살아도 부모덕, 죽어도 부모덕
2월을 이기고 나온 3월 초하루,
찬바람이 봄 햇살 키워낸 날이다.
선친 33주기 추도 예배 위해 떡과 과일을 챙겼다.
어머니 댁으로 나서는데 봄 내음이 코끝을 스쳐 그리움이 피어올랐다.
애들 보고 싶다는 어머니 말씀에 손녀 손자도 데려갔다.
‘할아버지, 문어 다리 몇 개?’ ‘여덟 개!’
‘애들아, 문어 손은 몇 개?’ ‘손이 어디 있어요?’
‘문어 머리 떼려 올리는 것 손이지?’ ‘하하하..’
익산, 광주 동생 내외가 차례로 들어와 한자리에 앉았다.
여수 누님은 떡값을 보내고 일본 동생은 죄송하다는 카톡만 남겼다.
65세 별세, 내가 그 나이라 감회가 새로워 돌이켰다.
1990년 2월 25일 주일, 깊은 밤 아버지가 구토하며 의식을 잃었다.
막내가 당황하여 앞 집 택시 기사의 도움에 강남 성모 병원으로 모셨다.
뇌일혈 진단에 응급 수술을 받았다.
뜻하지 일에 답답하여 퇴근 후 대한수도원으로 행했다.
도중에 버스가 끊겨 작은 교회에 들어갔다.
연락처를 남기고 기도 중에 잠들었다.
교회 사모님이 깨워 아버지 임종 소식을 전해 되돌아왔다.
사당동 집으로 아버지를 모셨다.
성광교회 진운섭 목사님과 장로님들의 도움받아 장례를 치렀다.
출관하는 날, 관을 붙들고 ‘왜? 한마디 말없이 떠나시오.’
어머니의 애절함에 가슴이 미어졌다.
큰 집 조부 제사 참석 위해 기차표 예매하고
또 하안동 아파트 입주 한 달을 남기고 가셨다.
발병하여 고향 서당골 안장까지 일주일에 끝났다.
한 번 죽는 것 사람에게 정하신 일이고
세상 모든 사람이 가는 길이지만 허망했다.
생전에 큰 덕을 보고 잘 섬기지 못한 탓에 아쉬움이 컸다.
인생은 잠깐 보이다가 없어지는 안개였다.
베틀의 북처럼 지나가는 세월을 셈할 가치가 없었다.
항구에 매인 밧줄을 풀면 쉽게 떠난 배와 같았다.
그래도 위로됨은 하나님께 속한 자녀로
마지막 주일 예배드리고 떠나신 일이었다.
아버지는 삶의 무거운 짐을 지고 버틴 힘이 장사였다.
스물넷 결혼하고 논산 훈련소에 입대하여 기초 훈련 후 전쟁터로 나갔다.
낙동강 전투에서 할아버지가 꿈에 나타나
‘바위 밑으로 숨어라’는 선몽에 살았다는 어머니 증언을 들었다.
총탄에 맞은 오른팔 절단 위기를 가까스로 넘겼다.
왼손을 주로 쓰시며 방앗간 운영을 하셨다.
보리 추수기 타작은 보리 가시 뒤집어쓴 밤낮 없는 수고였다.
집집마다 원동기 옮긴 일이 쉽지 않았다.
원동기 끓는 물에 헝겊에 싼 감사를 넣어 익혀 먹으면 맛이 기가 막혔다.
동네 우물 윗집 타작 마치고 원동기 뜨거운 물을 울타리에 부었다.
밑에서 놀던 아이 등짝에 튀어가 큰 화상을 입혔다.
그 일로 지서에 불러 다니며 애간장을 녹이셨다.
아버지의 헌신에 다섯 남매가 굶지 않고 배워서 좋은 직장에 들어갔다.
손자, 손녀 기저귀 갈고 우유 먹이는 일은 아버지 차지였다.
유모차에 태워 골목 나가면 노태우 대통령이 부럽지 않을 정도로 즐기셨다.
내 어린 시절, 동네 아이들을 사랑하여
겨울철 마른 소나무를 깎아 꼭지에 베어링을 박았다.
애들이 얼음판에서 치도록 팽이를 나눴다.
앉아 타는 스케이트도 두꺼운 철사를 대서 잘나가게 만들었다.
당산나무 아래 논바닥이 얼면 아이들과 어울려 탔다.
따뜻한 봄날, 방앗간 앞마당에 남자아이들을 불러 모았다.
말(斗)을 엎어 그 위에 앉히고
양손 바리깡으로 머리털을 밀어 보내면 동네가 밝았다.
부스럼 종기 난 아이는 모빌유를 발라 줬다.
막내를 품고 일찍 주무시고 새벽에 일어나 도란도란 말을 주고받았다.
‘아부지, 형들이 개구리 잡아 다리를 구워 먹었어요.’
막내 입에 코를 대고 ‘음, 너도 먹었구나?’
‘나는 한 마리뿐이 안 먹었어요.’
한 이불 속에 듣고 키득키득 웃던 때가 엊그제 같은데 50년이 흘렀다.
월동 준비로 장작더미를 쌓아 뒀다.
밥하고 난 잔불에 고구마도 굽고 달걀 껍데기에 쌀을 넣어 익혀 주셨다.
친구들과 산모퉁이에서 모닥불 피우고 놀던 때, 성냥 가진 아이가 짱이었다.
난 아궁이에서 작은 숯불을 종이에 말아 주머니에 넣고 달렸다.
양지바른 곳에 앉은 어른들이 소리쳤지만 들리지 않았다.
잠시 후 불덩이가 뽕빠져 얼마나 무색했는지 모른다.
한 번은 성냥을 훔쳐 논두렁에 불을 지르며
신나게 놀다 짚단에 옮겨 붙었다.
주인이 멀리서 쫓아와 산으로 도망쳤다.
아버지가 나뭇등걸을 캐고 계셨다.
그 주인에 따라붙어 ‘뛰어간 놈, 뉘 집 자식이요?’
‘벌로 봤네요!’ 위기를 넘겼지만 그날 밤 아버지에게 혼났다.
아버지 회갑 때, 사촌 누님이
‘불장난한 아이가 커서 잔칫상 차렸다’는 말에 웃었다.
큰 누님은 중학교 입시 위해 학교에서 지냈다.
도시락 당번은 내 차지였다.
추운 겨울 2.5킬로 거리를 걸면 손이 얼었다.
합격하고 이웃집 택문이 형에게 알파벳을 배웠다.
하루는 용기 형이 오다마와 연애편지를 줘서 전달했다.
그날 저녁 산모퉁이에서 둘이 만나 희희낙락 거렸다.
우연찮게 아버지가 지나다 그 소리를 듣고 올라갔다.
현장에서 붙들린 누님이 집에 돌아와
장작으로 맞고 난 공범으로 몰려 곤욕을 치렀다.
그 누님이 중3 때 파상풍으로 떠나
통곡한 내 아버지 피눈물이 잊히지 않는다.
그래도 건강한 유전자 이어받아 자녀 손이
성가신 일 없게 사는 것은 하나님의 은혜였다.
점심 후 어머니가 ‘이런 맛있는 음식은 처음이라며
살아도 부모덕, 죽어도 부모 덕이라’ 말씀하셨다.
2023. 2. 4 서당골 생명샘 발행인 광주신광교회 이상래 목사 010 4793 019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