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레미야애가 3장]
40 우리가 스스로 우리의 행위들을 조사하고 여호와께로 돌아가자
41 우리의 마음과 손을 아울러 하늘에 계신 하나님께 들자
42 우리의 범죄함과 우리의 반역함을 주께서 사하지 아니하시고
43 진노로 자신을 가리시고 우리를 추격하시며 죽이시고 긍휼을 베풀지 아니하셨나이다
44 주께서 구름으로 자신을 가리사 기도가 상달되지 못하게 하시고
45 우리를 뭇 나라 가운데에서 쓰레기와 폐물로 삼으셨으므로
46 우리의 모든 원수들이 우리를 향하여 그들의 입을 크게 벌렸나이다
47 두려움과 함정과 파멸과 멸망이 우리에게 임하였도다
48 딸 내 백성의 파멸로 말미암아 내 눈에는 눈물이 시내처럼 흐르도다
49 내 눈에 흐르는 눈물이 그치지 아니하고 쉬지 아니함이여
50 여호와께서 하늘에서 살피시고 돌아보실 때까지니라
51 나의 성읍의 모든 여자들을 내 눈으로 보니 내 심령이 상하는도다
52 나의 원수들이 이유없이 나를 새처럼 사냥하는도다
53 그들이 내 생명을 끊으려고 나를 구덩이에 넣고 그 위에 돌을 던짐이여
54 물이 내 머리 위로 넘치니 내가 스스로 이르기를 이제는 멸절되었다 하도다
[설교]
오늘 본문에서 말하는 화자는 이제 ‘나’에서 급작스레 ‘우리’로 전환됩니다. 선지자는 지금까지 개인적인 감정에 초점을 맞추었다면, 이제는 자기가 속한 공동체인 ‘우리’를 향하여 말씀합니다.
본문 40절, “우리가 스스로 우리의 행위들을 조사하고 여호와께로 돌아가자!” 구약의 수많은 선지자들, 특별히 호세아, 예레미야, 요엘 선지자가 동일하게 외쳤던 말씀입니다(호 6:1-3; 렘 32:21-42; 14:7; 욜 2:12-14). 우리의 행위를 돌이켜 여호와께로 돌아가자! 이때 우리의 ‘행위’라는 표현은 정확히 직역하면 우리의 ‘길’이란 표현입니다. 우리의 길이란 말 그대로 우리가 걸어가는 모든 길, 우리의 ‘삶’을 가리킵니다. 그래서 우리의 행위를 돌이키자는 것은 말 그대로 우리의 삶을 돌이키자는 뜻입니다. 어느 특정한 행동뿐 아니라, 우리의 삶 전체가 여호와께로 돌아가자는 것입니다.
그렇게 했을 때, 단순히 겉으로 드러난 삶만 돌이키느냐? 그런 게 아니라, 선지자는 계속해서 이어진 본문 41절에서 이렇게 말씀합니다. “우리의 마음과 손을 아울러 하늘에 계신 하나님께 들자!” 우리의 삶을 돌이키는 것과 함께, 선지자는 여기서 우리의 마음이 여호와께로 돌아가야 한다고 말씀합니다. ‘우리의 마음과 손을 아울러!’ 여기서 마음이 우리의 내면을 가리킨다면, 손은 우리의 외면을 가리킵니다. 그래서 내면과 외면이 둘 다 서로 어떠한 예외도 없이 같이 우리 하나님께로 돌이켜야 한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흔히 말하는 ‘회개’라는 것이 바로 이런 것입니다. 우리의 내면과 외면, 어느 것 하나 빠짐없이 순전하게 여호와께로 돌이키는 것입니다.
이러한 마음과 손의 회개를 위하여 선지자는 이제 자신이 어떻게 한다고 말씀합니까? 본문 48절, “딸 내 백성의 파멸로 말미암아 내 눈에는 눈물이 시내처럼 흐르도다.” 본문 49절, “내 눈에 흐르는 눈물이 그치지 아니하고 쉬지 아니함이여.” 여기서 선지자는 자신이 백성의 죄로 인하여 눈물을 흘린다고 말씀합니다. 언제까지 눈물을 흘리느냐? 본문 50절, “여호와께서 하늘에서 살피시고 돌아보실 때까지니라.” 선지자는 자신의 눈물이 곧 여호와께서 자기 백성을 돌아보시기까지 흐를 것이라 말씀합니다. 말하자면 이 눈물은 범죄한 이스라엘이 회개하기까지, 앞으로도 계속해서 흐를 눈물입니다.
물론 여기서 선지자가 흘린 눈물은 일종의 ‘비밀한 눈물’입니다. 예수님 당시 바리새인들처럼 길거리에서 보란 듯이 대놓고 펑펑 우는 게 아니라, 말 그대로 골방에서 흘리는 눈물입니다. 다른 사람에게 보이기 위한 눈물이 아니라, 그야말로 하나님 앞에서의 눈물. 자기가 속한 공동체의 죄악을 품고, 마음 깊이 아파할 줄 아는 사람의 진실한 눈물. 이것이 바로 본문 속 선지자가 흘린 눈물인 것입니다.
때문에 우리는 이러한 눈물을 보면서, 결단코 단순하게 접근해선 안 됩니다. ‘선지자도 울었으니, 나도 울리라!’ 이러한 발상으로 대뜸 달려드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선지자는 왜 울었을까?’ ‘왜 울 수밖에 없었을까?’ ‘왜 눈물이 없이는 죄를 통회하기 어려울까?’ 이런 식으로 차분하게 생각하며, 무엇보다 공동체의 죄를 품고 가슴 깊이 아파한다는 게 무엇인지를 생각해보아야 합니다.
특별히 오늘 본문 속 선지자의 여러 말들을 살펴보면, 사실 지금 현재 공동체가 당하는 여러 고통의 배후에는 결국 (인정하고 싶진 않지만,) 우리 하나님의 섭리가 있다는 걸 인정할 수밖에 없습니다. 선지자가 울 수밖에 없었던 이유?! 단순히 삶이 괴로워서? 현실이 갑갑해서? 그런 것이 아니라, 근본적으로 지금 이 말씀이 우리에게 알려주는 것은 오히려 이 모든 것의 배후에는 우리 인생을 주관하시는 ‘하나님의 섭리’가 있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백성 이스라엘이 여전히 죄를 깨닫지 못하고, 돌이키지 못하고, 원수들이 계속해서 저들을 삼키려 달려드는 상황?! 이 모든 상황이 어쩌면 전부 다 ‘하나님의 섭리’요 ‘하나님의 의로우신 판단’ 하에서 일어난 일인 것입니다. 그러니 어떻습니까? 선지자가 눈물을 흘리는 이유?! 결코 단편적으로 해석될 순 없습니다. 하나님의 돌보심이 끊어지고, 하나님께서 저들을 버리신 것만 같은 절망적인 상황에서, 그럼에도 마음 한편에 소망을 붙들며, 지금 이 공동체를 심판하시는 하나님께 기도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얼마나 풍부한 내용과 격정적인 심경을 담아낸 말씀인지를 잘 묵상해보셨으면 좋겠습니다.
마치 이 세상에 하나님이 없는 것 같은, 철저한 하나님의 부재하심을 느끼는 가운데, 하나님을 향하여 눈물로서 호소합니다. 그렇게 했을 때, 우리는 과연 무엇을, 어떻게 기도할 수 있을까? 함께 이러한 고민을 가지고, 오늘 아침 기도로 나아가길 소망합니다. 옛적 우리 신앙의 선조들은 우리가 날마다 드리는 기도의 시간을 일컬어, 높고 낮음의 굴곡이 있는 ‘기도의 골짜기’라고 불렀습니다. 기도를 함에 있어서 우리가 이러한 ‘골짜기’를 걸어가지 않는다면, 우리는 진정한 의미에서 하나님과 교통한다고 보긴 어려운 것입니다. 골짜기를 걷는다는 것?! 아시다시피 결코 쉬운 일이 아닙니다. 그럼에도 우리가 현재 우리 삶에 놓인 문제, 우리 공동체가 겪는 어려움을 가지고 하나님께 나아간다는 것이 실제로 얼마나 복합적인 문제인지를, 기도를 통해서 한번 깊이 경험해보시길 권합니다. 그래서 오늘 이 아침, 어떤 모습으로 어떻게 기도하든지, 우리 모두 하나님의 살아계심을 경험하며, 그분께 삶의 모든 것을 내어놓으시는 귀한 시간되길 소망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