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랑시
한경용
둑방길 따라 축 처진 꼬리 뿌옇게
뒷발바닥 보이면서 길을 잃다
눈발 속 뛰는 아이들이 부러워 구부정
곧 나를 찾는 누군가를 기다리다
날아간 목소리 유랑이라 등을 내밀다
남겨진 물 고량주만큼 냉독하다
실성한 사람처럼 거리만 노려본다
말을 걸고자 한 이들 내 앞에서 침울
칙칙한 대지 허상의 눈동자들
그리워하지 않는다
붉으레 푸르레 떠돌다가
물푸레나무 속에 숨어 몸을 씻다
물들이다 만 하늘이 꺼지고
불빛이 고기처럼 익어가는 골목마다
수선한 리듬이 술렁인다
휘어진 밤의 건물 속에서
바삭한 이불과 침대만이 그려지고
습격한 한 개의 빵과 초코우유가 고프다
종로의 기와지붕 아래 낮잠을 즐기다가
수치를 삼킨 눈으로 어슬렁거리다가
지네주(酒) 파는 흰 수염 할아버지를 보자
장미여관 담벼락에 숨어 오줌을 누다
나를 부르는 친절이 무서워
햇살도 구겨 넣은 뒷골목에 꼼짝없이 갇힐 뻔하다
영원 장의사 유리창에 붙은 안내서를 보다가
짊어진 채무 고지서를 들고
세무서 쪽으로 한 발 한 발 걷는 아저씨를 따라가다
쪽방촌 할머니의 안내를 받다가
한 장 한 장 세월 날리는
목구멍 하나 버거운 노숙자와 놀다
난 도망간다 궤짝 속의 아저씨가 차에 치인 후
난 숨죽인다 미화원의 마대가 무서워
희미한 불빛 터널 안에서 파르르 떨다
되밀려 오는 바람 떠밀려 가는 눈발
어둠이 새벽으로 까마귀떼처럼 날아갈 때
야멸찬 경적이 뱉어낸 신음으로 넘어지다
복수초의 탄식이 노래지며 가는 풀섶은
안나푸르나 봉으로 가는 등정
목청들이 마스크를 한 채 돌아서고
폐차 속에서 장송곡이 흘러나오자
고엽들이 썩은 향내를 풍긴다
난 보다 설목 위 은빛 햇살을
강아지가 먼저 무심을 욕하고
광케이블 매설지역이란 표지를 비석 대신 놓아 준 온정은
나의 길에 핀 꽃
이제 바람은 나의 출항을 다독이고
낙엽은 내게 날개를 달아준다
쏘다니는 나를 보던 눈동자들
그대들의 손바닥에서 어르던 부름들
달아난 이름은 허공을 굴리고
핏자국에서 붉은 별들이 울음을 토할 때
냇물이 떠나버린 천변에서
나는 낙엽 더미를 이불 삼아 어떤 안식을 노래할까
뒷골목은 먼지의 순장으로 덮여 있다
북극 바람은 모태에 신전을 두고 간다
레미콘 아래에는 발목이 설계되다
유미주의 시인의 입술에서
오독의 싯귀만 방울 소리로 흘러나오고
귓가엔 고드름이 걸린다
등뼈가 진흙 속에 스며들 때
주홍빛 하늘이 가물거리고
어린 울음소리 파랑으로
나의 수염은 비로소 유랑의 길을 떠난다
현대시 2015 10 월 호
출처: 문학의숲 연지당(硯池堂)사람들 원문보기 글쓴이: 김명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