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억을 걷는 시간 [진란]
경복궁 서편 담장 근처의 은행나무들은
몽땅, 이브 몽땅의 가을이다
둥근 뜨락의 우람한 노목은 언제쯤
황금 동전을 짤랑거릴지,
은행나무 아래에서 기다리는 사람들
느리고 지루하게 즐기고 있는 것이다
황금의 은행이 되기를 기다리는 동안
오후 3시는 그리도 단풍을 희롱했던지
가을, 짙은 뜨락에 시나브로 낙엽은 쌓이고
성급한 누군가에 치워져서는
모퉁이의 자루에 담겨 흐느끼는데
가을 뜨락에 쓰러져 우는 게 나만은 아니었지
쑥부쟁이들 화라락 피었을 때도 한참 이뻤는데
시들어가는 꽃잎도 고풍스러워지는 시간, 그렇게
가을향 한잔을 마시다 집으로 돌아오는 시간,
메밀꽃 필 무렵이라는 식당에는 아직도
메밀꽃이 피어있다 듬성듬성, 웅성웅성
내 집으로 가는 길인데 어디 가십니까?
사복경찰의 질문에 척척하던 나의 두 귀는
마른 꽃처럼 오래오래 버스럭거렸다
* 이번 주부터는 가수 이용이 시월의 마지막밤을 노래할 게다.
광화문 네거리가 노란 은행잎으로 뒤덮였던 때가 있었는데
지금은 많이 도시화되어 광화문의 추억이 사라졌다.
그나마 옛 서울고 자리에 경희궁이 복원되어 은행잎들을 밟아볼 수 있다.
풍문여고 교문을 지나 삼청동으로 가는 길은 말끔히 단장되긴 했어도
예전의 추억을 더듬기에 충분하다.
주말이면 인사동부터 삼청동까지 인산인해를 이루니 이리 치이고 저리 치이지만
그래도 기억을 걷는 시간이 될 게다.
주말에 낙엽 더 쌓이거든 걸어볼 만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