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장수말벌, 왜곡하지 말자
9월 2일 오전 7시 10분.
옥정동 932-10(대) 나대지와 보도블록 경계에 아까시나무가 창궐해 있습니다.
아까시나무 기둥을 한 손으로 잡고 낫으로 내리친 뒤 좁은 빈 공간으로 집어던지는 작업을 하던 중이었습니다.
땅속에 있던 왕탱이는 지진이라도 난 줄 알았나?
곧바로 출격. 오른쪽 귀 부근에 한 방 쏘고 갑니다.
분수까지는 아니어도 피가 귀 주변으로 번집니다.
해마다 한두 번씩 말벌에 쏘이는 편이지만 장수말벌, 왕탱이는 이번이 처음입니다.
벌에 쏘였다고 무조건 큰일 나는 것도 아니고, 왕탱이라고 무조건 죽는 것도 아닙니다.
벌독 반응은 개인의 알레르기 정도, 들어온 독의 양, 쏘인 횟수 등 여러 조건이 함께 작용하죠.
저는 북한산 바위산행 때처럼 작업할 때도 늘 헬멧을 쓰고 소음방지 귀마개도 달고 다닙니다.
헬멧에 붙어 있던 귀마개를 귀까지 내려놓았으면 피할 수도 있었을 텐데...
이번에는 귀 부근이었습니다. 해마다 겪는 연례행사라 이 느낌은 잘 압니다.
그냥, "아프다."
양주 예쓰병원 응급실로 가는 중 얼굴이 붓고 잔기침이 나오면서 기도가 좁아지기 시작하죠.
해마다 벌에 쏘여본 경험이 있어 이 느낌은 금방 압니다.
응급실에서도 의사가 가장 먼저 "숨 쉬기는 괜찮으세요?" 하고 확인하는 이유가 바로 이 때문입니다.
빠른 처치 덕분에 다행히 후유증은 거의 없습니다.
문제는 지출, 5시간 세후 일당이 10.7만원,
응급실 68,940원, 약값 3,900원. 도합 약 73,000원.
오늘 일당의 3분의 2 이상을 왕탱이 한 마리가 가져갔습니다.
언제나 그렇듯 가짜뉴스가 판을 치는 세상이지만,
오늘만큼은 제가 억울한 장수말벌 대변인을 자처해 봅니다.
제가 산에서 만나온 왕탱이는 세상에 알려진 모습과 조금 다릅니다.
도시 가로수든 산속 참나무든 수액이 흐르기 시작하면 사슴벌레가 붙고 왕탱이도 붙습니다.
고로쇠 수액 마시듯 참나무에 입을 대고 수액을 빨고 있는 왕탱이를 보고 있으면
"저놈을 왜 맨날 산적, 마적떼 취급하나?" 싶은 생각도 듭니다.
물론 왕탱이가 수액만 마시는 고결한 선비는 아닙니다. 잡식성입니다.
성충은 참나무 수액이나 과즙 같은 당분도 좋아하고,
자기 새끼들에게 단백질을 먹이려고 다른 곤충도 잡고, 다른 말벌도 잡고,
필요에 따라 꿀벌도 잡으며 양봉장을 공격하기도 합니다.
그것까지 없다고 하면 제가 왕탱이 대변인이 아니라 왕탱이 변호사에게 돈 받은 사람이 되겠죠. ㅎㅎ
그런데 제가 오랫동안 야전에서 봐온 왕탱이는 인쇄된 책 몇 줄에서 느껴지는
"평생 꿀벌집만 찾아다니는 꿀벌 전문 학살자" 그런 모습과는 거리가 있습니다.
수액도 먹고,
다른 곤충도 잡고,
특히 다른 말벌도 강하게 공격하고,
때로는 꿀벌도 잡고,
그냥 자기 방식대로 자연스럽게 살아가는 우리 산야의 대형 포식자입니다.
그래서 저는 반쯤 농담, 반쯤 진담으로
"장수말벌은 꿀벌의 수호자"라고 부릅니다.
이런 얘기하면 벌떼처럼 달려들어 저를 씹으려 할 분도 있겠죠. ^^
장수말벌이 양봉장 앞에서 보초를 서준다는 이야기가 아닙니다.
왕탱이가 다른 말벌들을 공격하고 그 개체수를 누르는 만큼, 결과적으로
꿀벌에게도 숨통이 트이는 부분이 있지 않겠느냐는 제 식의 표현입니다.
핏불테리어가 다른 개를 만나면 눈빛부터 달라지듯,
제가 현장에서 느끼는 왕탱이도 다른 말벌을 만나면 성깔이 달라집니다.
체급부터 워낙 차이가 나니 제대로 붙으면 작은 말벌 쪽에서는 죽을 맛입니다.
그래서 제가 보는 자연 속 왕탱이는 꿀벌만 잡아먹고 사는 악당이 아니라,
때로는 자식 배불리려고 꿀벌도 잡지만, 꿀벌을 잡아먹는 다른 말벌도 잡아내면서,
먹이사슬 꼭대기에서 나름대로 균형을 이루고 살아가는 놈입니다.
"꿀벌 수호자"라는 말은 바로 그런 뜻입니다.
그리고 왕탱이는 덩치가 덩치인지라 현장에서 마주치는 느낌부터 작은 말벌들과 다릅니다.
제가 산에서 여러 번 지켜본 바로는 평소 먹이활동을 할 때 작은 벌들이 우르르 돌아다니는 모습과는 또 다릅니다.
왕탱이는 한두 마리만 떠도 주변 공기가 달라집니다. 독고다이 같은 느낌이죠.
덩치에서 오는 자신감인지 제 눈에는 좀 품위 있게 놉니다.
오늘 저를 공격한 놈도 한 방 놓고 물러났습니다.
물론 장수말벌도 침 구조상 여러 번 쏠 수 있습니다.
제가 말하는 것은 "왕탱이는 평생 한 번밖에 못 쏜다" 그런 이야기가 아니라,
제가 오랫동안 현장에서 느껴온 왕탱이 성깔이 다른 작은 말벌들과 좀 다르다는 이야기입니다.
지저분하게 악착같이 덤빈다는 느낌보다는, 한 방이 묵직하고 단아하다고 해야 하나?
왕탱이에게는 또 하나 대단한 무기가 있습니다.
드론이 공중에서 호버링하듯 멈춰서 독액을 눈 쪽으로 뿌리는 능력입니다.
제가 예전에 말벌옷을 입고 노봉 작업을 하면서 직접 경험했습니다.
일반 말벌에서는 좀처럼 보지 못했던 왕탱이의 특별한 공격법입니다.
한 놈이 앞에서 호버링하며 스프레이를 갈기고 물러나면 다음 타자가 들어와 또 스프레이입니다.
땅속 노봉 주변에 비상사태가 발생하면 두어 마리가 이런 식으로 연속해서 들어옵니다.
허리를 꼬듯 구부리고 꼬리 끝에서 뿌리죠.
1진 끝나면 2진, 또 다음 타자. 미리 훈련이라도 한 듯 교대합니다.
이 구경은 동료들이 못 합니다. 다들 멀찌감치 떨어져 있으니까요. ^^
말벌옷 앞쪽 마스크가 메쉬라 그대로 눈으로 들어옵니다.
처음에는 무척 간지럽습니다. 많이 들어가면 시야가 이상해집니다.
제 경험으로는 컬러로 보이던 세상이 순간 흑백처럼 보입니다.
"아, 이러다 심봉사 되는 것 아닌가?" 처음에는 진짜 겁먹었습니다.
땅 속에서 노봉 파내려면 아직도 시간이 아득인데, 이대로 강봉사 되는 거 아니야? ^^
그러니 왕탱이 스프레이만큼은 제가 산꾼 허풍으로 하는 이야기가 아닙니다.
왕탱이에게 잘못 걸리면 컬러를 흑백으로 바꿔주는 재주도 있습니다. ^^
그리고 왕탱이를 술에 담가본 사람들은 또 압니다.
죽기 전 뿜어내는 물질 때문인지 술의 느낌이 달라지고 점도가 진해지는 느낌이 있습니다.
제 체감으로는 작은 말벌 여러 마리가 내놓는 것과 왕탱이 한 마리가 내놓는 양에서 차이가 꽤 크게 느껴졌습니다.
이건 성분 분석표를 들이대는 이야기가 아니라 제가 직접 잡고 담가보면서 보고 느낀 경험담입니다.
그런데 오늘은 뜻밖의 대박 노봉도 만났습니다.
병원만 아니었으면,
2016년에 28만원 주고 산 말벌옷 입고
출입구부터 막은 다음,
땅을 파서 비닐봉지에 통째로 담아냈을 겁니다.
그런데 병원 갔다 돌아와 보니 이미 119가 출동했습니다.
119 입장에서야 사람 안전이 우선이니 스프레이가 가장 빠른 도구였겠죠.
하얀 에어로졸이 확 퍼지는 모습을 보면서
"아이고, 저 아까운 왕탱이 노봉..."
스프레이를 벌집에 직접 들이부은 것은 아니었지만 공중에 살충제가 분사됐으니
피레스로이드계 같은 살충성분에 노출됐을 가능성을 완전히 배제할 수 없습니다.
노봉을 열어보니 역시 대박.
애벌레와 번데기가 꽉 찼습니다.
살충제 스프레이만 아니었으면 정말 좋았을 텐데, 그게 가장 안타깝습니다.
꺼림칙해서 살아 움직이는 애벌레 위주로 핀셋으로 빼낸 뒤 사각 유리 락앤락에 넣고 20.5도 소주를 부었습니다.
이런 걸 저는 농담 삼아 "소독액에 담갔다" 합니다.
물론 소주가 살충제를 없애주는 소독액이라는 뜻은 아닙니다.
오히려 일부 살충성분이 술 쪽으로 녹아나올 수도 있습니다.
105마리 정도 들어갔는데 예전 같으면 10만원 정도 이야기할 만한 양입니다.
하지만 이번 것은 스프레이 노출 가능성이 있으니 먹는 문제는 별개입니다.
이번 것은 남에게 권할 일도 아니죠.
저도 이제는 말벌 잡아 술 담그는 일은 하지 않습니다.
예전에 한의사 다섯 분에게 물어봐도 공통된 이야기가
"말벌독을 소주에 담근다고 독성이 없어지는 것은 아니다."
그 뒤로 끊었습니다.
말벌옷도 지금은 산림과 창고에 파킹.
그래도 장수말벌을 볼 때마다 드는 생각은 같습니다.
신토불이(身土不二).
제가 농담 삼아 "코리안 말벌"이라고 부르는 것도
우리 산과 들에서 사람과 오랜 세월 함께 살아온 토박이 생명이라는 뜻입니다.
장수말벌은 순한 벌이 아닙니다. 오늘 제 귀에 직접 증명해줬습니다.
그렇다고 무조건 사람을 잡으러 다니는 악당도 아닙니다.
자기 집 건드리면 덤비고, 배고프면 사냥하고, 참나무 수액이 흐르면 수액도 먹고,
자기보다 작은 말벌도 잡으며, 그냥 자연 속에서 왕탱이답게 살아가는 놈입니다.
제가 명품, 영물로 치는 게 세 가지 있습니다.
능이,
홍어,
그리고 장수말벌.
셋의 공통점이 하나 있는데,
남자에게 좋다는 이야기는 많은데 그 이야기를 여기다 자세히 쓰자니 좀 거시기합니다. ^^
능이는 향으로 값을 하고,
홍어는 삭힘으로 값을 하고,
왕탱이는 구수한 애벌레 맛으로 값을 합니다.
거기에 산꾼들 사이에서는 오래전부터
"자연 삐아그X"라는 우스갯소리까지 따라붙죠. ^^
우리 산야에서 우리와 오랜 세월 함께 살아온 장수말벌.
순한 벌처럼 미화할 필요도 없지만, 무조건 산적, 마적, 살인벌로 매도할 필요도 없습니다.
적당히 거리를 두고, 노봉은 건드리지 말고,
왕탱이도 왕탱이 자리에서 살게 놔두는 것.
저는 그게 자연스럽다고 봅니다.
오늘 왕탱이에게 한 방 맞고도 여전히 왕탱이 대변인입니다.
다음부터는 아카시나무 기둥을 잡기 전에 땅바닥부터 한번 잘 살펴보는 걸로.
왕탱이 선생,
오늘 수업료 7만3천원은 너무 비쌌소. ^^
첫댓글 며칠전에 공원에서 말벌집을 발견해서 119에신고해서 갸들이 출동해서 장수말벌을 스프레이로 때려잡고 장화로 말벌집은 박살을 냈는데 그중에 한 소방관이 나보고 말벌복 얼마 안하니 공원에다 사달래서 나보고 잡으라고 하데요.나도 공원에서 받은 망사벌복이 있어 일반적인것은 내가 스프레이로 우리팀에서는 잡는데 솔직허니 말벌은 자신이 없어 전화한건데 니기미 난 기간제고 지덜은 공무원인데 그소리 들으니 뚜껑이 확 열리대요. 그리고 일하다 그랬으면 회사에서 병원비 내줘야지 왜 씨벌넘들 개인이 부담해야 하는지. 만만한게 기간제인가?
칼바위님, 노을공원이나 하늘공원은 언제쯤 찾아가야 가장 좋은 가을 그림을 볼 수 있을까요?
예전에는 노을공원에서 텐트 예약해 하룻밤 묵은 적도 있습니다.
이번에는 하룻밤보다는 억새밭과 산국, 감국이 어우러진 풍경 속에서 가을 행복을 한번 느껴보고 싶네요. ^^
혹시 그쪽 사정을 아시면, 가장 좋은 시기 귀띔 좀 해주세요.
@단풍 억새축제 때는 인간들이 많으니 그 이후 던지 그 이전이든지 오세요. 억새축제 시작하면 알려드릴게요
칼바위님 글 보니 초록은 동색이라 충분히 이해가 갑니다.
말벌복 사줄 테니 직접 잡으라는 말은, 하는 사람 입장에서는 쉽게 할 수 있겠지만
실제 현장에서 장수말벌이나 땅속 노봉을 상대하는 사람에게는 전혀 가벼운 일이 아니죠.
일반적인 벌집 정도는 현장에서 처리할 수 있어도 장수말벌은 한 번 잘못 건드리면 위험이 크잖아요. 땅속에 있으니까요.
저도 이번에 일하다 왕탱이 한 방에 응급실, 약값까지 7.3만원.
5시간 일당이 10.7만원인데 하루 품삯의 2/3를 병원비로 낸 셈이에요. ^^
업무 중 다친 일이라면 치료비를 개인이 모두 부담하는 게 맞는지도 따져볼 문제고요.
기간제라고 해서 위험까지 개인 몫이 되어서는 안 되겠지요.
무엇보다 우리처럼 산에서 오래 다닌 사람일수록 "이 정도는 내가 하지" 하다가 사고가 납니다.
일반 말벌도 위험하지만 장수말벌 노봉은 동료 중 잘 처리하는 사람이 있을 겁니다.
제 주변 선배 한 분은 장소만 알려주면 새벽에 가서 두 시간 혼자 작업해 장수말벌을 일망타진하는 전문가 수준이에요.
만만한 게 기간제인가요? ^^
좀말벌, 등검은말벌 같은 일반 말벌 노봉도 제대로 채취하려면 두 사람이 말벌옷을 입고 들어가는 게 안전한데,
우레탄 말벌옷 한 벌만 해도 20만원이 훌쩍 넘잖아요.
말벌 잡는 일을 정말 좋아하거나 오래 해온 사람이 아니면 누가 자기 돈 들여 그런 장비까지 갖추겠습니까.
공원에서 필요한 작업이라면, 근로자에게 "잡아라" 하기 전에 장비와 안전대책부터 갖춰주는 게 순서겠지요.
여튼 말벌 애벌레는 산꾼들 사이에서는 별미로 통하고, 남자에게 좋다는 우스갯소리도 따라붙지만
막상 노봉을 건드리는 순간 뜨거운 감자보다 더 위험한 식재료가 됩니다.
먹을거리 하나 얻겠다고 목숨까지 걸 일은 아니죠. ^^
(말벌옷 입으면 훨씬 낫긴 하지만, 그래도 방심은 금물이고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