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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나카 회장의 동경 집무실 곁 회의실. 다나카는 불빛으로 휘황한 동경의 밤거리를
내다보고 있었다. 주요 임원들은 조용히 앉아 기획본부장의 브리핑을 듣고 있었다.
"…하버드대 경영학과를 수석으로 졸업했고 회사 경험은 처음입니다. 햇병아리라는 말이죠.
다만 아버지가 국제 거상으로 알려진 공설암이라는 게 마음에 걸립니다.”
"공설암?"
"네, 공설암입니다."
"우리가 다른 기업들 인수할 때 사사건건 훼방을 놓았던 그 공설암이 맞아?"
"네. 맞습니다."
기획본부장의 설명에 다른 임원들도 적잖이 수군거렸다.
"그런 배경의 여자가 뭣 때문에 대일 전자엘 들어간 거지?"
"죽은 대일 회장과 공설암이 친구였습니다.
죽은 변승우 회장이 전자를 살려달라고 부탁했던 모양입니다."
"살려달라? 살려달라고?"
다나카의 얼굴에 음흉한 미소가 그려졌다.
"지시했던 다른 문제들 말해 봐."
기획본부장이 자리에 앉자 홍보이사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회장님께서 아시다시피 한국에서 대일의 점유도는 1%도 안됩니다.
우리가 합병할 경우 한국 언론의 주목을 받을 확률은 미미하다는 말입니다.
사전 언론 작업은 이미 시작한 단곕니다."
"미디어는 금방 달구어졌다가 금방 식어. 문제는 책이야.
한국 놈들은 근본부터 바꿔져야 해, 근본부터. 그 쪽은?"
"아직…."
다나카가 창을 등지고 홱 돌아섰다. 회의실 안이 찬물을 끼얹은 듯 고요해졌다.
"너 뭐하는 놈이야. 내가 네 놈한테 왜 월급을 주는데.
네 놈 하나한테 주는 돈이면 참신한 애들 백 명은 써. 너 지금까지 뭐했어?"
"한국에서 섭외할 마땅한 출판사들을 찾고 있습니다."
"찾아? 이제서?"
다나카가 손가락을 들어 가볍게 저었다.
"이번 달까지 한국에서 최소 10종은 책을 출판하도록 해. 붐을 만들란 말이야."
다나카는 차갑게 말했다. 일본의 기업이 한국의 기업을 인수 합병하는 걸 당연하게
받아들이는 분위기를 조성한다는 게 다나카의 전략이었다. 그 핵심에 책을 두었다.
엄청난 홍보비를 부어 기업의 적대적 인수 합병이라도 당연하다는 인식을 심어주자는 것이었다.
그건 유대인의 다국적기업이 알짜 기업들을 잡아먹는 방법 중 하나이기도 했다.
길게는 50년을 두고 50년 전부터 사전 작업을 하는 실로 무서운 기업가들이었다.
다나카는 그런 그들을 존경했다.
홍보이사가 조용히 자리에 앉았다. 그는 테이블 밑에서 다리를 부들부들 떨었다.
잠시 후 그의 비서가 옆문을 열고 들어왔다.
"회장님, 전화 왔습니다. 홍 마담이랍니다."
"다들 나가! 이번 주에 보고서 완성해."
언제 그랬냐는 듯 다나카의 목소리는 부드러웠다.
"…이번 주말에 저희 가게 중요한 손님들이 오시게 되어 있어서 회장님께 못 갈 거 같아요."
"그래? 아쉽군. 이번 주말에 같이 유럽이나 다녀올 생각이었는데.
홍 마담도 사업이 있으니 어쩔 수 없겠지. 그럼 다음 주말이나 봐야겠네."
"회장님, 죄송해요."
"아냐. 얼른 한국에서 사업을 하나 해야 내가 한국엘 자주 나갈 텐데."
"그러게요."
홍은수와 통화를 끝낸 다나카는 장식장으로 다가가 술병을 꺼낸 후 잔에 술을 따라 단숨에 비웠다.
"나보다 더 중요한 손님이 있다는 말이지."
다나카는 혼잣말을 중얼거리며 몇 차례 더 잔에 술을 따라 마셨다. 마지막으로 잔을 비운
다나카는 잔을 소리나게 테이블 위에 내려놓았다. 그 바람에 테이블 유리에 금이 갔다.
"내 사랑이 우습다는 건가?"
다나카는 숨을 크게 몰아쉰 후 창가로 다가갔다.
마음이 진정되었는지 그의 얼굴에 희미하게 미소가 번졌다.
다음 날, 한국의 오탁번의 본사 집무실에는 기획 3팀의 실장이 창백한 얼굴로 들어왔다.
"말레이시아 인부였던 칼 쟈삼이라는 놈한테서 연락이 왔습니다."
서류를 들쳐보던 오탁번이 고개를 들었다.
"그 놈이 왜?"
"협박을 해왔습니다."
"협박? 충분히 주지 않았나?"
"필리핀으로 가라고 했는데 거기서 도박에 손을 댄 모양입니다."
"일처리를 왜 그렇게 해! 그런 놈한테 왜 휘둘리나."
"죄, 죄송합니다. 멍청한 놈인 줄 알았는데…."
"뭘 요구하는 거야?"
"좀 애매한 이야긴데…. 본인과 가족들이 한국에 정착할 수 있게…."
오탁번이 책상을 내려쳤다.
"그게 말이나 되는 이야기야? 그 놈이 한국에 들어오면 가만히 있을 거 같아?
세상 어느 나라 놈들이든 다 똑같아. 뭐든 한번 쉽게 얻기 시작하면 그걸 버리지 못하는 게
인간의 속성이란 말이야. 그리고 비밀이란 영원히 간직해야 비밀이겠지. 알아서 처리해."
"알아서 처리하란 말씀은?"
"자넨 앞뒤가 그렇게 꽉꽉 막혔나? 변양수가 지금 어디에 있는가?"
기획실장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변양수 사장님께서는 그러니까 돌아가신 지가···. 아, 네 알겠습니다."
기획실장이 머리를 조아렸다.
"나가 봐. 결과 보고하고. 일을 어떻게 처리하는 거야."
기획실장이 부리나케 빠져나가자 오탁번은 의자 등받이에 몸을 맡겼다.
필리핀 케손시티. 수도인 마닐라 북동쪽에 자리 잡은 작은 도시다.
그곳 마사지 하우스에서 엎드린 채 마사지를 받고 있는 근육질의 남자가 있었다.
오일을 잔뜩 발라 번들거리는 그의 등 위로 까무잡잡한 여자의 손길이 지나갔다.
남자는 긴 머리에 콧수염을 기르고 있었다. 그의 어깨에 긴 칼자국이 하나 나 있었다.
그가 고개를 반대로 틀었을 때 누군가 마사지 룸으로 들어서고 있었다.
"댁이 반초 리요?"
마사지 룸으로 들어서던 남자는 유창하게 영어를 구사했다.
마사지를 받고 있던 남자가 손을 들자 마사지 하던 여자가 물러났다.
"누구시오?"
"댁이 솜씨가 좋다는 이야기를 듣고 찾아온 겁니다."
"솜씨? 무슨 솜씨?"
"다 알고 왔소."
남자가 마사지 침대에서 일어나 앉았다. 벗은 그의 몸은 근육덩어리였다.
"나를 어떻게 찾았소?"
"마닐라 황제 나이트라는 곳의 영업실장인 쟈니가 당신을 소개했소."
마사지를 받고 있던 남자는 그때까지도 선글라스를 끼고 있었다. 그가 선글라스를 벗었다.
그는 놀랍게도 다름 아닌 이강재였다. 이강재를 만나러 온 남자가 명함을 내밀었다.
명함에는 쟈니의 이름과 연락처 그리고 그의 사인이 적혀 있었다.
"용건이 뭐요?"
"당신이 깨끗하고 깔끔하게 일 처리를 한다고 해서 찾아온 겁니다. 뒤 끝도 없고….
사람을 하나 정리 할 수 있을까요?"
"먹물 먹은 사람들은 그렇게 말합니까? 쉽게 말해요. 죽여 달라는 겁니까?"
남자가 고개를 끄덕였다.
"말로 하란 말입니다."
"네 죽여주시오."
"누굴?"
남자가 사진을 내밀었다.
"칼 쟈삼이라는 놈인데 마닐라에 가면 쟈니가 찾아줄 겁니다."
남자가 봉투를 내밀었다. 이강재는 봉투 안을 뒤졌다.
"쟈니한테 들었을 텐데, 난 5만 달러 아니면 안 움직여. 착수금은 2만 달러이고."
"너, 너무 세지 않소. 마닐라 뒷골목에선 만 달러면 너도나도 하려고 난리요."
"그럼, 그 놈들한테 해. 나하고 협상하려 들지 마."
이강재는 봉투를 남자 발 아래 툭 던지고 마사지 침대 위에 엎드렸다.
남자가 마사지 룸에서 잠시 사라졌다가 들어왔다.
남자는 어디론가 전화를 걸어 작은 목소리로 통화했다.
'상무? 회사 차원에서 사람을 죽여?'
이강재는 엎드린 채 문 쪽을 쳐다봤다. 남자는 이내 마사지 룸으로 들어왔다.
"싼 게 비지떡이라고 생각하셨나?"
남자는 다시 봉투를 꺼내 이강재의 얼굴에 내밀었다.
봉투 속을 확인한 이강재는 그제야 자리에서 일어났다.
남자는 사고로 처리해야한다는 단서를 달았다
전략영업부는 초상집이나 다름없었다. 재고를 파악하는 일이며 새로운 활성화 기획안도 무용지물이
되었고 고길수의 미래를 위한 제안 역시 물 건너 간 일이 되어버렸다.
우선 피해액을 많이 받아내는 게 전략영업부의 업무가 됐다.
변강호가 하루 종일 손해사정인과 소방관들에게 허리를 굽혀가며 장부상의 재고량에
대해 설명한 후 서울로 돌아왔다. 손해사정인들이나 소방관들은 일체 변강호의 접대를 받으려 들지 않았다.
사정해도 밥 한 끼 같이 먹지 않았다. 세상이 많이 청렴해지긴 했지만 이런 순간 그게 더 불안한 요소였다.
"입사한 지 얼마나 됐다고…. 우리는 어떻게 되는 거죠?"
이소정이 누구에게랄 것도 없이 물었다. 하지만 아무도 대답할 수 없는 사안이었다.
임달호는 창밖을 내다보며 끊었다던 담배만 열심히 피워댔고,
고길수는 그래도 컴퓨터 앞에 앉아 뭔가를 열심히 작성했다.
변강호도 허탈한 심정으로 넋을 놓고 앉아 있는데 성대근이 사무실로 불쑥 고개를 내밀었다.
변강호를 발견한 그가 손짓을 했다.
"이천 공장 화재 말이야, 안됐다는 말 밖에 못하겠다."
성대근이 변강호에게 커피를 뽑아주며 위로했다. 입사한 후 한 번도 커피를 뽑아준 적이 없었던
성대근이었고 위로라는 건 생각할 수 없는 그였다.
"그걸 확인하러 왔냐?"
변강호는 그가 얄미웠다.
"그게 아니라, 저기… 미정씨가 무슨 다른 말 안하든?"
웃음이 나왔지만 웃을 수 있는 처지가 아니었다.
"무슨 말? 아하, 그거."
성대근이 다급하게 변강호의 입을 막았다.
"사실은 말이야, 어제 내가 너무 과음을 했던 모양이야. 스트레스도 심한데다가 말이야.
너도 잘 알잖아. 내 물건이 얼마나 튼실한지 말이야."
"어떤 여자가 내게 그러더라, 말랑말랑하고 쉽게 꺼져버리는 고무대포보다는 짧지만 강한 대포가 더 낫다고."
성대근의 얼굴에 초조함이 뚝뚝 묻어났다.
"강호야, 그 동안 내가 너 놀려 먹은 거 정말 미안하다.
그러니까 이번에 있었던 일은 비밀로 해주면 안 될까? 나 사실은 열심히 병원도 다니고 비방도 찾으며
노력하는 데도 그게 영 잘 안되더라. 내 노력을 가상히 생각해서 한번 봐주라."
성대근이 간절하게 빌었다. 변강호는 우쭐했다.
"지금 그런 게 중요하냐. 우리 부서가 난리가 났는데."
"너무 상심하지 마. 보상액이 나오면 다시 일으켜 세우면 되지 않겠냐. 넌 잘 할 거야.
이럴 때 일수록 직원들 간의 단합이 중요한 거다."
"그럼, 우리 부서원들 단합하게 저녁이라도 한 끼 내 봐. 그래도 너는 머리가 되잖아.
이 난관을 헤쳐 나갈 아이디어도 좀 주고."
"저녁을 사라고?"
"싫음 말고."
"다, 당연히 사야지."
성대근은 마지못해 변강호의 제안을 받아들였다. 그렇게 해서 화재를 극복하기 위한 단합대회가 시작되었다
남자의 이야기를 듣던 이강재가 이를 갈았다. 그의 턱이 씰룩거렸다.
그 모습이 강하고 차가워보였다.
"당신 연락처."
"나한테는 쟈니를 통해서 연락하면 됩니다. 잔금도 쟈니를 통해 전달될 것이고요."
"그럼, 쟈니 그 놈하고 거래해. 난 안 할 테니까."
남자가 마지못해 명함을 내밀었다.
"마, 마닐라 호텔 704호에 묵고 있소."
"일 끝나면 연락하지."
남자가 나간 후 명함을 살피던 이강재의 얼굴에 씁쓸한 미소가 번졌다.
'여기에 와서까지 이 대일 놈들하고 엮이는군. 나와 전생에 무슨 악연인지.'
남자가 사라진 뒤 이강재는 샤워실로 향했다. 잠시 후 수영복 차림의 여자 둘이 들어와
이강재의 벗은 몸 위에 비누칠을 했다. 비누칠을 하는 여자들의 탄력적인 구릿빛 젖가슴이
이강재의 눈에 들어왔다. 이강재는 두 여자를 한꺼번에 끌어안았다. 두 여자가 깔깔거렸다.
이강재는 여자들이 입은 수영복을 벗겨버렸다.
그리고는 두 여자의 젖가슴을 번갈아 가며 격렬하게 빨았다.
마닐라의 한 지하 사설 도박장. 도박장은 담배 연기로 꽉 차 있었다. 이강재는 두 시간 전부터
포카를 치고 있는 칼 쟈삼을 주시하고 있었다. 그는 슬롯머신을 돌리고 있었다.
칼 쟈삼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돈을 딴 모양이었다. 그의 얼굴이 밝았다.
이강재는 은밀히 그의 뒤를 따랐다. 칼 쟈삼은 한참을 걷다가 이미 문 닫은 시장 골목 안으로
들어갔다. 간간이 사람들이 오갔다. 시장 골목을 지나자 허름한 집들이 게딱지처럼
모여 있는 동네가 나왔다.
칼 쟈삼이 들어간 집 역시 겨우 방 한 칸 딸랑 있는 집이었다.
살펴보니 부인과 제법 큰 딸 아이가 있었다. 부인에게 돈을 건넨 후 칼 쟈삼은 술을 마시기
시작했다. 이강재는 끈기를 갖고 기다렸다. 점점 술에 취해가더니 그는 조금씩 변하기 시작했다. 처음엔 부인에게 손찌검을 하더니 마지막엔 딸에게도 손을 댔다.
"재수 없는 것들! 네 년들이 나한테 마귀처럼 달라붙어 있어서 돈을 잃은 거야. 알아?"
칼 쟈삼은 이성을 잃어버린 듯 모녀의 옷을 찢어발기며 주먹을 휘둘렀다.
화가 불끈 솟았지만 이강재는 참았다. 남의 나라에서 더군다나 표적이 된 인물의 가정을
동정할 필요는 없었다. 어차피 죽을 사람은 죽어야만 했다.
잠시 후 칼 쟈삼이 집에서 나왔다.
"어이, 칼!"
"누구야?"
"누군 누구야. 존 친구지. 너 여기 살았어?"
이강재의 영어 실력은 수준급이었다.
"존? 아, 존. 그런데 내가 널 봤나?"
"짜식, 도박장에서 만난 것만 해도 벌써 수백번이겠다."
"그래, 그런데 너는…."
"반초잖아. 반초."
"아, 맞다 반초. 그런데 여긴 무슨 일로?"
이강재는 칼 쟈삼의 어깨에 다정하게 어깨동무를 했다.
칼 쟈삼은 술기운 때문인지 이강재를 전혀 경계하지 않았다.
이강재는 그 와중에도 주변을 살폈다.
두 사람을 눈여겨보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이강재는 이런 순간이 오기까지 삼일 가까이 기다렸다.
"집에 들어갔다가 와이프가 돈 다 털렸다고 지랄하길래 맥주나 한잔 하려고 나오는 길이야.
돈만 밝히는 그 놈의 여편네 때문에 내가 매일 돈을 잃는 거야. 같이 갈까?"
"맥주? 그러지 뭐."
칼 쟈삼은 동지를 만났다는 기분 때문인지 이강재를 쉽게 따라왔다.
이강재는 시장 골목 끝에 주차해두었던 차로 그를 안내했다.
"어디가?"
"한국 년들 있는 술집이 있는데 애들이 삼삼하거든. 이왕이면 거기 가서 한잔 하자고.
거기 받을 돈이 좀 있거든. 돈 대신 술로 먹지 뭐."
코리안이라는 단어에 칼 쟈삼의 얼굴에 회색이 돌았다.
이강재는 차에 미리 준비해 두었던 맥주 캔 하나를 그에게 건넸다.
자신도 운전을 하며 맥주를 마셨다. 이강재는 그가 떠드는 말에 대꾸를 해주었다.
10분 남짓 흘렀을까. 칼 쟈삼은 앉은 자리에서 그대로 고꾸라졌다.
이강재는 마닐라 부두 쪽 출입제한구역 쪽으로 차를 몰았다.
수출입 지역이라 일반인들의 출입이 금지된 곳이지만 어디에나 개구멍은 있는 법이다.
부두의 끝자락 한적한 곳으로 차를 몰고 간 이강재는 그를 운전석에 앉힌 후 시동을 걸었다.
기어를 넣고 핸드브레이크를 풀기 전 뒷좌석에 시너를 붓고 불을 붙였다.
거의 동시에 브레이크를 풀고 차에서 뛰어내렸다.
칼 쟈삼을 태운 차는 바다를 향해 천천히 달려갔다.
이강재는 칼 쟈삼이 잠이 드는 순간부터 마지막 순간까지 디지털 카메라에 담았다.
그 안에는 이강재에게 부탁을 하던 남자의 모습도 담겨 있었다.
마사지를 하던 여급들이 찍은 것이었다.
이강재는 불길에 휩싸인 채 바다 속으로 들어가는 차를 오랫동안 지켜보았다.
한적한 부두 쪽이라 쉽게 발견되지 않을 터였다.
이강재는 담배를 꺼내 문 후 주머니에서 디지털 녹음기를 꺼냈다. 재생 버튼을 눌렀다.
"…먹물 먹은 사람들은 그렇게 말합니까? 쉽게 말해요. 죽여 달라는 겁니까? 말로 하란 말입니다. 네 죽여주시오…."
칼 쟈삼을 처리해 달라며 찾아왔던 대일 직원의 목소리와 이강재의 목소리가
그대로 녹음되어 있었다.
후텁지근한 바람이 이강재의 목덜미를 스치고 지나갔다.
'양 사장은 전화 한 통 없군. 초선이가 보고 싶다. 하지만 아직 때가 아니다.
이제 몇 건만 더하면 작은 술집 하난 할 수 있게 된다. 그때 가서….'
이강재는 바다를 향해 담배꽁초를 튕겼다. 날아가던 담배꽁초가 물 속에 빠지더니 픽 꺼졌다.
'이젠 나도 당하고 살지 않는다.'
이강재는 주머니에 다시 녹음기를 넣으며 속으로 중얼거렸다.
그는 마닐라로 건너와 정보가 곧 커다란 돈이 될 수도 있다는 걸 깨달았다.
그 후 이강재는 모든 걸 녹음했다. 필리핀 여자와 섹스를 해도 녹음했다.
영어를 할 줄 알아야 속지 않는다는 것도 깨달았다.
그 후 이강재는 미친 듯 영어 회화에 매달렸다.
이강재는 칼 쟈삼을 처리해 달라고 찾아왔던 남자의 명함을 꺼내들고 불을 붙였다.
'…분명 상무라는 놈한테 지시를 받는 거 같았는데…. 누구지?'
불이 붙은 명함이 바다를 향해 떨어지며 춤을 추었다.
이강재는 주변을 살핀 후 자신의 차를 덮어두었던 천막을 걷었다.
그는 헤드라이트도 켜지 않은 채 부두를 빠져나갔다.
이강재가 케손 시티로 돌아가고 있는 늦은 그 시각, 한국의 대일 전자 본사의 회의실에서
공미라와 변강호가 걸어 나오고 있었다. 그 뒤로 황 상무와 다른 직원들이 뒤를 따랐다.
"…일본 출장에서 오자마자 쉬지도 못하게 하고 미안해요."
공미라의 말에 변강호는 손을 내저었다.
"아닙니다. 그럼, 저는 내일 일본에 보낼 샘플 잘 나왔는지 이천 가서 직접 확인하고
바로 일본으로 건너가겠습니다."
"그래요, 변 실장이 수고 좀 해요."
직원들과 일일이 인사를 한 후 변강호는 고물차를 끌고 자신의 오피스텔로 향하고 있었다.
30분 남짓 차를 달려 오피스텔 주차장으로 막 진입하려는 순간 오피스텔 정문 입구에서
낯익은 걸음걸이의 여자를 발견했다.
무심코 지나치다가 변강호는 브레이크를 밟았다. 혹시, 정희? 변강호는 눈을 비볐다.
아무리 봐도 나정희였다.
변강호는 비상등을 켜 놓은 채 차에서 뛰어내려 정문 쪽으로 달려갔다.
변강호가 대로변의 인도로 막 접어드는 나정희의 팔을 잡았다.
"정희야!"
몸을 돌려세우던 나정희는 깜짝 놀랐다. 변강호 역시 그녀만큼 놀랐다.
그녀는 늦은 밤인데도 얼굴을 반쯤 가린 검정색 선글라스를 끼고 있었다.
가로등 아래 비친 그녀의 오른쪽 눈가 밑이 푸르죽죽했다.
"강호씨…."
"나 만나러 온 거야?"
변강호는 너무도 반가워 그녀를 금방이라도 끌어안을 태세였다.
"실은 이 부근에 일이 있어서···. 강호씨가 이 부근에 산다는 건 알았지만…."
"저 뒤에 오피스텔에 살아. 우리 어디라도 좀 들어가자."
"안 돼. 가 봐야할 데가 있어."
"그런데 이 시간에 선글라스를 왜 쓰고 있어. 눈 밑은 또 왜 그래?"
변강호는 무의식적으로 손을 뻗어 그녀의 선글라스를 벗기려했다.
그러자 나정희가 다급하게 그의 손을 막았다.
"아, 아무 것도 아냐. 사실 나 무지 바쁘거든. 나, 나중에 연락할게."
나정희는 변강호의 손을 떼어냈다.
"나중에? 나중에 언제?"
변강호의 말을 들었는지 못들었는지 나정희는 바람을 일으키며 거리의 사람들 사이로
서둘러 숨어들었다. 그녀를 따라가려던 변강호는 요란하게 울리는 경적 소리에
차를 세워둔 곳을 쳐다봤다. 오피스텔 주차장 입구에 차를 세워둔 터라 들어가고 나오는
차들이 얽혀 경적을 울려대고 있었다.
'도대체 무슨 일이 있는 거니?'
전략영업부 회식의 모든 비용은 성대근이 결제하기로 했다.
대일그룹의 한 동료로서 그리고 변강호의 동기로서 위로 차원이라는 명분이었다.
부서원들은 성대근의 등장을 환영했다. 그러나 단합대회라기 보다 송별회 같은 분위기가 되고 말았다.
부서원들은 우울한 심사 때문에 술만 들이켰다.
위기를 느낀 임달호가 가장 먼저 취해 집으로 돌아갔고 고길수도 취해 곯아떨어지고 말았다.
성대근은 신정하가 마음에 드는 지 그녀의 시중만 들었다. 신정하도 그가 파워 있는 기획1부 팀장이라
싫지 않은 눈치였다. 이소정은 외삼촌과 약속이 있다며 일찍 자리를 뜬 상태였다.
어느 순간 성대근이 신정하와 함께 사라졌다.
남은 사람은 변강호와 맹순희 둘 뿐이었다. 맹순희는 얼굴 색 하나 변하지 않고 술을 마셨다.
별 말도 없었다. 변강호는 부서의 폭탄이랄 수 있는 그녀와 마주앉아 술 마시는 일이 곤혹스러웠다.
"이제 그만 우리도 가죠."
변강호가 의자에서 일어났지만 그녀는 별 반응이 없었다.
"맹순희씨!"
어? 변강호는 그녀의 얼굴을 가까이에서 들여다보았다. 이런, 그녀는 눈을 뜬 채로 인사불성이었다.
폭탄다운 모습이었다. 난감했다. 그렇다고 사나이 체면에 그냥 두고 갈 수도 없었다.
'말없이 술만 처먹더니만.'
변강호는 투덜거리며 그녀를 업었다. 무거웠다.
웨이터가 도와준 후에야 겨우 업을 수 있었다. 맹순희의 집을 모르니 어쩔 수 없이 근방의
모텔을 향해 맹순희를 업고 걸었다. 인사불성이 된 맹순희가 변강호의 등 뒤에서 숨을 내쉬었다.
맹순희의 숨결이 변강호의 귓가를 간질였다.
변강호 최대의 성감대가 바로 귓불이란 걸 맹순희가 알았을 리는 없었다.
그런데도 맹순희는 계속해서 변강호 귓가에 대고 숨을 쌕쌕거렸다.
변강호는 오금이 저리고 치골이 두근거렸다.
맹순희의 숨이 거칠어질수록 변강호 다리에 힘이 빠졌다.
머릿속이 아찔하고 몸이 삽시간에 뜨거워졌다. 물건이 염치없이 서서히 일어서는 듯했다.
'어, 어. 이거 이러면 안 되는데….'
변강호는 흥분이 되어 어떻게 방까지 올라왔는지 알 수 없을 정도였다.
맹순희의 입김이 계속해서 귓불을 간질이는 바람에 정신이 하나도 없었다
. 모텔 방문을 열고 들어선 순간 맹순희가 꿈을 꾸는 지 변강호의 귀를 덥석 물고 빨았다.
아! 변강호는 그만 이성의 벽이 무너지는 걸 느꼈다. 변강호는 자신도 모르게 맹순희를 침대위에 눕히고
짐승처럼 달려들었다. 무방비 상태의 맹순희가 미소를 지으며 변강호를 맞이했다.
변강호는 마법에라도 걸린 듯 정신없이 맹순희의 옷을 벗겼다.
옷을 입고 있을 때와 달리 통통하며 희고 부드러운 살결이 나타났다.
고대 희랍의 그림 속에 등장하는 그런 성스러운 여성의 나체였다.
'모든 게 당신이 내 귀에 바람을 불어 넣은 잘못입니다.'
넉넉한 그녀의 중심으로 변강호가 진입할 무렵, 맹순희가 잠꼬대를 했다.
"아… 길수씨, 행복해요. 정말 행복해요."
'으잉? 고길수? 맹순희가 고길수를 좋아하는구나?'
순간 변강호는 그녀의 팔을 슬그머니 풀고 서서히 물러났다.
그런 다음 그녀의 옷을 다시 입히고 조용히 모텔 방을 빠져나왔다. 짐승이 될 수는 없었다
첫댓글 즐감하고 감니다
즐~~~감!
즐독하였습니다
즐독입니다
즐감합니다
감사합니다.
이거 앞전에 본 걸 엎었나요 또 나오네~~~
잘보고갑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