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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은이
함재봉(咸在鳳)
저자 함재봉은 아산정책연구원의 이사장 겸 원장이다.
미국 칼튼대학교(Carleton College)에서 경제학 학사학위(1980), 존스홉킨스대학교(Johns Hopkins University)에서 정치학 석사 및 박사학위(1992)를 취득한 후, 연세대학교 정치외교학과 교수(1992-2005), 프랑스 파리 유네스코 본부(UNESCO) 사회과학국장(2003-2005), 미국 서던캘리포니아대학교(University of Southern California) 한국학연구소 소장 겸 국제관계학부 및 정치학과 교수(2005-2007), 랜드연구소(RAND Corporation) 선임 정치학자(2007-2010) 등을 역임했다.
책에 대하여
1983년 버마 아웅산 묘소 테러로 순직한 함병춘 전 대통령비서실장의 아들
함재봉 박사
‘한국 사람은 누구인가?’
유태인(Jew)들은 어디에 살든 유태인이다.
중국 본토 바깥에 사는 모든 중국 사람들 또한 어디에 살든 모두 ‘화교’라고 불린다.
그러나 한국에 사는 사람들을 ‘조선 사람’이라 하지 않고,
북한에 사람들은 ‘한국 사람’이라 하지 않는다.
‘코리안’이라는 불리는 우리에겐 비단 공통의 단어만 없는 것이 아니다.
한국 사람과 조선 사람(북한 사람),
재미 교포와 재일 교포, 조선족과 고려인 사이의 공통점도 사실 찾아보기 힘들다.
이들을 하나로 묶어주는 것이 있는가?
언어인가?
이념인가?
종교인가?
과연 ‘한국 사람’의 정체성을 구성하는 것은 무엇인가?
저자 함재봉은 이 책에서 “‘한국 사람’이란 무엇이다”라고 규정하지 않는다.
그는 ‘한국다움’이 무엇인지, 무엇이 ‘한국 문화’인지,
누가 ‘한국 사람’인지에 대한 궁금증을 다음 다섯 가지 담론의 틀로 풀어나간다.
‘조선 사람’이 해체되고 ‘한국 사람’이 탄생하는 과정에서
결정적인 역할을 해 온 정치적, 지정학적, 이념적 요소들을 압축적으로 망라하는
이 다섯 가지 담론의 틀은,
‘친중위정척사파’,
‘친일개화파’,
‘친미기독교파’,
‘친소공산주의파’,
‘인종적 민족주의파’로 정리된다.
저자는 해당 담론들을 입체적으로 묘사하며,
‘한국 사람’이라는 의미의 망을 분석한다.
이를 통해 ‘한국 사람’의 기저를 형성하고 있는
다섯 가지 인간형의 정치적, 국제 정치적, 사상적 배경을 추적한다.
총 5권의 시리즈로 진행될 『한국 사람 만들기』
제 1권의 1부 <조선 사람 만들기>에서는
한국 사람이 대체하고 있는 조선 사람의 형성 과정과 정체성을 추적한다.
2부 <친중위정척사파>에서는 17세기, 조선 초기의 급진 개혁을 통해 탄생한 조선 사람의 정체성이 흔들리는 과정을 소개하며, 그 시대적·사상적·정치적 계보를 추적한다.
책 속으로
‘한국 사람’이란 용어가 보편화되기 시작한 것은 1949년부터다.
‘대한민국’이라는 신생국이 설립되면서 새 나라의 사람들을 호칭하기 위해서였다.
『조선일보』에는 ‘한국 사람’이란 표현이 1962년 9월 22일 기사에 처음 나타난다.
‘한국 사람’은 20세기 후반에 만들어지기 시작한 새로운 인간형이다. (p. 8~9)
19세기 말까지도 ‘조선 반도’로 불리던 땅에 살던 사람들은 ‘조선 사람’들이었다.
‘조선 사람’은 14세기 말~15세기 초부터 만들어지기 시작했다.
조선(朝鮮, 1392~1910)의 건국 세력은
불교 국가였던 고려를 멸망시키고
고려인들에게는 생소하고 이질적이기만 한 주자성리학이란 이념을 도입하여
새 문명을 건설한다. 조선 왕조가 강력하게 추진한 개혁의 결과,
16세기 말에 이르면 ‘사서삼경’(四書三經)을 배움의 근간으로 삼아
‘삼강오륜’(三綱五倫)의 윤리관을 내재화하고,
‘종묘사직’(宗廟社稷)이라는 공동체의 일원으로 자신을 규정하는 ‘조선 사람’이 완성된다. (p. 9)
조선 사람의 정체성이 무너지기 시작하고
이를 대체할 새로운 정체성을 찾아 나선 조선 사람들은 다섯 가지 대안을 찾는다
. 첫째, ‘친중위정척사파’,
둘째, ‘친일개화파’,
셋째, ’친미기독교파’,
넷째, ‘친소공산주의파’,
다섯째, ‘인종적 민족주의파’다. (p. 11)
우리는 조선 사람이 한국 사람의 ‘원형’이라고 흔히 생각한다.
그러나 조선 사람 역시 조선조의 개혁 세력에 의해서 만들어진 인간형이다.
고려 사람은 조선 사람과는 전혀 달랐다.
고려 사람들은 결혼을 하면 남자가 여자의 집으로 가서 사는 풍습을 갖고 있었다.
따라서 대부분의 고려 남자들은 처가살이를 하였다.
또 대부분의 고려 사람들은 외가에서 나서 자랐다.
이러한 풍습은 조선 중기까지도 널리 성행하였다. (p. 40)
조선 말의 위정척사 사상은
흔히 화서 이항로와 면암 최익현의 학문에서 비롯된 것으로 알려져 있다.
그러나 위정척사파의 기원은 병자호란(1636~1637)을 겪으면서 형성된
후기 조선의 친명반청(親明反淸) 이념과
소중화(小中華) 의식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p. 132)
그토록 의지했던 명이 사라지고 ‘오랑캐’가 대륙을 차지한 천붕지해의 시대 에 조선 사람들은 자신들의 정치적, 국제 정치적, 사상적 정체성을 재정립해야 만 했다. 명이 사라진 후 조선의 체제는 어떻게 진화할 것인지, 적성국가(敵性國家)인 청이 대륙을 차지한 상황에서 어떤 외교와 안보 정책을 채택할 것인지, 문명의 척도였던 주자성리학이 중원에서 사라진 후 무엇을 문명의 기준으로 할 것인지, 이 모든 것을 처음부터 재검토하고 재설정해야 했다. 송시열의 「기축 봉사」, 효종과 송시열의 ‘북벌론’, 그리고 효종의 뒤를 이은 현종대에 조선을 뒤흔든 ‘예송’(禮訟), ‘사문난적’(斯文亂賊) 논쟁 등이 그 결과였다. (p. 133)
이처럼 대내적으로는
새로운 ‘사문난적’인 천주교의 도전과 대외적으로는
‘서양 오랑캐’의 출현으로 빚어진 위기에 맞서 일어난 것이 위정척사파였다.
임진왜란과 병자호란으로 형성된 소중화 사상과 쇄국 정책은 서세동점과 개국의 시대를 맞아 다시 한 번 만개한다. 그러나 동아시아는 원-명, 명-청 교체기에 버금가는 또 한 번의 난세로 빠져들고 있었다. 세계 문명의 축이 동양에서 서양으로, 동아시아의 문명과 무력의 축이 중국에서 일본으로 바뀌고 있었다. 명-청 교체기에 형성된 친중위정척사 사상과 쇄국 정책으로는 넘을 수 없는 파고(波高)였다. (p. 135)
책에 대하여
조선 사람의 가슴과 뇌리에 깊이 뿌리내린 반일 감정과
‘왜’(倭)에 대한 문화적 우월 의식, 피해 의식, 강력한 쇄국 정책에도 불구하고
19세기 말에 이르면 일본을 새로운 문명의 기준으로 받아들이는 친일개화파가 출현한다. 놀라운 인식의 전환이었다.
늘 중국을 문명의 원천으로 간주해 온 조선 사람들이
중화 질서의 가장 변방이었던 일본을 새로운 문명의 원천으로 받아들이기 시작한다.
조선은 근대 문명을 일본으로부터 배운다.
친중위정척사파와 흥선대원군, 조선의 왕실은
모두 근대 문명을 금수와 같은 서양 오랑캐의 것으로 치부하고 거부하면서
그 내용을 알려고 조차 하지 않았다.
조선이 상국(上國)으로 모시던 청은 왕조의 명맥을 간신히 유지하면서도
여전히 중국의 유교 문명이 우월하다는 ‘중체서용론’을 견지하고 있었다.
따라서 조선이 근대 문명을 배울 수 있었던 유일한 통로는 ‘문명개화’의 이름으로 급속한 근대화를 이루고 있던 일본이었다. 이 비좁은 통로를 이용하여 문명개화의 당위성을 배우고 근대 문명을 조선에도 이식하고자 한 사람들이 친일개화파다.
친일개화파가 일본으로부터 배운 것은 근대 산업, 군사, 교육, 법뿐만 아니라
‘독립’이라는 개념이었다.
이들은 메이지 일본이 ‘만국공법’(萬國公法)이라 불리는
근대 국제법을 익히고 불평등 조약을 극복하기 위하여 노력하는 것을 보면서
‘민족 국가’라는 독립 단위로 구성되어 있는 근대 국제 질서를 배운다.
당시 쇠락의 길을 걷고 있던 청은
조선 반도에 대한 우월적 지위를 유지하고
서구 열강과 일본의 영향력을 차단하기 위하여
조선이 독립국이 아닌 중국의 속방(屬邦)임을 적극 홍보하고 있었다.
조선의 왕실, 민씨 척족 중심의 친청파 역시 모두 조선이 청의 속국임을 대내외에
스스럼 없이 천명하고 있었다.
그러나 친일개화파는 메이지 일본을 통하여
조선과 청 간의 사대 관계가 근대 국제 질서의 관점에서 보자면
용납할 수 없는 치욕적인 종속 관계라는 사실을 처음 깨닫는다.
친일개화파가 본격적으로 형성되는 것은
훗날 “개화파”로 불리게 되는 극소수의 인사들이 직접 일본으로 건너가
‘문명개화’를 이루고 있던 메이지 일본을 보고 배우면서부터였다.
■ 메이지유신
메이지유신은 세계사에서 그 유례를 찾아보기 힘들게
빠르고 성공적인 근대화 과정이었다.
일본은 메이지유신을 거치면서 불과 한 세대 만에
봉건 국가에서 근대 국가로 탈바꿈한다.
조선과 일본은 비슷한 시기에 서구 열강과 조우한다.
외세의 도래에 대한 초기 반응도 유사했다.
서구 열강이 문을 두드릴 당시 조선과 일본은 모두 쇄국 정책을 고수하고 있었다.
서구 열강이 본격적으로 통상을 요구하자
조선에서는 위정척사파가,
일본에서는 존왕양이파(尊王夷派,, 손노조이파라고도 함)가 일어나
개국에 극렬하게 반대한다.
그러나 그 이후로 조선과 일본의 역사는 서로 전혀 다른 방향으로 전개된다.
조선에서는 위정척사파가 끝내 개국에 반대하고 친일개화파는 몰락한다.
반면 일본의 존왕양이파는 개국주의자로 변신한다.
일본을 지키기 위해서는 서양을 배워야 한다는 인식 전환을 통하여
가장 극렬한 쇄국주의자들이 가장 적극적인 개국주의자가 된다.
이들이 일으킨 혁명이 메이지유신이다.
메이지유신에 성공한 일본은 곧바로 조선의 문을 두드린다.
일본은 오랫동안 속해있던 중화 질서,
또는 ‘화이질서’(華夷秩序)의 역사와 구조, 논리를 누구보다도 잘 이해하고 있었다.
동시에 근대 국제 질서의 역사와 구조, 논리도 정확하게 파악하기 시작하였다.
이를 바탕으로 일본은 중화 질서를 자신이 주도하는 근대 국제 질서로 바꿔나간다.
조선과 중국에게 익숙한 전통 중화 질서의 개념과 용어,
이론과 상징을 근대 국제 질서의 것들로 하나씩 대체해 나가면서
동아시아의 국제 질서를 주도 면밀하게, 그리고 근본적으로 바꾼다.
■ 친일개화파의 좌절
급격히 근대화하고 있는 일본에 직접 건너가 보고 배우기 시작한
최초의 조선 사람은 불교승 이동인이었다.
1879년 김옥균과 박영효의 부탁과 후원으로
처음 도일(渡日)한 이동인은 1년간 일본 말과 문화를 익히면서
일본의 정치인, 지식인, 기업인은 물론 일본에 상주하고 있던
서구 열강의 외교관들과 폭넓게 교류하면서 친일개화파와 일본의 교량 역할을 한다.
그 후 1880년 제2차 수신사 파견,
1881년 4월 10일 신사유람단 파견,
그리고 세 차례에 걸친 김옥균의 방일과 장기 체류를 통하여
조선의 개화파는 일본의 개화사상을 본격적으로 배우고 귀국하여
조선의 개화를 기획한다.
그러나 친일개화파는 두 개의 장애물을 만난다.
첫째는 친중위정척사파였다.
대원군의 개혁을 ‘패도 정치’로 몰아 대원군을 실각시킨 위정척사파였지만
고종이 일본과 강화도 조약을 체결하고 일본의 근대화 과정을 적극 배우려고 하자
이번에는 대원군과 손을 잡고 이에 격렬히 맞선다.
안기영 역모사건(1881), 임오군란(1882)은
위정척사파와 대원군이 함께
고종과 친일개화파의 개국 시도에 반대하여 일으킨 정변이었다.
그러나 임오군란으로 쇄국주의자였던
대원군과 위정척사파가 다시 득세하자
이홍장이 공을 들여 추진한
조선과 서구 열강 간의 적극적인 수교 정책이 수포로 돌아갈 위기에 처하게 된다.
이에 이홍장은 조선으로 대군을 급파하여 군란을 평정하고,
대원군을 납치하여 톈진(天津, 천진)으로 압송한다.
외세를 배격하겠다고 일으킨 임오군란은
오히려 외세가 조선 내정에 전례 없이 깊이 간여하는 빌미를 제공한다.
임오군란을 계기로 청은 병자호란 이후 처음으로
조선에 군대를 진주시키고 조선의 내정과 외교를 직접 챙긴다.
청은 조선과의 관계를 전통적인 사대 관계에서
근대적인 제국주의 식민지 체제로 전환시키고
위안스카이(袁世凱, 원세개, 1859~1916)를 보내 조선을 직접 통치하기 시작한다.
임오군란이 불러온 청의 군사 개입과 정치 간섭의 가장 큰 수혜자는
세력을 키워오던 조선 왕실의 외척인 여흥 민씨 척족이었다.
1874년 대원군의 실각으로 세력을 키우기 시작한 민씨 척족은
1882년 임오군란으로 대원군이 톈진으로 납치되자 권력을 완전히 장악한다.
청 역시 민씨 척족의 이용 가치를 간파하여 이들과 적극 손을 잡는다.
친일개화파의 두 번째 장애물인 ‘친청파’는 이렇게 형성된다.
일본을 통하여 근대 국가와 근대 국제 질서의 성격을 이해하기 시작한
친일개화파들에게 조청 간의 조공 관계는 굴욕적이었다.
중국은 더 이상 문명의 기준도, 따라야 할 이상도 아닌 오직 극복의 대상일 뿐이었다.
그런 중국에 의존하여 권력을 유지하면서 조선의 독립과 개화를 모두 가로막고 있는
민씨 척족 주도의 친청파는 타도의 대상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상황은 오히려 친청파에게 유리하게 돌아가고 있었다.
다급해진 친일개화파는 1884년 갑신정변을 일으킨다.
그러나 역사는 친일개화파에게 가혹했다. 조선은 메이지유신과 같은 혁명을 성공시킬 수 있는 정치 세력도, 사회적, 이념적 여건도 갖추지 못했다. 청과 정면 대결을 하기에는 아직 실력이 부족했던 일본도 친일개화파를 돕지 않는다. 청군이 베트남을 둘러싼 청과 프랑스 간의 전쟁(1884~1885)에 조선 주둔 청군을 파병하면서 청군의 개입도 없을 것으로 생각하였지만 이는 오판이었다. 오히려 위안스카이가 청군을 이끌고 적극적으로 개입함으로써 갑신정변은 결국 삼일천하로 끝난다.
갑신정변의 실패로 조선에 대한 중국의 직접 통치는 더욱 강화된다.
개화파는 역적으로 몰려 미국, 일본 등지로 망명을 떠났고
조선에 남은 그들의 가족들은 연좌제(緣坐制)로 비참한 최후를 맞는다.
메이지유신을 모델로 한 조선의 자주적인 근대 혁명은 실패한다.
책 속으로
친일개화파가 목격하고 배우기 시작한 일본은
메이지유신 직후 힘을 기르고 있던 일본이었다.
아직 청이나 러시아, 그 외의 서구 열강에 직접 도전할 실력은 갖추지 못하였지만
급진 개혁을 통하여 근대 국가의 모습을 만들어가는 동시에
부족한 힘을 외교력으로 보완하고 있었다.
더구나 조선의 지정학적인 중요성을 일찍 간파한 일본의 지도자들이
아직 힘으로는 좌지우지 할 수 없는 조선을 적극적인 교류를 통하여
일본식 근대화의 길을 가도록 설득하고자 한다.
이 과정에서 메이지의 지도층은 친일개화파들과 깊은 교류를 한다.
친일개화파들은 메이지유신이란 정치, 경제, 사회, 문화, 사상의 혁명을
성공적으로 주도한 일본의 정치인, 경제인, 사상가들과 직접 교류하면서
새로운 세계관, 국제 정세 인식, 그리고 국가관을 정립한다.
조선의 건국 세력이 송나라의 산업 혁명과 문화적 성취를 본받고자
개방, 개혁을 추진했다면
조선 말기의 개화파는 일본의 급격한 근대화 과정을 본 받고자 ‘개화’를 추구하였다.
위정척사파가 주자학을 문명의 정점으로 확신하고 이를 지키고자 하였다면 개화파는 일본이 받아들이고 있는 서구 근대 문명을 새로운 글로벌 스탠더드로 간주하였다. 위정척사파에게는 중국이 문명이고 서양이 오랑캐였다면 개화파에게는 서구와 일본이 문명이고 중국이 야만이었다. 개화사상은 수백 년에 걸쳐 형성된 조선 사람의 세계관에 대한 전면적인 거부였다.
그러나 친일개화파의 인식 전환은 당시 조선이 따라갈 수 없는 것이었다.
친중위정척사와 친청 동도서기파 사이에서
갈팡질팡하고 있던 조선의 주류 사회로서는 일본을 따르고자 하는
친일개화파를 받아들일 수 없었다.
그리고 친일개화파가 자신들의 이념을 관철시키고자 거사를 하였을 당시에는
아직도 청이 너무 강했다.
정변이 일어나자 청은 놀라울 정도로 단호하게 군사를 동원하여 이를 진압한다.
반면, 아직도 메이지유신 초기의 일본은 청을 정면으로 상대할 자신이 없었다.
청이 조선 정국에 적극 개입하자 일본은 친일개화파를 버린다.
갑신정변의 실패로 조선이 자주적으로 근대화의 길을 갈 기회는 사라진다. (p. 436~437)
오늘날 많은 한국 사람들은 서대문의 ‘독립문’이
일본으로부터의 ‘독립’을 기념하는 문으로 오해하고 있다.
그 바로 뒤에 서대문형무소의 옛 자리가 있어서 더욱 그렇다.
그러나 ‘독립문’은 중국의 칙사가 무악재를 넘어서 조선에 당도하면
조선의 왕이 직접 나가 그를 영접하던
‘영은문’(迎恩門)과 ‘모화관’(慕華館), 즉 ‘중국을 사모하는 건물’을 허문 자리에 지었다.
중국으로부터의 독립을 상징하기 위해서였다.
만일 ‘독립문’이 일본으로부터의 독립을 상징하는 문이었다면
1897년에 지어진 독립문을 일제가 일제 시대 내내 그대로 두었을 리 만무하다.
독립문은 오히려 일본이 조선을 중국으로부터 독립시켜줬음을
상기시켜주는 상징물이었기에 일제가 그대로 두었을 뿐이다. (p. 4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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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짜 ‘헬조선’ 조선 말기, 개신교는
조선 사람이 한국 사람으로 바뀌는 데 큰 역할을 했다.
대한민국 번영은 개신교라는 외부 자극을 받은 조선 사람이
민주주의, 자본주의를 과감히 수용해 한국 사람으로 거듭났기에 가능했다.”
함재봉(63) 박사는
조선 말기 혼란부터 대한민국 정부 수립까지 역사에 대해 열변을 토했다.
함 박사는 연세대 정치외교학과 교수와 유네스코(UNESCO) 사회과학국장,
아산정책연구원 이사장 겸 원장을 지낸 정치학자다.
최근 20년 동안 그의 화두는 ‘한국·한국인이란 무엇인가’였다.
국내외 방대한 자료를 통섭한 ‘한국 사람 만들기’는 필생의 역작이다.
2017년 1권 ‘친중(親中) 위정척사파’,
2권 ‘친일(親日) 개화파’를, 최근 3권 ‘친미(親美) 기독교파 1’을 출간했다.
신간 ‘친미 기독교파’는 한국 근대화 과정에서 미국 개신교의 역할을 조명했다.
1·2권 각각 500쪽, 3권은 1000쪽에 달하는 거질(巨帙)이다.
앞으로 ‘친소(親蘇) 공산주의파’와 ‘인종적 민족주의파’도 다룰 예정이다.
그는 “지금 대한민국은 지도층이 세계 정세에 어두운 ‘우물 안 개구리’라는 점에서
조선 말기와 닮았다”며 “폐쇄적·인종적 민족주의에 빠져 친중·친북 노선을 걷는다면
국가적 위기가 닥칠 것”이라고 우려했다.
2월 2일과 16일 두 차례 서울 서대문구 동아일보 충정로 사옥에서
함 박사를 만나 한국·한국인은 무엇이며 어디로 나아가야 할지 물었다.
‘한국 사람 만들기’ 연구에 나선 이유는 무엇인가.
“1966년 아버지(1983년 버마 아웅산 묘소 테러로 순직한 함병춘 전 대통령비서실장)가 교환교수로 부임해 미국에 처음 갔다.
또래 미국 아이들이 나를 보고 ‘차이니즈’(chinese: 중국인),
‘재퍼니즈’(japanese: 일본인)라더라.
나는 ‘코리안’(korean: 한국인)이랬더니 ‘왓츠 댓’(What’s that: 그게 뭐냐)이라고
되묻더라. 강렬한 경험이었다.
코리안이 미국에 살면 ‘재미동포’,
중국에 살면 ‘조선족’,
중앙아시아에 살면 ‘고려인’ 아닌가.
한국인이라는 단어가 이들을 모두 하나로 엮을 수 있을까,
한국과 한국인이 무엇인지 탐구해보고 싶었다.”
그 전에 조선 사람이란 무엇인가.
“조선 사람도 조선 왕조가 인위적으로 만들어낸 것이다.
세종대왕은 성리학적 가치관에 따라 국가 시스템을 바꿨다.
고려시대까지 ‘장가가던’ 사회를 ‘시집가는’
사회로 바꾸는 등 백성의 삶까지 성리학적으로 규율했다.
유교적 삼강오륜(三綱五倫)이 지배하는 조선과 조선 사람이 탄생했다.
조선 말기 혼란으로 이런 정체성이 흔들렸다.
1919년 고종의 인산(因山)을 계기로 3·1운동이 일어났다.
그럼에도 당시 사람들은 ‘국권 회복’을 부르짖을 뿐, 왕조 부활을 주장하지 않았다.
그만큼 조선 왕조의 통치가 끔찍했던 것이다.”
함 박사는 조선 말기 혼미(昏迷)를 ‘헬조선’이라고 표현했다.
헬조선은 헬(hell: 지옥)과 조선(朝鮮)을 합쳐
‘한국이 지옥처럼 희망 없는 사회’라고 자조하는 신조어다.
그는 외국인 선교사들이 남긴 기록을 바탕으로 당시 시대상을 다음과 같이 짚었다.
“조선 말 백성들은 진짜 헬조선에서 비참하게 살았다.
힘 있는 양반이 비옥한 땅을 모두 차지하고 세금도 내지 않았다.
조선 정부는 백성을 위해 제대로 구실하지 못했다.
의료체계가 무너져 병든 백성은 미신에 의존할 수밖에 없었다.
비(非)양반과 여성은 제대로 된 교육을 못 받고 박해받았다.
이런 열악한 현실은 개신교가 대다수 보통 사람에게 호소력을 갖는 배경이 됐다.”
개신교는 한국 사람 만들기에 어떤 역할을 했나.
“서양인 개신교 선교사들은 무작정 종교만 전파하지 않았다.
신분·성차별을 뛰어넘어 신 앞에 인간이 평등하다고 가르쳤다.
봉건적 관습을 타파하는 데 앞장선 것이다.
근대적 의료 기술로 조선 사람을 살리기도 했다.
교회에서 근대적 제도를 경험할 수도 있었다.
조선 사람의 첫 선거는 1948년 제헌의회 선거가 아니었다.
장로교가 조선에 전파된 후 조선인 신자들은
자기 손으로 평신도 지도자인 장로(長老)를 뽑았다.
교회 공동체에서 제한적으로나마 민주주의를 경험한 것이다.”
개신교의 중요성을 과장한 것 아닌가.
“‘친미 기독교파’라는 신간 부제를 보고 기독교,
특히 개신교도를 위해 쓴 책으로 착각하기도 한다(웃음).
결코 아니다.
개신교가 조선에서 근대적 인간이 등장하는 데 어떻게 일조했는지 분석했을 뿐이다.
칼뱅주의 영향 속에서 개신교를 수용한 사회는
자유주의 정치와 시장경제로 나아가게 마련이다.
네덜란드와 영국, 미국이 대표적 사례다.
19세기 말 형성된 조선의 친미 기독교파도 마찬가지다.
일제강점기를 지나 대한민국 건국까지 이 땅에 근대성이 뿌리내리는 데 기여했다.”
조선 말기부터 해방 공간까지 다양한 이념이 경합했다.
“그렇다. 조선·조선인이 한국·한국인이 되는 과정에서 크게 5가지
국가·인간 유형이 있었다.
‘한국 사람 만들기’ 시리즈의 뼈대이기도 하다.
첫째는 친중 위정척사파였다.
기존 조선의 가치관을 고수해 중국 문명을 가치 기준으로 세웠다.
둘째는 일본 근대화에 주목한 친일 개화파였다.
셋째가 친미 기독교파다.
기독교, 특히 개신교적 세계관을 받아들여 자유주의·자본주의에 우호적이었다.
넷째로 친소 공산주의파는 말 그대로 공산주의자로서
소련 중심의 국제 사회주의 노선을 신봉했다.
마지막은 인종적 민족주의파다. 혈통 중심 민족주의로 세계를 바라보는 이들이다.
지금도 한국 사회에서 큰 힘을 발휘한다.”
이 대목에서 함 박사는 “오늘날 대한민국에 친중 위정척사파와 인종적 민족주의파의
그림자가 짙게 드리웠다.
586 운동권 출신 지도층의 폐쇄적 세계관을 보면
조선 말기 망국의 비극이 재현되지 않을까 우려된다”고 짚었다.
586세대 지도층의 어떤 점이 문제인가.
“586세대는 1980년대 민주화를 울부짖었다.
상당수는 NL(민족해방)이니 PD(민중민주)니 하는 이념 투쟁에만 골몰했다.
심지어 북한을 신봉하는 주체사상에 빠지기도 했다.
586세대 정치인들이 그런 이념을 버렸어도
젊은 시절 익힌 편협한 세계관의 영향은 무시할 수 없다.
조선 말 친중 위정척사파의 협애한 가치관과 닮은꼴이다.
여기에 인종적 민족주의까지 결합했다.”
친중 위정척사파에 인종적 민족주의파가 결합했다?
“미국·일본에 대한 반감, 중국·북한에 대한 막연한 동경이 그것이다.
지금 남북한이 하나라고 볼 근거는 이른바 ‘피(血)’밖에 없다.
이념과 사고방식이 전혀 다르다.
북한은 지금도 한국을 핵폭탄으로 말살하겠다고 벼른다.
그럼에도 어떤 이는 통일을 낭만적으로만 바라보고
북한 정권에게 뭔가 베풀고 싶어 한다.
인종적 민족주의의 폐해다.
중국에 굴종적 태도를 보이는 것도 친중 위정척사파와 같은 현실 오판이다.”
“미·중 갈등 속 한국은 결국 미국을 택할 수밖에 없다.
한국·한국인의 근간은 민주주의와 시장경제다.
모두 미국식 모델이다. 미국은 적어도 한국의 민주주의·시장경제를 지켜주지 않나.
중국은 결코 미국을 추월할 수 없다.
시진핑 중국 국가주석을 보면 1972년 10월 유신 후 박정희 전 대통령이 떠오른다.
국가 주도로 산업화에 성공한 지도자는 독재 유혹에 빠진다.
결국 박정희 전 대통령은 10·26 사건으로 목숨을 잃고 유신 체제도 붕괴했다.
지금 중국 상황도 마찬가지다.
정치·경제적 자유에 대한 열망을 무시하면 국가가 위기에 빠질 수밖에 없다.
한국 지도자들은 이런 국제 정세 속에서
어떤 선택이 국익에 부합하는지 냉철히 판단해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