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보형 金寶炯 (1894 ~ 미상)】 "정의부, 고려혁명군 결사대장 .”
평안북도 영변 출신. 1919년 3·1운동에 참가한 다음 만주로 망명하여 군자금모금 및 의용군(義勇軍) 조직책으로 활약하였다. 1922년 일본군과 교전하다가 두 팔에 관통상을 입고 붙잡혀 2년간 옥고를 치렀다.
1925년 정의부(正義府)에 가입하여 특파원 및 검무원(檢務員)에 임명되었다. 1927년 동흥농민회(東興農民會) 조직에 참여하여 활동하였다. 1928년 고려혁명군(高麗革命軍)에 가입하고, 1929년 11월 25일 하얼빈에서 군자금 모집 작전을 펼치다 체포되어 10년간 옥고를 치렀다.
당시 하얼빈 일대에서는 고려혁명당 당원들의 활동이 활발하였다. 고려혁명군 결사대원으로 함께 활동하던 김보형(金寶炯)·김만와(金晩窩) 등은 모두 고려혁명당의 일원이었다. 1926년 4월경 지린성(吉林省)에서 조직된 고려혁명당은 하얼빈과 국내를 오가며 군자금 모집 활동을 하였다.
1929년 9월경 김보형을 결사대 대장으로 임명하고 고려혁명군 결사대를 조직하였는데, 김헌(金軒) 등과 같이 가입하였다. 고려혁명군 결사대는 중동철도 동부연선 오길밀역(烏吉密驛)에서 이범석(李範錫)이 결성한 단체로, 친일파를 처단하는 활동을 펼쳤다. 1929년 10월 25일 밤, 대원 최기호(崔基浩)·김해룡(金海龍) 등과 함께 하얼빈 사도가(四道街)에 살고 있는 이규은(李奎殷)으로부터 군자금을 모집 하던 중, 밀정의 밀고로 일본영사관 경찰 7명이 출동하였다. 교전 중 일제 경찰 1명에게 총상을 입하고, 결사대는 대원 3명이 총상을 입으면서 붙잡혔다. 당시 왼쪽다리와 턱과 기타 여러 곳에 상처를 입었다. 이듬해인 1930년 3월 4명의 대원들과 함께 신의주지방법원 검사국에 송치되었다.
1963년 건국훈장 독립장이 추서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