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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목사는 레위 족속이 아니고 제사장도 아닙니다.
일차적으로 십일조는 율법시대에 주어진 것인데 지금은 율법이 완성된 복음의 시대요 은혜의 시대입니다.
그런데 왜 십일조만 시행하고 할례는 시행하지 않나요? 여성들은 예배 시간에 왜 머리에 두건을 쓰지 않나요?
2. 교회는 성전이 아니고 예배는 제사가 아니며 헌금은 제물이 아닙니다.
요즘도 번제와 소제와 화목제 등을 하고 있나요?
3. 아브라함이 드린 것은 자신이 거둔 땅의 소산인 농작물이나 소유한 가축에서 드린 것이 아니고 전리품입니다. 구약시대 성도들이 드린 것은 결코 전리품이 아닙니다. 십일조는 반드시 개인의 소유에서 나온 소득에 근거했습니다. 그리고 그가 멜기세덱에게 드린 것은 오직 유일회적인 일이요 정기적으로 행한 구약시대의 십일조와는 그 성격이 근본적으로 다릅니다.
4. 야곱의 서원은 십일조를 드리기 전에 한 것이고 반드시 ‘If~’로 시작됩니다. 그리고 지적하신 대로 그가 실지로 했다는 증거가 없습니다. 물론 그 시대에는 성전도 제사장도 율법도 생기기 전이고요.
5. 구약시대에 드린 십일조 품목에 ‘돈’은 절대로 없었습니다. 지금은 돈만 받지요?
6. 구약시대에도 십일조 의무를 면제 받은 직업들이 있습니다. 수확을 위한 바구니를 만든 상인들, 들판에서 일하는 종들이 신는 신발을 만든 사람들, 추수 수확을 위해 마차를 만든 목수들, 들판에서 일하는 종들이 물을 길어 나르도록 물통을 만든 도자기공들, 들판에서 일하는 이들을 위해 외투를 만든 여인들, 임금을 받고 들에서 일한 종들이 바로 그들입니다. 예수님은 목수였기(마 13:55, 막 6:3) 때문에 십일조 뿐 아니라 성전세도 내지 않으셨습니다(마 17:24-27).
7. 헌금은 반드시 자발적이어야 합니다(마 10:8하, 마 5:42, 롬 15:26-27, 눅 6:38 등). 즉 마음으로 드리는 것이어야 합니다.
8. 바울, 베드로, 야고보, 요한, 유다가 쓴 성경에 십일조에 대한 언급이 전무 합니다. 즉 초대교회는 이미 십일조를 하지 않았다는 증거이지요.
그러면 어떻게 해야 하는가요? 유럽 교회들을 주의 깊게 살펴보아야 합니다. 제가 다니는 영국 교회도 공식적으로 십일조는 언급조차 않고 있어요. 물론 아프리카나 스리랑카 인도 등에서 온 이들 중에 하는 분들이 있긴 하지만 그들도 사실은 위의 내용들을 잘 모르고 있지요. 유럽 성도들은 아무리 믿음이 좋아도 십일조를 중심으로 헌금 생활을 하지 않습니다.
교회 인건비, 유지비, 구제비 등 실질적인 재정관련 사항들은 ‘십일조’를 강조함으로 해결할 게 아니라 목회자들이 구체적인 재정 필요 사항들을 교인들에게 알려서 그들이 기쁜 마음으로 동참할 수 있게 해야 하는 데 한국 교회처럼 그렇게 강조하니, 심각한 부작용이 생기는 것이지요. 저희 교회는 십일조 강조 하나도 안하고 저도 지금 십일조 안 해도 할 일은 다하는 교회랍니다. 구제와 선교를 위해 적극적으로 헌금을 하기 때문에 담임목사님은 제 기억으로 지난 5년 동안 꼭 한 차례 그것도 스쳐 지나가는 말로 헌금에 대한 언급을 했습니다. оо님께서 참조하신 성경주석을 쓴 이는 위의 기본적인 사실을 모른 채 의례적인 논리를 따라 쓴 것 같습니다.
한국도 머지않아 십일조 문제를 극복해야 할 때가 올 것입니다. 언제까지나 지금처럼 하지는 않을 것이기 때문이지요. 영국 교회도 100여 년 전까지는 했으나 지금은 안하고 있습니다. 따라서 구태의연하게 대처할 것이 아니라 실질적으로 접근해야 합니다. 한국 교우들은 유럽 교회는 죽었다고 하는 데 그런 측면도 있으나 영국은 ‘병든 한국 교회’와는 전혀 다른 측면에서 살아있는 교회랍니다.
십일조는 무조건 소득의 십 분을 내는 것이 아니랍니다. 구약 시대에서는 반드시 소출과 가축에서 드렸고, 직업에 따라서 면제되는 것도 많았습니다. 어부와 목수가 그 대표적인 예지요. 그래서 예수님도 베드로도 십일조를 하신 적이 없으십니다. 십일조는 예루살렘 성전이 있고 제사장이 있으며 성전 제사가 있을 때 유효했던 제도로서 초대교회 때는 시행하지 않다가 중세에 들어 교회가 제도화 되면서 다시 시행된 제도입니다. 영국과 서구 교회는 더 이상 십일조에 대한 의무를 지지 않습니다. 이는 믿음의 부족 문제가 아니라 성서적인 근거 문제 때문입니다. 대신 그들은 십일조의 근본 취지인 극빈자, 장애인, 노인, 어린이, 여성 그리고 사회보장 및 복지에 대해 깊은 관심과 투자를 아끼지 않고 있습니다.
이제는 한국 교회와 성도들도 맹목적으로 십일조를 이야기 할 것이 아니라, 그 근본 취지와 뜻을 밝히 알아야 할 것입니다. 십일조 한다고 복이 굴러 온다거나 하지 않으면 저주 받는 다거나 하는 이야기는 감언이설에 불과 합니다. 저는 기득권의 욕심과 이익을 대변하는 왜곡된 성경해석이나 잘못된 설교를 지적하고 성경이 적시하고 있는 정확한 내용을 알려주는 것이야말로.. 진정한 의미의 참된 목회요, 진리말씀으로 영혼을 자유케하는 고귀한 사역이라고 생각합니다.
기독교가 사제중심의 브로커 종교체제나 사제만 행세하고 공공연히 착취하는 노예종교에서 벗어나 진리 안에서 자유롭고, 평등하며, 거룩하게 개혁되는 교회가 되길 바랍니다. 만약 십일조를 강조한다면 초대교회(초대교회는 십일조가 없었음)의 연보처럼 하나님이 원하시는 곳에 투명하고 공정하게 집행되도록 하는 장치가 필요합니다. 불완전한 사람이나.. 혹은 사제나 교주에게 무조건 ‘아멘’하는 것이나, 덮어놓고 맹종하는 일은 지극히 어리석은 일일 것입니다. 우리는 뱀같이 지혜로와야 합니다. 무엇이 자유케하는 성경적 참 진리인지 무엇이 율법과 제도와 사람에게 종노릇하게 하는 사람의 계명인지 분별할 줄 아는 지혜가 필요할 것입니다.
『………… 농경 목축 사회에서 토지 소산과 가축이 '모든' 소득이 아니고 무엇이냐고 따지는 사람들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그 당시 이미 화폐가 유통되고 있었고(참고 - 농경 목축 시대였던 아브라함 시대와 전통적인 십일조가 처음으로 시행되던 모세 여호수아 시대에도 화폐가 중요한 교환 수단으로 유통되고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하나님께서는 돈이 아닌 토지 소산과 가축의 십일조만을 오직 원하셨음, 창23:12-16, 신14:24-26) 다른 일거리나 매매 행위 등을 통해 여러 형태의 소득들이 있었음을 유의해야 한다. 왕정시대로 넘어갈수록 다른 종류의 소득들이 다양하게 나오고 있는 것을 보게 된다. 특히 성전세나 헌금, 다른 세금들은 돈으로 냈으나 십일조는 특별한 경우 이외에는 돈으로 내서는 안 되고 반드시 양식의 형태로 성전 곳간에 들여야 한다는 사실은, 십일조의 대상이 '모든' 소득이 아님을 분명히 밝혀주고 있다.
가나안 땅에서 토지 분배가 있은 연후의 토지 소산과 가축의 개념은 소득이나 부의 축적 수단이라기보다 양식의 차원에서 생각해야 할 것이다. 십일조는 레위인, 또는 가난한 자들과 양식을 나눠 먹는 구제의 정신 가운데서 행해졌다. 한 가족이 1년 동안 먹는 양식의 10분 1을 내어놓아 더불어 사는 공동체를 만들어 나갔던 것이다. 그러므로 십일조는 양식의 10분 1은 될지언정 '모든' 소득의 10분 1은 아닌 것이다. 적어도 말라기와 느헤미야 시대까지는 십일조가 토지 소산의 10분 1로 양식에 국한되었다는 것은 성경이 분명히 증거하고 있다. 그러다가 바리새인과 랍비들이 더 많은 성전 수입을 위해 제사장들과 함께 십일조의 대상을 확대시키기 시작했다. 일반적인 토지 소산 이외에 박하, 회향 같은 특수(양념) 작물들도 십일조의 대상이 되도록 하였다.
무엇보다 십일조가 변질되기 시작한 것은 화폐 소득을 십일조에 포함시키고부터였다. 화폐 소득을 포함시키자 자연히 십일조의 대상이 '모든' 소득으로 확장되었다. 화폐와 박하와 및 향료의 십일조는 탈무드의 랍비들이 주문하는 내용이었으나 이는 성경의 의도를 크게 벗어나는 것이었다. (《성서 대백과》 제4권, p.752, 기독지혜사)
중세 교회에서도 4세기 무렵 십일조를 채택하고 나서 근 1000년 가까이 지난 13세기 무렵에 이르러서야 비로소 십일조의 대상을 토지 소산에서 '모든' 소득으로 확대시켰다는 사실은 이미 살펴본 바와 같다. 거의 독점 체제에 가까웠던 중세 교회가 왜 십일조의 대상을 토지 소산에서 '모든' 소득으로 확장시키는 데 1000년이나 걸렸을까. 그것은 중세 교회에서도 전통적인 십일조의 대상은 '모든' 소득이 아님을 잘 알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이렇게 화폐 소득을 중심한 '모든' 소득이 십일조의 대상이 됨으로써 십일조가 변질되고, 그것이 전통적인 십일조 정신을 흐리게 하는 중요한 원인이 되었다. 십일조가 나눔의 양식이 아니라 제사장들과 대제사장들의 치부 수단으로 전락한 것이다. …………』 (십일조를 넘어서 中..)
°(롬 3:30-31)“때문에 한분 그 하나님이 이 의롭다고 간주하심이 할례 받아도 믿음으로 부터요 할례 받지 않아도 그 믿음에 의해서라. 따라서 그 믿음 때문에 율법을 무익케 함이니, 율법을 세우지도 않고 |(율법의 고안품을)| 만들지도 아니하노라.”
‘(율법의 고안품을)’은 문맥의 의미에 맞게 첨가 한 것입니다. 또한 오늘날의 율법적 흉내내기 장치(裝置)들론 ‘주일성수’, ‘십일조’, ‘성전건축(?)’..등등이 있을 겁니다.
하여, 주와 함께 걷는 신앙의 공동체 안에서 또한 그런 믿음 안에서, 오늘날의 의식률(儀式律 : 주일성수, 십일조..등등)을 잘 지켜야만 신실한 크리스찬 이라고 평(評)하는 자들의 변은(딤전 6:5), 말씀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한데서 온 무지의 소치(所致)에 불과합니다. 왜냐하면, 성전(성전되신 예수- 요 2:19-21, 행 6:14, 마 26:61, 막 14:58, 마 18:20) 안에서 안식일에도 제사장들은 하나님께 제사를 드렸고【마 12:5】, 주의 백성은 공동체 안에서(교회를 이룬 각 지체- 엡 2:19-22, 고전 12:27, 롬 12:4-5, 엡 1:22-23) 그들의 자손에게 할례를 베풀었으며【요 7:23】, 주와 함께한(성령이 내주하시는 성도의 몸- 고전 3:16, 고전 6:19, 고후 6:16, 히 3:6) 다윗은 그 종자들과 안식일에 성막(혹은 산당)의 진설병을 먹었습니다【삼상 21:1-6 / 레 24:8-9】.
따라서, 우리 유일하신 성전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이러한 조항들은 이미 채워진(πληροω 플레로오 | 가득하게 하다, 채우다, 풍성하게 하다, 완성하다, 끝까지 채우다, 완벽하게 하다, 실재가 되게 하다, 수행하다 / 마 5:17) 하찮은 보조수단에 불과합니다. 왜냐하면, 우리의 믿음은 참된 말씀을 따르고, 배워서 주께로 활발히 자라가는 것이지, 사람들의 손으로 지어낸 그런 고안품(εργον 엘곤 | 사업, 고용, 생산된 것, 손으로 만들어진 것, 예술, 제조업, 행동, 행위 / 딛 3:5)들로 자라나진 않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율법주의적 사고로 믿음의 크기를 잰다거나, 칭송한다거나, 자랑해 대는 것은 그들의 무지만을 더더욱 크게 알리는 허망한 노래일 뿐입니다.
“그러나 주 그리스도께서 오심으로써 이 계명의 의식적 부분이 폐지된 것은 의심할 여지가 없다. 그리스도 자신이 실상이시므로 그가 계시는 곳에서는 모든 상징이 사라지며, 그가 본체이시므로, 그가 나타나실 때에 그림자는 버려지기 때문이다. 즉, 그는 안식의 진정한 실현이시다. 우리가 세례를 받음으로써 그와 함께 묻혔으며, 그와 연합하여 그의 죽음에 참여한 목적은 그의 부활에 참여함으로써 새로운 생명으로 살려는 것이다(롬 6 : 4-5). 그렇기 때문에 사도는 다른 곳에서 안식일은(골 2 : 16) "장래 일의 그림자이나 몸은 그리스도의 것이니라"고한다(골 2 : 17). 바꿔 말하면, 그리스도는 실상의 바로 본체시며, 여기에 대해서 바울은 이 구절에서 잘 설명했다. 이 일은 어느 하루에만 국한되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자신에 대해서 완전히 죽고 하나님의 생명으로 충만할 때까지 우리의 일생을 통해서 있을 일이다. 따라서 그리스도인들은 날을 미신적으로 지키는 것을 철저히 피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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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리하여 거짓 선지자들의 너절한 이야기는 사라진다. 그들은 수 백년 전에 유대교적 견해를 사람들에게 감염시켰다. 이 계명의 의식적 부분만이(그들의 소위 제 칠일의 "정"만이) 지폐지된 것이고 도덕적 부분은-즉, 이레 가운데서 하루를 정하는 것은-남아 있다고 주장했다. 그러나 이것은 유대인들을 비난하는 의미로 날을 변경했을 뿐이고, 그 날을 거룩하다고 하는 생각은 여전하다. 유대인들이 생각한 것과 같이, 그날의 신비성에 중요성을 인정하기 때문이다. 또 그들은 이런 사상을 가르침으로써 이익을 얻는다. 자기들의 교회 규정을 고집하는 자들의 미신은 유대인 이상이요 세 갑절이나 더 유치하고 육적인 안식일 미신이다. 따라서 이사야가 당시의 사람들을 책망한 말은 현대의 그들에게도 그대로 해당된다(사 1 : 13-15, 58 : 13). 그러나 우리가 특히 견지해야 하는 일반적 교훈은 이것이다. 즉, 우리들 사이에서 경건이 소멸하거나 쇠퇴하는 것을 막기 위해서 우리는 성회에 부지런히 출석하며 하나님께 대한 경배를 도을 수 있는 외면적 보조수단들을 이용해야 한다는 것이다.”
《기독교 강요 Ⅱ, 8장 28 - 34》 中 에서..
【행 15:23-29】 “우상의 제물과 피와 목졸라 죽인 것과 음행에서 떠나 멀리하는 것”말고는 다른 짐【계 2:24】으로 성도를 괴롭히지 않으려했던 ‘사도와 장로의 규정(δογμα)’에 따르지 않고, 사도로 부터 보냄 받은 바(사도적 계승) 없이 지식의 열쇠【눅 11:52】만을 갖고서 예수 그리스도의 피 값으로 사신 성도에게 무거운 짐을 지워〈(마 11:28) φορτιζω 프홀티조 G5412, 짐을 얹다, 짐을 싣다, (관습과 부당한 교훈의)짐을 지우다〉, 그리스도의 몸된 교회 위에 군림하려는 자의 계략을 간파하여 속지맙시다. 주의 이름으로 구제(救濟)하기 보단, 자기의 이름을 높이기 위해 사치하고 치장하길 더 좋아하고 잔치의 상석과 회당의 상좌을 탐하며 과부의 가산을 삼키는 데에【마 23:1-7, 막 12:38-40, 눅 20:45-47】 여념 없는 자들이 지운 짐을 이제는 벗어 던져버립시다.
과부의 두 렙돈 기사는 헌금강조용인가
'각주(脚註) 없이 성경 읽기' (눅 21: 1- 4)………………………………………………………… (글 : 오세용 2007. 09. 26)
누가복음 21장 1- 4절의 말씀을 묵상하면서 가장 먼저 떠오른 생각은 과연 이 본문이 헌금에 관한 것일까, 헌금을 강조하는 것인가 하는 것입니다. 그것은 제가 신앙생활을 시작한 이래 들어온 설교들이 모두 그랬기에 그렇습니다. 많은 분들이 이 본문을 들어 말씀하시기를 이 과부처럼 정성껏 혹은 가진 것 전부를 헌금해야 한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어떤 분은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오늘 본문을 보니 예수님께서 가난한 과부의 연보궤에 연보 넣는 것을 보시고 다른 사람들이 많이 넣는 것 보다 더 많이 넣었다고 크게 그리고 공개적으로 칭찬했다. 사람의 중심을 보시는 주님께서 공개적으로 칭찬하신 일이 이것이니 우리가 헌금에 대하여 공개적으로 칭찬해도 되지 않는가?”
또 어떤 분은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가진 소유의 비율을 볼 때 과부가 바친 헌금은 전부입니다. 다른 부자들은 많이 바쳤습니다. 과부가 바친 돈에 비하면 엄청난 액수의 거액입니다. 그런데 부자들의 바친 많은 금액은 한마디도 칭찬하지 않고, 이 과부가 바친 적은 것은 왜 칭찬하셨을까요? 우리 인간들은 단순히 액수의 많고 적음만 보기가 쉽습니다. 그러나 주님은 비율적으로 헌금액수로 보신 것입니다.”
그런 해석이 내리는 결론은 다음과 같이 명쾌합니다.
“결론적으로, 예수께서 하신 이 헌금 평가의 말씀을 성경에 기록하게 하신 하나님의 목적이 무엇인가?
이 말씀은 또한 오늘 우리의 헌금 생활을 반성하라는 뜻이 있지 않겠는가? 저 가난한 과부를 본받자. 하나님을 우리 영혼의 구주로 참으로 믿고 그를 사랑한다면, 우리는 우리의 가장 좋은 것을 그에게, 그를 위해 드릴 수 있을 것이다. 우리도 하나님의 은혜로 저 가난한 과부처럼 정성의 헌금을 하나님께 드리는 자들이 되자.”
이 본문이 과연 그러한 말씀인가 생각해보려고, 몇가지를 관찰하여 보았습니다. 본문 3절에는 이렇게 되어 있습니다.
“그래서 예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셨다”
예수님께서 성전에서 두렙돈 헌금하는 과부를 본 후에 그 일에 대하여 말씀하셨는데, 그 말씀하신 대상이 누구인지를 정확하게 기록하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같은 내용의 본문이 마가복음(막 12: 41-44)에도 기록이 되어있는데 거기에는 이렇게 되어 있습니다. 예수님이 누구에게 말씀하셨는가 하면 “예수께서 제자들을 곁에 불러 놓고서” (막 12 :43) 말씀하셨습니다.
제자들에게만 말씀하셨다는 것은, 무슨 의미일까요? ‘자, 얘들아 내가 오늘은 너희들에게 헌금을 어떻게 해야 하는지 알려주마…. 내가 오늘 성전에 갔더니…’ 하면서 제자들에게 헌금은 이렇게 하라고 가르치셨을까요? 우리가 아는 것처럼, 제자들은 모든 것을 버리고 온 사람들입니다. 정말 그들은 금과 은도 없거니와 두벌 옷도 가지지 못한 사람들입니다. 헌금을 할래야 헌금을 할 돈이 없는 사람들입니다. 그런 제자들에게 헌금을 어떻게 하라고 말씀하신다는 것은 말도 안 되는 이야기입니다. 또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가르치시기를, 앞으로 너희들이 성도들을 관리할 때에 그들에게 이렇게 헌금을 하도록 가르치라고 하실리도 없습니다.
또 이런 생각을 해 보았습니다. 예수님이 이 말씀을 하실 당시로 돌아가 봅시다. 듣는 사람이 제자들이건, 아니면 다른 사람이든 유대 사람에게 예수님께서 이 말씀을 하십니다.
"내가 진정으로 너희에게 말한다. 이 가난한 과부가 누구보다도 더 많이 넣었다. 저 사람들은 다 넉넉한 가운데서 자기들의 헌금을 넣었지만, 이 여자는 구차한 가운데서 가지고 있는 생활비 전부를 털어 넣었다."
그런 말을 들었다면, 예수님 앞에서 그 말씀을 듣고 있는 유대 사람들은 어떤 생각을 먼저 했을까요? ‘아하, 저 여자가 생활비 전부를 헌금했으니 나도 헌금을 그렇게 해야겠다’ 라는 생각이 떠오를까요? 아니면 ‘아니, 그렇게 생활비 전부를 헌금해버리면 그 여자는 무얼 먹고 산다는 말인가?’ 라는 생각이 떠오를까요? 아마 유대사람이라면 당연히 첫 번째 생각은 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하나님 말씀을 잘 알고 있는 그 당시 사람들에게 고아와 과부는 특별 보호대상입니다. 하나님께서 특별히 과부를 돌보라고 말씀하신 것을 잘 알고 있는 유대인들이 그 과부가 가진 생활비 전부를 헌금했다는 이야기를 들었을 때에 ‘잘했다, 나도 그 여자를 본받아 헌금을 그렇게 해야겠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그 당시 아무도 없었을 것입니다.
열이면 열, 백이면 백 모두가 ‘도대체, 그렇게 헌금을 해버리면 그 여자는 무엇을 먹고 산단 말입니까? 그 여자가 누구입니까? 우리가 어떻게 도와 주어야 하지 않겠습니까?’라고 생각했을 것입니다. 또 이런 생각도 했을 것입니다. ‘도대체 서기관들은 무엇 하는 사람입니까? 어떻게 가르쳤길래, 그 여자가 자기 생활비 전부를 헌금을 한단 말입니까? 서기관들과 부자들은 과부가 그렇게 헌금을 하는 것을 보고도 가만 있었습니까?
따라서 본문의 말씀을 예수님께서 헌금을 중요시 여겨 사람들에게 헌금을 가르친 말씀이라고 가르친 것이라 한다면, 예수님을 이상한 분으로 만드는 결과가 되어버립니다. 이 본문은 결코 헌금에 대해서 말씀하시는 것이 아닙니다. 이 말씀을 그런 용도로 사용한다면, 한마디로 예수님을 욕보이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오늘 본문은 무엇을 말하고 있는 것일까요? 말씀을 제대로 해석하기 위해서는 문맥을 잘 살펴보아야 합니다. 그럼 오늘 본문의 앞뒤 문맥을 한번 살펴봅시다. 누가복음 21장은 20장에 이어서 나오고 있으니 20장 마지막 구절에서 어떤 이야기가 나오고 있는지 살펴보아야 합니다. 20장 45절-47절입니다. 47절, 그들(서기관)은 과부의 가산을 삼키고…
원래 성경이 쓰여질 때에는 장, 절의 구분이 없었습니다, 그러다가 나중에 장을 나누고 절로 구분하여, 성경을 찾고 읽는데 편리하도록 만든 것입니다. 따라서 다른 장에 기록되어 있다 하더라도 이 경우 본문의 말씀은 바로 앞에 나오는 말씀과 연결이 되어야 합니다. 참고로, 같은 내용을 기록한 마가복음에서는 과부의 두 렙돈 기사가 12:41-44에 나오고, 그 다음 장인 13장 1- 3절까지는 성전이 무너진다는 기사가 나오고 있습니다. 누가복음 20장 45절부터 예수님은 다가올 심판, 예루살렘의 멸망, 말세의 징조 등에 대하여 말씀하시는데 맨 먼저 46절에서 율법학자들인 서기관들을 책망하십니다. 그리고 본문말씀의 바로 뒤(눅 21:5—6)에서는 예루살렘 성전이 무너질 것이라는 충격적인 말씀을 하십니다.
그래서 이 세 개의 구절은 다음과 같은 식으로 서로 연결이 되고 있습니다.
20장 45- 47 서기관 …과부
21장 1- 4절 과부 …두 렙돈 헌금
21장 5절 성전 ..미석과 헌물
21잘 6절 성전 ….무너짐
그러니 이렇게 말을 이어가며 뜻을 해석해야 합니다.
20장 47절 율법학자들은 과부들의 가산을 삼키고…
21장 4절 (가산을 뺏긴) 과부들은 구차한 가운데서 가지고 있는 생활비 전부를 털어 헌금을 하고….. ..
21장 5절 (그러한 과부들은 돌보지 않고) 성전은 과부가 헌금한 헌물로 호사스럽게 꾸며지고 ….
21장 6절 그러한 성전이 다 무너질 날이 올 것이다.
이렇게 연결이 되어, 과부들의 가산을 삼킨 율법학자들에게 경고하심으로 시작하여 성전이 무너질 것이다, 라는 무서운 경고의 말씀을 하시는 중인데 중간에 본문을 뚝 떼어내어 헌금을 잘 하라는 것이다, 라고 해석한다면 이 얼마나 엉뚱한 해석입니까?
그러니 오늘 본문 과부의 두 렙돈 헌금 이야기는 우리들에게 헌금을 어떻게 하라고 가르치려고 한 것이 아니라 그렇게 과부 즉 사회적 약자를 돌보지 않고, 또한 교회가 정작 해야 할 일은 제쳐두고 성전을 아름답게 치장하는 등 하지 말아야 할 일에 골몰하여 정신차리지 못하고 있는 교회를 향하여 경고하는 메시지인 것입니다. 지금 우리 한국 교회의 현실을 돌아보면, 교회가 교회로서의 역할을 제대로 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이러한 때, 특별히 본문 말씀이 교회 개혁을 위하여 시사하는 바가 크다고 생각되는데, 이러한 교훈을 찾기는커녕 이 본문을 거두절미하고 뚝 떼어 내어 성도들에게 헌금을 강조하는 말씀으로 오용하고 있으니, 정말로 한국교회가 얼마나 매(?)를 벌고 있는지 모르겠습니다.
제사장들을 향한 말라기 선지자의 책망
말라기 3:8-10 은 술사(術士)의 주문이 될 수 있는가?
앞에서 함께 읽고 생각을 나누었던 것을 다시 한번 살펴보기로 하겠습니다. 부산의 C목사님은 누구나 흔히 그러는 것처럼 말라기서를 가지고 십일조에 대한 설교를 하셨는데 과연 말라기 선지자가 그런 뜻에서 말했을까요? 여기에서 그의 진정한 속 뜻을 알아보는 것은 중요한 것입니다. 말라기 선지자의 말 한마디로 인하여 한국의 목회자들이 서로 엇갈린 주장을 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말라기 3:7-12절을 우선 읽어 봅시다.
“만군의 여호와가 이르노라 너희 열조의 날로부터 너희가 나의 규례를 떠나 지키지 아니하였도다 그런즉 내게로 돌아오라 그리하면 나도 너희에게로 돌아가리라 하였더니 너희가 이르기를 우리가 어떻게 하여야 돌아가리이까 하도다 사람이 어찌 하나님의 것을 도적질하겠느냐 그러나 너희는 나의 것을 도적질하고도 말하기를 우리가 어떻게 주의 것을 도적질하였나이까 하도다 이는 곧 십일조와 헌물이라 너희 곧 온 나라가 나의 것을 도적질하였으므로 너희가 저주를 받았느니라 만군의 여호와가 이르노라 너희의 온전한 십일조를 창고에 들여 나의 집에 양식이 있게 하고 그것으로 나를 시험하여 내가 하늘 문을 열고 너희에게 복을 쌓을 곳이 없도록 붓지 아니하나 보라 만군의 여호와가 이르노라 내가 너희를 위하여 황충을 금하여 너희 토지 소산을 멸하지 않게 하며 너희 밭에 포도나무의 과실로 기한 전에 떨어지지 않게 하리니 너희 땅이 아름다워지므로 열방이 너희를 복되다 하리라 만군의 여호와의 말이니라”
우리는 항상 성경을 읽을 때 읽고 있는 성경의 전체적인 내용과 문맥을 조심스럽게 먼저 살펴보고 읽는 습성을 길러야 합니다. 전체의 내용과 문맥을 무시하고 어느 한 구절을 인용하여 목소리를 높인다는 것은 엉뚱한 결론에 도달하게 됩니다. 위 본문을 이해하기 위해서 우리는 먼저 말라기 전체의 흐름을 파악해야 합니다.
말라기서가 기록된 시기는 스룹바벨 성전과 제사장들의 부패가 언급된 것으로 보아 성전재건 이후에 기록되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주전 539 년경 바벨론을 멸망시킨 페르시아 제국은 알렉산더 대왕에 의해 멸망될 때까지 고대 근동지역을 지배했던 나라였습니다. 포로지에서 귀환한 유대인들은 선지자 학개와 스가랴의 설교를 듣고 감동을 받아 성전을 재건하기도 결심했습니다. 그러나 성전을 재건하고 수 십년이 지나도 유대인들에게는 하나님의 큰 영광이 나타나질 않았습니다. 거기에다 흉년과 기근이 들어 고통의 나날이 연속되었습니다. 드디어 그들은 하나님의 사랑을 의심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리고 하나님 앞에서 악을 행하는 자들의 형통을 부러워 하였으며, 하나님의 명령을 준행하는 것은 헛된 일이라고 주장했습니다.
이런 상황 속에서 말라기 선지자는 그들의 의심과 불순종은 하나님의 사랑과 약속을 잘 모르는데서 오는 것이라고 말했습니다. 즉, 그들이 신실했는데도 불구하고 재앙이 임한 것이 아니라 그들의 죄악으로 인해 고통을 겪는다는 것이었습니다. 제사장들은 부패한 제사를 드리고 있었으며, 형식적으로 제사행위를 했던 것입니다. 하나님 앞에 드려야 하는 것은 흠 없는 것이어야 했는데도 제사장들은 좋은 것은 자기들이 차지하고 흠있는 것을 골라서 희생제사를 지냈을 뿐만 아니라 백성들에게 그렇게 해도 괜챦다고 가르쳤습니다. 말라기 선지자는 그들로 하여금 하나님 앞으로 돌아오기를 촉구했으며, 율법을 온전히 준행하면 율법에 명한 복을 받을 수 있을 것이라고 말했습니다.
다시 말하자면 말라기서는 주전 약 430 년경 부패한 제사를 드리고 있던 제사장들에 대한 책망을 담고 있는 것입니다. 1장 6절을 보세요. "내 이름을 멸시하는 제사장들아'라는 말로 시작됩니다. 2장1절에도 "너희 제사장들아"라는 말씀이 있습니다. 그러나 2장10절에 가면 "우리는"이란 말이 나옴으로써 유대 백성들을 향한 책망이라고 보는 자도 있습니다. 그러나 3장 8절로 가면 헌물을 도적질했다는 말이 나오는데 헌물은 이미 백성들이 성전에 바친 것이라는 것을 감안한다면 이것은 제사장들을 향한 책망이라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헌물(תּרמה ㆍ תּרוּמה 테루마 | 기부금, 조세, 제물, 거제)이란 유대인들의 3대 절기에 바치던 것입니다. 헌물은 원래 하나님의 것으로 구별되 있는 것이 아니었기에 헌물을 잘못 냈다고 해서 하나님의 것을 도적질했다고 볼 수는 없습니다. 따라서 이것은 백성들이 바쳐 하나님의 것이 된 것을 제사장들이 도적질했다고 보아야 맞습니다. 그러한 도적질에 대한 구체적인 행위가 1장에 나타나 있음이 그 증거입니다.
“너희가 더러운 떡을 나의 단에 드리고도 말하기를...너를 가납하겠느냐”(말라기 1:7-8)
“만군의 여호와가 이르노라...........만군의 여호와의 말이니라”(말1:13-14)
위에 나오는 더러운 떡이나 눈먼 희생, 저는 것과 병든 것, 토색한 물건.. 등등은 백성들이 제사를 드리기 위하여 가지고 온 것들임이 분명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이러한 것들은 제사에 쓰일 수 없다고 말씀하셨습니다(신15:21). 그러나 제사장의 입에는 율법이 있어 그러한 행위를 막는 것이 당연했지만 제사장들은 부패하여 대강 제사를 드리고 자기에게 돌아올 양식이나 돈만을 챙겼던 것입니다. 말라기 본문에 나타나는 '희생을 드린다'는 말은 백성들과는 상관이 없는 제사장들과 관련된 것임을 알아야 합니다. 이것이 바로 하나님의 것을 도적질한 제사장들의 부패상입니다. 하나님의 것에 대한 도적질의 결정적인 역할을 했던 것을 백성들이 아니라 제사장들이었다는 것입니다.
말라기3장8절에 나오는 '너희'라는 주체가 누구입니까? 그들은 일반 백성들이 아닙니다. 그들이 누구였는지를 알면 본문의 의미가 뚜럿하게 나타납니다. 말라기 3잘8절에서 '우리가 어떻게 주의 것을 도적질하였나이까?'라는 반문을 할 수 있는 자들은 결코 백성이 될 수 없습니다. 그것은 말라기 1:10과 2:3을 보면 더욱 선명해집니다. 히브리어 원문을 보면 우리말 성경에 나타나는 '하나님의 것' 또는 '나의 것' 또는 '주의 것'이란 단어들이 나오지 않습니다. 그러나 그렇게 번역을 해놓는 바람에 십일조에 대한 오해가 가중되었다고 볼 수 있습니다. 또한 도적질에 해당하는 히브리어 '카바(קבע 카바 | 강탈하다, (덮어)속여 빼앗다)'라는 단어는 영어의 Cover와 같이 '덮다' 또는 '속이다' 또는 '속여 빼앗다'라는 의미로써 백성들이 가져온 희생제물을 제사장들이 속였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사실 십일조에 대한 도적질은 굳이 말라기 시대에만 있었던 것은 아니었습니다. 말라기와 같은 시대에 살았던 느헤미야도 여기에 대한 말을 하고 있습니다. 느헤미야13:4-14까지 읽어 보시기 바랍니다. 거기를 보면 백성들이 레위인들에게 주라고 바친 십일조를 제사장들이 중간에서 빼돌리고 성전 창고를 다른 곳에 사용한 예가 나오고 있습니다. 자연히 성전의 일을 돌보던 레위인들은 자기들에게 돌아오는 십일조를 중간에서 도적질하는 자들 때문에 받지 못해서 성전에 남지 못하고 고향으로 돌아가버렸으므로 성전은 피폐되었기 때문에 말라기 선지자가 이때 나타났던 것입니다.
느헤미야 총독은 급기야 십일조를 조직적으로 거두기 위하여 전국적인 감독체제를 갖추고 철저하게 십일조를 거두기 시작했습니다. 이것이 느헤미야 10:38과 12:44에 나옵니다. 느헤미야는 감독들을 시켜 타작마다에 직접 가서 십일조를 거두게 했습니다. 백성들은 기꺼이 기쁜 마음으로 십일조를 바쳤습니다(느12:47).
그러나 느헤미야가 예루살렘에 없는 동안에 모든 것이 변하고 말았습니다. 예루살렘으로 다시 돌아온 느헤미야는 이 사실을 알고 도비야의 세간들을 모두 끄집어내서 밖에 내던지고 원래 있어야 할 것들을 있게 하여 성전을 회복했던 것입니다(느13;12). 느헤미야는 십일조를 중간에서 빼돌리는 제사장들을 모두 갈아 치우고 사람을 세워 십일조를 관리하도록 했습니다(느13:13).
이렇게 말라기서는 십일조를 빼돌린 제사장들에 대한 하나님의 책망의 말씀입니다. 이런 책망의 말씀을 가지고 부요의 원칙이니 뭐니 하면서 하나님의 심정을 곡해하는 행위를 뭐라고 설명해야 좋을지 그저 난감할 따름입니다.
강도의 소굴이 되어버린 성전
한국교회가 설교 홍수 속에 있지만 말씀은 기근 ……………………………………………………… (글 : 정 병 선 2007. 11. 09)
본문: 마가복음 11장 12~25절
드디어 예루살렘에 도착하신 예수님은 제일 먼저 성전에 들어가셨다. 이스라엘의 정치와 종교의 중심지인 성전에 들어가셔서 구석구석을 둘러보셨다. 어떤 제자는 성전의 외형을 보고 그 규모와 위용에 놀란 나머지 ‘얼마나 굉장한 돌이며 건물이냐’고 감탄을 하였는데(막 13:1), 예수님은 성전의 외형을 보지 않고 내부와 구석을 살폈다. 겉을 보지 않고 속을 보았다. 그리고 날이 저물어 더 이상 성전에 있을 수 없게 되자 제자들과 함께 베다니로 내려가 밤을 보냈다.
이튿날 다시 예루살렘에 가려고 베다니를 떠나는 길에 배가 고파 먹을 것을 찾던 예수님은 잎이 무성한 무화과나무가 멀리 있는 것을 보시고, 혹시 열매가 있을까 하여 가까이 갔다. 가보니 잎사귀만 무성할 뿐 열매가 없었다. 아직은 열매 맺을 철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예수님은 열매 없는 나무를 향해 “이제부터 영원히 네게서 열매를 따먹을 사람이 없을 것이다”(막 11:14)며 저주를 퍼부었다.
참 이해하기 어려운 행동이다. 아직 무화과 철이 아니라는 거야 예수님도 아실 터. 그런데 어찌하자고 저주를 퍼붓는 것인지 이해가 안 된다. 그렇다. ‘철’을 ‘계절’로 이해하면 혼란이 생긴다. 하지만 여기서 사용된 ‘철’은 무화과 철을 가리키는 계절상의 용어가 아니라 하나님나라의 때를 나타내는 종교적인 용어, 마가가 ‘때가 찼고 하나님나라가 가까웠다’(막 1:14~15)고 말할 때 사용했던 바로 그 용어(kairos)라는 사실을 알면 더 이상 헷갈리지 않는다.
마가는 본문을 구성할 때 치밀하게도 ‘하나님의 때’를 의미하는 종교적 용어를 무화과나무 이야기에 도입함으로써 무화과나무 이야기에 종교적 차원을 부여하고 있다. 그렇게 함으로써 곧바로 이어지는 성전 이야기와의 연결 고리를 맺어준다. 다시 말하면, 본문은 무화과나무 이야기를 통해 성전 이야기를 읽어야 성전 이야기가 제대로 읽히고, 또 무화과나무 이야기도 성전 이야기를 통해 읽어야 제대로 읽히도록 구성되어 있다고 할 수 있다.
강도의 굴혈이 된 성전
이튿날 예루살렘으로 올라가신 예수님은 다시 성전에 들어가셨다. 성전에 들어가자 성전 안에는 사람들이 붐볐다. 성전 뜰에는 희생 제사로 드릴 소·양·비둘기 등을 판매하는 자들과 각지에서 온 순례자들에게 성전세로 사용되는 세겔을 교환해주는 환전상들로 북새통을 이루고 있었다. 그야말로 종교적인 상거래가 활발하게 이루어지고 있었다. 그뿐만 아니라 희생 제사에 쓰는 기구를 가지고 아무나 성전 안으로 지나다니는 등 성전은 말할 수 없이 무질서했다. 예수님은 그런 성전의 모습을 보시고 끓어오르는 분노를 참을 수 없어 환전상들의 상과 비둘기를 파는 자들의 의자를 둘러엎었다. 성전이 상업적으로 운용되고, 종교적으로 기능화 되어버린 것을 더 이상 두고 볼 수 없었던 예수님은 가차 없이 상업상의 거래를 중단시키고 장사꾼들을 성전에서 내쫓았다. 그리고 성전을 가로질러 종교의식에 필요한 물건 운반하는 것을 금지시킴으로써 성전의 종교의식도 중지시켰다.
그리고는 여느 때와 똑같이 가르치기 시작했다. 하나님나라의 비밀이 어떠한 것인지를 가르치는 가운데 “내 집은 만민이 기도하는 집이라 불릴 것이다. 그러나 너희는 내 집을 강도의 소굴로 만들어버렸다”(막 11:17)며 정곡을 찌르는 말씀도 서슴지 않았다. 아! 강도의 소굴이라! 예수님이 어떻게 하나님의 성전을 가리켜 ‘강도의 소굴’이라고 할 수 있는지 의아스럽기도 하고 충격적이기도 하다. 요즘 네티즌들이 ‘기독교’를 ‘개독교’라고 부르는 것보다 더 노골적이고 신성모독적인 언사가 아닐 수 없다. 이 행동이 예수님의 행동이기 때문에 별 문제 없이 받아들이는데 익숙해 있지만, 세속화되었다고 하는 현대 교회에서조차도 누군가가 교회를 향해 ‘강도의 소굴’이라고 한다면 분명히 교회로부터 돌팔매질을 당할 것이다. 그런데 예수님이 돌팔매질을 당할 언사를 내뱉었다. 왜 그러셨을까? 예수님은 여간해서 중심을 잃지 않으시는 분이신데 왜 이처럼 중심을 잃은 듯한 언행을 하셨을까?
그 당시 유대 종교의 실상이 그러했기 때문이다. 그 당시 성전은 특정한 사람들의 이익을 위해 이용되고 있었다. 제사장들과 율법학자들, 그리고 환전상들은 성전을 중심으로 자기들만의 상호 이익을 보장하는 일종의 카르텔을 형성하고 있었고, 모든 이익은 그들의 몫으로 돌아가게 되어 있었다. 본래 성전은 만민이 하나님께 나아와 기도하는 곳으로 만민에게 개방되어야 한다. 만민이 하나님께 나아와 하나님께 기도하는 소통의 중심지가 되어야 한다. 이것이 이사야 선지자가 바라본 성전의 비전이었다. 그런데 이 위대한 성전의 비전을 저들이 가로막고 있었다.
물론 유대 종교의 외피를 보면 결코 피폐하지 않았다. 예수님이 성전을 떠날 때 제자들 가운데 한 사람이 성전을 보고 “선생님, 보십시오! 얼마나 굉장한 돌입니까! 얼마나 굉장한 건물들입니까!”(막 13:1)라며 감탄할 정도로 위용이 대단했다. 또 성전 마당이 시장을 방불케 할 정도로 종교적인 활동도 활발했다. 적어도 겉으로 보기에는 수많은 사람들이 성전세를 바치고, 희생 제사를 드리며, 말씀과 전통을 따르고 있었다. 결코 말라비틀어진 죽은 종교가 아니었다. 하지만 속을 들여다보면 성전이 아니라 강도의 소굴이었다. 예레미야 선지자가 오래 전에 말한 것 그대로였다.
“너희는 이처럼 내가 미워하는 일만 저지르고서도 내 이름으로 불리는 이 성전으로 들어와서, 내 앞에 서서 ‘우리는 안전하다’라고 말한다. 너희는 그런 역겨운 모든 일들을 또 되풀이하고 싶어서 그렇게 말한다. 그래, 내 이름으로 불리는 이 성전이 너희의 눈에는 도둑들이 숨는 곳으로 보이느냐? 여기에서 벌어진 온갖 악을 나도 똑똑히 보았다.”(렘 7:10~11).
그랬다. 예레미야가 지적한 대로 성전은 도둑들이 자기들의 정체를 숨기는 곳이 되어버렸다. 온갖 죄악을 범하고, 탐욕에 이끌려 과부의 가산을 강탈하고도 성전에 들어가기만 하면 숨길 수 있었고 포장할 수 있었다. 성전은 온갖 죄악을 저지를 수 있는 방패막이였다. 당시의 유대 종교는 잎은 무성한데 열매는 없는 무화과나무, 바로 그것이었다.
이익에 눈먼 종교지도자들과 진리 들을 줄 아는 백성
예수님이 하나님나라의 진리를 가감 없이 말씀하고, 성전 중심의 종교가 얼마나 타락했는지를 말하며 비참하게 종말을 고하게 될 것을 예고하자 대제사장들과 율법학자들은 예수님을 없애버릴 방도를 찾기 시작했다. 예수님이 주변부를 건드릴 때는 적의를 표출하지 않았지만 저들의 체제와 이익의 중심부를 뒤흔들고 위협한다고 생각될 때는 여지없이 사나운 발톱을 드러내며 죽일 방도를 찾는 것이 저들이었다.
저들의 관심사는 처음부터 백성들을 진리로 자유케 하거나 하나님나라의 비전을 향하는 것이 아니었으니까. 저들의 관심사는 언제나 자기들의 이익이었다. 저들이 좇는 것은 진리가 아니라 이익이었다. 그런데 진리는 언제나 현실적 이익에 반한다. 진리가 이익을 동반하는 일은 매우 드물다. 때문에 이익을 도모하기 위해서는 진리를 가려야 했다. 진리를 가리지 않으면 이익을 도모할 수 없기 때문에 이익을 쫓는 자는 진리를 쫓을 수 없을 뿐 아니라 진리를 가로막고 억압하지 않을 수 없게 되어 있다.
반면에 백성들은 예수님의 가르침에 놀랐다. 갈릴리와 이방에 살던 주변인들이 예수님의 가르침을 듣고 놀랐던 것처럼 예루살렘의 군중들도 예수님의 가르침을 듣고 귀가 번쩍 뜨였다. 그렇다. 백성들은 우둔한 것 같지만 진리를 들으면 깨우친다. 백성들이 진리를 깨우치지 못하는 것은 듣지 못해서다. 이익에 집착한 종교지도자들이 포장된 진리, 왜곡된 진리, 자기들 이익에 부합되는 거짓 진리만을 말하기 때문에 진리를 듣지 못해서 깨우치지 못하는 것이지 진리를 정직하게 들려주면 백성의 귀는 열린다.
그러기 때문에 이익에 눈먼 지도자들은 백성들의 귀가 열리는 것을 가장 두려워한다. 백성들의 귀가 열리면 자기들의 거짓이 통하지 않을 테니까 말이다. 하여, 저들은 할 수만 있으면 수단방법을 가리지 않고 백성들의 귀를 열어주는 자를 제거하려 한다. 참 진리를 듣지 못하게 가로막는다. 제도와 권력으로. 구약의 이스라엘 백성들이 선지자들에게 그랬고, 대제사장들과 율법학자들이 예수님에게 그랬으며, 오늘의 교회도 할 수만 있으면 성도들의 귀를 막으려 한다. 진리를 가르치는 자들의 입을 막으려 한다. 그것도 언제나 하나님의 이름으로. 또한 진리의 이름으로.
만민이 기도하는 집
바로 이것이 교회의 역사요, 종교의 역사다. 하나님의 말씀을 듣지 못하게 귀를 틀어막고 입을 틀어막는 것이 성경이 증언하는 이스라엘 종교의 역사요, 교회의 역사였다. 하지만 감사한 것은 사람들이 하나님의 말씀을 듣지 못하게 막으려 함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은 사람에게 말씀을 들려주신다는 사실이다. 그러기 때문에 교회는 절망 가운데서도 희망이 있다. 하나님의 말씀은 막는다고 막아지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하나님은 반드시 당신의 말씀을 가르치는 자와 듣는 자가 있게 하시기 때문에 교회는 희망이 있다. ‘내 집은 만민이 기도하는 집’이라는 말씀에서도 확인할 수 있다시피 하나님나라는 만민에게 개방되어 있다. 듣고자 하는 자는 누구나 들을 수 있도록 은혜의 문이 활짝 열려 있다. 말씀을 듣지 못하도록 방해하는 자들에게 걸려 넘어지지만 않는다면 누구나 하나님께 나와 듣고 말할 수 있다. 그리고 구원을 얻을 수 있다.
하나님의 집은 만민이 기도하는 집이다. 그렇다면 기도가 무엇인가? 한마디로 말하면 기도는 소통이다. 기도는 소통의 종교적 표현이다. 하나님과 소통하는 것이야말로 신앙의 전부이며, 알파요, 오메가다. 더 이상 무언가를 덧붙일 필요가 없다. 하나님과 소통하는 것이면 충분하다. 예수님이 이 땅에 오신 것도, 십자가에 죽으신 것도, 부활하신 것도, 우리가 하나님과 소통하게 하기 위함이다. 사람을 만드실 때 당신의 형상을 따라 만드신 것도 피차 소통하기 위해서다. 하나님나라도 하나님과 만물이 소통하는 나라일 뿐 다른 무엇도 아니다. 때문에 ‘만민이 기도하는 집’이라는 말씀은, ‘만민이 하나님과 소통하는 집’이라는 말로 읽을 수 있다.
하지만 이 소통은 조직이나 제도로 되지 않는다. 훈련으로 되는 것도 아니다. 성경 공부로 되는 것도 아니다. 이런 것들이 소통을 돕는 하나의 방편일 수는 있지만, 그런 것들로 소통이 열리는 것은 아니다. 소통의 길은 오직 하늘로부터 시작된다. 소통은 은혜요, 선물로만 존재한다. 그러기 때문에 소통인 기도는 자랑할 수 있는 것도 아니고, 종교적인 업적이 될 수도 없으며, 축복을 받는 도구로 동원될 수도 없다. 기도는 하나님과의 소통을 위해 주어진 은혜의 선물일 뿐이다. 기도-소통은 진실로 신앙의 본질이요, 하나님의 집인 교회의 본질이다.
말라 죽은 무화과나무
예수님의 무화과나무 이야기는 비유이지만 단순히 비유만은 아니다. 비유이면서 동시에 사실이요, 사실이면서 동시에 예언이다. 실제로 놀라운 일이 벌어졌다. 예수님이 무화과나무를 저주하신 다음날 아침에 보니 저주를 받은 무화과나무가 정말 뿌리 채 말라 죽어 있었다. 베드로는 전날 일이 생각나 예수님께 말했다. “선생님, 저것 좀 보십시오. 선생님이 저주하신 저 무화과나무가 말라버렸습니다.”(막 11:21) 이 말을 할 때 베드로의 가슴이 어땠을까? 아마 놀라는 정도를 넘어 온몸에 전율이 흐르는 두려움 같은 걸 느꼈을 것이다. 예수님의 말씀의 권위와 능력이 어떠함을 보고 놀라기도 했겠지만, 말라 죽은 무화과나무가 뭔가를 암시하는 것 같다는 직감 때문에 더 놀라고 두려웠을 것이다.
그렇다. 무화과나무가 말라 죽은 것은 이스라엘의 미래, 성전 신앙의 미래를 보여주는 예언이었다. 무화과나무가 죽은 것처럼 이스라엘의 미래, 성전 신앙의 미래 또한 그러할 것임을 암시하는 예언이었다. 사람들은 예수님을 환호하며 “복되다! 다가오는 우리 조상 다윗의 나라여! 더없이 높은 곳에서 호산나”(막 11:11)라고 외쳤지만, 실제로 다가오고 있는 것은 다윗의 나라가 아니라 말라 죽은 무화과나무와 같은 운명이 될 것임을 예언적으로 보여주었다.
기도하는 집의 위력
성전을 중심으로 한 세력과 성전 신앙의 운명이 말라 죽은 무화과나무처럼 될 것임에 반해 만민이 기도하는 집은 진정한 능력을 행사하는 참 자유의 집이 될 것임을 말씀하신다. 베드로가 말라 죽어버린 무화과나무를 보고 “선생님, 저것 좀 보십시오. 선생님이 저주하신 저 무화과나무가 말라버렸습니다”라고 충격적인 말을 하자, 예수님이 곧바로 기도 이야기를 하신다. 나는 이게 조금은 생뚱맞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곰곰이 묵상해보니 뜻이 통한다.
예수님이 베드로의 말을 듣고 대뜸 하신 말씀이 “하나님을 믿어라”(막 11:22)였다. 그리고 곧바로 “누구든지 이 산더러 ‘번쩍 들려서 바다에 빠져라’ 하고 말하고, 마음에 의심하지 않고 말한 대로 될 것을 믿으면 그대로 이루어질 것이다”(막 11:23)고 했다. 연이어 용서를 말씀하셨다(막 11:25). 여기서 예수님이 말씀하신 세 가지는 믿음·기도·용서다. 그런데 믿음·기도·용서는 이미 도래한 새로운 공동체의 본질과 성격이 어떠한 것인지를 보증하는 요소다. 예수와 함께 시작된 새로운 공동체는 하나님을 믿는 공동체이기 때문에 인간적인 방편이나 방어막이 더 이상 필요치 않게 될 것이고, 기도하는 공동체로서 하나님과 막힘없는 소통이 이루어지게 될 것이며, 피차 용서하고 용서받는 공동체로서 허물과 죄악과 비난이 더 이상 기를 쓰지 못하는 공동체, 그래서 지금의 성전 공동체와는 질적으로 다른 공동체가 될 것이라는 사실을 말씀하셨다. 이사야 선지자의 비전이 결코 헛되지 않고 반드시 이루어지게 될 것임을 말씀하셨다.
특히 믿음의 기도는 산을 옮긴다고 말한다. 당신의 말씀이 무화과나무를 말라 죽게 한 것처럼 믿음의 기도는 산을 바다에 빠뜨릴 수 있다고, 믿음의 기도는 엄청난 능력을 발휘한다고 말씀하신다. 그렇다. 기도는 하나님을 믿는 데서 나오는 것이다. 하나님을 신뢰하고 하나님과 소통하는 바로 거기에 기도가 있다. 기도는 단지 내가 믿는 것도 아니고, 내가 확신하는 것도 아니며, 원하는 것을 얻는 방편도 아니고, 오직 하나님을 신뢰하는 것이다. 그럴 때 기도는 산을 바다에 빠뜨릴 수 있다.
나는 여기서 산을 단지 눈에 보이는 산으로만 보고 싶지는 않다. 여기서 산은 단지 산이 아니다. 산은 세상의 높아진 것들을 통칭한다. 온 세상 사람들에게 높임을 받는 세상의 우상들을 통칭한다. 모든 사람들이 오르기 원하는 욕망과 성공을 의미한다. 산처럼 견고하여 영원히 흔들리지 않을 것처럼 보이는 돈과 명예와 세상적 가치를 의미한다. 이 높고 견고한 산을 어느 누가 어떻게 바다에 빠뜨릴 수 있겠는가? 정말 정복할 수 없는 요새처럼 보인다. 하지만 예수님은 말한다. 높은 산을 바다에 빠뜨려버릴 수 있다고. 믿음으로 기도하는 자는 산을 허물어버릴 수 있다고. 하나님과 소통함으로서 하나님의 세계를 알고, 하나님나라의 가치를 아는 자는 세상의 우상들을 발로 찰 수 있다고. 세상의 우상들로부터 넉넉히 자유할 수 있다고. 그렇다. 나는 바로 이것이 기도의 진정한 능력이라고 믿는다. 세상의 우상들 앞에 절절매지 않는 능력, 세상이 우러러 보는 것들을 배설물과 같이 여길 수 있는 능력, 그런 능력을 배양하는 것이 기도의 저력이라고 믿는다.
기도의 홍수 속에 기도의 빈곤?
교회와 그리스도인의 능력은 돈이나 권세나 외적인 거룩함에 있지 않다. 오직 기도에 있다. 아니다. ‘기도’조차도 많이 왜곡되고 오염되어서 ‘기도’라고 하면 자칫 뜻이 와전되어버릴 수 있다. 하여, ‘기도’보다는 ‘하나님과의 소통’이라고 하는 것이 본래의 의미를 제대로 전달하는 표현이라고 생각된다. 하나님과의 소통, 이것이 신앙의 본질이요, 교회의 근본이며, 능력의 근원이다. 하나님과 소통하지 않은 채로 종교적인 활동만 무성하고, 종교를 빙자한 상거래의 장이 되어버린 성전은 더 이상 예수의 하나님나라를 담아낼 수 없다. 그런 성전은 폐기되어야 마땅하다. 뿌리째 말라 죽은 무화과나무처럼. 돌 하나도 돌 위에 남지 않고 다 무너지게 될 것이라고 말씀하신 것처럼(막 13:2).
하지만 기도하는 집이 되면, 하나님을 움직이는 종교적 수단으로써의 기도가 아니라 소통으로서의 기도하는 집이 되면 비록 두세 사람이 주님의 이름으로 모인다 할지라도 높은 산을 바다에 던져버릴 수 있게 될 것이고, 지금까지와는 전혀 다른 새 역사의 중심-하나님나라의 중심이 될 수 있다. 주님은 교회를 향하여 한 가지 기대를 갖고 계신다. 교회가 만민이 기도하는 집이 되기를. 그래서 세상의 높아진 것들을 허물어뜨리기를.
그런데 한국교회의 기도소리는 크고 높으나 세상의 높아진 것들을 허물어뜨리기는커녕 오히려 세상의 높아진 것들을 우러러보며, 그 앞에 무릎 꿇고 있다. 기도로 열심히 세상의 우상들을 손에 넣게 해달라고 조른다. 세계에서 가장 열심히 기도하는 교회라고 소문은 자자한데 산을 바다에 빠뜨리지 못하고 산으로 기어오르기 바쁘다. 무엇 때문일까? 진정으로 기도하는 집이라면 그러지 않을 텐데…. 사랑하는 한국교회가 설교의 홍수 속에 있지만 말씀의 기근이듯이, 기도의 홍수 속에 있지만 기도가 빈곤한 건 아닌지….
교회와 예배당
개념(槪念)부터 제대로 세우자 <펌>
교회와 예배당은 전혀 별개의 것입니다. 교회란 그리스도를 영접한, 신앙을 고백한 사람들, 신앙의 공동체를 두고한 말이며, 예배당은 그 사람들이 모여서 예배를 드리는 장소에 불과 합니다. 그런데 문제는 그 장소를 특정 건물로 만들고, 그 장소를 신당이나 혹은 무슨 사원처럼 꾸며놓고, 그 건물 혹은 장소에 교회라는 간판을 내걸고, 성직자를 구별해 따로 세우고, 하나님께 예물(헌금)을 바치게 함으로 그곳이(장소) 당당한 교회로 인식이 되게 했다는 사실입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교회라 하면, 일단은 건물을 교회로 생각하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우리 한국교회의 60년대만해도 예배장소에 예배당이라고 간판을 써붙인 교회들이 있었습니다. 어느때부터인가 건물에 교회란 간판을 부착한 교회들이 늘어났고, 지금은 그것이 당연한 것처럼 되어버렸습니다. 이러한 결과는 신자나 불신자를 막론하고 교회라고 했을때, 건물을 교회라고 생각하게 만들었다는 것입니다. 그곳(장소)에 나가는 사람을 교회라고 생각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사람은 그 교회 교인 혹은 그 교회 성도, 그 교회 집사, 권사, 장로라고 생각할 뿐입니다.
성도, 즉 교회를 위해 예배당(장소)이 필요한 것이였지만, 지금은 예배당을 위해 성도(교회)가 필요한 결과가 된것입니다. 주께서 피흘려 사신 교회, 주께서 피흘려 부여하신 왕같은 제사장의 신분을, 건물에 빼앗긴 채, 건물의 노예처럼 살아가는 오늘의 처지가 되었다는 사실입니다. 누가 이렇게 만들었습니까? 이것은 예배당을 성전이라고 가르치는 사람들이, 또는 하나님의 집, 하나님의 처소, 혹은 예배당과 교회를 혼동한체 열심만 갖고사는 사람들이 만든 것입니다.
만약, 예배당을 때려부수고, 사슬에 묶인 하나님의 백성들을 해방시켜야 한다고 한다면, 어떤 사람들이 제일 먼저 반대하고 나설까요? 그것은 신앙심이 투철하다고 자랑삼는 소위 보수주의를 주장하는 분들이 앞장 설 것 아닐까? 하는 생각이 됩니다. 과거 미국의 역사를 보면 그랬습니다. 흑인 노예 해방을 하자고 했을 때 가장 첨예하게 반대했던 사람들이 보수주의 미국남부교회 사람들 이였다는 사실이 증명해주고 있는것을 봐서입니다.
그래서 참 교회(사람)는 예배당을 섬기는 노예(?)가 되어, 가족을 돌보고, 이웃을 돌보고, 하나님의 나라를 위한 삶보다는 예배당(건물)을 섬기는것이 우선 되어야, 믿음이 좋은 사람으로 착각하게 만든것입니다. 이런 경우를 주객이 전도(主客顚倒)되었다, 고 말하는것 아닙니까? 왜 이런 현상이 되었을까? 그것은 교회당과 교회를 혼동하기 때문이랄수있고, 동시에 교회 공동체란 한계설정을 잘못 이해한데서 비롯된 현상일수 있습니다.
모두가 그렇지는 않지만 일부 목사님들 중에는 그 장소를 "성전" 혹은 "하나님의 집"이라고 성도들에게 인식을 시키고, 그 건물을 아름답게 건축하게 하고, 경건하게 하고, 소중하게 인식을 시켜, 교회당을 위해 아낌없이 봉사하게 만듭니다. 이와 같은 일은, 신당(神堂)에 신을 모시고 사는 이방 종교인들이 행하는 짓을, 성령과 함께 사는 하나님의 백성들에게 가르쳐 어둠의 자식들이 되게 했다는 것이 심각한 오늘의 현실이라 할 수 있습니다.
우상을 섬기는 종교와 기독교가 다른것은 우리 자신들이 곧 교회라는것이 다른 것입니다. 이방 신은 신당에 모셔두고 신당을 찾아 섬기지만, 크리스천은 우리몸에 하나님을 모시고 사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몸을 성전이라 한것입니다.(고전 6: 19)
이 소중한 일을 위해 예수가 십자가에 달리셨고, 성령이 강림하신 것입니다. 이 엄청난 사건을 왜곡해서 예배당을 교회로 둔갑시키는 오류를 만들어 내는 이유는 무엇일까요? 이렇게 된것은 신당문화의 영향과 성직자(목사)들이 은연중에 자신들을 사제(司祭) 혹은 제사장이나 승려와 같은 중재자의 신분을 취하려하기 때문입니다.
주께서 피흘려 사신바된 주의 백성(참 교회)들이 교회당이란 곳에 묶여, 목사 한 사람의 왕국을 위해서 혹은 목사기업 기능을 위해서 충성 봉사를 다해야하는 어처구니 없는 현실은, 하나님의 백성들이 흑암권세의 포로들이 된것으로 봐야합니다. 교회당에 빼앗긴 왕 같은 제사장의 신분들을 신자(교회)각 사람에게 되돌려 주어야 하고, 그 신분이 각 사람에게서 제기능을 발휘할 수 있게 되는 날이 참 교회가 회복되는 날이라 할 수 있을 것이요, 주님의 나라가 이땅에 이루어지게 될 것입니다.
루터의 만인 제사장설의 주장을 한번쯤 되새겨 보면서, 오늘의 신자들의 처지를 가늠해볼 필요가 있습니다. 당시 개혁자들은 중세교회를 두고, 사탄의회란 말을 했습니다. 사탄의 집단에 불과한 중세 교회를 떠나 개혁교회를 출발시켰지만, 지금의 교회상황은 중세 카톨릭보다도 더 사탄의 모습(?)을 지니게 되었다면, 반드시 개혁이 되어야 하지 않겠습니까?
신약시대의 성전에 관한 인식문제는 개혁의 중심 문제라 할 수 있습니다. 모든 신앙이 성전이란 이름에 모아지고, 문제의 발생도 성전이란 이름에서 출발되기 때문입니다. 여기서 성전이라 말한것은 가시적 혹은 영적인것을 포함한 성전 전체 개념에 관한것을 말하는 것입니다.
"너희가 이 성전을 헐라 내가 사흘 동안에 일으키리라 유대인들이 가로되 이 성전은 46년 동안에 지었거늘 네가 삼일동안에 일으키겠느뇨 하더라 그러나 예수는 성전된 자기 육체를 가르켜 말씀하신 것이라"(요 2:19-21) 여기서 "성전된 자기 육체"란 말씀이 나옵니다. 이 말씀은 예루살렘 성전은 그리스도의 모형이란것을 확인시킨 말씀이라 할 수 있습니다.
이미 구약은 그리스도의 모형, 그림자, 비유, 등으로 설명 된것을 잘알고 있습니다. 사실 유대인들이 자기생명처럼 소중하게 여긴것, 세 가지가 있는데 그 첫째가 안식일, 둘째가 법궤, 셋째가 성전이라 합니다. 그렇게 소중하게 여긴 실체는 사실 그리스도를 가르킨 모형에 불과한것들 이였습니다.
"내가 안식일의 주인이다"(눅 6: 5)
"말씀이 육신이 되어 오신 분"(요 1: 14 / 법궤는 말씀)
"성전된 자기 육체"(요 2: 21)
이와같이 예루살렘 성전은 그리스도가 십자가에 달려 죽으시고, 장사 지낸바 되셨다가 삼일만에 부활하심으로 예루살렘 성전은 폐기되고(성전 휘장이 갈라져 버리고), 그리스도의 부활하신 몸으로 성전을 완성하신(다시 일으킨) 것입니다. 그래서 신약시대의 성전은 그리스도인 것입니다. 사실 교회 개혁을 말하게 된것은 땅에 다시 성전들이 등장하게 되고, 그 성전을 드나드는 사람들은 예수이름으로 포장된 신종 율법의 노예로 전락되어 땅의 건물(성전)을 섬기는 자들이 되어있기 때문입니다.
지금이야 그런 교회가 없겠지만 얼마 전까지만 해도 여자 분들은 강단에 올라갈수 없다고, 교회법으로 정한 교단들이 있었습니다. 어떻게 이런 교회들이 있을수 있었을까요? 그것은 예배당은 하나님의 집(성전)이란 의식 때문이죠. 이같은 의식을 가진 분들의 생각은 그와 같은것이 가장 믿음이 좋은 행위라고 믿기 때문이었을 것입니다.
혹 지금도 예배당을 신성시하거나, 신자들에게 하나님의 처소나 집처럼 인식을 시키려 하는 분들이 있다면, 그 일은 하루속히 중단해야 합니다. 왜냐하면 그것은 하나님께 범죄 행위요, 하나님나라의 반역행위요, 주께서 피흘려 진리로 자유케한 백성들로 종교(성전)의 노예가 되게하기 때문입니다. 이와같은 행위는 그리스도의 값진 피흘리심을 무의미하게 만드는 행위가 되기 때문에 더욱 심각한 것입니다.
우리는 광야에서의 성막은 하나님의 임시 임재 처소 였다는것을 압니다. 예루살렘 성전은 성막을 대신해서 지어진것이고, 그것은 하나님의 임재 처소란 점에서 성전이란 말을 하게된 것입니다. 이 성전이 그리스도의 몸에서 성취된 것이고,(요 2:21) 성전되신 그리스도께서 부활 승천하신 후, 그분의 영(갈 4:6)이 오순절 성령으로 강림 하셨는데, 그 영(성령)이 임한 곳이 곧 성전이 된것입니다.
그렇다면 오순절 성령 강림은 어디로 임하셨는가? 사도행전 2장 17절에서 요엘 선지의 말씀을 인용, "모든 육체에" 부어준 것이라 증거 함으로, 믿는자의 몸(마음)에 임한것을 말하고 있습니다.(갈 4:6) 그래서 바울은 "너희가 하나님의 성전인 것과 하나님의 성령이 너희 안에 거하시는 것을 알지 못하느뇨"(고전 3: 16) 하고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신약시대의 성전은 성령이 임하신 믿는자의 각 사람의 몸이 성전이된 것입니다. 목사님들이 예배당을 지어놓고, 혹은 지으려 하면서 성전이란 말을 공공연히 드러내 놓고 말하게 되면, 순진하기만한 신자들은 그것을 그대로 믿게 됩니다. 이 일은, 아무리 주의 이름으로 권능을 행하고, 귀신을 쫓아내고, 목사 노릇을 한다 해도, 그들은 불법을 행하는 자들이요, 주께로부터 부인(否認)되는 존재가 되고 맙니다.(마 7:22-23) 일개 건축물에 하나님의 거룩하신 이름을 들먹이며 성전 운운하는 것은 결코 작은 일이 아닌 것입니다. 이 일은 하나님의 이름과 관계된 일이며, 수많은 영혼들을 어둠으로 이끄는데 그 사안의 심각성이 있습니다.
거짓을 가르쳐 아름다운 교회당을 짓고, 사람들을 수만명, 수십만명을 모은다고 해서, 하나님 앞에 무슨 유익이 있겠습니까? 그것은 하나님께는 아무런 유익이 없을뿐만 아니라, 범죄 행위가 될뿐입니다. 하나님은 당신의 이름으로 무엇인가를 대단히 거창하게 하기를 원하심이 아니요, 비록 사람들 보기엔 초라해 보일지라도 하나님의 뜻대로 행하기를 원하시는 분이란 것을 분명히 인식했으면 합니다.(마 7:21, 마 25:34-4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