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빌4:14-23절) 향기로운 제사
원래 로마는 이태리 중부에 있는 작은 도시국가였습니다. 로마인은 게르만민족처럼 체격이 크지도 않았고, 그렇다고, 그리스인 같이 지식이나 학문이 뛰어나지도 않았습니다. 혹은 카르타고인 처럼 무역에 재능이 있는 것도 아니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로마는 아주 빠른 시간 안에 지중해를 장악하며, 세계를 주름잡는 대제국으로 발전했습니다. 그리스 사람들은 자기들같이 지식이 뛰어난 나라가 망하고, 무식한 로마가 세계 최강대국 된 것을 이해할 수가 없었습니다.
그래서 초창기에 로마 역사에 관심을 가졌던 사람들은 로마인이 아니라, 로마에 노예로 붙들려온 그리스인들이었다고 합니다. 로마가 가진 위대한 정신은 철저하게 현실에 바탕을 둔 것이었습니다.
로마 군인들은 단 하루를 숙영(宿營)하더라도 기습에 대비해서 튼튼한 목채(木寨)진영을 만들었습니다. 즉 진격할 때는 미리 도로를 만들고, 다리를 세워서 병력이나 군수의 이동을 용이하게 했습니다.
그리고 전쟁에서 패한 지휘관을 처벌하지 않았던 것을 보면, 감정적으로 대응하지 않았던 것 같습니다.
카르타고 같은 데서는 지휘관이 패배하면, 비참하게 공개처형을 했다고 합니다. 그러나 로마는 지휘관은 패배에 대한 정신적 고통만으로도 충분히 처벌을 받았다고 생각했습니다. 오히려 다음 전투에 다시 그 지휘관을 투입해서 충성할 수 있는 기회를 주었습니다.
그리고 집정관(執政官)들이나 황제가 전쟁에 이기고 돌아오면, 막대한 개인 재산을 내서 로마의 화려한 시설들을 건축했습니다. 즉 노블레스 오블리주(noblesse oblige)를 실천했던 것입니다.
로마가 세계를 제패했던 것이 결코 우연이 아니었다고 말하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당시 로마같이 철저하게 정신적으로 무장된 나라가 없었기 때문에 로마는 준비된 국가였다는 것입니다.
하지만 이렇게 준비된 나라가 쇠퇴하게 됩니다. 즉 로마의 정신적인 퇴보와 함께 로마의 멸망이 진행되었습니다.
지금도 마찬가지입니다.
위대한 성공을 거두려면, 다른 사람들을 능가하는 위대한 정신을 가져야 합니다. 하지만 정신만 위대하다고 성공할 수 있는 것은 아닙니다. 그 정신이 철저하게 현실에 바탕을 둔 것인가? 가 아주 중요합니다.
기독교가 그 짧은 기간 안에 로마를 정복하고, 전 세계에 복음(福音)을 전할 수 있었던 것은 바로 현실에 뿌리내린 위대한 정신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기독교 사상(思想)은 다른데서 모방 해 온 것도 아닙니다. 기독교 안에는 위대한 하나님의 사랑과 위대한 구원이 있으며, 전 세계의 신분과 인종을 뛰어넘어서 하나가 되게 하는 위대한 사상이 있었습니다.
그리고 이것은 철저하게 현실에 바탕을 둔 사상입니다. 교회는 굳이 큰 신전(神殿)을 필요로 하지 않았고, 어는 곳에 모이든지 두 세 사람이 모인 곳에는 하나님이 함께 하셨습니다.
그리고 기독교는 새로 믿는 사람들에게 죄를 버리고, 세례 받을 것만을 요구했습니다. 바로 이것이 가장 짧은 시기에 전 세계에 복음(福音)이 전파된 비결이었습니다.
마찬가지로 오늘날의 기독교에도 현실을 배제하지 않는 위대한 신앙이 있어야 하고, 위대한 부흥이 있어야 합니다.
본문은 사도 바울이 세계 여러 곳을 다니면서 복음(福音)을 전할 때에 빌립보 교회가 자신을 위해 헌금한 것에 대해 감사하는 내용입니다.
우리는 대개 하나님의 나라는 믿음만 있으면 충분하고, 물질은 전혀 불필요한 것으로 생각하기 쉽니다. 특히 최근 우리나라 교회 안에서는 지나치게 헌금을 강조하는 바람에 교인들이 상처를 입고, 교회를 떠나는 경우가 많은 것을 볼 수 있습니다.
물론 교인들 중에는 믿음이 부족해서 교회에 헌금을 내는데 부담을 느끼는 분들도 많이 있을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교회가 전혀 헌금없이 정신적인 믿음만 가지고, 유지되거나, 선교를 할 수 있는 것은 아닙니다.
물론 하나님의 일에 헌금이 전부는 아닙니다. 역시나 중요한 것은 믿음이고, 말씀의 능력입니다. 그렇다고 아무런 물질적지원 없이 손가락만 빨면서 하나님의 일을 할 순 없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이 부분에 적절한 균형이 필요합니다.
우리는 지나친 이상주의에 빠져서 물질을 하찮게 여기는 것도 위험한 생각이고, 또 올바른 믿음 없이 무조건 돈만 가지고, 하나님의 일을 하려는 것도 지양해야 합니다. 우리의 믿음이 성장하면, 그만큼 더 하나님의 일에 자발적으로 부담을 지도록 하는 것이 올바른 것이라고 봅니다.
Ⅰ.빌립보 교인들의 헌금
빌립보는 사도 바울이 소아시아를 떠나서 그리스 지역에서 처음으로 복음을 전한 곳이었습니다. 이곳에서 사도 바울은 극적인 경험을 합니다.
즉 귀신들려서 점(点)치는 여자 아이의 귀신을 쫓아내고, 그 일로 고발을 당해 감옥에서 매를 맞고, 쇠사슬에 묶여 있었는데, 갑자기 하나님의 능력이 나타나면서 쇠사슬이 풀어지고, 옥문이 열렸습니다.
그때 놀란 간수가 예수를 믿고, 세례를 받게 되었습니다. 이렇게 놀라운 사건이 일어난 빌립보 교회는 사도 바울에 대하여 아주 특별한 애정과 신뢰를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인지, 빌립보 교회는 아무도 시키지 않았는데도 자발적으로 사도 바울을 위해서 선교비를 보냈습니다.
사도 바울은 이것이야말로 빌립보 교회가 사도 바울의 선교에 동참하는 것이며, 특히 그의 괴로움에 참여하는 것이라고 말합니다.
4:14절)그러나 너희가 내 괴로움에 함께 참여하였으니 잘 하였도다”
사도 바울은 이방인들에게 복음(福音)을 전하면서 많은 괴로움을 받아야만 했습니다. 즉 사도 바울은 여러 낮선 땅을 돌아다니면서 사람들로부터 미움을 받고, 배척을 당하기도 했습니다. 특히 유대인들의 집요한 반대도 있었습니다.
여러 문제들 중, 늘 사도의 마음을 무겁게 한 건 바로 금전적인 문제였습니다. 사도 바울은 어떤 특정 교회로부터 금전적인 후원을 받지 못했고, 그래서 궁핍하고, 어려울 때가 많았던 것 같습니다.
이때 오직 빌립보 교회만 사도 바울을 위해서 선교비를 보내주었습니다.-
사도 바울은 이것에 감사하면서 *너희가 내 괴로움에 함께 참여하였으니 잘 하였다*고 말합니다.
대개 처음 어느 지역에 복음(福音)을 전하는 전도자들은 교회로부터 생활비를 받지 못하기 때문에 먹고 사는 문제가 아주 어려울 때가 많습니다.
그런데 놀라운 것은 하나님께서 어떤 성도들의 마음을 감동시켜주셔서 집 세도 낼 수 있게 해주시고, 먹을 것과 입을 것을 공급해주시는 것입니다.
복음을 전하는 자가 이런 하나님의 공급을 신뢰하지 못하면, 불안해서 복음(福音)을 전할 수 없을 것입니다.
특히 해외 선교사들은 생활비 전액을 본국의 후원에 의지해야 합니다. 그래서 선교사들에게 가장 두려운 것은 교회가 그들을 잊는 것입니다. 만약 선교사가 교회나 교인들로부터 그 존재가 잊혀 지게 되면, 기도도 해주지 않을 것이며, 물질적인 후원도 끊어지게 될 것입니다.
그래서 선교사들은 그들의 존재와 사역을 알리기 위해 기도편지를 보내거나, 사역보고를 해서 기도와 물질적 후원이 끊어지지 않게 해야 합니다.
15-16절)빌립보 사람들아 너희도 알거니와 복음의 시초에 내가 마게도냐를 떠날 때에 주고받은 내 일에 참여한 교회가 너희 외에 아무도 없었느니라.”
사도 바울은 마게도냐를 떠날 때는 *복음의 시초*였습니다. 즉 그는 이때를 자신의 본격적인 이방인 사역의 시초로 생각하고 있습니다. 처음에는 할 수 있는 대로 유대인들을 중심으로 복음(福音)을 전하려고 했는데, 유대인들은 복음(福音)을 거부했고, 오히려 그를 핍박했습니다.
반면 이방인들은 복음(福音)에 뜨거운 반응을 보였습니다. 그래서 그는 유대인들을 포기하고, 이방인들 중심으로 복음(福音)을 전하게 됩니다. 사도 바울이 본격적으로 이방인들을 대상으로 복음을 전하자, 그때부터 사도 바울에 대한 지원도 끊어졌습니다.
유대인들은 복음(福音)이 이방인들에게 전해지는 것을 싫어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천막짓는 일을 하면서 자비량으로 복음(福音)을 전하게 되었습니다.
이런 상황에서 빌립보 교회가 사도 바울을 물질적으로 지원했다는 것은 바울에게 있어서는 잊지 못할 일입니다.
본문에서 사도 바울은 *주고받은 일에 너희 외에는 아무도 없었다.*고 말합니다. 사도 바울은 유대인들에게 밉게 보인 후, 그를 후원하는 교회들이 거의 없었다는 말입니다.
더군다나 사도 바울은 유대인 중심의 교회에서는 말씀을 전할 기회가 없었습니다. 그러니, 사도 바울이 그 교회들에게서 물질적인 지원을 받았을리 만무합니다.
하지만 빌립보 교회는 사도 바울을 위하여 헌금을 했습니다. 사도 바울이 데살로니가에 있을 때에도 빌립보 교회는 적어도 한 번 이상 헌금을 보냈습니다. 이것은 빌립보 교회가 사도 바울의 사역을 인정한다는 뜻이었습니다.
물론 빌립보 교회의 반응에 따라 바울의 사도직이 좌우되는 것은 아니지만, 그들의 인정과 지원은 사도 바울에게 엄청난 위로가 되었습니다. 사도 바울은 빌립보 교회의 지원을 하나님의 위로로 받아들였습니다.
즉 주께서 사도와 그의 사역을 잊지 않고 계시다는 증거로 생각하고, 위로를 받았습니다. 복음(福音)사역에 전념하는 목회자나 선교사를 지원하는 것은 그들의 고통과 사역에 동참하는 것과 같습니다.
아마 빌립보 교회는 그리스도의 심판대 앞에 섰을 때, 사도 바울의 이방선교의 중요한 동역자로 인정받을 것입니다.
즉 마지막 날 심판대앞에 서면, 우리는 우리가 맺은 열매로 판단을 받게 됩니다. 지금은 그날에 우리가 어떤 평가를 받을지? 확실히 알 순 없습니다. 하나님만이 우리의 중심(中心)을 아시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매순간 하나님 앞에서 진실해야 합니다. 아주 작은 성령의 감화에 순종 했을 때, 자기도 모르게 하나님의 나라를 위해, 많은 사람들의 구원을 위해, 결정적인 역할을 하게 될 수도 있기 때문입니다.
출애굽 당시 이스라엘 백성은 애굽 사람들로부터 금은보석을 받아 가지고 나왔습니다. 하지만, 광야 생활에서는 그렇게 유용한 재산이 아니었습니다. 그래서 이스라엘 백성들은 그것으로 엉뚱한 짓 했습니다. 즉 금송아지 우상을 만든 것입니다.
이 일로 인하여 이스라엘은 백성들의 준엄한 심판을 받습니다. 나중에는 이스라엘 백성들의 금은보화)가 성막을 짖는 일에 쓰이게 됩니다.
즉 이들이 하나님의 궤를 만드는 데 쓰였고, 온갖 보석은 대제사장의 가슴에서 열두 보석으로 빛났으며, 놋은 제물을 올려놓는 제단이 되었습니다.
우리의 소유는 자기의 정욕을 위해 버려지기도 하고, 하나님의 나라를 위해 쓰일 수도 있습니다. 아직도 많은 젊은이들이 하나님을 위해 헌신한다면서 신학교로 몰려듭니다. 전 세계적으로 이런 좋은 나라가 없습니다.
하지만 그들이 사역할 수 있는 교회는 부족하고, 현실적으로 개척은 더더욱 힘든 실정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교회는 그들의 열정이 식지 않도록 지원해야 합니다. 즉 그들이 하나님 나라의 큰 인물이 될 수 있도록 길을 열어주어야 합니다.
사실 그 동안 한국교회에서 헌금이 강조된 이유는 예배당 건축에 많은 비용이 필요했기 때문입니다. 즉 교회의 장소가 협소하고, 부족하면, 예배와 모임 자체가 힘들고, 불안정해질 수밖에 없는 게 사실입니다.
하지만 냉정하게 반성해보면, 지금까지 내용은 빈약하고, 보이는 건물에 치중한 것이 현재 교회들이 부실하게 된 큰 요인입니다.
사도 바울은 본문에서 *주고받은 것*이라는 표현을 썼는데, 이것은 복음(福音)의 중요한 원리입니다. 주의 종이 말씀을 주면, 말씀을 받은 자는 물질적인 필요를 채워주는 것이 성경적 원리입니다. 즉 주의 종은 생명의 양식으로 교인들을 섬기고, 은혜 받는 성도들은 물질적 양식으로 주의 종을 섬기는 것이 성경적 원리입니다.
그리고 교회는 성도의 모임을 지속할 수 있도록 재정적인 지원을 해야 합니다. 이것이 제대로 이뤄지지 않으면, 교회의 신앙이 자랄 수 없습니다.
일본 교회를 보면, 일본 기독교인들은 지나치게 헌금에 인색합니다. 일본 교회 목회자들은 대개 다른 직업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그런 것 같기도 합니다.
일본에서는 목회자들 자신만이 아니라, 교인들도 목회자가 목회에만 전념하는 것을 이상하게 생각한다고 합니다.
목회자와 성도들 서로가 경제적 부담을 주지 않으려고 하다 보니, 이런 분위기가 만들어진 것 같습니다. 이제는 아예 당연한 체계로 굳어졌습니다.
사실 *마음 가는 곳에 물질이 가고, 물질이 가는 곳에 마음이 가는 법*입니다. 일본 교회의 교인들 삶에서 교회는 그렇게 중요한 부분이 될 수 없습니다. 즉 목사도 아르바이트 하듯이 교회 일을 하고, 교인들도 교회가 삶에서 얼마나 중추적인 부분인지, 전혀 인식하지 못합니다.
예수님의 말씀처럼 마6:21절)네 보물 있는 그 곳에는 네 마음이 있다”는 단순한 진리를 경험으로 터득하지 못한 것입니다. 교회가 중요해질 때, 물질적 헌신이 가능하고, 물질적 헌신이 있을 때, 교회는 더욱 중요한 곳이 됩니다.
인간의 이상으로 세운 교회는 기초가 무너질 수밖에 없습니다. 복음의 원리, 성경적 원리로 세운 교회가 든든히 설 수 있습니다. 목회자든, 성도든, 교회에 대한 책임감이 있어야 합니다.
무조건 주기만 하거나, 받기만 하는 건 진정한 사랑이 아닙니다. 즉 목회자는 교인들을 돌 볼 책임이 있고, 교인들도 은혜를 받은 만큼 목회자와 교회를 위해 헌신 할 책임이 있습니다. 즉 말과 혀로만 교회를 사랑하는 사람은 교회에 대해 책임을 지지 않습니다. 이들의 신앙은 결코 참된 신앙일 수 없습니다.
Ⅱ.헌금의 영적인 의미
이 서신을 읽는 사람들 중에는 위대한 사도인 사도 바울이 왜 그렇게 헌금을 강조할까? 의아하게 생각하는 사람들도 있었을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결코 자신의 이익을 위하여 헌금에 관해 언급하는 것이 아니라고 밝힙니다.
17-18절)내가 선물을 구함이 아니요. 오직 너희에게 유익하도록 풍성한 열매를 구함이라. 내게는 모든 것이 있고. 또 풍부한지라. 에바브로디도 편에 너희가 준 것을 받으므로 내가 풍족하니. 이는 받으실 만한 향기로운 제물이요. 하나님을 기쁘시게 한 것이라”
여기서 *너희에게 유의하다* 나 *열매가 풍성하다.*는 말은 모두 상업적 용어입니다. 유익은 장사를 해서 돈을 버는 것이고, 열매가 번성하다는 것도 이익이 많이 남는 것을 말합니다.
예를 들어서 어떤 회사가 돈을 많이 벌어서 본국에 보내는 것을 *송금(送金)* 이라고 말합니다. 이 용어는 *열매를 보낸다*는 뜻이 아니라, *이익을 남겨서 보내는 것*을 말합니다.
빌립보 교인들은 사도 바울의 복음(福音)사역을 위해 투자한 것이나 다름이 없습니다. 그렇다면, 빌립보 교인들이 그에 대한 이익을 기대하는 것은 이상한 일이 아닙니다.
상업적으로 생각하면, 사도 바울이 장사를 많이 해서 원금과 이자를 빌립보 교인들에게 많이 보내는 것이 이익이 될 것입니다.
그런데 복음(福音)사역은 그런 장사가 아니라, 이방인들에게 복음(福音)을 전하는 일입니다. 그러므로 사도 바울이 이방인들에게 복음을 더 많이 전하는 것이 곧 빌립보 교인들에게 이익입니다.
하나님께서 이 상급을 그대로 빌립보 교인들의 상급으로 인정해주실 것이기에 더더욱 이익이 됩니다. 사도 바울이 이방 지역에 복음(福音)을 전하고, 많은 영혼들을 건진 사역의 열매가 바울의 것만이 아니라, 빌립보 교회의 것이기도 하다는 말입니다.
이로써 빌립보 교인들은 세계를 돌아다니지 않아도 하나님 앞에서 선교의 상(賞)을 받게 됩니다. 빌립보 교인들은 헌금을 함으로써 사도 바울의 사역에 더 관심을 가지게 되었습니다.
하나님의 일에 마음을 쓰고, 동참하는 자는 하나님 앞에서 더욱 가치있는 사람이 됩니다.
사도 바울의 마음에도 빌립보 교인들은 중요한 존재가 되었기에 그가 기도할 때마다 교인들을 떠 올렸습니다.
헌금은 그저 물질적 헌신만을 의미하지 않습니다. 마음을 다한 헌금은 우리에게 영적인 작용을 일으킵니다. 즉 우리가 헌금한 그 기관이나 사역자를 위해 더욱 마음을 써서 기도하게 되고, 그 물질을 사용하는 사람은 헌금을 바친 자를 늘 기억하며, 기도하기 마련입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를 앞두고 영적으로 고뇌하실 때, 한 여자는 비싼 향유를 가지고 와서 그것을 예수님의 발에 부어버렸습니다. 그때 다른 사람들은 이 여자가 비싼 향유를 허비한다고 책망했습니다.
하지만 예수님에게는 이 향유가 예수님의 장례를 준비하는 의미를 주었고, 예수님은 다시 한 번 십자가에 용기를 내게 되었습니다.
이 여인의 향유를 통해서 십자가는 결코 처참한 것이 아니라, 향기 나는 제사이며, 반드시 믿음으로 승리한다는 확신을 가지셨던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복음이 증거 되는 곳마다 이 여자가 행한 일도 증거 되리라고 하셨습니다.
사도 바울은 빌립보 교인들이 헌금한 것이 자신들에게 유익하다고 말합니다. 즉 그들이 하나님 앞에서 그만큼 중요한 사람이 되었기 때문입니다.
빌립보 교인들의 헌금이 없었더라면, 그들은 성경에 기록되지도 못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이 헌금 때문에 그들은 하나님 앞에서 중요한 사람들이 되었습니다.
사도 바울은 예루살렘에 흉년이 들었을 때, 이방 교회로부터 헌금을 거둬서 예루살렘 교회를 도우러 갔습니다. 그때 빌립 집사의 딸들이나, 아가보라는 선지자를 비롯한 모든 사람들이 사도 바울을 말렸습니다.
그러나 사도 바울은 생명을 걸고, 헌금을 가지고 예루살렘으로 갔습니다. 예루살렘 교회와 이방인 교회가 하나라는 것을 증거 하기 위해서였습니다. 오히려 이 일로 이방인 교회가 더 큰 유익을 얻었습니다.
이방인 교회가 예루살렘 교회에 헌금을 함으로써 교회의 정통성이 확인되었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이제 틀림없이 이스라엘이며, 아브라함의 복(福)을 받는 자들로 공교회적으로 인정을 받았습니다.
더 주목한 사실은 이방인 교회가 그 시점부터 교회에서 중요한 역할을 감당하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한 마디로 영적인 장자의 복(福)을 받게 되었습니다. 이후부터 이방인 교회가 주도적으로 전 세계에 복음을 전하고, 사도 바울은 교회사를 통틀어, 가장 위대하고, 중요한 복음 전도자가 되었습니다.
만약 그때 이런 저런 핑계로 헌금을 하지 않았더라면, 이런 위대한 역사가 이방 교회를 통해서는 일어나지 않았을지도 모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여러분의 수입을 대부분 어디에 지출되고 있습니까? 본문을 통해 점검해 볼 필요가 있습니다. 혹 먹는 일에 대부분 지출되고 있다면, 그 집은 *먹자판*입니다.
혹 카드빚 갚는데, 쓰이고 있다면, 그 집은 *허영의 집*입니다. 우리는 영적인 지출에 점점 비중을 두어야 합니다.
예수님께서 하신 말씀을 항상 기억해야 합니다. 마6:21절)네 보물 있는 그 곳에는 네 마음이 있다”는 말씀을......
특히 우리의 시간을 영적인 일에 사용해야 합니다. 사람은 자기가 중요하다고 생각하는 데, 시간과 물질을 쓰게 되어 있습니다.
하나님의 백성이라고 하면서도 영적인 곳에 지출하기를 꺼려하는 사람은 영적으로 미숙아와 다름이 없습니다.
사도 바울은 헌금이란 18절)...하나님이 받으실 만한 향기로운 제물”이라고 정의를 내리고 있습니다.
구약시대에 이스라엘 백성들이 하나님께 제사를 드리면, 향기가 하늘로 올라갔습니다. 참으로 놀라운 것은 하나님께서는 무계나 양으로 제물을 받지 않으시고, 제물을 태우는 향기를 받으셨습니다.
인간은 하나님 앞에서 냄새나는 존재입니다. 하나님은 우리에 죄로 인한 악취를 견디실 수 없습니다. 우리와 가까이 하고 싶어도 죄의 악취때문에 우리를 멀리 하십니다.
그런데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해서 제사를 드릴 때, 우리의 죄가 씻기면서 향기가 나기 시작합니다. 하나님은 이 향기로운 제사를 받으시고, 우리의 죄를 없이하신 후, 우리와 가까이 하십니다.
사도 바울은 우리가 바치는 헌금이 바로 그 향기 나는 제사라고 말합니다. 즉 헌금은 사람을 돕기 위해 드리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향기로운 예물입니다.
그러므로 헌금은 강제로 드릴 것도 아니요, 사람 앞에서 부끄러워하며 드릴 것도 아닙니다. 헌금은 가장 아름다운 것이며, 어떻게 보면, 신앙생활의 절정입니다.
19절)나의 하나님이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영광 가운데 그 풍성한 대로 너희 모든 쓸 것을 채우시리라”
빌립보 교인들이 없는 중에 사도 바울에게 헌금을 했기에 분명 자기들이 쓸 것은 부족해졌을 것입니다. 그러나 사도 바울은 하나님께서 그들의 쓸 것을 채워주실 것이라고 말합니다.
즉 하나님께서는 이들의 불필요한 지출을 막아 주시고, 알게 모르게 많은 복(福)을 부어주실 것이기 때문입니다. 이뿐 만이 아니라, 하나님은 지혜를 주셔서 올바른 분별력을 갖게 하시고, 이들의 생업에 풍성한 복(福)을 더 하실 것입니다.
Ⅲ.문안과 축복
사도 바울은 이 편지를 통해서 빌립보 교회 안에서 서로 서운하게 지내던 믿음의 형제들이 다시 한 번 교제하는 기회가 되기를 바랐습니다.
21절)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성도에게 각각 문안하라.
사도 바울은 이 편지를 계기로 함께 만나 편지를 읽고, 이야기를 나누며 문안하기를 바랍니다.
평소에는 볼 일이 없었던 자들도 결혼식이나 여러 행사를 계기로 얼굴을 보고, 안부도 묻듯이 편지를 통해서라도 서로 문안함으로 서운해진 관계를 회복하라고 권고하는 것입니다.
혹시라도 평소에 서로 오해가 있었다면, 이런 기회를 통해 오해를 씻고, 좋은 관계를 회복했을지도 모릅니다.
이런 모습은 단순히 편지를 나눠 읽는 것에서 그치지 않고, 교회와 성도들이 하나님의 말씀으로 하나가 되는 모습니다. 우리는 예수를 믿는다고 하면서도 본래 자기중심적이고, 이기적이기 때문에 강제력이 없으면, 자발적으로 하나 되기가 어렵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오직 하나님의 말씀 하나만 붙들면, 서로 하나가 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우리를 하나 되게 하는 능력이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네 것 내 것을 구분하는데 익숙합니다. 하지만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는 모든 것이 주님의 것이고, 모든 교회가 하나입니다.
단지 우리가 편의를 위해서 지역 교회로 모일 뿐입니다. 세상 사람들은 술과 음식으로 하나가 되지만, 우리는 성령과 말씀으로 하나가 되어야 합니다.
21-22절)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성도에게 각각 문안하라 나와 함께 있는 형제들이 너희에게 문안하고 모든 성도들이 너희에게 문안하되 특히 가이사의 집 사람들 중 몇이니라.”
사도 바울이 빌립보 교인들에게 이런 펀지를 보낸다는 것을 주위에 있는 성도들이 다 알고, 모두 좋아했습니다.
그래서 그들이 자기 안부도 전해 달라고 문안 인사를 했던 모양입니다. 특히 가이사의 집 사람들 중에도 그리스도인들이 있어서 안부를 전하고 있습니다.
로마 황실의 사람들이 누구인지 밝히지 않았지만, 아마 황제 부인이나, 딸들 중에서도 그리스도인들이 있었을 것이고, 근위대나 거기에 일하는 노예 중에서도 그리스도인들이 있었던 것 같습니다.
그러면서 23절)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가 너희 심령에 있을지어다.”라고 축복하고 편지로 마칩니다.
사도 바울은 이방에 처음으로 세워진 이 빌립보 교회가 영적으로 강하기를 원했습니다. 만약 영적으로 병들면, 다른 교회에 근심과 짐이 되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다른 교회를 가장 잘 도울 수 있는 길은 먼저 우리 자신이 영적으로 건강하고, 부흥을 지속하는 것입니다.
자기 자신을 잘 지키는 것도 큰일이며, 덕을 세우는 일입니다. 그리스도인들은 모두 한 성령 안에서 연결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그들의 심령에 그리스도의 은혜가 있기를 축복하고 있습니다.
빌립보 교회들의 물질적 헌신은 오히려 그들에게 큰 유익이 되었습니다. 사도 바울은 이 귀한 편지 가득히 빌립보 교회를 칭찬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들이 안고 있는 여러 가지 문제에 대한 하나님의 말씀을 전해 주었고, 또 빌립보 교인들은 이 말씀으로 하나가 될 수 있었습니다.
주는 자는 주는 것 이상을 받게 되어 있습니다. 빌립보 교회는 약간의 헌금을 보냈지만, 그들의 심령에는 주님의 은혜가 넘치고 있습니다. 그리스도인들이 바치는 헌금은 참으로 아름다운 것입니다.
이것은 물질을 빌미로 하나님의 은혜를 흥정하는 것도 아니고, 자기 자랑을 위한 것도 아닙니다. 이것은 구체적인 삶 가운데,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고, 하나님에 대한 믿음을 표현하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요즘 코로나 시대 거리두기 등 제재 핑계로 불신과 불통으로 고립된 짧은 인생을 살면서 자기만 생각하다가 하나님 앞에서 하찮은 존재가 되지 말고, 우리의 헌신이 하나님 나라를 위해서 크게 쓰임 받는 복(福)을 누리시는 귀한 하나님의 자녀가 되길 원합니다.아-멘 찬송가 220장 *사랑하는 주님 앞에*
주일 예배와 십일조 봉헌으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것은 천국시민된 특권과 의무.
농협 온라인 302-8772-0191-01(헌금 종류)
☞모든 헌금은 우리와 다음 세대를 위하여 예배당 겸 선교센타를 설립하기 위함이니 의미 있는 일에 적극 동참합시다. ※목사 개인의 사비나 생활비로는 사용되지 않습니다.
성숙한 신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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