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좋은 글 스크랩 면도날 되라. 윌리엄 오캄 [CEO 리더십] 김형철 교수
잠실/맥(조문희) 추천 0 조회 57 15.01.22 10:23 댓글 0
게시글 본문내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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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EO 리더십]

불필요한 것 잘라내는 ‘면도날’ 되라

 

중세 사상의 성채를 허문 윌리엄 오캄

 

“이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개별자는 영원한 보편자의 그림자에 불과하다”고 플라톤은 말합니다. 여기 특정한 볼펜이 한 자루 있습니다. 또 다른 형태의 볼펜도 있습니다. 그렇다면 이렇게 다양한 형태의 볼펜을 총칭해 부르는 ‘볼펜’이라는 이데아가 존재하게 됩니다. 물론 의자·책상·학교·산·나무 등 존재하는 모든 개별자가 보편자인 이데아를 가진다면 이 세상에는 보편자들이 넘쳐나겠죠. 우리가 이름으로 부르는 것들이 실재 존재한다는 의미에서 플라톤과 같은 사람들을 실재론자라고 부릅니다. 만약 플라톤이 옳다면, 이 세상에는 수많은 이데아들이 존재할 텐데요.

이것은 마치 깎지 않은 수염이 더부룩하게 난 플라톤의 수염과 같이 많다고 해서 ‘플라톤의 수염’이라고 불립니다. 이 실재론자들에게 반기를 들고 나선 철학자가 유명론자인 윌리엄 오캄입니다.


‘플라톤의 수염’을 밀어 버린 유명론자

‘플라톤의 수염’을 깨끗하게 밀어버릴 무기가 바로 ‘오캄의 면도날’입니다. 오캄의 면도날에 대해 이야기하기 전에 오캄에 대해 간단히 살펴보겠습니다. 오캄은 목적을 달성하기 위한 순수한 열정을 가진 사람이었습니다. 그의 목표는 진리 탐구 그리고 발견이었습니다. 그의 스승은 스코투스라는 중세의 위대한 철학자였습니다. 그의 명성은 많은 철학자들이 그랬던 것처럼 사후에 주어진 것이 아니라 그가 살아 있을 때 주어진 것이었습니다.
 
많은 사람들은 위대하다고 칭송받는 사람 옆에 있다면 그의 주장의 타당성을 곰곰이 생각해 보기보다 그의 권위가 갖는 위엄에 의지해 그의 주장을 받아들입니다. 하지만 오캄은 순수했습니다. 그 시대의 정신이자 자신의 스승이기도 한 스코투스의 주장을 곰곰이 따져보고 틀렸다고 생각되는 순간 그는 스승의 주장조차 과감하게 비판했습니다.

그는 스승에 대한 비판뿐만 아니라 그가 살던 시기에 우주를 지배하고 있었던 교회를 비판하기도 했습니다. 그의 비판 대상은 교회의 신학이 진리를 드러내고 있지 못하다는 것이었습니다. 그는 교회를 비판했고 그로 인해 1324년에 신학의 학문적 성격을 파괴했다는 이유로 기소됐습니다. 하지만 그는 여기서도 굽히지 않았습니다. 더 이상 학문적 논의로 진리를 드러낼 수 없다고 생각하고 그는 실천적인 문제에 관심을 갖기 시작했습니다.

이를 잘 드러내 보이는 것이 바로 1324년 이후에 그가 쏟아냈던 정치 영역과 윤리 영역의 글들입니다.

오캄의 꼬장꼬장한 성격은 그의 학문을 대하는 태도에서도 잘 나타납니다. 오캄은 눈에 보이는 것만 믿겠다는 원칙을 고수하는 듯 보입니다. 왜냐하면 오캄은 존재하는 것은 오직 개별자밖에 없다고 생각합니다.

보편자는 실제로 존재하지 않고 이름만 있다고 주장하기 때문에 오캄은 유명론자입니다.

‘오캄의 면도날’의 핵심은 “적은 가설과 가정을 통해 현상을 설명할 수 있는 이론이 불필요하게 많은 것을 가정하는 것보다 더 낫다”로 요약됩니다.

세상을 설명하는 경제적 법칙을 말합니다. 이 세상을 깜짝 놀라게 한 천재 과학자 아인슈타인의 상대성이론은 ‘E=mc²’으로 단순 명료하게 정리됩니다. 이렇게 할 수 있었던 배경에는 유클리드 기하학의 평행정리를 부정하는 비유클리드 기하학의 가설을 받아 들였기 때문에 가능해진 것입니다. 즉, 이 우주 공간은 평평한 것이 아니라고 가정한 것입니다.

경제학 교수 두 명이 표류하다가 무인도에 도착합니다. 정말로 아무것도 없는 그런 무인도 말입니다. 며칠 뒤 통조림 하나가 둥둥 떠서 해변에 도착합니다.

한 경제학자가 다른 경제학자에게 “이 통조림을 어떻게 따야 하지”라고 묻습니다. 그랬더니, 다른 경제학자가 이렇게 대답합니다. “일단 여기에 통조림 따개가 있다고 가정합시다.”

썰렁한 농담으로 들리십니까? 이것이 상식적으로 썰렁하게 느껴지는 이유는 문제의 핵심이 바로 통조림 따개가 없는 상황에서 문제를 해결해야 하는데, 그 통조림 따개가 있다고 가정하고 문제를 해결하려고 하는 자세가 너무도 비현실적인 자세이기 때문입니다. 아니 통조림 따개가 있다면 토론할 이유조차 없는 것 아닙니까.

너무 많은 것을 미리 가정하고 현상을 설명하려고 하는 탁상공론적 자세를 꼬집는 농담 아닌 농담입니다.

지나치게 예를 강조해 복잡한 규칙과 법률을 만들어 내는 유가를 노자는 비판합니다.

형법이 아주 정교하게 다듬어져 있다는 것은 그 사회에 범죄가 많다는 것을 나타내주는 것”이라고 꼬집습니다. 즉, 복잡한 법률 체계가 오히려 범죄자를 양산하고 있다는 주장입니다.

조직 내에서 지나치게 복잡한 매뉴얼을 가지고 소통하려고 하면 오히려 더 소통이 되지 않는 것도 마찬가지입니다. 투명 경영, 윤리 경영을 소통하는 방법은 간단하게 하는 것입니다. 위반 사례를 구체적으로 101가지 지적하면 오히려 더 많은 예외를 둬 아예 백과사전 두께만큼의 규정집만 만들어 냅니다. 이래서는 아무런 도움이 되지 않습니다. 오히려 혼란만 가중시키게 되는 거죠.

 

 

 

 

복잡한 규정은 혼란과 부정을 낳는다

 

미국에 한 초일류 기업이 있습니다. 이 기업에서는 어떤 일을 해야 할지, 하지 말아야 할지를 결정할 때 모든 조직원에게 당부하는 것이 하나 있습니다. 자기 자신에게 간단한 질문 하나를 던지라는 것입니다.

“내가 하는 이 일이 내일 아침 신문에 헤드라인에 난다면 나는 당황할 것인 것인가? 아닌가?”

당황할 것처럼 스스로 생각되면 절대 하지 말라는 겁니다. 만약에 괜찮을 것 같으면 해도 된다는 겁니다. 그래도 헷갈리면 다시 이번에는 이런 질문을 한 번 더 던져 보라는 겁니다.

“나는 내 자식에게 이 이야기를 떳떳하게 할 수 있는가?”

말해주기에 부끄러우면 그 일을 하지 말라는 겁니다. 떳떳하면 해도 된다는 겁니다. 자, 간단하면서도 얼마나 파워풀한 윤리 테스트입니까. 단순한 것이 복잡한 것보다 훨씬 낫습니다.

새로 직원이 들어오면 당연히 직무교육을 시켜야 합니다. 이때 주의해 할 점은 ‘왓 투 두(What to do)’는 비교적 자세하게 가르쳐야 합니다. 그러나 ‘하우 투 두(How to do)’에 대해서는 간결하게 말해준 다음 직원의 스타일에 맡기는 것이 좋습니다. 이걸 거꾸로 하는 분들이 있습니다.

“제가 해야 할 일이 무엇인가요?”

“자네 눈에는 안 보이나? 일할 게 널렸다 널렸어!”

이런 식으로 두루뭉수리하게 말하면 자신의 업무 영역에 대한 이해가 될 리 없습니다. 반면에 부하의 일하는 스타일을 존중하지 않는 소통 방식은 일일이 간섭하는 겁니다. 이런 소통 방식에 대해 부하들은 자신을 로봇이라고 생각하게 되고 일할 의욕을 결국 상실하게 됩니다.

직원들에게 언제 사표 내고 싶으냐고 물어 보면 “상사가 자신을 불신하고 있다고 느낄 때”라는 답이 가장 많이 나옵니다. 그다음 언제 불신 받고 있다고 느끼느냐고 물으면 자신이 일하고 있을 때 사사건건 간섭할 때라는 당연한 답이 나옵니다.

 

항상 사전 보고를 번거롭게 요구하는 상사는 부하도 못 믿는 부정적 소통 방식을 취하고 있는 겁니다. 명령과 보고는 간단명료할수록 좋습니다. 단 여기에 조건이 하나 있습니다. 충분한 교육 훈련, 시간 자원을 주고 난 뒤 간단명료하게 소통하는 것이 핵심입니다.

오캄의 면도날을 적절하게 사용하는 리더는 현명합니다.

 

불필요한 규칙들을 과감하게 정리하세요. 불필요한 자리들을 과감하게 정리하세요. 불필요한 활동을 줄이십시오. 그리고 무엇보다 불필요한 말씀을 줄이는 소통을 하십시오.

 

 

 

 

 

 

 

 

 

 

 

다음 두 주장을 비교해보자.

 

“우리는 자명성이나 …… 경험에 근거한 것이거나 …… 관찰에 의해 검증된 명제로부터의 논리적 연역에 근거한 것이 아니라면, 어떤 진술이 참이라고 확증하거나 어떤 것이 존재한다고 주장할 수 없다.”

 

“어떤 진술이 유의미하다는 것은 그 진술이 참이라는 것을 그 의미에 의해서 분명하게 밝힐 수 있거나, 경험에 의해서 확실하게 혹은 개연적으로 검증할 수 있다는 것이다.”

 

이 중에 하나는 14세기 초반, 다른 하나는 20세기 초반 철학자의 말이다. 앞에 주장에서 ‘자명하다’는 것은 뒤에 주장에서 ‘의미에 의해서 분명하게 밝힐 수 있다’는 것과 같은 의미로 생각할 수 있다. 그리고 앞에 주장에서 ‘관찰에 의해서 검증되었다’는 것은 뒤에 주장에서 ‘경험에 의해서 확실하게 혹은 개연적으로 검증할 수 있다’는 것과 대동소이하다. 구분할 수 있겠는가? 어느 것이 14세기이고, 어느 것이 20세긴가? 물론 구분하기 쉽지 않다. 사실 이 둘이 말하는 바는 거의 같다.

 

 

 

 

 

그럼 다시 물어보자. 위 주장들은 14세기와 어울리는가, 아니면 20세기와 어울리는가? 종교가 인간 이성을 심각하게 제한했던, 그래서 일반적으로 학문의 암흑기라고 불리는 중세 14세기와 상대성 이론과 양자 역학 등의 비약적인 발전으로 과학이 모든 지식의 모범으로 여겨졌던 20세기 초반 중에서 어느 시대에 더 어울리는 주장인가? 20세기 초반 과학의 엄청난 성공을 경험한 몇몇 지식인들은 그 어떤 학문 분야보다 과학은 합리적이라고 생각하게 되었다. 그들은 당시 심각한 사회적인 문제들이 그런 과학적 방법을 사용하지 않았기 때문에 발생한 것으로 생각했으며, 따라서 과학 특유의 방법을 사용한다면 당면한 사회적 문제를 해결할 수 있으리라 기대했다.

 

 

20세기 초반, 과학의 성공을 경험한 몇몇 지식인들은 ‘관찰(경험)에 의해 검증될 수 없는 주장들’은 무의미한 것으로 여겼다.

 

 

이때 과학 특유의 방법의 핵심을 이루는 것은 경험(관찰)에 의한 검증이었으며, 경험에 의해서 검증될 수 없는 주장들, 예컨대 형이상학적, 종교적, 이데올로기적 주장들은 무의미한 것으로 제거하려고 했다. 이런 종류의 주장을 했던 사람들로는 논리 실증주의(logical positivism) 혹은 논리 경험주의(logical empiricism)가 대표적이다. 이런 점을 생각할 때, 위의 두 주장은 20세기 초반과 더 어울린다고 할 수 있다.

사실 두 번째 인용문은 대표적인 논리 실증주의자 중에 한 명인 알프레드 에이어(Alfred Jules Ayer)의 것이다. 그리고 첫 번째가 바로 14세기 초반 중세 철학자의 주장이다.

정말 14세기 초반 중세 철학자의 주장으로 보이는가? 이 주장을 문자 그대로 받아들인다면, 경험에 의해서 검증되기 어려운 종교적인 주장도 참이라고 확증될 수 없는 것들이 된다. 14세기 초반 중세 철학자가 이런 주장을 하는 것이 정말로 가능한가?

 

물론 그렇다. 이해의 실마리는 생략된 부분에 있다. 위 인용문 ‘……’ 부분에는 무엇이 생략된 것으로 보이는가? 자명한 것, 경험에 의해서 검증된 것 이외에 우리가 참이라고 확증할 수 있는 것이 그 부분에 생략되어 있다. 무엇이 생략되었을 것 같은가? 비록 교황과 황제들이 정치적으로 대립하고, 흑사병으로 인해 교회에 대한 신뢰가 떨어지고 있었던 14세기 초반이었지만, 그때는 여전히 중세였다. 여전히 신의 권능과 말씀은 의심할 수 없는 것이었다. 과연 무엇이 생략되었겠는가? 그것은 바로 신 혹은 신의 말씀, 즉 계시다. 이것을 보충하면 위 인용문은 다음과 같다.

 

"우리는 자명성이나 계시 또는 경험에 근거한 것이거나 아니면 계시된 진리나 관찰에 의해 검증된 명제로부터의 논리적 연역에 근거한 것이 아니라면, 어떤 진술이 참이라고 확증하거나 어떤 것이 존재한다고 주장할 수 없다.”

 

 

윌리엄 오컴을 스케치한 그림(14세기, Ockham's Summa Logicae에서 발췌).

 

 

비록 경험과 계시가 불편하게 동거하고 있지만, 생략되어 있는 부분을 채우니 이제 중세 철학자의 주장이라는 것이 이상해 보이지 않는다. 이런 주장을 한 중세 철학자는 바로 윌리엄 오컴(William of Ockham)이다. 오컴 자신이 원했던 결과는 아니었지만, 이 경험과 계시 사이의 불편한 동거는 결국 종교와 철학을 조화시키려는 기존 중세 철학자들의 노력에 결정적인 타격을 가하게 되며, 이후 홉스와 흄 등의 영국 경험론자들에게 큰 영향을 주게 된다. 물론 그 영향은 20세기 논리 실증주의에게도 남아있다고 말할 수 있다.

 

윌리엄 오컴은 토마스 아퀴나스(Thomas Aquinas), 존 둔스 스코투스(John Duns Scotus)와 더불어 후기 중세 철학 Big3에 포함된다. 1280년대 말 영국 런던 근처 오컴이라는 지역에서 태어났으며, 1347년 즈음 독일 뮌헨에서 (아마도) 흑사병으로 죽었다. 그는 신학자이자, 철학자 그리고 정치가로 알려져 있다. 그의 정치적 활동은 그가 참여한 수도사의 청빈에 대한 논쟁과 관련되어 있다. 이 논쟁은 단순히 신학적인 논쟁이 아니었으며, 당시 교황인 요한 22세와 독일 황제였던 바바리아의 루이스(Louis the Bavarian) 사이의 정치적 투쟁이라고 부를 수 있다. 그때 오컴은 독일 황제 편에서 그 투쟁을 이끌었던 중요 지도자 중에 한 명이었다.

 

물론 이런 철학 외적 활동 때문에 그가 유명한 것은 아니다. 혹시 당신이 그의 이름을 들어봤다면, 그것은 아마도 다음 두 가지 때문일 것이다. 면도날과 유명론. 과거 인물에 대한 일반적인 이미지가 대부분 그러하듯 오컴의 철학을 ‘면도날과 유명론’으로 요약하는 것은 잘못이다. 그는 면도날로 비유되는 철학적 원칙을 처음으로 제시한 사람이 아니었으며, 엄격하게 말하자면 유명론자도 아니었다. 이제 이 두 가지에 대해서 좀 더 알아보자.

 

 

 

 

 

검약의 원칙(principle of parsimony)’, ‘경제성의 원칙(princple of economy)’과 같은 말로 사용되는 ‘오컴의 면도날(Ockham's razor)’은 일반적으로 ‘존재자의 수를 불필요하게 늘려서는 안 된다.(Entia non sunt multiplicanda sine necessitate)’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예를 들어 생각해보자. 아리스토텔레스 물리학에 따르면 달 윗 세계(천상계)에서 성립하는 물리법칙과 달 밑 세계(지상계)에서 성립하는 물리법칙은 서로 다르다. 하지만 뉴턴의 역학은 그 둘을 구분하지 않는다. 달 위의 세계든, 달 밑의 세계든 오직 하나의 물리법칙만 있을 뿐이다. 이런 점에서 뉴턴 역학과 달리 아리스토텔레스의 물리학은 불필요하게 다수, 즉 천상계와 지상계를 상정했다고 말할 수 있다. 이때 검약의 원칙은 이 둘 중에서 그런 것을 상정하지 않고 보다 단순한 뉴턴 역학을 선택하라고 조언한다. 오컴의 면도날에서 ‘면도날’은 이론에 불필요하게 추가된 존재자를 싹둑 잘라 버리는 것을 비유한 것이다.

 

그러나 이런 검약의 원칙에 왜 ‘오컴’이라는 이름이 붙었는지는 불분명하다. 오컴 이전의 철학자들, 가령 토마스 아퀴나스, 둔스 스코투스는 물론이고 심지어 아리스토텔레스에게서도 이런 원칙은 발견되며, ‘오컴의 면도날’이라는 용어는 오컴이 죽은 후 수 세기가 지난 19세기에 처음 등장했다. 한편 검약의 원칙으로 흔히 알려져 있는 ‘존재자의 수를 불필요하게 늘려서는 안 된다.’라는 경구도 오컴의 글에는 등장하지 않는다. 그렇다면 검약의 원칙에 그의 이름이 붙은 것은 기껏해야 오컴이 그 원칙을 가장 충실하게 적용했기 때문인 듯하다. 하지만 그가 이 원칙을 어떻게 적용하는지 이해하는 데 있어 주의해야 할 것이 있다.

 

 

오컴은 모순을 제외하고 신에게 불가능이란 없다고 보았다. 신이 원한다면 물리 법칙에 위반되더라도 무거운 물체가 위로 올라갈 수도 있다는 것이다.

 

 

오컴에게서 찾아 볼 수 있는 검약의 원칙은 맨 처음 소개한 인용문으로 요약될 수 있다. 그 인용문은 무언가를 참이라고 확증하기 위해서는 충분한 이유가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물론 그 이유에는 신의 계시, 경험 등이 포함되어 있다. 즉 오컴의 검약의 원칙은 충분한 이유 없이 무언가를 참이라고 믿어서는 안 된다는 것으로 요약된다. 이것은 우리 인간의 지성에 적용되는 원칙이다. 다른 말로 우리가 세계에 대한 지식을 확립하는 데 있어 갖추고 있어야 할 원칙이라는 것이다. 하지만 이 원칙은 신이 만든 이 세계에 적용되지는 않는다. 다른 말로, 오컴에게 있어 ‘신은 이 세계를 만들 때 불필요하게 존재자의 수를 늘리지 않았다’, 혹은 ‘신은 이 세계를 가장 간단하게 만들었다.’는 식의 주장은 성립하지 않는다. 신학자인 오컴에게 있어 모순을 제외하고 신에게 불가능한 것이란 없다. 여기서 모순을 제외한다는 것은 ‘둥근 사각형’, ‘결혼한 총각’과 같은 것은 신도 만들 수는 없다는 말이다.

 

모순을 제외하고 무엇이든 만들 수 있는 신에게 불필요한 존재자를 늘리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 아니며, 신이 원한다면 이 세계는 충분히 그렇게 만들어졌을 수 있다. 이런 점에서 신은 우리가 알고 있는 물리 법칙을 위반하는 일들을 할 수 있으며, 물리 법칙 없이도 무슨 일이든 할 수 있다. 가령 우리가 사는 세계에서 무거운 물체는 아래로 떨어지기 마련이지만, 신이 원한다면 무거운 물체가 위로 올라 갈 수도 있다. 바로 이런 의미에서 기적은 가능하다.. 그리고 바로 이런 의미에서 신만이 필연적이며, 그것을 제외한 모든 것은 우연적이다. 여기서 우연적이라는 말은 동전 던지기와 같은 임의성(randomness)을 말하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필연과 대비되는 의미에서, 우리가 사는 이 세계가 지금과 달랐을 수도 있었다는 것이다.

 

 

 

 

오컴의 면도날과 더불어 한 가지 더 언급할 만한 것은 그의 유명론(nominalism, 唯名論)이다. 먼저 유명론이 무엇인지 생각해보자. 당신은 지금 어딘가에 앉아 컴퓨터를 보고 있다. 아마도 당신은 인간일 것이다. 인간인 당신은 존재하는가? ‘존재’라는 말이 들어 있다고, 당황할 필요 없다. 어려운 질문이 아니다. 당연히 존재한다. (물론 존재하지 않는다고 의심할 수 있다. 아무튼 우선 상식적으로 생각해보자.) 인간인 당신이 존재한다는 것이 당연하다면, 이제 다시 물어보자. 당신은 몇 개인가? 당연히 1개다. 이것은 의심스럽지 않다. 당신과 아주 유사한 일란성 쌍둥이 동생이 있다고 하더라도 그 쌍둥이 동생은 당신이 아니다. 당신은 분명 하나이다. 다시 생각해보자. 당신은 지금 PC방에 앉아 있다. 당신 옆에는 친구들이 열심히 게임을 하고 있다. 당신 친구들 각각은 다 하나이다. 기한이도 하나이고, 규삼이도 하나이고, 미노도 하나이고, 석이도 하나다. 하지만 인간은 모두 몇 명인가? 인간인 당신과 당신 친구들 각각은 하나이지만, 인간은 하나가 아니다.

 

이렇게 인간 각각은 하나씩 있지만 인간은 여럿이라고 말할 때 우리는 무언가를 가정하고 있다. 즉 인간인 당신과 당신 친구들이 공유하고 있는 것으로, 그것을 가지고 있으면 인간이라고 부를 수 있는 그 무엇을 가정하고 있다. 보통 그런 것을 ‘보편자’(universals)이라고 부른다. 그것은 인간이라면 보편적으로 가지고 있는 것을 의미한다. 그리고 그런 보편자를 가지고 있는 각각의 인간과 같은 것을 ‘개별자 ’(particulars)라고 부른다. 가령, 점심 대신 먹으려고 여기 놓아둔 붉은 사과는 개별자이지만, 그 붉은 사과가 가지고 있는 듯 보이는 붉음(redness)과 같은 것은 보편자이다. 이런 보편자는 여러 개별자에 나타날 수 있다. 즉 앞에 있는 사과도 붉고, 소방차도 붉고, 늦은 오후의 태양도 붉다. 각각의 개별자는 붉음이라는 보편자를 가지고 있다.

 

 

사과, 토마토, 붉은 피망 등은 각각 '개별자'이지만 각각이 가지고 있는 붉음은 '보편자'이다.

 

 

한편 개별자가 존재하는 것은 다소 분명하다. 그것은 분명 어떤 시공간의 한 위치를 점유하고 있으며, 한 번에 여러 곳을 점유할 수 없다. 당신은 지금 어떤 모니터 바로 앞에 앉아 있다. 하지만 이와 동시에 모니터 뒤에 앉아 있을 수는 없다. 개별자는 한 번에 여러 곳을 점유할 수 없다. 하지만 보편자는 다르다. 붉음이라는 보편자는 책상 위에 있는 붉은 사과에도, 냉장고에 있는 토마토에도 나타난다. 보편자는 동시에 두 곳에 나타날 수 있다. 이런 점에서 보편자의 존재가 의심스러울 수 있다. 하나의 보편자가 동시에 여러 곳에 나타날 수 있다는 것은 그것은 시공간을 초월해 있다는 말과 유사하다. 시공간을 초월해 있는 것이 존재한다고 말할 수 있을까?

 

유명론이란 그런 보편자의 존재를 부정하는 것이다. 존재하는 것은 개별자 밖에 없으며, 개별자들 사이의 공통적인 것은 오로지(唯) 이름(名)밖에 없다는 것이 바로 유명론이다. 이 유명론의 대표적인 인물이 바로 오컴이다. 유명론과 관련해서 몇 가지 기억할 만한 것이 있다. 우선 보편자가 시공간을 초월해 있다는 이유에서 오컴은 그 존재를 부정한 것은 아니라는 점이다. 오컴에게 있어 시공간을 초월한다는 것이 그것의 존재를 의심하게 만들지는 못한다. 시공간을 초월했음에도 그가 존재한다고 생각했던 것이 있다. 무엇이겠는가? 어렵지 않게 답을 찾을 수 있을 것이다. 그것은 바로 신과 천사들이다. 두 번째로 오컴의 유명론은 검약의 원리로부터 도출된 것이 아니라는 점도 언급할 만하다. 일견 오컴은 자신의 면도날을 이용해서 불필요해 보이는 보편자를 싹둑 잘라 버렸다고 생각할 수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이는 오해다. 오컴은 (검약의 원칙을 따라) 보편자를 믿을 만한 충분한 이유가 없기 때문에 이것을 거부한 것이 아니다. 앞에서 언급했듯이, 신은 마음만 먹으면 보편자를 비롯해서 많은 다양한 것들을 존재하게 할 수 있다. 그보다 그것을 상정한 이론 ― 특히 그의 스승이라고 할 수 있는 둔스 스코투스의 이론 ― 이 정합적이지 않다는 이유 때문에 보편자를 거부한다. 마지막으로 오컴이 보편자의 존재를 거부했다는 것을 그가 보편적인 것에 대한 어떤 논의도 거부했다고 생각하는 것 역시 잘못이다. 그는 그런 논의가 불가능하다고 생각하지 않았으며, 다른 방식으로 보편적인 것을 다룰 수 있다고 여겼다.

 

 

 

 

다소 전문적으로 서술하자면, 그는 온건한 유명론자 혹은 개념론자(conceptualist)로 분류될 수 있을 것이다. 앞에서도 언급했지만 하지만 철학사적으로 그가 중요한 이유는 사실 그의 논리학에 있다. 그의 논리학의 독창성과 영향력은 과소평가 되어서는 안 될 것이다. 오컴에 대한 보다 전문적인 이해를 위해서는 무엇보다 그의 논리학에 대한 이해가 선행되어야 할 것이다. 마지막으로 하나만 더 언급하자. 움베르토 에코의 소설 [장미의 이름]에 등장하는 ‘프란체스코 수도사 윌리엄’은 오컴을 모델로 한 것이라고 알려져 있다. 에코는 사실 윌리엄 오컴을 실제 주인공으로 삼고자 했지만 몇 가지 이유에서 단념했다고 한다. 소설의 시대적 배경과 주인공의 몇 가지 말들로부터 윌리엄 오컴의 흔적을 찾을 수도 있을 것이다.

 

글 박일호 / 경희대 포스트 닥터 연구원

출처 : 네이버 캐스트

 

 

 

 

 

 

스콜라 철학

 

중세 신학은 흔히 스콜라 신학이라고 부른다. 중세의 철학은 곧 신학이었기 때문에 그것은 스콜라 철학이라고도 불린다. 중세에 있어서 철학의 본분은 이미 정해진 교회의 교의(dogma)를 철학적 방식으로 설명하고 변증하고 조직화하는 것이었기 때문이다. 스콜라(Scholar)라는 말은 샤를마뉴 황제 시절의 궁정 학교를 가리키던 이름인데 변증학적 방법을 적용하여 기독교의 신앙과 신학을 해석하려는 경향이 학교와 강단을 중심으로 일어났기 때문에 기독교 신학을 스콜라주의라고 부르게 된 것이다. 그러므로 스콜라 신학 또는 스콜라 철학은 중세 로마 카톨릭 교회의 신학과 신앙 체계를 가리키는 말인 것이다.


스콜라 철학의 전개 시기


스콜라 신학의 역사는 세 단계로 구분되는데 제1기는 발생기로서 9-12세기의 기간이고 제2기는 전성기로서 13세기에 해당된다. 그리고 제3기는 쇠퇴기로서 14-15세기의 기간이다.


① 초기(발생기)


샤를마뉴 대제 시대(9세기)에서 12세기까지이며 신플라톤학파의 철학을 도입하고 거짓 디오니시우스의 번역에 의해 큰 영향을 받은 J.S.에리우게나와, 신앙과 이성의 관계를 명확하게 한정하고 스콜라 철학의 방법을 확립하여 <스콜라 철학의 아버지>라 불리는 캔터베리의 안셀무스가 대표자이다. 신의 존재에 관한 안셀무스의 증명은 유명하다.


② 전성기


스콜라철학의 전성기는 13세기이다. 아리스토텔레스 자연학서에서 아라비아철학을 이입(移入)함에 따라 재래의 신학과 독립된 지적 연구가 시작되었다. 이 새로운 연구를 대폭 채용하면서 그것을 전통적 스콜라 철학의 체계 속에 하나로 융화시킨 것이 아퀴나스이다. 신학에 대한 철학의 원리적인 독립성이 유지되면서도 전체적으로는 신학의 체계로 종합되어 있다. 이에 대해 보나벤투라는 전통적인 아우구스티누스적, 신비주의적 경향을 지켰다.


③ 말기(쇠퇴기)


말기인 14세기에는 신앙과 이성의 조화가 차츰 약화되었다. 유명론자(唯名論者) W.오컴, 신비주의자 M.에크하르트가 있다.


1.스콜라 철학의 발생기


스콜라 철학은 교양과 지성의 조화, 즉 종교와 철학의 유기적인 조화를 강조했다. 이 철학은 사실 고대 헬라 철학을 기독교에 혼합시킨 것이라 할 수 있다. 스콜라 철학의 종류는 대체로 세 가지로 나누어지는데 곧 이상론(理想論), 실재론(實在論), 유명론(唯名論)이 그것이다. 이상론은 플라톤 철학에, 실재론은 아리스토텔레스 철학에, 유명론은 스토아 철학에 그 기초를 두고 있다. 이들 고대 철학자들의 사상은 중세 교회 지도자들의 사상에 큰 영향을 미쳤으며 중세 후기 교회의 교리를 철학적으로 논증하는데 크게 작용하였다. 역사적으로 보면 초기의 교부들은 대체로 플라톤 철학에 크게 영향을 받았고 중세 초기의 스콜라 학자들은 신플라톤 철학에 크게 영향을 받았다. 그러나 스콜라 학파 학자들의 중요 논점은 실재론과 유명론 철학 중 어느 것을 취하느냐 하는 것이었다. 그리고 아리스토텔레스의 철학은 토마스 아퀴나스와 둔스 스코투스와 같은 학자들에 의해 중세 후반기의 철학이 되었으며 그 후로 로마 카톨릭 교회의 교의 신학이 되었다.


1.스콜라 철학의 특징


스콜라 학파는 성경 진리(교의)와 이성(理性)을 조정함으로써 교회 교리를 체계적으로 정리하여 소위 [가장 완전한 신학](Summa Theologia)이라는 것을 만들려고 노력했다. 그러나 그들이 생각하는 완전한 신학이란 계시와 이성 곧 하나님의 빛과 인간의 생각을 절충하는 것이었으며 다른 한편으로 전통적으로 내려오던 교의 신학을 그 시대 사조에 맞게 재조정하는 것이었다. 그들이 교의와 이성을 조정하려고 한 것은 이성을 신앙의 근거로 삼기 위해서였으며, 교회 교리를 정리한 것은 하나님에 대한 인간의 모든 지식을 정리함으로써 세상이 보다 쉽게 하나님의 진리의 세계로 들어갈 수 있도록 하기 위해서였다. 그들은 성경을 학문의 기본으로 삼았고 성경 해석을 위해 교회의 전통도 참고하였다. 그리고 스콜라 철학자들은 교부들로부터 계승받은 교의의 전달자였다. 이들은 성경 해석이나 성경 신학에 새롭고 근본적인 공헌을 하려고 힘쓰기보다도 조상들로부터 계승받은 교의를 확인시키기에 힘썼다.


스콜라 철학의 가치는 그 지적 구조가 대단히 광대했으며 신학 방법에 일대 진보를 이룩하였다는 점에서 먼저 찾아볼 수 있다. 그들은 기독교의 진리와 신학을 합리적이고도 철학적으로 논증하려고 하였다. 그리하여 진리를 해석하는데 무리를 하거나 오류를 범하지 않도록 애썼다.


그러나 스콜라 철학에는 큰 약점이 있었는데 우선 그들은 역사적 평론을 무시하고 터무니없는 철학의 기초 위에 신학 체계를 수립했으며 그들이 행하였던 성경 해석 또한 사실에 바탕을 둔 것이라기보다는 전설(전통)에 지나치게 의존하였다는 점을 들 수 있다. 또한 그들은 형식적 논리를 너무 과도하게 구사한 나머지 궤변으로 흐르는 경향이 없지 않았다. 한편 그들은 성경이나 교회 역사에 근거가 없는 이론을 도입함으로써 '이단을 뒤집어 놓은 것이 정통'이라는 터무니없는 독단을 낳기도 했다.


스콜라 철학의 특징 요약


① 중세의 학문 연구는 먼저 성경과 교부(敎父)의 저서, 고대 그리스·로마의 철학자와 기타 저술가가 쓴 저서의 문헌적 연구에서 시작되었다. 그러므로 그 저서들의 독해·주석·해독이 가장 중요한 일이었다. 이때 성경은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는 것으로서 가장 중시되었다.


② 하나님의 말씀은 먼저 신앙에 의해 인간에게 받아들여지는데 '신앙'은 곧 인간이 거기에 내포된 하나님의 가르침을 '이해'하여 새 사람으로 다시 태어나기 위한 수단이었다. 그래서 '신앙의 이해'(intellectus fidei)라는 것이 스콜라 철학이 지향하는 목표였다. 이때 신앙과 이해(이성)는 서로 한 쪽이 다른 쪽을 요구하면서도 한 쪽이 다른 쪽에 용해되어 없어지는 것을 허용하지 않는 긴장 관계에 있으며 이것은 중세 철학을 구성하는 이대(二大) 요인이다. 한 쪽이 다른 쪽에 예속되면 스콜라 철학은 없어지며, 신앙과 이해가 긴장 관계에 있으면서도 종합될 때 스콜라 철학이 성립하는 것이다. 스콜라 철학의 다양성은 바로 이 종합의 다양성에 있다고 할 수 있다.


③ 교부와 철학자의 저서는 이것을 위해 사용되었다. 각 문제점에 따라 참조할 만한 전거(典據)들 곧 고대로부터 내려오는 여러 학설들이 수집, 정리되었던 것이다. 12세기 초의 P.롬바르두스의 [명제론집]은 이런 종류의 저서 중 대표적인 것이다. 아벨라르는 이 여러 견해를 각 논점에 대하여 긍정측과 부정측의 대립하는 양 쪽으로 분류하는 방법('이다'와 '아니다'의 방법)을 도입하였다. 13세기의 [숨마](Summa; 완전하게 정리된 결정적 신학)는 이 대립하는 여러 견해 사이에 조화와 종합을 이루려고 한 시도의 집대성이다. T.아퀴나스의 신학대전(Summa Theologiae)은 그 가운데 가장 저명한 것이다.


2.이 시기의 대표적 학자들


1.스코투스 에리게나(Scotus Erigena)


에리우게나라고도 불리는 에리게나는 아일랜드 사람으로 중세 초기의 가장 탁월한 사상가였다. 그는 845년 샤를 황제의 궁정 학교 교사로 있으면서 [거짓 디오니시우스]라는 책을 불어로 번역하고 [자연의 구분]이라는 책을 저술했다. 그의 사상은 시간의 흐름에 따라 그리스도인의 입장에서 벗어나 범신론적 입장을 띠었다. 그는 '하나님은 어떤 거룩한 신적 본질이며 연속적인 본질의 유출로 말미암아 우주 가운데 편만하신 분이라'고 주장했다. 그는 말하기를 '우주는 하나님 안에 있고 하나님은 우주 안에 있어서 그 본질과 정신과 생명이 되시며 그의 창조는 영원하며 영속적이어서 처음도 없고 끝도 없다'고 했다. 그는 또 주장하기를 '우주는 하나님께로부터 나와서 하나님께로 돌아가며 자연은 인간으로 말미암아 하나님께로 돌아가고 인간은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께로 돌아간다'고 했다. 이것은 그가 철학과 신학, 이성과 신학은 동일한 목적을 가지나 다만 형식만 다른 것이라고 생각하고 있음을 나타낸 것이다.


에리게나 이후에 나타난 그와 비슷한 철학자로는 중세의 에크하르트(Eckart)와 근대의 헤겔(Hegel)이 있다.

 


2.안셀무스(Anselmus, 1033-1109)


스콜라 철학은 안셀무스에서 시작하여 토마스 아퀴나스 때에 전성기를 이루었고 그 후에 몰락하였다. 안셀무스는 이탈리아 피드몬트의 아오스타에서 태어나서 프랑스 노르망디의 베크 수도원에서 수도하였다. 1093년에는 켄터베리의 대감독이 되었다.


그의 저서로는 유명한 [독백](Monologia), [대화], 그리고 [말씀이 육신이 되심]이 있다. 안셀무스가 기독교 사상에 공헌한 것 중 가장 중요한 것은 그의 실재론적 입장이었다. 그는 플라톤의 영향을 받아서 극단적인 실재론자였는데, 개념은 실물을 떠나 있으며 실물 이전에 있다고 주장했다. 그는 변증법을 가지고 기독교의 교리를 충분히 설명할 수 있다고 했다. 그의 저서 [대화]에 나오는 논리를 보면, '신은 모든 존재 중에서 가장 위대한 분이다. 신은 생각에서와 마찬가지로 실제로 존재할 수밖에 없다. 만일 신이 사고(思考)에서만 존재한다면 그보다 더 높은 존재가 있을 수 있기 때문에 이것은 불가능하다' 라고 했다. 이것은 신앙과 이성의 접촉점을 찾으려는 스콜라 철학의 가장 중요한 문제였다. 그의 [대화] 제1장 마지막 글에서 그가 한 말 곧 "나는 알기 위해서 믿는다"는 말은 신앙은 이성에 앞선다는 것을 암시하지만 그러나 신앙은 계시의 내용을 합리적으로 연구해야 완전하게 되고 완성된다는 것이 그의 주장이었다.


안셀무스의 실재론적 입장 못지 않게 중요한 것은 그의 '속죄론'이다. 그의 속죄론은 [말씀이 육신이 되심](Cur Deus Homo)이라는 책 속에 잘 나타나 있다. 그의 속죄론은 최초의 체계적 속죄론이라 할 수 있다. 그의 속죄론은 하나님의 영광에서 출발한다.


'사람이 세상에 존재하는 것은 하나님의 영광을 유지하며 마귀를 부끄럽게 하기 위함이다. 사람은 약하며 마귀의 유혹에 싸여 있다. 그러나 사람이 하나님을 믿음으로써 죄를 이기기만 한다면 사람보다 강한 것은 없으며 아무도 사람을 유혹할 수 없다. 그렇게 하여 타락한 마귀를 부끄럽게 할 수 있으며 하나님의 영광이 나타나게 될 것이다. 그러나 인류는 범죄함으로써 하나님의 영광을 나타낼 수 없게 되었다. 이런 상황에서 사람이 할 수 있는 일은 아무 것도 없다. 그러나 하나님은 사람을 위해 친히 사람이 되시고 사람들의 죄를 지고 죽으심으로써 구원의 길을 얻었다. 인류의 죄는 한없이 크나 그리스도의 죽음은 이 모든 죄를 덮고도 남음이 있다. 그리스도는 그에게서 태어난 모든 인류보다 크시기 때문이다. 이는 마치 원본이 수많은 사본보다 더 크고 중한 것과 같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의 죽음은 전 세계 인류의 죄보다 더 크다는 것이 증명된다.'


이러한 안셀무스의 속죄론의 영향을 입은 사람은 후에 나타나는 마그누스와 그의 제자 토마스 아퀴나스이다.

 


3.아벨라르(Abelard, 1079-1142)


안셀무스보다 조금 후에 등장한 아벨라르는 많은 점에서 안셀무스의 반대편에 서 있는 사상가라고 할 수 있다. 그는 프랑스의 브르따뉴에서 출생하였다. 그는 인격이 고매한 교수로서, 탁월한 철학과 신학 강사로서 학생들에게 인기 있는 학자였다. 그가 1115년 노트르담에 있을 때 그의 재능과 대담한 이론을 접한 많은 학생들로 인해 그의 사상과 생애는 널리 퍼지게 되었다.


아벨라르는 안셀무스의 제자였으나 그의 사상을 공허한 것으로 여기고 그와 대립하였다. 그 무렵 그는 파리에서 신학을 가르치면서 알게 된 여제자 엘루아즈(Heloise)와 사랑에 빠져서 비밀 결혼 생활을 했으나 그녀의 숙부에게 거세를 당하고 서로 헤어지게 되는 비극적 결말로 끝났다. 그 후 아벨라르는 1119년부터 1136년까지 수도원에 있었다. 그가 수도원장으로 있을 때도 그의 인기는 계속 높아져서 문하생이 수천명이나 되었다.


아벨라르의 탁월한 재능은 많은 적대자를 낳아서 삼위일체론(三位一體論)에 관한 논문이 공의회에서 소각되는 등 많은 박해를 받았다. 특히 그는 비평적인 사상으로 인해 한 때 그를 존경했던 기욤과 그의 제자로서 당시 가장 유력한 사상가요 신비주의자였던 베르나르두스(Bernardus)의 거센 반대를 받아 1140년 이단으로 선고를 받았고 2년 후 클루니 수도원에서 쓸쓸히 죽었다.


아벨라르는 중세에 있어서 가장 대담한 사상가였다. 그의 신학 사상은 진보적인 면이 강했다. 그는 신학 연구의 자유를 주장하였으며 성령의 영감에 대해 자유로운 의견을 가지고 있었다. 그는 성령의 계시는 신앙과 소망과 사랑과 성례에만 관계되는 것이고 다른 일에까지 확대시켜서 생각할 것이 아니라고 주장하였다. 따라서 선지자나 사도도 잘못될 수 있다고 했다. 원죄설에 대해서 그는 '죄는 각 개인의 자유로운 의지에서 기인하는 것이므로 죄를 원죄와 너무 연관시켜서는 안된다는 입장을 취했다. 그리고 속죄설에 대해서는 말하기를, 십자가는 하나님의 사랑의 표현이며 하나님의 아들의 희생은 죄인들의 영혼을 감화시키기 위해 행해진 것일 뿐이라고 가르쳤다. 이런 점에서 그는 근세의 도덕감화설(道德感化說)의 시조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이러한 그의 주장은 중세를 초월하여 근대 사상에 가깝다고 할 것이다. 다만 그의 사상은 논리로부터 출발하였을 뿐 신앙적 체험에서 나온 것이 적다는 점이 약점이다.

 


2.스콜라 철학의 전성기와 쇠퇴기


1.대학의 설립


초기 스콜라 철학은 12세기 중엽으로 끝나고 스콜라 철학의 전성기는 13세기에 이루어졌다. 이 시기에는 유럽 각지에서 대학들이 설립되었다. 대학은 처음에 교회나 수도원 부설의 교육 기관이었다. 그러던 것이 점차 이름난 학자들이 그런 교육 기관에서 연구와 강의를 하게 되자 많은 학생들이 몰려 들어 전문적 교육 기관인 대학을 이루게 되었다.


이탈리아의 볼로냐(1158년 설립)는 교회법과 민법으로, 프랑스의 파리(1186) 대학과 영국의 옥스포드(1200)는 신학으로, 이탈리아의 살레르노(1200)는 의학으로 이름이 났다. 당시 대학은 교사와 학생들이 상업조합(trade guild) 같은 단체를 만들어 상호 보호와 질서 유지 및 효과적인 지도 운영을 도모했으며 교수의 직업 규정도 만들었다. 그리하여 학생과 선생의 universitas scholarium(University of Scholars)이라 이름했다. 이런 대학교 조직은 1200년 경에 형성되었다.


중세 유럽의 대학들은 학문의 도장으로서 국가나 교회가 간섭하지 않았으며, 세금과 병역 의무가 면제되는 등 특권이 부여되었다.


2.이 시기의 대표적 학자들


1.알렉산더(Alexander of Hales, 1170?∼1245)


영국의 신학자요 철학자인 알렉산더는 헤일스에서 나서 파리대학에서 신학을 강의했다. 그는 박식하여 '불가항박사'(不可抗博士), '신학자의 왕자'라고 일컬어졌으며 스콜라 철학과 프란시스코회 학파를 창시하였다. 주요 저서인 {신학대전(神學大全)}은 아리스토텔레스의 자연학·형이상학 및 아라비아, 특히 아비켄나의 사상을 받아들인 최초의 대전이었다. 그러나 그의 견해가 신플라톤주의 영향을 받은 어거스틴·빅토르학파 설과 대립될 때에는 그들(어거스틴·빅토르학파)의 의견을 우선한다는 방법을 취하여 13세기 프란시스코회 신학 기초를 쌓았다. 그는 아리스토텔레스 철학을 통달하였고 그것을 사용하여 신학의 계통을 세우려고 노력하였다.


그는 궁극적 진리는 성경뿐이라고 하면서 온건한 실재론을 주장하였다. 그는 말하기를 '세속적인 일에는 지식이 믿음보다 앞서며 영적인 일에 있어서는 믿음이 지식보다 앞선다'고 했다. 그러므로 "신학은 지혜를 모아놓은 것이지 과학이 아니다. 신학은 경험을 통하여 얻는 지식처럼 연구를 통해 얻게 되는 지식이 아니다"라고 하였다. 그의 사상은 알베르투스 마그누스와 토마스 아퀴나스가 계승하였다.


2.보나벤투라(Bonaventura, 1221∼1274)


중세 이탈리아 신학자·철학자로서 토스카나 지방의 바뇨레조에서 출생하였다. 그는 알렉산더의 제자로서 1257년 T.아퀴나스와 함께 탁발수도회 수사로서는 처음으로 파리대학 신학박사 칭호를 얻었다. 그의 신학은 어거스틴에게서 시작되어 안셀무스가 확인한 전승적인 것이었다. 아퀴나스에 비해 그는 시간에서의 세상 창조를 이성의 빛으로 설명할 수 있다고 했다. 그는 영혼이 하나님의 형상을 인지하고 하나님의 존재와 무한 선을 이해함으로써 풍요로워지며 명상은 기도, 묵상, 덕성, 사랑이 요구되는 바 하나님의 은혜로 추진되어야 완성이 된다고 하였다.


3.알베르투스(Albertus Magnus, 1200?∼1280)


독일의 신비주의자로서 도미니코 단원이었던 그는 당대에 가장 유명한 신학자였다. 이탈리아 파도바대학 재학중 도미니크회에 들어가 풍부한 학식으로 <보편적 박사>라는 별명을 얻었고, 생전에도 Magnus(위대한 사람)이라고 존칭될 정도로 권위를 인정받았다.


그는 쾰른에서 18년간 교수하였으며 경험과학에 깊은 관심을 가지고 동·식물과 광물계의 관찰과 천문학적 연구를 하였는데, 이 영역에서는 경험만이 확실성을 부여한다고 주장하고 아리스토텔레스의 학설이라 하더라도 자신의 관찰 결과에 근거하여 주저 없이 정정하였다. 그는 신학자였으나 신학 연구와 교육을 위해서는 세계와 인간에 관한 학문, 즉 철학이 불가결하며 이와 같은 세속적 학문에 관해서는 아리스토텔레스가 최선의 교사라고 확신하였다. 이러한 견지에서 그는 '아리스토텔레스 철학의 모든 부분을 라틴세계 인간에게 이해 가능한 것이 되게 하자'고 계획하고, 아리스토텔레스의 모든 주요 저서의 주석을 씀으로써 이 계획을 실행에 옮겼다. 이처럼 그는 누구보다도 아리스토텔레스 철학을 적극적으로 평가하여 그것을 이용하여 교회의 교리를 세우려 하였다. 그의 체계에는 아리스토텔레스의 학설 뿐 아니라 신플라톤 철학이나 이슬람의 아비켄나에서 유래하는 요소도 섞여 있다. 그는 진정한 의미에서 있어서 신학을 하나의 과학으로 정의한 사람이었으며 매우 많은 저서를 낸 대학자요 주석가였다.


4.토마스 아퀴나스(Thomas Aquinas, 1225∼1274)


이탈리아 출신의 아퀴나스는 중세 스콜라 철학을 완성한 사람이다. 아리스토텔레스 철학을 카톨릭 세계관에 도입하여 체계화시키는 데 크게 공헌하였다. 그는 어거스틴, 칼빈과 함께 서방에 있어서의 세 가지 주요 신학 정신을 형성한 인물로 꼽힌다.


① 생애와 저술


아퀴나는 로마 황제령과 프리드리히 2세 영역의 경계에 있는 로카세카 성주의 아들로 출생하여 5살 때부터 몬테카시노에 있는 베네딕트회 수도원에서 교육을 받았다. 15세 경 전화(戰禍)를 피해 몬테카시노를 떠나 나폴리대학으로 옮겼다. 이곳에서 아리스토텔레스의 철학과 학문연구를 통해서 복음을 전파하는 것을 목표로 하는 탁발수도회인 도미니크회를 접하게 되었다. 가족의 완강한 반대를 물리치고 도미니크회에 들어간 그는 파리를 경유하여 쾰른으로 건너가 거기서 알베르투스 마그누스의 지도를 받았다. 과묵하고 큰 체격을 가진 아퀴나스는 마그누스에게 재능을 인정받아 파리대학 교수의 후보자로 추천되었다. [명제논집]의 해설 강의를 마친 아퀴나스는 1256년에 교수자격을 획득하였으나 탁발수도회원을 배격하던 파리대학의 규정에 따라 강의의 시작은 1년 뒤로 미루어졌다.


신학과 교수의 주요한 직무는 성경 강의 및 학문적 논점에 대한 토론의 주재(主宰)와 설교였으며, 이 시기의 대표직 저서로는 [유(有)의 본질에 관해서]와 소수의 성경 주석 외에, 당시의 철학·신학의 주류였던 어거스틴주의를 아리스토텔레스의 철학에 바탕을 두는 진리에 따라서 보완하려고 시도했던, 정기토론집 [진리에 대하여]가 있다.


아퀴나스는 관례에 따라 3년간 교수로 재직한 뒤, 이탈리아로 돌아가 약 10년 동안 교황청 및 도미니크회 부속학교에서 교수직과 저작에 전념하였다. 이 시기에 그의 사상은 두드러지게 성숙하였는데, 그 계기가 된 것은 같은 도미니크 회원인 모르베카의 길레루무스의 번역활동에 도움 받아 아리스토텔레스와 신플라톤철학의 정교한 연구를 달성하였다는 점과, 정열적인 교황 우르바누스 4세의 요청을 받고 동방교회와 공동으로 그리이스 교부(敎父) 및 교의사(敎義史)의 본격적 연구에 몰두하게 되었던 점이다. 이 시기의 주요 저서로는 [대이교도대전](對異敎徒大全), 정기토론집 [하나님의 능력에 대하여], 보통 [황금연쇄](黃金連鎖)로 불리는 4대복음서의 연속 주석 및 [신학대전(神學大典)] 제1부 등이 있다.


1269년에 다시 불붙기 시작한 탁발수도회 배격운동에 대처하기 위해서, 아퀴나스는 다시 파리대학 교수로 취임하게 되었는데 그는 계속해서 3년간을 프란시스코회를 중심으로 하는 신학보수파 및 인문학과의 극단적 아리스토텔레스주의자도 포함된 3개파의 논적(論敵)들과 논쟁하면서 [신학대전] 제2부, 그리고 몇 가지의 성서 주석과 정기토론집, 아리스토텔레스의 주요 저서의 주석 등 많은 저작 활동을 하였다.


1272년 도미니크회의 새로운 신학대학을 설립하기 위해 나폴리로 돌아온 그는 다른 저서와 병행해서 [신학대전] 제3부를 연이어 저술하였으나, 1273년 12월 6일 성 니콜라우스의 축제일 미사 후 돌연 집필을 중단하였다. 이 사실에 놀란 동료들에 대해서 '나에게 새롭게 계시한 점에 비하면 이제까지 저술한 것은 지푸라기에 불과하다'고 그 이유를 설명했다 한다. 1274년 초 교황의 요청에 따라 병든 몸을 무릅쓰고 리옹 회의로 향해 여행길에 올랐으나 중도에서 병세가 악화되어 고향 근처인 포사노바의 시트회 수도원에서 죽었다.


아퀴나스는 50세를 채 못 살았지만 60여권의 저서를 남겼으며 이 저서들은 주로 철학서와 성경 주석, 설교 및 변증학 서적들이었다. 그의 가장 중요한 저서는 교리 신학과 윤리학이며 그의 필생의 대작 [신학대전](Summa Totus Theologia)이다. 그는 이것은 다 완성하지 못하고 죽었다.


② 사상


그의 사상 체계는 신플라톤적 아리스토텔레스주의의 철학과 카톨릭 교회 교리를 통일, 종합한 것이었다. 아퀴나스는 신학 연구의 목적이 하나님을 알고 인간의 기원과 미래, 운명을 아는 데 있다고 했다. 또한 그 지식은 이성과 계시로써 얻는데, 이성으로 부족하기 때문에 계시의 보충이 필요하며, 계시는 성경에 있고 성경은 유일하고 궁극적인 권위이며 성경은 기독교회의 회의와 교황들의 해석에 비추어 이해되어야 한다고 하였다. 이것은 인간의 이성이 계시를 이해하며 철학과 신학은 모순되는 것이 아니고 서로 상관 관계에 있으며 상대적인 것임을 의미했다. 그러나 타락한 인간의 이성은 불투명하며 계시를 올바르게 이해할 수 없기 때문에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새로운 피조물이 되고 그를 통해서 성경의 계시를 알지 않으면 안된다고 했다.


그의 신론은 아리스토텔레스와 신플라톤의 개념을 결합시킨 것이다. 그는 신은 제1 원리요 순수한 활동이므로 가장 참되고 완전하신 존재라 하였고, 신은 절대적 본질이시며 만물의 근원, 종국(終局)이라고 하였다. 또 그는 삼위일체론과 그리스도의 인격에 대해서는 어거스틴과 칼케돈 신조를 따랐다. 그는 또한 영혼(soul)과 정신(spirit)의 옛 구별을 버렸다. 사람의 영혼은 지성과 의지를 가진 한 단위로 비물질적이라 했고, 인간의 최고선(最高善, summum bonum)은 명상과 영적 교제로서 하나님을 바라보며 즐거워하는 것이라고 했다.


그리고 창조된 인간은 원래 자연의 능력에 덤으로 그 최고선을 찾으며 기독교의 3덕인 신망애(信望愛)를 실천할 수 있는 은사를 받았다고 했다. 그러나 이것을 아담의 타락으로 말미암아 잃게 되었으며 타고난 자연적 능력까지 부패되어 본래의 의를 상실했을 뿐 아니라 더 낮은 상태로 전락하게 되었다고 했다. 이러한 인간의 회복은 신이 값없이 주시는 은혜로만 가능하게 된다. 하나님은 예수의 희생 없이도 인간의 죄를 사하시고 은혜를 주실 수 있었으나, 예수의 거룩한 사역이 하나님이 택하실 수 있는 가장 지혜롭고 효과적인 방법이었으므로 그것을 사용한 것이라고 했다. 예수의 거룩한 사역은 인간의 죄에 대한 보상을 뜻했고 그는 상 받으실 공로를 세우셨으며, 사람들로 하여금 그를 사랑하게 하셨다는 것이다.


여기서 아퀴나스는 안셀무스-아벨라르의 견해를 발전시키고 결합시켰다. 그는 예수의 죽으심은 인간의 죄 값을 치르고도 남았으나 하나님이신 그에게는 필요한 것이 없어 직접 상을 받으실 수 없으므로, 그의 동생격인 인간들이 그 덕을 보게 되었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예수는 인간이 스스로 할수 없는 거룩한 사역을 대신하신 것이 되는 셈이다. 그리고 한 번 구속을 받고 하나님의 은혜를 받아서 행한 선행은 상을 받을 수 있다고 했다.


아퀴나스는 은혜는 아무렇게나 사람에게 찾아오는 것이 아니라 성례전(聖禮典)을 통해서 온다고 했다. 그리고 성례는 형식과 내용의 두 요소로 이루어진다고 했다. 즉 성례의 집행자는 예수 그리스도가 교회에 명한 것을 대행하는 것으로 생각해야 하며, 성례를 받는 자는 하나님의 은혜를 받는다는 믿음으로 해야 한다고 했다. 그는 성례를 하나님의 은혜를 누리는 중요한 도구로 보았다.


그는 성만찬은 화체설(化體說)을 인정하였을 뿐 아니라 더욱 분명히 설명하였다. 즉 집례자가 예문(禮文)을 읽으면 떡과 포도주의 모양과 맛은 그대로 있으나 하나님의 능력으로 그 물질의 본질이 예수의 살과 피가 된다는 것이다.


그의 내세관은 악인은 죽으면 곧 지옥으로 내려가며 교회가 제공한 은혜를 충분히 받은 자들은 즉시 천국으로 간다는 것이다. 그러나 하나님의 은혜를 충분히 받지 못한 대부분의 성도들은 연옥으로 내려가서 얼마동안 훈련과 징계를 받고 그들을 위한 성도들의 기도와 선행으로 다시 하나님 나라로 간다고 했다.


여기서 우리는 아퀴나스의 교회관을 엿볼 수 있는데 그는 오직 로마 카톨릭 교회만이 구원 기관이므로 누구든지 구원을 받으려면 반드시 로마 카톨릭 교회 안으로 들어와야 한다고 했다. 또한 보이는 교회에는 보이는 머리가 필요한데 이 머리는 로마의 교황이라 하였다. 그러므로 누구든지 실제로 구원을 받으려면 반드시 교황에게 복종하여야 한다는 것이다. 이것은 로마 교황 무오설(無誤說)을 주장한 것이요 로마 교황을 신앙과 생활의 실질적 주관자로 인정한 것이다.


아퀴나스의 신학적, 철학적 위치가 크기 때문에 그의 성자적, 시인적 위치는 등한시되고 있으나 그는 신학자로서뿐 아니라 이 두 방면에서도 탁월한 사람이었다. 그는 생활이 순결하였으며 그의 논리는 딱딱하지 않고 아름답고 질서정연하였다. 그가 쓴 찬송가 특히 그리스도의 몸에 관해 쓴 것은 카톨릭 교회의 오랜 찬송이 되었다.


토마스 아퀴나스의 사상 체계는 신플라톤적인 그의 사상의 새로움에 압도적 인상을 받았던 그 시대 사람들에 의해 학설의 일부가 1277년 파리와 옥스퍼드에서 개최된 이단 선언의 대상이 되었다. 그는 어거스틴을 기원으로 하는 교부 사상, 아리스토텔레스 철학, 신플라톤 철학, 이슬람 사상, 유대 사상 등의 유산을 풍부히 계승하면서 <아퀴나스적 총체>로 불리는 독창적 사상체계를 확립하였다. 그리고 신앙과 이성, 신학과 철학의 통일성을 추구하였으나, 이것은 한편에서 학(學)으로서 신학의 성립이며 다른 한편에서는 자율적인 학문으로서의 철학의 기초를 의미하는 것이기도 했다.


③ 어거스틴과 아퀴나스의 사상적 차이


토마스 아퀴나스의 사상은 어거스틴의 사상과 일치하는 점이 많았으나 차이도 있었다.


신관(神觀)에 있어서, 어거스틴은 삼위일체설을 확립하였으며 하나님을 인격적으로 체험할 수 있는 분으로 믿었으나, 아퀴나스는 삼위일체 하나님은 이성과 아울러 계시로 알 수 있다고 했다. 인간관에 있어서는, 어거스틴은 원죄의 유전을 믿었고 영혼도 유전하는 것이므로 인간은 완전히 타락한 존재요 진정한 의미에서의 선행도 불가능하다고 생각한 데 비해, 아퀴나스는 인간의 완전 타락을 인정하지 않았고 선행도 가능하다고 보았다.


그리스도론에 대해서도 차이가 있었는데, 어거스틴은 오직 그리스도의 구속으로써만 인류가 구원받을 수 있음을 믿었고 예수 그리스도는 신인 양성을 지녔다고 믿었고, 아퀴나스는 그리스도 없이도 인류의 속죄는 가능하나 그리스도의 구속이 가장 효과적이고 귀중한 것이라고 보았다. 그리고 그리스도의 구속은 십자가에서의 죽음만이 아니고 전 생애가 다 구속사라고 했다.


구원론에 대해서도 같은 차이를 보였는데 어거스틴은 카톨릭 교회의 신자가 됨으로써만 구원을 받을 수 있다고 했으며 그리스도의 십자가 대속은 구원의 필수 조건이라고 했다. 이에 비해 아퀴나스는 그리스도의 구속 없이도 구원은 가능하나 그리스도를 통하는 구원을 얻는 것이 최선의 길일 뿐이라고 했다. 그리고 구원은 그리스도와의 연합(신비적 일치)으로 얻는다고 했다.


예정론에 있어서 아퀴나스는 반(半)펠라기우스의 주장을 따랐다. 즉 구원을 얻으려면 먼저 하나님께서 은혜를 베풀지 않으면 안되지만 사람 또한 구원을 얻기 위해 그러한 하나님의 은혜에 상응하는 일을 하지 않으면 안된다는 것이다.


5.둔스 스코투스 (Johannes Duns Scotus, 1266∼1308)


스코투스는 영국의 신학자, 철학자로서 스코틀랜드 로디언의 둔스에서 출생하였다. 그는 1281년 프란체스코수도회에 입회하였고 1290년경 옥스퍼드대학에서 수학하였으며 1291년 사제(司祭)가 되었다. 그는 그가 수학한 옥스퍼드와 파리대학에서 피터 롬바르드의 [명제집](Sentences)을 강의했다. 그 후 교황 보니파시오 8세와 프랑스 왕 필립 4세와의 분쟁에서 교황 편에 가담했다가 1303년 파리에서 추방되어 영국으로 귀국했다. 그는 1307년 독일의 쾰른 대학 교수가 되었으나 다음 해에 요절했다.


그가 남긴 주요 저술은 옥스퍼드와 파리대학에서 썼던 두 권의 [명제집] 주석이다. 그의 사상은 이해하기 쉽지 않았기 때문에 당시 학자들로부터 '난해한 박사'라는 별명을 얻었고, 16세기의 인문주의자와 프로테스탄트 개혁자들 역시 그의 불명료한 문제에 대해 탐탁지 않게 생각했기 때문에 그의 이름에서 저능아(dunce)라는 단어를 만들어내었다.


젊어서 세상을 떠났으므로 그가 남긴 책은 적지만 그는 중세기 신학자 중 가장 대담한 자였다. 그는 자기 선배들의 학설을 거침없이 비평하였다. 그는 당시에 이미 로마 교회의 대표적인 신학으로 인정받고 있던 유명한 아퀴나스의 학설까지도 비평하였다.


아퀴나스와 스코투스의 근본적 차이는 신학과 철학의 관계에 대한 태도에서 드러난다. 아퀴나스는 신학과 철학간에 불일치는 없으며 단지 신학이 찾을 수 있는 모든 진리를 철학이 다 찾을 수 없을 따름이라고 했다. 그러나 스코투스는 신학에는 철학으로 설명할 수 없는 세계가 있다고 했다. 그것은 철학으로 설명되거나 입증될 수 있으며 오직 교회의 권위로 그것을 진리로 인정할 따름이라고 했다.


또 아퀴나스는 이성(理性)과 지식이 의지(意志)에 비해 우위에 있다고 믿었다. 의지는 이성이 의지에게 최고 선이라고 제시한 것을 따른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뜻은 이성의 사용에 의해 설명될 수 있다고 했다. 그러나 스코투스는 의지의 우위성을 주장했다. 이성은 의지에게 무엇이 가능한지를 보여주지만 그것들 중에서 자신이 원하는 것을 자유로이 선택할 수 있는 것은 바로 의지 자체라고 했다. 의지는 이성이 지시하는 것을 무조건 따르지 않는 '자유'를 가지고 있다고 했다.


여기서 두 가지 중요한 의미가 추론된다. 스코투스는 하나님의 자유(의지)를 강조했다. 아퀴나스는 하나님의 본질을 그 절대적인 '존재'(being)에 있다고 보았지만, 스코투스는 하나님이 지니신 절대 자유 의지, 곧 '최고 의지'(supreme will)에 있다고 보았다. 그는 하나님과 사람은 둘 다 자유 의지를 가지고 있다고 했다. 그러나 하나님은 '절대' 자유 의지를 가지신 분이시기 때문에 그의 모든 결정이 최고 선이 된다고 했다. 예를 들어 예수님의 십자가의 희생을 가장 좋은 구원 방법이라고 하는 것은 사실 하나님이 그 방법으로 인류를 구원하시기를 기뻐하셨기 때문에 가장 좋은 방법이라고 말하는 것이지 만일 하나님이 다른 방법으로 인류를 구원하시기를 의지(意志)하셨다면(기뻐하셨다면) 성육신과 십자가가 아니라 그 방법이 가장 좋은 방법이 되었을 것이라고 말했다. 그러므로 그는 아퀴나스가 '예수님의 죽으심'이 구원의 가장 좋은 방법이라고 말한 것을 인정하지 않았다. 그는 '우리가 할 수 있는 말은 단지 하나님이 그 방법을 취하셨다는 것뿐이다' 라고 했다.


스코투스가 하나님의 자유를 강조한 것은 이성과 철학의 역할이 필연적으로 감소되었음을 의미한다. 안셀름(Anselm)과 아퀴나스가 예수 그리스도의 성육신과 십자가는 매우 필연적이었기 때문에 하나님께서는 이 방법 이외의 다른 선택을 하지 못했다고 주장한데 비해 스코투스는 하나님께서 그것을 '선택'했기 때문에 그런 일이 일어났다고 주장한 것은 하나님의 자유를 매우 강조한 것이며 또한 교리가 '합리적'임을 증명할 가능성을 제한한 것이다. 스코투스는 심지어 주님은 인간이 죄를 짓지 않았어도 성육신하셨을 것이라고 주장하기도 했다. 이것은 성육신이 하나님의 자유로운 선택에 의한 것이지 인간의 죄로 인해 그분께 부과된 필연이 아니라는 의미이다.


스코투스는 이성과 철학이 하나님의 존재와 속성의 일부 곧 그 분의 무한성 같은 것을 증명할 수 있다고 믿었다. 그러나 토마스 아퀴나스가 이성으로 증명할 수 있다고 믿었던 대부분의것들 즉 하나님의 선, 공의, 자비, 예정 등은 단지 계시를 통해서만 알 수 있는 것이며 믿음으로서 수납될 수 있는 것이지 이성으로 증명할 수는 없다고 했다.


스코투스는 구원의 요건으로서 '회개'의 필요성을 크게 중요시하지 않았다. 아퀴나스는 진정한 회개가 꼭 필요하며 형벌을 무서워함으로 하는 불완전한 회개는 반드시 은혜를 통해서 완전한 회개로 바뀌어야 한다고 했다. 그러나 스코투스는 하나님이 기뻐하시기만 하면 그런 불완전한 회개도 죄 사함을 얻는 회개로 간주될 수 있으며, 하나님이 인정하는 인간의 충분한 반응이 될 수 있다고 했다.


아퀴나스와 스코투스 간의 가장 큰 견해 차이는 동정녀 마리아의 무오수태(無誤受胎)에 대한 것이었다. 아퀴나스는 예수 그리스도는 만인의 구주이지만 마리아는 인류의 원죄를 지닌 자로서 수태 후에야 비로소 무죄한 자가 되었다고 했다. 그러나 스코투스는 마리아는 처음부터 보통 인류와는 달리 원죄가 없는 거룩한 존재라고 했다. 이 주장은 로마 교황 피우스 9세에 의해 1854년 천주교 교리로 선포되었다.


6.오캄의 윌리엄 (William of Ockham, 1280-1348)


스코투스의 제자인 윌리엄 오캄은 1280년 경 영국의 서레이 지방에서 태어났다. 그는 옥스퍼드에서 배운 후 파리에서 대학 교수로 있었는데 사람들로부터 '무적의 학자'(Doctor Invincibilis)라는 별명으로 불렸다. 그는 프란체스코 교단의 가장 진지한 단원으로서 스코투스보다 더 극단적으로 철학을 신학에서 분리시킨 학자였다. 뿐만 아니라 그는 교권(敎權, 교회)과 정권(政權, 세속 정치)의 분립 특히 정치가 교회에서 독립해야 함을 죽을 때까지 강하게 주장하였다.


오캄이 프란체스코 수도원에서 초기에 받은 교육은 주로 논리학이었다. 오캄은 명사(名辭)에 관한 학문이 신(神)·세계·교회기관·시민기관 등 사물에 관한 모든 학문을 연구하는 데 기본적이고 없어서는 안된다고 생각했기 때문에 전 생애를 통해 논리학에 관심을 가졌다. 그의 일생 동안 모든 논쟁에서 논리학은 상대에 맞서는 주된 무기로 쓰였다. 오캄의 글들은 추상적이고 개인 감정을 섞지 않은 문체로 되어 있었지만 그의 지적·정신적 태도를 잘 드러내었다.


그는 논리학을 대단히 중시하였기 때문에 흔히 [신학자 논리학자](theologicus logicus ; 루터의 표현)로 불렸다. 그는 논리학에 대한 열정을 가지고 엄격한 합리적 평가, 필연적인 것과 우연적인 것의 구분, 증거와 개연성(蓋然性) 사이의 차이 등을 강하게 주장했다. 이는 인간의 자연적 이성과 인간 본성을 크게 신뢰하는 데서 나온 것이었다. 다른 한편, 신학자로서 그는 교리에 나온 그대로의 하나님이 일차적으로 중요하고, 이 전능하신 하나님이 인간을 은혜롭게 구원한다고 말했다. 즉 하나님의 구원 행위는 의무를 부과하지 않고 주기만 하는 것이며 그것은 이미 하나님이 자연을 창조한 데서 유감 없이 증명되었다고 했다.


"가장 단순한 것이 최상의 설명이다", "작은 말로 충분할 때 쓸데없이 많은 전제들을 설정해서는 안된다"는 그의 법칙은 흔히 [경제 법칙] 또는 [오컴의 면도날]이라는 이름으로 알려져 왔다. 오캄은 특히 스콜라 철학자들이 소위 '실재'(實在)를 설명하기 위해 고안한 많은 것들을 제거하기 위해 이 원리를 사용했다. 유명론(唯名論)이라는 형식을 창시한 인물로 여겨지는 후기 스콜라 철학 사상가로서 그는 모든 형태의 실재론(實在論, realism)을 강하게 공격했다.


유명론이란 예컨대 '아버지'와 같은 보편 개념이 그 보편자나 일반명사가 가리키는 개체들과 따로 실재성을 가진다는 것을 부인하는 사상이다. 그는 오직 개체의 대상만이 존재하며 유(類)와 종(種)은 단순히 미래에만 있는 것으로서 객관적 실재는 없다고 주장했고, 단순히 상징적 기호(술어; terms)를 사용하여 그것(각 개체)을 일컬어야 한다고 주장했기 때문에 사람들은 그를 기호주의자(terminist)라고 불렀다.


좀더 그의 사상을 설명하자면 오캄은 언어를 문자·음성·개념으로 구별한 다음, 보편은 개념으로서의 말이라고 하였다. 또 그는 음성과 문자가 약속에 의하여 성립한 기호인 데 대하여, 개념은 이해의 작용으로서 사물의 자연적인 기호라고 하였다. <인간>이라는 말을 놓고 볼 때 [인간]은 어디까지나 개별 사물들의 기호이지만, 반드시 개별 사물을 대표한다(가리킨다)고는 할 수 없고, [인간은 명사(名詞)이다]에서는 음성을, [인간은 종(種)이다]에서는 개념을 대표한다고 하였다. 그리고 실재하는 것은 개체(개별 사물)뿐이고, 이 개체들을 인식하는 직관(直觀 ; notitia intuitiva)이야말로 명증적 지식(明證的知識)의 기초가 된다고 하였다. 이와 같은 생각은 많은 신학적 명제를 '믿어야만 할 것'으로 만들었고, 이것과 경험과 지식의 분리를 촉구하여 근세의 자연과학적 사상의 선구가 되었다.


이에 따라 그는 신학적 교리는 철학적으로 증명할 수 없다고 하면서, 교리는 이성에 의해 수락된 것이 아니라 외부적 권위에 의해 수락된 것일 뿐이라는 그의 스승 스코투스의 주장을 따랐다. 그는 그 권위를 부여하는 것이 교회라는 사실은 인정했으나 무책임한 교황의 종교 회의 결정보다는 성경이 그 궁극적 권위여야 하며 오직 그것이 성도들을 구속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런 까닭에 루터는 그를 '존경하는 선생'이라고 불렀다.


오캄의 견해는 그가 죽은 후에도 계속 보급되었다. 그리하여 그때부터 종교 개혁 직전까지 유명론이 신학계를 지배하며 아퀴나스-스코투스 주의를 고대(古代, via antigua)라고 부르는데 비해, 오캄 이후를 근대(近代, via moderna)라고 불렀다. 이것은 스콜라 신학의 파산을 의미하는 것이었다. 교회의 권위에 기반을 두고 있는 기존 교리들에 대한 철학적 자유 비판은 사람들로 하여금 기독교 신앙의 기반이 합리에 근거를 둔 것이 아니라 교회의 독단적 권위에 근거를 둔 것으로 생각케 하여 신학의 토대를 무너뜨리게 했다. 이미 그 무렵 사람들은 지적으로 설명할 수 없는 것을 참이라고 믿지 않았기 때문이다. 옛 스콜라 철학의 훌륭한 사색 체계에 대해 취미를 잃은 14,15세기의 사람들은 신비주의로 넘어가거나 스콜라 신학이 줄 수 없는 기적과 종교적 안위를 찾아 어거스틴에게로 돌아갔다.


오캄의 가장 중요한 논쟁거리는 청빈 문제였다. 그는 그 문제로 오랫동안 교황과 다투었다. 그는 이렇게 말했다. "성 프란치스코의 복음주의 율법 아래서 살기로 선택한 사람은 누구나 그리스도의 모범을 따라야 한다. 그리스도는 하나님이며 따라서 우주의 왕이지만 소유권을 포기하고 세속적 권력을 내어놓고 오직 믿음으로써만 세상에 군림하려 한 가난한 사람이었다. 이 군림은 교회라는 형식으로 표현된다. 교회는 교황이나 종교회의 같은 소위 절대무오류(無誤謬)의 권위를 가진 무리가 아니라 본질적으로 진실한 신앙을 가진 평범한 사람들의 공동체이다. 이 공동체는 설사 일시적으로는 어느 정도 줄어들고 위축될 수 있더라도 지난 수백 년 동안 버텨온 것처럼 앞으로도 틀림없이 계속 버틸 것이다. 지위와 성별을 막론하고 모든 사람은 교회 안에서 모두에게 공통되는 신앙을 지켜야 한다."


오캄이 보기에 교황의 권력은 복음과 자연법으로 확립된 그리스도인들의 자유에 부딪쳐 한계를 맞게 될 것이었다. 그러므로 오캄이 교황권에 맞서 제국을 편든 것이나 1339년 교회 재산에 세금을 물린다는 영국 왕의 권리 선언을 옹호한 것은 당연하였다.


오캄은 이단 혐의와 수도회의 청빈 강조, 교황권의 한계 천명 등의 이유로 교황으로부터 파문을 당했다. 그러나 그는 교황 요한 22세 및 베네딕투스 12세에게 저항하였다. 그는 1334년 요한네스 22세가 죽은 뒤에 그리고 베네딕투스 12세의 재위 기간(1334~42)과 클레멘스 6세의 선출 및 1347년 루드비히 4세의 죽음 후에도 여전히 같은 견해를 유지했다. 이 마지막 몇 해 동안 그는 논리학에 관한 2편의 소논문을 쓸 시간을 얻었다. 이 논문은 그가 논리학에 일관되게 중요한 역할을 부여했음을 입증한다. 또 교황 클레멘스가 제안한 중재 절차에 관해서도 토론했다. 오캄은 1349년경 흑사병으로 추측되는 병으로 뮌헨의 한 수도원에서 죽었다.


참고 : 普遍論爭


유럽의 중세 철학에서 <보편>을 둘러싸고 전개된 존재론적·논리학적 논쟁을 보편 논쟁이라 한다. 보편에 대한 문제는 이미 플라톤이나 아리스토텔레스도 논의했는데, 포르피리우스가 아리스토텔레스의 《카테고리론》의 서문에서 ① 유(類;genus)나 종(種;species)은 실체로서 존재하는가 아니면 단순한 표상(表象)에 지나지 않는가 ② 만일 그것들이 실체로 존재한다면 그것들은 물체적인가 또는 비물체적인가 ③ 그것들은 감각적 사물들로부터 분리되어 있는가 아니면 그 안에 존재하고 있는가 라는 3가지 문제를 제출하였고, 로마의 철학자 A.M.S.보에티우스가 그 주석에서 문제 해결을 시도한 이후, 중세 특히 11세기부터 12세기에 걸쳐 보편에 관한 여러 가지 존재론적·논리학적 견해가 나타나 논쟁이 오갔다.


이 문제에 대한 첫 해답은 {극단적인 실재론}(實在論, 實念論)이다. 그것에 의하면 類나 種이라는 普遍은 정신 안에 존재하는 것과 동일한 방법으로 정신 밖에 있는 대상 속에 실체로서 존재한다. 오세르의 레미기우스, 캉브레의 오도, 샹포의 기욤 등이 이 입장을 취했다.


이에 반하여 보편은 <이름>에 지나지 않으며 실체로서 존재하는 것은 '개별적 사물'뿐이라고 하는 주장을 {유명론}(唯名論)이라고 한다. 11세기에 살았던 대표적인 유명론자 [로스켈리누스]는 보편이 <음성의 숨소리>에 지나지 않는다고 주장했다. 이와 같이 보편을 <사물>에 귀착시키느냐, <명칭>에 귀착시키느냐에 따라서 실재론과 유명론으로 나누어진다. 그리고 보편을 개념이라고 보는 주장을 개념론(槪念論)이라고 한다.


12세기 P.아벨라르는 로스켈리누스와 기욤을 비판하여 독자적인 주장을 세웠다. 그는 "보편은 다수에 대하여 술어(述語)로서 적합하나 개별적 사물은 그렇지 않다"는 아리스토텔레스의 정의(定義)에서 출발하여 보편에 대한 문제를 보편적 명칭의 명제에서 술어 기능이라는 관점으로 고찰하였고, 보편적 명칭의 표의작용(表意作用 ; signi-ficatio)의 분석을 통하여, 보편은 사물도 음성도 아니고 <말(語)>이라고 하였다. T.아퀴나스나 J.둔스 스코투스도 실재론의 입장을 가졌는데, 유명론을 발전시킨 사람은 14세기의 W.오컴이다. 그에 따르면 보편은 개별적 대상을 나타내는 명사(名辭) 내지 기호이다. 실체로서 존재하는 것은 개별적 사물뿐이며, 보편은 개별적 사물이 아니므로 어떤 뜻에서도 실체로서 존재하지 않는다. 보편은 논리학적 신분만을 지닌 술어 또는 의미이다. 보편에 관한 여러 가지 논쟁은 중세의 논리학 및 존재론의 형성과 치밀한 전개에 이바지하는 데 큰 도움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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