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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구보다 현실을 직시하며 시를 썼던 쉼보르스카는 노벨상 수상 연설에서, 가장 중요한 시인의 영감이 “나는 모르겠어”라고 말했다.
잘 알고 있는 것들 바깥으로 시선을 돌려서 잘 알지 못하는 세계에 눈길을 주지 않는 지식은 생명력이 없다고 말했다. 과학자 뉴턴과 퀴리도 “나는 모르겠어”는 인식을 출발로 하여 오랜 헤맴 끝에 인류에 기여할 수 있었다고 말한다. 시인의 삶도 그와 같은 궤도를 그린다고 말한다. “그 어느 것 하나도 평범하거나 일상적이지 않다”며 끝낸 이 수상 연설에서, 나는 쉼보르스카가 끝까지 들추어보며 갸웃했던 세계는 ‘당연한 세계’라고 생각한다. 아니, ‘당연한 것처럼 보이는 세계’라고 생각한다.
당연하다고 말하는 사람의 확고함과, 당연할 리 없다고 한 번 더 생각해보는 사람의 흔들림에 대해 생각해본다. 자신이 이미 이해한 세계에 대해 이야기하는 작가의 자신감과 자신이 아직 이해하지 못한 세계를 이야기해보려는 작가의 불안감에 상상해본다. 시가 아직 우리에게 소중한 힘을 주고 있다면, 이 역할을 대신해주고 있는 탓이 클 것이다. 흔들림과 불안감이라는 진자 운동은 일차적으로 생명을 지닌 존재들의 가장 큰 특징이며 인간을 한계 짓는 테두리를 한없이 건드리다 기어이 구멍을 내는 힘이 된다.
쉼보르스카는 ‘우리’라는 주어를 그 어떤 시인보다 즐겨 사용했다. 두 사람을 지칭하는 것에서부터 인류 전체를 지칭하는 데에 이르기까지 ‘우리’라는 말을 거듭 사용하며 우리를 우리답게 묶어주었다. 개별성을 묵살하려는 흔적이 발견되지 않는 우리. 누군가를 배제하고야만 흔적이 발견되지 않는 우리. 이 온전한 ‘우리’는 시인의 “나는 모르겠어”라는 말로부터 비롯되지 않았을까.
시인이 모르겠다며 고개를 가로저을 때, 그래서 주변의 공기를 흩뜨려놓을 때, 잘 알던 세계의 안온함에 균열이 갈 때, 그 틈새로 낯선 우리가 차곡차곡 도착해 왔으리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