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찬샘통신 171/200521]“옻이 올랐다”
외국여행이 겁나는 건 순전히 음식 때문이다. 내 나라 음식은 어떤 것이든 어지간하면 거부감이 없는데, 다른 나라 음식은 많이 보고 가끔 먹어본 것조차 숟가락이 쉽게 가지 못한다. 말하자면 ‘ 음식飮食 국수주의자國粹主義’라고 해야 할 듯. 피짜pizza나 빵으로 배를 채웠어도 꼭 집에 와 밥을 먹어야 하듯 말이다. 여권passport를 처음 만든 게 80년대말이었나? ‘셀렘배국제테니스대회’ 해외취재라니? t,e,n,n,i,s의 ‘테’자도 모르는 놈이 4박5일, 참말로 뛰다죽을 노릇이었다. 스포츠신문 기자 옆에 바짝 붙어 고대로 기사를 베껴 보냈더니 ‘홍콩=000특파원’이라는 바이라인by line(기사 타이틀 맨밑의 필자명)으로 체육면에 짧게 두 꼭지가 실렸다. D일보 지면에 유일하게 등장했던 사건. 소가 웃을 일이었다.
음식 이야기다. 홍콩공항에 내릴 때부터 공중까지 지배하는 비위가 상한 냄새로 머리가 아팠다. 그때부터 어떤 음식이든 한 숟가락도 떠먹을 수가 없었다. 그렇게 이틀을 꼬박 굶었다. 하다못해 몇 번 먹어본 햄버거조차 ‘이상한 향’이 묻어있었고, 일본음식점에서 ‘라멘’을 먹어보려 했는데, 역시나 거기에도 향이 코를 찔렀다. 이튿날 저녁, 진짜 홍콩특파원인 선배에게 전화를 했다. 한국음식점으로 당장 달려오라며 주소를 불러줬다. 택시를 탔는데, 영어조차 통하지 않아, 할 수 없이 ‘한자漢字 필담筆談’으로 달려갔다. 무조건 제육볶음 2인분에 쐬주 한 병을 시켜, 그야말로 허겁지겁 먹으니 ‘세상이 모두 내 것’이었던 기억. 이튿날도 염치를 불구하고 또 한번 ‘민폐民弊’를 끼쳤다. 셋째날은 어떻게 전화를 드리겠는가? 네 밤을 자고 돌아오니 몸무게가 5kg나 빠져 아내는 놀랐지만 진짜 ‘살 것’ 같았던 달콤하면서 악몽 같았던 기억.
중국여행은 반찬을 바리바리 갖고 가야 하니, 번거로워 아내도 못할 일이었다. 요즘엔 많이 globalize되어 먹을만 하다지만, 당시는 미치고 폴딱 뛸 일이었다. 죄없는 칭따오(靑島) 맥주만 비울 수밖에. 태국, 베트남 등 동남아국가 원주민 요리들은 눈길조차 주지 않는다. ‘글로벌 시민’되기는 진작에 시루를 엎은 것이다. 미국은 그래도 좀 낫지만, 유럽음식도 한참을 망설이다 살짝 입에 대보는(결벽증 걸린 사람도 아닌데), 주위를, 특히 아내를 성가시게 하는 나쁜 습성, 나도 싫다. 우리 음식은 무엇이든 맛있다며 게걸스럽게 잘 먹는데, 자칭·타칭 ‘세미-식도락가’인데, 오죽하면 홍보팀장이 “니가 안맛있는 게 어딨냐?”며 늘 놀려댔는데. 결코 ‘혀가 짧은’ 게 아니고, ‘그놈의 향香’이 문제인 것이다. 우리나라 ‘고수’의 향이 싫어 거들떠보지 않는 것과 같다.
지난 월요일 ‘자연인 친구’가 데치지 않는 ‘옻순’을 약간의 양념으로 버물려 가져왔다. 아무 편견없이 맛있게 잘 먹었는데, 그만 옻이 오른 것이다. ‘옻을 타는’ 사람은 옻나무를 보기만 해도 ‘옻이 옮아’ 몸에 두드러기가 나고, 솔차니 고생한다는 말을 이상하게 생각했는데, 내가 딱 걸린 것이다. 오른쪽 옆구리가 가려워 조금 긁다보니, 아뿔싸 빨가족족 두드러기가 100개도 넘게 순식간에 생기더니, 오른쪽 팔뚝도 환장하게 근지러웠다. 그래도 촌넘인지라 이런 것은 별로 겁을 안낸다. 시간 지나면 낫겠지, 대충 견디는 체질이다.
아무튼 음식으로 탈난 것은 난생 처음이다. 소싯적 마루 선반에는 남은 밥들을 담아놓은 소쿠리가 있었다. 이제 냉장고가 없던 세상을 이제 어디 상상이나 할 수 있을까? 동네 우물 속에 김치가 담긴 주홍색 플라스틱단지를 집집마다 표시하여 띄어놓았던 시대. 여름철 보리밥은 얼마나 쉬기 쉬웠던가? 쉬었어도 찬물에 여러 번 헹궈 풋고추에 된장을 찍어 팍팍 먹어대면(아무 걱정이 없어야 한다), 위장에 어떤 문제도 발생하지 않았다. 밥통(위장)이 튼튼해 어떤 난관도 잘 버틴 것이다. 94세 아버지는 지금도 위장은 아무 문제가 없는지라 어떤 음식도 잘 드시고, 탈이 나 본 적이 한번도 없다. 배 고팠던 시절의 농사꾼 특권일까? 축복일 것이다.
너무 많이 쉬어 먹지 못할 밥은 술을 만들어 해치웠다. 절에 중들처럼 밥티 하나 버리지 않고 알뜰하게 먹어치우던, 냉장고 없던 시절이 뜽금맞게 가끔 그리울 때가 있다. 할머니와 어머니 아버지, 형들과 동생들, 그렇게 10명의 대가족으로 살던, 다시는 오지 않을 그 시절은 어디로 갔는가? 말 그대로 ‘가화만사성’이었거늘, 이제는 각자 뿔뿔이 살면서 모두 ‘남의 식구들’ 만나 살면서, 왜 무슨 갈등과 이해타산이 그리 많아 대가족은 찌그락짜그락 해대며 살꼬? 아지 못게라.
두릅순보다 엄나무순이, 엄나무순보다 옻순이 더 ‘기똥차다’하여 날 것으로 먹고 탈이 났지만, 먹을 때에는 별미였다. 옻순을 살짝 데쳐 초고추장으로 찍어먹었을 때에는 ‘별일’이 없었는데 ‘쌩 옻순’은 아직 내성耐性이 안생겼나 보다. 그나저나 나는 약도 안먹고 약도 안바르고 그냥 촌놈처럼 무식하게 버티고, 가려워도 안가려운 척 하고 있다. 내년에도 요때쯤 ‘누가 이기나’ 한번 더 먹어볼 생각이다. 이까짓 게 내 위장을 괴롭히다니? 40년을 죽창 마셔댄 ‘알코올’의 독기毒氣도 나를 어쩌지 못했는데….
첫댓글 오늘도 글쓴이의 허락도 없이
그속으로 풍덩 빠졌다 나옵니다.
어쩜 그리도 표현을 곁에 있는양 잘하십니나.
얻어다놓은 옻순을 냉장고에 넣어놨는데 깜빡 잊을뻔했네
오늘 점심엔 혼자만 먹어야겠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