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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일그룹 본사 회의실. 변장수는 문자 메시지가 들어온 휴대폰을 열었다.
'회장님, 죄송해요. 그 동안 몸이 아파서 연락 못 드렸네요. 오늘 저녁에 오피스텔에 계시나요?
사모님하곤 별 일 없으셨는지. 신정하.'
변장수는 메시지를 확인한 후 회의실에 모인 임원들을 둘러보았다. 그들은 열띤 논쟁 중이었다.
'마누라랑 무슨 일이 있긴 있었던 모양인데.'
변장수는 신정하를 머리에 떠올리자 괜히 흥분이 됐다.
"…그게 말이 안 된다는 겁니다.
지금 중국 인건비가 천정부진데 저가의 옷을 생산해서 뭘 어쩌겠다는 겁니까."
"이사님도 아시잖아요. 중국에 런칭한 고가 의류들이 다 망했어요.
애들 옷 좀 팔렸다고 해서 다 된 게 아니란 말입니다."
"당신은 그러니까 진부하다는 말을 듣는 겁니다. 도전을 해야죠, 도전을.
언제까지 우물 안의 개구리로 살 겁니까? 이제 중국에다가 물건 팔아먹지 못하면 장사 못해요."
"그걸 누가 모릅니까. 이번엔 조심해서 나가자는 겁니다.
브랜드 한 개만 런칭해도 충분하다는 거죠."
"브랜드 한 개로 뭘 하겠다는 겁니까?
외국의 대형 브랜드들 속에서 살아남을 수나 있을 거 같습니까?
처음부터 지지부진하게 시작하다간 죽도 밥도 안돼요."
서로 자신들의 주장이 옳다고 떠들어댔다.
그들은 나름대로 시장조사한 자료들을 근거로 말하고 있었다.
변장수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공장 물색하고 브랜드 세 개로 정리해요. 이번에 우리 의류에 사활을 걸어봅시다.
더 늦어지면 들어갈 틈이 없어요."
"저, 회장님, 우린 성인복에는 경험이 부족합니다."
"이번 기회에 경험하는 걸로 합시다. 고급화로 나가세요. 저가 덤핑 물건을 세계에 쏟아내는
중국이지만 그들도 실은 고가 물건을 원한다고 봅니다. 대신 월급을 몽땅 털어 넣어도
안 아까울만한 브랜드를 만드세요. 본사 차원에서 적극적으로 지지할 테니까."
회의를 마무리 지은 변장수는 회의장을 빠져나오며 신정하에게 전화를 걸었다.
"회장님."
"그래, 요즘은 회사 나오나?"
"네. 어제부터 나왔어요."
"너, 내일부터 비서실로 올라와라. 그렇게 조치해 놓을 테니까."
"사모님이 아시면…."
"우리 마누라 만났냐?"
"전화만 한번 왔었어요. 제가 누구냐고."
"그래서?"
"회장님을 사랑하는 직원이라고…."
변장수는 나긋나긋한 그녀의 목소리에 오금이 다 저렸다.
금방이라도 달려가 그녀를 안아주고 싶은 심정이었다.
"있다가 오피스텔로 와. 보고 싶구나."
뱀의 껍질처럼 미끈하면서도 차가운 피부가 변장수의 손길이 닿자마자 금방 달아올랐다.
"회장님…."
"우리 마누라 때문에 병가를 낸 거야?"
"꼭 그런 건 아니지만…."
"염려하지 마. 우리 마누라랑 난 쿨하게 사니까."
변장수는 그녀의 젖가슴을 핥으며 말했다.
"전 회장님께 뭐죠?"
신정하가 느닷없이 말했다.
"뭐?"
변장수가 고개를 들었다. 눈에 넣어도 아프지 않을 아름다운 육신이 변장수의 눈에 들어왔다.
"뭐든 상관없어요. 전 회장님을 사랑하는 것만으로 만족해요."
신정하의 목소리가 울먹거렸다. 변장수는 알몸의 그녀를 끌어안았다.
"조금만 기다려라. 중요한 일이 하나 마무리 되면 평생 내 곁에 있을 수 있게 해줄게."
"전 괜찮아요."
신정하의 손이 변장수의 아랫도리로 향했다.
손은 부드럽게 떨고 있었지만 그녀의 눈은 차갑게 빛났다.
'변장수는 한 여자 오래 못 만나는 작자야.
다 해줄 것처럼 말하지만 신물이 나면 언제 그랬냐는 듯 버리지.
비서실장의 업무 중 하나가 그런 여자들 정리하는 거야. 네 역할이나 충실히 해.
그리고 명심해, 너라는 존재는 나로 인해 존재한다는 걸.'
오탁번의 말이 떠오르자 신정하는 새삼 소름이 돋았다.
신정하는 변장수의 아랫도리를 정성스럽게 애무했다.
"전 그냥 기획실에 있을래요."
변장수의 손이 미끄러지듯 신정하의 사타구니로 들어갔다.
"그, 그럴래?"
'불러올릴 것처럼 말하더니 금방 꼬리 내리네.'
신정하는 조금씩 다리를 벌리며 변장수의 손을 받아들였다.
'언제나 이 늙은이들 굴레에서 벗어날 수 있을까.'
신정하는 낮게 한숨을 내쉬었다.
"걱정 있어?"
신정하의 중심을 향해 머리를 들이밀던 변장수가 물었다.
"아니에요."
"그럼, 흥분해서 그런 거니?"
"네, 회장님하고 오랜만에 이렇게 있으니까 흥분이 돼요."
"짜식, 나하고 하는 게 그렇게 좋으니?"
"그럼요. 어떤 남자도 회장님처럼 못해요."
변장수가 껄껄 웃었다. 그는 신정하의 중심이 충분히 젖은 걸 확인한 후 자신의 아랫도리를
그녀의 여성에 천천히 들이밀었다. 신정하는 감격한 듯 변장수의 등을 부서질 듯 끌어안았다.
이강재는 마닐라 부두에서 오랫동안 서서 북쪽 바다를 바라보았다.
북쪽 먼 곳에 이강재가 가고 싶은 한국이 있었다.
밀려오던 파도가 밀려나가던 파도와 살을 섞은 후 다시 한꺼번에 방파제로 밀려들고 있었다.
칼 쟈삼의 시체는 어제 아침 부둣가 백사장으로 차와 함께 밀려와 발견되었다.
필리핀 인콰이어(inquirer)지 하단에 짤막하게 기사가 실렸다.
'…경찰은 이 사내가 술에 취한 채 차량을 훔쳐 운전미숙으로 바다로 돌진한 것으로
결론을 내렸습니다….'
이강재는 신문을 한번 더 살펴본 후 마닐라 호텔로 향했다.
이강재는 쫄티에 청바지 차림이었다. 머리카락은 치렁치렁했다.
옷 밖으로 드러난 살은 구릿빛으로 번들거렸다. 게다가 그는 검정색의 선글라스를 끼고 있어
누가 봐도 필리핀 히피처럼 보였다. 이강재는 704호 앞에 서서 벨을 눌렀다.
"반초요."
잠시 후 문이 열렸다. 남자가 손에 신문을 들고 있었다.
"잔금은?"
남자가 종이봉투를 건넸다. 만 달러씩 세 뭉치가 들어 있었다.
"한 가지만 묻겠소. 한국 사람이 왜 필리핀 사람도 아니고 인도네시아 사람을 정리해달라고
부탁하지? 그것도 시장의 불량배나 다름없던 놈들을?"
"그런 건 당신이 알바 아니오."
남자의 목소리가 차가웠다.
"우리 계산은 끝난 거 같은데…."
남자가 이강재를 재촉했다.
"필리핀에서 곤란한 일 생기면 이 반초를 찾아요. 내가 한국에 놀러가서 전화하면 반겨주시려나? 장영박 실장님!"
이강재는 능글맞게 웃으며 농을 지껄였다.
그러자 장영박은 누가 밀기라도 한 듯 뒤로 몇 발 물러나더니 손을 들어 내저었다.
"그, 그런 소리 하지 마시오. 난 죽을 때까지 당신 만날 일 없소."
"하긴 당신 같은 먹물하고 내가 만날 일이 뭐가 있겠소. 굳바이!"
이강재가 복도로 나오자 문이 요란하게 닫혔다.
그는 황제 나이트클럽을 찾아가 쟈니에게 소개비를 건넸다.
"반초, 한 건 더 할래?"
"뭔데?"
"보이스피싱하는 조직인데 내부에서 분란이 일어난 모양이야.
죽이는 건 아니고 겁만 주면 되는 건데."
쟈니가 사진을 건넸다.
"코리안?"
"한국 상대로 보이스피싱하는 애들이니까. 이 놈들 요즘은 한국 검찰이라고 사기를 쳐도
잘 안 먹혀서 벌이가 시원찮은 모양지만 돈 무지 많이 벌었어."
"코리안은 안 해."
이강재는 더 이상 듣지 않고 나이트클럽을 빠져나왔다. 표적이 사기꾼이고 죽일 놈이어도
한국 사람이면 이강재는 경계했다. 언젠가 한국으로 돌아가 살 미래를 염두에 둔 때문이었다.
케손 시티의 허름한 아파트로 돌아온 이강재는 해 저무는 서편을 바라보며 휴대폰을 들었다.
"여보세요?"
나긋나긋한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누구세요?"
이강재가 전화를 건 사람은 긴자의 양초선이었다.
볼 수 없지만 목소리라도 한번 들어보고 싶었던 것이다.
"이상한 번호네, 당신… 누구…? 혹시 강재씨?"
이강재는 휴대폰을 닫았다. 그리고는 담배를 꺼내 문 후 가늘고 길게 담배연기를 내뱉었다.
그의 얼굴 위로 저녁의 붉은 노을이 바람처럼 다가와 스며들었다.
'기다려 주시오. 내 곧 가리다.'
그 때 이강재의 휴대폰이 울렸다. 한국이었다.
"여보세요?"
"나다."
양동탁이었다.
"별일 없지? 그동안 고생했다. 이번 주 중에 들어와라. 지낼 곳 마련해 놨다."
"사장님, 감사합니다."
"면목이 없다. 네가 들어와 대양을 키워라."
이강재는 자신도 모르게 허리를 굽혀 북쪽을 향해 인사를 했다.
이강재가 한국으로 돌아가기 위해 분주하게 준비를 하고 있는 그 시각 이천 공장에서
돌아온 변강호는 일본으로 건너가기 위해 공항으로 향하고 있었다.
공항에 도착하자마자 변강호는 나정희에게 쉼 없이 전화를 걸었다.
그러나 그녀의 전화기는 여전히 꺼져 있었다.
공항 대합실을 서성거리던 변강호는 서점으로 향했다.
경제 서적 코너를 훑어보던 변강호는 M&A 일색의 책들이 진열되어 있는 걸 보았다.
대형 출판사들이 기업의 합병이 대세라는 내용의 책을 쏟아냈다.
서점 입구에도 스탠드 광고판을 내걸 정도였다.
변강호는 스포츠서울 한 장을 사들고 나왔다. 그는 버릇대로 가장 먼저 운세란을 살폈다.
'웃을 수도 울 수도 없는 인연과 조우한다? 나도 할 소리네.'
변강호는 운세란을 싱겁게 읽었다. 스포츠와 소설란을 훑고 있을 때 동경행 탑승 안내 방송이
흘러나왔다.
변강호는 출국 게이트 쪽으로 걸음을 옮겼다. 출국 게이트 쪽으로 사람들이 모여들었다.
'저 여자 낯이 익은데.'
변강호는 허벅지를 겨우 가린 치마에 풍성한 가슴을 앞으로 내밀고 당당하게 걸어가던
여자를 쳐다봤다.
중간 키지만 늘씬한 몸매에 꽤 볼륨 있는 가슴을 가진 여자였다.
변강호가 뚫어지게 쳐다보자 여자가 고개를 돌렸다.
갈색의 선글라스를 끼고 있던 여자가 선글라스를 머리 위로 올렸다.
아, 그녀는 변강호가 언젠가 호텔로 데려갔던 맹순희였다.
브래지어를 벗기고 팬티를 벗기려는 순간 고길수의 이름을 거들먹거렸던 바로 그 맹순희였다.
그녀는 환골탈태를 한 나비처럼 전혀 다른 사람이 되어 출국 게이트 앞에 서 있었다.
'성기 확대 프로그램?'
변강호는 주변을 살핀 후 모니터에 떠오른 글자를 클릭했다.
'기구나 수술 없이 자연요법과 운동으로 성기 확대가 가능하다.'
변강호는 눈을 크게 떴다. 변강호가 간절히 원하던 바로 그런 정보였다.
'육종용을 복용하라, 열당과에 딸린 기생식물의 하나로… 냉온마사지를 하라,
처음엔 냉수에… 혈자리를 마사지 하라, 부추와 대파를 상시 먹어라. 뭐야, 별거 아니잖아?'
변강호는 신이 나서 내용들을 복사해 자신의 블로그에 옮기고 있었다.
"변 대리님, 바쁘세요?"
이소정이 다가온 것도 모른 채 열중해 있던 변강호가 놀라 자신도 모르게 모니터 화면을 꺼버렸다.
"왜 모니터 화면을 끄세요?"
"매번 모니터가 말썽이야…."
변강호는 얼굴이 빨갛게 달아오른 걸 감추느라 두리번거리며 딴청을 부렸다.
"그런데 무슨 일입니까?"
변강호는 이소정에게 서류를 받아들며 어색하게 미소를 지었다.
"공장 건물이랑 기계까지… 피해액이 15억 6천 7백 4십 만원이나 됩니까?"
변강호가 놀란 눈으로 이소정을 올려다보았다. 최대 80%쯤 보상을 받을 수 있다고
가정한다면 12억쯤 받을 수 있다는 말이었다. 대일 전자 입장에서는 돈 버는 거지만 보험사 입장에서는
억울한 일일 터였다. 손해사정인은 화재로 타버린 재를 근거로 물건 값까지 포함해 최대 보상이 가능한
금액을 6억쯤으로 불렀다.
어느새 임달호가 변강호 곁에 다가와 서 있었다.
"조사 때 틀림없이 20억이라고 불렀지?"
변강호는 고개를 끄덕였다. 몇몇 도둑놈 때문에 보험사가 억울한 돈을 지불해야할 지도 몰랐다.
그렇다고 밝힐 수도 없는 일.
'이 자식은 왜 연락이 없지?'
모두 제자리로 돌아간 후 변강호는 시계를 들여다보며 속으로 중얼거렸다.
이천 공장의 기계나 건물은 규정대로 보상이 이루어질 터였다. 문제는 재고량의 차이였다.
물건 값으로 8억 가까운 돈을 받아내야 하는데 화재로 쌓인 재의 양을 조사한 손해사정인은
고작해야 1억쯤 되겠다며 의심했다. 결국 손해사정인을 우리 편으로 만드는 수밖에 다른 대안이 없었다.
다행인지 불행인지 이천공장의 화재사건을 담당한 손해사정인은 여자였다. 이름은 다주리.
뾰족한 대안이 없어 고민하는 변강호에게 성대근으로부터 전화가 걸려왔다.
"야, 내가 정말 이런 것 까지 해야겠냐? 제발 나 좀 봐주라. 동창들 동원해도 정보가 부족해서
심부름센터까지 동원했다."
성대근은 못마땅한 말투로 엄살을 부렸다.
"그래, 고맙다. 일 해결되면 한 턱 쏠게. 그리고 너 3초라는 거 아무한테도 말 안했다.
나 입 무거운 거 알지? 그리고 우리 신정하씨도 네가 우리 일 도와준다고 하니까 너무 좋아하더라.
너야말로 젠틀맨이라나 뭐라나."
변강호는 성대근을 추켜세웠다. 신정하의 이름이 나오자 성대근의 반응이 확 달라졌다
변강호는 맹순희에게서 조금씩 멀어지며 시선을 다른 곳에 두었다.
왠지 아는 체 하고 싶지 않았다.
"변 선배."
설마 했는데 맹순희가 다가와 스스럼없이 손을 내밀었다.
"어, 어. 맹순희씨. 여긴 어쩐 일로?"
변강호는 능청을 떨며 두리번거렸다.
"아니지, 맹 사장이라고 해야지."
"맹 사장은 무슨…. 오랜만이에요. 지금도 대리예요?"
"아니, 지금은 실장인데…."
"어머, 그래요? 잘됐네요. 다른 동기들 다 승진할 때 대리 달고 있길래 뭐가 모자라나 싶었는데.
호호호!"
늘 분위기 못 맞추고 엉뚱하고 사오정 같았던 맹순희가 아니었다.
전에는 맡아보지 못했던 향수 냄새가 물씬 풍겼다.
"도쿄 출장?"
변강호가 고개를 끄덕였다.
"잘됐다. 심심하던 참이었는데. 저도 도쿄 출장 가는데 같이 앉아 가요."
변강호는 어쩔 수 없이 그녀와 함께 비행기를 탔다.
맹순희는 스튜어디스에게 부탁해 변강호 옆으로 자리를 옮겼다.
'요즘 호국 전자 잘 나간다고 하던데.'
변강호는 얼마 전 경제 신문에서 읽은 기사가 떠올랐다.
맹순희는 다리를 이쪽저쪽 번갈아 올리며 열심히 직원들의 안부를 물었다.
변강호는 눈 둘 곳을 찾지 못해 먼 곳으로 시선을 둔 채 그녀의 질문에 답했다.
"…대일 전자 이제 독립했죠?"
"그렇게 됐습니다."
"본사 지원 없이 버티려면 힘들 텐데, 순환출자가 안되니까 자금 사정도 어려울 테고.
그나마 빌트밥 팔아서 꾸려나가긴 나가나 봐요?"
맹순희의 말투에 가시가 박혀 있었다.
"주력 상품이니까…."
"요즘 같은 세트 시대에 하나 가지고 승부가 날까?"
여자의 변신은 소름끼쳤다. 둔하고 모자라 보이던 맹순희가 이처럼 세련된 여자로
나타날 줄은 상상도 못했던 일이었다. 순발력과 독기까지 지니고 있었다.
"한 가지 물어봅시다. 호국 전자 사장 따님이 왜 대일에 들어온 겁니까?"
변강호는 직접적으로 물었다.
"그냥 직장 다닌 거예요. 우리랑 상황이 비슷한 델 다녀서 문제점들을 캐치해보자는 거였죠.
변 실장님 설마 넘치는 애사심 때문에 물어보시는 건 아니겠죠?"
당당하게 말하는 맹순희 때문에 오히려 변강호가 당황했다.
"요즘 회사 오래 다녀야 10년이라 애사심 같은 건 없을 테고…."
맹순희는 변강호 쪽으로 몸을 기울였다. 변강호의 어깨에 그녀의 단단한 가슴이 닿았다.
거침없는 스킨십이었다. 예전의 맹순희라면 상상할 수 없는 일이었다.
"애사심이 아니면 뭘까? 배신감? 까르르르!"
그녀는 쾌활하게 웃으며 변강호의 어깨를 잡았다.
변강호는 바짝 긴장이 되었다. 반면 맹순희는 부드러웠다.
"…아시겠지만 요즘 시스템 바꾸지 않고는 살아남기 힘들어요. 직장 생활은 딱 10년이에요.
능력 있는 몇 사람만 남기고 모두 퇴직 시키는 게 그 사람들이나 회사나 득이 되죠.
우리 호국은 이미 그런 시스템으로 굴러가고 있어요. 그래서 매출이 확 늘기도 했구요.
젊은 피를 수혈해야 장사가 잘 되거든요."
맹순희는 대일도 개혁을 해야 한다는 뜻으로 쉼 없이 말을 늘어놓았다.
"대일은 너무 늙었어요."
"전자는 참신합니다."
"공미라 사장? 흠, 경영이라곤 해보지 않은 여자가 잘 할까요?
부디 잘해서 우리랑 경쟁하면 좋은데. 까르르르!"
맹순희는 변강호가 자신의 허벅지를 쳐다보고 있다는 사실을 즐기는 듯 가끔씩 다리를 벌린 후
한 다리를 반대편 다리 위에 포갰다. 변강호는 그녀의 스스럼없는 행동 때문에 더 긴장이 됐다.
맹순희의 진짜 모습이 어떤 건지 헷갈릴 정도였다.
'이 여자 혹시 보름달 뜨면 여우로 변하는 거 아냐?'
변강호는 입 밖으로 튀어나오려는 말을 밀어 넣은 후 쿡 웃었다.
"왜 웃어요?"
"옛날 직원 생각이 나서요."
비행기가 동경에 도착한 후 맹순희가 먼저 제안을 했다.
"오늘 신주쿠에서 술 한잔 해요. 외국에 나오면 다 동지잖아요. 안 그래요?"
맹순희가 명함을 건넸다.
"네, 그러죠."
"참, 고길수 선배는 잘 있죠?"
"여기 같이 있어요."
"그래요? 그럼 이따가 같이 봬요. 꼭요."
맹순희는 대기하고 있던 세단에 올라탔다. 아마 도쿄지사 직원들인 모양이었다.
변강호도 바로 택시를 잡았다.
그런데 맹순희가 탄 세단이 가는 방향과 대일의 동경 지사 방향이 같았다.
'우연이겠지.'
우연은 돌풍처럼 다가오는 모양이었다.
맹순희가 탄 세단이 멈춘 곳은 다름 아닌 대일 지사가 있는 오피스텔 앞이었다.
'호국 지사도 여기에 있었나?'
변강호는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는 오피스텔에서 멀리 떨어진 곳에서 내렸다.
세단에서 내리는 맹순희를 주시하며 변강호는 편의점으로 들어갔다.
"샤마 비루 200엔입니다."
변강호는 맥주 캔을 들고 창가에 서서 오피스텔 쪽을 쳐다봤다.
맥주를 한 모금 들이켜던 변강호는 놀라 그대로 입 밖으로 맥주를 뿜었다.
오피스텔 앞에서 그녀를 맞이하고 있는 사람은 다빈치 건설의 전략기획본부장인 겐지였다.
겐지와 맹순희는 가볍게 포옹까지 하며 인사를 나누었다.
'도대체 저 여자 뭐야?'
변강호는 겐지와 맹순희가 오피스텔로 걸어 들어가는 걸 맥없이 지켜봤다.
그날 저녁 한국에서는 오탁번이 청자와 함께 변일수의 펜트하우스로 들어서고 있었다.
"조카님 펜트하우스도 만만치 않네. 그런데 꼭 전투에 나가는 작전회의실 같아."
오탁번이 변일수의 펜트하우스를 둘러보며 적잖이 감동한 눈치였다.
오탁번은 세상과 단절하듯 지하로 숨어드는 아지트를 선호하는 반면,
변일수는 한강과 서울 전체가 내려다보이는 전망 좋은 아지트를 선호했다.
변일수는 오탁번의 뒤를 따라 들어온 청자를 못 본 척 했다.
"안 그래도 지금 제 심정이 꼭 전쟁터에 나가는 기분입니다."
"이게 평수가 얼마나 되나?"
"한 200평쯤 될 겁니다."
청자가 흠칫 놀라 낮게 신음 소리를 냈다.
"혼자 쓰긴 너무 넓지 않나? 그건 그렇고, 인사 안 해?"
오탁번이 능글능글 미소를 지으며 청자를 돌아다보았다.
"안녕하세요, 사장님."
"누구시더라?"
변일수가 능청을 떨었다.
"조카님도 참, 우리 집 바에서 본 아이잖아. 청자라고."
"청자라고 해요."
청자는 타이트한 베이지 색 치마에 연한 갈색의 실크 블라우스 차림이었다.
브래지어를 하지 않은 듯 블라우스 가슴 부분에 유두가 툭 불거진 게 변일수의 눈에 들어왔다.
청자는 변일수의 펜트하우스를 둘러보며 입을 다물지 못했다.
'도대체 이 사람들 돈이 얼마나 많은 거야?'
청자는 한쪽 벽면이 유리로 만들어진 창가로 다가갔다. 한강과 서울의 야경이 한 눈에 들어왔다. 바로 코 앞 인 듯 63빌딩이 보였다.
그들은 한강을 정원처럼 내다보이도록 인테리어한 창가에 앉았다.
"조금 전에 김만수 기획이사가 다녀갔습니다."
오탁번이 변일수의 말을 듣고 눈살을 찌푸렸다. 가사도우미가 차를 내왔다.
"오늘은 들어가세요."
가사도우미가 목례를 한 후 사라졌다.
"김만수 그 놈이 무슨 일로?"
"우리 건설이 중국 정부로부터 임대한 땅을 좀 빌리자는군요."
"흠, 공장을 새로 짓겠다? 청두에 있는 공장 얘기를 하던가?"
"청두에 있는 공장이라뇨?"
"이보게 조카님, 적을 이기려면 적을 알아야할 거 아냐. 청두에 대일 의류 공장들 있다는 거
모르시는가? 이번 대지진에 의류 공장들이 초토화돼서 급하게 공장을 찾는 모양이던데."
"그, 그게 청두에 있었습니까? 전 상하이에 있는 줄 알았는데."
"상하이에도 있지. 그건 브랜드가 다른 거고. 아무튼 이번에 장수가 타격을 좀 입을 거야.
이때 조여야하는데…."
창밖을 내다보는 오탁번의 입가에 야릇한 미소가 번졌다.
변일수는 그의 웃음의 의미를 헤아리지 못한 채 덩달아 웃었다.
오탁번은 청자를 남겨둔 채 떠났다.
"상무님께서 그러시는데 사장님 친구 분들이 방송국에 많이 계시다고…."
변일수는 청자의 잔에 비에리 본 시커어스라는 맥주를 따랐다. 청자는 무심결에 잔을 들어 받았다.
"이게 세상에서 가장 비싼 맥주다."
"얼마짜린데요?"
청자가 맹랑하게 물었다.
"저도 술은 좀 알아요."
청자는 자신만만하게 말했다.
"그래도 이건 처음 보는 맥준데…."
"비에리 본 시커어스!"
변일수는 자신의 부를 드러내는 걸 즐겼다.
"얼마짜린데요?"
"500파운드!"
"500파운드면 뭐…."
청자가 눈알을 굴리며 계산하는 듯했다.
"우리나라 돈으로 백만 원 쯤 되지."
"맥주 한 병에 백만 원?"
세상의 모든 여자는 돈에 약하다는 게 변일수의 지론이었다. 청자의 눈빛이 반짝였다.
그녀는 자신이 부의 반열에 오르기라도 한 듯 흥분했다.
"이렇게 좋은 맥주를 따라주셨는데 노래라도 한 곡 들려드려야 하지 않을까요?"
변일수가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청자가 노래를 시작했다. 글루미 선데이였다.
한때 유럽의 많은 청춘을 자살하게 만들었다는 바로 그 노래.
"글루미 선데이구나."
변일수가 이런 노래를 다 알고 있었다니. 청자는 내심 놀라고 있었다.
"너는 도발적이면서도 매혹적이야. 외삼촌의 안목이 이렇게 뛰어난 줄은 몰랐다."
변일수는 맥주로 목을 축인 후 자신의 열정을 견디지 못하고 청자 곁으로 다가가 앉았다.
"이 나이에 내게도 이런 정열이 남아 있었나 싶다."
변일수의 눈이 반짝였다. 그는 자연스럽게 청자의 블라우스를 헤집고 얼굴을 들이밀었다.
처음 그의 머리를 밀어내던 청자는 두 팔을 뒤로 넘겨짚고 그의 입술에 자신의 유두를 맡겼다.
"내가 회장이 되면 문화 산업 쪽으로 우리 대일을 키울 거다.
나는 사실 어려서부터 영화감독이 되고 싶었거든."
"너, 너무 멋있으세요. 상무님도 사장님도."
"너는 글루미 선데이에 나온 일로나 같은 여자야. 아니, 일로나 보다 더 매혹적이지."
더 이상 흥분을 참지 못한 변일수가 그녀의 블라우스 단추를 뜯어 버렸다. 우유보다도
더 흰 젖가슴이 변일수의 눈앞에 쏟아졌다. 청자가 몸을 비틀었다.
"제가 그렇게 좋으세요?"
"너같은 여자는 30년 전에 한번 보곤 처음이야."
신정하에 대해 언급하자 성대근의 목소리가 밝아졌다.
"정하씨는 잘 있냐?"
"응, 아주 잘 있어. 그건 그렇고 얼른 정보 수집한 거 풀어봐."
변강호는 다이어리를 펼치고 메모준비를 했다.
"다주리씨, 홀어머니에 외동딸이고 노처녀야. 그런데 어머니가 한국병원에 유방암으로
수술해서 입원해 있어. 암 전문병원이고 병실은 506호야. 간병인을 쓰는데 6시 퇴근이래.
다주리씨는 저녁 7시에 병원으로 가. 그러니까 6시에서 7시 사이엔 병실에 간병인이 없는 거지.
그리고 그 여자, 굉장히 일에 몰두하는 스타일이라고 하더라. 차는 청색 투싼을 몰고 다니고
커피는 에소프레소를 마시고 일식을 좋아해. 술은 '트라피스트 베스트벨레레'라는 고급맥주를
가장 좋아해. 노래방에선 주로 뽕짝을 부르고. 이 정도면 충분하냐?"
"트라피스트 베스트벨레레가 뭐냐? 뭔 헤벨렐레한 소리 같다."
"맥주 좋아하는 놈이 그런 것도 모르냐. 술 한 잔을 해도 알고 마셔라. 벨지움산 맥준데 더 자세한
건 네가 직접 공부해 봐."
성대근과 통화를 마친 변강호는 한국병원 506호에 동그라미를 친 후 맥주에 대해 검색을 했다.
'트라피스트 베스트벨레레', 맥주 애호가들에게서 최고의 맥주로 인정받은 맥주로 실내온도와
가까운 온도에서 발효시킨 벨지움산의 맥주였다. 다주리는 의외로 감상적인 여자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저녁 6시, 변강호는 한국병원으로 향했다.
506호로 찾아간 변강호는 복도 벤치에 앉아 다주리의 어머니가 나오기를 기다렸다.
7시까지 한번은 병실 밖으로 나올 것이라고 생각했다. 성대근이 보내준 사진 파일을
통해 얼굴은 이미 익혀둔 터였다. 얼마쯤 시간이 지났을까. 변강호는 슬슬 조바심이 났다.
계획대로 진행되려면 이쯤에서 다주리 어머니가 등장해야 했다. 드디어 병실 문이 열리며
다주리의 어머니가 휠체어를 타고 나타났다. 변강호는 기다렸다는 듯 휠체어 앞으로 달려갔다.
"제가 좀 밀어드릴까요?"
다주리의 어머니가 변강호를 쳐다봤다.
"휠체어를 안타다가 타니까 영 불편하네. 한국 병원 직원인가 봐요?"
변강호는 휠체어 손잡이를 잡고 실내 정원 쪽으로 밀고 갔다.
"아닙니다. 저희 어머니가 지금 검진중이라 잠깐 나온 겁니다. 어머니가 아프니까
다른 분들 아픈 게 남일 같지 않네요."
"아, 난 또… 젊은 사람이 친절도 하네요. 그런데 어머니는 어디가 아프신가요?"
"암이세요."
"암? 그거 참. 나도 얼마 전에 암 수술 받았는데. 그래 무슨 암이신데요?"
"유방암이십니다."
다주리의 어머니가 변강호의 얼굴을 빤히 쳐다봤다.
"희한한 인연이네요. 나도 유방암인데…."
"저희 어머니는 다 나으셨고 요즘은 정기검진 받으러 다니시는 겁니다. 지금 검진 받고
계신데 7시나 되어야 나오실 겁니다. 저녁은 드셨습니까?"
"혼자 먹으려니 영 입맛도 없고 아직은 팔도 제대로 못 움직여서 불편하고."
변강호는 속으로 쾌재를 불렀다. 그는 다주리의 어머니를 병실로 모시고 갔다.
그는 스스럼없이 수저를 들고 그녀에게 죽을 떠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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