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01-07 신년예배설교
본문: 빌 3:14
제목: 푯대를 향해 달려가는 새해
1. 푯대를 향해 달려가는 새해가 되자
“푯대를 향하여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님이 위에서 부르신 부름의 상을 위하여 달려가노라”(빌3:14)
세상은 극한 방탕을 향해 달음질한다.
육신의 정욕, 안목의 정욕, 이생의 자랑을 향해 달려간다.
그 길이 멸망을 재촉하는 길임을 모르기 때문이다.
바리새인들은 겉으로는 깨끗한 척 거룩한 척 하면서 향해 달려가는 것이 따로 있다.
탐욕과 방탕이요 외식과 불법이다.
그래서 너희 의가 바리새인과 서기관보다 더 낫지 못하면 결코 천국에 못 들어가는 것이다.
믿음생활은 경주요 달려가는 것이다.
“너희도 상을 받도록 달음질하라”(고전9:24)
새해는 푯대를 향하여 달려가는 해가 되게 하자.
그리스도인에게 푯대는 ‘하나님이 위에서 부르신 부름의 상’이다.
세상의 출세와 성공이 푯대인 자는 출발부터가 잘못되었다.
이 부르심의 상은 반드시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이다.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자, 그리스도 예수와 연합한 자만이 받을 수 있는 것이다.
성령으로 거듭나고 회심하여 그리스도의 제자가 된 사람만이 받을 수 있는 상이다.
예수 안에 있는 참 그리스도인만이 그 상을 푯대로 하여 달려갈 수 있다.
바울은 이 푯대를 ‘그리스도 예수께 잡힌 바 된 그것’이라 하였다.
“내가 이미 얻었다 함도 아니요 온전히 이루었다 함도 아니라
오직 내가 그리스도 예수께 잡힌 바 된 그것을 잡으려고 달려가노라”(12절)
그것을 잡으려고 달려가는 사람은 항상 진행형이지 완료형이 아니다.
이미 얻었다. 온전히 이루었다. 그런 것은 생애 마지막까지 없다.
아무리 많은 업적을 세웠어도, 아직 잡은 줄로 여기지 아니 한다.
오직 한 일 즉 뒤에 있는 것은 잊어버린다.
우리의 푯대는 오직 그리스도 예수께 잡힌 바 된 그것, 곧 주 예수께 받은 사명이다.
그것만이 하나님이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위에서 부르신 부름의 상이다.
모세는 이 부름의 상을 위하여 애굽의 모든 보화와 특권을 버렸다.
‘그리스도를 위하여 받는 수모를 애굽의 모든 보화보다 더 크게 여겼으니 상을 바라봄이라’
우리 주님은 산상설교에서도 말씀하셨다.
“나로 말미암아 너희를 욕하고 박해하고 거짓으로 너희를 거슬러 모든 악한 말을 할 때에는
너희에게 복이 있나니 기뻐하고 즐거워하라 하늘에서 너희의 상이 큼이라”(마5:12)
이 세상 영광은 잠깐이요, 하늘에서의 상은 영원하다.
뒤에 있는 것은 잊어버리고, 앞에 있는 것을 잡으려고 푯대를 향하여 달려가야 한다.
믿음은 하나님이 살아계신 것과 그가 상 주시는 분임을 믿는 것이다.
자유주의 신학은 미래를 향하여 달려가는 것이 구원이고
과거에 의존하여 사는 것을 죄라고 한다.
이 빌립보서와 실존주의 철학을 가져다가 적용한 것이다.
말만 근사하게 할 뿐 결코 살 수 없는 진리이다.
참다운 개혁도 끝이 없는 것이고, 끊임없이, 원리에로, 원칙의 말씀에로, 돌아가는 것이다.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성령을 따라 말씀으로 사는 자만 가능한 것이 개혁이다.
그 개혁 위에 하나님은 성령의 기름을 부어주시고 부흥을 주신다.
2. 그리스도 안에서 새 것으로 살자
“그런즉 누구든지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새로운 피조물이라
이전 것은 지나갔으니 보라 새 것이 되었도다”(고후5:17)
푯대를 향하여 달려갈려면 이미 지나가버린 이전 것을 잊어버려야 한다.
참 그리스도인은 주님의 제자요 하나님의 자녀요 성령의 전이다.
옛 것은 지나가고 그리스도 안에서 새로운 존재가 된 것이다.
코페르니쿠스적인 전환이 이루어진 것, 그것이 바로 새로운 피조물이요 새 것이다.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으면 그렇게 달라져야 하고 변화되어야 한다.
그것이 기독교가 말하는 성화요 성숙이다.
심리학 상담학이 말하는 겉의 변화가 아니라, 존재 자체의 변화이다.
그러기에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가능하고
그 일을 성령께서 하시는 것이다.
오늘날 교회는 겨우 심리학적인 변화만 알고 성령의 능력으로 이루어지는 변화는 내버렸다.
참 그리스도인이라면, 내가 성령으로 하나님의 자녀로 태어났고,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새로운 피조물, 새 것이 되었고,
성령을 따라 말씀을 따라 살아야 함을 자각하고 인식해야 한다.
육신의 생각은 사망이요 영의 생각은 생명과 평안이다.
육신을 따라 살 것인지, 성령을 따라 살 것인지,
육신의 생각으로 살 것인지, 영의 생각으로 살 것인지 순간 순간 결정해야 한다.
성경을 멀리하면, 영과 멀어지고, 육신을 따라, 육신의 생각을 따라, 살게 된다.
하나님과도 멀어지고 자기 자신으로 충만해지고 자기 옳은 소견대로 살게 된다.
그 결과는 사망이다. 가나안 땅도 암흑시대로 변한다는 것이다.
‘성경도’가 되어야 한다.
성경의 제자, 성경의 종, 성경을 사랑하는 사람이 되어야 한다.
하나님의 말씀을 마음과 생각에 영으로 쓰는 새 언약의 사람이 되어야 한다.
16세기 종교개혁은 개신교 5백년을 성경도가 아닌 교리주의자들을 만들어 냈다.
교리는 실천을 위한 것이 아니라 교리를 위한 교리였다.
먹으로 돌판에 쓰는 율법주의의 재현이었고, 죽이는 율법조문이었다.
‘그들의 열매를 보고 그들을 알리라’이다.
교회는 많고 교인수는 많고 세력은 많이도 키웠지만
아름다운 열매는 없고, 세상은 더욱 악하고 어두워져만 간다.
빛도 없고 소금도 없다.
믿음만 강조하고 선한 행실은 없다.
이전 것이 새 것으로 변화되는 변화의 열매는 찾을 길 없다.
초대교회와 발도인들은 빛과 소금이 되어 세상을 변화시켰다.
신앙과 일체가 된 성품과 삶의 모습을 보고 사람들이 교회로 몰려 왔다.
13세기에는 폭발적인 교회 부흥을 이루었고 그것이 14-15세기의 르네상스를 이루었다.
그 교회 부흥을 종교개혁이라고 부르는 것은 어패가 있다.
그들은 교회를 개혁한 적 없고, 초대교회의 전통을 그대로 살았을 뿐이다.
그들은 로마교회의 비성경적이고 우상숭배적인 요소를 비판하였을 뿐이다.
그들은 성경을 순수하고 단순하게 사랑하고 영으로 마음으로 생명으로 살았다.
먹으로 돌판에 쓰는 먹물들에게 속지 않았고, 그 어떤 권력도 핍박도 두려워하지 않았다.
고문과 화형과 감옥살이에도 굴하지 않았고, 평온하고 의연하게 죽음을 맞이했다.
세상과 다른 그들의 열매가, 함께 하시는 하나님의 능력이, 세상을 변화시키는 것이지,
장사하는 집이, 강도의 소굴이, 제도권을 장악한 권력과 부가, 하는 것이 아니다.
그리스도 안에서 새로운 피조물이 교회와 세상을 변화시키는 것이다.
참된 믿음의 선진들은 성경도들이었다.
지성은 필요하지만 성품과 삶의 변화보다 우선일 수 없다.
그렇게 두꺼운 책들과 어려운 학문들은 사람의 머리와 교만만 키울 뿐이다.
새해에는 참으로 성경을 사랑하고 공부하고 실천하는 성경도가 되자.
내 말을 듣고 행하는 자는 반석 위에 주추를 세운 지혜로운 자와 같다고 하셨다.
내 아버지의 뜻대로 행하는 자라야 천국에 들어간다.
“너희 빛이 사람 앞에 비치게 하여 그들로 너희 착한 행실을 보고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게 하라”(마5:16)
그리스도인다운 온전한 성품과 모든 선을 행할 능력은 성령의 감동으로 된 성경에서 나온다.
“모든 성경은 하나님의 감동으로 된 것으로
교훈과 책망과 바르게 함과 의로 교육하기에 유익하니
이는 하나님의 사람으로 온전하게 하며
모든 선한 일을 행할 능력을 갖추게 하려 함이라”(딤후3:16-17
이전 것은 지나가고 새 것이 되는 비결이 성경에 있다.
모든 성경은 하나님의 감동으로 곧 성령의 영감으로 쓰여졌기 때문이다.
그 성경에서 교리만 캐내는 먹물들의 감언이설에 그만 속고.
성경을 읽으며 묵상하며 단순하게 교훈과 책망을 받아야 한다.
바르게 되고 의로 교육을 받아야 한다.
그러할 때, 온전한 성품과 모든 선을 행할 능력을 갖추게 되는 것이다.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새로운 존재로, 새 것으로, 성경을 따라 사는 것,
그것이, 새해는 물론, 전 인생을, 복되게 하고 형통하게 하는 비결이다.
낮추기도 하시고 주리게도 하시는 모든 고난의 목적은
떡으로만 살지 않고 하나님의 입에서 나오는 모든 말씀으로 살게 하기 위한 것이다.
푯대를 향하여,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이 부르신 부름의 상을 위하여 달려가는 비결이다.
3. 땅에 보물을 쌓지 말고, 하늘에 보물을 쌓자.
“너희를 위하여 보물을 땅에 쌓아 두지 말라 거기는 좀과 동록이 해하며 도둑이 구멍을 뚫고
도둑질하느니라 오직 너희를 위하여 보물을 하늘에 쌓아 두라 거기는 좀이나 동록이
해하지 못하며 도둑이 구멍을 뚫지도 못하고 도둑질도 못하느니라”(마6;19-20)
이 말씀의 결론은 33절에 나와 있다.
“그런즉 너희는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
그리하면 이 모든 것을 너희에게 더하시리라”
좀과 동록이 무엇인가?
작은 사고들, 소소한 질병에 드는 돈들, 분실하고 실수와 낭비로 없어지는 것들 아닌가?
도둑이 구멍을 뚫고 도둑질하는 것이 무엇인가?
사기 크게 당하고, 큰 병 걸리는 것, 큰 사고를 당하는 것, 큰 낭비와 큰 실수들 아닌가?
학개서는 말씀한다.
“너희가 많이 뿌릴지라도 수확이 적으며 먹을지라도 배부르지 못하며
마실지라도 흡족하지 못하며 입어도 따뜻하지 못하며
일꾼이 삯을 받아도 그것을 구멍뚫어진 전대에 넣음이 되느니라”(1:6)
“너희가 많은 것을 바랐으나 도리어 적었고 너희가 그것을 집으로 가졌갔으나
내가 불어 버렸느니라 --- 너희로 말미암아 하늘은 이슬을 그쳤고 땅은 산물을 그쳤으며 --- 손으로 수고하는 모든 일에 한재를 들게 하였느니라”(10-11)
자기를 위해 땅에다가 보물을 쌓으면 하나님이 불어 버리신다.
전대에 구멍이 뚫어지게 하신다. 수확이 적게 하신다.
손으로 하는 모든 일에 한재(가뭄으로 인해 생기는 재앙)가 들게 하신다.
그러나 하늘에 보물을 쌓으면 좀과 동록도, 전대 구멍도, 도둑질도 당하지 않게 하신다.
하나님의 나라와 그 의를 먼저 구하는 것이 바로 하늘에 보물을 쌓는 것이다.
먼저 구한다는 것은 우선 순위가 하나님 나라이고 그 의인 것을 말한다.
하나님의 나라와 그 의를 위해 내 가진 것을 우선적으로 쓰는 것을 말한다.
세상의 계산법으로 살면, 내 수입은 날로 줄어들 것이고,
하늘의 계산법으로 살면, 이 모든 것을 더해주시는 역사를 경험하게 된다.
새해에는 성경이 말씀하는 하늘의 계산법으로 살아서,
이 모든 것이 더해지고, 형통해지고, 더욱 풍성한 새해가 되시기를 빈다.
빨리 깨달은 만큼, 한해의 수확이 많아지는 것을 경험할 것이고,
늦게 깨달은 만큼, 한해의 한재가 많아지는 것을 경험하게 될 것이다.
푯대를 향하여, 그 부름의 상을 위하여, 달려가는 새해, 풍성한 새해가 되기를 바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