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창동의 <시>를 통해 본 ‘본능과 본질’ 정국환. 온라인. 월요일. 오전반 200810
이른 아침에 눈을 뜬 아이들이 아빠와 함께 놀자고 졸라댄다. 아이들은 본능을 따라 자신들이 원하는 것을 끊임없이 요구한다. 그러나 아빠는 아이의 모든 것을 들어줄 수가 없다. 때로는 그 요구를 들어주지 못하는 여러상황에 속상해하고 때로는 가족을 위한 삶이 가족이 아닌 다른 이들을 위해서 살아야 하는 서글픔도 생긴다.
삶이라는 것은 메비우스의 띠처럼 돌고돌아 제자리로 간다. 그러나 “시를 잘 쓰기 위해서는 ‘잘 보는 것’부터 시작해야”하고 “느낌대로 솔직하게 적으라”는 영화 속의 조언들처럼 본질을 보고 본능에 따른 진솔한 이는 한 발 나아간 제자리이고 그렇지 못한 이는 다람쥐의 쳇바퀴를 돌 듯 그 자리이다. 마치 욱이할머니가 영화의 말미에 본인의 이름 ‘양미자’로 밝혀지면서 ‘아네스의 노래’를 남기며 죽은 희진이가 살아나고 욱이 할머니는 사라진것처럼 말이다.
1. 시는 ‘잘 보는 것’부터 시작한다.
여자 아이의 주검은 물놀이 하던 평범한 아이들의 인생에 허락없이 자신의 존재를 알리며 밀려온다. 그러나 여중생의 죽음은 이름조차 기억되지 못하고 일상에 밀린다. 어쩌면 모두가 죽음을 향해 살아가는 것이 삶인데 무관심 속에서 산 사람과 죽은 사람의 차이는 사라진다.
여자의 죽음과 관련이 있는 학생들의 부모와 학교는 대책마련에 분주한데 욱이 할머니는 ‘시’를 배우려고 한다. 사람의 죽음에 무책임한 “아이들의 인생이 걸린 일”이란 무엇일까. 욱이 할머니가 ‘시’를 쓰기 위해 ‘시상’을 잘 보려고 찾아헤매는 노력과 역설적으로 비춰진다.
2. 시는 느낌대로 솔직하게 적는다.
욱이 할머니는 생활을 위해 간병인 일을 한다. 그녀의 복잡한 심정과는 무관심하게 간병을 받는 불구의 노인은 욕정을 내비친다. 매일 아침 밥을 먹는 종욱이의 본능처럼 육신은 아름다운 생명력을 추하게 유지한다.
시교실의 우아한 배움은 잠시 세상과 단절을 가져온다. 욱이 할머니가 ‘시’를 쓰고자 하는 힘은 영화를 이끌어 간다. 죽기 전에 “남자 구실을 한 번이라도 해보게 해달라”는 불구의 노인은 삶이란 시의 서글픈 시상이다. ‘시간이 흐르고 꽃도 시들 듯’ 알츠하이머로 서서히 인생의 종말을 준비하는 욱이 할머니는 마치 빗 속에 내려온 희진이와 첫 만남을 조우하는 듯 했다.
3. 시를 쓰는게 어려운게 아니라 시를 쓰겠다는 마음을 갖는게 어렵다.
욱이 할머니는 “살구는 스스로 땅에 몸을 던지는 것”처럼 돈을 마련하기 위해서 노인과 측은한 관계를 가진다. 소비되는 ‘성’은 ‘성’의 신비로움을 추하게 만들었다. 마치 ‘시’를 소비하는 시낭송회처럼 음담패설을 내뱉는 경찰보다도 사람에 대한 관심을 찾아보기 힘들다. ‘시상’을 찾는 이라면 ‘오백만’원을 협박으로 보는 불구의 노인과는 다른 눈으로 ‘시를 못써서’ 우는 욱이 할머니의 심정을 헤아려야 했을 것이다. 어쩌면 “시를 쓴 사람은 ‘양미자’씨 밖에 없다”는 김용탁 시인의 말은 피해자의 모친과 합의를 끝내고 소주 한 잔에 마음고생을 털어내는 육신에 충실한 일상이 아니라 손자를 음담패설이나 지껄이는 결찰에게 인계하고 담담하게 배드민턴을 치는 ‘양미자’씨의 내면의 소리가 아닐까.
삶이란 ‘시’를 써가는 여정인듯하다. 영화의 말미에 드디어 양미자씨의 딸이 등장하지만 양미자씨는 사라졌다. 양미자씨는 ‘아네스의 노래’를 읊으며 사라진다. 시가 읽혀지는 동안에 학교는 아무일이 없는 듯 정상수업을 진행한다. 죽은 여자아이가 돌아오는 듯 그녀의 집과 그녀가 죽었던 다리가 페이드 인 페이드 아웃되고 흐릿한 여자아이가 또렷이 클로즈 업되면서 되돌아 본다. 그리고 물이 흐른다. 마치 양미자씨의 삶은 이렇게 돌아가는 사건의 안내자의 역할에 충실한 듯 하나 하나 읊어주고 자신은 사라진다. 돌고 돌아 나타난 영화의 끝은 다시 처음자리에 와있다. 더 이상 희진이의 모습은 보이지 않지만 양미자씨의 써내려간 시는 희진이를 웃게 만들었다.
이창동 감독의 ‘시’는 인생이란 ‘시상’을 어떤 깊이로 통찰하고 써내려가는지를 단편적으로 나에게 보여주었다. 살기 바쁘고 살기 버거운 사람들에게 배부른 소리일 수 있는 ‘시’ 쓰기는 그 일에 관심있는 사람들마저도 벅차보이는 영적 행위이다. 이런 사람들에게는 그저 배고픈 본능의 허기를 채우는 탐욕을 합리화하는 고귀한 추잡함이다. 그러나 내면의 소리에 귀를 기울이며 글감 하나 하나에 삶을 고치는 수고를 마다않는 시인에게는 자신을 뗄감으로 소비시킴으로 알츠하이머처럼 서서히 사라져가는 인생속에서 아무도 기억하지 않는 한 소녀를 부활시키는 고귀한 도구이다. 그런 의미에서 ‘아네스의 노래’는 시인이 시의 본질을 잘 표현한 것이라 하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