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1.10.02.日. 맑음
진천 가는 길.
죽전, 신갈을 지나고 나면 이제부터는 본격적으로 고속도로를 달려가게 된다. 스카이라인을 이루고 있는 하늘 가장자리인 산등성이 위로 올라붙은 둥근 해에게서 붉은 빛살이 퍼져 나온다. 오전 일곱 시 반의 비스듬한 햇살은 빛과 그림자를 명확하게 구분 지으며 원근법을 통해 세상을 구체적으로 묘사해내고 있다. 가깝고 먼 풍경들이 손에 잡힐 듯이 생생하게 전해온다. 눈으로 볼 수 있는 즐거움이란 보이는 것과 보이지 않는 것의 구분에 한하지 아니하고 보이지 않은 것들의 느낌까지 짐작할 수 있도록 도와준다. 해가 수직으로 공중에 올라 있어 모든 풍경이 평면으로 보이는 정오경에 비해 햇살의 각도로 인해 풍경이 입체적으로 보이는 아침과 해질녘이 더 아름답게 보이는 이유가 바로 이것이라고 본다. 그래서 빛과 그림자는 시선視線의 아득한 근원 같은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우리를 태우고 달리던 버스가 안성맞춤(충주) 휴게소에 들린다. 고속도로에 드문드문 위치한 휴게소는 이를 테면 바닷길에 떠있는 섬 같은 곳이다. 그곳은 채울 것은 채우고 버릴 것은 버리는 부두의 기능뿐만 아니라 만남과 이별의 쓸쓸하고 애틋한 사연을 전해주는 항구의 낭만까지 끌어안고 있어서이다. 버스 안을 벗어나 밝은 햇살 아래서 회원 한 사람 한 사람 얼굴을 비로소 찬찬히 쳐다본다. 맑은 하늘 아래 휘도는 맛있는 바람과 찰랑찰랑 볼을 때리는 밝은 햇살이 이토록 고마울 수 없다. 휴게소에서의 10분간 행복충전은 오늘 사용할 하루분량에 넘칠 만큼 몸 안에 가득 찬다. 섬이란 바다 위를 떠도는 작은 땅이 아닌 것처럼 휴게소도 고속도로에 떠있는 독자적인 공간이 아니다. 그래서 휴게소는 쉬어가는 곳이지 머무르는 곳이 아니라는 걸 우리는 알고 있다.
음성I.C 라는 이정표를 언뜻 본 것 같은데 금세 진천 시내에 들어왔다고 안내방송을 해준다. 이때가 아침 8시40분경이다. 진천은 아담한 산등성이에 둘러싸인 크지도 작지도 않은 평화로운 고을이다. 오늘의 첫 답사지인 보탑사가 여기에서 멀리 있을 이유가 하나도 없다. 몇 개의 저수지를 지나고 예전에는 분명 호젓한 오솔길이었을 왕복 일차선 도로를 따라 들어가면 보련산이 가로 막고 있는 막다른 연꽃골에 보탑사가 보인다. 무엇보다 눈에 먼저 띄는 것은 몇백 년은 족히 자랐을 성싶은 예쁜 느티나무다. 구불구불 위를 향해 뻗은 실한 가지가 구중궁궐 비빈의 치마폭처럼 하늘을 향해 펼쳐져있다.
보탑사寶塔寺가 존재하는 몇 가지 이유들.
사천왕문을 지나고 법고각과 범종각 사이의 돌계단을 올라서면 우리를 맨 처음 맞아 주는 것은 가로로 긴 화단에 가꾸어놓은 포기 단단하고 잎이 잘 벌어진 파란 배추들이다. 하얀 구절초와 붉은 코스모스가 만발한 화원 같은 도량 내에 포기 좋은 배추라니, 지루할 것만 같은 초록에서 끌어낸 그 역발상이 눈이 시원하도록 산뜻하다.
보탑사 3층 목탑은 1층부터 3층까지 각각 4면으로 이루어져 있고, 각 면마다 다른 이름의 현판이 걸려있다. 법당의 이름을 내건 현판이 다르다는 것은 그 법당 안에 모신 주 부처님이 다르다는 뜻이니 일층에 현판이 4개 걸려있다는 말은 법당 안에 모신 부처님이 네 분인 사방불四方佛을 각 방위마다 모셨다는 이야기가 된다. 그중 서쪽을 향하고 있는 면의 현판이 극락보전인데 그렇다면 그 방위에 모셔져 있는 부처님은 서방정토를 관장하시는 아미타부처님이 된다. 그 극락보전 앞에 땅 위로 불쑥 튀어나온 코끼리만한 바위가 있다. 그 바위 틈새기에 풀과 들꽃들이 여린 뿌리를 내리고 가을 빛 바람에 몸을 하늘거리고 있다. 3층 목탑 창건 당시 법당 앞의 바윗돌을 뽑아 내치지 않고 그 자연미를 법당과 조화롭게 꾸밀 줄 아는 장인이라면 그는 분명 당대의 으뜸가는 명장이었을 것이다. 건축술에 대해서는 눈곱만큼도 모르는 내 눈과 귀에는 그 당시의 풍경과 소리들이 또렷이 들려온다.
“아니, 아니야. 그 바위를 뽑아내지 말고 있는 그대로 둬. 그 바위가 있으니 나무로 지은 3층 목탑이 더 생생하게 살아나는 거야. 자, 잠시 땀을 좀 들렸다가 저 바위와 3층 목탑과의 간격을 생각해보자구.”
법당 안이 꽉 차 보이는 영산전과 적조전에 비해 법당 내부를 수수한 붉은 벽돌로 벽을 마감하고 오직 지장보살님만 모셔져 있는 지장전地藏殿의 허허로운 공허가 부처님 말씀을 전해 듣기에는 훨씬 좋은 곳이다. 보탑사라는 화려한 영역 안에 들어 있는 단순하고 범박한 공간인 지장전은 밖에서 들여다보아서 만은 그 진가를 도무지 추측할 수 없는 장소이다. 신발을 벗고 지장전 안에 들어와 부처님께 삼배를 하고 빈자리에 사붓이 앉아보지 않았더라면 이 유장悠長과 적조寂照를 어찌 맛볼 수 있었을까!
보탑사 3층 목탑 중 1층이 현세라면 3층은 미래세를 나타내고 있다. 그래서 미륵전인 목탑 3층에는 미래불인 미륵삼존불이 모셔져있다. 우리가 법당을 둘러보는 동안 때마침 미륵전 전면에 활짝 열려있는 창으로 가을햇살이 무차별 쏟아져 들어오고 있다. 그 창으로 내다본 산과 들과 도량의 풍경이 가을햇살 아래 넘쳐날듯이 아름답다. 그래, 세상은 이 순간에도 누구에게라도 충분할 만큼 아름답고도 풍요로워 보인다. 이 느낌이란 괜히 가을햇살 때문만은 아닐 것이다. 구차한 현재가 아름다운 미래를 이끌어내는 것이 아니라 아름다운 현재가 아름다운 미래를 끌어들이는 것이 마땅한 도리가 아닐까? 하고 생각해 본다.
(- 연꽃골에 솟아오른 내 마음의 보물 상자. -)
첫댓글 아름다운 현재가 아름다운 미래를 끌어당긴다..이 아침 ..깨우침하나 얻고 갑니다
카르페 지엠..지금 이순간이 바로 내일이군요...좋은글 감사드립니다
깨달음~~참 좋네요.
맞아요. 무차별하게 쏟아졌던 가을햇살을 온몸으로 받아들인 건 정말 복이었지요. 우리들의 아름다운 미래를 위하여..아자~~~^*^
오늘에 충실하면 아름다운 미래를 맞을수있겠지요~
오늘 하루 아름답게 살았는지 반성해보며 갑니다 ㅎ~^*^
역시 작가님의 눈과 귀는 다르시군요. 남들이 못보고 듣지 못하는 걸 놓치지 않으시니... 수준 높은 글, 고맙습니다~~~
함께해서 즐거웠습니다~! ^^
긴울림님의 글에서 아름다운 현재를 늘 만들어 나가야겠다는 깨우침이 들었습니다.
좋은 글 감사합니다. 항상 건강하시고 행복하세요.*^^*
오랜만에 뵈어서 정말 반가웠습니다~~ 부지런도 하셔라 벌써 후기를 줄줄 읊으셨네요~ㅎㅎㅎ
비록 함께하진 못했지만 긴울림 글보면서 그 눈부신 가을햇살과 더불어 함께한듯 생생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