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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월 초파일 밤의 밀항
1085년(선종 2)4월 8일. 사월 초파일은 예나 이제나 불교계 최대의 명절이다. 명절은 그 말만으로도 남녀노소의 마음을 들뜨게 하기에 충분하다. 때는 고려시대. 개성과 인근의 크고 작은 사찰은 낮 동안 수많은 남녀신도와 승려와 상인들로 북적거렸으며, 밤에는 그들의 갖가지 사연을 담은 오색찬란한 연등행렬로 불야성을 이루었다.
이날 밤 예성강 하구의 무역항 벽란도에서는 송나라 상선이 은은한 달빛을 받으며 미끄러지듯 포구를 빠져나갔다. 배에는 상인 말고도 변장을 한 의천 일행 11명이 타고 있었다. 선종은 뒤늦게야 친동생 의천이 남긴 글을 받아볼 수 있었다. 그것은 ‘만 번의 죽음도 가벼이 여기고 험한 파도를 건너 법을 구한다’는 밀항의 변이었다. 놀란 선종이 황급히 사람을 보내 뒤따르게 하였으나 끝내 놓치고 말았다. <고려사>는 이날 밤의 한바탕 소동을 한마디로 잘라 말하였다. “왕의 동생인 승려 후가 몰래 송나라로 빠져나갔다!”
후는 의천의 본명인데 송나라 철종의 이름과 같기 때문에, 이를 피하고 대신 자인 의천으로 널리 불리게 되었다. 그는 1055년 9월 문종과 인예태후 사이의 10남 2녀 가운데 넷째로 태어났으며, 열한 살 때 개성 교외의 화엄종 사찰인 영통사로 출가하였다. 그리고 불과 열세 살에 ‘왕사’바로 아래이자 교종 승려로서는 최고위직인 ‘승통’에 올랐다.
문종은 의천의 앞날을 위하여, 평소 후원해 왔던 화엄종에 출가시키고 파격적일 정도로 높은 자리를 안겨 주었다. 그러나 그것이 내면세계를 진정으로 대신할 수는 없는 노릇이다. 말할 나위 없이, 인격을 도야하고 학식을 겸비하는 일은 전적으로 의천에게 달렸던 것이다. 그는 출가 후 십여 년간 일정한 스승 없이 도가 있는 이를 찾아다니며 학문에 전념하였다. 그는 불교 경전은 물론 유교와 도교를 비롯한 제자백가의 학설까지 두루 섭렵하여, 약관의 나이에 이미 ‘법문의 종장’이라는 명성을 얻었다.
경전에 대한 이해가 어느 정도 경지에 오르자 의천은 중국 유학을 꿈꾸기 시작하였다. 그가 보기에 신라말 고려초 이래 수많은 승려들이 중국 유학을 다녀왔는데, 그들은 거의 대부분 선종 승려였다. 반면 교종 승려들의 유학은 단절되다시피 하여, 마침내 의천 당시의 고려 불교학은 침체를 면치 못하고 있었던 것이다. 이에 그는 중국 유학을 통하여 고려 불교의 ‘눈을 가린 막’을 벗겨내고 싶었다.
그러던 차에 의천은 송나라 상인들을 통하여 화엄종 승려 진수정원을 알게 되었다. 송상들 중에는 복건성 출신이 많았는데, 그들은 같은 고향 사람인 정원을 소개한 것이다. 의천과 정원은 수차례나 편지와 서적을 주고 받은 끝에, 1083년 8월 마침내 정원은 의천을 초청하였다. 이듬해(선종 2)정월 의천은 궁궐에 들어가 송나라 유학의 뜻을 간곡히 아뢰고 반대하는 조정대신들에게 눈물로 호소하였다. 선종은 감격하였으나, 조정대신들은 너무나 완강하였다. “왕의 동생이라는 고귀한 신분으로 바다를 건너는 것은 좋지 않다”는 것이었다. 여기에는 불교 외적인 요인 즉 당시의 미묘한 국제정세가 작용하고 있었다.
고려는 현종 때 요나라와 통교하면서 요와 적대적인 송과는 외교관계를 단절하였다. 문종은 송과의 외교를 회복하고자 하였지만 뜻을 이루지 못하다가, 1071년(문종 25)실로 반세기 만에 송과 국교를 재개할 수 있었다. 그러면서도 고려는 여전히 인접한 요를 의식할 수밖에 없었다. 지금까지 의천은 왕자이기 때문에 남들보다 많은 혜택을 누려왔지만, 이럴 때는 그것이 도리어 약점이 되었다. 이러한 국제정세의 틈바구니에서 서른 한 살이 된 의천이 선택할 수 있는 길은 밀항뿐이었다.
진수정원, 그리고 고려사
벽란도를 떠난 지 25일째인 1085년 5월 2일 의천 일행이 마침내 밀주 판교진(산동성 교주시)에 도착하자, 밀주지사가 마중을 나왔다. 의천이 온 뜻을 송나라 조정에 알리자, 5월 21일 철종과 태황태후는 특별히 중앙 관리를 파견하여 서울인 변경(하남성 개봉시)까지 안내토록 하였다. 이 때부터 중국을 떠나는 그날까지 송 왕실은 수시로 음식을 비롯한 각종 물품을 하사하는 등 극진한 환대를 베풀어 주었는데, 이는 송나라 조야는 물로 불교계의 이목을 끌기에도 충분하였다.
의천은 송 왕실이 미리 불교계의 추천을 받아 선발한 화엄종 승려 유성으로부터 중국 화엄학의 새로운 성과를 접할 수 있었다. 또한 관리의 안내를 받아 변경의 여러 사찰을 찾아다니며 많은 승려들을 만나 볼 수 있었는데, 인도 출신의 승려를 만나 인도에 관해 상세히 묻기도 하며 견문을 넓혔다. 그리고 변경에 머무른 지 채 한 달도 안되어 진수정원을 만나러 항주로 출발하였다.
절강성 항주에 도착한 것은 8월이었다. ‘이승의 천당’이라 할 만큼 이곳은 옛부터 빼어난 산수로 유명하였다. 당대의 내노라하는 고승대덕들이 이곳 서호일대에서 수행하였으며, 그들이 머물던 사찰이 500여 곳을 넘는 그야말로 송 불교계의 중심지였다. 그들은 고려 왕자가 불법을 배우고자 찾아왔다는 이야기를 듣고 기꺼이 만나주었기에, 의천은 그들로부터 여러 종파의 사상을 골고루 접할 수 있었다.
의천이 진수정원을 찾아갔을 때 정원은 서호 동북쪽의 상부사에 있었는데, 새로 항주지사로 부임한 포종맹의 주선으로 1086년 정월 서호 남쪽의 혜인원으로 거처를 옮겼다. 포종맹은 여기에 화엄종 일곱 조사의 상을 만들어 봉안케 하였으며, 조정에 건의하여 혜인원을 선종사찰에서 교종사찰로 소속을 바꾸고 특별히 조세를 면하도록 해주었다. 의천은 이곳에서 정원으로부터 화엄학을 배울 수 있었다.
의천이 항주에 머물던 1085년 11월 신종의 죽음을 조문하고 철종의 즉위를 축하하기 위한 고려 사절단이 변경에 입성하였다. 이들은 어머니 인예태후가 의천의 귀국을 간절히 바란다는 뜻을 전달하였다. 의천으로서는 국법을 어겨가면서까지 감행한 중국 유학을 1년도 못 채우고 귀국하자니 아쉬움이 클 수밖에 없었다. 마침내 그는 1086년 윤2월 변경으로 가서 황제에게 고별 인사를 하고 4월에 다시 항주로 돌아왔다. 시간이 얼마 남지 않은 그는 항주에서 변경을 왕복하는 배 위에서 정원으로부터 계속 화엄학을 익혔다.
도중에 수주의 진여사에 들러 거금을 쾌척하여 퇴락한 장수자선의 탑을 대대적으로 수리하기도 하였다. 장수자선은 정원의 스승이니, 만년의 노구를 이끌로 수천리 뱃길을 함께 해준 스승 정원에 대한 감사의 표시였을 것이다. 그런데 의천이 정원으로부터 일방적으로 배우기만 한 것은 아니었다. 그는 침체일로에 있던 중국 화엄학을 부흥시키는 데 커다란 기여를 하기도 하였다. 그가 혜인원에 머무를 때는 불교 서적 7,500여 질을 간행하여 비치하도록 하였으며, 귀구한 후에는 금물로 쓴<화엄경>180권을 보내 주었다. 정원은 이를 위해 전각을 별도로 세우는 동시에 의천의 상을 봉안할 사당을 건립하였다.
최근 다시 지은 혜인고려사
항주 혜인 고려사 대각전에 모신 의천대사상
혜인사가 중국 화엄종의 제1 도량이었다는 뜻
1101년에는 의천의 친형인 숙종이 거금을 보내어 불상을 조성하고 새로운 전각을 세우게 하였는데, 뒷날 남송의 황제가 친히 이 전각의 현판을 쓰기도 하였다. 의천의 체류를 계기로 혜인원은 중국 화엄종의 중심 사찰로 부상하였으며, 고려와 송의 우호관계를 보여 주는 상징 사찰로서 번영 누리게 되었다. 그리고 본명보다 ‘고려사’라는 속칭으로 더욱 유명해졌다.
‘신법당’의 호의
한편 의천의 중국 유학은 송의 양대 정파인 ‘신법당’과 ‘구법당’사이에 하나의 정쟁거리가 되었다. 신법당은 피폐한 농촌사회와 고갈된 국가재정을 일신하고자 개혁을 강력히 추진하면서 대외적으로도 적극적인 정책을 내새웠다. 다만 송의 군사력만으로는 요를 상대하기 벅찼기 때문에, 고려와 연합하여 요를 견제하려는 외교노선을 표방하였다. 이러한 신법당의 정책은 고려와의 통상에서 막대한 이익을 챙기게 될 송상 - 그들 중 대부분이 복건성과 절강성 출신임- 들로부터 당연히 환영을 받았다. 송상들은 의천을 동향 출신의 정원과 연결시켰고, 그렇게 해서 의천의 중국유학이 성사되었던 것이다. 의천이 중국에 온다는 소식을 듣고 내심 가장 반긴 정치세력은 당연히 신법당이었으며, 그들은 ‘승려 의천’보다 ‘왕자 의천’에 무게를 두었다.
신법당에는 남방출신이 많았는데, 핵심인물인 여혜경은 정원과 동향이었다. 그는 나중에 항주지사로 부임하여 혜인원에 정원의 비석을 세워 주었다. 의천이 항주에 머무를 때 정원을 후원하였던 포종맹도 신법당 소속이었다. 그는 구법당의 영수 사마광의 인사 정책을 비판하다가 좌천당하였는데, 공교롭게도 의천과 앞서거니 뒤서거니 하며 항주지사로 부임하여 왔던 것이다. 또한 당파는 불분명하지만, 의천을 시종 안내하였던 양걸이란 관리도 나중에 절강 지방의 관리가 되어 화엄종을 후원하였다.
그런데 신법당의 고려 우대정책 때문에 고려 사절이 지나가는 연도의 지방민과 수령이 경제적인 고충을 겪게 되었다. 대외정책보다 내정의 안정을 우선하는 구법당이 이를 가만둘 리 없었다. 특히 구법당의 맹장 가운데 한 사람인 소동파는 때로는 지방관으로 때로는 유배자로서 각지를 전전하며 신법당에 비판적인 지방여론을 익히 체감하고 있었다. 의천이 밀항하기 직전인 1085년 3월 신법당의 후원자였던 신종이 죽고 철종이 새로 즉위하였는데, 그는 아홉 살 소년이었기에 할머니인 태황태후가 섭정하게 되었다. 그녀는 신법당을 몹시 싫어하여 신법당의 개혁책을 차례로 폐지시킨 반면, 구법당 그 중에서도 소동파를 신임하여 유배 중이던 그를 사면 복권시켰다.
소동파가 지방 관리를 거쳐 중앙 관직에 복귀한 것은 의천이 항주에 내려가 있던 1085년 12월 중순이었다. 그는 돌아오자마자 잘못 씹은 음식물을 뱉아내듯이 신법당의 제반 시책을 연일 공격하여 남아 있던 몇몇 개혁마저 폐지시켜 버렸다. 그리고 1089년에는 자원하여 항주태수가 되었다. 3년 전에 귀국한 의천은 이 해 11월 제자 수개를 항주로 보내어 그 전해에 입적한 정원의 제사를 받들게 하는 동시에, 따로 황제와 태황태후의 만수무강을 기원하는 뜻에서 금탑 2기를 바치도록 하였다.
소동파는 정원을 돈밖에 모르는 용렬한 승려로 매도하는 한편, 수개 일행에 대해서는 제사만 허락하고 금탑은 돌려 보낼 것을 중앙정부에 건의하였으며, 수개 일행을 태우고 온 송나라 상인 서진을 직권으로 구속시켜 버렸다. 이 부렵 소동파는 송과 고려의 문물교류를 통제하자는 건의를 수 차례나 올렸으며, 1090년 마침내 그의 건의가 채택되어 두 나라 사이의 교역은 물론 의천과 송 불교계의 교류가 일시 중단되기도 하였다.
소동파가 고려와의 통상을 반대한 이유의 하나는 송의 서적이 해외로 반출된다는 것이었다. 소동파는 우국충정에서 한 말이었겠지만, 이는 오해와 기우에 불과하였다. 중국은 당나라 말기 이래로 계속되는 전란과 두 차례의 대대적인 불교탄압으로 수많은 불교서적이 유실되었다. 그런 화엄학이 부흥할 수 있었던 것은 고려에 고스란히 남아 있던 많은 서적이 송으로 역수출되었기 때문이었다.
이러한 과정을 거쳐서 마침내 1145년 이들 화엄종 전적이 송의 대장경에 정식으로 편입되었다.
교종에 공감, 선종에 반감
성인은 자기 몸을 굽혀서 남의 장점 취하기를 꺼려하지 않는다고 한다. 의천 또한 하나의 지식, 작은 행실이라도 배울 점이 있으면 두루 찾아보았고, 그럴 때마다 반드시 제자의 예를 갖추었다. 그는 14개월의 짧은 기간에 각 종파의 고승 50여 명과 교류할 수 있었는데, 귀국 보고서에서는 단지 화엄. 유식. 천태. 율학의 종지를 받아왔다고만 하였다. 이들은 모두 교학불교였다. 의천은 왜 선종을 언급하지 않은 것일까? 물로 그는 선종 승려를 만났으며, 그 중에는 당대 최고의 선승도 있었다.
1085년 7월 하순 의천은 변경 상국사에서 운문종의 종본을 만났다. 종본은 왕실로부터 두터운 존경을 받던 선의 거장이었다. 그 자리에서 <화엄경>을 소재로 선문답이 오갔는데, 종본으로부터 들은 말은, “그대는 아직 <화엄경>을 깨닫지 못하였다.”는 한마디였다. <화엄경>이야말로 수십 번도 더 읽어 보았을 의천이 아니던가. 그러나 스스로도 고백하였듯이 여태껏 참선 한 번 해본 적이 없는 선의 문외한이었다. 문외한과 거장의 첫대면은 이렇게 끝났다.
의천은 항주로 내려가는 도중 경치 좋기로 이름난 금산사(강소성 진강)에서 운문종의 요원을 만났다. 그는 유학자 집안 출신으로 계율보다 시와 술을 더 좋아하였으며, 소동파와의 재기발랄한 일화로 훗날 문학사의 한 페이지를 장식하게 된다. 의천은 우연히도 소동파가 다녀간 직후에 금산사에 이르렀다. 두 사람의 만남은 대화 내용보다 첫인사 장면이 동행한 사람들에게 깊은 인상을 남겼다. 의천이 요원에게 스승의 예를 갖추자, 요원은 앉은 채 절을 받아서 안내하던 양걸을 당혹서럽게 하였다. 요원의 눈에 의천은 왕자가 아니라 단지 불교를 구하고자 온 타국의 승려일 뿐이었다. 송대 지식인 사회에 팽배한 배타적 중화주의가 요원에게도 영향을 미친 것일까.
1086년 여름 의천은 귀국선을 타기 직전 명주성(절강성 영파) 동쪽에 있는 아육왕사를 찾아가서 회련을 만나 그로부터 설법을 들었다. 회련은 은퇴한 노승에 불과하였지만, 그야말로 운문종을 왕실에 전파한 일등공신이었다.
의천은 이들 운문종 승려 외에 다른 유파의 선승도 만났으나, 끝내 선종을 받아들이지는 않았다. 선 자체는 모든 불교도들의 보편적인 수행법이지만, 그것을 독립된 종파로 발전시킨 것은 중국 불교도의 창안이었다. 선종에 따르자면, ‘나’자신을 발견하는 것이 바로 깨달음인데, 나를 알기 위해 반드시 경전을 읽거나 불상에 절할 필요는 없다는 것이다. 기왕의 교종은 경전의 자구 해석에만 골몰한다거나, 아니면 미신에 가까울 정도로 불상을 숭배함으로써, 정작 찾고자 하는 ‘나’를 놓치고 있었다. 경전과 불상을 빼놓고 과연 불교를 이야기할 수 있을까마는, 선종이 그랬던 것이다. 언제부턴가 선승들 사이에서는 부처 어록인 경전보다 선사어록이 더 유행하기 시작하였다. 인도 이래의 전통 불교를 자처해온 교종으로서는 이러한 선종을 인정하기 어려웠다. 교종의 눈에 선종은 단연 이단이었다.
그런데 중국사회가 당나라 말기 이후 혼란기를 거치면서 숱한 경전이 불타고 불상이 파괴되었으며, 인도로부터 새로운 경전의 전래는 갈수록 줄어들었다. 따라서 인도적인 전통에 기반한 교종이 급격히 위축된 반면, 중국적 전통을 강화한 선종이 급속도로 득세하였다. 송대 선종은 수많은 유파로 갈라지며 성행하였으며, 항주는 그 중심지였다. 특히 정교한 언어와 고매한 담론을 자랑하는 운문종은 의천이 중국에 갔을 무렵 이미 왕실까지 파고들 정도로 전성기를 맞고 있었다.
의천은 철저한 교종승려였다. 그가 중국에 간 목적은 침체된 고려의 교종을 진흥시키기 위해서였다. 그런데 송 불교계는 선종이 맹위를 떨치고 있었다. 의천이 내심 ‘중국에 인물이 없다’라고 탄식할 만도 하였다. 그러나 송 불교계에도 선종의 득세와 교종의 침체 현상을 우려하는 승려들이 있었다. 자연 의천은 이들과 만나 서로의 입장을 재확인하게 된다.
1085년 섣달 그믐께 의천은 서호 동쪽에 자리잡은 영지사로 원조를 찾아갔다.
원조는 영지사 생활 30년 동안 늘 베옷에 지팡이 차림으로 탁발 행각을 하였다는 계율종의 고승이었다. 그는 계율뿐 아니라 천태사상과 정토사상에도 조예가 깊어서, 의천은 그로부터 계율과 정토에 관해 특강을 들었으며, 그의 저술을 가져와 간행하기도 하였다. 일찍이 원조는 선종을 조목조목 비판하는 책을 간행하려다, 선승들이 소송을 제기하는 바람에 판을 허무는 곤욕을 치른 적이 있었다. 나중에 원조는 그 책을 의천에게 보내주어 지금껏 합천 해인사에 전해지고 있는데, 따로 보낸 편지에서, “나를 알아주는 자 오직 우리 스님(의천)뿐이십니다”라고 하였다.
의천이 선종을 얼마나 비판했는가를 보여 주는 사례가 있다. 한번은 선종에 비판적인 송나라 승려의 글을 입수해서는 말미에 자신의 견해를 덧붙여서 간행한 적이 있었다. 덧붙인 글에서 요나라 임금이 대장경을 편찬하면서 선종의 대표 전적인 <육조단경>과 <보림전>이 거짓되었다는 이유로 불태워 버린 사건을 언급하면서 “요망을 잘 제거하였다”라고 평가하기도 하였다. 의천의 글을 구해 읽은 송나라 화엄종 승려가 기쁨에 넘치는 편지를 보낸 것은 그 후의 일이었다.
천태종 개창을 맹세
선은 불교의 기본적인 수행법이기 때문에, 의천도 선 자체를 비판한 것은 아니었다. 교종 승려도 선을 닦을 필요가 있었다. 다만 선에는 ‘익히는 선’과 ‘말뿐인 선’이 있는데, 선종이 바로 후자에 해당한다고 보고 격렬히 비난하였던 것이다. 그는 ‘말뿐인 선’에서 ‘익히는 선’으로 되돌아가야 한다고 주장하였으며, 그것을 천태학의 수행법에서 찾았다.
항주는 10세기 이래로 중국 천태학의 중심지여서, 의천이 만난 승려들은 종파를 불문하고 대개 천태학을 배운 경력이 있었다. 1086년 초 의천은 포종맹의 추천을 받아 서호 서쪽의 상천축사로 가서 정통파 천태종 승려 종간을 만나, 그로부터 천태학의 교리롸 수행법에 대해 배울 수 있었다. 그리고 고개 너머 용정사로 종간의 스승 원정을 찾아가 천하제일이라는 용정차를 맛보며 종일토록 담론을 나누었다. 나중에 원정은 의천의 도움으로 교종이 쇠퇴하지 않게 되었다는 감사의 글을 보내기도 하였다.
1086년 봄 변경을 다녀온 의천은 혜인원에 머물다가 정원과 하직한 다음 귀국길에 올랐는데, 바로 항구로 가지 않고 천태산(절강성 천태현)을 향하여 남쪽으로 내려갔다. 천태산 남쪽 기슭 풍광이 수려한 곳에 유서 깊은 국청사가 자리잡고 있다. 이 절은 일찍이 수 양제가 지자대사의 유언에 따라 창건한 이래 중국 천태종의 중심 사찰이었다. 우리 나라 승려들의 발길도 잦아서 국청사 앞에 ‘신라원’이 있을 정도였다. 고구려승 반야와 신라승 도육은 이 곳에서 수행하다가 일생을 마쳤으며, 10세기 고려에서 온 의통과 제관은 중국 천태종을 부흥시키는 데 결정적인 기여를 하였다.
의천은 천태산에 흩어져 있는 유적지를 순례하면서 남다른 감회에 젖었을 것이다. 마침내 지자대사탑을 참배하는 자리에서, 그는 고려에 돌아가면 반드시 천태종을 창건하겠노라고 굳게 맹세하였다.
금의환양
1086년 5월 12일 의천은 명주 포구에서 고려 사절단의 배를 타고 귀국하게 되는데, 그를 전송하는 고관들의 수레가 길을 가득 메웠다고 한다. 6월 고려 국경에 다다르자, 그는 허락없이 중국유학을 감행한 데 대해 선종에게 죄를 청하는 글을 올렸다. 이 글에 의하면, 의천은 자신의 유학을 당나라 승려 현장의 인도 유학에 비견하고 있다. <서유기>의 삼장법사로 유명한 현장 역시 국법을 어기고 몰래 인도 유학을 하였으나, 귀국할 때는 거국적인 환영을 받았다. 의천의 유학기간은 현장의 17년에 비해 턱없이 짧았지만, 고려의 국제적 지위를 한껏 높인 점, 침체일로에 있던 송 불교교학을 진작시킨 점, 그리고 3000여 권의 경전을 가져온 점 등은 현장 못지않게 성대한 환영을 받을 만하였다.
작가 한국역사연구회 출판 청년사 발매 1997.04.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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