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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양사 오다와 오와리
무르 추천 1 조회 1,452 15.09.08 09:22 댓글 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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댓글
  • 15.09.08 09:31

    첫댓글 오사카지방과 관동평야의 중간에 위치하여 양쪽을 잇는 자본의 흐름이 활발한것이 상업발달에 더욱 유리하였던 거 같네요. 이후에 해외세력과의 교류가 이루어지면서 바다와 인접한 오사카가 상업적으로 더 중요해지고. 오다-히데요시로 이어지며 오와리=>오사카로의 경제중심지의 이동 흐름이 참 순리대로 흘러갔다는 생각이 듭니다.

  • 작성자 15.09.08 09:43

    찰목합님 좋은 말씀감사합니다. 기본적으로 상업에 유리하다는 것에 같은 생각이며, 중부평야의 또 다른 의의는 옛날엔 교환보단 일방적인 세금이나 일방적인 명령이 흔했는데 이를 적극적으로 가로채거나 소극적으로 저지할 수 있는 것 같고, 서쪽 유목지역과 동쪽 농경 지역 사이의 관중이 비단길이란 상업도 있지만 근본적으로 혼란한 유목지역의 서량 동탁처럼 외교적이고 정치적이고 군사적인 면이 더 강하지 않았나 생각해 봅니다. 옛날 관중에 있단 것은 동탁 부르듯 유목민을 부를 수 있단 것이고 사카이란 조총 구입권을 뜻할 수도 있고 오늘날 미국은 골라가며 무기를 파는 것 같습니다. 순리대로 흘러갔다는 말씀에 같은 생각입니다.

  • 15.09.08 12:42

    지금 관점에서는 해안에 인접한 넓은 평야가 가장 생산력이 좋을거라 생각되지만, 전근대시대에 이들지역 대부분은 늪지대였고 또 해수에 의한 염해때문에 농사짓기 힘들었을테니, 실제 생산력은 교토만 못했을겁니다.
    그래서, 쿄토같은 내륙의 분지가 먼저 개발되게 된거고, 이후 증가된 인구를 바탕으로 수세기에 걸쳐 제방을 쌓아 늪지대를 메꾸고 간척사업을 해서 지금과 비슷한 골격의 평야가 만들어졌을겁니다.
    또, 기후가 안정적인 혼슈북사면과 동북부가 농사짓기 좋기때문에 이쪽지방이 평야면적에 비해서 쌀생산성이 높고, 우에스기 겐신의 힘도 여기서 나왔다고 볼수 있죠.

  • 작성자 15.09.08 16:20

    jyni님 말씀처럼 해안선은 옮겨가고 소금기 또한 빠지지만 그 기점이 근대란 설명은 좀다르게 생각합니다. 에도성의 시기와 위치를 보면 그런 개간이 근대 이전에도 가능했고 당시 이 부근 전체가 늪지대여서 평야가 너무 적었다 생각하이기엔 다른 지역의 여러강들의 퇴적과 이로인한 항구의 이동을 볼때 지나친 과장으로 생각됩니다.

  • 15.09.08 18:10

    신장의 야망 장성록에서도 관동평야는 늪지대로 묘사되죠. 그나저나 후호조가는 어떻게 보면 정말 좋은 땅을 가졌던 셈인데....
    그리고 다케다, 우에스기가 한때 세력을 떨쳤던건 광물(지네들 말로는 금광) 개발과 그로 인한 자원거래도 있지 않았을까요? 이야기 들어보니 저 금광들이 고갈된 그순간부터 몰락이 시작되었다고도 하고...

  • 작성자 15.09.08 18:18

    Revolution 님 안녕하세요. 석고지도를 아무것이나 찾아보신뒤 위의 동쪽 평야의 석고와 서쪽 평야의 석고를 비교해보시면 하나로 동쪽이 그리 적지 않았다고 생각됩니다. 그리고 석고란 말은 기본적으로 농업을 전제로한 개념인 것 같습니다.

    http://blog-imgs-34.fc2.com/h/a/y/hayatomaru8810/tizu-1570a1s.gif

  • 15.09.13 02:43

    @무르 석고는 모든 경제력을 쌀기준으로 바꿔서 환산한거지, 농업 개념은 아닙니다.

  • 15.09.13 02:39

    닌자는 이세가 아니라 '이가, 코가'

  • 작성자 15.09.13 05:38

    명지광수님 말씀이 맞습니다.

  • 15.09.13 03:17

    이 글은 전반적으로 결과를 놓고 과정에 의미를 부여한 측면이 강한 것 같습니다.
    그냥 『노부나가의 지리적 상황이 유리했고, 노부나가는 세력확장 과정에서 그런 유리한 상황을 놓치지 않았다』...가 맞겠다로 풀어가야 순리에 맞겠죠.
    이걸로 끝나는 이야기인데, 어색한 사족이 너무 깁니다.
    미노니 오카자키니 그저 그때그때 상황이었던거지, 대등한 동맹 같은 건 '자기 아버지도 쫓아내는 시대'에 만화 속 이야기죠.
    소설에서야 아버지의 뜻을 거역 못하는 아자이 나가마사이지만, 역사속에선 그 녀석도 아버지 쫓아낸 놈임.

  • 15.09.13 03:30

    http://blog.naver.com/halmi/50005799440

    2004년에 쓴 글이니 10년이 넘은 글인데...
    거기에 제가 언급한게... ↓

    아자이 나가마사가...
    원래 이름이 롯카쿠 요시카타에서 한자를 받아 아자이 카타마사 였다는 것을 아는가?
    원래 롯카쿠쪽 무장의 딸과 결혼했다가 쫓아내고, ‘오이치’와 결혼했다는 건 아는가?
    과하게 말하면, 아버지를 은거시킨 쿠데타(?) 다이묘라고도 할 수 있는데... 아버지 뜻을 거역 못해서라고?

  • 작성자 15.09.13 05:45

    @明智光秀 명지광수님 안녕하세요. 유리한 상황이 있었고 기회를 놓치지 않았다라고 생각하는 것도 가능합니다. 그러나 그것과 자연선택적으로 많은 다이묘가 있었고 상황에 적응한 다이묘가 살아남았다라는 것의 차이가 무엇인지 궁금합니다. 가마쿠라 막부와 에도 막부는 그 성격을 달리 하지만 서울의 귀족적이던 면이 지방의 호족적인 면으로 변한 바 공통점이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집권이던 호조, 유배되었던 이즈반도, 가마쿠라 막부, 에도 막부 등은 모두 관동평야쪽에 있고 이는 우연으로 생각하긴 다소 어려운 것 같습니다.

  • 15.09.13 09:38

    @무르 걔들이 관동에 있었다는거 자체가 관동이 그 시점마다 상대적으로 발전이 안돼서 그런겁니다.
    미나모토 가문이 관동에 뿌리를 내리게 된 것도 그 쪽이 상대적으로 외적을 상대해야 하는 변방이라는 뜻이고(그러니 征夷대장군이고)....
    싯켄 호죠도 촌동네 무사에 불과하다가 치고 올라가 출세했으니 관동출신일 뿐이고...
    정작 무로마치 막부는 쿄토에 있었고, 에도 막부는 히데요시가 일부러 에도에 쳐박아 버렸는데 이에야스가 눈물을 머금고 수용했던 거고, 히데요시나 노부나가와 다르게 자기 영지를 수도화 시켜버린 거고...

  • 작성자 15.09.13 09:48

    @明智光秀 명지광수님 안녕하세요.

    관동關東 이 발전이 덜 되었다는 것은 저도 같은 생각입니다. 그리고 이에야스의 옮김이 본의가 아님도 같은 생각입니다. 그리고 이는 이미 글과 댓글에서 밝혔습니다. 말씀처럼 촌동네 무사 [(지방) 호족 <-> (중앙) 귀족] 라는 점도 호족이란 말로 이미 동의를 표했다고 생각됩니다. 또 무로마치 막부가 남북조로 나눠져 싸운 기간이 전반부이며 전국시대가 후반부이며 실권을 발휘한 기간이 얼마 안됨도 글로 밝혔습니다.

    고장난시계도 하루에 두번은 맞듯 사람말이란 맞는부분도 있고 틀린 부분도 있으니 틀린 부분은 가르쳐 주시고 맞는 부분은 공감해주시길 원합니다.

  • 15.09.13 10:06

    @무르 무로마치 시대를 쫄로 아시는데, 무로마치 시대가 실권을 발휘한 기간이 얼마 안된다고 할 것 같으면, 동일한 잣대로 카마쿠라 막부도 별볼일 없습니다.
    왜 걔는 들어내고 걔는 넣어야 하나요?

    그리고, 제가 지난 밤에 리플을 달 때는 틀린 부분이 많으니 내 기준으로는 '말 좀 되는 소리를 합시다' 정도의 지적질이었는데...
    아침에 일어나니 무르님의 감히 저에게 이빨을 들어내기도 하고, 틀린 부분은 절대 인정을 안하시는데요?
    걱정하지 마세요. 인정을 안하면 그 뒤는 제가 까발려서 밟아드리는 일만 남았습니다.
    무르님 말은 전반적으로 해동천자님 말씀대로 자의적이고 어디서부터 손을 대야 할지 모를 수준입니다.

  • 작성자 15.09.14 01:05

    @明智光秀 님의 말씀은 정당한 지적질이시고 거기에대한 저의 반론은 이빨을 드러내는 것이라고요?

  • 15.09.13 03:17

    특히, 일본의 수도가 동쪽으로 옮겨 갔다 하셨는데, 평야의 규모니 하는 것하고는 아무 상관 없습니다.
    『교토는 셋 가운데 가장 작은 평야기에, 가장 빠른 합의에 도달할 수 있었고, 따라서 일본의 중심으로 활약합니다.』라는 문장은 제 눈을 의심했습니다.
    그런거 없습니다.
    에도 일대는 이에야스가 발령(?) 났을 때도 교토 오사카 일대에 비하면 완전 시골이었음.
    관동은 평야의 땅을 놓고 전국시대가 시작되기도 전에 오만때만 집안이 서로 물리고 물리는 전쟁이 펼쳐지고 있었고...
    쿄토가 수도가 되었을 때, 쿄토/오사카/나라 일대는 그나마 일본에서 선진화 된 동네였고, 토쿄 일대는 아직 미개발 지역(야마토 땅이긴 한거야?).

  • 작성자 15.09.13 05:49

    유럽의 지도를 보시면 오늘날 라인강 일대가 가장 인구밀도가 높고 야경을 보시면 가장 발달한 지역입니다. 그러나 로마 시대에는 국경선으로 깡촌이었죠. 에도인근도 이와 같다고 저는 생각합니다.

    서로마 제국의 서울인 밀라노가 자리잡게 되는 이탈리아 북부평야는 당시 깡촌이었습니다. 그리고 프랑크족이 자리잡는 프랑스는 당시 깡촌이었습니다. 그리고 독일인의 게르만 지역또한 마찬가지죠.

    그곳은 드넓은 평야였지만 깡촌이었고 점차적으로 그 드 넓은곳으로 중심이 이동합니다.

  • 15.09.13 03:27

    그리고... 전국시대 단위면적당 쌀 생산량은, 오사카 일대가 일본에서 압도적임.
    그 유리한 평야를, 노부나가 당시엔 어느 한 놈이 통일을 못한 상태였죠.
    그러나 노부나가 바로 앞에는 미요시 나가요시라는 걸물이 전부 털어먹은 상태였음. 그러나 미요시 정권은 결국 천하를 얻지 못했음.
    그리고, 오와리도 엄청난 군웅할거 상태였음.
    오와리라는 지역을 놓고보면 노부나가가 상당히 유리한 상태였지만(그에 대해선 이 글처럼 접근할게 아니라 다른 측면으로 접근해야 함)...
    정작 당시 오와리 내부 상태를 보면, 군소세력들의 party people 임. (오다 노부히데도 군소세력)
    고로, 평야지대 3군데 모두 오만 잡새들의 향연이었습니다.

  • 15.09.13 03:34

    오와리의 군소세력 할거 상태는 여기를 참고 → http://blog.naver.com/halmi/50110719929
    오죽하면 오와리 안쪽에 이마가와 세력이 자리잡고 있었고.

  • 작성자 15.09.13 05:58

    @明智光秀 전국시대 오사카 일대가 세 개의 평야 가운데 압도적이란 자료를 보여주시길 원합니다.

    그리고 말씀하셨듯 오다는 그들 중 하나 정도에 불과했고 따라서 자연선택적으로, 특별히 오다가 뛰어나다기보다, 땅모양이 영향을 끼쳤다고 생각합니다.

    초기의 서울들이 쿄토가 있는 서쪽 평야에 있다가 후기에들면서 막부들이 들어서며 동쪽으로 옮겨가며, 호족 혹은 무사로 상징되는 이들이 준동한 것을 단순히 우연으로 본다면, 게르만족의 침입과 이후 그들이 다스리던 야만족의 땅이 라인강 [스위스~독일~네델란드] 이란 유럽의 중심지역 [인구밀집, 공업도] 으로 발전한 것을 이해하기 힘들게 됩니다.

  • 15.09.13 09:59

    @무르 나를 님과 동일한 수준으로 놓고 자료 보여달라고 자꾸 쿡쿡 찌르면 안됩니다.
    http://blog.naver.com/halmi/220479901067
    그 잘난 에도 일대의 1㎢당 석고는 100석 정도이지만, 오사카 일대는 200~385석.
    압도적이란 표현은 이럴때 쓰는거 아닙니까?

  • 작성자 15.09.13 10:02

    @明智光秀 명지광수님 일단 잠시라도 같은 수준으로 대해주셔서 감사합니다. (굽신굽신)

    님의 블로그를 가봤는데 이는 단위당으로 보입니다.

    혹시 제가 앞서 쓴 글을 보셨는 지 궁금하네요.

    http://cafe.daum.net/shogun/1Db/7060

    단위당 생산량은 당연히 서쪽평야가 발달했다는 것은 저의 주장과 같고 그것은 님의 주장하시는 바이기도 합니다.

    즉 서쪽평야 와 동쪽평야 의 양에 관한 저의 주장에 가르침을 주실려면 동쪽평야의 질 [단위 면적 당 생산량] 이 아니 양 [총생산량] 을 보여주셔야 할 것 같습니다.

    여하튼 큰 맘 먹고 자료를 보여 주심에 감사드립니다.

  • 15.09.13 10:37

    @무르 님을 잠시라도 같은 수준으로 생각한 적도 대한 적도 없고, 다른 글의 리플에서도 명시했지만, 님은 전국시대에 대해 이런 특이한 자기 주장을 할 정도의 전국시대를 알지 못합니다.

  • 작성자 15.09.14 01:06

    @明智光秀 님의 수준에대해선 잘 알겠습니다.

  • 15.09.13 06:19

    아케치 노인과 같은 생각입니다. 특히 [관동평야 개발]을 놓고 보면 더욱 그렇지요.

    사실 에도를 위시한 관동지역은 당시 일본으로 치면 깡촌 중의 깡촌이었습니다. 이에야스가 히데요시에 의해 슨푸에서 전봉되어 도착한 에도는 호죠씨가 쓰던 성으로 비가 새는 지붕에, 화공을 막는답시고 진흙으로 떡칠한, 게다가 시가지 따위는 없고 갈대밭과 작은 어촌이 있는 그야말로 촌구석 중의 촌구석...-_-; 막 슨푸성을 새로 지어올린 이에야스로서는 억장이 무너지는 상황... 뭐 히데요시도 이 점을 노린 것이었지만...ㅋ

    이랬던 에도를 위시한 관동지역이 개발되기 시작하는 것은 이에야스가 천하를 장악하고 제다이묘들을 통제할 능력이 생긴

  • 15.09.13 12:37

    이후의 일입니다. 그러니까 전국적으로 인력과 물력을 동원할 수 있는 체제가 출범한 다음에나 가능했다는 것이죠. 거대한 에도 건설과 도네가와강 정비를 통한 늪지대 개발 및 하천정비는 꼴랑 일개 다이묘 나부랭이가 할 수 있는 공사가 아니었습니다. 특히 도네가와강의 경우는 아예 하천의 경로를 다른 곳으로 돌리는 수준의 대공사였죠. 공사방법은 할당제로 유명한 [와리후신]이었고...ㅎㅎ;;

    그러니까 관동의 경우는 강력한 정치권력이 자리잡아 전국의 물력과 인력을 동원함으로써 가능했던 것이지, 이 지역에 들어와 자리잡아 그 생산력을 바탕으로 천하통일이 가능했다는 것이 아니라는 말씀...

  • 15.09.13 06:25

    무르씨는 앞뒤를 바꿔놓고 얘길 하는 겁니다...-_-;

  • 작성자 15.09.13 07:35

    @★海東天子☆ 해동천자님의 말씀에 순서가 바뀌었으며, 전국적인 인력과 물력을 동원할 수 있는 체제의 출범 이후에나 가능했다는 말씀으로 이해가 됩니다. 이에 그림에 따르면 1598 년의 석고를 기준으로 그림을 그려 보았습니다.

    http://cafe.daum.net/shogun/1Db/7058

  • 15.09.13 08:58

    @무르 46년간 이어진 에도성 건설이 시작된 것이 1606년 3월입니다. 관동평야의 대하천인 도네가와의 물줄기가 잡힌 것이 1654년, 도네가와와 에도성이 연결된 것은 1665년에 이르러서였어요.

    그리고 뭔 석고가 농업생산력을 반영하는 절대척도인 것처럼 착각하는 모양인데, 석고는 죠카마치의 부동산들도 그 대상이었습니다. 기본개념은 이해하고 논의를 진행하셔야죠. 1598년 석고가 그랬는데, 그게 뭐 어쨌다는 겁니까?!...나참...-_-;

    말 나온김에 에도를 포함했던 무사시노쿠니의 석고변화 좀 볼까요?!

    1589년 - 667,126석
    1610년 - 840,000석
    1651년 - 982,337 여석
    1702년 - 1,167,862 여석
    1834년 - 1,281,431 여석

  • 15.09.13 08:56

    @무르 에도성 건설 및 하천정비 등의 사업이 마무리 단계에 접어든 1650년 경에 들어서면 무사시노쿠니의 석고가 1백만석에 근접하는데, 1598년의 석고와 비교해 보시죠.

    물론 참근교대제 등의 영향도 무시못하지만, [관동개발]의 여파가 반영된 거니까...

  • 작성자 15.09.13 09:04

    @★海東天子☆ 저는 에도개발을 부정하는 것이 아닙니다. 해동천자님께선 순서가 바뀌었다고 하셨는데, 그 이전부터 이미 생산력에서 앞선 것으로 봅니다. 석고가 절대적 기준이 아니라는 말씀은 동감하지만 그 말이 이에대한 반론은 안된다고 생각합니다. 즉 석고란 절대적인 기준이 아니고 이후에도 차이가 벌어졌다는 말씀을 하시고 있지 그 이전에는 서쪽평야가 동쪽평야에 앞선다는 논증은 하고 계시지 않습니다.

  • 작성자 15.09.13 09:05

    @★海東天子☆ 즉 제 주장에대한 반론은 오로지 석고가 절대적 기준이 아니란 것 뿐입니다. 그리고 개발하니 그 차이가 더 벌어졌단 말씀을 하시고 계신 것으로 생각됩니다. 제 주장을 뒤엎고 님의 주장을 하실려면 우선 다른 기준을 통해 동쪽평야의 생산량이 서쪽평야의 생산량만 못했다는 것을 증명하셔야 할 것 같습니다.

  • 작성자 15.09.13 09:07

    @★海東天子☆ 작은 평야가 있고 큰 평야가 있는데 작은 평야부터 개발되었고 큰 평야를 개발하니 더 차이가 벌어졌다는 해동천자님의 주장은 당연한 말씀입니다. 저의 말 또한 작은 평야의 서쪽에서 큰 평야의 동쪽으로 옮겨갔단 제가 생각하기엔 그럴수도 있는 이야기를 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실제로 그러했단 것을 사진을 들어 보여드린 것입니다.

  • 15.09.13 10:01

    @★海東天子☆ 그러니까 나도 하는 말이, 무르님은 자신만의 자의적인 역사해석을 통한 결과를 놓고, 자꾸 앞뒤를 바꿔서 이야기 함 ;;;

  • 작성자 15.09.13 10:11

    @明智光秀 명지광수님 안녕하세요. 그에관해서는 앞서 말씀드렸던 글을 올렸습니다. 명지광수님의 댓글이 지금 달린 것을 보니 이미 보신 것 같네요.

    http://cafe.daum.net/shogun/1Db/7060

  • 15.09.13 10:15

    @무르 해동천자님이나 내가 말하는 건, 그 수준이 아니라 글 전체가 전반적으로 자의적이고 앞뒤가 바뀌어 있다는 것임.
    앞뒤를 바꿔서 이해한다는 건, 그 역사 내용을 잘 모른다는 것임.
    그리고 '모를 수도 있으니 가르켜 달라'라고 해놓고 틀린걸 인정한게 하나도 없음.
    고로 과정과 결과가 궤변이 되는 것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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