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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복음말씀의 향기♣ No2782
6월5일 [성 보니파시오 주교 순교자 기념일/연중 제9주간 토요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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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화의 주님! 하루의 양식이 될 이 묵상글을 받아보는 모든 이들을 축복하시고 주님의 뜻대로 살게 하시며 은총 주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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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pbc방송미사**
https://m.youtube.com/watch?v=gsZkz_1WUW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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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레시오회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님]
6월5일 [연중 제9주간 토요일]
마르코 12장 38-44절
<금액의 크기보다는 마음을 보시는 주님, 겉으로 드러나는 것 보다는 내면을 중요시 여기시는 주님!>
극단적 율법주의와 형식주의에 빠진 유다인들이 크게 착각하고 있었던 바가 있었으니 헌금에 대한 생각이었습니다. 그들은 헌금의 액수가 하느님께 대한 신앙의 깊이와 비례한다고 여겼습니다. 많은 헌금을 한 부자들은 그렇지 못한 가난한 사람들의 보잘것 없는 헌금을 크게 업신여겼습니다.
가난한 과부 한 사람이 와서 헌금을 하는데, 금액이 고작 렙톤 두 닢이었습니다. 인간적인 눈으로 볼 때 렙톤 두닢은 일생에 도움이 안되는 작은 금액입니다. 렙톤은 당대 통용되던 화폐들 가운데 가장 가치가 낮은 그리스 동전이었습니다.
한 렙톤은 당시 노동자들 하루 품삯의 144분의 1가치를 지닌다고 하니, 우리나라 돈으로 4~500원 정도 될지 모르겠습니다. 요즘 세상에 한 렙톤으로 대체 무엇을 할 수 있을까요? 겨우 자판기 커피 한잔 뽑아 마실 수 있는 금액입니다. 성전에 조금이라도 도움이 되려면 적어도 만원이나 5만 원이나 10만 원 짜리 수표 정도는 넣어줘야 마땅합니다.
그런데 인간의 내면을 들여다보시는 예수님께서는 렙톤 두 닢이 과부가 지니고 있던 전재산이라는 것을 알고 계셨기에, 제자들에게 이렇게 가르치셨습니다.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저 가난한 과부가 다른 모든 사람보다 더 많이 넣았다.
저들은 모두 풍족한 데에서 얼마씩을 예물로 넣었지만, 저 과부는 궁핍한 가운데에서 가진 것을, 곧 생활비를 모두 다 넣었기 때문이다.”(마르코 복음 12장 43~44절)
가난한 과부가 하느님께 드린 헌금은, 그 가치에 있어서 다른 어떤 사람들의 큰 헌금보다도 뛰어납니다. 그녀가 두 렙톤을 헌금하는 데에는 큰 희생이 뒤따랐기 때문입니다. 과부는 주님께 봉헌하기 위해 그날 자신에게 필요한 모든 것을 다 내어놓았기 때문입니다. 반면에 다른 사람들은 쓰고 남는 것을 바쳤습니다.
가난한 과부의 헌금에는 마음이 담겨있었습니다. 진심이 담겨있었습니다. 지극한 정성이 포함되어 있었습니다. 삶 전체가 녹아들어가 있었습니다. 의무감에서 하는 봉헌, 보란 듯이 우쭐하는 마음에서 드리는 봉헌, 쓸 것 안 쓸 것 다 쓰고 남는 것을 바치는 봉헌이 아니라 준비된 봉헌, 감사의 마음이 담긴 봉헌을 주님께서는 바라고 계십니다.
금액의 크기보다는 마음을 보시는 주님, 겉으로 드러나는 것 보다는 내면을 중요시 여기시는 주님이심을 다시 한번 확인할 수 있어 참으로 기쁩니다. 오늘 우리의 보잘 것 없는 헌금, 오늘 우리의 아주 작은 희생, 오늘 우리의 티끌만한 봉사도 크게 어여삐 여기시고, 기쁘게 받으시는 주님께 깊은 감사를 드리며, 작더라도 마음과 정성이 담긴 봉헌을 준비해야겠습니다.
‘미드라쉬 랍바(랍비들의 가르침) Ⅲ’에 다음과 같은 경고문이 소개되고 있습니다. 한 사제가 어느 가난한 여인이 봉헌한 한줌 밀가루 제물을 손에 받아들고는 너무 어이가 없어 거절했습니다.
그 사제는 즉시 하느님으로부터 경고를 받았습니다. 바로 그밤 꿈에 그는 이런 음성을 들었습니다. “그 여인이 바친 것을 멸시하지 말아라. 그것은 자신의 생명을 내어놓은 것과 같으니라.”
봉헌과 관련해서 오늘 우리 역시 진지한 반성과 성찰이 필요합니다. ‘이왕이면 다홍치마’라고 하느님께 봉헌하는 우리의 예물이 보다 귀하고 값진 것이면 좋겠습니다. 보다 큰 액수라면 좋겠습니다.
그러나 사람마다 주어진 처지가 각자 다릅니다. 만원이 아무것도 아닌 사람도 있겠지만, 만원이 하늘같은 사람도 있습니다. 뿐만 아니라 하느님께서는 액수보다는 마음과 정성을 더 높이 평가하십니다. 따라서 봉헌이나 자선 금액의 많고 적음을 가지고 사람을 평가해서는 절대 안되겠습니다.
우리 교회가 경제적으로 어려운 사람들을 경멸하거나 무시하는 일이 있어서는 안되겠습니다. 가난한 사람들이 헌금 때문에 소외당하거나 상처받은 일이 없어야겠습니다. 각종 헌금이나 기부금을 모금하는 과정에서 사목자들은 가난한 신자들이 상처받지 않도록 더욱 세심한 배려를 아끼지 말아야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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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원교구 전삼용 요셉 신부님]
(복음묵상 동영상)
https://youtu.be/VBwKxEAbjM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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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신앙의 수준은 내가 무언가 잃을 때 드러난다>
오늘 복음에서는 예수님께서 과부들의 가산을 등쳐 먹는 부자 율법 학자들을 비판하시며 가난한 과부의 헌금을 칭찬해 주십니다. 가난한 과부는 가진 재산의 전부인 모든 생활비를 봉헌하였지만, 율법 학자들은 겉보기에 액수는 많아도 일부만 봉헌하였기 때문입니다.
봉헌으로 신앙인의 믿음을 측정하는 것이 과연 옳은 일일까요? 오늘 복음의 예수님께서 그렇게 하고 계시니 이것은 반박의 여지가 없습니다. 사랑하면, 믿으면 더 내어놓을 수 있습니다. 신앙은 참된 봉헌으로 측정될 수밖에 없습니다.
봉헌은 무엇일까요? 나의 것이 사라지는 것입니다. 율법학자들은 자신의 것이 사라지는 것이 매우 못마땅합니다. 그래서 과부의 가산을 등쳐 먹기까지 합니다. 다만 봉헌하거나 기도를 하는 것은 남에게 보이기 위한 것일 뿐입니다. 그러나 과부는 생활비 모두를 바칩니다. 아까워하지 않습니다. 어떻게 나의 모든 것을 바치는데 아깝지 않을까요? 그만큼 신앙이 성숙했기 때문입니다.
신앙생활이 40년 된 부부의 외아들이 갑자기 사고로 죽자 앞으로 성당에 나오지 않겠다고 말씀하신 것을 보았습니다. 자기 외아들을 빼앗아가는 그런 하느님은 믿지 않겠다고 한 것입니다. 어쩌면 이분은 40년 동안 신앙을 발전시키지 못했다고 볼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신앙에서 가장 중요한 것을 성장시키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그것은 내 모든 것의 주인은 하느님이라는 믿음입니다.
또 신앙생활이 1년 된 분이 외아들을 잃은 모습도 보았는데, 그분은 그 고통을 잘 참아내셨습니다. 그리고 믿음을 버리지 않았습니다. 이미 이분은 신앙생활이 자기의 것이나 자기 자신을 바치는 삶으로 이어져야 함을 잘 알고 계셨던 것입니다. 신앙생활을 하면서 발전을 하였느냐, 하지 않았느냐는 내가 어디까지 봉헌할 수 있느냐로 결정될 수밖에 없습니다.
만약 신앙을 증가시켜 왔다면 혹은 기도 생활을 했다면, 자녀를 잃어도 그동안 키울 수 있게 해 주신 하느님께 감사해야 할 것입니다. 자전거가 너무 타고 싶은 아이에게 자신의 자전거를 잠깐 빌려줬다가 다시 받으면 아이는 분명 조금이라도 태워준 친구에게 고마워할 것입니다. 우리도 본래 우리 것은 아무것도 없었습니다. 그러니 모든 것을 빼앗겨도 항상 감사할 것이 남아있을 수밖에 없습니다.
이런 면에서 오늘 복음의 과부는 신앙생활을 하는 동안 자신을 성장시켜 온 사람의 모델이고 율법 학자들은 신앙생활을 하는 동안 믿음이 퇴보한 사람의 모델입니다. 우리는 항상 신앙이 발전하고 있는지 퇴보하고 있는지 살펴야 합니다.
봉헌은 ‘감사’와 직결됩니다. 오늘 복음에서 율법학자들은 “기도는 길게” 하는 사람들이었습니다. 하지만 그들의 기도에는 과부의 헌금에 들어있는 가장 중요한 봉헌이 없었습니다. 그것은 ‘감사의 마음’입니다. 감사가 자라지 않는 기도는 기도가 아닙니다.
김준호씨는 인하대학교 공과대학 건축과에 진학하여 공부하다가 군에 입대했습니다. 군복무 19개월이 되던 10월 어느 날 부대에서 관물대 위에 올라가 물건을 정리하다가 실수로 땅바닥에 떨어져 크게 다쳤습니다. 척추 중에서 가장 중요한 경추를 크게 다쳐 전신 마비 환자가 된 것입니다.
그러나 그는 절망적인 상황 속에서 믿음을 가지게 됩니다. 그는 인당이라는 화명으로 붓을 입에 물고 글씨나 그림을 그립니다. 그가 감사하는 것을 들어보겠습니다. 첫째는 내가 전신 마비 환자가 되었기 때문에 주님을 영접하고 믿게 된 것이 무엇보다 감사합니다. 둘째는 군대에서 다쳤기 때문에 치료비를 해결할 수 있게 된 것을 하느님께 감사합니다. 셋째는 원호병원에 입원하는 중에 지금의 아내를 만나게 된 것을 감사합니다. 아내는 그때 병원의 실습생이었습니다. 넷째는 남들이 하지 못하는 구필 화가(입으로 그리는 화가)가 된 것이 감사합니다.
그는 우리나라의 첫 번째 구필 화가로서 이후 많은 사람에게 희망을 심어주었습니다. 1981년도에는 세종문화회관에서 전시를 하고 하느님의 영광을 드러내었습니다. 그는 항상 말합니다. “하느님께서 내게 베푸신 은혜를 생각할 때마다 감사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이런 분이 하는 감사가 ‘과부의 헌금’과 같을 것입니다. 감사할 것이 전혀 없는데도 감사하고 주님께 영광을 드린다면 신앙이 성숙한 것입니다. 반면 신앙생활을 하면서도 불만만 커진다면 이상한 율법주의자가 되어가고 있는 것입니다.
과부의 헌금이란 ‘모든 상황에서 감사할 수 있는 마음’입니다. 과부는 생활비 전부를 봉헌했습니다. 먹을 것이 없어도 감사하기 때문입니다. 율법 학자들처럼 자신들의 재산이라 여기는 것으로 하느님과 거래하지 않습니다. 감사가 증가하지 않으면 신앙은 퇴보하는 것이고 기도도 의미가 없습니다. 기도의 가장 큰 목적이 감사의 마음을 증가시키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인생은 늙어가는 것이 아니라 익어가는 것이란 말도 있듯, 신앙도 끊임없이 감사를 찾지 않으면 늙어갈 수밖에 없습니다. 사람인 것만으로도, 신앙을 가진 것만으로도 감사할 수 있습니다. 작년보다 올해가 항상 더 감사할 줄 알고 행복할 수 있다면 신앙이 익어가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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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원교구 조욱현 토마스 신부님]
예수님께서는 먼저 율법학자들을 조심하라고 하신다. 그들은 율법을 중요하게 여기고 실천하지만, 외적인 것에 더 큰 관심을 기울인다. 그들은 장터에서 인사받기를 좋아하고 잔칫집에서 윗자리에 앉는 것에 더 신경을 쓴다고 하시며 과부들의 가산을 등쳐먹으면서도 남에게 보이려고 기도는 길게 한다고 하신다. 내적인 것에 관심이 없고 껍데기에만 신경 쓰는 그들의 불행을 말씀하신다.
예루살렘 성전 안에는 부인들을 위해 마련된 13개의 헌금 궤가 있다. 그것들은 매일 드리는 제물이나 성전의 비용을 위한 헌금 궤이다. 많은 사람들이 상당한 액수의 헌금을 하였다. 그런데 한 과부는 동전 한 닢에 해당하는 렙톤을 헌금 궤에 넣었고, 예수께서는 그 과부를 칭찬하셨다. 그것은 그 과부가 자신이 가지고 있던 것을 모두 희생하고 바쳤다는 데 그 이유가 있을 것이다.
이 과부의 헌금에 관한 이야기는 신학적으로 더 풍부한 의미를 담고 있다. 무엇보다도 과부의 동전에 대한 이야기가 율법학자들에 대한 가혹한 표현과 직접 연결되고 있다는 점이다. 그들은 신앙생활을 겉꾸미는 신앙생활을 하면서 남에게 대우받기를 원하면서도 뒤로는 “과부들의 가산을 등쳐먹는다.”(40절). 이렇게 위선에 가득찬 율법학자들과 단순하고도 충만한 과부의 믿음을 비교하고 있다. 그 과부는 생계를 꾸려나가기 위하여 꼭 필요한 것까지도 바쳤던 것이다.
과부의 헌금은 그 무게가 아니라 그것을 봉헌한 선한 마음으로 재어진다. 즉 예수님께서는 과부가 봉헌한 돈의 양에는 전혀 관심을 기울이지 않으시고, 그 여인의 아낌없는 마음만 보셨다. 얼마 안 되는 것으로 최선을 다하여 충실히 응답하는 이들은, 더 많은 것을 가지고 있으면서도 한 귀퉁이만으로 응답하는 이들보다 더 깊은 신앙을 표현하는 것이다. 마르코는 은총에 호응하지 못하는 율법학자들과, 조건 없이 단순하고 기꺼운 마음으로 응답하는 과부를 비교하고 있다.
자선을 베풀기 위해 필요한 것은 마음가짐뿐이다. 비록 지독하게 가난한 사람들 틈에서 살아가면서도 동전 두 닢을 넣는다면 우리는 힘자라는 대로 모든 일을 다 한 것이다. 보리빵 한 조각밖에 없으면서도 그것을 나눈다면 우리는 자선행위의 가장 중요한 것을 행하는 것이다. 가난한 사람이 냉수 한 잔으로 하늘 나라를 얻는 것과 같으니 이 얼마나 대단한 일인가!
오늘 헌금을 한 과부의 모습을 통하여 자비로운 마음과 믿는 마음을 즉 신앙으로 자기의 모든 것을 바친 것과 하느님 아버지의 뜻을 따라 당신의 모든 것을 즉 당신 자신을 온전히 바치신 예수 그리스도를 볼 수 있어야 한다. 그리스도의 사제직에 참여한다는 것은 바로 나 자신을 온전히 하느님께 봉헌할 수 있는 삶이 뒤따라야 한다는 것을 오늘의 독서를 통해서 우리는 알아들을 수 있어야 한다. 이러한 자비로운 마음과 신앙을 우리에게 주시도록 청하여야 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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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미사》 오늘의 묵상
[인천교구 박형순 바오로 신부님(인천가톨릭대학교 신학대학 교수)]
6월을 시작하면서 우리는 제1독서 말씀으로 토빗기를 만납니다. 토빗기의 중요한 신학은 주님의 가르침에 충실한 삶은 반드시 하느님의 보상을 받는다는 사실입니다. 그러므로 어떠한 어려움이 있더라도, 자선을 베풀고 기도에 충실한 삶을 살아야 함을 우리에게 알려 줍니다. 내가 원하고 내가 편할 때 선택적으로 하느님을 섬기는 것이 아니라, 한결같은 모습으로 하느님을 섬겨야 하고, 주님의 가르침을 따라야 함을 알려 줍니다. 어려움과 역경 속에서도 하느님을 신뢰하고 따른다면, 복을 받고 보상을 받게 되는 것입니다.
동시에 토빗기는 하느님의 뜻을 따르기가 쉽지 않은 일이라는 사실도 알려 줍니다. 하느님의 뜻을 따르겠다는 선택이 가져올 수 있는 불편함과 어려움 또한 전해 주기 때문입니다. 오늘 우리가 독서에서 만나는 장면은 역경 속에서도 하느님께 의지하며 살아간 토빗이 다시 보상을 받게 된다는 내용입니다.
성경은 이처럼 우리보다 먼저 하느님을 알고 믿었던 사람들의 이야기를 들려줍니다. 토빗이 살던 시절에 하느님을 알았던 사람은 토빗과 그의 아들 토비야만이 아니었습니다. 수많은 사람이 하느님을 주님이라고 고백하며 살아갔지만, 그 고백을 삶으로 실천한 사람은 많지 않았습니다. 이처럼 하느님을 향한 믿음을 바탕으로, 자신 앞에 다가오는 시련과 어려움 속에서도 주님의 가르침을 실천하면서 살아가기란 매우 어려운 일입니다.
오늘을 살아가는 우리도 많은 어려움을 겪고 있습니다. 주님의 가르침이 우리 마음 한 편에 자리 잡고 있지만, 동시에 주님의 가르침을 따르면 이익이나 성공보다 손해를 입는다는 마음의 가난함도 자리하고 있습니다. 그 부족함을, 가난함을 인정하면서 주님을 잊지 않는다면, 우리의 믿음도 토빗과 토비야의 여정을 닮아갈 수 있을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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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대교구(가톨릭 평화신문 미주지사)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님]
지난 4월 28일에 전임 서울대교구 교구장이셨던 정진석 니콜라오 추기경님께서 하느님의 품으로 가셨습니다. 추기경님께서는 1998년 청주교구장에서 서울대교구장으로 오셨습니다. 저는 1999년 정진석 니콜라오 추기경님께 본당 신부 임명장을 받고 적성 성당의 본당신부가 되었습니다. 추기경님을 가까이 뵙지는 못했습니다. 교구 인사이동으로 2002년 저는 교구청 사목국에서 교육담당 업무를 맡았습니다. 구역장, 반장 교육과 미사를 준비하면서 가끔씩 추기경님께 총구역장 피정미사를 부탁드렸습니다. 추기경님께서는 총구역장을 위한 파견미사에는 꼭 함께 해 주셨습니다. 복음화 학교 담당 사제로 있을 때입니다. 추기경님께서는 복음화 학교의 피정에도 함께해 주셨고, 강의와 미사를 해 주셨습니다. 밖에서 돌아오면 어머니께서 자녀들을 위해서 맛있는 저녁을 준비해 주시듯이, 추기경님께서는 매일 저녁 교구청 마당에서 묵주기도를 하셨습니다. 기도가 부족한 젊은 신부들을 위해서 기도의 밥상을 차려주셨습니다.
추기경님께서는 1961년에 사제서품을 받았습니다. 9년 후인 1970년 청주교구 교구장이 되셨고 1998년까지 28년 동안 청주교구 교구장으로 사목하셨습니다. 1998년 서울대교구 교구장이 되셨고 2012년까지 14년 동안 서울대교구 교구장으로 사목하셨습니다. 2012년 은퇴하셔서 원로사목자가 되셨고 2021년 하느님의 품으로 가셨습니다. 사제로 9년, 교구장으로 42년, 원로사목자로 9년을 지내셨습니다. 제가 이렇게 연도를 이야기하는 것은 추기경님의 정확한 기억력 때문입니다. 추기경님께서는 강의나 강론 중에 오랜 전의 일을 년도와 날짜까지 기억하셨습니다. 4월 28일에 하느님의 품으로 가셨으니 이제 하느님 나라에서 새로운 삶을 시작하신 지 39일 되셨습니다. 하느님 나라에서 그리운 어머니도 만나시고, 전임 교구장이셨던 김수환 스테파노 추기경님도 만나시고, 존경하였던 김대건 안드레아 신부님, 최양업 토마스 신부님도 만나셔서 이 세상에서의 소풍이야기 나누시길 바랍니다.
추기경님을 기억하는 사람들의 이야기를 나누고 싶습니다. 추기경님께서는 시간을 소중하게 여기셨습니다. 철저하게 시간을 관리하셨기에 매년 책을 출판하실 수 있었습니다. 추기경님께서는 새해 선물로 구역장, 반장들에게 본인이 쓰신 책을 선물해 주셨습니다. 추기경님께서는 언제나 기도하는 모습을 보여주셨습니다. 성직자와 수도자를 위해서, 신학생들의 부모님을 위해서, 구역장과 반장을 위해서, 교회를 위해서, 가난한 이를 위해서 기도하셨습니다. 추기경님께서는 청빈한 삶을 사셨습니다. 더운 여름에도 에어컨을 켜지 않고 선풍기를 사용하셨습니다. 글을 쓰실 때는 이면지를 사용하셨습니다. 같은 옷을 18년 동안 입으셨습니다. 이 세상을 떠나실 때는 안구를 기증하셨습니다. 모든 이를 위해 모든 것이 되셨습니다. 추기경님께서는 경청의 삶을 사셨습니다. 하느님께서 우리의 기도를 언제나 들어주시듯이, 추기경님께서는 사람들의 이야기를 끝까지 들어주셨습니다. 위로해 주시고, 격려해 주셨습니다. 추기경님께서는 순교자들을 공경하셨습니다.
추기경님의 외적인 삶은 화려한 모습이었습니다. 교구장으로 42년을 지내셨고, 존경받는 자리에 있었습니다. 그러나 추기경님의 내적인 삶은 가난한 과부의 삶이었습니다. 가난한 과부가 하느님께 가진 모든 것을 봉헌하였듯이, 추기경님께서도 모든 이를 위해서 모든 것이 되려하셨고, 하느님께 오롯한 마음으로 사랑을 드렸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는 가난한 과부의 헌금을 칭찬하셨고, 겸손한 세리의 기도를 칭찬하셨고, 백인대장의 믿음을 칭찬하셨고, 착한 사마리아 사람의 나눔을 칭찬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정진석 니콜라오 추기경의 삶 또한 칭찬하셨으리라 믿습니다. ‘적선지가 필유여경(積善之家 必有餘慶)’이라는 말이 있습니다. 선을 베푸는 집안에는 반드시 경사가 생긴다는 뜻입니다. 가난하지만 선(善)을 쌓은 집안은 언젠가는 경사를 맞게 되고 비록 부자라 하더라도 불선(不善)을 쌓은 집안에는 언젠가는 재앙이 닥쳐오게 된다는 말입니다. 나의 마음에 무엇을 쌓아 놓을 것인지 생각하면서 오늘 하루를 지냈으면 합니다.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저 가난한 과부가 헌금함에 돈을 넣은 다른 모든 사람보다 더 많이 넣었다. 저들은 모두 풍족한 데에서 얼마씩 넣었지만, 저 과부는 궁핍한 가운데에서 가진 것을, 곧 생활비를 모두 다 넣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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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대교구 김영남 다미아노 신부님]
<율법학자의 위선과 가난한 과부의 정성>
오늘 복음은 두 대목으로 구성되어 있다. 하나는 율법학자들의 잘못된 태도를 조심하라는 경고의 말씀이고, 다른 하나는 '가난한 과부의 정성'을 칭찬하는 말씀인데, 전체적으로 보아 율법학자의 태도와 가난한 과부의 태도가 큰 대조를 이루고 있다.
"먼저 율법학자들을 조심하라"는 내용의 말씀을 살펴보겠다. 사람들이 율법학자들에 대하여 조심하여야 할 내용은 크게 보아 명예욕과 재물욕이다.
예수님은 먼저 장터와 회당과 잔치 자리와 같이, 많은 사람들이 모이는 곳에서 자신을 과시하고자 하는 그들의 명예욕을 비판하신다.
둘째로는 두 가지 예를 통해 율법 학자들의 위선을 들추어내신다. '과부들'은 구약성서에서 '고아' 와 '떠돌이' 와 함께 공동체의 보호가 필요한 '가난한 사람들'의 대표격으로 자주 언급되는데, 예수님은 율법학자들이 이 과부들의 가산을 등쳐먹는다는 날카로운 비판의 말씀을 하신다.
율법학자들이 어떤 식으로 과부들의 재산을 등쳐먹는 일이 일어 나는지에 관하여는 복음말씀을 통해 알 수는 없지만, 율법학자들은 과부들의 재산을 관리하는 변호사의 역할을 하면서 과부들을 속여 먹는 경우들이 있지 않았을까 추정해 볼 수는 있겠다.
율법학자들은 이렇게 옳지 못한 행동을 하면서 남들에게는 거룩한 듯이 보이려고 기도는 길게 한다며, 예수님은 그들의 위선을 비판하신다. 그러면서 이런 사람들이야말로 엄한 심판을 받게 될 것이라고 경고하신다.
이제는 '가난한 과부의 헌금'에 관한 대목을 살펴보자. 이 대목은 예수께서 '헌금함' 이 놓여 있던 성전 앞마당에서 앉아서 가르 치고 계셨음을 전제로 하고 있다.
앞의 대목에서는 율법학자들의 태도가 본받지 말아야 할 예로서 제시되었다면, 과부의 헌금에 대한 칭찬의 대목에서는 과부의 태도가 사람들이 본받아야 할 모범으로 제시되어 있다. 매우 대조적이다.
참고로 말하자면, 이 대목에 나오는 과부에 관하여는 그가 나이가 많은지, 병중에 있는지, 가족들은 있는지 등에 대하여는 전혀 언급이 없다. 예수님은 부자들이 헌금 하는 것을 "바라보고" 계시다가 어느 가난한 과부가 가장 작은 화폐단위였던 렙톤 두 닢을 헌금하는 것을 보시고 말씀하신다.
예수님의 말씀은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하며 매우 장중 하게 표현되어 있는데 사람들의 일반적인 가치평가가 잘못 되어 있음을 가르치신다.
헌금의 양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그 헌금으로 표현되는 자세의 질이 중요한 것이라고 가르치신다. 그리고 외양만 보고 판단하는 것이 얼마나 잘못된 것인지를 가르치신다.(참조: 야고 2,1~13)
그리고 바로 앞 대목에서 "과부들의 가산을 등쳐먹는 율법학자들" 에 관한 말이 있었는데, 다시 이 대목에서 과부가 언급되면서 그의 '가난한' 처지가 매우 강조되어 있다.
'가난한' 과부들을 도와 주어야 할 율법학자들이 오히려 그들을 '등쳐먹어' 그들의 가난의 골을 더욱 깊어지게 한다는 것이다.
예수님의 판단은 준엄 하다. 예수님은 "이런 사람들이야말로 더 엄한 심판을 받게 될 것 이다" 라고 말씀하신다. 종교지도자들의 그릇된 태도의 책임이 얼마나 큰지 말해준다.
율법학자들에 대하여 예수님께서 그토록 날카로운 비판의 말씀을 하신 이유는 그들이 유다인 사회에서 영향 력이 매우 큰 위치에 있는 사람들이었기 때문일 것이다.
반면에 과부는 일반적으로 성서의 유다인들의 사회에서 너무 가난하여 아무런 영향력도 없고, 무시받기 쉬운 입장에 있는 사람들이었다.
그런데 예수님은 바로 가난한 과부를 본받아야 할 예로 제시하신다. 가난하고 불쌍한 사람들에 대한 예수님의 각별한 관심과 애정이 여기에서도 드러난다.
오늘 복음에 나오는 율법학자들은 당시의 사회에서 볼 때 종교 지도자들이었고, 사회의 지도층 인사들이었다. 오늘날에는 어떠 한가?
사회의 지도층 인사들을 말하기 전에 우선 종교의 지도자들은 어떠한가? 종교가 가난한 사람들을 돕지는 못할 망정, 오히려 피해를 주는 경우들도 더러 있음을 생각할 때, -그것이 어찌 사이비 종교들 에게서만 보인다고 할 수 있겠는가?- 예수님의 말씀이 "찌르듯이" 더욱 아프게 다가온다.
오늘 우리 그리스도신자들은 복음 말씀을 통하여 한편으로는 율법 학자들의 명예욕과 재물욕이 뒤섞인 위선을 본받아서는 안된다는 경고를 받고, 다른 한편으로는 가난하지만 온 정성을 다해 헌금하는 과부의 정성어린 '하느님 공경' 의 태도를 본받으라는 초대를 받는다.
또한 복음 말씀은 오늘의 신앙인들에게, 특히 교회안에서 책임 있는 자리에 있는 분들에게, 자신들이 혹시라도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으로 부터 심하게 비판받는 율법학자들의 태도에 떨어져 있지는 않은지 철저하게 자기 성찰을 하라고 요청한다.
그러면서 동시에 오늘 복음 말씀을 듣거나 읽으면서, 교회 공동체 전체는 교회 안에서 가난한 과부와 같은 처지에 있는 사람들이 무시 당하는 일이 결코 없도록 하고, 그들이 교회를 따뜻한 공간으로 느낄 수 있도록 각별히 배려한다고 깨우쳐 준다.
교회는 어려운 처지에 있는 사람들이 적어도 '신앙 공동체' 안에서만은 '하느님의 사랑' 과 '이웃 형제자매들의 사랑' 을 따뜻하게 느낄 수 있도록 급히 구체적 노력을 기울여야 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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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산교구 김동환 다마소 신부님]
그때에 예수님께서는 군중을 가르치시면서 이렇게 이르셨다. “율법학자들을 조심하여라. 그들은 긴 겉옷을 입고 나다니며 장터에서 인사받기를 즐기고, 회당에서는 높은 자리를, 잔치 때에는 윗자리를 즐긴다. 그들은 과부들의 가산을 등쳐 먹으면서 남에게 보이려고 기도는 길게 한다. 이러한 자들은 더 엄중히 단죄를 받을 것이다.”
예수님께서 헌금함 맞은쪽에 앉으시어, 사람들이 헌금함에 돈을 넣는 모습을 보고 계셨다. 많은 부자들이 큰 돈을 넣었다. 그런데 가난한 과부 한 사람이 와서 렙톤 두 닢을 넣었다. 그것은 콰드란스 한 닢인 셈이다.
예수님께서 제자들을 가까이 불러 이르셨다.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저 가난한 과부가 헌금함에 돈을 넣은 다른 모든 사람보다 더 많이 넣었다. 저들은 모두 풍족한 데에서 얼마씩 넣었지만, 저 과부는 궁핍한 가운데에서 가진 것을, 곧 생활비를 모두 다 넣었기 때문이다.”(마르 12,38-44)
우리가 헌금할 때 그 정성과 마음을 보신다는 사실을 오늘 복음에서 들려주는 과부의 헌금이야기는 자기가 하루를 살아가는데 필요한 양식을 사서 먹을 돈을 모두 하느님께 바쳤다는 것입니다.
옛날 예수님이 사시는 시대에 유다인들은 하느님께 바치는 흠숭즉 봉헌을 소중히 여겼다고 합니다. 그래서 헌금도 상당히 많이 바쳤다고 합니다. 많은 돈을 내놓는 부자 옆에서 한 가난한 과부가 렙톤 2개를 넣었다는 것이 오늘 복음의 이야기입니다. (여기서 참고로 말씀드리고 싶은 것은 렙톤은 그리이스에서 가장 가치가 낮은 화폐라는 점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가난한 과부가 헌금하는 모습을 보고 계시다가 이렇게 칭찬하였습니다. "이 부인은 여기에 있는 어떤 사람보다 많은 헌금을 하였다. 다른 사람들은 많은 돈 중에서 얼마를 헌금하였지만, 이 부인은 있는 것을 모두 다 헌금한 것이다"
왜냐하면 다른 사람들은 자기 재산 중에 일부를 떠에서 남겨 놓고 그 일부를 헌금했지만, 이 부인은 아주 작은 돈을 헌금하였지만 가지고 있던 것을 몽땅 내놓았던 것입니다.
여기서 예수님께서 이렇게 말하는 이유는 하느님께서는 돈의 많고 적음을 따지시는 분이 아니라, 우리의 마음과 정성을 보고 계시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그녀는 소유한 모든 것을 바쳤다는 점에서 하느님의 마음에 든 것입니다.
그녀는 진실로 하느님을 믿었기에 모든 것을 바칠 수가 있었던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계산을 하고 때때로 한 부분만을 바치지는 않습니까? 여기서 아주 중대한 사실을 우리는 알아야 할 것입니다.
여러분 중에 진실로 하느님을 믿고 모든 것을 다 바친 사람은 예수님의 마음을 이해하실 수 있습니다. 예수님은 하나뿐인 당신 생명을 우리를 위해 내어놓으셨습니다. 기꺼이 당신 생명을 아낌없이 바칠 수 있었던 것입니다.
이런 예수님의 마음과 생각을 조금이나마 우리가 깨달을 수 있다면 우리는 예수님의 마음을 어느 정도 이해할 수 있다고 말할 수 있을 것입니다.
당신의 생명을 내놓을 수 있는 마음은 바로 그 과부가 헌금한 마음과 똑같은 마음이라는 것입니다. 이 가난한 과부는 자신이 쓰고 남은 여분의 것을 하느님께 이웃에게 바친 것이 아니라 가난과 궁핍 속에서, 곧 죽어 가는 마당에서 바친 것입니다. 그녀는 자신의 모든 것을 하느님께 드렸던 것입니다. 그래서 주님은 그 여인의 마음을 느낄 수 가 있었던 것입니다.
이 가난한 과부는 자신이 필요한 것까지 내 놓을 수 있는 마음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이 마음은 바로 예수님의 마음입니다. 예수님은 당신의 모든 것을 예수님과 같은 마음을 가진 이 과부는 하느님의 마음에 꼭 든 이라는 것입니다.
형제 자매 여러분 예수님께서는 우리가 헌금할 때 그 정성과 마음을 보신다는 사실을 꼭 기억하시고 감사하는 마음으로 봉헌해야 하겠습니다.
그러면 오늘 하루 기쁘고 즐거운 하루가 되기를 바라면서 마치도록 하겠습니다. 안녕히 계십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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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산교구 신문갑 비오 신부님]
<신앙생활의 기준은 믿음의 중심이다>
오늘 복음은 율법학자들과 가난한 과부의 모습을 통해 주님께서 우리에게 바라시는 믿음의 모습을 가르쳐주고 있습니다. 율법학자들의 신앙생활과 가난한 과부의 신앙생활을 구분 짖는 유일한 기준은 바로 믿음의 중심이 어디에 있는가(?)로 구분됩니다.
율법학자들의 신앙생활 속에서 그 믿음의 중심은 철저히 자기 자신에게 있음을 발견합니다. 율법학자들에게 있어서는 하느님의 말씀도, 하느님의 뜻도 철저히 자기 자신을 위해 이용됩니다.
이들에게 하느님과 신앙은 다른 사람에게 인사 받고, 회당이나 잔치에서 윗자리, 높은 자리를 차지하기 위하여 그리고 자신의 현실적인 이익을 챙기기 위한 수단이 됩니다. 결국 이들에게 신앙생활은 자기 자신을 위한 하느님과의 거래가 되어 버립니다.
복음에는 구체적으로 언급하고 있지 않지만 아마도 이들에게 있어서 하느님께 드리는 봉헌 역시도 자신이 원하는 것을 얻기 위한 투자의 의미에 지나지 않을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이러한 신앙의 모습을 분명하게 경고하십니다. “이러한 자들은 더욱 엄중한 단죄를 받을 것이다.” 반면에 가난한 과부의 신앙생활 속에는 그 믿음의 중심이 철저히 하느님께 있음을 발견합니다. 이 사실은 과부가 보여주는 봉헌 하나만으로도 넉넉히 알 수 있습니다. 과부가 보여준 봉헌은 율사들이 보여준 모습과는 정반대로 그 모든 것보다 우선적으로 주님을 사랑하는 마음이 담겨진 봉헌이었습니다.
과부의 봉헌 속에는 어떠한 계산도, 자신의 현실적인 이익도 없었습니다. 오히려 지극히 높으신 하느님께서 자신에게 베풀어 주시는 은혜에 감사하며 자신의 능력껏 아낌없이 바치는 모습, 주님을 찬양하며 내 가장 소중한 것을 기쁜 마음으로 바치는 모습이 담겨져 있는 아름다운 봉헌이었습니다.
그래서 주님께서도 이러한 과부의 봉헌을 극찬하셨습니다.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저 가난한 과부가 헌금함에 돈을 넣은 다른 모든 사람보다 더 많이 넣었다.“
우리들의 신앙 생활속에는 율법학자의 모습도, 가난한 과부의 모습도 담겨져 있는 것 같습니다. 때로는 주님께 받은 은혜를 진심으로 감사드리고 주님을 찬양하며 아무런 조건없이 오로지 주님을 위하는 마음으로 하느님을 내 신앙의 중심으로 모시고 살아갈 때도 있지만 또 때로는 내가 필요한 것을 얻기 위해 주님과 거래를 하며 내 뜻에 주님을 맞추려는 마음으로 철저히 나 자신을 신앙의 중심으로 두고 살아갈 때도 있습니다.
그래서 하느님께 “이번 한번만 해주시면 제가 이렇게 해드리겠습니다. 제가 이렇게 기도해 드릴테니 이번 한 번만 도와주십시오“
이렇게 기도하며 하느님과 흥정을 벌이고 “내가 이렇게 하느님께 정성을 들였는데 어떻게 하느님께서 나에게 이러 실수가 있느냐“ 원망하며 하느님을 믿는다는 사실 자체에 회의를 느낄 때도 있습니다.
이러한 두가지 우리의 모습을 바라보면서 과연 우리가 하느님께 드려야할 믿음의 모습은 어떤 모습인지를 깊이 묵상해 보아야 하겠습니다. 적어도 우리의 신앙의 모습은 가난한 과부처럼 하느님께 인정받는 모습이 되어야 하지 않겠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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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올리베따노 성 베네딕도수도회 양주분회 이영근 아오스딩 신부님]
오늘 <복음>의 “앞부분”에서는 예수님께서 율법학자들의 위선을 엄하게 질타하십니다. 남에게 인사받기를 좋아하고, 높은 자리에 찾으며, 약한 자들의 재산을 등쳐먹으면서도 기도는 오래 바치는 위선의 삶을 질책하십니다.
<복음>의 “뒷부분”에서는 예수님께서 렙톤 두 개를 봉헌한 가난한 과부의 헌금을 높이 칭송하십니다. 부자들은 나름대로 여분의 것에서 일부를 바쳤지만, 이 과부는 자신의 모든 것을 바쳤기에 가장 큰 봉헌을 한 것이라고 칭송하십니다. 과부의 헌금은 자신의 전부를 내어주는 “내면적 헌신의 외적인 표시”였습니다.
이는 헌금의 의미가 액수에 있는 것이 아니라 마음에 달려있다는 말씀입니다. 우리의 봉헌과 나눔도 바로 이러한 것이 되어야 할 일입니다. 마지막 음식마저 내어주었던 사렙다의 과부처럼, 자신이 가진 동전 전부를 내어놓았던 이 가난한 과부처럼, 아니 십자가에서 자신의 몸을 우리에게 내어주신 예수님처럼, 우리 역시 그렇게 다른 이들과 하느님을 위해 믿음과 사랑으로 마음으로 헌신하여야 할 일입니다.
이는 교회를 위하여 헌금을 많이 해야 한다는 돈 모금방법을 제시하는 것이 결코 아닙니다. 예수님께서는 단지 봉헌의 참뜻을 일깨워 주시고자 하십니다. 예수님께서는 복음 곳곳에서 약한 자와 억울한 자와 가난한 자에 대한 우선적인 사랑과 관심을 강조하십니다. “참된 봉헌”은 타인을 위해 자신을 내어놓는 것임을 말씀하십니다. 그리고 당신께서는 마침내는 우리를 위해 당신 자신을 참된 봉헌 제물로 내어주셨습니다. 사실, 이 과부는 가난하고 어려운 처지인데도, 그의 전부를 바쳤습니다. 대체, 무엇이 그로 하여금 그의 전부를 바치게 하였을까?
우리는 자신의 전부를 내어주고 싶은 이를 만났는가? 전부를 건네주지 않고는 못 배기게 만드는 그분을 만났는가? 전부를 내어주고도 가지지 못한 것마저 만들어서라도 주고 싶은, 그런 이를 만났는가? 그렇게 소중하고, 그렇게 귀한 이를 만났는가? 진정, 우리가 그분을 만났다면, 어떻게 하면 그분의 마음을 얻을 수 있을까?
그런데 예수님의 마음은 너무도 비싸서 그 어떤 많은 돈으로도 결코 얻을 수가 없지만, 또한 너무도 싸서 ‘단 돈 두 닢’으로도 얻을 수가 있는 마음입니다. 그러니 우선적으로 필요한 것은 순수한 마음의 지향입니다.
그렇습니다. 사람의 마음 안에는 ‘지향’이라는 보화가 있습니다. 마음을 살피시는 분께서는 그 ‘지향’을 보십니다. 마음 속 ‘지향’이 순수하면 예수님 마음을 얻게 된다는 사실을 말해줍니다. 곧 아무리 거대하고 큰 일리라도 마음 없이 한다면 결코 예수님 마음을 얻을 수 없지만, 비록 작고 보잘 것 없는 일이지라도 사랑으로 한다면 예수님 마음을 얻게 된다는 것을 말해줍니다.
그러니 중요한 것은 일을 잘하느냐 못하느냐, 혹은 크고 거창한 일을 하느냐 작고 미천한 일을 하느냐에 달려 있는 것도 아니라, 오히려 ‘마음의 지향’에 얼마나 순수하느냐에 달려 있습니다. 곧 무엇을 하든지 사랑으로 하는 것입니다. 이는 요한 카시아누스가 수도승의 목표로 제시한 “마음의 순결”(puritas cordis)이기도 합니다. 그러니 지금 내가 하고 있는 일을 순수한 마음의 지향으로 하고 있는지를 보아야 할 일입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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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말씀에서 샘 솟은 기도 -
“과부는 궁핍한 가운데에서 가진 것을 다 넣었기 때문이다.”(마르 12,44)
주님!
제 마음의 지향을 깨끗하게 하소서.
아무리 작은 것이라도 사랑의 마음으로 하게 하소서.
전부를 내어놓은 가난한 과부처럼, 목숨을 내어놓은 당신처럼,
산 제물이 되게 하소서.
당신이 저의 전부이오니, 전부를 내어주게 하소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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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산교구 이병우 루카 신부님]
"율법 학자들을 조심하여라."(마르12,38)
<위선에 대한 지적!>
예수님께서 율법 학자들의 위선을 지적하십니다.
"그들은 긴 겉옷을 입고 나다니며 장터에서 인사받기를 즐기고, 회당에서는 높은 자리를 잔치 때에는 윗자리를 즐긴다. 그들은 과부의 가산을 등쳐 먹으면서 남에게 보이려고 기도는 길게 한다. 이런 자들은 더 엄중히 단죄를 받을 것이다."(마르 12,38-40)
예수님께서는 이어서 헌금함에 '렙톤 두 닢'(약1,400원)을 넣은 가난한 과부를 언급하시면서, 제자들에게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저 가난한 과부가 헌금함에 돈을 넣은 다른 모든 사람보다 더 많이 넣었다. 저들은 모두 풍족한 데에서 얼마씩 넣었지만, 저 과부는 궁핍한 가운데에서 가진 것을, 곧 생활비를 모두 다 넣었기 때문이다."(마르 12,43-44)
복음 안에서 드러난 '예수님의 가장 큰 분노'는 '위선'입니다. 율법 학자들과 바리사이들의 위선이요, 우리의 위선입니다.
'위선이란?'
이는 예수님께서 말씀하시고 사셨던 모습과 다르게 살아가는 모습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끊임없이 겸손 안에서 낮아지셨는데, 교만을 드러내면서 높은 사람으로 대우받기를 원하는 모습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우리를 위해 당신의 전부를 봉헌하시고 죽으셨는데도, 온 마음과 정성을 담아 봉헌하지도 않고, 너를 위해 죽으려고도 하지 않는 모습이,
바로 '위선'입니다.
토빗과 사라에게 파견되어 그들을 고쳐준 라파엘이, 토빗과 그의 아들 토비야를 은밀히 불러, 자신이 '하느님의 일곱 천사 가운데 하나'라는 것을 밝힙니다. 그리고 그들에게 이렇게 말합니다.
"자선은 사람을 죽음에서 구해 주고 모든 죄를 깨끗이 없애 준다. 자선을 베푸는 이는 충만한 삶을 누린다."(토빗 12,9)
교만과 위선을 드러낸 나의 부족함을 하느님의 자비에 내어 맡기고, 다시금 겸손 안에서 '진실되게 믿고', '진실되게 사랑을 실천하는' 하느님의 자녀들이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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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정부교구 상지종 베르나르도 신부님]
<왜>
마르코 12,38-44 (율법 학자들을 조심하여라, 가난한 과부의 헌금)
그때에 예수님께서는 군중을 가르치시면서 이렇게 이르셨다. “율법 학자들을 조심하여라. 그들은 긴 겉옷을 입고 나다니며 장터에서 인사받기를 즐기고, 회당에서는 높은 자리를, 잔치 때에는 윗자리를 즐긴다. 그들은 과부들의 가산을 등쳐 먹으면서 남에게 보이려고 기도는 길게 한다. 이러한 자들은 더 엄중히 단죄를 받을 것이다.”
예수님께서 헌금함 맞은쪽에 앉으시어, 사람들이 헌금함에 돈을 넣는 모습을 보고 계셨다. 많은 부자들이 큰돈을 넣었다. 그런데 가난한 과부 한 사람이 와서 렙톤 두 닢을 넣었다. 그것은 콰드란스 한 닢인 셈이다. 예수님께서 제자들을 가까이 불러 이르셨다.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저 가난한 과부가 헌금함에 돈을 넣은 다른 모든 사람보다 더 많이 넣었다. 저들은 모두 풍족한 데에서 얼마씩 넣었지만, 저 과부는 궁핍한 가운데에서 가진 것을, 곧 생활비를 모두 다 넣었기 때문이다.”
<왜>
나를 보는 이에게
어떻게 보일지
헛되이 헤아리면서
나를 보시는 하느님께
어떻게 보일지
속 깊이 헤아리지 않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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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천교구 조명연 마태오 신부님]
=빠다킹 신부와 새벽을 열며=
지금은 종영되었지만, 장수 프로그램이었던 ‘무한도전’의 김태호 피디의 MBC 채용 면접 일화를 어느 책에서 읽을 수 있었습니다. 그는 면접 볼 때 떨리지 않았느냐는 질문에 이렇게 대답했습니다.
“면접 볼 때 앞에 방송국 국장님, 이사님, 사장님이 앉아 있지만 사실 제가 입사해야 국장님, 이사님, 사장님이지 떨어지면 제겐 그냥 동네 아저씨보다 못한 분이거든요. ‘그런데 내가 왜 굳이 여기서 떨고 있어야 하지?’라고 생각했어요. 또 ‘넌 복덕방에 와 있다. 이 아저씨들은 바둑 두던 아저씨들이다.’라는 생각을 했죠.”
우리는 이런 마음가짐을 잘 갖지 못하지요. 상대방의 지위와 부에 신경을 쓰고 주눅이 들면서 할 수 있는 것도 하지 못하는 경우가 얼마나 많은지 모릅니다. 생각해 보면 우리는 모두 하느님 안에서 한 가족일 뿐입니다.
하느님 앞에서 누구의 모습이 더 대단하다고 할 수 없습니다. 모두가 전지전능하신 그분 앞에서는 부족한 존재일 뿐입니다. 하지만 우리는 왜 이렇게 지위의 높고 낮음을 따지고, 재산의 많고 적음을 따지는지 모릅니다. 이 세상의 기준 아래에서 사람을 평가하는 우리가 아니었을까요?
오늘 복음을 보면 예수님께서 헌금함 맞은쪽에 앉으시어, 사람들이 헌금함에 돈을 넣는 모습을 보고 계셨습니다. 많은 부자가 큰돈을 넣는 것을 보셨고, 또한 몹시 가난한 과부 한 사람이 와서 아주 적은 돈인 렙톤 두 닢을 넣은 장면도 보셨습니다. 그리고는 이렇게 말씀하시지요.
“저 가난한 과부가 헌금함에 돈을 넣은 다른 모든 사람보다 더 많이 넣었다. 저들은 모두 풍족한 데에서 얼마씩 넣었지만, 저 과부는 궁핍한 가운데에서 가진 것을, 곧 생활비를 모두 다 넣었기 때문이다.” 이 가난한 과부는 주님의 뜻에 맞게 행동하는 데 최선을 다했기 때문에 궁핍한 가운데에서도 가진 것을 모두 주님께 봉헌할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부자들은 이것저것 신경 쓸 것들이 많지요. 가난한 과부보다 훨씬 큰돈을 헌금하지만, 주님의 뜻에 맞추기보다는 보여주기 위한 헌금의 성격이 더 크지요.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이러한 부자의 모습을 닮기보다는 주님께 자신의 모든 것을 봉헌하는 마음을 가진 가난한 과부를 본받으라고 하십니다. 이 여자야말로 주님의 뜻에 맞게 최선을 다했고, 그 결과 하느님 나라에 들어갈 자격이 주어졌기 때문입니다. 주님의 뜻에 충실한 우리가 되어야 합니다. 세상의 기준이 아닌 주님의 기준 아래에서 충실할 수 있어야 합니다. 그래야 가장 좋은 선물을 주님으로부터 받을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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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 하려는 일이 내일 아침 기사 1면에 나온다면?>
우리의 삶 안에서 어떤 일을 해야 할지, 하지 말아야 할지가 헷갈릴 때가 있습니다. 이렇게 하자니 잘못된 선택을 하는 것 같고, 하지 말자니 남들도 다 하는 것을 하지 않아 ‘바보’ 소리 들을 것만 같습니다. 이런 경우에 어떤 선택이 바른 선택일까요? 어느 책에서 이런 경우, 이렇게 생각하라고 하더군요.
“지금 하려는 일이 내일 아침 기사 1면에 나온다면 부끄러운가 부끄럽지 않은가? 부끄럽다면 하지 마십시오. 이를 통해 잘 모르겠다면, 내 자녀가 지금 하려는 일을 안다면 어떨까요? 부끄러울까요? 부끄럽지 않을까요?” 어떻습니까? 자신의 행동에 관한 결정을 내리는 데 도움이 될 수 있지 않을까요?
신문에 나올 때, 좋은 모습으로 나와야 합니다. 부끄럽지 않은 모습이 나와야 합니다. 바로 주님의 뜻을 기억하고 또 그 뜻에 맞춰서 살아갈 때만 가능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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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주교구 반영억 라파엘 신부님]
<부분은 전부보다 클 수 없다>
초등학교 2학년 학생들에게 숙제로 ‘우리 집 자랑거리’를 써오라고 하였답니다. 그런데 그 자랑거리를 보니 “아파트가 넓다, 차가 좋다. 대형스크린 텔레비전이 있다.”등 물질적인 것들을 적어오는 학생들이 많았다고 합니다. 정말 물질이 정신을 지배하는 세상이 되었나 봅니다.
오늘 복음을 보면 사람들이 헌금함에 돈을 넣는 모습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부자들은 큰돈을 넣었습니다. 그런데 가난한 과부 한 사람이 와서 렙톤 두 닢을 넣었습니다. 렙톤은 당시 통용되는 화폐단위의 최소단위 입니다. 그렇다면 금전적 가치를 따질 수 없는 하찮은 금액입니다. 우리식으로 하면 십 원짜리 동전 두 개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으로부터 칭찬을 받은 사람은 부자가 아니라 가난한 과부였습니다. 그 이유를 “저 가난한 과부가 헌금함에 돈을 넣은 다른 모든 사람보다 더 많이 넣었다. 저들은 모두 풍족한 데에서 얼마씩 넣었지만, 저 과부는 궁핍한 가운데에서 가진 것을, 곧 생활비를 모두 넣었기 때문이다.”(마르12,43-44) 하고 말씀하십니다. 부자는 가진 것의 일부를 내었고 가난한 과부는 있는 것 전부를 내었습니다. 일부는 액수가 얼마든 전부보다는 많을 수 없습니다. 전부는 액수가 적어도 부분보다 많습니다. 그리고 마음과 사랑을 봉헌한 것과 생색내기로 봉헌한 것은 분명 차원이 다릅니다. 사실 예수님께서는 ‘부유하시면서도 우리를 위하여 가난하게 되시어, 우리가 그 가난으로 부유하게 되도록 하셨습니다.’(2코린8,9)
세상은 돈을 좋아합니다. 많은 돈을 가지면 무엇이든 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돈을 좇아 동분서주합니다. 그러나 돈으로도 살 수 없는 것이 진정한 사랑의 마음입니다. 초등학생들이 벌써 물질을 자랑거리로 삼는다는 것이 안타까운 일이지만 그렇게 만든 것이 바로 우리 기성세대입니다. 우리가 어렵고 힘든 가운데에서도 기쁜 마음으로 그리고 민첩하게 자선을 베푸는 삶을 살았더라면 그것을 배웠을 것입니다.
사실 과부의 헌금이 소중한 것은 가진 모든 것을 남김없이 바쳤기 때문입니다. 남김없이 바칠 수 있는 마음을 언제나 간직할 수 있을지…… 무엇을 봉헌하든 사랑의 마음으로 할 수 있기를 희망합니다. 생계야 어찌 되든 재산을 다 팔아 성당에 바치라는 의미가 아니라 하느님을 신뢰하고 그분께 모든 것을 아낌없이 바칠 준비가 되어있어야 한다는 의미입니다. 재물이든 시간이든 근심 걱정, 내면의 상처까지도 온전히 주님께 맡길 수 있는 믿음이 필요합니다.
본당신부를 하면서 많은 선물을 받고 살았지만 기억되는 선물이 있습니다. 한 어르신으로부터 받은 네 잎 클로버입니다. 들에서 발견했는데 신부님께 복을 빌어주려고 가져오셨답니다. "가정형편이 어려워 물질적인 선물은 할 수 없지만 이것이라도 받아주십시오. 제 마음입니다." 하셨습니다. 저는 아가다 할머니의 모든 것을 받았습니다. 사랑이 담긴 네 잎 클로버는 다른 무엇보다도 오래 기억될 것입니다. '미룰 수 없는 사랑에 눈뜨기를 희망하며' 사랑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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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 베네딕토회 요셉수도원 이수철 프란치스코 신부님]
<참 행복한 삶>
-찬미와 봉헌, 자선의 삶-
“주여, 새벽부터 일어나서, 도우심을 빌며,
당신의 말씀에 희망을 거나이다.
당신의 말씀을 묵상하고 싶어서,
이 내 눈은 밤새도록 떠있나이다.”(시편119,147-148)
이런 마음으로 미사를 봉헌하는 우리들입니다. 어제도 참 좋은 날씨에 눈부시도록 찬란하고 아름다운 수도원 자연경관이었습니다. 하느님은 이렇듯 우리에게 행복하게 살 수 있는 조건을 마련해 주십니다. 행복하게 살아야 합니다. 행복하게 사는 것은 우리의 권리요 의무입니다. 언젠가의 행복이 아니라 오늘 지금 여기서 행복하게 살아야 합니다.
하느님께서 당신 앞에 갔을 때 물음은 단 하나 ‘너는 행복하게 살았느냐?’일 것입니다. 하느님께서 성경을 통해 주시는 가르침 또한 행복하게 사는 방법들입니다. 어제 써놓은 글이 생각납니다.
-“날마다
자연의
당신의 향기에, 아름다움에
취하여, 반하여 산다
볼수록
참 좋고, 새롭고, 향기롭고, 아름다운 당신은
내 삶의 기쁨이요 행복이다.”-
마침 어제 제 강론을 읽은 분으로 부터의 메시지도 반가웠습니다. ‘오늘 강론을 읽으면서 무릎을 탁! 쳤습니다. 살아오면서 오늘이 가장 행복한 날이다!’ 하느님께서는 우리를 매일 새로 나게 하시며 새로운 은총을 내려주시는 것을 느끼며 감사드렸습니다.
“행복은 어디에?”
화두같은 물음입니다. 흡사 “길은 어디에?” 묻는 듯 합니다. 행복은, 길은 바로 오늘 지금 여기 있습니다. 밖으로 찾아 나갈 필요없습니다. 오늘 지금 여기서 행복을, 길을 찾지 못하면 밖 어디서도 찾지 못합니다. 바로 오늘 지금 여기에 하느님이 계십니다. 임마누엘, 우리와 함께 계신 하느님이신 파스카의 예수님께서 계십니다. 요즘 6월 예수성심성월을 시작하면서 매일 화답송 후렴 시편성구가 한결같이 우리의 행복은 오늘 지금 여기 하느님께 있음을 보여 줍니다.
“의로운 마음 굳게 주님을 신뢰하네.”
“주님, 당신께 제 영혼 들어 올리나이다.”
“행복하여라, 주님을 경외하는 사람!”
“내 영혼아, 주님을 찬양하라.”
“영원히 살아계신 하느님은 찬미받으소서.”
바로 성서의 무수한 주인공들이, 교회의 무수한 성인들이, 또 하느님으로 말미암아 행복하게 살아가는 무수한 형제자매들이 하느님이 우리의 참 행복임을 증거합니다. 시편 저자의 “주님께 아뢰옵니다. ‘당신은 저의 주님, 저의 행복 당신밖에 없습니다’”(시편16,2) 고백도 기억하실 것입니다.
시공을 초월하여 우리를 감동하게 하는 성인들의 하느님 사랑입니다. 오늘 기념하는 성 보니파시오 주교 순교자도 예외가 아닙니다. 1300년전 성인인데도 흡사 가까이 살아계신 분처럼 느껴집니다. 파란만장한 삶중에도 그 옛날에 79세 장수늘 누리시다가 순교하셨으니 인명은 재천임을 깨닫습니다.
영국의 베네딕도 수도회 출신인 보니파시오 성인은 독일에 선교사로 파견되어 독일 지역 사람들의 개종에 헌신하고 신설된 독일 교회가 로마 교회와 밀접하게 일치되도록 조직하고 성직자의 개혁과 선교활동을 위한 수도회 설립에 헌신하던중 이교도들의 급습을 받아 동료 52명과 함께 754년 6월 5일 순교합니다. 성인은 ‘게르만족의 사도’, ‘독일의 사도’로 불리며 널리 공경을 받고 있습니다. 성인께서 순교하기까지 온갖 고난중에도 지칠줄 모르는 한결같은 선교열정은 그대로 성인의 하느님 사랑을 보여줍니다. 바로 이런 하느님 사랑이 온갖 시련과 고통중에도 행복의 원천이 되었음을 봅니다. 평생 휴식이 없었고 평생 고통이 함께 했어도 주님만으로 행복했던, 주님 안에서 기쁨과 평화를 누렸던 성인들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주님은 거짓 신앙인의 표본인 율법학자들과 참 신앙인의 귀감인 가난한 과부의 예를 들면서 제자들은 물론 우리 모두에게 참 행복한 삶의 길을 가르쳐 주십니다. 바로 참 행복은 탐욕과 허영, 교만의 피상적인 율법학자들의 삶에 있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모두를 봉헌한 가난한 과부의 삶에 있음을 보여줍니다. 예수님은 가난한 과부의 온전한 봉헌에서 온 삶을 봉헌한 자신의 모습을 보셨음이 분명합니다.
주님을 위한 사랑에 날로 비워가는 봉헌의 삶에 참 행복이 있음을 보여줍니다. 외적으로는 가난해도 내적으로는 주님으로 충만한 참 행복한 부자이자 자유인인 과부요 예수님임을 깨닫습니다. 많이 소유해서 부와 행복과 자유가 아니라 필요로 하는 것이 적을수록, 마침내 주님 한 분만으로 행복할 때 참 부자요 자유인이요 행복한 사람이라는 것입니다.
오늘 제1독서 토빗기에서 주님은 라파엘 천사를 통해 참 행복한 삶의 비결을 알려 주십니다. 라파엘 천사가 토빗과 토비야 부자뿐 아니라 시공을 초월하여 오늘 우리 모두에게 주시는 참 행복한 삶의 비결입니다. 들어 보십시오.
“하느님께서 너희에게 잘 해 주셨으니, 살아 있는 모든 이 앞에서 그분을 찬미하고 찬양하여라. 그리고 그분의 이름을 찬미하고 찬송하여라. 그분을 찬양하기를 게을리 하지 마라. 선을 행하여라. 그러면 악이 너희에게 닥치지 않을 것이다. 진실한 기도와 의로운 자선은 부정한 재물보다 낫다. 자선은 사람을 죽음에서 구해 주고 모든 죄를 깨끗이 없애 준다. 자선을 베푸는 이들은 충만한 삶을 누린다.”
찬미와 자선으로 요약되는 참 행복한 삶입니다. 하느님께 찬미는 하느님 사랑을, 이웃에게 자선은 이웃 사랑을 반영합니다. 바로 경천애인이 참 행복의 비결임을 보여줍니다. 봉헌 삶의 진위眞僞도 경천애인의 삶을 통해 드러납니다. 거듭 주님 찬미와 찬양을 강조하며 떠나는 라파엘 대천사입니다.
“나는 일곱 천사들 가운데 하나인 라파엘이다. 이제 이 세상에서 주님을 찬미하고 하느님을 찬양하여라. 나는 나를 파견하신 분께 올라간다. 너희에게 일어난 모든 일을 기록해 두어라.”
라파엘이 파견하신 분께 올라가듯 우리 또한 한 생애를 마치면 파견하신 우리의 본향이신 하느님께 돌아갈 것입니다. 하루하루 주님께서 우리에게 하신 일들을 기록해 둬야 함을 배웁니다.
참 행복한 삶을 살고 싶습니까? 찬미와 봉헌, 자선의 삶입니다. 사랑의 찬미, 사랑의 봉헌, 사랑의 자선입니다. 결국 사랑이 답입니다. 사랑밖엔 길이 없습니다. 경천애인의 사랑입니다. 주님은 이 거룩한 미사은총으로 우리 모두 찬미와 봉헌, 자선의 사랑에 충실함으로 참 행복한 삶을 살게 하십니다.
“행복하여라, 마음이 가난한 사람들! 하늘 나라가 그들의 것이다.”
봉헌과 자선의 사랑으로 자기를 비워 갈 때 하늘 나라의 실현이요, 가난한 텅 빈 마음에서 샘솟는 찬미와 행복임을 깨닫습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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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은형제회(프란치스코회) 오상선 바오로 신부님]
♡알타반의 말씀 사랑♡
오늘 미사의 말씀은 우리에게 하느님을 닮아가는 방법을 일러 주십니다.
"남에게 보이려고"(마르 12,40)
예수님이 율법 학자들을 비난하시는 이유는 그들의 봉헌과 자선, 기도가 하느님이 아닌 남에게 보이려는 과시이기 때문입니다. 하느님의 눈이 아닌 사람의 눈에 영광이 되고자 하는 선행은 비록 타인에게 유익을 주더라도 하느님께는 기만이 될 따름이지요. 자기 영광을 위해 하느님을 이용하는 것이니까요.
"다른 모든 사람보다 더 많이 넣었다."(마르 12,43)
예수님께서 어느 가난한 과부가 헌금하는 모습을 보시고 제자들에게 말씀하십니다. 그때는 헌금함에 돈이 떨어지는 소리로 주위에서 그 가치를 어림짐작할 수 있었다고 하네요. 가난한 이들이 제 깜냥을 다해 무언가라도 소박하게 봉헌하려면 부끄러움을 무릅쓰고 주변의 업신여김까지 감당해야 했다는 뜻입니다.
그런 시선에도 불구하고 용기를 내어 헌금함에 다가가는 가난한 이들은 어쩌면 사람의 눈이 아닌 하느님의 눈에 자신을 내던진 이들이 될 것입니다. 그러니 하느님 눈에 그들이 귀하고 사랑스럽지 않을 수 없었겠지요. 그녀의 봉헌을 "많이"라고 보신 예수님의 수량 계산법은 우리 인간의 도량형 척도와 상당히 다른 게 분명합니다.
사실 봉헌의 끝판왕은 주님이십니다. 아버지께서 당신과 같은 하느님이신 아드님을 세상에 주셨고(봉헌하셨고), 예수님은 우리 구원을 위해 당신 목숨을 바치셨으니까요. 그래서 사심없이 주는 행위는 하느님의 자기 증여와 닮았습니다. 잘 비우고 나누고 주는 이는 하느님을 많이 닮은 사람이지요.
제1독서에서는 라파엘 천사가 토빗과 토비야 부자에게 자신의 신분을 밝히고 권고하는 대목입니다.
"진실한 기도와 의로운 자선은 부정한 재물보다 낫다. ... 자선을 베푸는 이들은 충만한 삶을 누린다."(토빗 12,7.9)
토빗은 하느님 앞에 충실한 의인이었습니다. 그의 자선과 선행은 자기에게 있어도 그만 없어도 그만인 무엇을 선심쓰듯 내놓는 차원을 넘어 자기 목숨까지 건, 위험을 무릅쓴 헌신이었지요. 이것이 하느님께서 즐겨받으시는 봉헌입니다. 오늘 "생활비를 모두 다"(마르 12,44) 바친 복음 속 가난한 과부의 봉헌과 이어지지요.
"충만한 삶"
여기서 우리는 하느님께서 당신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는 이에게 허락하고 베푸시는 "충만함"이 물질적 풍요나 세속적 성공과 무관함을 알 수 있습니다. 어쩌면 존재적 충만함, 영적 충만함은 물리적 수량의 많고 적음과 상관 없이, 사랑의 크기에 비례하는 게 아닐까 싶습니다. 사랑 때문에 비운 만큼, 나눈 만큼이 충만함으로 채워지는 것이지요.
"이제 이 세상에서 주님을 찬미하고 하느님을 찬양하여라."(토빗 12,20)
이것이 이 세상에 남아 순례의 남은 여정을 채워가야 하는 우리의 지상 과제입니다. 많건 적건 주님을 사랑하기에 그분께 바치는 모든 것, 이웃을 사랑하고 연민하기에 그들과 나누는 모든 것이 주님께는 진실된 찬미가 됩니다. 그리고 사랑으로 행한 모든 것은 굳이 "남에게 보이려고" 하지 않아도 주님께 아름답고 영롱한 찬양으로 올려지지요.
"행복하여라, 마음이 가난한 사람들! 하늘 나라가 그들의 것이다."(복음 환호송)
주님께서 우리를 위해 마련하신 이 행복은 우리가 부자이건 가난한 이건, 누리는 것이 많건 적건, 지위가 높건 낮건, 어느 신분이건 상관없습니다. 당신의 목숨까지 내어주신 분께 자신을 온전히 내어드리는 기도와 헌신, 그리고 그분이 특별히 사랑하시는 가난한 이웃에게 손을 내미는 자선과 선행이 우리를 더욱 행복하게 합니다. 행복은 우리가 주님과 닮아갈수록 더 충만해집니다.
사랑하는 벗님! 내어줌의 끝판왕이신 주님의 거룩한 살과 피를 기리는 성체성혈 대축일을 준비하며, 주님 닮은 성체의 삶을 더 깊이 묵상하는 오늘 되시길 기원합니다. 어렵고 팍팍한 삶 한가운데서 나날이 주님을 닮아가는 여러분 모두를 축복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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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성심시녀회 김연희 마리아 수녀님]
(5분 아침묵상)
https://www.youtube.com/watch?v=mduFGNMnmY4&feature=youtu.b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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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극히 거룩한 구속주회 한상우 바오로 신부님]
"저 가난한 과부가 다른 모든 사람보다 더 많이 넣었다."(마르 12, 43)
지금 여기에서
맛 보는 일치의
삶이다.
예수님의
삶이
복음이다.
복음은
서로를 위한
섬김과
봉헌으로
더욱 빛을
발한다.
복음은
봉헌의
삶이다.
봉헌은
생활의
새로운
창조이다.
하느님의
현존 안에서
사람을
섬기시는
예수님의
마음이다.
복음은 먼저
가난하고
소외된 이를
사랑으로
끌어안으신다.
마음에서
우러나오는
봉헌이 참된
봉헌이다.
봉헌은
자아에
갇혀 있지
않다.
자아에
갇혀 있지
않기에 일치를
이룰 수 있다.
하느님을
섬긴다는 것은
자신의 생활
전부를
봉헌한다는
것이다.
삶의 생명력은
참된 봉헌에
있다.
우리 삶의
안전장치는
물질이 아닌
하느님의
사랑에 있다.
사랑을
회복하는
봉헌이다.
봉헌은
주님 말씀에
귀 기울이며
말씀을 실천하는
일상의 삶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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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ince 2013. 10. 24
연희동성당 류상현 스테파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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