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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이도행군총관(嵎夷道行軍總管)과 중원(中原) 땅 (우이와 래이)
○「우이(嵎夷)」라고 하면 곧 「동쪽에 사는 이족(夷族)으로 동이(東夷)」라고 하며, 곧 「조선(朝鮮)」을 떠올린다. 당(唐) 고종(高宗) 현경(顯慶) 5년에, 소정방(蘇定方)에게 백제(百濟)토벌(討伐) 명(命)을 내리면서, 신라(新羅) 왕(王) 김춘추(金春秋)에게 내린 관작(官爵)이 바로, 「우이도행군총관(嵎夷道行軍總管)」이다.
이것을 보면, 반도(半島) 서남(西南) 백제(百濟) 땅이 바로 “우이(嵎夷)”들이 사는 곳이라는 선입견(先入見)을 갖게 되고, 당연(當然)하게, 우이(嵎夷)는 곧 반도(半島)에 사는 이족(夷族)이라는 인식(認識)을 갖게끔 만들어져 있다.
○ 이글을 쓰고 있는 본인(本人)은, 단연코 이러한 주장(主張)에 대해 동조(同調)할 수 없으며, 이러한 역사해설(歷史解說)은, 매국노(賣國奴)들이 만든, 조선사(朝鮮史)의 조작품(造作品)이라고 확언(確言)하며, 「조선사(朝鮮史)는 조선인(朝鮮人)에 의한, 조선(朝鮮)을 위한, 조선사(朝鮮史)로 새롭게 태어나야 한다.」고 주장(主張)한다.
더불어 ‘반도사관(半島史觀)=식민사관(植民史觀)’은, 철저(徹底)하게 배척(排斥)하고, 매국(賣國)사학자(史學者)들을 색출(索出)하여, 그 댓가를 치르도록 해야 하며, 역사(歷史)를 왜곡(歪曲), 조작(造作)하는 무리들에게는 용서(容恕)란 있을 수 없다는 점을 분명(分明)하게 밝혀야 한다. 이리하여 「민족(民族)의 자존심(自尊心)을 회복(回復)하고, 조선(朝鮮)민족(民族)의 정체성(正體性)을 찾아, 재확립(再確立)해야 한다.」고 강력(强力)하게 주장(主張)하는 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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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르게 역사(歷史)를 배우지 못하면, 혼(魂)이 비정상(非正常)이 된다.》고 하는 코-메-디 같은 이야기는 하지말자. 그렇다면, 지금까지 역사(歷史)교육(敎育)을 받은 젊은 세대(世代)들 모두는, 혼(魂)이 비정상(非正常)이 되었다는 이야긴가?
그렇다면 바른 역사(歷史)는 무엇이며, 이를 누가, 어떻게 판단(判斷)할까?
일제(日帝)에 부역(附逆)한 자(者)들을 찬양(讚揚)하고, 미화(美化)하는 것이 올바른 역사교육(歷史敎育)인가?
나라의 대들보인 헌법(憲法)을 무시(無視)하려는 시도(試圖)가 찬양(讚揚)받아야 되는가?
자신(自身)들과 의견(意見)과 주장(主張)이 다르면, “종북(從北)”으로 모는 행위(行爲)가 찬양(讚揚)되어야 하는가?
나라에 반역(叛逆)하고, 헌법(憲法)을 중단(中斷)시킨 일이 찬양(讚揚)되어야 하는가?
일제(日帝)에 부역(附逆)한 자(者)들이, 비굴(卑屈)했던 행적(行蹟)을 숨기기 위해, 반공(反共)주의자(主義者)가 되고, 친미(親美)주의자(主義者)가 되었다고 해서, 나라와 민족(民族)을 배신(背信)한, 그 과거(過去)가 없어지는가?
요즘 우리 사회(社會)가 정상적(正常的)이지 못하다. 국회의원 ‘하00’라는 자(者)는 ‘친일인명사전’을 학교(學校)에 비치(備置)하는 것을, 무슨 큰 일이 난 양 떠벌리면서, “친일인명사전? 대한민국 흠집 내려는 것”이라 말했다고 뉴스에서 전(傳)하고 있는데, 이 자(者)의 정체(正體)가 심히 궁금하다.
매국노(賣國奴)들이나, 부역자(附逆者)들이 한 짓이 무엇이었는가? 이 자(者)는 앞으로 열도(列島)의 식민지(植民地)가 되어도 좋다는 뜻인가? 뭐야? 스스로 대한민국(大韓民國)을 흠집을 내고 있는지 조차 모르는 자(者)! 이런 자(者)가 국회의원(國會議員)이라니.......대한민국(大韓民國) 사회(社會)가 정상적(正常的)이 않다고 해도, 정도(程度)를 넘어섰다. 대통령(大統領)이란 분은 자신(自身)을 선출(選出)해 준 국민(國民)들을 협박(脅迫)하고 저주(詛呪)하는 듯, 막말을 하지 않나?
대한민국(大韓民國)이 왜 이렇게 이상(異常)한 방향(方向)으로 흘러가는 것일까? 국민(國民)알기를 호구정도, 장기판(將棋板)의 ‘졸’쯤으로 생각하는 걸까? 그러나 그 “졸(卒)”이 한 번 성나면, 도피(逃避)할 곳이 없다는 것은, 장기(將棋)를 둬 본 사람은 잘 안다.
친일(親日)부역자(附逆者)들을 청산(淸算)했어야 했다. 그러나 이승만(李承晩) 전(前) 대통령(大統領)은 무력(武力)으로 이를 무력화(無力化)시켰다. 그 대가로 대한민국(大韓民國) 국민(國民)들이 그 폐해(弊害)를 고스란히 받고 있는 것이다. 열을 좀 받았네요. 본론(本論)으로 들어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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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위와 같은 역사(歷史)통설(通說)에서 벗어나, 발상(發想)전환(轉換)을 해보자. 곧 위 논리(論理)의 반대(反對)로, 「우이(嵎夷)는 곧 조선(朝鮮)이다. 우이(嵎夷)가 대륙(大陸) 땅에 있었다면, 조선(朝鮮)은 대륙(大陸) 땅에 있었다.」는 것이 될 것이다. 우리 한 번 역발상으로 고찰(考察)해보자. 【관심(觀心)부분(部分)과 해당(該當)부분(部分)만 발췌(拔萃)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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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이(嵎夷)
(1) 우공추지(禹貢錐指) 권04 / 《嵎夷既略,釋文:嵎音隅.傳曰:嵎夷,地名.正義曰:即堯典宅嵎夷是也.王氏曰:略,為之封畛也. : 우이(嵎夷)를 기 경략(經略)하였다. 석문(釋文)에 : 우(嵎)의 음은 우(隅)이다. : 우이(嵎夷)는 땅 이름이다(地名). 정의(正義)에서 이르기를 : 곧 요전(堯典)에서 우이(嵎夷)에서 살았다고 하는 것이다. 왕(王)씨가 이르기를 : 략(略)은 봉받은 땅이다(封畛). 渭按:後漢書:東夷有九種,曰:畎夷,幹夷,方夷,黃夷,白夷,赤夷,玄夷,風夷,陽夷. : 호위(胡渭)가 이르기를 : 후한서(後漢書) : 동이(東夷)는 아홉 종류가 있는데, 견이(畎夷)·간이(幹夷)·방이(方夷)·황이(黃夷)·백이(白夷)·적이(赤夷)·현이(玄夷)·풍이(風夷)·양이(陽夷)라고 일컫는다. 중략.》
《嵎夷,堯典疏雲:尚書,考靈曜及史記作禺銕.渭按:五帝本紀作鬱夷. : 우이(嵎夷)는, 요전소(堯典疏)에서 : 상서(尙書), 고령요(考靈曜)와 사기(史記)에는 우철(禺銕)이다. 호위(胡渭) 안(按) : 오제(五帝)본기(本紀)에는 울이(鬱夷)다. 張守節曰鬱音隅.夏本紀,仍作嵎夷.司馬貞曰:今文尚書及帝命驗並作禺鐵,在遼西.鐵古夷字也. : 장수절(張守節)이 말하기를 울(鬱)의 음(音)은 우(隅)이다. 하(夏)본기(本紀)에서는 거듭 우이(嵎夷)라 하였다. 사마정(司馬貞) 이르기를 : 금문상서(今文尙書)와 제명험(帝命驗)은 나란히 우철(禺鐵)인데, 요서(遼西)에 있다. 철(鐵)은 옛 이(夷)자이다. 중략. 堯典傳雲:東表之地稱嵎夷.暘,明也.日出於穀而天下明,故稱暘穀.暘穀,嵎夷一也. : 요전(堯典)전(傳)에서 : 동(東)쪽 땅을 지칭하는 것이 우이(嵎夷)다. 양(暘)은 밝음이다. 태양이 나오면 천하(天下)가 밝아져, 옛 부터 칭하기를 양곡(暘穀)이라 하였다. 양곡(暘穀)은, 우이(嵎夷) 하나이다. 중략(中略). 通鑒:唐高宗顯慶五年,命蘇定萬伐百濟,以新羅王春秋為嵎夷道行軍總管.是亦以東夷為嵎夷也. : 통감(通鑒) : 당(唐) 고종(高宗) 현경(顯慶)5년에, 소정방(蘇定方)에게 명하여 백제(百濟)를 치게 하고, 신라왕(新羅王) 김춘추(金春秋)를 우이도(嵎夷道)행군총관(行軍總管)으로 하였다.》
➊ 우이(嵎夷)는, 땅의 이름이다(地名).
➋ 우이(嵎夷)는, 또한 동방(東方)의 구이(九夷)중의 하나인데, 곧 양이(陽夷)이며, 이곳은 해가 뜨는 곳이다.
➌ 우이(嵎夷)의 땅은, 요서(遼西)지방에 있다. 우이(嵎夷)는 곧 양곡(暘穀)으로 해가 떠오르면 천하(天下)가 밝아지는데, 양곡(暘穀)은 우이(嵎夷)이다.
➍ 우이(嵎夷)는 요서(遼西)에 있고, 동방(東方)의 구이(九夷)중의 하나이며, 이곳에서 해가 떠오르면, 천하(天下)가 밝아진다고 하였는데, 이곳이 반도(半島)지방(地方)일 수는 없다. 반도(半島)가 요서(遼西)지방일 수는 없기 때문이다. 또 동방(東方)이란 총령(蔥嶺)의 동쪽지방을 뜻한 말이니, 총령(葱嶺)으로부터 열도(列島)까지를 아우르는 말이다. 곧 현 대륙(大陸)의 땅, 대부분(大部分)을 말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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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사기(史記) 오제(본기五帝本紀)
사기오제본가(史記五帝本紀) : 《요(堯)의 명으로 희중(羲仲)이 욱이(郁夷)에서 살았다.(堯命義仲居郁夷)
집해(集解) : 인(駰)안(案) :《욱이(郁夷)는, 상서(上書)에서 우이(嵎夷)이다. 공안국(孔安國)이르기를, 동쪽의 땅을 우이(嵎夷)라고 일컫는다(駰案,郁夷,尙書作嵎夷.孔安國曰,東表之地稱嵎夷)》
색은(索隱) :《욱이(郁夷)는 또한 땅의 별명(別名)이다.(郁夷亦地之別名也)》
사기오제본기(史記五帝本紀) :《금문상서(今文尙書)와 제명험(帝命驗)은 나란히, 우철(禺鐵)인데, 요서(遼西)에 있다. 철(鐵)은 옛 이(夷)자이다. 嵎夷,今文尙書及帝命驗竝作.禺銕,在遼西.銕古夷字也》
정의(正義) : 《우공(禹貢) 청주(靑州)에서 이르기를 : 우이(嵎夷)는 이미 경략(經略)하였다. 안(按) : 우이(嵎夷)는, 청주(靑州)이다.(禹貢靑州云.嵎夷旣略.按,嵎夷,靑州也)》라고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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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공전(孔傳)에서는 : 《동쪽의 땅을 우이(隅夷)라고 한다(東表之地稱隅夷)》고 하였고,
설문(說文)에서는 :《우산(隅山)은 요서(遼西)에 있다. 이르기를, 우이(隅銕)이며, 양곡(暘谷)이다》라고 했고,
설토용서고문훈(薛土龍書古文訓)에서는 :《우이(嵎夷)는 바닷가【또는 하(河)】모퉁이의 여러 이(海隅諸夷)》라고 했으며,
동파서전(東坡書傳)에서는 :《동방의 해상【當在東方海上 : 또는 동방의 하상(河上)】에 있다》라고 했다.
한서(漢書)를 주한 사고(師古)가 이르기를(師古曰) : 우이(嵎夷)는 , 땅의 이름이며, 곧 양곡에 소재(所在)한다(嵎夷,地名也,即陽谷所在)하였다.
➊ 우이(嵎夷)는 요서(遼西)에 있다. 우이(嵎夷)의 땅에 우산(隅山)이 있는데, 요서(遼西)에 있다. 이르기를, 우이(隅銕)이며, 양곡(暘谷)이라고 했으며,
➋ 우이(嵎夷)는 해우제이(海隅諸夷)라고 했고, 우이(嵎夷)는 동방(東方)해상(海上)에 있다라고 하였는데, 중요(重要)한 것은, 당시(當時) “해(海)” 자(字)의 용도(用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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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後漢書 卷 11 . 劉 玄 劉 盆 子 列 傳 第 1 :《中略.大司徒鄧禹時在長安,遣兵擊之於郁夷,反為所敗,禹乃出之雲陽.九月,赤眉復入長安,止桂宮.注:郁夷:郁夷,縣,屬右扶風也. : 후한서(後漢書)11 유현유분자열전1 : 《대사도 등우(鄧禹)가 장안(長安)에 있을 때, 병사를 보내 욱이(郁夷)를 쳤으나, 반대로 패하였는바, 우(禹)는 이에 운양을 나왔다. 9월, 적미(赤眉)가 다시 장안(長安)에 들어와, 계궁(桂宮)에 머물렀다. 주(注) : 욱이(郁夷) : 욱이(郁夷)는 현(縣)으로, 우부풍에 속했다.》
➊ 《注 : 郁 夷 : 郁 夷, 縣, 屬 右 扶 風 也. : 주(注) : 욱이(郁夷) : 욱이(郁夷)는, 현(縣)으로, 우부풍(右扶風)에 속했다.》고 하였는데, 《욱이(郁夷)는 상서(尙書)에서 우이(嵎夷)(郁 夷, 尙 書 作 嵎 夷)》라고 하였다. <욱이(郁夷)=우이(嵎夷)>라는 뜻이다.
곧 「우부풍(右扶風)에서 관할(管轄)했던 “욱이현(郁夷縣)”이다」라는 이야기다. 그렇다면 위의 많은 학자(學者)들이 주해(註解)한 동(東)쪽의 땅이란 이야기는 대륙(大陸)의 한복판을 말하고 있는 것이 아닌가!
➋「우부풍(右扶風)」은 장안(長安) 곧 경사(京師)를 수호(守護)하는 서(西)쪽의 요충지(要衝地) 땅이며, 이곳은 삼보(三輔)중의 하나로서, 강력(强力)한 이민족(異民族)들의 침략(侵略)과 약탈(掠奪)에 대비(對備)하여, 왕조(王朝)의 정예(精銳)군사(軍士)들이 항시(恒時) 주둔(駐屯)하고 있던 곳이다. 우부풍(右扶風)은, 기산(岐山)의 동남(東南)쪽 위수(渭水)의 북쪽에 있으며, 장안(長安)에서 함양, 무공, 우부풍, 봉상, 보계 등을 거쳐 서(西)쪽으로 가게 된다.
한서(漢書)지리지(地理志) 우부풍(右扶風) : 호수(戶數) 216,377 / 인구(人口) 836,070 명에, 속현(屬縣)이 21개 현【戶 二 十 一 萬 六 千 三 百 七 十 七 , 口 八 十 三 萬 六 千 七 十. 縣 二 十 一】이라고 하였으며, 「욱이현(郁夷縣)」은, 주석(註釋)에서
욱이(郁夷)현(縣)의 욱이(郁夷)는, 《시(詩)에서 「주도(周道)욱이(郁夷)」라고 하는데, 병수사(洴水祠)가 있다. 왕망(王莽)은 욱평(郁平)이라고 하였다.【郁夷,詩,周道郁夷.有汧水祠.莽曰郁平.】》라고 하였으며,
주석(註釋)에서는 《욱이(郁夷) : 안사고(顔師古)가 이르기를 : 「소아(小雅)사모(四牡)의 시(詩)에서 이르기를 : 『사모비비(四 牡 騑 騑), 주도왜지(周 道 倭 遲)』라고 하였다. 【師 古 曰 : 「 小 雅 四 牡 之 詩 曰『四 牡 騑 騑 ,周 道 倭 遲』】 한시(韓詩)의 욱이(郁夷) 자(字)는, 사신(使臣)이 말을 타고 가는 것이라고 말하는데 바로 이 길이다.【韓 詩 作 郁 夷 字 ,言 使 臣 乘 馬 行 於 此 道 】라고 하였다.
➌ 「욱이(郁夷)란 우이(嵎夷)」를 말하는 것이고, 이는 곧 땅의 이름이며, 곧 「욱이현(郁夷縣)이며, 다른 이름으로 우이현(嵎夷縣)」을 말하는 것이다. 이러한 땅이 동쪽의 땅을 지칭(指稱)하는 말이라면,
당(唐) 고종(高宗) 현경(顯慶) 5년, 무열왕(武烈王) 김춘추(金春秋)에게 내렸다는 「우이도 행군총관(嵎夷道行軍總管)」이라는 직책(職責)에 나오는 우이도(嵎夷道) 역시 재해설(再解說)이 되어야 마땅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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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해국도지(海國圖志)는 말하기를 : 중화(中華)는 총령(蔥嶺)의 동(東)쪽에 있고, 서양(西洋)은 총령(蔥嶺)의 서(西)쪽에 있다【中華在蔥嶺之東,則山脈自西來,愈西愈高,高至蔥嶺而止,西洋在蔥嶺西】고 하였다.
「동(東)쪽 땅에는 동이(東夷)가 있고, 서(西)쪽 땅에는 서이(西夷)가 있다.」는 말에서, 동이(東夷)는 곧 구이(九夷)를 말함이며, 조선(朝鮮)을 뜻하며, 오늘날 역사(歷史)조작(造作)의 한 축(軸)인, 한족(漢族)이란, 동방(東方)의 동이(東夷) 곧 구이(九夷)중의 하나였을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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래이(萊夷)
(1) 우공추지(禹貢錐指) 권04 : 《萊夷作牧,釋文:萊音來.牧,徐音目,一音茂.顏氏曰:萊夷,萊山之夷也。中略. : 래이(萊夷)는 목(牧)이며, 석문(釋文) : 래(萊)의 음(音)은 목(目)이고, 또 하나는 무(茂)이다. 안사고(顏師古)가 이르기를 : 래이(萊夷)는, 래산(萊山)의 이(夷)이다. 중략. 吳氏曰:作,謂耕作;牧,謂放牧,夷人以耕牧為業也。: 오(吳)씨가 이르기를 : 작(作)은, 경작(耕作)을 말하고 : 목(牧)은, 방목(放牧)을 말하는데, 이인(夷人)은 경목(耕牧)이 업(業)이다. 중략.》
➊ 래이(萊夷)는 래산(萊山)에 살고 있던 이족(夷族)들을 부르는 명칭(名稱)이다.
➋ 래산(萊山) : 산해경(山海經)을 찾아보면 : 산해경(山海經) 2 서산경(西山經)에서 말하기를 태화산【太華山 : 화산(華山)】으로부터 2, 3천리 서(西)쪽에 래산(萊山)이 있다.【山海經 第 2 西山經 :曰太華之山.丹水出焉,北流注于渭.涔水出焉.北流注于渭.清水出焉,南流注于漢水.又西三百二十里,曰嶓冢之山,漢水出焉.楚水出焉,而南流注于渭.又西三百五十里,曰萊山.凡西次二經之首,自鈐山至于萊山,凡十七山,四千一百四十里.又西三百里,曰積石之山,其下有石門,河水冒以西流,是山也.】
➌ 화산(華山)으로부터 서(西)쪽으로 약 2,000 – 3,000 리쯤 떨어져 있던 곳에, 「래산(萊山)」이 있는데, 이 래산(萊山) 주위에서 살던 부족(部族)들을 ‘래이(萊夷)’라고 불렀고, 이들이 점차(漸次) 커져 “래산국(萊山國)=래자국(萊子國)”이 되었는데, 이곳은 서방(西方)의 황량(荒涼)하고, 큰물(江)이 삼면(三面)을 싸고 도는 곳에 있어, 염기(鹽氣)가 많아, 오곡(五穀)은 자라지 않고, 오직 가축(家畜)을 기르는 일만이 가능(可能)했다는 곳이다.
➍ 로(鹵) : “로(鹵)” 자(字)를 찾아보자 : 「鹵 : 西 方 鹽 池」 라고 했고, 「地 不 生 物 斥 鹵」라고 하였다. 이 말은 『서방(西方)의 염지(鹽池)를 일컫는 말이고, 땅은 염기가 들어나 있어 생물이 살 수 없다.』는 뜻이다.
산동성(山東省)에 있는 “래주(萊州)”가 “서방(西方) 땅이요, 그곳이 염지(鹽池)요, 래산(萊山)이 있다.”고 한다면, 이러한 곳(땅)이, 현(現) 산동 반도(山東半島)냐? 한다면, 대륙(大陸) 아이들이 말하기를 “반도(半島) 아이들은 정신(精神) 나간 자(者)들이다”라고 할 것임에 틀림없다.
(2) 우공서(禹貢書 : 《래이(萊夷)는 방목(放牧)한다【萊 夷 作 牧】》라고 했으며,
호위우공(胡謂禹貢)에서는 : 《등주(登州), 래주(萊州)의 땅은, 모두 우공(禹貢)의 래주(萊州)의 땅인데, 삼면이 바다(海)가에 있어, 모두 소금기가 땅위에 드러나는 곳으로, 오곡(五穀)이 자라지 못한다. 중략. 또 래자국(萊子國)이라 한다.【今登州,萊州之地,皆禹貢萊州之地,三面濱海,皆爲斥鹵,五穀不生.中略.亦稱萊子國】》고 하였다.
한서(漢書)를 주(注)한 사고(師古)가 이르기를 : 《래산(萊山)의 이(夷)는, 그 땅에 가축을 기르는 것이 마땅하다【萊 山 之 夷 ,地 宜 畜 牧】》고 하였다.
➊ 오늘날의 등주(登州)와 래주(萊州)는 산동성(山東省) 산동반도(山東半島)에 있는데, 래주(萊州)와 등주(登州)가 동서(東西)로 나란히 붙어있는데, 지도(地圖)를 보면 래주(萊州)만(灣)이라고 표기(標記)되어 있다.
➋ 이곳은 평야(平野)지대(地帶)로, 위에서 설명(說明)한 래산(萊山)도 없으며, ‘땅에 소금기가 있어 오곡(五穀)이 자라지 못한다(不生)’는 것과는 전혀 다른 곳으로, 곡창(穀倉)지대(地帶)라고 할 수 있다.
➌ 또 중요(重要)한 대목은 : 로(鹵)자인데, ‘로(鹵)’는 바다에서 생산(生産)되는 소금(鹽)과는 다른, 「서방(西方)염지(鹽地) “로(鹵)”」자(字)이다. 곧 내륙(內陸)에서 생산(生産)되는 소금을 말하는 글자다.
➍ 래이(萊夷) =「오곡불생(五穀不生) + 방목(放牧) + 래산(萊山)」으로 풀어보면 : 곧 내륙(內陸)의 서(西)쪽 땅 “래산(萊山)”주위에서 가축(家畜)을 기르며 살던 부족(部族)들을 말하며, 이들은 옛 동방(東方)의 땅에 살고 있었던 구이(九夷) 중의 하나였다는 이야기다. 그 동방(東方)이란 화산(華山)으로부터 서(西)쪽으로 수천(數千)리도 포함(包含)되었다는 것은, 해국도지(海國圖志)에서 말하는 “총령(葱嶺)을 기준(基準)하여 서방(西方)과 동방(東方)을 나눈다.”는 말을 증명(證明)해 주고 있다.
➎ 따라서 동방(東方)의 구이(九夷)란 말은, “총령(葱嶺)을 포함한 그 동(東)쪽 지방에서 살던 아홉 종족(種族)들을 말하는 것이다.” 라고 한다면 정답(正答)이다. 그래서 구한(九韓)속에 화하(華夏)곧 중국(中國)이 포함되는 것이다.
○ 동방(東方)의 구이(九夷)는, 곧 조선(朝鮮)에서 살고 있는 아홉 종족(種族)들을 말하는 것이고, 구이(九夷)는 구한(九韓)과 같다. 이들이 살던 땅은, 총령(蔥嶺)의 동(東)쪽으로부터, 열도(列島)까지를 아우른다. 이러한 이여기는, 조선사(朝鮮史)의 일부분(一部分)일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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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요즘 정권(政權)을 잡고 있는 무리들이 역사(歷史)교과서(敎科書)를 국정화(國定化)하겠다고 발표(發表)하여, 법석을 떨고 있다. 그동안 우리나라에서는 여야(與野) 및 정권(政權), 국민(國民)들 다수(多數)가 열도(列島)아이들에게, 역사(歷史)교과서(敎科書)를 왜곡(歪曲)하여, 열도(列島)학생(學生)들에게 가르친다고 노발대발(怒發大發), 항의(抗議)하는 등, 이를 비난(非難)하였다.
○ 그렇다면 앞으로 열도(列島) 아이들이 더욱 노골적(露骨的)으로 과거(過去)의 역사(歷史)를 왜곡(歪曲), 조작(造作)하는 행위(行爲)에 대해, 우리나라에서 무엇을 어떻게 대처(對處)할 수 있겠는가? 자기들은 역사(歷史)교과서(敎科書)를 국유화(國有化)하여, 입맛에 맞게 만들고, 남의 나라 역사(歷史)교과서(敎科書)를 비난(非難)하겠다? 이건 코-메-디다.
○ 보수주의(保守主義)란 말은 : 현상유지(現狀維持)나 전통(傳統)의 옹호(擁護), 또는 점진적(漸進的) 개혁(改革)을 바라는 주장(主張)이나 이론(理論)이라고 설명(說明)할 수 있다.
따라서 매국(賣國)행위(行爲)나, 민족(民族)을 배신(背信)하는 행위(行爲), 독립(獨立)투사(鬪士)들을 체포(逮捕), 구금(拘禁), 고문(拷問), 살해(殺害)하는 행위, 일제(日帝)의 침략(侵略)야욕(野慾)에 동조(同調), 동포들을 사지(死地)로 몰아넣는 행위(行爲)등이, 보수주의(保守主義)가 될 수 없음은, 너무도 자명(自明)한 사실(事實)이며, 진실(眞實)이다.
○ 무엇을 어떻게 만들어, 국정화(國定化)하겠다는 이야긴가? 한국(사韓國史)는 지금도 절름발이 신세(身世)를 면하지 못하고 있다는 것을, 이 사람들만 모르고 있는 것일까?
아니면 자신(自身)들의 가계(家系)를 위한 것인가?
그것도 아니면, 헌법(憲法)을 유린(蹂躪)한 행위(行爲)를 정당화(正當化)시키려는 것인가?
그것도 아니면, 먼 장래(將來), 열도(列島)아이들을 위해서인가?
○ 우물 안에서 살고 있는 개구리들은, 우물밖에 다른 세상(世上)이 있다는 것을 모른다. 좀 더 넓은 시야(視野)를 확보(確保)해야 할 필요성(必要性)이 있으며, 무엇이 나라와 국민들을 위한 것인지를 심사숙고(深思熟考)해야 할 시점(時點)이다. 권력(權力)은 무한(無限)하지 않으며, 아름다운 꽃도, 계절(季節)이 바뀌면 시들고, 꽃처럼 아름다운 절세(絶世)미인(美人)도, 세월이 가고 나면, 시들고 만다. 이런 모든 것들이 자연(自然)의 법칙(法則)인 것을! 초심(初心)을 잊는 일이 없도록, 자기반성(自己反省)이 필요(必要)하다고 충고(忠告)하는 바다.
2015년 11월 11일 <글쓴이 : 문무(文武)>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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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使持節 神丘·嵎夷·馬韓·熊津 등 十四道 大摠管 左武衛大將軍 上柱國 邢國公 蘇定方은 曾城에서 여러 번 構陷을 당하고 委水에서 긴 파란을 일으켰으며, 뛰어난 계획은 武帳에서 맞추었고 빼어난 기개는 文昌星에 나타냈으니 衛霍을 능가하면서도 따라잡지 않으며, 彭韓을 굽어보면서도 높게 여긴다.
윗댓글은 大唐平百濟國碑銘에 나오는 구절이라 하는데... "14도" 전부가 대륙에 있었던 지명이겠지요? 구체적으로 위치가 어디인가요?
물론 대륙에 있었던 지명입니다. 그 위치는 넓은 곳에 분포되어 있어 댓글로 설명한다는 것은 어렵습니다. 다음에 본 게시물에 게재될 것입니다.
등주와 래주의 땅은 소금(鹵)기가 있어 곡물이 자라지 못한다....
登州 漢東萊郡之海口。如意元年,分置登州,領文登、牟平、黃三縣,以牟平為治所。神龍三年,改黃縣為蓬萊縣,移州治于蓬萊。天寶元年,以登州為東牟郡
등주는 한나라 동래군의 황현이다.여의 원년에 등주를 분할해 문등과 모평 황의 3개현을 두었다. 신용3년에 황현을 봉래현으로 개명했다. 주치소를 봉래로 옮겼다. 천보원년에 등주를 동모군으로 했다.
란 글이 있는데(구당서..?) 동모군(東牟郡)은 동모산(東牟山)이 있는곳이 아닌지요...?
동모산은 대조영의 발해 건국지 입니다.
래산(萊山)은 봉래산(蓬萊山)이 아닌지요....
산해경에 의한 래산은 화산으로 부터 수천리 떨어진 롱서의 서쪽지방에 있습니다. 물론 그 이름은 옛 이름이 아닙니다. 따라서 이곳은 바다와는 전혀 관계없는 곳이며, 내륙의 로(鹵)지입니다.
<경세유표>에 ; 여조겸(呂祖謙)은 “소금의 종류가 매우 많다. 바다에서 나고 우물에서 나고 못에서도 나는데, 이 세 가지 외에도 나는 곳이 더 있다. 하북(河北)에는 노지(鹵地 : 소금이 나는 땅)가 있는데 이것은 땅에서 나는 것이고, 영강군(永康軍)에서는 소금이 벼랑에서 나는데..~중략~
또 “남방의 소금은 전적으로 바다에서 생산되고 북방은 전적으로 해지(解池)에서 생산된다. 그런데 남방 소금을 관리하는 데에 올바른 사람만 얻으면 그 해가 적지만, 오직 북방 해지 소금은 글안(契丹)과 서하(西夏) 소금이 서로 끼여들어서 해지 소금의 이(利)를 빼앗는다.
위의 경세유표의 내용중 하북에 노지(鹵地)가 있다는데 하북은 현 황하(서안과 낙양사이)의 북쪽이 아닌지요...
남방은 바다에서, 북방은 해지(解池)에서 소금이 생산되는데 북방의 해지는 지금의 산서 남부의 염지를 말합니다. 지금도 막대한 양의 소금을 생산한다 합니다. 교통과 통신이 불편했던 옛날 서안사람들은 어디서 나는 소금을 먹었을까요....? 분명 산서남부의 염지소금을 먹었을 것이고 그것이 경세유표의 내용이라 생각됩니다.
하북지방은 시대적으로 많은 이동이 있었다고 모아집니다. 대륙사에서의 하북은 중앙아세아 지방으로부터 현재의 신강성지역과 그 다음에는 황하상류인 청해성의 북쪽 내몽고를 지방을, 그 다음으로 섬서성 북방을 흐르는 황하를 기준했고, 근세기에는 현재의 하북지방으로 이동했다고 봅니다. 고전에서의 하북지방 지명은 대부분이 중앙아세아와 신강성과 청해성지방에 있다고 봅니다. 이것은 지리적 위치와 지세, 풍토, 산물등으로 검증이 됩니다. 산서성 역시 염지가 있고, 그 북쪽의 내몽고 땅에도 염지가 있습니다. 과거에는 이러한 노천의 소금으로 많은 유목민들이 섭취하고, 가축들 역시도 이로 인해 살아 갈 수 있었을 것입니다.
당나라의 고구려 침공군 총사령관직인 청구도행군대총관도 있는데....
백제 침공군 총사령관직인 신구도행군대총관과 비교하면 지명이 비슷합니다.
청구와 신구... 고구려와 백제....
구한에는 중화가 포함되는데, 구이 중에는 구한의 중화와 같이 그 중심 역할을 하는 건 없나요?
황색은 중앙을 가리키므로, 황이가 구이의 중심일까요?
구이는 이미 기원전 수천년 전부터 대륙의 고전에 등장하는데 죽서기년을 보면, 하(夏)나라 때 구이들을 정복하는 기록이 있으며, 조정에 찾아왔다는 기록으로 보면, 대륙에는 이미 글자가 생기기 전부터 구이들이 살았다는 것으로 판단됩니다. 구이들의 터전은 반도가 아닌 대륙이라는 확실한 증거입니다. 그 중에서 누가 주인이었는가는 섣불리 판단키 어렵습니다. 좀 더 연구가 필요한 부분입니다.
구한=아홉의 한국
<삼국유사> 마한 편에서...
일본(日本), 중화(中華), 오월(吳越), 둔라(屯羅), 응유(鷹遊), 말갈(靺鞨), 단국(丹國), 여진(女眞), 예맥(濊貊)
구한 가운데 중화가 있습니다. 이는 당연한 이야기입니다. 소위 동방과 서방! 이것을 기준하는 곳은 총령(곤륜)이라고 했습니다. 따라서 동방의 구이 또는 구한이란 현 대륙의 땅에 흩어져 살던 우리들의 선조들을 말하는 것이고, 기록으로 확인될 수 있는 것은 죽서기년의 하나라 때 부터입니다. 이러한 옛 기록을 무시하고. 모르는 척 하면서 "구이"들을 반도에 몰아 넣은, 식민사관이나 반도사관은 매국노보다 더한 자들이라고 봅니다. 비록 지금은 반도에 처밖혀 있을지언 정, 정신세계만큼은 우리의 옛 영토로 가야 한다고 봅니다. 언젠가 옛 선조들이 말타고 달리던 그곳에 옛 조선의 영광이 재현되리라 생각됩니다.
독일학자 마르카드는 "turk"가 고대 투르크 말로 아홉(九)이라는 뜻이라고 주장하였고, 프랑스학자 펠리오도 이에 동의하였습니다. "돌궐"은 아홉 신선 즉 구이(九夷)을 가리키는 말이라 하는데... 그리고 "돌궐"'은 "투르크"를 한자로 옮긴 것으로 어떤 종족이나 부족을 가리키는 말이 아니라 하고...
이와 관련된 글도 문무님이 써 주시면 좋겠습니다.
추가적으로... 대륙에서 반도로, 반도에서 열도로, "동이(東夷)의 대이동"이 시작된 시기는 언제일까요? 그 대이동의 배경은 무엇일까요??
돌궐은 고구려와 밀접한 관계가 있으며, 고구려가 강성할 때는 일부 돌궐들을 복속시켰습니다. 고구려가 당에 의해 와해되었을 때, 고구려의 왕자인 "고문간"은 돌궐로 피신해 돌궐의 사위가 됩니다. 그곳에서 고구려의 막리지 역할을 유지했다고 합니다. 이러하듯이 돌궐은 고구려와 아주 깊은 관계에 있는데, 이에 대한 증거되는 사료들이 많지 않아, 연구하는데 애로가 많습니다. 노력해 보겠습니다.
대륙에서 반도로 대거 이주한 것은 19세기 말로부터 20세기 초에 걸쳐 이주되었으며, 이는 일제의 지원아래 이루졌다고 봄니다. 반도 역시 토착민들이 살았으며, 대륙의 변화에 따라 반도 역시 지배계급은 변화를 겪었을 것입니다. 특히 정변기에는 도피하는 자들이 많았을 것으로 추정됩니다.열도에는 본시 토착민들이 살았으며, 이들은 대륙의 왕조변화에 따라 반도와 대동소이한 지배계급의 변화는 어쩔 수 없었을 것이며, 지금의 천황계 이주자들은 19세기 초로부터 중반에 걸쳐 대규모 이루어졌고, 이것은 열도에서의 대규모 국지전이 이를 중명합니다. 왜는 서남으로부터 필리핀을 거쳐 대만을 거쳐 열도로 이주한 것은 고증이 됩니다.
반도와 열도의 토착민들은 동이의 후손들이 아닌가요? 그 정체는 무엇인가요?
토착 반도인들과 열도인들에게는 대륙사가 무슨 의미가 있는 걸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