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체(體) |
사은 |
삼학 |
용(用) |
사요 |
팔조(진행4조/사연4조) |
결 과 |
복 |
혜 |
원불교 교리를 보면 체와 용으로 구성되어 있다.
사은은 일원상의 4가지 위력이다. 그 위력을 어떻게 잘 드러나게 할 것이냐. 사요를 실천함으로써 이다. 인간 사회가 평등 사회가 되었을 때 비로소 사은의 원리가 드러날 수 있다.
삼학은 일원상의 속성이다. 공, 원, 정의 속성을 통해 수양, 연구, 취사가 나오는데, 이때 운용에 필요한 것이 신분의성이다. 그런데 이 신분의성의 출발은 서원이다. 원력이다. 원력이 믿음에 뭉쳐졌을 때 큰 힘이 나온다.
정신수양을 왜 안하냐. 원력, 서원이 없어서 안한다. 믿음이 없어서 안한다. 분발심이 없어서 안한다. 의심이 없어서 안한다.(내가 왜 수양을 안 하지? 어떻게 해야지?) 불신, 탐욕, 나태, 우치가 있어서 안한다. 정성. 한번 물었다 하면 끝까지 하는 끈기가 필요하다.
신분의성이 삼학으로 가서 사은으로, 사요로, 이것이 다시 신분의성으로 회전이 되어야 신앙과 수행이 정진되고, 복과 혜가 족족하다.
[서원. 신]-[탐욕. 나태]는 반비례한다.
내가 서원이나 신이 약해졌을 때는 언제냐. 탐욕과 나태가 커졌을 때이다.
탐욕과 나태가 낮아졌을 때는 언제냐. 서원과 신이 강해졌을 때다.
불만(忿心분심)이 많은 사람은 두 종류이다. 믿음에 바탕한 분심과 믿음이 빠진 분심.
교단에 문제가 있으면 성질이 나야 맞다. 그런데 그것이 믿음에 바탕한 정당한 것인지, 불신에 바탕한 욕심인지에 따라 다르다.
[불신]-[나태]는 비례한다.
나태하면 서원이 가라앉는다. 믿음도 약해진다. 불신이 들면 나태해진다. 나태한 만큼 불신이 된다.
[신분]-[의성]은 비례한다.
신분의성은 자기들끼리 친하다. 불신탐욕도 자기들끼리 친하다.
불신탐욕자가 신분의성을 가진 자를 보면 비웃는다. “원불교가 밥 먹여주니?”, “인간적으로 살자. 그렇게까지 할 것 있니?”, 의심을 내는 자에게 “머리 아프게 뭐 그정도까지 하니?” 하고 말한다. 교당에서도 보면 끼리끼리 논다. 묘하다. 신분의성 있는 사람들은 그런 사람들끼리, 불신탐욕이 있는 사람은 그런 사람들끼리 논다. 그러면서 자기 생각이 맞다는 것을 증명해준다.
남녀노소 신분귀천 유무식을 막론하고 신분의성이면 어디서든 성공할 수 있다. 사회에서 성공한 사람들 다 뜯어놓고 보면 신분의성이다. 반대로 성공 못한 사람 다 뜯어놓고 보면 불신 탐욕 나태 우치이다. 그래서 성공하지 못한 것이다.
2. 信
믿음도 바른 믿음이 있고 미신적 믿음이 있다.
바른 믿음도 자력적 믿음과 타력적 믿음이 있다.
믿음은 앙신(仰信)과 해신(解信)이 있다.
앙신(仰信) : 오롯하게 사심 없이 받드는 믿음
해신(解信) : 아는 만큼 믿는 것.
우리가 모르는 것이 많다. 과학이 밝혀낸 것이 20%도 안 된다. 마음의 세계는 밝혀지지 않은 것이 많다. 아이큐(지능지수)와 이큐(감성지수)가 있는데 이큐의 발달은 7살이면 닫힌다고 한다. 그래서 7살 이전에 교육이 끝난다는 말이 그것이다. 이큐 좋은 사람이 아이큐 좋은 사람보다 잘 산다. 그리고 요즘은 간뇌의 중요성을 말하는데, 간뇌가 관장하는 것이 영성이다. 영성지수를 SQ(Spiritual Quotient)라고 하는데 예수나 부처를 1000이라 했을 때 과학자들은 100이 안된다고 한다. 밝혀진 것이 물질세계도, 마음의 세계도 얼마 되지 않는다. 대종사님께서 견성한 과학자가 내 법을 증명해 줄 것이라고 말씀하셨다.
믿음이 있으면 사람이 긍정적이다. 특히 가장 중요한 믿음은 나라는 존재가 일원상이라는 믿음이다. 내 본성이 부처님이라는 것을 믿는 것이 첫째이다. 그리고 나 혼자 그게 안 되니, 타력적으로 위력을 얻고, 4대불이신심(四大不二信心)(진리, 법, 스승, 회상)을 갖자는 것이다. 이 세상에서 무엇을 믿고, 무엇을 의지하고 살 것인가. 은행? 회사? 자식? 변한다.
믿을 것은 진리, 법, 스승, 회상이다. 얼마나 복이 많은 것이고, 다행인 것인가. 여러분 이 법을 만나지 않았다면 어떻게 살았겠는가. 무엇을 믿고 살았겠는가. 믿을게 없다.
*스승은 대종사님 이하 정사-항마위
*회상은 정법회상을 말한다. 한두 생 선을 한다고 정법을 만나지 못한다. 여러분은 어쩌다가 봉사 문고리 잡듯이 여기 앉아있는데... “어찌 다행 이 회상 만났는가. 이 스승님 만났는가. 생각할수록 다행이다.”라는 선진님들의 말씀을 나이가 들어갈수록 가슴깊이 느낀다.
*정산종사님 - ‘7가지 보물’ 중 4대불이신심(진리, 법, 스승, 회상)이 보물 중의 보물이다
*대산종사님 - 이 세상에서 믿고, 의지할 것은 무엇인가 : 진리, 법, 스승, 회상, 참나, 사은 (6가지)
3. 忿
분발로 넘어가겠다.
분발은 분이라고도 한다. 대종사님께서 분은 용장한 전진심이라고 했다. 그래서 만사를 이뤄갈 때 권면하고 촉진하는 원동력이다. 여러분 공부방 오면 하루는 권면 촉진이 되지 않나? 주사 딱 맞고 가면 약빨이 하루는 가지 않나?
분발은 정분(正忿)과 객분(客忿)이 있다.
분발심은 화가 나는 마음이다. 나는 여러분들이 화를 좀 냈으면 좋겠다. 또 화를 좀 안냈으면 좋겠다. 어떤 것에 화를 안냈으면 좋겠냐. 안 낼만 한 것들은 안냈으면 좋겠다.
안내야 되는 화를 내는 것을 객분(客忿)이라고 하고, 내야될 화를 내는 것 그것이 정분(正忿)이다.
감정적인 일, 경쟁심, 부당한 일에는 화를 잘 낸다. 거기에 화를 내는 마음 그것을 객분이라고 한다. 이것은 용장한 전진심이 아니다. 감정의 장난이고, 상대심이고, 중생심이다. 욕심으로 내는 마음이다.
그런데 분발심이라고 하는 것은 믿음을 이루기 위한, 서원을 이루기 위한 것이다. 나는 부처다, 나는 뭐든지 할 수 있는 것을 믿으라고 하였다. 그런데 나는 왜 안되지? 왜? why not?이런 화를 내야 한다. 이것이 분발심이다.
최승훈씨라는 기독교인이 있다. 소아마비로 잘 걷지도 못하고 겨우 설 수 있다. 이 사람이 한양대 음대를 들어갔다. 졸업할 때쯤 발표회를 하는데, 발표회에 빠지라는 말을 들었다. 그리고 화가 나서 장애인의 천국이라는 미국으로 간다. 그곳에서 공부를 하여, 미국의 레이건 대통령 앞에서 노래를 하고, 미국 국가를 부른다. 그리고 상을 휩쓸었다.
장애를 가진 사람도 선생을 만나고, 음악을 배우고, 최고로 성장할 수 있다. 여러분 중에 환경적으로 그 사람보다 곤란한 사람 있나? 같은 출발점에서 다리 절뚝대는 사람과 정상인 사람이 달리면 누가 더 빠르겠는가?
온몸에 화상을 입은 이지선씨도, 팔다리가 없는 닉부이치치도 해낸다.
나라는 존재가 하면 된다는 믿음이 있다면, 할 수 있다는 분발을 낼 수 있다. 그런 악조건의 사람도 하는데, 게다가 여러분은 원불교, 마음의 원리를 배우는 원불교를 만나지 않았느냐.
그런데 습관이라는 패턴이 있다. 자기가 해왔던 습관이 있다. 복권 당첨된 사람이 1년이 지나니 더 가난해졌다. 자기가 살았던 습관, 태도가 바뀌지 않았기 때문이다.
분심이라고 하는 것은 눈알이 한번 확 뒤집어 지는 것이다. 내 의식에 혁명이 일어나는 것이다.
믿음과 온전한 서원은 내 목숨을 바칠만한 것이어야 한다. 이런 믿음만 있어도 분발은 따라올 것이다. 여러분에게 목숨을 바칠만한 원력이 있는지 대조해 봤으면 좋겠다.
분심은 열정이고, 과거와의 단절이고, 생각의 틀을 바꾸는 것이고, 도전이고, 인내이다. 믿음에 바탕한 뜨거운 열정이 있을 때 자기 혁명이 일어난다.
분심은 한계에 부딪혔을 때 일어난다. 그 한계를 뛰어넘으려 했을 때, 경계에 부딪쳤을 때, 그 다음단계로 진입하게 된다. 자기 삶이 확 방향을 틀 때가 있다. 그때는 뭔가 한계에 부딪쳤을 때다. 한때 뜨거운 열정과 분발을 내서 무언가를 열심히 해본 적이 있을 것이다. 그런적 없나요? 그러면 연탄재를 차지 마세요. 연탄재는 한 번 뜨거워져라도 봤지...
적당한 부족함을 느끼는 것이 분심이다.
그런데 스스로 너무 만족하는 것, 자신을 너무 사랑하는 것 또는 자신을 너무 비하하는 것, 너무 자책하는 것, 또는 우유부단한 것, 이러면 안 된다.
그리고 분발한다면서 너무 긴장해도 안되고, 너무 스스로를 잡기만 해도 안된다.
결국 분발심은 살아있는 마음이다. 日新又日新의 마음이다.
원불교를 만나서 정체되는 경우가 있다. 열심히 하다가 어느 순간 들어갈 때가 있다. 그때에는 목숨걸만한 서원을 다시 대조해봐라. 한 생에 목숨 걸만한 것 별로 없다. 오롯한 서원, 믿음... 바칠만 하지 않나? 어차피 죽을 인생.
분발을 낼 때 겨우 부귀영화에 분발을 내거나, 안으로 삼독오욕에 내지 않기를 바란다.
이 분발은 육신적 기질변화와 정신적 분발을 포함한다.
여러분. ‘나는 안 돼.’ 그런 생각하세요? 화 좀 내세요. 화 좀. 화 좀 내.
대적공실 법문 6개 있는데, 나는 왜 그걸 모르냐. 너는 바보천치냐. 네가 한번 알아보지 않을래? 하면서 자신을 사랑하면서도 구박도 해보고, 분심을 내봐야지. 견성 한 번 해보자.
너만 아니? 나라고 왜 몰라. 하고 화내보세요.
제가 한 번씩 여러분에게 “이것도 몰라? 그것도 몰라?” 하면서 배 아프게 말할 때가 있는데 이것은 성질 좀 내봐라, 자존심 좀 상해봐라. 모르고 왜 마음이 편안하냐. 그런 의미이다.
원력과 신이 오롯하면 분발은 따라온다. 그러니까 분발이 없다는 것은 안에 불신과 탐욕이 있다는 것이다. 그런데 대부분 사람은 자기가 하던 습관을 따른다. 그러면서 운명을 따지고, 사주를 따지고 한다.
믿음만 定하는 것이 아니라, 분발도 定해야한다. 딱 정해야한다.
천주교 성당에 가면 루터를 찔러 죽이는 모습이 있다. 루터는 종교 개혁을 한 사람이다.
루터는 ‘이게 하나님의 뜻이냐?’하고 분발심을 냈다. 그래서 기독교가 생겼다.
이게 대 분발심이다. ‘그런가보다’ 하고 넘어가는 것이 아니다.
마음에는 노소가 없다. 나이먹었다고 도전 못하는 것 아니다. 나이와 상관없이 분발심을 낼 수 있다.
4. 疑
의심으로 넘어가겠다.
대종사님이 의심은 모르는 것을 발견하여 알고자 하는 것이라고 하였다. 그래서 만사를 대할 때 모르는 것을 알아내는 원동력이라고 하였다.
서가모니 부처님도 생로병사에 의심을 걸어서 대각을 하셨고, 대종사님도 ‘장차 이일을 어찌할꼬’하는 우주에 대한 의심이 밝아져서 깨달음을 얻게 된 것이다. 깨달음의 열쇠는 의심이다. 그런 깨달음에 대해 의심을 냈으면 좋겠다.
의심은 정의(正疑)(바른의심)와 사의(邪疑)(여우같은 의심)가 있다.
사의(邪疑)
사의는 진리와 법과 스승과 회상에 대해 여우같은 의심을 내는 것이다. 불신에 바탕해서 의심하는 것이다. 저울질 하는 것이다. 여우는 가다가 한 번 쳐다보고 가다가 한번 쳐다보고 한다. 그래서 여우 호를 써서 狐疑(호의)라고도 한다. 중근병에 들면 그런다. 법마상전급쯤 되면, 뭘 좀 알거든. 그래서 자기의 잣대를 댄다. 그래서 대개 중생계를 못 넘고 생을 마감한다.
정의(正疑)
정의는 믿음에 바탕해서 하는 바른 의심이다.
기독교에서는 의심을 내면 믿음이 없는 것이다. 그런데 원불교에서는 의심을 내라고 한다.
믿음의 반대가 의심은 아니다. 불신에 바탕한 의심이 아니라, 연구적 측면의 의심을 내라는 것이다. ‘왜 그럴까?’ 하는 물음을 가지라는 것이다. 상대를 불신하는 의심, 상대를 해코지 하는 의심, 내 욕심으로 내는 의심을 말하는 것이 아니다.
의심은 이치에 대한 의심과 일에 대한 의심이 있다.
일에 대한 의심은 여러 가지이다.
그런데 이치에 대한 의심은 여러 의심이 하나로 모아진다. 그래서 이것이 단으로 형성되어야 한다. 주로 ‘이 뭐꼬’, ‘시심마’, ‘만법귀일’, ‘참 나는 무엇인가’ 이쪽으로 몰아가게 되어있다.
의심을 내고 잡아서 뭉쳐서 풀어내야한다. 그런데 사람들은 의심을 좀 냈다가 말아버린다.
의심은 하나 딱잡아서 걸리는 것을 뭉치고 뭉치고 뭉쳐서 의두가 되어야 한다. 그래서 화두가 되어야한다. 불교에서는 화두를 준다. 원불교에서는 제가 이것으로 의두를 삼아도 되겠습니까 하고 물어도 된다. 저는 의두요목 중에 천상천하 유아독존이 의심이었다. 그래서 이 의두를 하루도 안빼고 근 2년을 좌선 끝나고 대조하고, 평상시에도 계속 의심했다. 우리 안에 자성광명이 있기 때문에 계속 연구하다 보면 밝아진다. 열리고 뚫린다. 이것이 이치이다. 그것을 믿는 것이다. 나는 하면 된다. 나도 깨달을 수 있다. 이 의문을 풀 수 있다. 라는 믿음을 가져야 한다.
대종사님은 이일을 장차 어찌할꼬
에디슨은 1+2가 3이라고? 왜?
뉴턴은 사과가 왜 떨어지지?
예수님은 누가 내 아버지인가?
서가모니 부처님은 사문유관을 통해 생노병사는 왜 있는건가? 하는 의심이 있었다.
사람을 의심하면 지옥보를 받고,
진리를 의심하면 대각을 준다 .
의심을 하려거든 진리를 의심해라. 깨달음을 얻을 수 있다.
삿된 의심은 자기 주관이 너무 강해서 또는 자기 주관이 너무 없어서 많다.
자기가 무엇을 하려고 하면 의심이 생긴다.(望卽有疑)
그리고 행하다 보면 의심이 생긴다. (行卽有疑) 성해교우가 설법 타이핑을 하다보니, 강연을 준비하다 보니 의심이 생겼다고 했다.
생활에 까닭이 있어야한다. 국어 시험에서 제일 많이 나오는 문제가 무엇인가. ‘본문의 밑줄이 뜻하는 바는?’이다. 이 말의 본뜻, 숨은 뜻, 본의를 묻는 거다. 똑같다. 의두요목의 숨은 뜻은 뭐냐. ‘세존이 도솔천을 떠나지 아니하시고 이미 왕궁가에 내리시어 어머니 태중에서 나지 아니하시고 사람들을 제도하여 마치셨다.’의 숨은 뜻을 찾아내라는 것이다.
의심을 내 가까이에서 내면 좋다. 그래서 제가 여러분에게 가장 많이 제시하는 의두가 ‘꿈도 없이 잠잘 때 그 아는 영지가 어디 있는가.’이다. 그리고 여러분이 말하고 있고, 손가락을 움직이고, 걷고 하는데 무엇이 들어서 움직일까 하는 의심을 해보라고 권한다.
일에 어두운 사람을 보면 의심이 없는 사람이 많다. 의문이 없다. 왜 이것을 하라고 했지? 어떻게 하면 잘할까? 하는 의문이 없다.
밭에서 농사를 지어도, 연구실에서 연구를 해도, 호떡을 팔아도 연구를 한다.
돈을 벌어야겠다는 원력(이라기보다 목표)을 가지고, 호떡으로 돈을 벌 수 있다는 믿음을 가지고, 녹차호떡을 만들기도 하고, 땅콩가루를 넣기도, 떡을 넣기도, 진달래꽃을 넣기도 한다. 의심을 걸다보니 아이디어가 나오는 것이다. 그러면 히트를 치는거다.
이세상의 일은 업그레이드하게 되어있다. 까닭 있게 보면 다 보인다. 어디에 가서도 배움의 눈, 까닭의 눈으로 보면 다 배울 수 있는 것이다. 어두운 사람은 관심이 없었던 것이다. ‘뭘까’하는 까닭의 마음이 필요하다.
서원과 믿음이 없으면 안 보인다. 서원과 믿음은 주인의식, 주인의 마음이기도 하다.
직원이 주변 일을 못 보는 것은 주인의 마음이 없기 때문이다.
생각의 나태심이다. 관심이 없는 것이다. 그것이 습관이 되어있는 것이다.
사람이 좀 삐딱해야 된다. 좀 민감해야 된다. 그래야 논문도 새로운 것이 나오고, 직장에서도 업그레이드 해간다.
의심을 많이 하는 사람들의 특징이 있다. 링컨과 레오나르도 다빈치와 정약용의 공통점이 있다. 이 사람들은 사색과 메모를 했다는 것이다. 이것이 정약용이 책을 수백권 낼 수 있었던 이유이다. 중생심 있는 사람, 차별심 있는 사람은 이들이 나와 다른 사람이라고 생각할 수 있다. 그러나 그 사람들이 그 분야에서 그렇게 했다면 나는 내 분야에서 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 것이 분발심이고 믿음이다. 그렇지 않냐. 나는 왜 일생동안 남 박수만 쳐주나. 소중한 내 인생인데, 왜 박수만 치다가 생을 마감해야 하는가.
의심이 걸리면 계속 메모하게 되어있다. 그 의심의 대가가 칸트이다.
제가 요즘 대학원에서 유식학을 배우는데, 저는 제가 잘 아는 줄 알고 있었다. 그런데 그 수백년 전 사상을 이해하기가 어렵다. 얼마나 그 깊이가 깊은지, 그 연구력이 얼마나 깊은지, 혀를 내두를 정도이다. 그러니까 그들은 보살의 경지에 갔다.
여러분은 생활 속에서, 일 속에서, 이치에서, 의심하고 있는가? 일에 의심을 가져야 일이 밝아질 것이고, 이치에 의심을 가져야 의심에 밝아질 것이다. 자존심을 이런 데에 걸었으면 좋겠다.
건성건성한 사람들을 보면 의심이 적다. 생각이 깊지 못하다. 대충대충 적당적당히 한다. 그냥 되겠지 하는 마음을 갖는다.
대종사님은 학력도 안 좋은데 의심 걸어서 대각하셨다. 여러분도 의심하기 바란다.
4. 誠
어떤 교무님이 지방에 첫 발령을 받고 대산종사님께 “종법사님, 제가 실력도 없고 공부도 못했는데 지방 교무를 가려하니 걱정이 태산이고 자신이 없습니다.” 라고 말하니 “너 일상수행의 요법 아는가? 그거해라. 상시응용주의사항 아는가? 그거해라. 유무념 아는가? 그거해라.” 라고 말씀하셨다고 한다. 그리고 “실력을 이야기했는가. 실력이라는 것은 정성이다. 그래서 誠卽聖이다.”라고 하셨다.
직업에서는 상사, 직원 모두 자신이 가진 장점을 써라.
그러나 수행은 자신의 단점을 정성스럽게 노력으로 매우는 것이다. 처음부터 잘하는 것이 아니라 끝까지 놓지 않고 부지런하게 정성을 들이는 것이다. 그래서 성자는 부지런하고 정성스럽게 하는 사람이다. 간단없는 마음이라고 했다. 사이 간, 끊어질 단, 끊어진 사이가 없는 것이 간단(間斷)없는 것이다.
해는 매일 뜨고 지고 뜨고 지고 한다. 그런데 여러분은 하루 떴다 하루 쉬었다 자행자지 하시죠. 심고, 일기, 좌선, 헌배, 끊이지 않고 하기가 참 어렵다. 좀 하다가 만다. 그런데 대산종사님은 한번 하기로 한 것은 끝까지 했다. 비가 오나 눈이 오나 했다. 돌아가시기 전까지 하셨다. 그러니까 성자다.
誠은 信忿疑의 정성이다. 信이 사라지지 않도록, 忿이 끊어지지 않도록, 의심이 사라지지 않도록, 끝없는 정성을 다하는 것이다. 이 신분의성으로 정신수양, 사리연구, 작업취사를 하는 것이다.
정성을 들이다보면 선물이 있다. 선물이 뭘까? 맛보기를 준다. 체험이라는 맛보기.
헌배 하나를 해도 그 속에 맛이 있고, 일기 하나를 써도 그 속에 맛이 있고, 사경 하나를 해도 맛이 있고, 좌선을 해도 체험이라는 맛이 있다. 최소한 체험이라는 맛을 보면 한단계 업그레이드가 된다. 누구나 이 맛을 느낄 수 있다. 그런데 그 체험의 맛을 느끼기 전에 작심삼일로 끝나는 경우가 많다.
정성이 끊어지는 이유는 ‘신분의’에 달려있다. 서원이 철저한가, 내 습관을 분발심으로 바꿀 수 있는가. 습관이 안 바뀌면 정성이 끊어진다. 예를 들면 아침에 좌선하기. 백일은 해야 습관이 바뀔 수 있다.
제불제성의 심인이라고 한다 모든 부처님과 성인들의 마음자리이다. 그 마음자리는 핵심이 정성이다. 신분의성을 놓치지 않았다. 성공한 사람들의 특징이다.
한마음이다. 신분의성이 신성이고 한마음이다.
내가 한마음을, 신을 낼거냐 불신을 낼거냐. 탐욕을 낼거냐 분발을 낼거냐. 의심을 낼거냐 불신을 낼거냐로 정하는 것이다.
아이를 들어올릴 때 팔뚝을 잡아도 애가 들리고, 다리를 잡아도 애가 들리고, 목을 잡아도 애가 들린다. 삼학공부 중 하나를 잡고 하다보면 그 속에 되어가는 뭔가가 있다. 하나를 붙잡고 쭉 해봐라. 너무 큰 것을 잡으면 질리니까 천천히.
그리고 저 사람은 좀 인간미가 없다라는 소리를 들어봐라. 정성으로 들이대면 인간미 없다는 소리를 들을 수 있다. “어떻게 그럴 수 있냐.”한다. “저 사람 너무 한다.”라는 말을 들어봐라. 고지식한 너무 한다가 아니라 신분의성을 들이대는 오롯함이 너무하다는 말을 들어보라. 나중에는 감동한다. 정당한 것을 고지식하게 하면 은혜의 꽃이 핀다. 은혜의 열매가 열린다. 그것이 아니면 다른게 열린다.
그래서 정성 중에 최고의 정성을 소개하고 마칠까한다.
최고의 정성은 한마음 돌리는 정성이다. 이것이 바로 유무념이다. 정성중의 최고의 정성, 한마음 돌리는 정성, 불신의 마음이 들었어도, 나태의 탐욕의 우치의 마음이 들었어도 한마음 돌리는 정성. 그것이 최고의 정성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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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애 많이 쓰셨다! 타이핑이 초반에 참 쉽지 않은데 고생하셨네요^^ 감사합니다
우왕 복습이 확 됩니다!
압축적인 설법인듯해요. 고생하셧습니다.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