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40년 당시 세계정세
고구려 : 왕위계승을 둘러싸고 세군과 녹군의 내란이 얼마 끝나지 않았고
백제 :일본에 불교를 전파하였고 (부처님은 당신을 환영합니다. 뿌우~)
신라 : 진흥왕이 즉위할 무렵
중국에서는 급속한 한화의 부작용으로 둘로 쪼개진 타브가치의 후예들인 고환의 동위와 우문태의 서위가 대립하고..
남쪽 양나라에서는 후경의 전횡으로 병크를 탄다.
서방에서는.
비잔티움 제국 : 간지나는 저스틴 대제께서 서방 레콩키스타를 하는 가운데 아누시르반과 전쟁中
사산 조 페르시아 : 아누시르반 치세하에 제 2의 전성기, 앞서 말했듯이 동로마 찔러보기와 주기적인 아랍, 옥수스 정벌
동고트 왕국 : 벨리사리우스와 나르세스로 인해 거덜났음. ㅉㅉ
서고트 왕국 : 재정복으로 인해 남부지방 뜯김
프랑크 왕국 : 클로비스 사후 4형제들이 부르군트왕국을 멸망시킨 이후 내란.
초원에서는
동쪽
유연 : 동위와 서위의 대립에서 이득을 얻으려 했으며 동으로는 동위의 역수(易水)까지 들어가고 서로는 서위의 원주(原州: 지금의 영하 寧夏 고원 固原)까지 다달았다
중간
에프탈 : 비교적 안정적인 치세에 2인자인 카불의 테킨 미히라굴라가 간다라 대학살을 벌이는 등 인도원정을 했으나. 533년 패배 이후로 내리막길.
서쪽
훈의 후예인 쿠트리구르와 우트르구르의 내분(+비잔티움의 이간책)
구대륙 동,서방에서 어느하나 주도권을 가지지 못한 채 혼란으로 가득한 가운데. 돌궐 제국이 탄생하게 되었다.
1. 부민카간 이전의 돌궐
돌궐이 유연하에 복속된 이후 그들은 뛰어난 철기기술을 바탕으로 점차 성장해나갔다. 이러한 결과로 부민의 선친인
(1)아현(A-hen)은 (2)샤드(Sad)라는 칭호를 지녔고 전임자인 (1)투우(Tu-wu)는 (3)야브구(yabgu)의 칭호를 사용하게 되었다.
부민도 범상치 않을 능력을 가졌을 것이나 그가 돌궐의 지도자로 부상하는 것과 권력 장악과정이 잘 알려져 있지 않다.
2. 아나괴의 실책, 제국의 성립
돌궐은 본시 유연에 무기를 납품하던 부족이었다. 그러나 6c 초 유연의 통치계급 사이에 내분이 발생하여 칸 아나환(阿那環)은 북위로 도피하였다가, 얼마 지나지 않아 북위의 지원을 받고 다시 무력으로 통치 지위를 회복하고 이후 아나괴(阿那壞)가 숙부인 바라문과 내분과 521년 고차의 반란으로 흔들렸다. 비록 동위와 서위의 대립으로 영하고원과 역수를 차지했지만 546년 고차를 정복한 돌궐이 나날이 강대해져 공주와의 결혼을 요구했지만. 아나괴는 거절했다. 아나괴는 왜 이 제안을 거절했을까?
숙부의 도전과 고차의 반란을 물리치고, 동위와 서위를 주무르는데에서 기인한 자만심이였을까? 아니면 급성장하는 돌궐에 대한 경계심이었을까? 자세한 이유는 모르지만. 결국 돌궐의 부민(土門),즉 일-가한(伊利可汗)은 서위와 동맹을 맺어 (4)552년 유연을 멸한다. 하지만 승리의 달콤함을 느낄 세도 없이 사망하였고, 그의 영토는 동부에는 자식인 콜로(Kolo, 科羅, (Issik Kagan 553년 요절) 이후 무한(Mukan Kagan, 木桿可汗/木杆可汗), 서부는 그의 형제인 Istemi Yabgu (室點密/室点密)이 차지하였다.
이러한 (5)이원(二元)통치는 고대 투르크 정치 구조의특징이였고 훗날 위구르- 카를룩, 튀르기쉬 등 투르크 제부족과 몽골제국(원과 4한국의 관계)에도 적지 않은 영향을 끼쳤다.
(1)아현(A-hen) : 중국어 전사같은데 제가 한문을 몰라서 찾질 못했습니다.
(2)샤드(Sad) : 부족장이라는 뜻으로 돌궐제국 시기에는 '왕자'라는 뜻을 갖는다.
(3)야브구(yabgu) : 돌궐의 28관등 中 카간 다음인 제 2인자를 뜻한다. 최초의 기록은 박트리아로 이주한 월지-쿠샨왕조의 5개부족의 흡후(翕候)에서 기인했으며, 이후 11c초까지 1100년간 쓰인 칭호이다. 수,당 시기에는 엽호(葉護)로 불리며. 서돌궐에서 이스테미와 타르두가 이 칭호를 썼으며, 타르두의 손자 통엽호(統葉護) 즉 '통 야브구'의 이름이기도 하다.
(4)552년 : 돌궐제국의 건국년도로 1400년후 터키에서는 돌궐제국 건립 1400년을 기념하는 행사가 열렸고, 이 해에 북-대서양 기구(NATO)에 가입한다.
(5)이원(二元)통치 : 고대 투르크의 이원 통치는 주로 좌우(흉노의 좌,우현왕), 동서(돌궐, 위구르, 몽골), 흑백(튀르기쉬), 대소(카자흐), 내외 등으로 나누어졌다. 이원 통치는 공동통치가 아닌 한쪽을 우위로 두어 종주권을 인정하는 체제였으며 일반적으로 동쪽이 우위를 두었다.-몽골제국 초기에도 킵착,차가타이한국이 우구데이에게 종주권을 인정하는 모습을 보이며, 다얀의 몽골에서도 비교적 동쪽에 있는 차하르부가 대칸을 세습받는다. 16c 카자흐의 경우 대, 중, 소 오르다로 그 지역을 구분하였다.
출처 : 이희수 저 [터키사]
르네 그루쎄 저 [유라시아 유목제국사]
그림출처 ; http://tr.wikipedia.org/wiki/T%C3%BCrk_tarihi
첫댓글 고구려가 요동을 뺏기고 신라와 백제가 일통되다니!! 최소한 한반도 지도는 663년 이후 판세로 보이네요.
그저 신경을 안쓴게 아닌지 싶습니다만-_-;
한마디로 동아시아 전체가 내란의 광풍이로군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