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원효의 성도처 신라 海門 唐州界 鄕城山 토감 답사
Ⅰ. 머리말
Ⅱ. 신라 해문 당주계는 경기도 화성시 남양반도였다
A. 남양지도로 확인되는 海門과 唐州界
B. 당항성과 당항진
C. 당성과 당은포
Ⅲ.원효의 성도처는 화성시 마도면 백곡리 토감이었다
A. 원효와 원랑의 수도처 樴山
B. 당신라국의상전의 본국 海門 唐州界 土龕
C. 원효와 탄문의 수도처 鄕城山 절터
D. 향성산 절터로 밝혀진 白谷里寺址
E. 白寺와 白寺下家의 정체
F. 원효가 건립한 두 개의 神勒寺
G. 백곡리 百濟古墳群의 석실 무덤
H. 苦雨와 白骨觀에 대한 필자의 소견
Ⅳ. 맺음말
조선 전기 신도시 무장읍치(茂長邑治)의 입지와 경관구성 270 271 향토사연구 제31집 기록하였다. 또 무덤에서 큰 깨달음을 얻은 원효를 神僧(신승)으로 표기하였다. 『송고승전(宋高僧傳)』 「당신라국의성전(唐新羅國義湘傳)」은 원효가 본국(本國) 해문(海門) 당주계(唐州界)의 토감(土龕)에서 깨달음을 얻었다고 기록하였다. 창 파를 건널 거함(巨艦)을 찾아다니던 도중에 苦雨(고우)를 만났고, 苦雨를 피하여 고분(古墳)에 들었다가 오도송을 불렀다고 기록하였다. 《보원사법인국사보승탑비(普願寺法印國師寶乘塔碑)》는 승려 탄문(坦文)이 원 효보살과 의상대덕이 머물렀던 鄕城山(향성산)의 寺地墟(절터)에서 수년간 수도 하였다고 기록하였다. 토감(고분)에서 일체유심조의 깨달음을 얻은 원효는 이후 두 개의 《신륵사(神勒 寺)》를 세운다. 경기도 여주시 남한강변에 세운 봉미산신륵사와 충청북도 제천시 한수면 남한강변에 세운 월악산신륵사였다. 《월광사원랑선사대보선광탑비》에 근거하면 신라인들은 원효를 神僧으로 불렀다. 《神勒寺》에 근거하면 깨달음을 얻은 원효는 자신을 神勒(신륵)으로 여긴 듯하다. ‘원랑선사탑비’, ‘당신라국의상전’, ‘법인국사탑비’에 따르면 원효가 깨달음을 얻은 장소는 분명해진다. 그 장소는 신라 海門 唐州界 樴山의 土龕이고, 고려 鄕城 山에 위치한 古墳이다.
그런데 최근에 원효의 성도처를 답사할 수 있는 자료가 확보되었다. 정신문화연 구원이 발표한 ‘화성백곡리고분 조사연구보고서’, 한국문화재보호재단이 발굴한 자료 ‘白谷里寺址’, 화성지역학연구소가 답사하고 펴낸 책자 ‘원효성사 대각처는 화성에 있다’ 등이다. 원효와 원랑이 수련한 토감은 화성시 마도면 백곡리 산 91번지에 위치한다. 이 곳에서 백제 고분 수십 기가 발굴되었다. 원효와 탄문이 수도한 백곡리사지(白谷 里寺址)는 마도면 백곡리 산 104번지에 위치한다. 이곳에서 신라시대의 명문기와 ‘白寺’, ‘白寺下家’와 ‘佛頭’가 발굴되었다. 화성지역학연구소 연구위원들은 매주 이 지역을 답사하여 책자로 발간하고 BTN 불교방송에 소개하였다. 그래서 원효의 성도처를 눈으로 확인할 수 있는 가이드북이 되었다. 본 연구는 토감(고분)에서 一切唯心造의 깨달음을 얻은 元曉의 성도처를 재확인 하는데 그 목적을 두었다.
Ⅱ. 신라 해문 당주계는 경기도 화성시 남양반도였다
A. 남양지도로 확인되는 海門 唐州界 『宋高僧傳』 「唐新羅國義湘傳」은 원효가 깨달음을 얻는 장소를 本國 海門 唐州 界로 기록하였다. 그 장소는 어디일까? 여기서 本國은 신라이고 海門은 화성시 마도면 해문리이고 唐州界는 화성시에 딸린 남양반도(南陽半島)다. 아직도 경기도 화성시 마도면에는 신라 때의 지명 唐城과 海門이 그대로 존재한다. 당주(唐州)는 삼국시대의 당항성(党項城), 고구려의 당성군(唐城郡), 신라 경덕 왕(757년) 때의 당은군(唐恩郡)이다. 이어서 고려 충선왕(1310) 때 남양도호부( 南陽都護府), 조선 고종(1895년) 때 남양군(南陽郡), 2001년 3월 21일에 행정 개편된 경기도 화성시 남양읍, 마도면, 송산면, 서신면과 그 부속도서가 唐州다. 조선시대 수원군·안산군·광주군과 경계하는 남양군이 곧 唐州界다. 조선시대의 지 도 南陽1) 한 장으로 신라 海門 唐州界의 위치가 확실히 규명된다. 더이상 재론할 여지가 없다.
1) 南陽, 18세기 후반, 41×32cm, 정신문화연구원 소장. 그림 1. 海門 唐州界 조선 전기 신도시 무장읍치(茂長邑治)의 입지와 경관구성 272 273 향토사연구 제31집 B. 당항성(党項城)과 당항진(党項津) 삼국사기는 당항성(党項城)
2)과 당항진(党項津)3)을 다음과 같이 기록한다. a-1. 선덕왕 11년 7월에 백제왕 의자(義慈)가 크게 군사를 일으켜 나라 서 쪽의 40여 城을 공격하여 빼앗아갔다. a-2. 8월에 또 (백제가) 고구려와 공모하여 당항성(党項城)을 빼앗아 당에 통하는 길을 끊으려 하므로, 왕이 사신을 보내어 당태종(唐太宗)에게 급함( 急難)을 알렸다. 또 백제 장군 윤충이 군사를 거느리고 와서 대야성을 쳐 함 락시켰다. 도독 이찬 품석(品釋)과 사지 죽죽, 용석 등이 전사하였다. a-3. 문무왕 8년 6월 12일, 웅진도안무대사(熊津道安撫大使) 유인궤가 唐 主의 칙지를 받들어 숙위인 사찬 김삼광(金三光:유신의 장자)과 함께 당항 진(党項津)에 도착하니, 왕이 각간 김인문으로 하여금 가서 大禮로써 영접 하게 하였다. 사료 a-1은 백제 의자왕이 신라의 토경을 공취한 사건이다. 643년 7월, 백제 의 자왕은 신라 서쪽의 40여 城을 공취하였다. 신라 영토의 1/3에 해당하는 크기였 다. 덕만공주를 왕으로 세운 진평왕의 처사에 반대하여 모반이 끊이지 않았던 때 였다. 또 국방을 잘 모르는 선덕여왕의 치세에 군령이 제대로 서지 않던 때였다. 진평왕 53년, 이찬 칠숙(柒宿)과 아찬 석품(石品)이 모반하였다. 진평왕이 덕만 공주를 차기의 왕으로 추대하는 것에 반대하였다. 이에 진평왕이 칠숙과 석품을 잡아 동시(東市)의 저잣거리에서 목을 베고 구족(九族)을 처형하였다. 선덕여왕 11년, 대야성주 김품석은 부하 장수 검일의 아내를 빼앗았다. 이에 검 일은 백제와 내통하였고, 제장 윤충은 대야성을 쳐서 함락시켰다. 대야성 전투에 2) 당항성(党項城), 삼국사기(상), 을유문화사, 김부식지음 이병도역주, 117쪽.
3) 당항진(党項津), 위의 책. 152~153쪽. 서 품석(品釋)과 죽죽, 용석이 전사하였다. 김품석의 아내 고타소랑(古陀炤娘)도 죽었다. 고타소랑은 김춘추의 딸이었다. 백제 의자왕이 빼앗은 신라 40여 城은 진흥왕(551년)이 차지하였던 竹嶺 이북 高峴 이남의 10城도 백제의 영토가 되었음을 의미한다. 고구려와 공모한 백제가 당항성을 빼앗은 것은 지금의 경기 남부가 백제의 토경 이 되었음을 시사한다. 553년에 거칠부 등이 탈취한 한성 지역의 10郡도 백제의 토경으로 되돌아갔음을 의미한다. 사료 a-2는 백제 의자왕이 고구려 보장왕과 협공하여 당항성(党項城)을 빼앗은 기록이다. 의자왕이 당항성(党項城)을 빼앗은 것은 선덕여왕의 대당 입조(入朝)를 막은 것이다. 충청북도 단양의 죽령과 충주의 계립령에서 당항성으로 향하는 신 라의 당항성로를 끊은 것을 의미한다. 사료 a-3은 신라 문무왕이 각간 김인문을 당항진(党項津)으로 보내 당 태종의 사 자 유인궤를 맞이하는 장면이다. 이때 당 태종의 숙위(宿衛)로 근무하던 김유신의 장자 김삼광이 웅진도안부대사 유인궤를 수행하였다. 대당외교의 거점이었던 당항성(党項城)과 당항진(党項津)은 남양반도에 위치한 다. 경기도 화성시 남양읍, 마도면, 송산면 서신면의 바닷가이다. 신라 선덕여왕이 당 태종에게 백제 의자왕의 침략을 급보(急報)로 알린 신라 海門이었다. 화성시 남양반도의 지역민들은 당항성과 당항진을 닭목성과 닭목항으로 부르기 도 한다. 당항성(党項城)에 이르는 海門이 닭의 모가지처럼 잘록하기 때문이다. 좌우에서 치미는 갯골이 동서로 뻗은 능선 길을 잘록하게 만들기 때문이다. 그래 서 옛날부터 이 길목을 해문(海門)으로 불렀다. 해문의 다른 이름은 성목쟁이다. 당항성(党項城)과 당항진(党項津)은 이후 신라의 당은군(唐恩郡)과 당은포(唐恩 浦)로 바뀌었다. 조선 전기 신도시 무장읍치(茂長邑治)의 입지와 경관구성 274 275 향토사연구 제31집 C. 당성과 당은포 경기도 화성시 바닷가에 위치한 당항성(党項城)과 당항진(党項津)은 백제, 고구 려, 신라의 수군 기지이자 대당포구(對唐浦口)였다. 나·당연합군에 백제와 고구 려가 멸망한 이후에는 통일신라의 당은군(唐恩郡)과 당은포(唐恩浦)였다. 당성(唐城)은 신라 당은군의 주장성이었다. 당은포(唐恩浦)는 대당포구이자 국 제교류의 관문이었다. 당성은 1차 성과 2차 성으로 축성되었다. 1차 성은 구봉산과 봉화산을 잇는 능선 정상부에 축성되었다. 길이 약 600m로 6~8세기의 신라 유물이 다수 출토되었다. 신라와 통일신라의 산성이었음을 알려준다.4) 2차 성은 길이 약 1.2km로 1차 성의 중심부를 관통하여 구축되었다. 구봉산의 곡 간부를 감싸는 포곡식 산성으로 신라〜통일신라~고려~조선시대의 유물이 다수 출 토되었다. 당성이 시대의 역할과 필요에 따라 폭넓게 사용되었음을 짐작할 수 있다. 2017년, 한양대 문화재연구소가 당성 3차 발굴조사를 시행하였다. 발굴조사에 서 ‘唐’ ‘宅’ 등의 명문 기와를 수습하였다. 이로써 해외연구자들과 공동연구 및 국 제학술대회가 화성시의 주최로 여러 차례 추진되었다. 국제 해상 교류의 중심지 로서 당성의 역사적 가치를 밝히는 화성시의 해양 프로젝트였다.
당성은 신라가 삼국을 통일하는 데 매우 중요한 역할을 하였다. 김춘추와 김법민 이 당항진(党項津)에서 큰 배를 타고 당에 들어갔다. 통일신라시대, 당성(唐城)은 당과 신라를 바다로 잇는 관문이었다. 신라에서는 수많은 승려와 관료들이 당은군에 딸린 당은포(唐恩浦)를 이용하였다. 삼국통일 이후에도 북으로 발해(渤海)가 가로막고 있어 연안루트를 이용하기는 어려운 까 닭이었다. 통일신라로서는 당은포가 당과의 교역에 가장 중요한 거점이었다. 이 러한 관점에서 당은군은 신라의 수도 金城과 당의 수도 長安을 잇는 실크로드의 출발점이기도 하였다.
4) 「당성지표조사보고서」, 한양대학교박물관, 1998. 「도서해안지역 종합학술조사 1」, 경기도박물관, 2000.
Ⅲ. 원효의 성도처는 화성시 마도면 백곡리 토감이었다
A. 원효와 원랑의 수도처 樴山 《월광사원랑선사대보선광탑비(月光寺圓朗禪師大寶禪光塔碑)》
5)는 신라 승려 원 랑(圓朗,816~883년)
6)의 행장을 기록한 탑비다. 보물 제360호인 탑비는 충청북도 제천시 월악산 월광사지(月光寺址)에 있었다. 현재는 국립중앙박물관 1층에 옮겨 져 전시되고 있다. 신라 헌강왕이 ‘대보선광(大寶禪光)’의 탑명을 내려 김영(金瑛)에게 비문을 짓게 하였다. 비문의 글씨는 순몽(淳蒙)이 썼는데 구양순체의 해서이며 폭은 2cm 정도 이다. 탑비는 거북 받침돌 위로 몸돌을 세우고 머릿돌을 얹은 신라 후기의 전형적 인 모습을 지니고 있다. 圓朗禪師塔碑는 원랑이 원효의 성도처인 樴山의 □□□□에 우거하여 3개월간 수련하였다고 기록한다. 그런데 오랜 세월의 풍우에 비문의 글자가 마모되어 그 위치를 알 수 없다. 月光寺圓朗禪師大寶禪光塔碑文7)은 다음과 같다. 5) 월광사원랑선사대보선광탑비(月光寺圓朗禪師大寶禪光塔碑), 통일신라시대 말기 승려인 원랑선사의 탑 비, 보물 제360호. 높이 395㎝. 국립중앙박물관 소장. 6) 원랑(圓朗,816~883년), 856년(문성왕 18) 당나라에 유학한 뒤 귀국하여 선문을 널리 퍼뜨린 승려로 883년(헌강왕 9)에 입적했으며, 헌강왕은 '원랑선사'라고 추시하고, 비명은 '대보선광'이라고 했다. 7) 월광사원랑선서대보선광탑비문, 『譯註 韓國古代金石文』
Ⅲ(1992), 국학연구원. 그림 2. 당성(唐城) 망해루(望海樓) 그림 3. 당고지(唐串)-시화방조제 건설로 간척지가 되었다. 조선 전기 신도시 무장읍치(茂長邑治)의 입지와 경관구성 276 277 향토사연구 제31집 月光寺圓朗禪師大寶禪光塔碑 ▨▨▨▨▨江府月巖山月光寺詔諡圓朗禪師大寶禪光靈塔碑幷序 朝請郎守錦城郡太守賜緋魚袋臣金穎奉敎撰 五騰山菩提潭寺釋迦沙門淳夢奉敎書 ▨▨▨▨之君垂禮樂於百代猶龍之帝敷道德於萬方莫不崇仁重義允文 允武好生惡殺乃儉乃慈若迺掃跡玄妙之鄕安寂自然之域了因果而雙 ▨▨▨思而並除靜爲躁」 ▨▨▨▨▨喩人間若大夢齊衆生猶如來理寄忘言事超物外其惟我禪師 之宗乎禪師諱大通字太融朴姓其家通化府仲停里歷代捨官爵之榮近親 紹朴素之▨顯祖王考」 ▨▨▨▨▨▨氏族本取城郡人也姙禪師日守節持齋誦經胎敎及其載誕 果異常倫禪師蘊河嶽之英靈稟乾坤之秀氣猶崑山之片玉寔桂林之一枝 將邁觹年爰登冠歲家」 ▨▨▨▨▨▨▨勉旃於翰黑之場耽翫於經史之域汝其志哉禪師乃恭受 其旨忽焉尋師聰睿則五行具下敏捷乃一覽無遺遍通諸子百家洞▨千經 萬論後窺內典益悟群」 ▨▨▨▨▨▨▨是非不異遂投簪落髮解褐披緇以會昌乙丑年春投大德 聖鱗進具戒僧▨配居丹嚴寺▨是修心戒律練志菩提忍辱精進爲先布施 恭敏爲次時爲獅子喉」 ▨▨▨▨▨▨▨忘年請交廻席相事時也師兄慈忍禪師自唐歸國師時造 謁忍禪師察其雅懷知非所敎乃設馬鞭之義激揚龍象之心師卽潛▨憤悱 欲扣玄微爰抵樴山寓」 ▨▨▨▨乃神僧元曉成道之所也習定三月後依廣宗大師大師見知令惣 寺務師不獲已因而蒞焉未幾功就曰吾當捨去以大中丙子歲投入唐賀正」 ▨▨▨▨▨▨華夏遍詣宗林乃至仰山師事澄虛大師大師豫察聰惠俯令 精心敎諭眞宗夙夜無倦師素槩超倫丹誠罕匹智踰離日識邁彌天▨涉炎 凉默受黃梅之印不經」 ▨▨▨▨▨▨之珠後乃巡禮名山歷參禪伯旣周中夏欲化東溟咸通七年 投廻易使陳良付足東來時乃波濤騰湧煙靄昏沈舟楫有傾覆之虞僧俗 ▨▨溺之患師乃略無惧」 ▨▨▨▨▨不易去國之麻衣匪換出家之壯志若非神通妙用智識遐周履 險不驚孰能至此廣宗大師聞師東還遣使邀請異禮相接▨愛良多來年春 出山寓止」 ▨▨▨▨夏夜夢月嶽神官來請及曉慈忍禪師致書云月光寺者神僧道證 所刱也昔我太宗大王痛黔黎之塗▨▨▨海之▨▨止戈三韓之年垂衣一 統之日被」 ▨▨▨之▨永除▨▨之災別封此山表元勲也曾授錄於金剛又傳名於仙 記淸冷泉澗靉靆煙霞廣孕珠靈備存▨傳師其居焉師如響應聲振衣卽 ▨▨▨▨夕夢前神侍衛」 ▨▨▨▨▨▨▨行致禮肘步瞻容曰先有叨陳勞遠相應師是以養形玆地 寄居此山顯示玄機揄揚法要不存善惡若疾風之歸雲解脫是非▨▨▨之 突圍由是檀越將踰境」 ▨▨▨▨▨▨▨旣至寶山之人罕聞索手之士羶行普彰香名遠着價高六 合譽及九重景文大王以弘長養之深仁慘空寂之釋典遠聆禪德思竪良」 ▨▨▨▨▨▨▨月五日遣觀榮法師遠賞金詔慰勞山門月光寺永令禪師 主持又一年再廻天睠重降綸音追錫恩波遐宣眷渥茶」 ▨▨▨▨▨▨來世論爲榮禪門增耀中和三仲夏群虵出穴遍谷盈山叱口 悲號垂頭泣血禪師謂門人曰生也有涯吾豈無盡汝等當無隳怠勉力修行 以其年十月五日儼」 ▨▨▨▨年六十有八僧臈三十九鳴呼歿而不歿名播三韓亡而不亡法流 千載於是煙雲索漠松檜蒼茫遠近僧徒高卑士女覩變▨而叩地銜悲傷以 號天接武致哀拊膺長」 ▨▨▨▨▨淚集成泉門人融奐等以其年二月十日奉遷神柩葬于北院永 訣慈顏不勝感慕門人等慮陵遷谷徙天拂海田有忘先師法乳之恩欲以仰 조선 전기 신도시 무장읍치(茂長邑治)의 입지와 경관구성 278 279 향토사연구 제31집 陳攀慈之志爰集行狀」 ▨▨▨▨▨▨居請建鴻碑用光聖代」 ▨▨▨▨▨英文聖武繼祖嗣圖凡於內敎之中尤深依仰之意聞亡悲怛不 自勝任仍追諡圓朗禪師塔號大寶光禪又詔微臣修撰碑讚臣功疎畵虎用 匪懷蛟叨奉」 ▨▨▨▨▨▨其詞曰」 ▨▨▨▨▨▨沙達摩兮傳心中華散滿兮山盈谷溢周流兮地角天涯圓通 兮無形無相任用兮非實非花强字兮玄珠法印强名兮迦葉盧遮朝鮮兮東 接扶桑昔賢兮稱玆福」 ▨▨▨▨▨▨月光淸高兮爲僧人瑞是非兮了之不存聖智兮弃之不義貪 瞋兮捨而不捨聲色兮利而不利神靈兮感化圍繞皇王兮念道崇師嘉猷兮 無疆莫極懿績」 ▨▨▨▨▨▨▨兮欝然成市學徒兮豈或多歧六賊兮去而不去方法兮知 而不知皇▨兮何辜何戾靑丘兮孰福孰祐哲人兮焂然委化禪林兮忽焉衰 朽祗園兮慘慘」 ▨▨▨▨▨▨▨▨秀鳴呼哀哉法梁折勒石銘金示諸有」
龍紀二年歲次庚戌九月十五日建 門下僧眞胤等刻字」 휘(諱)는 대통(大通), 자(字)는 태융(太融), 박씨 성으로 집은 통화부(通化 府) 중정리(仲停里)이다. 선사는 일찍이 제자백가(諸子百家)와 천경만론(千經萬論)을 통달하였다. 20세 쯤 불경을 접하여 보고 옳고 그름이 다르지 않음을 깨닫고 출가하였 다. 845년 봄에 대덕(大德) 성린(聖鱗)에게 구족계(具足戒)를 받고 스님이 되어 단엄사(丹嚴寺)에 머물렀다. 그때 사형(師兄)인 자인선사(慈忍禪師)가 당에서 귀국하여 더이상 가르칠 사람이 아님을 알고 떠나라고 하였다. 선사는 진리를 찾아 신승(神僧) 원효(元 曉)가 도를 이룬 직산(樴山)의 ▧▧▧▧에 우거하였다. 석 달 동안 선정(禪定) 을 닦은 후에 광종대사(廣宗大師)에 귀의하니 대사는 절의 일을 맡겼다. 선사 는 사양할 수 없어서 절의 일에 공적을 쌓은 후 856년 당에 들어갔다. 당에서 종림(宗林)을 두루 참배하고 앙산(仰山)에 이르러 징허대사(澄虛大 師)를 스승으로 섬겼다. 대사는 총명하여 미리 살펴 마음을 닦고 진리를 가 르쳐 깨우치니 선사의 지혜와 지식은 뛰어나서 짝할 이가 없었다. 황매(黃 梅)의 심인(心印)을 받고 구슬을 얻어 명산을 순례하고 선백(禪伯)을 두루 찾아뵈었다. 선사는 신라를 교화시키고자 866년 회역사(廻易使) 진량(陳良)에게 의탁 하여 동쪽으로 오는데 파도의 격랑에 안개가 짙게 깔려 승려와 속인은 배가 뒤집혀 죽을까 걱정했다. 그러나 선사는 조금도 두려워하지 않았으며, 고국 을 떠날 때의 삼베옷을 바꾸어 입지 않았다. 광종대사는 선사가 동(東,신라)에 왔다는 소식을 듣고 사람을 보내 초청하 였다. 특별히 예의로 상봉하니 사랑함이 깊었다. 이듬해 봄에 산에서 나온 여름밤에 월암산(月巖山) 신궁(神宮)이 와서 초청하는 꿈을 꾸었다. 꿈을 깨 고 나니 자인선사(慈忍禪師)가 글을 보내왔다. "월광사는 신승(神僧) 도징(道澄)이 창건한 절이다. 태종대왕(太宗大王)이 삼한을 정복하여 통일을 이루던 때 재앙을 없애 이 산을 으뜸가는 공로로 기 렸다. 금강(金剛)에도 기록되어 있으며, 선기(仙記)에도 맑고 시원한 샘물이 있고 안개가 피어오르며, 널리 빼어난 정기를 품고 있다는 것이 전(傳)에 실 려 있다. 선사는 거기에 머물라" 선사는 지난번 꿈에 신궁(神宮)이 옆에서 호위하며 예를 다하였다. 선사는 이 땅에 몸을 담고 이 산에 머물면서 현묘한 이치와 법요(法要)를 휘날렸다. 선악(善惡)을 마음에 두지 않고, 시비(是非)를 벗어나니 불법은 천지사방에 드높아 궁중(宮中)까지 미쳤다. 경문대왕(景文大王)이 관영법사(觀榮法師)를 보내어 조칙을 내려 산문을 위로하고 1년이 지나 임금이 돌아봄을 다시 입어 조칙이 거듭 내려지니 선 문(禪門)은 더욱 빛났다.
헌강왕 9년(883년) 5월에 많은 뱀들이 구멍에서 나와 골짜기와 산에 두루 퍼져 크게 슬픈 소리를 내면서 머리를 늘어뜨리고 피눈물을 흘리며 울었다. 선사는 동문들에게 "삶에는 끝이 있는 법이니 나라고 어찌 다함이 없겠는 가. 너희들도 마땅히 게으르지 말고 힘써 수행하라"고 말하고, 그해 10월 5 일에 돌아가시니 향년 68세, 승랍(僧臘)은 39세였다. 제자 융환(融煥) 등이 다음 해 2월 10일에 영구(靈柩)를 받들어 옮겨 북원( 北院)에 장사지내고, 추모하며 행장(行狀)을 모으고 큰 비석을 세워 성대(聖 조선 전기 신도시 무장읍치(茂長邑治)의 입지와 경관구성 280 281 향토사연구 제31집 代)에 빛낼 것을 청하였다. 헌강왕은 선사의 부음에 슬픔을 가누지 못하였다. 이에 시호(諡號)를 추증 하여 원랑선사(圓朗禪師)라 하고, 탑호(塔號)를 대보광선(大寶光禪)이라 하 여 신하에게 조칙을 내려 비찬(碑讚)을 짓게 하였다. 찬사(讚詞)가 말한 가운데, '억지로 글을 붙여 현주(玄珠)와 법인(法印)이라 하였고, 굳이 이름하여 가엽(迦葉)과 노차나(盧遮那)라 하였도다. 아! 슬프 도다. 불법의 기둥이 부러졌으니, 돌에 새기고 쇠에 기록하여 모든 사람에게 보이고자 하노라.' 용기(龍記) 2년(890, 진성여왕 4년) 경술(庚戌) 9월 15일 세우다. 제자인 승려 진윤(眞胤) 등이 글자를 새기다. 위에서 圓朗禪師塔碑는 원랑이 ‘神僧 元曉가 成道한 樴山의 ▧▧▧▧에 寓하며 3개월을 수도하였다.’고 기록하였다.
여기에 등장하는 樴山은 어디일까? 직산(樴山)은 말뚝산이다. 말이나 소를 묶어두는 말뚝(樴)의 의미다. 조선시대 경 기도 화성시 마도면 해문리에 驛이 있었다. 수백 대의 우마차가 들고 나는 구화역 (仇火驛,갯벌역)이었다. 그 장소는 화성시 마도면 해문리의 역골(驛谷)과 마도면 백곡리의 입피골(立樴谷)이다. 그러므로 원랑선사탑비가 기록하는 樴山(말뚝산) 은 역골과 입피골을 끌어안는 산이어야 한다. 그런데 직산(樴山)에 대응되는 산이 마도면에 있다. 여치산(輿峙山,102.2m)8)이 다. 말뚝(樴)이 서 있는 골짜기여서 입피골(立樴谷)이고 수레(輿)가 지나는 고개( 峙)가 있어 여치산(輿峙山)이다. 마도면 해문리를 지난 우마차의 길은 마도면 백곡리 마을회관 앞에서 끝난다. 갯 벌 하천 백곡천(白谷川)이 길을 가로막기 때문이다. 백곡천 건넌 마을의 이름이 아직도 설앞말이다. 설앞말이 곧 직산(말뚝산)의 위치를 알려준다. 그 옛날 이곳 에 무엇을 세웠을 것인가? 수백 개의 말뚝을 박아 말과 우마차를 세웠을 것이다. 그래서 입피골(立樴谷)에 위치한 산의 이름이 직산(樴山)이었던 것이다. 8) 여치산(102.2m), 마도면 백곡리 지형도(50K), map,ngii.go.kr, 국토정보플랫폼, 국토정보맵, 1970 년대. 조선시대 마도면 해문리의 구화역(갯벌역)이 번성하였던 때문일까? 지금도 마도 면 백곡리와 해문리 일대에는 소를 키우는 목장이 즐비하다. 말을 기르는 목장도 두어 군데 있다. 입피골에 위치한 또나따목장9)이 그중의 하나다. 그렇다면 원효가 성도한 장소(▧▧▧▧)를 이 지역에서 찾아야 한다. 신라시대의 樴山 곧 조선시대 의 輿峙山에서 찾아야 한다.
9) 또나따목장, 송아지를 ‘또 낳았다’의 소리 말 표기. 그림 4.
당성(唐城) 망해루(望海樓) 그림 6.
수레(輿)가 넘는 고개 여치산(輿峙山) 그림 5.
월악산월광사지 그림 7.
도7 입피골의 또나따 목장 조선 전기 신도시 무장읍치(茂長邑治)의 입지와 경관구성 282 283 향토사연구 제31집
B. 당신라국의상전의 본국 海門 唐州界 土龕 『宋高僧傳』
10) 「唐新羅國義湘傳」은 송(宋)의 승려 찬영(贊寧,912~1002)이 쓴 고승 전이다. 唐부터 宋 태평흥국 5년(980)까지의 고승 533인의 전기(傳記)와 130인의 부전(附傳) 기록이다. 「唐新羅國義湘傳」에 기록된 원효 관련 내용은 다음과 같다.
釋義湘。俗姓朴。雞林府人也。生且英奇。長而出離。逍遙入道性分天然。 年臨弱冠聞唐土教宗鼎盛。與元曉法師同志西遊。行至本國海門唐州界。計 求巨艦。將越滄波。 倏於中塗遭其苦雨。遂依道旁土龕間隱身。所以避飄濕焉。迨乎明旦相視。 乃古墳骸骨旁也。天猶霢霂地且泥塗。尺寸難前逗留不進。又寄埏甓之中。 夜之未央俄有鬼物為怪。曉公歎曰。前之寓宿謂土龕而且安。此夜留宵託鬼 鄉而多崇。 則知心生故種種法生。心滅故龕墳不二。又三界唯心萬法唯識。心外無法胡 用別求。我不入唐。 의상은 석가의 제자다. 성은 박씨고 계림부의 사람이다. 생김이 영특하고 기 이했다. 성장하여 출가하였다. 도를 찾아다니기를 하늘의 뜻으로 받아들였다. 나이 약관에 이르러 당나라에 교종이 나란히 융성하다는 소식을 듣고 원효 법사와 뜻을 같이하여 서쪽으로 유행하였다. 본국(本國) 해문(海門) 당주계( 唐州界)에 이르러, 큰 배를 구해 창파를 건너려 했다. 배를 찾아다니는 중 도(條於中塗)에 매서운 고우(苦雨)를 만났다. 이에 길옆의 토감(土龕)에 몸 을 숨겨 회오리바람의 습기를 피했다. 다음날 날이 밝아 바라보니 그곳은 해골이 있는 옛 무덤이었다. 하늘에서 는 고우가 계속 내리고 땅은 질척해서 한 발자국도 앞으로 나아갈 수가 없었 다. 또 하루를 무덤 속에서 머물렀다. 밤이 깊기 전에 갑자기 귀신이 나타나 놀라게 했다. 원효가 탄식하며 깨달음을 노래했다. “전날 밤에는 토굴에서 잤음에도 편안하더니 오늘 밤은 귀신의 굴에 의탁 하니 근심이 많구나! 알겠다. 마음이 생기면 갖가지 것들이 생겨나고, 마음 이 사라지면 토감과 고분이 둘이 아닌 것을, 또한 모든 세계는 오직 마음일
10) 『송고승전』, 송(宋)의 승려 찬영(贊寧, 912~1002)이 당·송시대의 고승 533인의 행장을 쓴 전기(傳記). 뿐이요, 모든 존재는 오직 인식일 뿐임을, 마음밖에 法이 없으니 어찌 따로 구하랴.” 나는 당나라에 들어가지 않겠다고 하였다.
위에서 唐新羅國義湘傳은 원효가 성도한 장소를 本國 海門 唐州界 土龕(古墳)으 로 기록하였다. 이 기록의 本國은 신라, 海門은 마도면 해문리의 성목쟁이, 唐州 界는 통일신라의 唐恩郡이자 지금의 경기도 화성시 남양반도다. 그 흔적은 화성 시 서신면의 唐城과 마도면의 海門里에 또렷이 남았다. 송나라 승려 찬영(贊寧)11)이 쓴 「唐新羅國義湘傳」은 승려 영명연수(永明延壽)12) 가 쓴 「종경록」과 내용이 다르다. 또 승려 혜홍각범(慧洪覺範)13)이 쓴 「임간록」과 도 내용이 다르다.
결정적으로 다른 부분은 원효가 토감(고분)에서 깨달음을 얻는 과정이다. 「종경록」은 원효가 ‘시체 썩은 물을 마시고 깨달음을 얻었다’고 기록한다. 「임간 록」은 원효가 ‘해골 물을 마시고 구토하다 깨달음을 얻었다’고 기록한다. 그런데 「 당신라국의상전」은 시체 썩은 물을 마셨다거나 해골 물을 마셨다고 기록하지 않는 다. 원효가 ‘해골(骸骨) 있는 土龕(古墳)에서 이틀 밤을 묵었다’고만 기록한다. 이 부 분에서 「종경록」과 「임간록」은 상식적이지 않다. 원효의 깨달음을 극적으로 신격화 한 견강부회로 판단한다. 실제로 토감(고분)에 놓인 두개골에 물이 괴지 않는다. 南陽地方圖14)가 표기하는 海門은 화성시 마도면 해문리의 성목쟁이다. 갯골을 따라 올라온 바닷물이 남북으로 들이미는 언덕이다. 지금의 화성시 마도면 해운 로 794번지의 폭이 좁은 능선길이다. 좀 더 구체적으로는 화성시 마도면 청원초 등학교 정문 앞이다. 신라시대 당에 들어가는 사신이나 유학승이 당은포(唐恩浦) 에 이르는 유일한 길목이었다. 이곳에 삼국시대의 토성-성목쟁이성의 흔적이 남 았다.
11)찬영(贊寧,912~1002), 송나라 승려, 송고승전의 저자.
12)영명연수(永明延壽,904~975), 송나라 승려, 종경록의 저자.
13)혜홍각범(慧洪覺範,1071∼1128), 송나라 승려, 임간록의 저자.
14)南陽地方圖, 동여비고, 1682년, 33×42cm, 양산 대성암 소장.
조선 전기 신도시 무장읍치(茂長邑治)의 입지와 경관구성 284 285 향토사연구 제31집 조선시대 남양도호부에는 두 곳에 역(驛)이 있었다. 조선초기에는 화성시 남양 읍에 해문역(海門驛)이 있었고 조선후기에는 화성시 마도면 해문리에 구화역(仇 火驛)이 있었다. 해문역(海門驛)의 위치는 화성시 남양읍 역동(驛洞)이다. 남양읍에서 적량포(赤 梁浦)에 이르는 길목이다. 지금의 화성시 서신면 궁평항에 이르는 길이다. 구화역(仇火驛,갯벌역)의 위치는 화성시 마도면 해문리의 역골(驛谷)이다. 마도 면에서 영종포(永宗浦)에 이르는 길목이다. 지금의 화성시 서신면 전곡항에 이르 는 길이다. 해문역과 구화역은 충청남도 아산의 공진창에서 올라온 조세 등의 물류와 수원, 남양에서 거둔 조세를 도성 한양의 경창(京倉)으로 나르던 역이었다. 삼국시대에 는 唐으로 건너가고, 고려시대에는 宋으로 건너가고, 조선시대에는 明으로 건너 가는 포구역이었다. 남양도호부의 驛은 시대에 따라 그 위치가 바뀌었다. 남양만에 딸린 포구가 바닷 물의 흐름에 따라 변화하기 때문이다. 포구에 갯벌이 쌓이거나 물의 흐름이 바뀌 면 역의 위치도 바뀌었다.
그림 8. 해문역(海門驛)-남양읍 역동에 위치
그림 9. 구화역(仇火驛)-마도면 역골에 위치
C. 원효와 탄문의 수도처 鄕城山 절터 《보원사법인국사보승탑비(普願寺法印國師寶乘塔碑)》
15)는 승려 탄문(坦文,900~975)16) 의 행장을 기록한 탑비다. 충청남도 서산시 운산면 용현리 보원사지에 위치한다. 보물 제106호인 법인국사탑비의 비문은 김정언(金廷彦)이 짓고 구양순체의 해 서로 한윤(韓允)이 썼다. 김승렴(金承廉)이 각자하여 국사 입적 후 3년 뒤인 978 년(경종 3)에 세웠다. 法印國師塔碑는 鄕城山에 佛寺之墟가 있는데, 원효보살과 의상대덕이 머무르던 곳이라고 기록한다.
碑文은 다음과 같다. 迦耶山普願寺故國師制贈諡法印三重大師之碑(제액) 高麗國運州迦耶山普願寺故國師 制贈諡法印三重大師寶乘之塔碑銘(병 서) 光祿大夫太丞翰林學士前內奉令臣金廷彦奉 制撰 儒林郎司天臺博士臣韓允奉 制書幷篆額 恭惟 覺帝釋迦鵠樹昇遐之後 儲君彌勒龍華嗣位之前代有其仁心同彼 佛佛者 覺也師而行之故使蒸▨▨隅引玄津而更廣蟠桃山側撝慧日以重光 卽以道之尊爲王者師德之厚爲衆生父況乃 釋氏三藏有六義內爲戒定慧禪 之根也外爲經論律敎之門也誰其全之實 大師矣大師法號坦文字大悟俗緣 高氏廣州高人也祖陟種德無彊成功有裕曾作一同之長果彰三異之芳父能花 縣名家蘭庭茂族遂襲家風之慶蔚爲邑長之尊母田氏唯修聖善之心願得神通 之子奉行」 婦道愼守母儀魂交覩一梵僧授金色奇菓因有娠誕彌厥月父亦申夢法幢竪于 中庭梵旆掛其上隨風搖曳映日翩飜衆人集其下觀者如堵乾寧七年龍集涒灘 秋八月十四日天欲曙誕生大師其胎遶頸而垂如著方袍生有奇骨弱無放言覩 金像以」
15)보원사법인국사보승탑비(普願寺法印國師寶乘塔碑), 충남 서산시 운산면 용현리 119-1.
16)탄문(坦文,900~975), 신라 효공왕 4년(900)에 태어나서 고려 광종 26년(975)에 입적하였다. 법인국 사의 칭호를 받았다. 조선 전기 신도시 무장읍치(茂長邑治)의 입지와 경관구성 286 287 향토사연구 제31집 虔心對桑門而合掌有以見其根殆熟善芽尙早年甫五歲情敦出俗志在離塵願 託迹於緇門卽寄心於金界先白毋毋念疇昔之夢泣曰䚷願度來世吾不復撓倚 門之念也已後謁父父喜曰善卽以落辭親脩心學 佛去謁鄕山大寺大德和尙」 見 大師鳳毛奇相螺髻殊姿因謂曰方當童稚之年旣飽老成之德如子者以吾 爲師是猶守株待兎緣木求魚吾非汝師可往勝處 大師方欲僧之眞者必訪跡 之古者必尋會歸覲日古老相傳鄕城山內有佛寺之墟昔元曉菩薩義想大德俱 㦄居所」 憇 大師旣聞斯聖跡盍詣彼玄基以習善遂茇于其舊墟檻心猿柳意馬于以休 足于以齋心經厯數年時號之聖沙彌 (이하 줄임) [출전:『韓國金石全文』中世上(1984)]
가야산(迦耶山) 보원사(普願寺) 고국사(故國師) 제증시법인(制贈謚法印) 삼중대사(三重大師)의 비(제액)
고려국(高麗國) 운주(運州) 가야산(迦耶山) 보원사(普願寺) 고국사(故國師) 제증시법인(制贈謚法印) 삼중대사(三重大師) 보승탑비명(寶勝塔碑銘)과 아 울러 서문(序文) 광록대부(光祿大夫) 태승(太丞) 한림학사(翰林學士) 전내봉령(前內奉令) 신(臣) 김정언(金廷彦)이 왕명(王命)을 받들어 짓고, 유림랑(儒林郞) 사천대박사(司天臺博士) 신(臣) 한윤(韓允)이 제지(制旨)를 받들어 비문(碑文)과 전액(篆額)을 쓰다. 공손히 생각하는데 각제(覺帝)인 석가모니 부처님께서 구시나가라의 사라 나무 사이에서 열반하신 후 저군(儲君)인 미륵보살이 용화회상(龍華會上)에 서 불위(佛位)를 계승하기까지 대대로 인자(仁者)가 있어 모두 마음은 부처 님과 같았으니, 불(佛)이란 깨달은 자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그를 스승 삼 아 의행(依行)하는 까닭에 불교가 증조(蒸棗) 해우(海隅), 즉 동해의 한쪽 모 퉁이에 있는 우리 국민으로 하여금 진리의 세계로 인도하고 구습(舊習)을 고쳐 새로운 생활을 영위하도록 하였다. 널리 반보산(蟠桃山) 지역으로 넓 혀 혜일(慧日)을 도와 거듭 빛나게 하였으니, 즉 도(道)가 높은 존사(尊師)를 왕의 스승으로 삼고 덕이 두터운 큰스님을 중생(衆生)의 아버지로 삼았다. 석씨(釋氏)의 삼장(三藏)에는 육의(六義)가 있는데, 내(內)로는 계정혜(戒定 慧)이니 선(禪)의 근본이고 외(外)로는 경율논(經律論)이니 교(敎)의 본원(本 源)이 되는 것이다. 이 여섯 가지를 모두 갖추신 분이 있으니 실로 대사(大 師)가 그분이라 하겠다. 대사(大師)의 법호(法號)는 탄문(坦文), 자(字)는 대오(大悟), 속성은 고씨( 高氏), 광주(廣州) 고봉(高) 출신이다. 조척(祖陟)으로부터 덕(德)을 쌓음이 한량없으므로 공(功)을 이룸에 넉넉함이 있었다. 일찍이 일동(一同)이 될 만 한 장과(長果)를 지었으며, 삼이(三異)의 방부(芳父)를 나타내었다. 아버지 는 능히 화현(花縣)을 꾸민 훌륭한 군수(郡守)였고, 난정(蘭庭)에 태어난 빛 나는 가문이었다. 드디어 가풍(家風)의 경사를 이어받아 울창하게 읍장(邑 長)의 존령(尊令)이 되었다. 어머니는 백씨(白氏)이니 오직 성선(聖善)의 도 를 닦아 훌륭한 (결락) 아들 낳기를 희망하였으며, 부도(婦道)를 받들어 행하 고 삼가하여 모의(母儀)를 지켰다. 어느 날 밤 꿈에 한 범승(梵僧)이 나타나 금빛 나는 기과(奇菓)를 건네주었다. 그로 인해 임신하고 만삭이 되어 탄생 하였으며, 아버지 또한 꿈을 꾸었으니 법당(法幢)이 뜰 가운데 세워져 있거 늘, 범패(梵旆)가 그 위에 걸려 있어 바람을 따라 이리저리 나부꼈고, 많은 사람이 그 밑에 모인 것이 마치 둥근 담장과 같았다. 건녕(乾寧) 7년 용과(龍集) 군탄년(涒灘年) 8월 14일 새벽 동틀 무렵에 탄 생하였다. 대사(大師)는 태어날 때, 태(胎)가 목을 감아 드리운 것이 마치 방 포(方袍)를 입은 것과 같았다. 기이한 골격을 받아 태어났으며 어려서부터 말을 함부로 하지 않고, 불상(佛像)인 금상(金像)을 보면 마음을 경건히 하였 으며 상문(桑門)인 스님을 대하여는 반드시 합장하였으니 그 근기(根機)가 자못 성숙함을 볼 수 있었다. 선근(善根)의 싹이 전세(前世)에 이미 자랐으므 로 5살 때 벌써 출가하려는 마음이 돈독하여 뜻은 세간진로(世間塵勞)를 여 의는 데 있었으니 자취를 치문(緇門)에 의탁하고 마음을 금계(金界)에 의거 할 것을 발원(發願)하였다. 그리하여 아버지보다 어머니에게 먼저 여쭈었더 니, 어머니는 전일(前日)의 태몽을 생각하고는 울면서 허락하였으니, “내생( 來生)에는 나를 제도해 줄 것을 원할 뿐 다시는 문(門)에 기대어 자식이 돌아 오기를 바라는 마음을 일으키지 않겠다.”고 하였다. 이어 아버지에게 말씀 드리니 흔쾌하게 허락하였다. 스님은 곧 삭발하고는 부모에게 하직하였으며, 마음을 닦아 성불하고자 결 심하여 향산대사(鄕山大寺)의 대덕화상(大德和尙)을 찾아가 뵈었다. 화상( 조선 전기 신도시 무장읍치(茂長邑治)의 입지와 경관구성 288
289 향토사연구 제31집 和尙)이 스님을 보니 봉모(鳳毛) 기상(氣相)이며 나발(螺髻)을 지닌 특수한 자태(姿態)를 가졌으므로 경탄하여 말하기를, “바야흐로 동치(童稚)의 나이 에 해당하건만 이미 노성(老成)의 덕을 갖추었구나! 자네와 같은 자가 나를 스승으로 삼으면 이는 마치 수주대토(守株待兎)하고 연목구어(緣木求魚) 하 는 것과 같다. 나는 네 스승이 될 자격이 없으니 마땅히 다른 큰스님이 있는 곳을 찾아가라.”고 하였다. 그리하여 스님은 참된 선지식과 오래된 스님 들의 사적(事跡)을 빼놓지 않 고 반드시 심방(尋訪)하리라 하고 떠나려 인사를 드리는데 대덕화상(大德和 尙)이 말씀하기를, “옛 노인들 사이에 전해오는 말에 따르면, 향성산(鄕城 山)에 절터가 있는데 옛날 원효보살(元曉菩薩)과 의상대덕(義想大德)이 함 께 머무르며 쉬던 곳이라 한다.”하였다. 대사(大師)가 ‘이미 성적(聖跡)에 대하여 들었으니 내 어찌 그곳 현기(玄基) 에 나아가서 수도하지 않으랴.’하고, 마침내 그 구허(舊墟)에 풀집을 짓고, 원숭이 같은 마음을 우리 속에 가두어 놓고, 고삐 없는 말과 다름없는 의식은 말뚝에 붙잡아 매고는 여기에 발을 멈추고 마음을 가지런히 하여 수년을 지 냈다. 당시 부근 사람들이 성사미(聖沙彌)라고 일컬었다고 한다. (이하줄임)
[출전: 『校勘譯註 歷代高僧碑文』【高麗篇2】(1995)] 그림
10. 보원사법인국사보승탑비 그림
11. 보원사지 당간지주 위에서 法印國師塔碑는 ‘鄕城山內 佛寺之墟가 있는데 원효보살과 의상대덕이 머문 곳이다’라고 기록하였다. 이에 ‘향성산 절터를 찾아간 승려 탄문이 초막(茇 于)을 짓고, 朝三暮四와 같은 원숭이의 변덕스러운 마음을 가두고, 고삐 풀린 말 과 같은 의식을 말뚝에 붙잡아 매고 수년 동안 수도하였다.’고 기록하였다. 그러 므로 원효와 탄문이 수도한 장소를 찾으려면 고려시대의 ‘향성산 절터’를 먼저 찾 아야 한다. 앞장에서 圓郞禪師塔碑는 원효가 머무른 곳을 본국 해문 당주계 樴山(말뚝산)이 라고 하였다. 지금의 경기도 화성시 마도면 백곡리의 여치산(輿峙山)이다. 그러므 로 여치산에서 고려시대의 鄕城山을 찾아야 한다. 城과 己(基)가 관련된 鄕里의 산이어야 한다. 고려시대의 고승이라면 익히 알고 있는 성터와 절터가 있는 산이 어야 한다. 그런데 여치산 아래에 鄕城山과 같은 이름의 마을이 존재한다. 화성시 마도면 백곡리의 향기실(鄕己谷)이다. 향기실은 토성 성안성(城內城,성안이)에 빙 둘러싸인 마을이다. 삼국사기의 지명에 근거하면 城과 己는 같은 의미로 쓰였다. 예를 들면 충청남도 홍성군 결성(結城)의 다른 이름이 결기(結己)다.
17) 그러므로 향기실(鄕己谷)은 곧 향성산(鄕城山)에 딸린 마을 이름이다. 그렇다면 향기실 부근에 신라시대의 어떤 절터가 있는가? 그렇다. 2008년에 韓 國文化財保護財團이 발굴한 白谷里寺址18) 곧 白寺址19)다. 향기실 북쪽 산등성이 에 그 어떤 사적에도 기록되지 않은 절터가 발굴되었다. 이 마을 터줏대감도 모르 는 아주 오래된 신라시대의 절터다. 이곳에서 ‘소조 佛頭’와 ‘白寺’, ‘白寺下家’의 글자가 찍힌 명문기와가 출토되었 다. 그 장소는 경기도 화성시 마도면 백곡리 산 104번지다. 그러므로 圓郞禪師塔 碑가 기록한 樴山이 法印國師塔碑가 기록한 鄕城山이며 현재의 輿峙山에 비정되 17)배우리, 『우리땅 이름의 뿌리를 찾아서 2권』 307쪽. 18)白谷里寺址, 한국문화재보호재단 발굴 자료, 2008. 19)白寺址, 「화성 백사지의 조사성과와 성격 검토」 황보 경, 『삼국통일과 화성지역 사람들 삶의 변화』, 제12 회 화성시 역사문화 학술세미나, 29~47쪽. 조선 전기 신도시 무장읍치(茂長邑治)의 입지와 경관구성 290 291 향토사연구 제31집 는 것이다. 해문리와 백곡리를 동서로 끌어안는 산의 시대적 이름이 직산=향성산 =여치산이다. 위 비문에도 ‘고삐 풀린 말과 같은 의식은 말뚝에 붙잡아 매고 수년 동안 수도하였다’는 문장이 들어 있어 그 사실을 뒷받침한다.
다음은 1970년대 마도면 백곡리의 지도다.20) 이 지도에 향기실과 성안성, 입피 굴과 역골이 등장한다. 여치산(輿峙山)은 102.2m로 표기되었고, 백곡리사지(白 谷里寺址)는 62.13m로 표기되었다. 사진 ‘소조불상’은 「화성 백사지의 조사성과와 성격 검토-황보 경」에서 복사한 것이고, 명문기와 ‘白寺下家’는 2021년 11월 18일에 현지를 답사한 필자가 수습 한 것이다. 20)마도면 백곡리 지형도(50K), map,ngii.go.kr, 국토정보플랫폼, 국토정보맵, 1970년대. 그림 12. 마도면 백곡리-지도 중앙에 향기실과 토성 성안성. 중상귀에 굴고개와 당성. 우상귀에 해문리와 역골. 우하귀에 입피굴이 위치한다. D. 白寺와 白寺下家의 정체 1. 白寺의 정체 명문기와 ‘白寺’, ‘白寺下家’는 백곡리사지에서 발굴되었다. 조선시대 南陽地方 圖21)에도 등장하지 않는 절터다. 신라 선덕왕 때의 사찰 비봉산봉림사, 고려시대의 사찰 절명산장생사, 청명산홍법사는 나타나는데 향성산 백사의 기록은 없다. 그 러므로 원효보살과 의상대덕이 머물렀던 백사는 이미 신라 말기에 사라진 것으로 판단한다. 무슨 까닭일까? 원효는 이단으로 지탄받는 파계승이었다. 요석공주와 결혼한 원 21)南陽地方圖, 동여비고, 1682년, 33×42cm, 양산 대성암 소장. 그림 13. 소조 불상 옆면-앞면 그림 15. 백곡리사지 출토 명문기와 白寺下家 그림 16. 조선시대 驛의 모습 그림 14. 소조 불상 조선 전기 신도시 무장읍치(茂長邑治)의 입지와 경관구성 292 293 향토사연구 제31집 효는 아들 설총을 낳고 스스로 소성거사를 칭명하였다. 그런 까닭으로 작은 규모 의 백사는 크게 대접받지 못하였을 것이다. 다른 생각도 있다. 신라시대 당은군과 당은포는 대당외교의 거점이었다. 그러나 고려시대 대송외교의 거점은 벽란도와 예성항이었다. 대외 항로에서 벗어나면서 수입수출의 물동량도 떨어졌고 사신과 유학생도 오지 않았다. 당은군과 당은포에 딸린 역이나 마을도 쇠퇴하였다. 白寺址는 향성산(여치산) 아래 마도면 백곡리 산 104번지에서 발견되었다. 출토 된 소조 佛頭, 명문 기와 ‘白寺’, ‘白寺下家’에 근거하여 백곡리사지(白谷里寺址)22) 로 명명되었다. 우리말 지명으로 부르면 백곡리사지는 백골리절터다. 우연의 일 치겠지만 백사지(白寺址)는 백곡리 산 104번지에 위치한다. 백곡리사지는 전체적으로 3단의 단차에 장방형의 사역이 조성된 것으로 보인다. 남쪽 부분에 건축 부재로 보이는 석재와 다량의 기와가 쌓여 있는데, 이 중에는 완 형의 토수기와도 섞여 있다. 기와 외에도 다량의 토기편이 보이는데, 연질과 경질 이 섞여 있다. 연질토기는 외면에 꺾은 파상문이 시문된 직구호류의 동체편과 세 격자 타날문이 시문된 호의 구연부편 등 주로 통일신라기 토기들이 많다. 이외에 도 다량의 백제토기편이 채집되고 있다. 채집된 유물들이 대부분 고급품임을 감안 할 때 상당히 중요한 사역이었던 것으 로 보인다. 그러나 관련 문헌기록이 전무한 실정이다. 토지 소유주의 경작과정에 서 백사지의 일부 유구가 훼손되었다.
23) 그런데 외자 이름의 白寺가 특이하다. 무슨 의미일까? 그 하나는 백 개의 골짜기 마을이라는 것이다. 화성시사(華城市史)24)는 白谷里의 지명 유래를 이렇게 기록한다. ‘백곡리는 백(百)에서 하나(一)모자라는 99개 골짜 기라는 것이다. 그래서 百谷里가 아니라 白谷里가 되었다는 것이다.’ 그런데 이 지 명유래는 사실이 아니다. 백곡리에 99개나 되는 골짜기가 존재하지 않는다. 22) 『文化遺蹟分布地圖』 화성시, 2006. 23) 「화성 백사지의 조사성과와 성격 검토」, 황보 경, 세종대박물관 학예연구사. 24)화성시사(華城市史), 화성시사편찬위원회, 2005. 그 둘은 白寺가 백제의 사찰이었을 가능성이다. 백곡리사지 부근의 백제고분군 에서 백제 시대의 토기가 다량 발견된 것에 근거한다. 그러나 백곡리사지에서 출 토된 유물은 대부분 신라시대의 것으로 밝혀졌다.25) 또한 白寺와 百濟의 첫 글자 는 엄연히 다르다. 그 셋은 白谷里는 백골리(白骨里)라는 것이다. 栗谷을 밤골이라 하듯 白谷을 우 리말로 읽으면 백골(白骨)이 된다. 백골이 많이 묻힌 골짜기여서 그렇게 부른다는 해석이다. 이를 근거하는 것은 주변에 위치하는 백제고분군이다. 가장 큰 것은 백 곡리 제2호 고분으로 백곡리사지 의 여치산에 위치한다. 고분의 크기는 가로 1.8m×세로 3.8m의 석실 무덤이다. 苦雨를 만난 원효와 의상이 몸을 피한 土龕으 로 보아 무리가 없다.26) 필자는 위 지명 유래에서 세 번째 지명유래에 동의한다. 원효가 해골 무덤에서 깨우침을 얻었다는 唐新羅國義湘傳의 기록과 일맥상통하기 때문이다. 또 당항성( 党項城)이 백제, 고구려, 신라의 대당외교의 전진기지이었음을 근거로 든다. 또 당항성을 두고 세 나라가 뺏고 뺏기는 전투를 벌인 전장이었음에 근거한다. 그렇다고 하더라도 절의 이름을 白骨寺로 할 수는 없지 않은가? 이곳이 원효가 큰 깨달음을 얻은 장소라 하여도 백골사는 너무하지 않은가? 그래서 절을 세운 어 떤 승려가 절의 이름을 白寺로 칭명하였다고 판단한다. 백사를 세운 이는 원효나 의상일 수도 있고, 원효를 흠모하는 후대의 승려일 수도 있다. 2. 白寺下家의 정체 백곡리사지(白谷里寺址)에서 출토된 명문기와 ‘白寺下家’의 정체는 무엇일까? 白 寺에 딸려있던 요사채를 의미할까? 아니면 기와를 만든 마을의 이름을 의미할까? 두 가지 의견 중에 필자는 후자로 본다. 그렇게 추정하는 근거는 백곡리사지 아 랫마을 향기실에 있다. 토성 성안이(城內城) 마을 향기실에서 오래된 기와가 대량 25)황보 경, 위의 논문. 26)정찬모, 화성지역학연구소장. 조선 전기 신도시 무장읍치(茂長邑治)의 입지와 경관구성 294 295 향토사연구 제31집 으로 출토된 것이다. 놋쇠 그릇을 닦아 쓰던 시절, 이 지역 주민들은 성안이에서 깨진 기와편을 주워다 유기를 닦았다. 기와편이 많았다는 것은 성안이 마을이 곧 기와공장이었을 가능성이다. 백사하가에서 만든 기와는 白寺 뿐만 아니라, 唐城 건물의 축조에도 쓰였을 것이 다. 이웃한 唐城에서 ‘唐’, ‘宅’ 등의 명문기와가 출토된 것에 근거한다. E. 원랑선사탑비의 樴山寓□□□□ 圓郞禪師塔碑는 원랑이 원효의 성도처인 樴山寓□□□□에서 3개월간 수도하 였다고 기록하였다. 풍우에 지워진 비문의 장소 樴山寓□□□□에 담길 글자를 ‘ 白寺下家’로 추정한다. 향성산 아래의 향기실이 곧 백사하가이었을 것이다. 향기실(백사하가)은 백곡리사지에서 불과 400여m 떨어진 곳이다. 기와를 생산 하는 공장인 동시에 여행객의 숙소가 있었을 사하촌(寺下村)으로 판단한다. 東輿地圖 南陽地方圖27)는 신라시대의 사찰 비봉산 봉림사(鳳林寺), 고려시대의 사찰 청명산 홍법사(弘法寺), 절명산 장생사(長生寺)를 나란히 표기한다. 그런데 도 백제고분군이나 신라 유물이 출토된 鄕城山, 白寺의 표시는 아예 없다. 원효와 의상, 또는 원효를 흠모하던 어떤 승려가 건립하였을 백사는 이미 신라 후기에 폐 사된 것이 틀림없다. 신라, 고려시대 승려들의 시각에서 원효는 한낱 파계승에 지 나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명문기와 白寺, 白寺下家, 소조 佛頭가 출토되어 27)南陽地方圖, 앞의 지도. 그림 17. 백곡리사지, 남쪽에서 본 모습 그림 18. 백곡리사지, 북쪽에서 본 모습 이곳에 白寺가 있었음이 증명되었다. F. 원효가 건립한 두 개의 神勒寺 향성산 고분에서 오도송을 부른 원효는 두 개의 신륵사를 세운다. 봉미산 신륵사 와 월악산 신륵사다. 남한강변에 세운 두 개의 神勒寺는 두 개의 시사점을 준다. 성도한 원효는 자신을 神勒으로 여겼다는 것과 원효가 당항성에 오고 간 길은 남 한강 수로라는 점이다. 1. 봉미산 신륵사(神勒寺)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은 봉미산 신륵사의 연혁을 다음과 같이 기록한다. b-1. 대한불교조계종 제2교구 본사인 용주사(龍珠寺)의 말사이다. 신라 진 평왕 때 원효(元曉)가 창건하였다고 하나 정확한 것은 알 수 없다. 절 이름을 ‘신륵’이라고 한 데는 미륵(彌勒) 또는 왕사 나옹(懶翁)이 신기한 굴레로 용 마(龍馬)를 막았다는 전설에 의한 것이라는 설이 있다. 자료 b-1에서 봉미산 신륵사(神勒寺)는 원효가 창건한 사찰로 알려진다. 경기도 여주시 북내면 천송리 봉미산(鳳尾山)에 있는 절이다. 봉미산 신륵사가 번창한 것은 고려 승려 나옹선사의 행적과 관련한다. 나옹은 1376년(우왕 2), 문수회(文殊會)에서 강론하여 법명을 크게 떨쳤다. 그해 왕명에 의 해 밀성(密城:밀양) 영원사(瑩源寺)로 가던 중 신륵사(神勒寺)에 이르러 입적했다. 양주 회암사에 머물던 나옹은 한성 송파나루-양평 이포나루-여주 신륵사로 이 동하였다. 이 코스는 원효와 의상이 나옹에 앞서 남한강 수로를 따랐을 개연성이 다. 벼슬을 내놓고 안동으로 돌아가던 퇴계 이황도 이용한 뱃길이다. 조선 전기 신도시 무장읍치(茂長邑治)의 입지와 경관구성 296 297 향토사연구 제31집 2. 월악산 신륵사(神勒寺)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은 월악산 신륵사(神勒寺)의 연혁을 다음과 같이 기록한다. b-2. 대한불교조계종 제5교구 본사인 법주사(法住寺)의 말사이다. 582년( 진평왕 4)에 아도(阿度)가 창건하였다고 하나 연대의 신빙성은 없다. 그 뒤 문무왕 때에 원효(元曉)가 중창하였고, 조선 초기에는 무학(無學)이 중창하 였으며, 명종 때 사명당(四溟堂)이 중창하였다. 자료 b-2에서 월악산신륵사 또한 원효가 중창한 사찰로 알려진다. 충청북도 제천 시 덕산면 월악리 803-5번지 월악산 영봉 동쪽에 위치한다. 충청북도 유형문화재 제132호로 지정된 극락전과 보물 1296호로 지정된 제천 신륵사 3층 석탑이 있다. 월악산 신륵사는 제천시 한수면의 남한강 황강나루에 인접한다. 그러므로 원효 와 의상이 죽령이나 계립령을 넘어 남한강 수로를 따라 당항성에 왔을 가능성이 크다. 그 길은 신라 왕성 금성-계립령(죽령)-황강나루-신륵사-이포나루-당항성 에 이르는 코스였을 것으로 판단한다. G. 백곡리 百濟古墳群의 석실 무덤 1. 화성 백곡리 고분군 Ⅰ 경기도 화성시 마도면 백곡리 산91 일원에 위치한다. 향기실 마을 뒷산인 안산( 그림 19. 봉미산 신륵사 그림 20. 월악산 신륵사 案山,94m)· 망산(望山,95m)28) 자락이다. 한성 백제기의 대형고분군이다. 향기실 마을 주민의 신고에 따라 김원룡 교수가 현지답사를 실시하였고 그 내용을 학계 에 소개하면서 알려지게 되었다.29) 이후 한국정신문화연구원 강인구 교수 등에 의해 1993년 9월 안산 일대에 분포 하는 고분 중 4기에 대한 발굴조사가 이루어졌다. 이 조사를 통해 봉토가 온전한 고분이 망산까지 이어지며 분포하는 것으로 확인되었고 또 안산에서 동쪽 능선을 따라 계속 석곽묘와 고분의 흔적이 잔존하고 있음이 확인되었다. 따라서 백곡리 향기실 마을 동편의 야산 일대에는 한성 백제기의 대형고분군이 분포한다고 볼 수 있다.30) 2. 화성 백곡리 고분군 Ⅱ 경기도 화성시 마도면 백곡리 산99 일원에 위치한다. 백곡리 유물 산포지가 위 치한 능선을 따라 동북쪽의 여치산(輿峙山,102.2m)31) 정상부 일대다. 빽빽한 수 목들 사이에서 흩어진 고분 석재와 내부가 훤히 드러난 석곽묘 등을 볼 수 있다. 또, 파괴된 석곽 주변에서 1점의 경질 토기편을 채집할 수 있었다. 잔존부위가 작아 정확한 판단은 어려우나 일단 거친 물레 흔이 내면에 남아있는 목이 좁은 병 형 토기로 고려시대의 것으로 판단된다.32) 3. 화성 백곡리 고분군 Ⅲ 경기도 화성시 마도면 백곡리 산94-1 일원에 위치한다. 이 고분군은 백곡리 향 기실 마을 동편의 해발 123m 야산(여치산) 정상부로 올라가는 능선에 위치한다. 비교적 경사가 급하고 관목이 우거져 있어 시야 확보가 어렵지만, 간간이 흩어져 28)안산·망산, map,ngii.go.kr, 국토정보플랫폼, 국토정보맵, 1970년대. 29) 「화성군 마도면 백곡리 백제고분과 토기류」, 김원룡, 1971. 30) 「화성백곡리 고분」, 『백제연구2집』, 충남대학교백제연구소, 한국정신문화연구원, 1994. 31)여치산(輿峙山,102.2m), 앞의 지도. 32)위의 논문. 조선 전기 신도시 무장읍치(茂長邑治)의 입지와 경관구성 298 299 향토사연구 제31집 있는 고분 석재들과 석곽묘의 측벽이 노출된 것을 볼 수 있다. 주변에서 채집된 유 물도 없고 고분의 구조 자체도 파악이 어려우므로 시기 판단은 어렵지만 대체로 인근의 고분군들과 유사한 것으로 여겨진다.33) 4. 화성 백곡리 유적 경기도 화성시 마도면 백곡리 산103 일원에 위치한다. 육일리에서 백곡리로 넘 어가는 고갯마루 우측 능선 일대에 위치한다. 구릉지의 북쪽은 이미 터파기 공사 로 인해 오래전에 훼멸되었다. 소규모 공장건립이 계획되어 한국문화재보호재단 에서 지표조사와 시굴, 발굴조사를 실시하였다. 조사가 진행된 것은 이 유적이 위치한 능선으로 남양장성이 지나간다고 경기도 박물관에서 간행한 문화유적 분포지도에 표기되어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조사결 과 인위적인 축성의 흔적은 전혀 발견되지 않았다. 조사 과정에서 의외로 백제의 저장구덩이와 고려시대로 추정되는 기와가마, 성격이 부정확한 건물지 등이 조사 되었다. 인접한 곳에 이번 조사를 통해 새로 확인된 백곡리사지가 위치하고 있어 관련성이 있는 것으로 여겨진다.34) 33)위의 논문. 34) 「화성백곡리 근린생활시설부지 문화유적 시굴조사 지도위원회의 자료」, 한국문화재보호재단, 2005. 그림 21. 백곡리고분 8호분 그림 22. 백곡리 출토 유물 H. 苦雨와 白骨觀에 대한 필자의 소견 1. 백골관(白骨觀) 시신이 썩어서 백골이 되는 모습을 관(觀)하는 수행 방법이다. 다른 말로 고골관(枯 骨觀)이라고도 한다. 신라의 자장율사가 산에 들어가 닦은 수행법으로 유명하다. 자장(慈藏)35)은 원효보다 27살 위의 승려로 신라의 대국통(大國統)이었다. 당에 유학하고 돌아올 때 대장경 한 질과 진신사리 등을 가져온 왕족 승려였다. 선덕여 왕이 자장을 대국통에 임명하여 분황사와 황룡사의 주지로 머물게 하였다. 자장 율사가 분황사를 떠나자 원효가 분황사 주지의 임무를 이어받았다. 자장과 원효는 팔공산수도사36)를 함께 건립하고 수도한 도반이었다. 그러므로 한 세대 아래인 원효도 황룡사에서 강론한 자장율사의 보살계본을 들었을 것이 다. 또 자장율사가 수행한 백골관도 익히 알고 있었을 것이 분명하다. 늦은 자식으로 태어난 자장율사는 어려서 부모상을 당하였다. 원효 또한 자신을 낳은 어머니가 산후 후유증으로 죽었다. 두 승려의 출가 동기의 하나로 본다. 35)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자장의 성은 김씨, 속명은 선종랑(善宗郞)으로 신라 제일의 귀족인 진골 출신 이며 소판(蘇判) 벼슬을 지낸 무림(茂林)의 아들이다. 36)팔공산수도사, 647년(진덕왕 1), 자장(慈藏, 590∼658)과 원효(元曉, 617∼686) 두 스님이 함께 금 당사(金堂寺)라는 이름으로 창건했다고 전한다. 그림 23. 분황사 그림 24. 팔공산수도사 조선 전기 신도시 무장읍치(茂長邑治)의 입지와 경관구성 300 301 향토사연구 제31집 2. 무열왕 김춘추의 죽음에 대한 의견 삼국통일의 주역이었던 신라 무열왕 김춘추는 661년 6월에 죽었다. 대당 유학을 떠난 원효와 의상이 당항성에 머무를 때다. 삼국사기에 따르면 무열왕 김춘추는 백제 부흥군과 벌인 금마전투에서 전사한 것으로 추정된다. 그리고 원효가 대당 유학을 포기한 것도 어쩌면 무열왕의 죽음과 관련이 있다고 생각한다. 장인어른 의 죽음에 입당 유학을 포기하고 당주계 직산(樴山)의 고분에서 백골관을 수행한 것으로 판단한다. 삼국사기 신라본기는 무열왕37) 김춘추의 죽음을 다음과 같이 기 록한다. c-1. 6월에 大官寺의 우물물이 변하여 피가 되고 금마군(金馬郡:익산)의 땅 에서 피가 흘러 너비가 5步나 되더니 왕이 돌아갔다. 시(諡:시호)를 무열(武 烈)이라 하고 영경사(永敬寺) 북쪽에 장사하였다. 묘호(廟號)를 올려 태종(太 宗)이라 하였다. 당의 고종이 부음을 듣고 낙성문에서 애도식을 거행하였다. 사료 c-1은 신라군과 백제 부흥군이 벌인 금마전투의 기록이다. 무열왕 김춘추 가 금마군의 대관사에서 전사하였음을 시사하는 대목이다. 금마군에서 일어난 백 제 부흥군과 벌인 전투였다. 金馬郡에는 백제 무왕이 세운 미륵사와 대관사(왕궁사)가 있다. 백제 무왕이 창 건한 사찰로 ‘관궁사(官宮寺)’, ‘궁사(宮寺)’, ‘관사(官寺)’라는 명문 기와가 출토되 었다. 금마군의 대관사는 海路로 왜에 원군을 요청할 수 있는 백제의 또 다른 궁성 이었다. 661년 4월 10일, 신라군은 백제 부흥군에 연전연패하고 있었다. 대총관 소정방(蘇 定方)이 소수의 병력만을 남기고 13만 당군을 철수한 때문이었다. 소정방이 서둘러 당으로 돌아간 까닭은 무엇일까? 그것은 고구려군의 발 빠른 기병 공격을 우려한 때 37)무열왕, 삼국사기(상), 김부식지음 이병도역주, 을유문화사, p.134. 문이었다. 삼국사기는 빈골양(賓骨壤,고부)38) 전투를 다음과 같이 기록한다. c-2. 661년 4월 19일, (부득이) 군사를 돌이켜 대당(大幢)과 서당(誓幢)은 먼저 보내고 하주(下州) 군사가 뒤에 떨어져 빈골양(賓骨壤,고부)에 다다를 때 백제 군사를 만나 서로 싸우다가 패퇴하였다. 죽은 사람이 비록 적었으나 무기와 군수품을 매우 많이 잃었다. 왕이 大軍의 패보를 듣고 크게 놀라 장군 김순, 진흥, 천존, 죽지를 보내 군 사를 증원케 하였는데, 대군(大軍)이 가소천(加召川,거창 加川)에서 퇴각한 다는 소식을 듣고 돌아왔다. 왕은 여러 장군의 패적(敗績)을 논하고 차등하 여 벌을 주었다. 사료 c-2는 무열왕 김춘추가 사망하기 두 달 전의 기록이다. 빈골양 전투에서 신 라군은 백제 부흥군에 대패하였다. 죽은 사람이 적었으나 무기와 군수품을 매우 많이 빼앗겼다고 기록한다. 大軍의 패보를 듣고 크게 놀란 무열왕이 장군 김순, 진흥, 천존, 죽지를 보내 군사 를 증원하였다. 그런데도 신라군은 패하여 돌아왔다. 무열왕이 대노하여 전쟁에 패한 장수들에게 벌을 내려 군기를 다잡았다. 661년 5월 9일, 고구려와 말갈이 신라를 협공하였다. 백제 부흥군을 돕는 고구 려와 말갈군은 신라의 술천성(述川城)과 북한산성(北漢山城)을 공격하였다. 삼국 사기는 술천성(述川城)과 북한산성(北漢山城)39)전투를 다음과 같이 기록한다. c-3. 661년 5월 9일, 고구려 장군 뇌음신(惱音信)이 말갈장군 생해(生諧)와 군(軍)을 연합하여 술천성(述川城,여주)을 내공(來攻)하였다. 이기지 못하자 북한산성(北漢山城)을 공격하였다. 포차(抛車)를 벌여 놓고 돌을 날리니, 그 것에 맞는 비옥(陴屋,성가퀴)은 곧 무너졌다. 城主 大舍 동타천(冬陀川)이 사람을 시켜 마름쇠를 성 밖에 던져 펴 놓으니 38)빈골양(賓骨壤,고부), 위의 책, 133쪽 39)북한산성(北漢山城), 위의 책, 133쪽 조선 전기 신도시 무장읍치(茂長邑治)의 입지와 경관구성 302 303 향토사연구 제31집 인마가 다니지 못하였다. 또 안양사의 창고를 헐어 그 재목을 실어다가 성의 무너진 곳마다 누로(樓櫓)를 만들어 굵은 밧줄로 망을 얽고 우마의 가죽이나 솜옷 등속을 걸어 매고 그 안에다 노포(弩砲)를 준비하여 지켰다. 이때 성안에는 단지 남녀 2,800명이 있었는데 성주 동타천이 어린이와 약 자들을 격려하여 강대한 적과 대적하기 20여 일에 이르렀다. 양식이 다하고 힘은 지쳤으므로 정성껏 하늘에 빌었더니 홀연히 큰 별이 적의 진영에 떨어 지고 또 뇌우가 진동하니 적이 의심을 내고 두려워하여 드디어 에움을 풀고 물러갔다. 왕은 동타천을 가상히 여겨 대나마(大奈麻)의 자리(位)에 올렸다. 압독주(押督州:경산)를 대야(大耶:합천)에 옮기고 아찬 종정(宗貞)을 도독( 都督)으로 삼았다. 사료 c-3은 고구려가 백제 부흥군을 도와 신라를 협공한 기사이다. 고구려 장군 뇌음신과 말갈장군 생해의 술천성과 북한산성의 공격이었다. 신라 대군이 백제 부흥군에게 대패한 지 불과 18일 만의 일이었다. 삼국사기에 등장하는 술천성은 지금의 경기도 여주시 금사면 일대다. 여주시 대신면 천서리에 신라 산성 파사산 성(婆娑山城)이 위치한다. 빈골양 전투의 패배에 이은 고구려와 백제 부흥군의 협공에 무열왕 김춘추는 크 게 당황하였다. 북한산성의 城主 동타천(冬陀川)을 도울 뾰족한 방도가 없었다. 북한산성 전투에 신라군을 투입한다면 백제 부흥군은 신라 왕성을 공격하여 올 것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무열왕 김춘추는 북한산성 지원을 포기하였다. 그런데 도 성주 동타천은 어렵사리 북한산성을 지켜냈다. 이에 무열왕은 성주 동타천을 칭찬하여 대나마(大奈麻)의 자리(位)에 올렸다. 대나마는 진골과 5두품 이상이 받을 수 있던 관위였다. 신라의 골품제에서 5두 품 이하는 대나마 이상의 관위를 받을 수 없었다. 무열왕이 성주 동타천의 관위를 10등급에서 5등급으로 올린 것은 매우 특별한 조치였다. 빈골양 패전 직후, 신라 무열왕은 경산에 두었던 압독주의 치소를 대야성으로 옮 겼다. 무열왕이 경산에 있던 압독주를 대야성(합천)로 전진 배치한 것은 백제 금마 군을 공취하기 위한 사전 포석으로 보인다. 그리고 한 달 후인 6월 □일, 신라 무열 왕이 죽었다. 백제 금마군의 전투를 직접 독전하다가 전사하였던 것으로 판단한다. 삼국사기는 빈골양 전투(4월 19일)와 북한산성 전투(5월 9일)의 날짜까지 세세 히 기록한다. 그런데 무열왕 김춘추가 죽은 날짜는 6월이라고만 기록한다. 무슨 까닭이 있는 것일까? 삼국사기를 쓴 신라 왕족 김부식이 빼버린 것은 아닐까? 백 제 부흥군과 있었던 금마군 전투의 패전을 부끄러이 여겨 은폐한 의도로 보인다. 김춘추의 묘호는 태종, 시호는 무열왕이다. 무열(武烈)이라는 시호는 그가 삼국 통일의 피 흘리는 전장에서 일생을 보낸 인물임을 가리킨다. 백제 대관사의 우물물이 피가 되고, 금마군의 땅에 너비가 5步나 되는 피가 흘렀 다는 수식은 매우 처절한 전투이었음을 의미한다. 신라군과 백제 부흥군이 벌인 금마군 전투에서 무열왕이 전사하였을 가능성을 주장하는 근거다. 3. 苦雨에 따른 白骨觀의 수행 唐新羅國義湘傳은 원효가 당주계 직산의 고분에서 성도하였다고 기록한다. 고우(苦雨)를 피하여 토감(土龕)에 들었고, 아침에 이르러 해골이 있는 고분(古 墳)인 줄 알았다. 다음 날도 苦雨가 그치지 않아 고분에서 또 하룻밤을 묵었다. 土龕인 줄 알았던 첫날밤에는 잠자리가 평안했다. 해골 있는 古墳인 줄 알고 난 다음 날 밤에는 귀신에 시달렸다. 그래서 일체유심조의 큰 깨달음을 얻었고 당나 라 유학을 스스로 접었다. 원효는 고분에서 ‘心生則種種法生 心滅則龕墳不二’의 오도송(悟道頌)을 부른다. ‘마음이 일어나므로 갖가지 현상이 일어나고 마음이 사라지니 토감과 고분이 둘 그림 25. 대관사지(왕궁사지) 5층탑 그림 26. 대관사지(왕궁사지) 출토 기와 조선 전기 신도시 무장읍치(茂長邑治)의 입지와 경관구성 304 305 향토사연구 제31집 이 아니다’는 깨달음이다. 진리는 결코 밖에서 찾을 것이 아니라 나 자신에게서 찾 아야 한다는 것이다. 이 기록은 원효가 苦雨 때문에 해골 무덤에서 백골관을 수행하였다는 것이다. 여 기서 苦雨는 장인어른 김춘추의 갑작스런 죽음에 쏟아지는 피눈물로 볼 수 있다. 부음을 받기 전의 어제는 土龕에서 편안한 잠을 잤다. 그러나 무열왕이 죽었다는 부고를 받은 오늘은 도저히 잠을 이룰 수 없었다는 것이다. 그때 원효는 하늘이 무 너지는 苦雨를 맛보았을 것이다. 이 대목에서 필자는 비틀스의 노래 를 떠올린다. 20세기, 전 세계 젊 은이들의 가슴을 흔들어 놓았던 노래 ‘어제’의 가사다. 사랑하는 이와 만나던 어 제는 행복했다. 그러나 이별 통보를 받은 오늘은 처절했다. 피눈물이 앞을 가리는 것이다. 羅·濟전쟁의 시대적 상황에서 원효는 현실을 직시하였을 것이다. 삼한통일이라 는 험난한 여정에 오른 김춘추와 김유신의 앞날을 걱정했을 것이다. 대야성에서 비롯된 복수혈전에 백제와 신라의 싸울아비들이 수없이 죽어 나갔다. 그런데 그 과정의 초입에서 첫 단추가 떨어져 버렸다. 요석공주의 첫 남편이었던 김흠운은 물론 신라왕 김춘추도 전장에서 사라지는 형편이었다. 피가 피를 부르는 전쟁은 점차 더 거세어졌다. 김춘추와 김유신이 시작한 삼한통일 은 허업일 수밖에 없었다. 이런 사태를 외면할 수 없었던 원효는 고민에 고심을 거듭 하였을 것이다. 그래서 스스로 무덤에 들어가 백골관을 수행하였을 것이다. 원효의 입장에서 苦雨에 따른 龕墓不二의 깨달음을 필자의 시각으로 쓰면 다음과 같다. 원효와 의상은 본국(本國) 해문(海門) 당주계(唐州界) 직산(樴山)에 이르러 큰 배를 구해 창파를 건너려고 하였다. 여행의 중도에서 원효는 뜻하지 않은 고우(苦雨)를 만났다. 장인어른 무열왕 김춘추가 금마의 전투에서 전사하였 다는 부고였다. 피눈물이 눈 앞을 가렸다. 석가의 종족을 자처하는 무열왕이 어찌 한순간 에 비명횡사한다는 말인가? 원효는 토감(土龕)에 들어가 두려운 마음을 진 정코자 기도하였다. 그러나 두려운 마음이 조금도 진정되지 않았다. 원효의 기도는 질척해서 한 발자국도 앞으로 나아갈 수 없었다. 피눈물만 자꾸 흘러 내렸다. 원효는 또 하루를 고분(古墳)에서 기도했다. 밤이 깊기도 전에 갑자기 귀신 이 나타나 마음을 어지럽게 했다. 그때 원효가 탄식하며 깨달음을 노래했다. “어제는 토감에서 편안하더니, 오늘은 고분에서 근심이 많구나! 알겠다. 마음이 생기면 갖가지 것들이 생겨나고, 마음이 사라지면 토감과 고분이 둘 이 아니라는 것을, 세상의 모든 일은 오직 마음일 뿐이요, 모든 존재는 오직 인식일 뿐이다. 마음밖에 法이 없으니 어찌 따로 구하랴.” 나는 당나라에 들어가지 않겠다. 당나라에 가서 설법한들 무슨 소용이 있 으랴! 서라벌로 돌아가 무열왕과 나제전투에서 희생된 군사들의 영면을 기 도하겠다. 삼국사기에 무열왕이 죽은 해는 661년 6월이었다. 58세의 나이였다. 당주계에 서 무열왕의 부음을 들었을 때, 원효는 다시 생각하였을 것이다. 당에 건너가 황족 들과 고승들을 모아 놓고 멋지게 강설하려던 자신의 모습을 되돌아보았을 것이 다. 불교가 황족과 귀족을 위한 도구가 되어서는 안 된다고 주장을 펴는 으쓱한 자 신을 그려보았을 것이다. 그러다가 苦雨로 인하여 ‘龕墓不二’의 깨우침을 얻고 성 도하여 당나라에 가기를 그만두었을 것이다. 이후, 원효는 포교와 저술에 전념하는 것으로 생애를 마감하였다. 경상북도 경주 시 문무대왕면 기림로에 위치한 함월산기림사(祇林寺)40)와 골굴사(穴寺)41)였다. 승려의 길로 들어선 소년 원효가 천축국에서 건너온 光有聖人으로부터 불경을 배 우던 사찰이었다. 원효가 당대 그 어떤 승려보다 불경의 논소(論疏)에 뛰어난 것 은 일찍이 광유성인으로부터 범어(梵語)를 공부한 결과였다. 구랍 70세였다. 40)기림사, 643년(선덕여왕 12) 천축국(天竺國)의 승려 광유(光有)가 창건하여 임정사(林井寺)라 부르던 것을, 뒤에 원효(元曉)가 중창하여 머물면서 기림사로 개칭하였다. 기림사란 석가모니의 생존 때에 세워 졌던 인도의 기원정사(祈園精舍)를 뜻한다. 41)골굴사(혈사), 약 1,500여 년 전 인도에서 온 광유 선인 일행이 경주 함월산에 정착하면서 골굴사와 기림 사를 창건했다고 한다. 이 중에서 골굴사는 광유스님 일행이 인도의 석굴 사원을 본떠서 석굴사원 형태로 조성한 국내에서 가장 오랜 된 석굴사원이다. 조선 전기 신도시 무장읍치(茂長邑治)의 입지와 경관구성 306 307 향토사연구 제31집 Ⅳ. 맺음말 A. 결론 《남양지도》에 따르면 신라 唐州界 海門의 위치는 분명하다. 경기도 화성시 남양 반도가 당주계이고 마도면 해문리의 성목쟁이가 海門이다. 《월광사원랑선사대보선광탑비(月光寺圓朗禪師大寶禪光塔碑)》는 승려 원랑이 원효의 성도처인 직산(樴山)의 □□□□에서 머물렀다고 기록하였다. 이 기록에 등장하는 樴山은 지금의 화성시 마도면 백곡리의 여치산(輿峙山)이다. 직산은 말 뚝산이고 여치산은 수레산의 의미를 가진다. 시대에 따라 신라의 직산은 고려의 향성산, 조선의 여치산으로 바뀌어 불렸다. 원효가 성도한 직산을 찾아간 원랑은 백사지 아래 白寺下家에서 3개월간 수도하였다. 『송고승전(宋高僧傳)』 「당신라국의상전(唐新羅國義湘傳)」은 원효가 본국(本國) 해문(海門) 당주계(唐州界)의 토감(土龕)에서 깨달음을 얻었다고 기록하였다. 이 기록의 本國은 신라이고, 海門은 화성시 마도면 해문리의 성목쟁이고, 唐州界는 경기도 화성시 남양반도이며, 土龕은 마도면 백곡리의 百濟古墳이다. 그림 27. 골굴사(穴寺) 그림 28. 기림사(祇林寺) 《보원사법인국사보승탑비(普願寺法印國師寶乘塔碑)》는 승려 탄문(坦文)이 원 효보살과 의상대덕이 머물렀던 향성산(香城山) 절터에서 수년간 수도하였다고 기 록하였다. 이 기록의 香城山은 지금의 마도면 백곡리의 여치산이다. 여치산 아래 에 향기실이 있어 그 위치를 분명히 한다. 원효가 세운 神勒寺는 두 곳이다. 경기도 여주시 남한강변에 세운 봉미산신륵사 와 충청북도 제천시 한수면 남한강변에 세운 월악산신륵사였다. 圓朗禪師塔碑의 기록에 따르면 신라인들은 성도한 원효를 신승(神僧)이라 불렀고, 一切唯心造의 깨달음을 얻은 원효는 자신을 신륵(神勒)으로 여긴 듯하다. 남한강변에 신륵사를 세운 것에 근거하면 원효와 의상이 당주계에 오고 간 길은 신라의 왕성 금성-계립령(죽령)-남한강-당항성을 잇는 당항성로(党項城路)였다. 원랑선사탑비, 당신라국의상전, 법인국사탑비, 남양지방도에 따르면 원효가 깨 달음을 얻은 장소는 분명해진다. 그 장소는 新羅 海門 唐州界 鄕城山의 土龕이고, 그 장소는 경기도 화성시 마도면 백곡리(白谷里)의 백제 古墳이다. 율곡(栗谷)의 그림 29. 원효성사의 진영 조선 전기 신도시 무장읍치(茂長邑治)의 입지와 경관구성 308 309 향토사연구 제31집 우리말 이름이 ‘밤골’이듯 백곡(白谷)의 우리말 이름은 ‘백골’이다. 그런데도 원효의 성도처인 백곡리의 鄕城山 白寺址는 제대로 알려지지 않았다. 왜일까? 원효를 파계승으로 이단시한 신라와 고려 승려들의 질시였을 것이다. 또 불교를 철저히 지워버린 유생들의 저주 때문이었을 것이다. 그래서 원효가 머물 렀던 흔적이 철저히 파괴되었을 것으로 판단한다. 그러나 白谷里寺址에서 출토된 신라시대의 소조 佛頭와 白寺, 白寺下家의 명문기와, 그리고 향성산 백제 고분에 의해서 원효의 성도처는 분명하게 밝혀진다. B. 제언 경기도 및 화성시, 경상북도 및 경산시 경주시에 바란다. 하나, 海門을 세워주기 바란다. 그 장소는 경기도 화성시 마도면 청원리 성목쟁 이다. 그 형태는 사찰의 일주문 형태가 좋을 것이다. 海門은 661년 6월, 원효와 의 상이 지난 길이며 백제, 고구려, 신라의 대당외교의 관문이었다. 둘, 구화역(仇火驛,갯벌역)을 복원하기 바란다. 그 장소는 경기도 화성시 마도면 해문리 역골이다. 驛의 모습은 정조대왕 대의 화산릉행차도에 실린 자료를 참고 하면 가능한 일이다. 셋, 향성산 白寺를 복원하기 바란다. 그 장소는 경기도 화성시 마도면 백곡리 산 104번지다. 그 모습은 「백곡리 유적(한국문화재보호재단 2008)」과 「화성 백사지 의 조사성과와 성격 검토, 2018」에 근거하면 될 것이다. 이곳에 백사를 복원하고 백제 고분 모형을 세워 원효의 사상을 알리는 교육의 장 으로 조성할 것을 희망한다. 참고문헌 · 1. 《월광사원랑선사대보선광탑비문(月光寺圓朗禪師大寶禪光塔碑文)》,『譯註韓國古代金石文』Ⅲ 국학연구원,1992. · 2. 《보원사법인국사보승탑비문(普願寺法印國師寶乘塔碑文)》,한국금속전문-中世上,1984. · 3. 『화성군 마도면 백곡리 백제고분과 토기류』,김원룡,1971. · 4. 「화성백곡리 고분」,『백제연구2집』,충남대학교백제연구소,한국정신문화연구원,1994. · 5. 『화성시 마도면 백곡리 산 103번지 문화재 지표조사 보고서』,한국미술사연구소,2004. · 6. 『화성백곡리근린생활시설부지문화유적시굴조사지도위원회의자료』,한국문화재보호재단,2005. · 7. 『화성시사』,화성시사편찬위원회,2005. · 8. 『화성시의 역사와 문화유적』,토지박물관,2006. · 9. 『시화호의 역사와 문화』,한신대학교박물관,2006, · 10. 『탄도~송산간도로확·포장공사예정구간문화유적1차발굴조사약보고서』,한국문화재보호재단,2004. · 11. 『당성지표조사보고서』,화성군,1993. · 12. 『당성 1차발굴조사보고서』,한양대학교박물관,1998. · 13. 『도서해안지역 종합학술조사 1』,경기도박물관,2000. · 14. 『白谷里寺址』,한국문화재보호재단 발굴자료,2008. · 15. 『제1회 화성불교문화유적 학술발표회』,화성문화원,한국불교문인협회,화성시,(사)한국불교 학회,2017. · 16. 『제2회 화성불교문화유적 학술발표회』,화성문화원,한국불교문인협회,화성시,(사)한국불교 학회,2018. · 17. 『제3회 화성불교문화유적 학술발표회』,화성문화원,한국불교문인협회,화성시,(사)한국불교 학회,2019. · 18. 『화성 당성과 고대 포구』,화성시,한양대학교문화재연구소,동아시아고고학연구소,2017. · 19. 「화성 백사지의 조사성과와 성격 검토」,황보 경,제12회 화성시 역사문화 학술세미나,화성시,2018. · 20. 『원효성사 대각처는 화성에 있다』,화성지역학연구소(http//cafe.daum 원효의 성도처 신라 海門 唐州界 鄕城山 토감 답사 Ⅰ. 머리말 Ⅱ. 신라 해문 당주계는 경기도 화성시 남양반도였다 A. 남양지도로 확인되는 海門과 唐州界 B. 당항성과 당항진 C. 당성과 당은포 Ⅲ. 원효의 성도처는 화성시 마도면 백곡리 토감이었다 A. 원효와 원랑의 수도처 樴山 B. 당신라국의상전의 본국 海門 唐州界 土龕 C. 원효와 탄문의 수도처 鄕城山 절터 D. 향성산 절터로 밝혀진 白谷里寺址 E. 白寺와 白寺下家의 정체 F. 원효가 건립한 두 개의 神勒寺 G. 백곡리 百濟古墳群의 석실 무덤 H. 苦雨와 白骨觀에 대한 필자의 소견 Ⅳ. 맺음말 조선 전기 신도시 무장읍치(茂長邑治)의 입지와 경관구성 270 271 향토사연구 제31집 기록하였다. 또 무덤에서 큰 깨달음을 얻은 원효를 神僧(신승)으로 표기하였다. 『송고승전(宋高僧傳)』 「당신라국의성전(唐新羅國義湘傳)」은 원효가 본국(本國) 해문(海門) 당주계(唐州界)의 토감(土龕)에서 깨달음을 얻었다고 기록하였다. 창 파를 건널 거함(巨艦)을 찾아다니던 도중에 苦雨(고우)를 만났고, 苦雨를 피하여 고분(古墳)에 들었다가 오도송을 불렀다고 기록하였다. 《보원사법인국사보승탑비(普願寺法印國師寶乘塔碑)》는 승려 탄문(坦文)이 원 효보살과 의상대덕이 머물렀던 鄕城山(향성산)의 寺地墟(절터)에서 수년간 수도 하였다고 기록하였다. 토감(고분)에서 일체유심조의 깨달음을 얻은 원효는 이후 두 개의 《신륵사(神勒 寺)》를 세운다. 경기도 여주시 남한강변에 세운 봉미산신륵사와 충청북도 제천시 한수면 남한강변에 세운 월악산신륵사였다. 《월광사원랑선사대보선광탑비》에 근거하면 신라인들은 원효를 神僧으로 불렀다. 《神勒寺》에 근거하면 깨달음을 얻은 원효는 자신을 神勒(신륵)으로 여긴 듯하다. ‘원랑선사탑비’, ‘당신라국의상전’, ‘법인국사탑비’에 따르면 원효가 깨달음을 얻은 장소는 분명해진다. 그 장소는 신라 海門 唐州界 樴山의 土龕이고, 고려 鄕城 山에 위치한 古墳이다. 그런데 최근에 원효의 성도처를 답사할 수 있는 자료가 확보되었다. 정신문화연 구원이 발표한 ‘화성백곡리고분 조사연구보고서’, 한국문화재보호재단이 발굴한 자료 ‘白谷里寺址’, 화성지역학연구소가 답사하고 펴낸 책자 ‘원효성사 대각처는 화성에 있다’ 등이다. 원효와 원랑이 수련한 토감은 화성시 마도면 백곡리 산 91번지에 위치한다. 이 곳에서 백제 고분 수십 기가 발굴되었다. 원효와 탄문이 수도한 백곡리사지(白谷 里寺址)는 마도면 백곡리 산 104번지에 위치한다. 이곳에서 신라시대의 명문기와 ‘白寺’, ‘白寺下家’와 ‘佛頭’가 발굴되었다. 화성지역학연구소 연구위원들은 매주 이 지역을 답사하여 책자로 발간하고 BTN 불교방송에 소개하였다. 그래서 원효의 성도처를 눈으로 확인할 수 있는 가 이드북이 되었다. 본 연구는 토감(고분)에서 一切唯心造의 깨달음을 얻은 元曉의 성도처를 재확인 하는데 그 목적을 두었다. Ⅱ. 신라 해문 당주계는 경기도 화성시 남양반도였다 A. 남양지도로 확인되는 海門 唐州界 『宋高僧傳』 「唐新羅國義湘傳」은 원효가 깨달음을 얻는 장소를 本國 海門 唐州 界로 기록하였다. 그 장소는 어디일까? 여기서 本國은 신라이고 海門은 화성시 마 도면 해문리이고 唐州界는 화성시에 딸린 남양반도(南陽半島)다. 아직도 경기도 화성시 마도면에는 신라 때의 지명 唐城과 海門이 그대로 존재한다. 당주(唐州)는 삼국시대의 당항성(党項城), 고구려의 당성군(唐城郡), 신라 경덕 왕(757년) 때의 당은군(唐恩郡)이다. 이어서 고려 충선왕(1310) 때 남양도호부( 南陽都護府), 조선 고종(1895년) 때 남양군(南陽郡), 2001년 3월 21일에 행정 개 편된 경기도 화성시 남양읍, 마도면, 송산면, 서신면과 그 부속도서가 唐州다. 조 선시대 수원군·안산군·광주군과 경계하는 남양군이 곧 唐州界다. 조선시대의 지 도 南陽1) 한 장으로 신라 海門 唐州界의 위치가 확실히 규명된다. 더이상 재론할 여지가 없다. 1) 南陽, 18세기 후반, 41×32cm, 정신문화연구원 소장. 그림 1. 海門 唐州界 조선 전기 신도시 무장읍치(茂長邑治)의 입지와 경관구성 272 273 향토사연구 제31집 B. 당항성(党項城)과 당항진(党項津) 삼국사기는 당항성(党項城)2)과 당항진(党項津)3)을 다음과 같이 기록한다. a-1. 선덕왕 11년 7월에 백제왕 의자(義慈)가 크게 군사를 일으켜 나라 서 쪽의 40여 城을 공격하여 빼앗아갔다. a-2. 8월에 또 (백제가) 고구려와 공모하여 당항성(党項城)을 빼앗아 당에 통하는 길을 끊으려 하므로, 왕이 사신을 보내어 당태종(唐太宗)에게 급함( 急難)을 알렸다. 또 백제 장군 윤충이 군사를 거느리고 와서 대야성을 쳐 함 락시켰다. 도독 이찬 품석(品釋)과 사지 죽죽, 용석 등이 전사하였다. a-3. 문무왕 8년 6월 12일, 웅진도안무대사(熊津道安撫大使) 유인궤가 唐 主의 칙지를 받들어 숙위인 사찬 김삼광(金三光:유신의 장자)과 함께 당항 진(党項津)에 도착하니, 왕이 각간 김인문으로 하여금 가서 大禮로써 영접 하게 하였다. 사료 a-1은 백제 의자왕이 신라의 토경을 공취한 사건이다. 643년 7월, 백제 의 자왕은 신라 서쪽의 40여 城을 공취하였다. 신라 영토의 1/3에 해당하는 크기였 다. 덕만공주를 왕으로 세운 진평왕의 처사에 반대하여 모반이 끊이지 않았던 때 였다. 또 국방을 잘 모르는 선덕여왕의 치세에 군령이 제대로 서지 않던 때였다. 진평왕 53년, 이찬 칠숙(柒宿)과 아찬 석품(石品)이 모반하였다. 진평왕이 덕만 공주를 차기의 왕으로 추대하는 것에 반대하였다. 이에 진평왕이 칠숙과 석품을 잡아 동시(東市)의 저잣거리에서 목을 베고 구족(九族)을 처형하였다. 선덕여왕 11년, 대야성주 김품석은 부하 장수 검일의 아내를 빼앗았다. 이에 검 일은 백제와 내통하였고, 제장 윤충은 대야성을 쳐서 함락시켰다. 대야성 전투에 2) 당항성(党項城), 삼국사기(상), 을유문화사, 김부식지음 이병도역주, 117쪽. 3) 당항진(党項津), 위의 책. 152~153쪽. 서 품석(品釋)과 죽죽, 용석이 전사하였다. 김품석의 아내 고타소랑(古陀炤娘)도 죽었다. 고타소랑은 김춘추의 딸이었다. 백제 의자왕이 빼앗은 신라 40여 城은 진흥왕(551년)이 차지하였던 竹嶺 이북 高峴 이남의 10城도 백제의 영토가 되었음을 의미한다. 고구려와 공모한 백제가 당항성을 빼앗은 것은 지금의 경기 남부가 백제의 토경 이 되었음을 시사한다. 553년에 거칠부 등이 탈취한 한성 지역의 10郡도 백제의 토경으로 되돌아갔음을 의미한다. 사료 a-2는 백제 의자왕이 고구려 보장왕과 협공하여 당항성(党項城)을 빼앗은 기록이다. 의자왕이 당항성(党項城)을 빼앗은 것은 선덕여왕의 대당 입조(入朝)를 막은 것이다. 충청북도 단양의 죽령과 충주의 계립령에서 당항성으로 향하는 신 라의 당항성로를 끊은 것을 의미한다. 사료 a-3은 신라 문무왕이 각간 김인문을 당항진(党項津)으로 보내 당 태종의 사 자 유인궤를 맞이하는 장면이다. 이때 당 태종의 숙위(宿衛)로 근무하던 김유신의 장자 김삼광이 웅진도안부대사 유인궤를 수행하였다. 대당외교의 거점이었던 당항성(党項城)과 당항진(党項津)은 남양반도에 위치한 다. 경기도 화성시 남양읍, 마도면, 송산면 서신면의 바닷가이다. 신라 선덕여왕이 당 태종에게 백제 의자왕의 침략을 급보(急報)로 알린 신라 海門이었다. 화성시 남양반도의 지역민들은 당항성과 당항진을 닭목성과 닭목항으로 부르기 도 한다. 당항성(党項城)에 이르는 海門이 닭의 모가지처럼 잘록하기 때문이다. 좌우에서 치미는 갯골이 동서로 뻗은 능선 길을 잘록하게 만들기 때문이다. 그래 서 옛날부터 이 길목을 해문(海門)으로 불렀다. 해문의 다른 이름은 성목쟁이다. 당항성(党項城)과 당항진(党項津)은 이후 신라의 당은군(唐恩郡)과 당은포(唐恩 浦)로 바뀌었다. 조선 전기 신도시 무장읍치(茂長邑治)의 입지와 경관구성 274 275 향토사연구 제31집 C. 당성과 당은포 경기도 화성시 바닷가에 위치한 당항성(党項城)과 당항진(党項津)은 백제, 고구 려, 신라의 수군 기지이자 대당포구(對唐浦口)였다. 나·당연합군에 백제와 고구 려가 멸망한 이후에는 통일신라의 당은군(唐恩郡)과 당은포(唐恩浦)였다. 당성(唐城)은 신라 당은군의 주장성이었다. 당은포(唐恩浦)는 대당포구이자 국 제교류의 관문이었다. 당성은 1차 성과 2차 성으로 축성되었다. 1차 성은 구봉산과 봉화산을 잇는 능선 정상부에 축성되었다. 길이 약 600m로 6~8세기의 신라 유물이 다수 출토되었다. 신라와 통일신라의 산성이었음을 알려준다.4) 2차 성은 길이 약 1.2km로 1차 성의 중심부를 관통하여 구축되었다. 구봉산의 곡 간부를 감싸는 포곡식 산성으로 신라〜통일신라~고려~조선시대의 유물이 다수 출 토되었다. 당성이 시대의 역할과 필요에 따라 폭넓게 사용되었음을 짐작할 수 있다. 2017년, 한양대 문화재연구소가 당성 3차 발굴조사를 시행하였다. 발굴조사에 서 ‘唐’ ‘宅’ 등의 명문 기와를 수습하였다. 이로써 해외연구자들과 공동연구 및 국 제학술대회가 화성시의 주최로 여러 차례 추진되었다. 국제 해상 교류의 중심지 로서 당성의 역사적 가치를 밝히는 화성시의 해양 프로젝트였다. 당성은 신라가 삼국을 통일하는 데 매우 중요한 역할을 하였다. 김춘추와 김법민 이 당항진(党項津)에서 큰 배를 타고 당에 들어갔다. 통일신라시대, 당성(唐城)은 당과 신라를 바다로 잇는 관문이었다. 신라에서는 수많은 승려와 관료들이 당은군에 딸린 당은포(唐恩浦)를 이용하였다. 삼국통일 이후에도 북으로 발해(渤海)가 가로막고 있어 연안루트를 이용하기는 어려운 까 닭이었다. 통일신라로서는 당은포가 당과의 교역에 가장 중요한 거점이었다. 이 러한 관점에서 당은군은 신라의 수도 金城과 당의 수도 長安을 잇는 실크로드의 출발점이기도 하였다. 4) 「당성지표조사보고서」, 한양대학교박물관, 1998. 「도서해안지역 종합학술조사 1」, 경기도박물관, 2000. Ⅲ. 원효의 성도처는 화성시 마도면 백곡리 토감이었다 A. 원효와 원랑의 수도처 樴山 《월광사원랑선사대보선광탑비(月光寺圓朗禪師大寶禪光塔碑)》5)는 신라 승려 원 랑(圓朗,816~883년)6)의 행장을 기록한 탑비다. 보물 제360호인 탑비는 충청북도 제천시 월악산 월광사지(月光寺址)에 있었다. 현재는 국립중앙박물관 1층에 옮겨 져 전시되고 있다. 신라 헌강왕이 ‘대보선광(大寶禪光)’의 탑명을 내려 김영(金瑛)에게 비문을 짓게 하였다. 비문의 글씨는 순몽(淳蒙)이 썼는데 구양순체의 해서이며 폭은 2cm 정도 이다. 탑비는 거북 받침돌 위로 몸돌을 세우고 머릿돌을 얹은 신라 후기의 전형적 인 모습을 지니고 있다. 圓朗禪師塔碑는 원랑이 원효의 성도처인 樴山의 □□□□에 우거하여 3개월간 수련하였다고 기록한다. 그런데 오랜 세월의 풍우에 비문의 글자가 마모되어 그 위치를 알 수 없다. 月光寺圓朗禪師大寶禪光塔碑文7)은 다음과 같다. 5) 월광사원랑선사대보선광탑비(月光寺圓朗禪師大寶禪光塔碑), 통일신라시대 말기 승려인 원랑선사의 탑 비, 보물 제360호. 높이 395㎝. 국립중앙박물관 소장. 6) 원랑(圓朗,816~883년), 856년(문성왕 18) 당나라에 유학한 뒤 귀국하여 선문을 널리 퍼뜨린 승려로 883년(헌강왕 9)에 입적했으며, 헌강왕은 '원랑선사'라고 추시하고, 비명은 '대보선광'이라고 했다. 7) 월광사원랑선서대보선광탑비문, 『譯註 韓國古代金石文』Ⅲ(1992), 국학연구원. 그림 2. 당성(唐城) 망해루(望海樓) 그림 3. 당고지(唐串)-시화방조제 건설로 간척지가 되었다. 조선 전기 신도시 무장읍치(茂長邑治)의 입지와 경관구성 276 277 향토사연구 제31집 月光寺圓朗禪師大寶禪光塔碑 ▨▨▨▨▨江府月巖山月光寺詔諡圓朗禪師大寶禪光靈塔碑幷序 朝請郎守錦城郡太守賜緋魚袋臣金穎奉敎撰 五騰山菩提潭寺釋迦沙門淳夢奉敎書 ▨▨▨▨之君垂禮樂於百代猶龍之帝敷道德於萬方莫不崇仁重義允文 允武好生惡殺乃儉乃慈若迺掃跡玄妙之鄕安寂自然之域了因果而雙 ▨▨▨思而並除靜爲躁」 ▨▨▨▨▨喩人間若大夢齊衆生猶如來理寄忘言事超物外其惟我禪師 之宗乎禪師諱大通字太融朴姓其家通化府仲停里歷代捨官爵之榮近親 紹朴素之▨顯祖王考」 ▨▨▨▨▨▨氏族本取城郡人也姙禪師日守節持齋誦經胎敎及其載誕 果異常倫禪師蘊河嶽之英靈稟乾坤之秀氣猶崑山之片玉寔桂林之一枝 將邁觹年爰登冠歲家」 ▨▨▨▨▨▨▨勉旃於翰黑之場耽翫於經史之域汝其志哉禪師乃恭受 其旨忽焉尋師聰睿則五行具下敏捷乃一覽無遺遍通諸子百家洞▨千經 萬論後窺內典益悟群」 ▨▨▨▨▨▨▨是非不異遂投簪落髮解褐披緇以會昌乙丑年春投大德 聖鱗進具戒僧▨配居丹嚴寺▨是修心戒律練志菩提忍辱精進爲先布施 恭敏爲次時爲獅子喉」 ▨▨▨▨▨▨▨忘年請交廻席相事時也師兄慈忍禪師自唐歸國師時造 謁忍禪師察其雅懷知非所敎乃設馬鞭之義激揚龍象之心師卽潛▨憤悱 欲扣玄微爰抵樴山寓」 ▨▨▨▨乃神僧元曉成道之所也習定三月後依廣宗大師大師見知令惣 寺務師不獲已因而蒞焉未幾功就曰吾當捨去以大中丙子歲投入唐賀正」 ▨▨▨▨▨▨華夏遍詣宗林乃至仰山師事澄虛大師大師豫察聰惠俯令 精心敎諭眞宗夙夜無倦師素槩超倫丹誠罕匹智踰離日識邁彌天▨涉炎 凉默受黃梅之印不經」 ▨▨▨▨▨▨之珠後乃巡禮名山歷參禪伯旣周中夏欲化東溟咸通七年 投廻易使陳良付足東來時乃波濤騰湧煙靄昏沈舟楫有傾覆之虞僧俗 ▨▨溺之患師乃略無惧」 ▨▨▨▨▨不易去國之麻衣匪換出家之壯志若非神通妙用智識遐周履 險不驚孰能至此廣宗大師聞師東還遣使邀請異禮相接▨愛良多來年春 出山寓止」 ▨▨▨▨夏夜夢月嶽神官來請及曉慈忍禪師致書云月光寺者神僧道證 所刱也昔我太宗大王痛黔黎之塗▨▨▨海之▨▨止戈三韓之年垂衣一 統之日被」 ▨▨▨之▨永除▨▨之災別封此山表元勲也曾授錄於金剛又傳名於仙 記淸冷泉澗靉靆煙霞廣孕珠靈備存▨傳師其居焉師如響應聲振衣卽 ▨▨▨▨夕夢前神侍衛」 ▨▨▨▨▨▨▨行致禮肘步瞻容曰先有叨陳勞遠相應師是以養形玆地 寄居此山顯示玄機揄揚法要不存善惡若疾風之歸雲解脫是非▨▨▨之 突圍由是檀越將踰境」 ▨▨▨▨▨▨▨旣至寶山之人罕聞索手之士羶行普彰香名遠着價高六 合譽及九重景文大王以弘長養之深仁慘空寂之釋典遠聆禪德思竪良」 ▨▨▨▨▨▨▨月五日遣觀榮法師遠賞金詔慰勞山門月光寺永令禪師 主持又一年再廻天睠重降綸音追錫恩波遐宣眷渥茶」 ▨▨▨▨▨▨來世論爲榮禪門增耀中和三仲夏群虵出穴遍谷盈山叱口 悲號垂頭泣血禪師謂門人曰生也有涯吾豈無盡汝等當無隳怠勉力修行 以其年十月五日儼」 ▨▨▨▨年六十有八僧臈三十九鳴呼歿而不歿名播三韓亡而不亡法流 千載於是煙雲索漠松檜蒼茫遠近僧徒高卑士女覩變▨而叩地銜悲傷以 號天接武致哀拊膺長」 ▨▨▨▨▨淚集成泉門人融奐等以其年二月十日奉遷神柩葬于北院永 訣慈顏不勝感慕門人等慮陵遷谷徙天拂海田有忘先師法乳之恩欲以仰 조선 전기 신도시 무장읍치(茂長邑治)의 입지와 경관구성 278 279 향토사연구 제31집 陳攀慈之志爰集行狀」 ▨▨▨▨▨▨居請建鴻碑用光聖代」 ▨▨▨▨▨英文聖武繼祖嗣圖凡於內敎之中尤深依仰之意聞亡悲怛不 自勝任仍追諡圓朗禪師塔號大寶光禪又詔微臣修撰碑讚臣功疎畵虎用 匪懷蛟叨奉」 ▨▨▨▨▨▨其詞曰」 ▨▨▨▨▨▨沙達摩兮傳心中華散滿兮山盈谷溢周流兮地角天涯圓通 兮無形無相任用兮非實非花强字兮玄珠法印强名兮迦葉盧遮朝鮮兮東 接扶桑昔賢兮稱玆福」 ▨▨▨▨▨▨月光淸高兮爲僧人瑞是非兮了之不存聖智兮弃之不義貪 瞋兮捨而不捨聲色兮利而不利神靈兮感化圍繞皇王兮念道崇師嘉猷兮 無疆莫極懿績」 ▨▨▨▨▨▨▨兮欝然成市學徒兮豈或多歧六賊兮去而不去方法兮知 而不知皇▨兮何辜何戾靑丘兮孰福孰祐哲人兮焂然委化禪林兮忽焉衰 朽祗園兮慘慘」 ▨▨▨▨▨▨▨▨秀鳴呼哀哉法梁折勒石銘金示諸有」 龍紀二年歲次庚戌九月十五日建 門下僧眞胤等刻字」 휘(諱)는 대통(大通), 자(字)는 태융(太融), 박씨 성으로 집은 통화부(通化 府) 중정리(仲停里)이다. 선사는 일찍이 제자백가(諸子百家)와 천경만론(千經萬論)을 통달하였다. 20세 쯤 불경을 접하여 보고 옳고 그름이 다르지 않음을 깨닫고 출가하였 다. 845년 봄에 대덕(大德) 성린(聖鱗)에게 구족계(具足戒)를 받고 스님이 되어 단엄사(丹嚴寺)에 머물렀다. 그때 사형(師兄)인 자인선사(慈忍禪師)가 당에서 귀국하여 더이상 가르칠 사람이 아님을 알고 떠나라고 하였다. 선사는 진리를 찾아 신승(神僧) 원효(元 曉)가 도를 이룬 직산(樴山)의 ▧▧▧▧에 우거하였다. 석 달 동안 선정(禪定) 을 닦은 후에 광종대사(廣宗大師)에 귀의하니 대사는 절의 일을 맡겼다. 선사 는 사양할 수 없어서 절의 일에 공적을 쌓은 후 856년 당에 들어갔다. 당에서 종림(宗林)을 두루 참배하고 앙산(仰山)에 이르러 징허대사(澄虛大 師)를 스승으로 섬겼다. 대사는 총명하여 미리 살펴 마음을 닦고 진리를 가 르쳐 깨우치니 선사의 지혜와 지식은 뛰어나서 짝할 이가 없었다. 황매(黃 梅)의 심인(心印)을 받고 구슬을 얻어 명산을 순례하고 선백(禪伯)을 두루 찾아뵈었다. 선사는 신라를 교화시키고자 866년 회역사(廻易使) 진량(陳良)에게 의탁 하여 동쪽으로 오는데 파도의 격랑에 안개가 짙게 깔려 승려와 속인은 배가 뒤집혀 죽을까 걱정했다. 그러나 선사는 조금도 두려워하지 않았으며, 고국 을 떠날 때의 삼베옷을 바꾸어 입지 않았다. 광종대사는 선사가 동(東,신라)에 왔다는 소식을 듣고 사람을 보내 초청하 였다. 특별히 예의로 상봉하니 사랑함이 깊었다. 이듬해 봄에 산에서 나온 여름밤에 월암산(月巖山) 신궁(神宮)이 와서 초청하는 꿈을 꾸었다. 꿈을 깨 고 나니 자인선사(慈忍禪師)가 글을 보내왔다. "월광사는 신승(神僧) 도징(道澄)이 창건한 절이다. 태종대왕(太宗大王)이 삼한을 정복하여 통일을 이루던 때 재앙을 없애 이 산을 으뜸가는 공로로 기 렸다. 금강(金剛)에도 기록되어 있으며, 선기(仙記)에도 맑고 시원한 샘물이 있고 안개가 피어오르며, 널리 빼어난 정기를 품고 있다는 것이 전(傳)에 실 려 있다. 선사는 거기에 머물라" 선사는 지난번 꿈에 신궁(神宮)이 옆에서 호위하며 예를 다하였다. 선사는 이 땅에 몸을 담고 이 산에 머물면서 현묘한 이치와 법요(法要)를 휘날렸다. 선악(善惡)을 마음에 두지 않고, 시비(是非)를 벗어나니 불법은 천지사방에 드높아 궁중(宮中)까지 미쳤다. 경문대왕(景文大王)이 관영법사(觀榮法師)를 보내어 조칙을 내려 산문을 위로하고 1년이 지나 임금이 돌아봄을 다시 입어 조칙이 거듭 내려지니 선 문(禪門)은 더욱 빛났다. 헌강왕 9년(883년) 5월에 많은 뱀들이 구멍에서 나와 골짜기와 산에 두루 퍼져 크게 슬픈 소리를 내면서 머리를 늘어뜨리고 피눈물을 흘리며 울었다. 선사는 동문들에게 "삶에는 끝이 있는 법이니 나라고 어찌 다함이 없겠는 가. 너희들도 마땅히 게으르지 말고 힘써 수행하라"고 말하고, 그해 10월 5 일에 돌아가시니 향년 68세, 승랍(僧臘)은 39세였다. 제자 융환(融煥) 등이 다음 해 2월 10일에 영구(靈柩)를 받들어 옮겨 북원( 北院)에 장사지내고, 추모하며 행장(行狀)을 모으고 큰 비석을 세워 성대(聖 조선 전기 신도시 무장읍치(茂長邑治)의 입지와 경관구성 280 281 향토사연구 제31집 代)에 빛낼 것을 청하였다. 헌강왕은 선사의 부음에 슬픔을 가누지 못하였다. 이에 시호(諡號)를 추증 하여 원랑선사(圓朗禪師)라 하고, 탑호(塔號)를 대보광선(大寶光禪)이라 하 여 신하에게 조칙을 내려 비찬(碑讚)을 짓게 하였다. 찬사(讚詞)가 말한 가운데, '억지로 글을 붙여 현주(玄珠)와 법인(法印)이라 하였고, 굳이 이름하여 가엽(迦葉)과 노차나(盧遮那)라 하였도다. 아! 슬프 도다. 불법의 기둥이 부러졌으니, 돌에 새기고 쇠에 기록하여 모든 사람에게 보이고자 하노라.' 용기(龍記) 2년(890, 진성여왕 4년) 경술(庚戌) 9월 15일 세우다. 제자인 승려 진윤(眞胤) 등이 글자를 새기다. 위에서 圓朗禪師塔碑는 원랑이 ‘神僧 元曉가 成道한 樴山의 ▧▧▧▧에 寓하며 3개월을 수도하였다.’고 기록하였다. 여기에 등장하는 樴山은 어디일까? 직산(樴山)은 말뚝산이다. 말이나 소를 묶어두는 말뚝(樴)의 의미다. 조선시대 경 기도 화성시 마도면 해문리에 驛이 있었다. 수백 대의 우마차가 들고 나는 구화역 (仇火驛,갯벌역)이었다. 그 장소는 화성시 마도면 해문리의 역골(驛谷)과 마도면 백곡리의 입피골(立樴谷)이다. 그러므로 원랑선사탑비가 기록하는 樴山(말뚝산) 은 역골과 입피골을 끌어안는 산이어야 한다. 그런데 직산(樴山)에 대응되는 산이 마도면에 있다. 여치산(輿峙山,102.2m)8)이 다. 말뚝(樴)이 서 있는 골짜기여서 입피골(立樴谷)이고 수레(輿)가 지나는 고개( 峙)가 있어 여치산(輿峙山)이다. 마도면 해문리를 지난 우마차의 길은 마도면 백곡리 마을회관 앞에서 끝난다. 갯 벌 하천 백곡천(白谷川)이 길을 가로막기 때문이다. 백곡천 건넌 마을의 이름이 아직도 설앞말이다. 설앞말이 곧 직산(말뚝산)의 위치를 알려준다. 그 옛날 이곳 에 무엇을 세웠을 것인가? 수백 개의 말뚝을 박아 말과 우마차를 세웠을 것이다. 그래서 입피골(立樴谷)에 위치한 산의 이름이 직산(樴山)이었던 것이다. 8) 여치산(102.2m), 마도면 백곡리 지형도(50K), map,ngii.go.kr, 국토정보플랫폼, 국토정보맵, 1970 년대. 조선시대 마도면 해문리의 구화역(갯벌역)이 번성하였던 때문일까? 지금도 마도 면 백곡리와 해문리 일대에는 소를 키우는 목장이 즐비하다. 말을 기르는 목장도 두어 군데 있다. 입피골에 위치한 또나따목장9)이 그중의 하나다. 그렇다면 원효가 성도한 장소(▧▧▧▧)를 이 지역에서 찾아야 한다. 신라시대의 樴山 곧 조선시대 의 輿峙山에서 찾아야 한다. 9) 또나따목장, 송아지를 ‘또 낳았다’의 소리 말 표기. 그림 4. 당성(唐城) 망해루(望海樓) 그림 6. 수레(輿)가 넘는 고개 여치산(輿峙山) 그림 5. 월악산월광사지 그림 7. 도7 입피골의 또나따 목장 조선 전기 신도시 무장읍치(茂長邑治)의 입지와 경관구성 282 283 향토사연구 제31집 B. 당신라국의상전의 본국 海門 唐州界 土龕 『宋高僧傳』10) 「唐新羅國義湘傳」은 송(宋)의 승려 찬영(贊寧,912~1002)이 쓴 고승 전이다. 唐부터 宋 태평흥국 5년(980)까지의 고승 533인의 전기(傳記)와 130인의 부전(附傳) 기록이다. 「唐新羅國義湘傳」에 기록된 원효 관련 내용은 다음과 같다. 釋義湘。俗姓朴。雞林府人也。生且英奇。長而出離。逍遙入道性分天然。 年臨弱冠聞唐土教宗鼎盛。與元曉法師同志西遊。行至本國海門唐州界。計 求巨艦。將越滄波。 倏於中塗遭其苦雨。遂依道旁土龕間隱身。所以避飄濕焉。迨乎明旦相視。 乃古墳骸骨旁也。天猶霢霂地且泥塗。尺寸難前逗留不進。又寄埏甓之中。 夜之未央俄有鬼物為怪。曉公歎曰。前之寓宿謂土龕而且安。此夜留宵託鬼 鄉而多崇。 則知心生故種種法生。心滅故龕墳不二。又三界唯心萬法唯識。心外無法胡 用別求。我不入唐。 의상은 석가의 제자다. 성은 박씨고 계림부의 사람이다. 생김이 영특하고 기 이했다. 성장하여 출가하였다. 도를 찾아다니기를 하늘의 뜻으로 받아들였다. 나이 약관에 이르러 당나라에 교종이 나란히 융성하다는 소식을 듣고 원효 법사와 뜻을 같이하여 서쪽으로 유행하였다. 본국(本國) 해문(海門) 당주계( 唐州界)에 이르러, 큰 배를 구해 창파를 건너려 했다. 배를 찾아다니는 중 도(條於中塗)에 매서운 고우(苦雨)를 만났다. 이에 길옆의 토감(土龕)에 몸 을 숨겨 회오리바람의 습기를 피했다. 다음날 날이 밝아 바라보니 그곳은 해골이 있는 옛 무덤이었다. 하늘에서 는 고우가 계속 내리고 땅은 질척해서 한 발자국도 앞으로 나아갈 수가 없었 다. 또 하루를 무덤 속에서 머물렀다. 밤이 깊기 전에 갑자기 귀신이 나타나 놀라게 했다. 원효가 탄식하며 깨달음을 노래했다. “전날 밤에는 토굴에서 잤음에도 편안하더니 오늘 밤은 귀신의 굴에 의탁 하니 근심이 많구나! 알겠다. 마음이 생기면 갖가지 것들이 생겨나고, 마음 이 사라지면 토감과 고분이 둘이 아닌 것을, 또한 모든 세계는 오직 마음일 10) 『송고승전』, 송(宋)의 승려 찬영(贊寧, 912~1002)이 당·송시대의 고승 533인의 행장을 쓴 전기(傳記). 뿐이요, 모든 존재는 오직 인식일 뿐임을, 마음밖에 法이 없으니 어찌 따로 구하랴.” 나는 당나라에 들어가지 않겠다고 하였다. 위에서 唐新羅國義湘傳은 원효가 성도한 장소를 本國 海門 唐州界 土龕(古墳)으 로 기록하였다. 이 기록의 本國은 신라, 海門은 마도면 해문리의 성목쟁이, 唐州 界는 통일신라의 唐恩郡이자 지금의 경기도 화성시 남양반도다. 그 흔적은 화성 시 서신면의 唐城과 마도면의 海門里에 또렷이 남았다. 송나라 승려 찬영(贊寧)11)이 쓴 「唐新羅國義湘傳」은 승려 영명연수(永明延壽)12) 가 쓴 「종경록」과 내용이 다르다. 또 승려 혜홍각범(慧洪覺範)13)이 쓴 「임간록」과 도 내용이 다르다. 결정적으로 다른 부분은 원효가 토감(고분)에서 깨달음을 얻는 과정이다. 「종경록」은 원효가 ‘시체 썩은 물을 마시고 깨달음을 얻었다’고 기록한다. 「임간 록」은 원효가 ‘해골 물을 마시고 구토하다 깨달음을 얻었다’고 기록한다. 그런데 「 당신라국의상전」은 시체 썩은 물을 마셨다거나 해골 물을 마셨다고 기록하지 않는 다. 원효가 ‘해골(骸骨) 있는 土龕(古墳)에서 이틀 밤을 묵었다’고만 기록한다. 이 부 분에서 「종경록」과 「임간록」은 상식적이지 않다. 원효의 깨달음을 극적으로 신격화 한 견강부회로 판단한다. 실제로 토감(고분)에 놓인 두개골에 물이 괴지 않는다. 南陽地方圖14)가 표기하는 海門은 화성시 마도면 해문리의 성목쟁이다. 갯골을 따라 올라온 바닷물이 남북으로 들이미는 언덕이다. 지금의 화성시 마도면 해운 로 794번지의 폭이 좁은 능선길이다. 좀 더 구체적으로는 화성시 마도면 청원초 등학교 정문 앞이다. 신라시대 당에 들어가는 사신이나 유학승이 당은포(唐恩浦) 에 이르는 유일한 길목이었다. 이곳에 삼국시대의 토성-성목쟁이성의 흔적이 남 았다. 11)찬영(贊寧,912~1002), 송나라 승려, 송고승전의 저자. 12)영명연수(永明延壽,904~975), 송나라 승려, 종경록의 저자. 13)혜홍각범(慧洪覺範,1071∼1128), 송나라 승려, 임간록의 저자. 14)南陽地方圖, 동여비고, 1682년, 33×42cm, 양산 대성암 소장. 조선 전기 신도시 무장읍치(茂長邑治)의 입지와 경관구성 284 285 향토사연구 제31집 조선시대 남양도호부에는 두 곳에 역(驛)이 있었다. 조선초기에는 화성시 남양 읍에 해문역(海門驛)이 있었고 조선후기에는 화성시 마도면 해문리에 구화역(仇 火驛)이 있었다. 해문역(海門驛)의 위치는 화성시 남양읍 역동(驛洞)이다. 남양읍에서 적량포(赤 梁浦)에 이르는 길목이다. 지금의 화성시 서신면 궁평항에 이르는 길이다. 구화역(仇火驛,갯벌역)의 위치는 화성시 마도면 해문리의 역골(驛谷)이다. 마도 면에서 영종포(永宗浦)에 이르는 길목이다. 지금의 화성시 서신면 전곡항에 이르 는 길이다. 해문역과 구화역은 충청남도 아산의 공진창에서 올라온 조세 등의 물류와 수원, 남양에서 거둔 조세를 도성 한양의 경창(京倉)으로 나르던 역이었다. 삼국시대에 는 唐으로 건너가고, 고려시대에는 宋으로 건너가고, 조선시대에는 明으로 건너 가는 포구역이었다. 남양도호부의 驛은 시대에 따라 그 위치가 바뀌었다. 남양만에 딸린 포구가 바닷 물의 흐름에 따라 변화하기 때문이다. 포구에 갯벌이 쌓이거나 물의 흐름이 바뀌 면 역의 위치도 바뀌었다. 그림 8. 해문역(海門驛)-남양읍 역동에 위치 그림 9. 구화역(仇火驛)-마도면 역골에 위치 C. 원효와 탄문의 수도처 鄕城山 절터 《보원사법인국사보승탑비(普願寺法印國師寶乘塔碑)》15)는 승려 탄문(坦文,900~975)16) 의 행장을 기록한 탑비다. 충청남도 서산시 운산면 용현리 보원사지에 위치한다. 보물 제106호인 법인국사탑비의 비문은 김정언(金廷彦)이 짓고 구양순체의 해 서로 한윤(韓允)이 썼다. 김승렴(金承廉)이 각자하여 국사 입적 후 3년 뒤인 978 년(경종 3)에 세웠다. 法印國師塔碑는 鄕城山에 佛寺之墟가 있는데, 원효보살과 의상대덕이 머무르던 곳이라고 기록한다. 碑文은 다음과 같다. 迦耶山普願寺故國師制贈諡法印三重大師之碑(제액) 高麗國運州迦耶山普願寺故國師 制贈諡法印三重大師寶乘之塔碑銘(병 서) 光祿大夫太丞翰林學士前內奉令臣金廷彦奉 制撰 儒林郎司天臺博士臣韓允奉 制書幷篆額 恭惟 覺帝釋迦鵠樹昇遐之後 儲君彌勒龍華嗣位之前代有其仁心同彼 佛佛者 覺也師而行之故使蒸▨▨隅引玄津而更廣蟠桃山側撝慧日以重光 卽以道之尊爲王者師德之厚爲衆生父況乃 釋氏三藏有六義內爲戒定慧禪 之根也外爲經論律敎之門也誰其全之實 大師矣大師法號坦文字大悟俗緣 高氏廣州高人也祖陟種德無彊成功有裕曾作一同之長果彰三異之芳父能花 縣名家蘭庭茂族遂襲家風之慶蔚爲邑長之尊母田氏唯修聖善之心願得神通 之子奉行」 婦道愼守母儀魂交覩一梵僧授金色奇菓因有娠誕彌厥月父亦申夢法幢竪于 中庭梵旆掛其上隨風搖曳映日翩飜衆人集其下觀者如堵乾寧七年龍集涒灘 秋八月十四日天欲曙誕生大師其胎遶頸而垂如著方袍生有奇骨弱無放言覩 金像以」 15)보원사법인국사보승탑비(普願寺法印國師寶乘塔碑), 충남 서산시 운산면 용현리 119-1. 16)탄문(坦文,900~975), 신라 효공왕 4년(900)에 태어나서 고려 광종 26년(975)에 입적하였다. 법인국 사의 칭호를 받았다. 조선 전기 신도시 무장읍치(茂長邑治)의 입지와 경관구성 286 287 향토사연구 제31집 虔心對桑門而合掌有以見其根殆熟善芽尙早年甫五歲情敦出俗志在離塵願 託迹於緇門卽寄心於金界先白毋毋念疇昔之夢泣曰䚷願度來世吾不復撓倚 門之念也已後謁父父喜曰善卽以落辭親脩心學 佛去謁鄕山大寺大德和尙」 見 大師鳳毛奇相螺髻殊姿因謂曰方當童稚之年旣飽老成之德如子者以吾 爲師是猶守株待兎緣木求魚吾非汝師可往勝處 大師方欲僧之眞者必訪跡 之古者必尋會歸覲日古老相傳鄕城山內有佛寺之墟昔元曉菩薩義想大德俱 㦄居所」 憇 大師旣聞斯聖跡盍詣彼玄基以習善遂茇于其舊墟檻心猿柳意馬于以休 足于以齋心經厯數年時號之聖沙彌 (이하 줄임) [출전:『韓國金石全文』中世上(1984)] 가야산(迦耶山) 보원사(普願寺) 고국사(故國師) 제증시법인(制贈謚法印) 삼중대사(三重大師)의 비(제액) 고려국(高麗國) 운주(運州) 가야산(迦耶山) 보원사(普願寺) 고국사(故國師) 제증시법인(制贈謚法印) 삼중대사(三重大師) 보승탑비명(寶勝塔碑銘)과 아 울러 서문(序文) 광록대부(光祿大夫) 태승(太丞) 한림학사(翰林學士) 전내봉령(前內奉令) 신(臣) 김정언(金廷彦)이 왕명(王命)을 받들어 짓고, 유림랑(儒林郞) 사천대박사(司天臺博士) 신(臣) 한윤(韓允)이 제지(制旨)를 받들어 비문(碑文)과 전액(篆額)을 쓰다. 공손히 생각하는데 각제(覺帝)인 석가모니 부처님께서 구시나가라의 사라 나무 사이에서 열반하신 후 저군(儲君)인 미륵보살이 용화회상(龍華會上)에 서 불위(佛位)를 계승하기까지 대대로 인자(仁者)가 있어 모두 마음은 부처 님과 같았으니, 불(佛)이란 깨달은 자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그를 스승 삼 아 의행(依行)하는 까닭에 불교가 증조(蒸棗) 해우(海隅), 즉 동해의 한쪽 모 퉁이에 있는 우리 국민으로 하여금 진리의 세계로 인도하고 구습(舊習)을 고쳐 새로운 생활을 영위하도록 하였다. 널리 반보산(蟠桃山) 지역으로 넓 혀 혜일(慧日)을 도와 거듭 빛나게 하였으니, 즉 도(道)가 높은 존사(尊師)를 왕의 스승으로 삼고 덕이 두터운 큰스님을 중생(衆生)의 아버지로 삼았다. 석씨(釋氏)의 삼장(三藏)에는 육의(六義)가 있는데, 내(內)로는 계정혜(戒定 慧)이니 선(禪)의 근본이고 외(外)로는 경율논(經律論)이니 교(敎)의 본원(本 源)이 되는 것이다. 이 여섯 가지를 모두 갖추신 분이 있으니 실로 대사(大 師)가 그분이라 하겠다. 대사(大師)의 법호(法號)는 탄문(坦文), 자(字)는 대오(大悟), 속성은 고씨( 高氏), 광주(廣州) 고봉(高) 출신이다. 조척(祖陟)으로부터 덕(德)을 쌓음이 한량없으므로 공(功)을 이룸에 넉넉함이 있었다. 일찍이 일동(一同)이 될 만 한 장과(長果)를 지었으며, 삼이(三異)의 방부(芳父)를 나타내었다. 아버지 는 능히 화현(花縣)을 꾸민 훌륭한 군수(郡守)였고, 난정(蘭庭)에 태어난 빛 나는 가문이었다. 드디어 가풍(家風)의 경사를 이어받아 울창하게 읍장(邑 長)의 존령(尊令)이 되었다. 어머니는 백씨(白氏)이니 오직 성선(聖善)의 도 를 닦아 훌륭한 (결락) 아들 낳기를 희망하였으며, 부도(婦道)를 받들어 행하 고 삼가하여 모의(母儀)를 지켰다. 어느 날 밤 꿈에 한 범승(梵僧)이 나타나 금빛 나는 기과(奇菓)를 건네주었다. 그로 인해 임신하고 만삭이 되어 탄생 하였으며, 아버지 또한 꿈을 꾸었으니 법당(法幢)이 뜰 가운데 세워져 있거 늘, 범패(梵旆)가 그 위에 걸려 있어 바람을 따라 이리저리 나부꼈고, 많은 사람이 그 밑에 모인 것이 마치 둥근 담장과 같았다. 건녕(乾寧) 7년 용과(龍集) 군탄년(涒灘年) 8월 14일 새벽 동틀 무렵에 탄 생하였다. 대사(大師)는 태어날 때, 태(胎)가 목을 감아 드리운 것이 마치 방 포(方袍)를 입은 것과 같았다. 기이한 골격을 받아 태어났으며 어려서부터 말을 함부로 하지 않고, 불상(佛像)인 금상(金像)을 보면 마음을 경건히 하였 으며 상문(桑門)인 스님을 대하여는 반드시 합장하였으니 그 근기(根機)가 자못 성숙함을 볼 수 있었다. 선근(善根)의 싹이 전세(前世)에 이미 자랐으므 로 5살 때 벌써 출가하려는 마음이 돈독하여 뜻은 세간진로(世間塵勞)를 여 의는 데 있었으니 자취를 치문(緇門)에 의탁하고 마음을 금계(金界)에 의거 할 것을 발원(發願)하였다. 그리하여 아버지보다 어머니에게 먼저 여쭈었더 니, 어머니는 전일(前日)의 태몽을 생각하고는 울면서 허락하였으니, “내생( 來生)에는 나를 제도해 줄 것을 원할 뿐 다시는 문(門)에 기대어 자식이 돌아 오기를 바라는 마음을 일으키지 않겠다.”고 하였다. 이어 아버지에게 말씀 드리니 흔쾌하게 허락하였다. 스님은 곧 삭발하고는 부모에게 하직하였으며, 마음을 닦아 성불하고자 결 심하여 향산대사(鄕山大寺)의 대덕화상(大德和尙)을 찾아가 뵈었다. 화상( 조선 전기 신도시 무장읍치(茂長邑治)의 입지와 경관구성 288 289 향토사연구 제31집 和尙)이 스님을 보니 봉모(鳳毛) 기상(氣相)이며 나발(螺髻)을 지닌 특수한 자태(姿態)를 가졌으므로 경탄하여 말하기를, “바야흐로 동치(童稚)의 나이 에 해당하건만 이미 노성(老成)의 덕을 갖추었구나! 자네와 같은 자가 나를 스승으로 삼으면 이는 마치 수주대토(守株待兎)하고 연목구어(緣木求魚) 하 는 것과 같다. 나는 네 스승이 될 자격이 없으니 마땅히 다른 큰스님이 있는 곳을 찾아가라.”고 하였다. 그리하여 스님은 참된 선지식과 오래된 스님 들의 사적(事跡)을 빼놓지 않 고 반드시 심방(尋訪)하리라 하고 떠나려 인사를 드리는데 대덕화상(大德和 尙)이 말씀하기를, “옛 노인들 사이에 전해오는 말에 따르면, 향성산(鄕城 山)에 절터가 있는데 옛날 원효보살(元曉菩薩)과 의상대덕(義想大德)이 함 께 머무르며 쉬던 곳이라 한다.”하였다. 대사(大師)가 ‘이미 성적(聖跡)에 대하여 들었으니 내 어찌 그곳 현기(玄基) 에 나아가서 수도하지 않으랴.’하고, 마침내 그 구허(舊墟)에 풀집을 짓고, 원숭이 같은 마음을 우리 속에 가두어 놓고, 고삐 없는 말과 다름없는 의식은 말뚝에 붙잡아 매고는 여기에 발을 멈추고 마음을 가지런히 하여 수년을 지 냈다. 당시 부근 사람들이 성사미(聖沙彌)라고 일컬었다고 한다. (이하줄임) [출전: 『校勘譯註 歷代高僧碑文』【高麗篇2】(1995)] 그림 10. 보원사법인국사보승탑비 그림 11. 보원사지 당간지주 위에서 法印國師塔碑는 ‘鄕城山內 佛寺之墟가 있는데 원효보살과 의상대덕이 머문 곳이다’라고 기록하였다. 이에 ‘향성산 절터를 찾아간 승려 탄문이 초막(茇 于)을 짓고, 朝三暮四와 같은 원숭이의 변덕스러운 마음을 가두고, 고삐 풀린 말 과 같은 의식을 말뚝에 붙잡아 매고 수년 동안 수도하였다.’고 기록하였다. 그러 므로 원효와 탄문이 수도한 장소를 찾으려면 고려시대의 ‘향성산 절터’를 먼저 찾 아야 한다. 앞장에서 圓郞禪師塔碑는 원효가 머무른 곳을 본국 해문 당주계 樴山(말뚝산)이 라고 하였다. 지금의 경기도 화성시 마도면 백곡리의 여치산(輿峙山)이다. 그러므 로 여치산에서 고려시대의 鄕城山을 찾아야 한다. 城과 己(基)가 관련된 鄕里의 산이어야 한다. 고려시대의 고승이라면 익히 알고 있는 성터와 절터가 있는 산이 어야 한다. 그런데 여치산 아래에 鄕城山과 같은 이름의 마을이 존재한다. 화성시 마도면 백곡리의 향기실(鄕己谷)이다. 향기실은 토성 성안성(城內城,성안이)에 빙 둘러싸인 마을이다. 삼국사기의 지명에 근거하면 城과 己는 같은 의미로 쓰였다. 예를 들면 충청남도 홍성군 결성(結城)의 다른 이름이 결기(結己)다.17) 그러므로 향기실(鄕己谷)은 곧 향성산(鄕城山)에 딸린 마을 이름이다. 그렇다면 향기실 부근에 신라시대의 어떤 절터가 있는가? 그렇다. 2008년에 韓 國文化財保護財團이 발굴한 白谷里寺址18) 곧 白寺址19)다. 향기실 북쪽 산등성이 에 그 어떤 사적에도 기록되지 않은 절터가 발굴되었다. 이 마을 터줏대감도 모르 는 아주 오래된 신라시대의 절터다. 이곳에서 ‘소조 佛頭’와 ‘白寺’, ‘白寺下家’의 글자가 찍힌 명문기와가 출토되었 다. 그 장소는 경기도 화성시 마도면 백곡리 산 104번지다. 그러므로 圓郞禪師塔 碑가 기록한 樴山이 法印國師塔碑가 기록한 鄕城山이며 현재의 輿峙山에 비정되 17)배우리, 『우리땅 이름의 뿌리를 찾아서 2권』 307쪽. 18)白谷里寺址, 한국문화재보호재단 발굴 자료, 2008. 19)白寺址, 「화성 백사지의 조사성과와 성격 검토」 황보 경, 『삼국통일과 화성지역 사람들 삶의 변화』, 제12 회 화성시 역사문화 학술세미나, 29~47쪽. 조선 전기 신도시 무장읍치(茂長邑治)의 입지와 경관구성 290 291 향토사연구 제31집 는 것이다. 해문리와 백곡리를 동서로 끌어안는 산의 시대적 이름이 직산=향성산 =여치산이다. 위 비문에도 ‘고삐 풀린 말과 같은 의식은 말뚝에 붙잡아 매고 수년 동안 수도하였다’는 문장이 들어 있어 그 사실을 뒷받침한다. 다음은 1970년대 마도면 백곡리의 지도다.20) 이 지도에 향기실과 성안성, 입피 굴과 역골이 등장한다. 여치산(輿峙山)은 102.2m로 표기되었고, 백곡리사지(白 谷里寺址)는 62.13m로 표기되었다. 사진 ‘소조불상’은 「화성 백사지의 조사성과와 성격 검토-황보 경」에서 복사한 것이고, 명문기와 ‘白寺下家’는 2021년 11월 18일에 현지를 답사한 필자가 수습 한 것이다. 20)마도면 백곡리 지형도(50K), map,ngii.go.kr, 국토정보플랫폼, 국토정보맵, 1970년대. 그림 12. 마도면 백곡리-지도 중앙에 향기실과 토성 성안성. 중상귀에 굴고개와 당성. 우상귀에 해문리와 역골. 우하귀에 입피굴이 위치한다. D. 白寺와 白寺下家의 정체 1. 白寺의 정체 명문기와 ‘白寺’, ‘白寺下家’는 백곡리사지에서 발굴되었다. 조선시대 南陽地方 圖21)에도 등장하지 않는 절터다. 신라 선덕왕 때의 사찰 비봉산봉림사, 고려시대의 사찰 절명산장생사, 청명산홍법사는 나타나는데 향성산 백사의 기록은 없다. 그 러므로 원효보살과 의상대덕이 머물렀던 백사는 이미 신라 말기에 사라진 것으로 판단한다. 무슨 까닭일까? 원효는 이단으로 지탄받는 파계승이었다. 요석공주와 결혼한 원 21)南陽地方圖, 동여비고, 1682년, 33×42cm, 양산 대성암 소장. 그림 13. 소조 불상 옆면-앞면 그림 15. 백곡리사지 출토 명문기와 白寺下家 그림 16. 조선시대 驛의 모습 그림 14. 소조 불상 조선 전기 신도시 무장읍치(茂長邑治)의 입지와 경관구성 292 293 향토사연구 제31집 효는 아들 설총을 낳고 스스로 소성거사를 칭명하였다. 그런 까닭으로 작은 규모 의 백사는 크게 대접받지 못하였을 것이다. 다른 생각도 있다. 신라시대 당은군과 당은포는 대당외교의 거점이었다. 그러나 고려시대 대송외교의 거점은 벽란도와 예성항이었다. 대외 항로에서 벗어나면서 수입수출의 물동량도 떨어졌고 사신과 유학생도 오지 않았다. 당은군과 당은포에 딸린 역이나 마을도 쇠퇴하였다. 白寺址는 향성산(여치산) 아래 마도면 백곡리 산 104번지에서 발견되었다. 출토 된 소조 佛頭, 명문 기와 ‘白寺’, ‘白寺下家’에 근거하여 백곡리사지(白谷里寺址)22) 로 명명되었다. 우리말 지명으로 부르면 백곡리사지는 백골리절터다. 우연의 일 치겠지만 백사지(白寺址)는 백곡리 산 104번지에 위치한다. 백곡리사지는 전체적으로 3단의 단차에 장방형의 사역이 조성된 것으로 보인다. 남쪽 부분에 건축 부재로 보이는 석재와 다량의 기와가 쌓여 있는데, 이 중에는 완 형의 토수기와도 섞여 있다. 기와 외에도 다량의 토기편이 보이는데, 연질과 경질 이 섞여 있다. 연질토기는 외면에 꺾은 파상문이 시문된 직구호류의 동체편과 세 격자 타날문이 시문된 호의 구연부편 등 주로 통일신라기 토기들이 많다. 이외에 도 다량의 백제토기편이 채집되고 있다. 채집된 유물들이 대부분 고급품임을 감안 할 때 상당히 중요한 사역이었던 것으 로 보인다. 그러나 관련 문헌기록이 전무한 실정이다. 토지 소유주의 경작과정에 서 백사지의 일부 유구가 훼손되었다.23) 그런데 외자 이름의 白寺가 특이하다. 무슨 의미일까? 그 하나는 백 개의 골짜기 마을이라는 것이다. 화성시사(華城市史)24)는 白谷里의 지명 유래를 이렇게 기록한다. ‘백곡리는 백(百)에서 하나(一)모자라는 99개 골짜 기라는 것이다. 그래서 百谷里가 아니라 白谷里가 되었다는 것이다.’ 그런데 이 지 명유래는 사실이 아니다. 백곡리에 99개나 되는 골짜기가 존재하지 않는다. 22) 『文化遺蹟分布地圖』 화성시, 2006. 23) 「화성 백사지의 조사성과와 성격 검토」, 황보 경, 세종대박물관 학예연구사. 24)화성시사(華城市史), 화성시사편찬위원회, 2005. 그 둘은 白寺가 백제의 사찰이었을 가능성이다. 백곡리사지 부근의 백제고분군 에서 백제 시대의 토기가 다량 발견된 것에 근거한다. 그러나 백곡리사지에서 출 토된 유물은 대부분 신라시대의 것으로 밝혀졌다.25) 또한 白寺와 百濟의 첫 글자 는 엄연히 다르다. 그 셋은 白谷里는 백골리(白骨里)라는 것이다. 栗谷을 밤골이라 하듯 白谷을 우 리말로 읽으면 백골(白骨)이 된다. 백골이 많이 묻힌 골짜기여서 그렇게 부른다는 해석이다. 이를 근거하는 것은 주변에 위치하는 백제고분군이다. 가장 큰 것은 백 곡리 제2호 고분으로 백곡리사지 의 여치산에 위치한다. 고분의 크기는 가로 1.8m×세로 3.8m의 석실 무덤이다. 苦雨를 만난 원효와 의상이 몸을 피한 土龕으 로 보아 무리가 없다.26) 필자는 위 지명 유래에서 세 번째 지명유래에 동의한다. 원효가 해골 무덤에서 깨우침을 얻었다는 唐新羅國義湘傳의 기록과 일맥상통하기 때문이다. 또 당항성( 党項城)이 백제, 고구려, 신라의 대당외교의 전진기지이었음을 근거로 든다. 또 당항성을 두고 세 나라가 뺏고 뺏기는 전투를 벌인 전장이었음에 근거한다. 그렇다고 하더라도 절의 이름을 白骨寺로 할 수는 없지 않은가? 이곳이 원효가 큰 깨달음을 얻은 장소라 하여도 백골사는 너무하지 않은가? 그래서 절을 세운 어 떤 승려가 절의 이름을 白寺로 칭명하였다고 판단한다. 백사를 세운 이는 원효나 의상일 수도 있고, 원효를 흠모하는 후대의 승려일 수도 있다. 2. 白寺下家의 정체 백곡리사지(白谷里寺址)에서 출토된 명문기와 ‘白寺下家’의 정체는 무엇일까? 白 寺에 딸려있던 요사채를 의미할까? 아니면 기와를 만든 마을의 이름을 의미할까? 두 가지 의견 중에 필자는 후자로 본다. 그렇게 추정하는 근거는 백곡리사지 아 랫마을 향기실에 있다. 토성 성안이(城內城) 마을 향기실에서 오래된 기와가 대량 25)황보 경, 위의 논문. 26)정찬모, 화성지역학연구소장. 조선 전기 신도시 무장읍치(茂長邑治)의 입지와 경관구성 294 295 향토사연구 제31집 으로 출토된 것이다. 놋쇠 그릇을 닦아 쓰던 시절, 이 지역 주민들은 성안이에서 깨진 기와편을 주워다 유기를 닦았다. 기와편이 많았다는 것은 성안이 마을이 곧 기와공장이었을 가능성이다. 백사하가에서 만든 기와는 白寺 뿐만 아니라, 唐城 건물의 축조에도 쓰였을 것이 다. 이웃한 唐城에서 ‘唐’, ‘宅’ 등의 명문기와가 출토된 것에 근거한다. E. 원랑선사탑비의 樴山寓□□□□ 圓郞禪師塔碑는 원랑이 원효의 성도처인 樴山寓□□□□에서 3개월간 수도하 였다고 기록하였다. 풍우에 지워진 비문의 장소 樴山寓□□□□에 담길 글자를 ‘ 白寺下家’로 추정한다. 향성산 아래의 향기실이 곧 백사하가이었을 것이다. 향기실(백사하가)은 백곡리사지에서 불과 400여m 떨어진 곳이다. 기와를 생산 하는 공장인 동시에 여행객의 숙소가 있었을 사하촌(寺下村)으로 판단한다. 東輿地圖 南陽地方圖27)는 신라시대의 사찰 비봉산 봉림사(鳳林寺), 고려시대의 사찰 청명산 홍법사(弘法寺), 절명산 장생사(長生寺)를 나란히 표기한다. 그런데 도 백제고분군이나 신라 유물이 출토된 鄕城山, 白寺의 표시는 아예 없다. 원효와 의상, 또는 원효를 흠모하던 어떤 승려가 건립하였을 백사는 이미 신라 후기에 폐 사된 것이 틀림없다. 신라, 고려시대 승려들의 시각에서 원효는 한낱 파계승에 지 나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명문기와 白寺, 白寺下家, 소조 佛頭가 출토되어 27)南陽地方圖, 앞의 지도. 그림 17. 백곡리사지, 남쪽에서 본 모습 그림 18. 백곡리사지, 북쪽에서 본 모습 이곳에 白寺가 있었음이 증명되었다. F. 원효가 건립한 두 개의 神勒寺 향성산 고분에서 오도송을 부른 원효는 두 개의 신륵사를 세운다. 봉미산 신륵사 와 월악산 신륵사다. 남한강변에 세운 두 개의 神勒寺는 두 개의 시사점을 준다. 성도한 원효는 자신을 神勒으로 여겼다는 것과 원효가 당항성에 오고 간 길은 남 한강 수로라는 점이다. 1. 봉미산 신륵사(神勒寺)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은 봉미산 신륵사의 연혁을 다음과 같이 기록한다. b-1. 대한불교조계종 제2교구 본사인 용주사(龍珠寺)의 말사이다. 신라 진 평왕 때 원효(元曉)가 창건하였다고 하나 정확한 것은 알 수 없다. 절 이름을 ‘신륵’이라고 한 데는 미륵(彌勒) 또는 왕사 나옹(懶翁)이 신기한 굴레로 용 마(龍馬)를 막았다는 전설에 의한 것이라는 설이 있다. 자료 b-1에서 봉미산 신륵사(神勒寺)는 원효가 창건한 사찰로 알려진다. 경기도 여주시 북내면 천송리 봉미산(鳳尾山)에 있는 절이다. 봉미산 신륵사가 번창한 것은 고려 승려 나옹선사의 행적과 관련한다. 나옹은 1376년(우왕 2), 문수회(文殊會)에서 강론하여 법명을 크게 떨쳤다. 그해 왕명에 의 해 밀성(密城:밀양) 영원사(瑩源寺)로 가던 중 신륵사(神勒寺)에 이르러 입적했다. 양주 회암사에 머물던 나옹은 한성 송파나루-양평 이포나루-여주 신륵사로 이 동하였다. 이 코스는 원효와 의상이 나옹에 앞서 남한강 수로를 따랐을 개연성이 다. 벼슬을 내놓고 안동으로 돌아가던 퇴계 이황도 이용한 뱃길이다. 조선 전기 신도시 무장읍치(茂長邑治)의 입지와 경관구성 296 297 향토사연구 제31집 2. 월악산 신륵사(神勒寺)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은 월악산 신륵사(神勒寺)의 연혁을 다음과 같이 기록한다. b-2. 대한불교조계종 제5교구 본사인 법주사(法住寺)의 말사이다. 582년( 진평왕 4)에 아도(阿度)가 창건하였다고 하나 연대의 신빙성은 없다. 그 뒤 문무왕 때에 원효(元曉)가 중창하였고, 조선 초기에는 무학(無學)이 중창하 였으며, 명종 때 사명당(四溟堂)이 중창하였다. 자료 b-2에서 월악산신륵사 또한 원효가 중창한 사찰로 알려진다. 충청북도 제천 시 덕산면 월악리 803-5번지 월악산 영봉 동쪽에 위치한다. 충청북도 유형문화재 제132호로 지정된 극락전과 보물 1296호로 지정된 제천 신륵사 3층 석탑이 있다. 월악산 신륵사는 제천시 한수면의 남한강 황강나루에 인접한다. 그러므로 원효 와 의상이 죽령이나 계립령을 넘어 남한강 수로를 따라 당항성에 왔을 가능성이 크다. 그 길은 신라 왕성 금성-계립령(죽령)-황강나루-신륵사-이포나루-당항성 에 이르는 코스였을 것으로 판단한다. G. 백곡리 百濟古墳群의 석실 무덤 1. 화성 백곡리 고분군 Ⅰ 경기도 화성시 마도면 백곡리 산91 일원에 위치한다. 향기실 마을 뒷산인 안산( 그림 19. 봉미산 신륵사 그림 20. 월악산 신륵사 案山,94m)· 망산(望山,95m)28) 자락이다. 한성 백제기의 대형고분군이다. 향기실 마을 주민의 신고에 따라 김원룡 교수가 현지답사를 실시하였고 그 내용을 학계 에 소개하면서 알려지게 되었다.29) 이후 한국정신문화연구원 강인구 교수 등에 의해 1993년 9월 안산 일대에 분포 하는 고분 중 4기에 대한 발굴조사가 이루어졌다. 이 조사를 통해 봉토가 온전한 고분이 망산까지 이어지며 분포하는 것으로 확인되었고 또 안산에서 동쪽 능선을 따라 계속 석곽묘와 고분의 흔적이 잔존하고 있음이 확인되었다. 따라서 백곡리 향기실 마을 동편의 야산 일대에는 한성 백제기의 대형고분군이 분포한다고 볼 수 있다.30) 2. 화성 백곡리 고분군 Ⅱ 경기도 화성시 마도면 백곡리 산99 일원에 위치한다. 백곡리 유물 산포지가 위 치한 능선을 따라 동북쪽의 여치산(輿峙山,102.2m)31) 정상부 일대다. 빽빽한 수 목들 사이에서 흩어진 고분 석재와 내부가 훤히 드러난 석곽묘 등을 볼 수 있다. 또, 파괴된 석곽 주변에서 1점의 경질 토기편을 채집할 수 있었다. 잔존부위가 작아 정확한 판단은 어려우나 일단 거친 물레 흔이 내면에 남아있는 목이 좁은 병 형 토기로 고려시대의 것으로 판단된다.32) 3. 화성 백곡리 고분군 Ⅲ 경기도 화성시 마도면 백곡리 산94-1 일원에 위치한다. 이 고분군은 백곡리 향 기실 마을 동편의 해발 123m 야산(여치산) 정상부로 올라가는 능선에 위치한다. 비교적 경사가 급하고 관목이 우거져 있어 시야 확보가 어렵지만, 간간이 흩어져 28)안산·망산, map,ngii.go.kr, 국토정보플랫폼, 국토정보맵, 1970년대. 29) 「화성군 마도면 백곡리 백제고분과 토기류」, 김원룡, 1971. 30) 「화성백곡리 고분」, 『백제연구2집』, 충남대학교백제연구소, 한국정신문화연구원, 1994. 31)여치산(輿峙山,102.2m), 앞의 지도. 32)위의 논문. 조선 전기 신도시 무장읍치(茂長邑治)의 입지와 경관구성 298 299 향토사연구 제31집 있는 고분 석재들과 석곽묘의 측벽이 노출된 것을 볼 수 있다. 주변에서 채집된 유 물도 없고 고분의 구조 자체도 파악이 어려우므로 시기 판단은 어렵지만 대체로 인근의 고분군들과 유사한 것으로 여겨진다.33) 4. 화성 백곡리 유적 경기도 화성시 마도면 백곡리 산103 일원에 위치한다. 육일리에서 백곡리로 넘 어가는 고갯마루 우측 능선 일대에 위치한다. 구릉지의 북쪽은 이미 터파기 공사 로 인해 오래전에 훼멸되었다. 소규모 공장건립이 계획되어 한국문화재보호재단 에서 지표조사와 시굴, 발굴조사를 실시하였다. 조사가 진행된 것은 이 유적이 위치한 능선으로 남양장성이 지나간다고 경기도 박물관에서 간행한 문화유적 분포지도에 표기되어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조사결 과 인위적인 축성의 흔적은 전혀 발견되지 않았다. 조사 과정에서 의외로 백제의 저장구덩이와 고려시대로 추정되는 기와가마, 성격이 부정확한 건물지 등이 조사 되었다. 인접한 곳에 이번 조사를 통해 새로 확인된 백곡리사지가 위치하고 있어 관련성이 있는 것으로 여겨진다.34) 33)위의 논문. 34) 「화성백곡리 근린생활시설부지 문화유적 시굴조사 지도위원회의 자료」, 한국문화재보호재단, 2005. 그림 21. 백곡리고분 8호분 그림 22. 백곡리 출토 유물 H. 苦雨와 白骨觀에 대한 필자의 소견 1. 백골관(白骨觀) 시신이 썩어서 백골이 되는 모습을 관(觀)하는 수행 방법이다. 다른 말로 고골관(枯 骨觀)이라고도 한다. 신라의 자장율사가 산에 들어가 닦은 수행법으로 유명하다. 자장(慈藏)35)은 원효보다 27살 위의 승려로 신라의 대국통(大國統)이었다. 당에 유학하고 돌아올 때 대장경 한 질과 진신사리 등을 가져온 왕족 승려였다. 선덕여 왕이 자장을 대국통에 임명하여 분황사와 황룡사의 주지로 머물게 하였다. 자장 율사가 분황사를 떠나자 원효가 분황사 주지의 임무를 이어받았다. 자장과 원효는 팔공산수도사36)를 함께 건립하고 수도한 도반이었다. 그러므로 한 세대 아래인 원효도 황룡사에서 강론한 자장율사의 보살계본을 들었을 것이 다. 또 자장율사가 수행한 백골관도 익히 알고 있었을 것이 분명하다. 늦은 자식으로 태어난 자장율사는 어려서 부모상을 당하였다. 원효 또한 자신을 낳은 어머니가 산후 후유증으로 죽었다. 두 승려의 출가 동기의 하나로 본다. 35)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자장의 성은 김씨, 속명은 선종랑(善宗郞)으로 신라 제일의 귀족인 진골 출신 이며 소판(蘇判) 벼슬을 지낸 무림(茂林)의 아들이다. 36)팔공산수도사, 647년(진덕왕 1), 자장(慈藏, 590∼658)과 원효(元曉, 617∼686) 두 스님이 함께 금 당사(金堂寺)라는 이름으로 창건했다고 전한다. 그림 23. 분황사 그림 24. 팔공산수도사 조선 전기 신도시 무장읍치(茂長邑治)의 입지와 경관구성 300 301 향토사연구 제31집 2. 무열왕 김춘추의 죽음에 대한 의견 삼국통일의 주역이었던 신라 무열왕 김춘추는 661년 6월에 죽었다. 대당 유학을 떠난 원효와 의상이 당항성에 머무를 때다. 삼국사기에 따르면 무열왕 김춘추는 백제 부흥군과 벌인 금마전투에서 전사한 것으로 추정된다. 그리고 원효가 대당 유학을 포기한 것도 어쩌면 무열왕의 죽음과 관련이 있다고 생각한다. 장인어른 의 죽음에 입당 유학을 포기하고 당주계 직산(樴山)의 고분에서 백골관을 수행한 것으로 판단한다. 삼국사기 신라본기는 무열왕37) 김춘추의 죽음을 다음과 같이 기 록한다. c-1. 6월에 大官寺의 우물물이 변하여 피가 되고 금마군(金馬郡:익산)의 땅 에서 피가 흘러 너비가 5步나 되더니 왕이 돌아갔다. 시(諡:시호)를 무열(武 烈)이라 하고 영경사(永敬寺) 북쪽에 장사하였다. 묘호(廟號)를 올려 태종(太 宗)이라 하였다. 당의 고종이 부음을 듣고 낙성문에서 애도식을 거행하였다. 사료 c-1은 신라군과 백제 부흥군이 벌인 금마전투의 기록이다. 무열왕 김춘추 가 금마군의 대관사에서 전사하였음을 시사하는 대목이다. 금마군에서 일어난 백 제 부흥군과 벌인 전투였다. 金馬郡에는 백제 무왕이 세운 미륵사와 대관사(왕궁사)가 있다. 백제 무왕이 창 건한 사찰로 ‘관궁사(官宮寺)’, ‘궁사(宮寺)’, ‘관사(官寺)’라는 명문 기와가 출토되 었다. 금마군의 대관사는 海路로 왜에 원군을 요청할 수 있는 백제의 또 다른 궁성 이었다. 661년 4월 10일, 신라군은 백제 부흥군에 연전연패하고 있었다. 대총관 소정방(蘇 定方)이 소수의 병력만을 남기고 13만 당군을 철수한 때문이었다. 소정방이 서둘러 당으로 돌아간 까닭은 무엇일까? 그것은 고구려군의 발 빠른 기병 공격을 우려한 때 37)무열왕, 삼국사기(상), 김부식지음 이병도역주, 을유문화사, p.134. 문이었다. 삼국사기는 빈골양(賓骨壤,고부)38) 전투를 다음과 같이 기록한다. c-2. 661년 4월 19일, (부득이) 군사를 돌이켜 대당(大幢)과 서당(誓幢)은 먼저 보내고 하주(下州) 군사가 뒤에 떨어져 빈골양(賓骨壤,고부)에 다다를 때 백제 군사를 만나 서로 싸우다가 패퇴하였다. 죽은 사람이 비록 적었으나 무기와 군수품을 매우 많이 잃었다. 왕이 大軍의 패보를 듣고 크게 놀라 장군 김순, 진흥, 천존, 죽지를 보내 군 사를 증원케 하였는데, 대군(大軍)이 가소천(加召川,거창 加川)에서 퇴각한 다는 소식을 듣고 돌아왔다. 왕은 여러 장군의 패적(敗績)을 논하고 차등하 여 벌을 주었다. 사료 c-2는 무열왕 김춘추가 사망하기 두 달 전의 기록이다. 빈골양 전투에서 신 라군은 백제 부흥군에 대패하였다. 죽은 사람이 적었으나 무기와 군수품을 매우 많이 빼앗겼다고 기록한다. 大軍의 패보를 듣고 크게 놀란 무열왕이 장군 김순, 진흥, 천존, 죽지를 보내 군사 를 증원하였다. 그런데도 신라군은 패하여 돌아왔다. 무열왕이 대노하여 전쟁에 패한 장수들에게 벌을 내려 군기를 다잡았다. 661년 5월 9일, 고구려와 말갈이 신라를 협공하였다. 백제 부흥군을 돕는 고구 려와 말갈군은 신라의 술천성(述川城)과 북한산성(北漢山城)을 공격하였다. 삼국 사기는 술천성(述川城)과 북한산성(北漢山城)39)전투를 다음과 같이 기록한다. c-3. 661년 5월 9일, 고구려 장군 뇌음신(惱音信)이 말갈장군 생해(生諧)와 군(軍)을 연합하여 술천성(述川城,여주)을 내공(來攻)하였다. 이기지 못하자 북한산성(北漢山城)을 공격하였다. 포차(抛車)를 벌여 놓고 돌을 날리니, 그 것에 맞는 비옥(陴屋,성가퀴)은 곧 무너졌다. 城主 大舍 동타천(冬陀川)이 사람을 시켜 마름쇠를 성 밖에 던져 펴 놓으니 38)빈골양(賓骨壤,고부), 위의 책, 133쪽 39)북한산성(北漢山城), 위의 책, 133쪽 조선 전기 신도시 무장읍치(茂長邑治)의 입지와 경관구성 302 303 향토사연구 제31집 인마가 다니지 못하였다. 또 안양사의 창고를 헐어 그 재목을 실어다가 성의 무너진 곳마다 누로(樓櫓)를 만들어 굵은 밧줄로 망을 얽고 우마의 가죽이나 솜옷 등속을 걸어 매고 그 안에다 노포(弩砲)를 준비하여 지켰다. 이때 성안에는 단지 남녀 2,800명이 있었는데 성주 동타천이 어린이와 약 자들을 격려하여 강대한 적과 대적하기 20여 일에 이르렀다. 양식이 다하고 힘은 지쳤으므로 정성껏 하늘에 빌었더니 홀연히 큰 별이 적의 진영에 떨어 지고 또 뇌우가 진동하니 적이 의심을 내고 두려워하여 드디어 에움을 풀고 물러갔다. 왕은 동타천을 가상히 여겨 대나마(大奈麻)의 자리(位)에 올렸다. 압독주(押督州:경산)를 대야(大耶:합천)에 옮기고 아찬 종정(宗貞)을 도독( 都督)으로 삼았다. 사료 c-3은 고구려가 백제 부흥군을 도와 신라를 협공한 기사이다. 고구려 장군 뇌음신과 말갈장군 생해의 술천성과 북한산성의 공격이었다. 신라 대군이 백제 부흥군에게 대패한 지 불과 18일 만의 일이었다. 삼국사기에 등장하는 술천성은 지금의 경기도 여주시 금사면 일대다. 여주시 대신면 천서리에 신라 산성 파사산 성(婆娑山城)이 위치한다. 빈골양 전투의 패배에 이은 고구려와 백제 부흥군의 협공에 무열왕 김춘추는 크 게 당황하였다. 북한산성의 城主 동타천(冬陀川)을 도울 뾰족한 방도가 없었다. 북한산성 전투에 신라군을 투입한다면 백제 부흥군은 신라 왕성을 공격하여 올 것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무열왕 김춘추는 북한산성 지원을 포기하였다. 그런데 도 성주 동타천은 어렵사리 북한산성을 지켜냈다. 이에 무열왕은 성주 동타천을 칭찬하여 대나마(大奈麻)의 자리(位)에 올렸다. 대나마는 진골과 5두품 이상이 받을 수 있던 관위였다. 신라의 골품제에서 5두 품 이하는 대나마 이상의 관위를 받을 수 없었다. 무열왕이 성주 동타천의 관위를 10등급에서 5등급으로 올린 것은 매우 특별한 조치였다. 빈골양 패전 직후, 신라 무열왕은 경산에 두었던 압독주의 치소를 대야성으로 옮 겼다. 무열왕이 경산에 있던 압독주를 대야성(합천)로 전진 배치한 것은 백제 금마 군을 공취하기 위한 사전 포석으로 보인다. 그리고 한 달 후인 6월 □일, 신라 무열 왕이 죽었다. 백제 금마군의 전투를 직접 독전하다가 전사하였던 것으로 판단한다. 삼국사기는 빈골양 전투(4월 19일)와 북한산성 전투(5월 9일)의 날짜까지 세세 히 기록한다. 그런데 무열왕 김춘추가 죽은 날짜는 6월이라고만 기록한다. 무슨 까닭이 있는 것일까? 삼국사기를 쓴 신라 왕족 김부식이 빼버린 것은 아닐까? 백 제 부흥군과 있었던 금마군 전투의 패전을 부끄러이 여겨 은폐한 의도로 보인다. 김춘추의 묘호는 태종, 시호는 무열왕이다. 무열(武烈)이라는 시호는 그가 삼국 통일의 피 흘리는 전장에서 일생을 보낸 인물임을 가리킨다. 백제 대관사의 우물물이 피가 되고, 금마군의 땅에 너비가 5步나 되는 피가 흘렀 다는 수식은 매우 처절한 전투이었음을 의미한다. 신라군과 백제 부흥군이 벌인 금마군 전투에서 무열왕이 전사하였을 가능성을 주장하는 근거다. 3. 苦雨에 따른 白骨觀의 수행 唐新羅國義湘傳은 원효가 당주계 직산의 고분에서 성도하였다고 기록한다. 고우(苦雨)를 피하여 토감(土龕)에 들었고, 아침에 이르러 해골이 있는 고분(古 墳)인 줄 알았다. 다음 날도 苦雨가 그치지 않아 고분에서 또 하룻밤을 묵었다. 土龕인 줄 알았던 첫날밤에는 잠자리가 평안했다. 해골 있는 古墳인 줄 알고 난 다음 날 밤에는 귀신에 시달렸다. 그래서 일체유심조의 큰 깨달음을 얻었고 당나 라 유학을 스스로 접었다. 원효는 고분에서 ‘心生則種種法生 心滅則龕墳不二’의 오도송(悟道頌)을 부른다. ‘마음이 일어나므로 갖가지 현상이 일어나고 마음이 사라지니 토감과 고분이 둘 그림 25. 대관사지(왕궁사지) 5층탑 그림 26. 대관사지(왕궁사지) 출토 기와 조선 전기 신도시 무장읍치(茂長邑治)의 입지와 경관구성 304 305 향토사연구 제31집 이 아니다’는 깨달음이다. 진리는 결코 밖에서 찾을 것이 아니라 나 자신에게서 찾 아야 한다는 것이다. 이 기록은 원효가 苦雨 때문에 해골 무덤에서 백골관을 수행하였다는 것이다. 여 기서 苦雨는 장인어른 김춘추의 갑작스런 죽음에 쏟아지는 피눈물로 볼 수 있다. 부음을 받기 전의 어제는 土龕에서 편안한 잠을 잤다. 그러나 무열왕이 죽었다는 부고를 받은 오늘은 도저히 잠을 이룰 수 없었다는 것이다. 그때 원효는 하늘이 무 너지는 苦雨를 맛보았을 것이다. 이 대목에서 필자는 비틀스의 노래 를 떠올린다. 20세기, 전 세계 젊 은이들의 가슴을 흔들어 놓았던 노래 ‘어제’의 가사다. 사랑하는 이와 만나던 어 제는 행복했다. 그러나 이별 통보를 받은 오늘은 처절했다. 피눈물이 앞을 가리는 것이다. 羅·濟전쟁의 시대적 상황에서 원효는 현실을 직시하였을 것이다. 삼한통일이라 는 험난한 여정에 오른 김춘추와 김유신의 앞날을 걱정했을 것이다. 대야성에서 비롯된 복수혈전에 백제와 신라의 싸울아비들이 수없이 죽어 나갔다. 그런데 그 과정의 초입에서 첫 단추가 떨어져 버렸다. 요석공주의 첫 남편이었던 김흠운은 물론 신라왕 김춘추도 전장에서 사라지는 형편이었다. 피가 피를 부르는 전쟁은 점차 더 거세어졌다. 김춘추와 김유신이 시작한 삼한통일 은 허업일 수밖에 없었다. 이런 사태를 외면할 수 없었던 원효는 고민에 고심을 거듭 하였을 것이다. 그래서 스스로 무덤에 들어가 백골관을 수행하였을 것이다. 원효의 입장에서 苦雨에 따른 龕墓不二의 깨달음을 필자의 시각으로 쓰면 다음과 같다. 원효와 의상은 본국(本國) 해문(海門) 당주계(唐州界) 직산(樴山)에 이르러 큰 배를 구해 창파를 건너려고 하였다. 여행의 중도에서 원효는 뜻하지 않은 고우(苦雨)를 만났다. 장인어른 무열왕 김춘추가 금마의 전투에서 전사하였 다는 부고였다. 피눈물이 눈 앞을 가렸다. 석가의 종족을 자처하는 무열왕이 어찌 한순간 에 비명횡사한다는 말인가? 원효는 토감(土龕)에 들어가 두려운 마음을 진 정코자 기도하였다. 그러나 두려운 마음이 조금도 진정되지 않았다. 원효의 기도는 질척해서 한 발자국도 앞으로 나아갈 수 없었다. 피눈물만 자꾸 흘러 내렸다. 원효는 또 하루를 고분(古墳)에서 기도했다. 밤이 깊기도 전에 갑자기 귀신 이 나타나 마음을 어지럽게 했다. 그때 원효가 탄식하며 깨달음을 노래했다. “어제는 토감에서 편안하더니, 오늘은 고분에서 근심이 많구나! 알겠다. 마음이 생기면 갖가지 것들이 생겨나고, 마음이 사라지면 토감과 고분이 둘 이 아니라는 것을, 세상의 모든 일은 오직 마음일 뿐이요, 모든 존재는 오직 인식일 뿐이다. 마음밖에 法이 없으니 어찌 따로 구하랴.” 나는 당나라에 들어가지 않겠다. 당나라에 가서 설법한들 무슨 소용이 있 으랴! 서라벌로 돌아가 무열왕과 나제전투에서 희생된 군사들의 영면을 기 도하겠다. 삼국사기에 무열왕이 죽은 해는 661년 6월이었다. 58세의 나이였다. 당주계에 서 무열왕의 부음을 들었을 때, 원효는 다시 생각하였을 것이다. 당에 건너가 황족 들과 고승들을 모아 놓고 멋지게 강설하려던 자신의 모습을 되돌아보았을 것이 다. 불교가 황족과 귀족을 위한 도구가 되어서는 안 된다고 주장을 펴는 으쓱한 자 신을 그려보았을 것이다. 그러다가 苦雨로 인하여 ‘龕墓不二’의 깨우침을 얻고 성 도하여 당나라에 가기를 그만두었을 것이다. 이후, 원효는 포교와 저술에 전념하는 것으로 생애를 마감하였다. 경상북도 경주 시 문무대왕면 기림로에 위치한 함월산기림사(祇林寺)40)와 골굴사(穴寺)41)였다. 승려의 길로 들어선 소년 원효가 천축국에서 건너온 光有聖人으로부터 불경을 배 우던 사찰이었다. 원효가 당대 그 어떤 승려보다 불경의 논소(論疏)에 뛰어난 것 은 일찍이 광유성인으로부터 범어(梵語)를 공부한 결과였다. 구랍 70세였다. 40)기림사, 643년(선덕여왕 12) 천축국(天竺國)의 승려 광유(光有)가 창건하여 임정사(林井寺)라 부르던 것을, 뒤에 원효(元曉)가 중창하여 머물면서 기림사로 개칭하였다. 기림사란 석가모니의 생존 때에 세워 졌던 인도의 기원정사(祈園精舍)를 뜻한다. 41)골굴사(혈사), 약 1,500여 년 전 인도에서 온 광유 선인 일행이 경주 함월산에 정착하면서 골굴사와 기림 사를 창건했다고 한다. 이 중에서 골굴사는 광유스님 일행이 인도의 석굴 사원을 본떠서 석굴사원 형태로 조성한 국내에서 가장 오랜 된 석굴사원이다. 조선 전기 신도시 무장읍치(茂長邑治)의 입지와 경관구성 306 307 향토사연구 제31집 Ⅳ. 맺음말 A. 결론 《남양지도》에 따르면 신라 唐州界 海門의 위치는 분명하다. 경기도 화성시 남양 반도가 당주계이고 마도면 해문리의 성목쟁이가 海門이다. 《월광사원랑선사대보선광탑비(月光寺圓朗禪師大寶禪光塔碑)》는 승려 원랑이 원효의 성도처인 직산(樴山)의 □□□□에서 머물렀다고 기록하였다. 이 기록에 등장하는 樴山은 지금의 화성시 마도면 백곡리의 여치산(輿峙山)이다. 직산은 말 뚝산이고 여치산은 수레산의 의미를 가진다. 시대에 따라 신라의 직산은 고려의 향성산, 조선의 여치산으로 바뀌어 불렸다. 원효가 성도한 직산을 찾아간 원랑은 백사지 아래 白寺下家에서 3개월간 수도하였다. 『송고승전(宋高僧傳)』 「당신라국의상전(唐新羅國義湘傳)」은 원효가 본국(本國) 해문(海門) 당주계(唐州界)의 토감(土龕)에서 깨달음을 얻었다고 기록하였다. 이 기록의 本國은 신라이고, 海門은 화성시 마도면 해문리의 성목쟁이고, 唐州界는 경기도 화성시 남양반도이며, 土龕은 마도면 백곡리의 百濟古墳이다. 그림 27. 골굴사(穴寺) 그림 28. 기림사(祇林寺) 《보원사법인국사보승탑비(普願寺法印國師寶乘塔碑)》는 승려 탄문(坦文)이 원 효보살과 의상대덕이 머물렀던 향성산(香城山) 절터에서 수년간 수도하였다고 기 록하였다. 이 기록의 香城山은 지금의 마도면 백곡리의 여치산이다. 여치산 아래 에 향기실이 있어 그 위치를 분명히 한다. 원효가 세운 神勒寺는 두 곳이다. 경기도 여주시 남한강변에 세운 봉미산신륵사 와 충청북도 제천시 한수면 남한강변에 세운 월악산신륵사였다. 圓朗禪師塔碑의 기록에 따르면 신라인들은 성도한 원효를 신승(神僧)이라 불렀고, 一切唯心造의 깨달음을 얻은 원효는 자신을 신륵(神勒)으로 여긴 듯하다. 남한강변에 신륵사를 세운 것에 근거하면 원효와 의상이 당주계에 오고 간 길은 신라의 왕성 금성-계립령(죽령)-남한강-당항성을 잇는 당항성로(党項城路)였다. 원랑선사탑비, 당신라국의상전, 법인국사탑비, 남양지방도에 따르면 원효가 깨 달음을 얻은 장소는 분명해진다. 그 장소는 新羅 海門 唐州界 鄕城山의 土龕이고, 그 장소는 경기도 화성시 마도면 백곡리(白谷里)의 백제 古墳이다. 율곡(栗谷)의 그림 29. 원효성사의 진영 조선 전기 신도시 무장읍치(茂長邑治)의 입지와 경관구성 308 309 향토사연구 제31집 우리말 이름이 ‘밤골’이듯 백곡(白谷)의 우리말 이름은 ‘백골’이다. 그런데도 원효의 성도처인 백곡리의 鄕城山 白寺址는 제대로 알려지지 않았다. 왜일까? 원효를 파계승으로 이단시한 신라와 고려 승려들의 질시였을 것이다. 또 불교를 철저히 지워버린 유생들의 저주 때문이었을 것이다. 그래서 원효가 머물 렀던 흔적이 철저히 파괴되었을 것으로 판단한다. 그러나 白谷里寺址에서 출토된 신라시대의 소조 佛頭와 白寺, 白寺下家의 명문기와, 그리고 향성산 백제 고분에 의해서 원효의 성도처는 분명하게 밝혀진다. B. 제언 경기도 및 화성시, 경상북도 및 경산시 경주시에 바란다. 하나, 海門을 세워주기 바란다. 그 장소는 경기도 화성시 마도면 청원리 성목쟁 이다. 그 형태는 사찰의 일주문 형태가 좋을 것이다. 海門은 661년 6월, 원효와 의 상이 지난 길이며 백제, 고구려, 신라의 대당외교의 관문이었다. 둘, 구화역(仇火驛,갯벌역)을 복원하기 바란다. 그 장소는 경기도 화성시 마도면 해문리 역골이다. 驛의 모습은 정조대왕 대의 화산릉행차도에 실린 자료를 참고 하면 가능한 일이다. 셋, 향성산 白寺를 복원하기 바란다. 그 장소는 경기도 화성시 마도면 백곡리 산 104번지다. 그 모습은 「백곡리 유적(한국문화재보호재단 2008)」과 「화성 백사지 의 조사성과와 성격 검토, 2018」에 근거하면 될 것이다. 이곳에 백사를 복원하고 백제 고분 모형을 세워 원효의 사상을 알리는 교육의 장 으로 조성할 것을 희망한다. 참고문헌 · 1. 《월광사원랑선사대보선광탑비문(月光寺圓朗禪師大寶禪光塔碑文)》,『譯註韓國古代金石文』Ⅲ 국학연구원,1992. · 2. 《보원사법인국사보승탑비문(普願寺法印國師寶乘塔碑文)》,한국금속전문-中世上,1984. · 3. 『화성군 마도면 백곡리 백제고분과 토기류』,김원룡,1971. · 4. 「화성백곡리 고분」,『백제연구2집』,충남대학교백제연구소,한국정신문화연구원,1994. · 5. 『화성시 마도면 백곡리 산 103번지 문화재 지표조사 보고서』,한국미술사연구소,2004. · 6. 『화성백곡리근린생활시설부지문화유적시굴조사지도위원회의자료』,한국문화재보호재단,2005. · 7. 『화성시사』,화성시사편찬위원회,2005. · 8. 『화성시의 역사와 문화유적』,토지박물관,2006. · 9. 『시화호의 역사와 문화』,한신대학교박물관,2006, · 10. 『탄도~송산간도로확·포장공사예정구간문화유적1차발굴조사약보고서』,한국문화재보호재단,2004. · 11. 『당성지표조사보고서』,화성군,1993. · 12. 『당성 1차발굴조사보고서』,한양대학교박물관,1998. · 13. 『도서해안지역 종합학술조사 1』,경기도박물관,2000. · 14. 『白谷里寺址』,한국문화재보호재단 발굴자료,2008. · 15. 『제1회 화성불교문화유적 학술발표회』,화성문화원,한국불교문인협회,화성시,(사)한국불교 학회,2017. · 16. 『제2회 화성불교문화유적 학술발표회』,화성문화원,한국불교문인협회,화성시,(사)한국불교 학회,2018. · 17. 『제3회 화성불교문화유적 학술발표회』,화성문화원,한국불교문인협회,화성시,(사)한국불교 학회,2019. · 18. 『화성 당성과 고대 포구』,화성시,한양대학교문화재연구소,동아시아고고학연구소,2017. · 19. 「화성 백사지의 조사성과와 성격 검토」,황보 경,제12회 화성시 역사문화 학술세미나,화성시,2018. · 20. 『원효성사 대각처는 화성에 있다』,화성지역학연구소(http//cafe.dau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