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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린도후서 개요
▣ 고린도후서-개요와 서론
1. 자기의 사역에 대한 바울의 해명/ 1-5장
고난-그러나, 좌절하지 않음 /1장
슬픔-실망하지 않음 /2장
신령함-육신적이지 않음 /3장
진실함-속임수가 아님 /4장
신중함-부주의하지 않음 /5장
2. 교회에 보내는 바울의 권면/6-9장
자기의 생애를 검토함 /6장 1-13절
죄에서의 분리 /6장 14절-7장 1절
주님 안에서 화목함/7장 2-16절
헌금에 협력함 /8-9장
3. 자기의 사도권에 대한 바울의 변호/10-13장
소수가 고발한 문제에 대한 대답
그의 방법 /10장 “바울은 강한 체하지만 사실은 약하다 !“
그의 동기 /11장 “바울은 자신이 저버릴 수도 있는 것을 전파하고 있다“
그의 공로 /12장 “바울은 사실상 승인받은 사도가 아니다 !“
그의 사명 /13장 “바울은 결코 우리를 보러 오지 않을 것이다 !“
-바울이 당한 고난에 대한 참고 구절: 1:3-11/4:8-11/6:4/6:8-10/7:5/11:23-28/12:7-10"
▣ 고린도후서 서론
이 교회의 배경을 알기 위하여는 고린도전서에 대한 설명을 복습하라.
바울은 3년 동안 에베소에서 사역하는 중에 고린도전서를 썼으며, 거기서 디모데를 통하여 교회로 보냈다(고전 4:17). 그러나, 교회의 형편이 더 나빠진 것이 분명하다. 아마도 고린도 신자들이 바울의 말에 불순종한 것은 젊은 디모데에게 권위가 없었기 때문인 듯하다. 어쨌든 다음으로 바울은, 그들에게 준 사도의 명령을 순종하는지 확인하기 위하여 디도를 고린도에 보냈다(고후 7:13-15).
그러는 동안, 사도행전 19장 23-41절에 나오는 소요로 인해 바울은 그 도시를 억지로 떠나야 했다. 바울은 고린도 사람들을 방문하겠다고 약속했었지만(고전 16:3-7) 환경이 그러하여 늦어지고 있었다. 그는 드로아에서 디도를 만나고자 하였으나(고후 2:12-13) 이 계획은 실패했다. 고린도후서 1, 2장을 읽으면 육체적으로나 정서적으로 괴로워하고 있는 바울의 부담감과 심적 고통을 느끼게 된다.
바울은 드로아에 있는 동안 몇 번의 설교를 하고 그 후에 마게도냐로 갔다. 그와 디도는 마침내 만났는데, 아마도 빌립보에서 만난 것 같다(고후 7:5-6). 디도는 바울에게 고린도 교회의 대다수가 그를 따랐으며 그의 말에 순종하였다는 좋은 소식을 전해 주었고, 이러한 기쁨이 바울로 하여금 고린도후서를 쓰도록 조장하였다.
바울은 이 편지를 쓰면서 다음의 몇 가지 목적을 가지고 있었다.
범죄한 사람을 징계한 일로 그 교회를 칭찬하고(고전 5장), 다시 그를 용서하며 받아 들이도록 격려하기 위함(고후 2:6-11).
“계획이 바뀌어져서 그가 약속했던 대로 그들을 방문하지 못한 이유를 설명하기 위함(고전 16:3-7/고후 1:15-22).
교회 내에서 그의 사도권을 의심하는 사람들에게 답변하기 위함(고후 10-12장).
그를 나쁜 동기고 고소하는 사람들에게 답변하기 위함(고후 4:1-2).
예루살렘 성도들을 위한 헌금에 참여하도록 그 교회를 격려하기 위함(고후8-9장).
자신의 방문 계획을 알리고 그들을 준비시키기 위함(고후 13장).
이 편지는 고린도전서와는 직접적인 대조를 이룬다. 고린도후서는 강렬하리만큼 개인적이며, 헌신한 이 사도의 깊은 정서들로 채워져 있다. 만일 고린도전서가 고린도 교회의 “지붕을 벗겨 내는“ 것이라면 고린도후서에서는 바울이 “마음을 열고“ 있으며, 주님의 일을 위한 바울의 사랑과 관심을 보여 준다.
첫째 편지에서 바울은 질문에 답하는 교사로서 문제들을 바로잡는 반면에, 두번째 편지에서는 목회자이며 그리스도의 사역자로 그의 영적인 자녀들이 믿음안에서 완전해지도록 그의 생애를 쏟아 붓고 있다.
신약의 어떠한 서신서에서도 이처럼 그리스도인의 섬김(사역)의 참된 특성을 잘 나타내고 있지는 못하며, 어떤 편지도 그리스도인의 드림과 고난과, 영적인 승리에 대해 이처럼 말하고 있지는 못하다."
고후 1:1-24
▣ 참 목자로서의 변(辨)-고린도후서 1장-
본 장에서와 같이 사도 바울의 마음을 잘 드러낸 곳은, 신약 성경에서 몇 장 되지 않는다. 여기서 우리는 위대한 사도가 자신이 당해 온 고난에 대하여 말하면서 근심과 실패들을 시인하는 모습을 보게 될 것이다. 고통의 문제는 언제나 생각하는 사람들을 혼란에 빠뜨린다. “왜 의인이 고난을 당하는가?“의 문제는 욥기로부터 요한계시록까지 성경 전체를 흐르고 있는 질문이다.
이 장에서 바울은 자신의 경험들을 다시 회고하면서 하나님은 왜 자신의 백성에게 고난을 허락하시는가에 대한 세 가지 이유를 전해 준다.
1. 다른 사람을 위로하기 위하여(1:1-7)
“위로“(Comfort, Consolation)라는 단어는 이 구절들에서 10회나 사용되고 있으며, 직역하면 “자기의 곁으로 부르다“는 뜻이다. 예수님께서 성령에 대하여 요한복음 14장 16절에서 사용하셨던 “위로자“(Comforter, 변호자)라는 것도 같은 단어이다. 우리가 문제를 당할 때마다 우리를 도우시려고 하나님께서 우리 곁에 서 계심을 안다는 것은 얼마나 큰 기쁨인가(사 41:10/사 41:13/사 43:2-3). 삼위일체, 즉 성부 하나님(고후 1:3), 성자와 성령(요 14:16), 모두가 위로자이시다. 하나님은 모든 은혜의 하나님이신 것과 같이(벧전 5:10) 모든 위로의 하나님이시다. 모든 상황에 위로와 은혜가 따르는 것이다 !
그러나, 우리가 하나님께로서 받는 이 위로는 우리의 개인적인 즐거움을 위한 것이 아니라, 우리가 다른 사람을 도울 수 있게 하기 위하여 주어지는 위로이다. 바울은 환란을 통과했는데(1:4, 8/ 2:4/ 4:17/ 6:4/ 7:4/ 8:2) 그것은 다른 사람들을 섬길 수 있기 위함이었다. 하나님은 그가 우리를 위해 예비해 놓으신 일을 할 수 있도록 우리를 준비시키신다. 우리가 가본 일이 없는 곳에 다른 사람들을 인도할 수는 없다.
바울은 이러한 시련들을 “그리스도의 고난“으로 간주한다(1:5/4:10-11). 빌립보서 3장 10절에서 그가 언급한 대로 “주님의 고난으로 말미암은 교제“를 경험하고 있는 것이다. 이 말은 그가 죄를 위해 고난당하신 그리스도의 고난을 나누어진다는 뜻은 아니다. 왜냐하면 이것은 그리스도만이 성취하실 수 있는 사역이었기 때문이다. 그보다는 우리가 주님과 주님의 영광을 위하여 고난을 당하며, 또한 주님이 우리와 함께 고난을 당하신다는 뜻을 암시하고 있다(행 9:4).자비에 관한 하나님의 수학은 놀랍다. 시련이 많아지면 하나님은 위로도 마찬가지로 풍성해진다 ! 죄가 많은 곳에 은혜가 넘친다(롬 5:20). 바울은 “풍성하다“는 단어를 고린도후서에서 지주 사용한다. 성구사전에서 관련 구절들을 조사해 보라. 6절에서 바울은 그리스도인의 고난당함이 이중의 축복을 가져온다는 놀라운 진리를 가르친다. 첫째는 자신에게(“역사하며“란 말은 그 사람 안에서 일이 이루어진다는 뜻이다- 살전 2:13/빌 2:12-13) 다음으로는 그를 통하여 다른 사람들에게 축복을 가져오는 것이다.
그리스도인으로서 우리는 시련을 기꺼이 견뎌야 한다. 이는 우리들에게 개인적으로 영적인 유익을 가져오며, 다른 사람들과 함께 하나님의 위로를 나눌 때에 그들에게도 축복이 되기 때문이다. 7절의 “참예하는 자“란 “교제“ 또는 “짝“이란 뜻이다. 우리는 고난당함에 있어서 그리스도와 기꺼이 “파트너“가 되어야 한다. 왜냐하면 이러한 “공동 협력“은 위로와 교훈으로 인도해 가기 때문이다."
고후 1:8-11
2. 오직 하나님만을 신뢰하도록 하기 위해서(1:8-11)
실패를 시인한다는 것은 위대한 영혼만이 할 수 있는 일이다. 바울은 여기서 자기의 마음을 숨김없이 드러내며 신자들과 더불어 그가 아시아에서 견뎌야 했던 문제들을 함께 나눈다. 그가 이것을 기록한 것은 그들이 동정을 사기 위함이 아니요, 그가 배운 “하나님만을 신뢰하라“는 교훈을 가르치기 위함이었다. 바울이 어떤 고난을 가리키고 있는 것인지는 확실히 알 수 없으나, 아마도 고린도에서의 문제거리들이던 슬픈 소식과 더불어 에베소에 있었던 소요 사건이 포함되어 있을 것이다(행 19:23-41/고전 15:32).
7장 5절에서 바울은 외부와 내부에 문제들이 있었음을 시사한다. 아마도 문제들이란 육신의 연약함과 위험, 그리고 고린도의 갓난 아기 같은 교회에 대한 영적인 관심이었을 것이다. 이러한 문제거리가 무엇이었든지 간에 바울을 압도하였으며 사형선고를 언도하기에 충분한 것이었다 ! 그는 생명조차 포기할 정도였다!(하나님의 위대한 성도들도 역시 진흙으로 빚어졌음을 알게 되는 것은 참으로 큰 위로이다!) 그러나, 바울은 하나님께서 그에게 보내신 교훈을 배웠다. 그는 자신을 의뢰하지 않고 하나님만을 의지해야 하는 것이다.
10절에 나와 있는 신자의 구원에 대한 세 가지 시제에 유의하자(딛 2:11-15 참조). 바울은 그의 친구들의 기도의 도움을 신속하게 인정하였다(11절). 그는 기도의 응답으로 그가 구조를 받았음이 많은 사람들로 하여금 하나님을 찬양하게 하고, 마땅히 받으셔야 할 영광을 돌리게 하였다고 말한다.
우리가 자신이나 환경이나 사람을 믿지 않고 하나님만을 신뢰하는 법을 배울정도가 되려면 오랫동안 그리스도인으로서의 삶을 살아야 한다. 아브라함은 롯을 데리고 갔는데 롯은 실패하였다. 모세는 아론의 도움을 강요하였지만 그는 백성을 죄로 인도해 갔으며, 다윗의 고문관들은 그를 저버렸고, 제자들도 그리스도를 버리고 달아났다 ! 여호와를 경외하고 그를 기쁘시게 하기 위하여 사는 사람은 평화와 확신을 누린다. 참으로 깊이 배워야 할 교훈이다 !"
고후 1:12-24
3. 하나님의 약속을 요구하기 위하여(1:12-24)
바울의 계획들과, 고난에 대한 일반적인 내용을 다루는 구절 사이에 무슨 연관성이 있는지는 쉽게 알 수 없다. 그러나, 그 배경을 이해하면 바울의 생각을 알 수 있다. 바울은 고린도 교회를 방문하기로 약속을 했었다. 그리고 거기서 일단 마게도냐로 갔다가 그리고나서 다시 예루살렘으로 돌아가려고 했다. 15절에 나타난 “이중의 축복“(두번째 유익)은 바로 이것이었다.
그러나, 환경은 그의 계획을 변경시켰으며, 고린도에서의 그의 원수들은 바울을 변덕스럽고 믿을 수 없는 사람이라고 비난하였다. “바울의 편지는 믿을 수 없어 ! 그런데 그는 이러한 편지들이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보내시는 멧세지들이라고 주장한다 !“고 그들은 말했다.
바울은 이러한 고발에 대해 그들을 두 번 방문한다는 그의 약속이 진지한 것이었으며 그의 동기는 순수하고 거룩한 것임을 보여 줌으로써 대답한다. 바울은 이 편지가 정직하고 믿을 만한 것임을 확신시키며 그리스도가 심판하시기 위하여 돌아오실 때는 알게 될 것이라고 하였다(12-14절). 바울은 그들의 사랑과 이해를 믿는 확신 때문에 계획을 변경시켰던 것이었다(15-16절).
테일러의 저서인 “살아 있는 편지들“(Living Letters)에서는 이렇게 설명한다. “내가 마게도냐로 가는 길에 너희에게 들러 너희를 만나려고 계획을 세운 것은 너희의 이해와 신뢰를 믿었기 때문이었다 ...“ 사랑과 신뢰가 있을 때 동기에 대한 의심이나 의문이 있을 수 없다.
바울은 “예“라고 말하면서 “아니요“를 의미하는 세상 사람과 같지는 않았다. 그는 여기서 “하나님의 말씀은 신뢰할 만하며, 하나님의 모든 약속은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예」가 된다“는 교훈을 남긴다. 20절은 다음과 같이 번역할 수 있다. “하나님의 모든 약속들은 그리스도 안에서 「예」인 것을 알게 된다. 그리고 주님을 통하여 우리는 「아멘」한다.“ 다른 말로 하면, 하나님의 약속들은 그리스도 안에서 진실된 것이다. 주님께서 그 약속들을 성취하시며, 우리에게 그 약속들을 요구할 믿음을 주신다.
하나님의 불변하는 말씀을 인하여 우리는 얼마나 감사해야 할 것인가 ! 하나님의 약속을 요구하고 믿기에 앞서 고난과 시련이 닥치는 때가 종종 있다. 우리가 계획을 세우지만 하나님이 이를 다스리신다. 우리는 약속을 하지만 언제나 지킬수는 없다. 그러나,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의 말씀의 모든 약속들이 성취됨을 알 수 있다. 그리고 주님 안에서 우리 자신을 위하여 이러한 약속들을 요구할 능력을 가지게 된다.끝맺는 구절에서(21-24절) 바울은 그의 그리스도인으로서의 생명이 하나님께로부터 왔음을 상기시킨다. 그는 성령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 안에서 세우심을 받아 기름부음을 받았고, 인침을 받았으며 성령이 주시는 열심을 받았다. 성령이 그의 생활에서 일하고 있는데 그가 어떻게 불성실할 수가 있겠는가?
성령의 인침이란, 우리에게 영원한 구원의 표를 해주시는 성령의 사역을 말한다. 일단 우리가 그리스도를 신뢰했으면 우리는 주님 안에서 인침을 받은 상태이며 보장을 받는다(엡 1:13-14/엡 4:30). 열심이란 우리가 영광 중에 누리게 될 영적인 축복을 오늘의 우리 생활에서 누리도록 내려주시는 성령의 축복이다(롬 8:9/롬 8:14/롬 8:23/엡 1:14).
끝으로, 바울은 계획된 여행을 하나님께서 변경시켜 주셔서 기쁘다고 말한다. 왜냐하면 만일 그 때 그가 그들을 방문했었다면 그들을 책망했어야 할 것이기 때문이다. 그가 에베소에서 고린도로 항해하는 대신에 드로아와 빌립보로 갔으므로 고린도 교회는 일들을 바로잡을 시간을 더 벌게 되었다. 그 당시 여행했었다면 고통스러울 것이었겠지만 이제는 일들이 해결되었으므로(2:6-11) 근심없이 기쁨으로 그들을 방문할 수가 있었다."
고후 2:1-17
▣ 바울의 사역(Ⅰ)-고린도후서 2장-
본 장에서 바울은 계획이 변경되었던 데에 대한 해명을 계속하며(1:15- 이하) 그 교회와 문제들에 대한 그의 사랑과 관심을 표명한다.
1. 교회를 향한 바울의 눈물(2:1-4)
11장 23-28절에서 바울은 그리스도를 위하여 그가 견뎌야 했던 많은 시련들을 열거하며, “모든 교회를 돌보는“ 것이 가장 큰 짐이라고 말한다. 마치 이스라엘의 대제사장이 그의 마음과 어깨에 지파들에 대한 염려의 짐을 진 것과도 같이(출 28:12-21) 참목자 바울은 그의 마음에 이 젖먹이 교회들을 품고 어깨에 메고 있었다. 눈물이란 영적인 사역에 있어 중요한 부분이다. 예수님께서도 우셨고, 바울은 눈물로 사역했으며(행 20:19/행 20:31), 시편 126편 5-6절은 눈물이 없이는 추수도 없다고 언급한다.
바울은 엄격한 아버지로서 교회를 방문하는 것을 원치 않았다. 그는 사랑하는 친구로서 방문하고 싶었다. 교회가 그의 마음에 기쁨이 되어야지 결코 슬픔이 되어서는 안 되는 것이다. 만일 그가 그들을 심히 꾸짖어 유감스럽게 만든다면 그들은 어떻게 바울에게 기쁨으로 돌려 줄 수가 있겠는가 ! 그는 교회가 문제를 바르게 할 시간을 주고 싶었다. 그리고 나서 그들을 방문하면 그들의 교제가 기쁠 것이다.
그는 그들에게 눈물로 젖은 편지를 썼다. 그는 편지에 엎드려서 울었다 ! 이것은 아마도 고린도전서를 가리키는 것 같다. 또는 보다 엄격했던 편지, 즉 우리가 가지고 있지 못한 편지였을 것이다.
1장에서 바울은 풍성한 위로를 주제로 하였으며, 여기서는 풍성한 사랑에 대해 다룬다. “사랑은 결코 실패하지 않는다.“ 사랑이 있는 곳에는 다른 사람이 최선의 것을 누리는 것을 보고 싶은 부담감이 있다. 목회자들이 흔들리는 그리스도인을 위하여, 얼마나 눈물을 흘렸는가. 그러나, 하나님은 바울의 눈물을 영예롭게 하셨으며 교회 내에 그러한 죄가 없어지도록 역사하셨다."
고후 2:5-11
2. 범죄자들에 대한 바울의 가르침(2:5-11)
이 주제는 고린도전서 5장으로 돌아가게 하는데 여기서, 바울은 공개적으로 죄된 생활을 하는 사람을 징치하라고 교회에 권면했다. 그런데 여기서 바울은, 죄를 범한 사람만 그에게 문제와 슬픔을 주는 것이 아니라 온 교회로 말미암아 괴로움을 당한다고 말한다. 바울은 교회를 소집하여 이 사람을 교제에서 내치도록 지시했었다. 이러한 징계의 행위는 그 사람을 슬픔과 회개의 자리에 있게할 것이었다.
그들은 이 일을 잘 해냈다. 그러나 너무 지나쳤다. 그가 죄가 슬픈 것임을 알고 자백을 했는데도 교회는 그를 다시 영접하려 하지 않았던 것이다.
“그를 용서하고 다시 받아 들이라“고 사도는 말한다. “만일 그렇게 하지 않으면 사단은 큰 슬픔으로 그를 멸망시킬 것이다“. 그리스도인들은 얼마나 자주 죄를 범하는가. 그러면서도 하나님은 용서하시고 잊으신다는 것을 믿지 못한다. 참된 회개가 아니면서도 비정상적으로 슬퍼하는 사단의 슬픔이 있는데, 이것은 양심의 가책이며 세상에 속한 슬픔이다. 베드로는 회개를 보였다. 그의 슬픔은 거룩한 슬픔으로서 그를 그리스도께로 돌아오게 하였다. 그러나, 유다는 양심의 가책을 보였다. 그의 슬픔은 사단의 슬픔이며 세상의 슬픔으로, 그가 그리스도를 떠나 자살하도록 인도해 갔다.
사단은 우리가 용서받을 수 없다고 믿기를 원한다(슥 3:1-5/롬 8:31-39 참조). 만일 사단이 우리를 죄로 인하여 고소할 수 있고 실망에 빠뜨릴수 있다면, 우리에게서 기쁨을 빼앗아가며 그리스도께 사용되지 못하게 할 것이다. 하나님이 죄인을 용서하신다면 우리는 그를 용서해야만 한다(엡 4:32)."
고후 2:12-17
3. 그리스도 안에서의 바울의 승리(2:12-17)
바울은 에베소에서 빌립보로 여행한 이야기를 꺼낸다. 문제거리로 출발한 것이 승리로 끝을 맺게 되었다. 그리스도인의 생활에서 이러한 일은 얼마나 자주 일어나는가. 부활절 아침에 무덤에 왔던 여인들은 실망으로 인하여 마음이 무거웠으나 위대한 승리가 있었던 것을 발견하였다. 바울은 드로아에서 디도를 찾지 못했으나 복음을 전파할 “놀라운 기회“를 발견하였다(롬 8:28).
시련이 있는 곳에는 어디나 봉사의 문이 열려 있다. 요셉은 애굽에서 시련을 승리로 바꾸었으며, 다니엘은 바벨론에서, 그리고 바울은 드로아에서 그러하였다.
하지만 봉사가 평안을 대신하는 것은 아니다. 그래서 바울은 디도를 만나기를 갈망하였으며 고린도에서 소식을 가져오기를 원하였다. 그는 드로아를 떠나 마게도냐(아마도 빌립보)로 갔으며 고린도를 완전히 지나쳤다. 그는 빌립보에서 디도를 만나 보고를 들었는데, 범법자가 징계를 받았으며, 고린도 교인의 대다수가 바울의 권위에 따랐고, 고린도에서 일들이 잘 되어 간다는 좋은 소식이었다. 이 소식은 바울을 대단히 기쁘게 하여 그는 편지를 쓰다 말고 잠시 찬양의 노래를 적어 넣었다.
14-17절에 나오는 모습은 모든 로마 사람들에게는 친근한 것이지만 20세기 그리스도인에게는 그렇지가 않다. 승리를 거둔 장군이 전쟁터에서 귀국할 때는 나라에서 공식적인 시위행진을 벌였는데, 이 퍼레이드는 화려함과 영광으로 가득 찼으며 많은 향이 피워져 영웅을 높였다. 이 행진에서 군인과 지도자들이 영광과 찬양을 즐기는 반면에, 노예와 포로들은 죽음의 투기장을 향하고 있었다. 승리자들이 향기를 즐기는 동안 이것은 생명과 기쁨이었으나, 포로들에게는 다가오는 죽음을 생각나게 하는 것이었다.
“그리스도인의 행진“에서 바울은 예수 그리스도를 승리자로 묘사한다. 십자가에서의 죽으심을 통하여 그리스도는 모든 적을 정복하셨다.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주님의 승리에 동참하여 행진한다(고전 15:57). 그러나, 그리스도인은 이 행렬에서 향기(그리스도의 달콤한 향)이다. 왜냐하면 우리는 우리의 생활에서, 그리고 생활을 통하여 그리스도에 대한 지식을 퍼뜨리기 때문이다.
이 향기는 다른 신자들에게 생명을 뜻하며 영원한 죽음을 향하는 불신자들에게는 죽음을 뜻한다. 요셉은 떡 맡은 관원장에게는 죽음의 향기요, 술 맡은 자에게는 생명의 향기였으며(창 40장), 예수님은 회개한 도둑에게 생명의 향기였다.
이것은 아름답고 도전을 주는 모습이다. 사람들에게 생명을 소개하는 것, 아니면 그리스도를 거절하고 죽음으로 가도록 소개하는 것은 막중한 책임이다. 그리스도인이 된다는 일은 진지한 일이다. 왜냐하면 우리의 생활은 사람들을 천국이나 지옥으로 인도하고 있기 때문이다. “누가 이 일을 감당하기에 충분하겠는가?“라고 바울이 외치는 것도 이상한 일이 아니다. 가능한 한 최선의 증인, 최선의 군사가 되는 데에 필요한 모든 것을 소유한 그리스도인이 누구인가?
3장 5절에서 그는 이 질문에 답한다. “우리의 만족(충분함)이란 하나님께 속해 있는 것이다.“ 바울은 충만함(충분함)이란 단어를 이 편지에서 여러 번 사용한다. 그는 그리스도께서 우리의 영적인 필요들과(3:4-6), 물질적인 필요와(9:8), 육체적인 필요(12:7-10)를 만족시키기에 충분하심을 보여 준다.
17절에서 바울은 그의 말을 믿을 수 없다는 고소로 되돌아 간다. 불행히도 오늘날까지 하나님의 말씀을 “상업화하는“ 타락한 설교자들과 선생들이 있다. 여기서 타락했다는 말은 복음을 “하찮게“ 생각하며,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확장하는 데보다는 삶의 수단으로서 사용하고 있다. 이 단어의 헬라어는 여관 주인, 행상인에 해당하는 단어에서 왔으며, 이익을 남기기 위해서 어떤 종류의 일도 한다는 개념이 들어 있다.
바울의 사역은 사업이 아니었다. 그것은 부담감이었다. 그는 인간을 섬기는것이 아니라 그리스도를 섬기고 있었다. 그는 멧세지와 방법, 그리고 동기에 있어서 신실하였다. 그는 하나님의 눈이 자신에게 머물러 있고 그리스도의 이름이 그에게 걸려 있음을 인식하고 있었다.
이 두 장에서 우리는 바울의 사역이 고난과 슬픔으로 가득 찼었음을 보았다. 그러나, 그리스도 안에서 승리와 기쁨이 있었다. “우리의 만족은 하나님께 속해 있는 것이다.“"
고후 3:1-18
▣ 바울의 사역(Ⅱ)-고린도후서 3장-
본 장은 율법의 구약 사역과 복음의 신약 사역을 나타내는 핵심적인 장이다. 오늘날 유대주의와 교회를 혼합하는 종교 단체가 얼마나 많은가. 아마도 바울이 예루살렘교회에서 보내는 추천서를 가지고 있지 않았기 때문에, 고린도에 있는 유대인 분당은 그가 참된 사도가 아니라고 말하는 것 같다. 어떤 교사들이 이런 추천서를 가지고 고린도에 왔던 것이 분명하며, 이 일로 인해 바울을 신용하지 않은 것 같다.
바울은 이 고발을 사용하여 율법의 구약 사역과 복음의 신약 사역을 대조시키는 기회로 삼는다.
1. 돌비가 아니라 마음에 새겨짐(3:1-3)
바울은 “내게는 추천서가 필요하지 않다. 고린도에 있는 너희 그리스도인이 나의 편지, 곧 추천서이다. 돌비가 아니라 마음에 기록된 편지인 것이다“라고 말한다. “그들의 열매로 그들을 알리라“고 예수님께서 말씀하셨다. 사람의 생활과 사역은 그가 한 일로 검사를 받을 수 있다. 바울은 자신을 하나님의 백성의, 생활에 말씀을 기록한 하나님의 비서로 나타낸다. 참으로 놀라운 진리이다. 모든 그리스도인들은 모든 사람들이 읽는 “그리스도의 서신“이다.
“당신은 매일 한 장씩 복음서를 쓰고 있다.
당신의 행위와, 당신의 말로 쓰는 것이다.
사람들은 믿음직한지 또는 진실인지 보려고
당신이 쓴 것을 읽는다.
당신이 쓴 복음서는 과연 어떠한 것인가?“
모세는 하나님의 율법을 돌에 기록하였다. 그러나, 이 시대에는 하나님께서 우리의 마음에 그의 말씀을 쓰신다(히 10:16-17). 율법은 외적인 문제이나, 은혜는 내면적이며 마음에 관계된다. 그러나 바울은 잉크로 쓰지 않았다. 왜냐하면 그것은 흐릿하게 바래지기 때문이다.
그는 사람들의 마음에 성령으로 영원히 썼다. 돌비에 기록된 율법은 인간의 손에 들려져 있으나 그들의 생애를 변화시킬 수 없다. 그러나, 하나님의 성령은 말씀을 사용하셔서 인간의 생애를 변화시킬 수 있으시다. 그래서 신약 사역은 성령께서 말씀을 인간의 마음에 기록하시기 때문에 영적인 사역인 것이다."
고후 3:4-6
2. 죽음이 아니라 생명을 가져옴(3:4-6)
바울이 “의문(儀文)은 죽이는 것이다“라고 말할 때는 “문자로 기록된 하나님의 말씀“이 말씀의 “영(정신)“을 거스린다고 말하는 것이 아니다. 우리는 종종 혼란을 일으킨 사람들이 다음과 같이 말하는 소리를 듣는다. “성경의 문자를 따르는 것은 잘못이다. 우리는 성경의 정신을 따라야 한다.“
그러나, 명심할 일은 “의문“(the letter)이라고 할 때 바울은 구약율법을 의미한다는 점이다. 바울은 본 장에서 구약 율법을 말함에 있어 몇 가지의 표현을 사용하여 의문(6절), 죽게 하는 직분(7절), 정죄의 직분(9절)으로 나타낸다. 율법은 생명을 부여하도록 주어진 것이 결코 아니다.
율법은 분명히 죽게 하는 직분이다. 바울은 새로운 언약의 사역자였는데, 이 새 언약은 행위와 죽음의 옛 언약이 아니다. 율법을 통하여 구원을 받은 사람은 아무도 없다 ! 그런데 고린도에는 사람들에게 율법에 순종하며 바울의 은혜의 복음을 거절하라고 가르치는 교사들이 있었다.
예를 들어, 요한의 복음서에서 “생명“이란 단어를 추적해 보면 신약의 사역은 성령을 통한 생명의 사역임을 알게 될 것이다. 요한복음 6장 63절에는 “생명을 주는 것은 영이다“라고 기록되어 있다."
고후 3:7-13
3. 시들어 버릴 영광이 아니라 지속적인 영광(3:7-13)
구약의 사역에 영광이 있었던 것은 물론이다. 영광이 성전을 채웠고, 하나님의 사역이 광야에서 백성들 위에 머물렀었다. 성전과 의식들, 모세에게 율법을 주신 일 등, 이 모든 것은 그들에게 따른 영광이었다. 그러나, 그것은 빛바랠 영광이었으며, 지속되는 영광이 아니었다.
바울은 출애굽기 34장 29-35절에서 모세의 경험을 인용한다. 모세는 하나님의 임재를 경험했으며 하나님의 영광이 그의 얼굴에서 반사되었다. 그러나, 모세는 이러한 영광이 희미하게 된다는 것을 알고 있었으므로, 사람들에게 말할때는 언제나 그의 얼굴을 수건으로 가렸다. 그렇지 않으면 백성들은 흐릿해진 영광을 볼 때 그의 사역에 대한 신뢰를 잃게 될 것이었기 때문이다. 대개는 모세가 사람들이 깜짝 놀랄까 봐서 베일을 썼다고 가르치는데 이것은 틀린 것이다. 13절을 유의해서 읽어 보라. 테일러의 「살아 있는 편지들」(Taylor, 「Living Letters」)에는 “우리는 모세가 아무도 그의 얼굴에서 빛이 사라져감을 볼 수 없게 하려고 수건을 쓴 것같이 하지 않는다“라고 번역되어 있다.
하나님의 뜻은 옛 언약과 율법의 영광이 머물러 있게 하려는 것이 결코 아니었다. 하나님의 영광이 거하기 앞서 그 영광은 색이 바래게 되는 것이었다. 만일 정죄의 직분(율법)이 영광스럽다면, 의의 직분(복음)은 훨씬 더 영광스럽다. 바울은 베일을 필요로 하지 않는다. 숨길 것이란 아무것도 없기 때문이다. 복음의 영광이 거기 있는 것이다. 이 영광이 보이지 않는다면 그것은 그의 잘못이 아니다(4:3-6)."
고후 3:14-16
4. 가려진 것이 아니라 드러난 것(3:14-16)
바울은 모세의 수건을 영적으로 적용시키고 있다. 그는 유대인들이 구약을 읽을 때 유대인의 마음에 여전히 베일을 쓰고 있어서, 이 베일이 그들로 하여금 그리스도를 보지 못하도록 막고 있다고 언급한다. 구약은 그리스도를 알지 못하는 마음에는 언제나 잠겨 있는 책이 될 것이다.
그리스도는 성전의 베일을 빌려서 구약의 모형과 예언들을 성취하고는 그 베일을 제거하셨다. 이스라엘은 율법의 임시적인 사역을 알지 못하고 영광의 색채가 바랠 직분, 결코 지속되지 않을 직분에 매달려 있는 것이다.
이스라엘은 이중으로 눈이 멀어 있었다. 인격적으로 눈이 멀어 구약에서 그리스도를 볼 수 없었으며, 또한 심판으로 인하여 눈이 멀었는데, 하나님은 민족적으로 그들이 보지 못하게 하셨던 것이다(롬 11:25). 고린도후서 4장 4절은 사단이 모든 죄인들의 마음을 눈멀게 함은 물론이며, 그리스도의 영광스러운 복음을 숨기는 것을 시사한다.
그러나, 마음이 그리스도를 향해 돌이킬 때는 베일이 벗겨진다. 모세가 하나님을 뵈러 산으로 올라갔을 때는 베일을 제거하였다. 이처럼 어떠한 유대인도 정직히 주님께로 향할 때 그의 영적인 베일이 제거될 것이며 그리스도를 보게될 것이고, 주님을 구세주로 영접하게 될 것이다. 신약 사역은 하나님의 말씀(신약, 구약)을 통하여 그리스도를 지목하는 것이다. 우리는 숨길 것이 없으며 베일로 가릴 것이 없다. 영광은 영원한 것이며 점점 더 밝아질 것이다.
고후 3:17-18
5. 속박이 아니라 자유(3:17-18)
17절은 크게 오용되고 있으며 온갖 종류의 신령하지 못한 실천 생활의 핑계를 대는 데에 인용되고 있다. “주님은 영이시다.“ 사람이 그리스도께로 돌이키는 것은 성령을 통해서이다. 성령은 영구적 속박으로부터 자유를 준다. 옛 언약은 행위와 속박의 언약이었다(행 15:10). 그러나, 복음의 새로운 언약은 그리스도 안에서 영광스러운 자유의 직분이다(갈 5:1-).
이러한 자유는 방종이 아님은 물론이며, 두려움과 죄와 세상과 종교 의식들로부터의 자유이다. 모든 그리스도인은 모세와 같다. 베일을 벗어버린 얼굴로 그는 하나님의 존전에 나아가 하나님의 영광을 누릴 수 있다. 스스로 그 영광을 받고 더욱 그리스도를 닮아가라.18절에서 바울은 성화의 의미와 은혜 안에서 성장하는 것의 의미를 요약하고 있다. 그는 하나님의 말씀을 거울에 비교한다(약 1:23-25). 하나님의 자녀가 하나님의 말씀을 연구하며 거기서 하나님의 아들을 볼 때 하나님의 영은 그를 변화시켜 더욱 그리스도를 닮게 하신다(롬 8:29). 이 구절에서 “화하여“란 말은 로마서 12장 2절에 나오는 “변화를 받아“와 같은 단어이다. 우리가 어떻게 우리의 마음을 그리스도 안에서 새롭게 하였는가를 설명하는 것이다.
그리스도인은 속박과 두려움에 속해 있지 않다. 그는 하나님의 존전으로 나아갈 수 있으며, 그의 영광과 은혜를 누릴 수 있다. 우리는 그를 닮기 위해 그가 오실 때까지 기다릴 필요는 없다. 우리가 말씀 안에서, 그리고 성령 안에서 살 때 “영광에서 영광으로“ 매일같이 성장할 수 있는 것이다.
진실로 그리스도 안에 있는 우리의 지위는 영광스러운 지위이다. 신약의 그리스도인들은 율법에 속한 예식이나 눈에 보이는 옷차림 같은 것은 없을지라도, 은혜의 직분은 유대주의보다 훨씬 우월한 것이다. 우리의 직분은 영광스러운 직분이다. 그 영광은 결코 쇠하여지지 않을 것이다."
고후 4:2-4
2. 그의 정직성(4:2-4)
바울이 행하기를 거절한 몇 가지 일들이 있다. 그는 추종자들을 얻는 데 비밀리 속임수를 쓰는 방법을 사용하기를 거절하였다. 거짓 교사들이 이러한 일들을 행하고 있었다. “살아 있는 편지들“(Taylor's Living Letters)은 이렇게 설명한다. “우리는 속임수를 써서 사람들을 믿게 하지는 않는다.“
바울은 교활하게 굴거나, 또는 말씀을 속여 사용하거나 하지 않았다. 즉, “하나님의 말씀을 혼잡케 아니하였다.“ 오늘날 하나님의 진리를 철학과 오류들과 혼합하여 성경을 속여 사용하는 목회자들과 교사들이 얼마나 많은가 ! 그들은 성경이 말하지 않은 것을 성경이 말하는 것으로 만들려 한다. 그러나, 바울은 그렇지 않았다. 그의 사역은 정직했던 것이다. 그는 공개적으로 말씀을 사용하였으며, 사람들이 스스로 성경을 살펴보도록 격려하는(행 17:11) 정직한 방법을 사용하였다.
만약 복음이 숨겨진 것이라면, 그것은 교사의 잘못이 아니었다. 사단은 사람들이 그리스도의 영광스러운 얼굴을 보는 것을 원치 않기 때문에 죄인들의 마음을 멀게 한다. 말하기는 유감스럽지만, 구원에 있어서 주님의 얼굴 보기를 원하지 않는 수 많은 사람들이 어느 날 주님의 얼굴을 피하여 숨으려고 할 것이다(계 6:15-17).
죄인의 마음은 눈멀고 무지하며(엡 4:17-19), 오직 말씀의 빛만이 구원의 지식을 가져올 수 있다. 그러나,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을 왜곡시키거나 변조하여 회심자들을 얻으려고 해서는 안 된다. 우리는 하나님과 사람들을 향하여 선한 양심으로 말씀을 다루어야 하는 것이다."
고후 4:5-7
3. 그의 겸손(4:5-7)
만일 바울이 자신을 위해서나 돈을 벌려고 추종자를 얻으려 했다면, 그는 그리스도가 아니라 자기 자신을 전파했을 것이다. 그러나, 그는 자신을 전하지 않았고 오직 그리스도를 영화롭게 하는 일만을 추구하였다. 고린도전서 3장 1-9절을 다시 읽고, 그가 어떻게 자신을 하나님의 종으로, 그리고 예수님을 위한 노예로 제시하는지 보라. 우리가 사람들을 높일 때에는 아무런 빛을 발할 수가 없다. 왜냐하면 하나님만이 어두움에서 빛을 발하게 하실 수 있기 때문이다.
바울은 여기서 창세기 1장 1-5절로 돌아가 언급하는데, 이 구절에는 하나님이 창조시에 빛을 비추셨으며, 이 빛에서 생명과 축복을 얻게 하셨다는 내용이 있다. 잃어버린 죄인의 마음은 혼돈과 공허와 어두움이 있던 본래의 땅과 같으나 성령이 그 마음을 덮으며, 말씀이 오셔서 빛을 비추신다. 곧, 영광스러운 복음의 빛이다. 그럼으로써 죄인이 새롭게 창조되며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열매를 맺기 시작한다.
바울은 다음과 같이 시인한다. “그렇다. 나는 보물을 가지고 있다. 그러나, 그 보물은 흙으로 빚은 질그릇에 들어 있다. 나는 나타나기를 원하지 않는다. 나는 그 그릇일 뿐이다. 가장 중요한 것은 그리스도만이 나타나며 그리스도께서 영광을 받으시는 것이다.“ 그리스도인 일꾼들이 복음이라는 보물보다도 그릇을 더욱 중하게 여기는 것은 대단히 나쁜 일이다."
고후 4:8-10
4. 그의 고난(4:8-10)
만일 바울이 그들의 말처럼 개인적인 이익을 얻으려 했다면 그가 왜 그렇게 많은 고난을 당했겠는가? 하나님의 말씀을 타협하는 사람은 고난을 당하지 않는다. 사람들은 그를 환영할 것이며 그를 영화롭게 할 것이다. 그러나, 사람들은 바울을 욕하고, 거절하였으며 그의 생애를 어렵게 만들었다. 사람들은 그리스도를 취급했던 대로 그를 취급하고 있었다! 이것은 바울이 그의 사역에 있어서 진실하다는 증명이 되지 않겠는가?
그리스도를 위하여 기꺼이 고난을 당하려는 바울의 마음가짐은 하나님의 종으로서의 그의 진실함을 나타내는 가장 큰 증거들 중의 하나였다. 현대 번역판으로 이 구절을 읽으면 그가 받은 고난이 얼마나 격했는지를 알 수 있다. 정직한 하나님의 종은 언제나 고난을 당하기 마련이다.
고후 4:11-15
5. 그의 이타심(4:11-15)
바울은 예수 그리스도와 교회를 위하여 고난과 죽음을 기꺼이 직면하려고 하고 있었다. 그들에게 말씀을 전해 주기 위하여 그가 겪은 고난과 죽음의 경험은 신자들에게는 생명을 의미했다. 거짓 교사들은 고난이나 희생에 대하여 아무 것도 알지 못했다. 갈라디아서 6장 17절에서 그는 “나는 내 몸에 예수 그리스도의 흔적, 표식을 가지고 있다“고 말했다.
“모든 일들이 너희를 위한 것이다 !“ 얼마나 이타적인 정신인가! 바울은 만일 하나님께 영광이 되며 교회에 유익이 된다면 어디든지 기꺼이 가고자 하였으며, 무엇이든지 기꺼이 견디려 했다. 그는 믿음의 영을 가졌으므로 그의 고난은 곧 축복을 의미함을 알고 있었다."
고후 4:16-19
6. 그의 믿음(4:16-19)
이 구절들은 고난의 때를 당한 신자에게 놀라운 확신을 가져다 준다. 비록 겉사람은 매일 죽어가지만 속사람, 영적인 사람은 매일 새로워진다(3:18 참조). 바울은 여기서 하나님의 척도로 자신의 고난을 측량한다. 그는 하나님께서 그를 위하여 준비해 두신 영광의 무게에 비하면 그의 고난은 가벼운 것임을 발견한다. 그의 시련의 날과 해는 그를 기다리는 영원한 축복에 비교할 것이 없었다.
우리가 영원한 가치관을 가지고 산다는 것은 얼마나 중요한가 ! 우리가 하나님의 시각을 통하여 사물을 볼 때, 생은 새로운 의미를 지닌다. 시편 73편에서 하늘(heaven)의 가치관을 가지고 생을 바라보는 법을 배운 사람의 경험을 읽어보라.
18절은 불신자에게는 하나의 역설이지만 그리스도인에게는 보배로운 귀중한 진리이다. 우리는 보이는 것으로 사는 것이 아니라 믿음으로 산다. 보이지 않는 것을 그리스도인으로 하여금 보게 하는 것이 믿음이며(히 11:1-3) 이 믿음은 하나님의 말씀에서 온다(롬 10:17).
세상은 임시적이고 지나가는 것들을 위하여 살고 죽는다. 그러나, 주님의 일들은 영원히 지속된다. 우리가 담대히 하나님의 말씀을 믿고 그 뜻을 따라 살기 때문에 세상은 우리를 미쳤다고 한다. 그러나, 우리의 마음은 보다 높은 가치관에 고정되어 있으므로 사람들이 탐내는 것을 지나쳐 버리는 것이다.
우리가 진실한 그리스도인의 삶을 살며 직분을 감당하는 것은 중요한 일이다. 우리의 동기들은 정당해야만 하며, 우리의 방법은 성경적이어야 하고, 우리는하나님의 말씀에 진실해야 한다. 바울은 이 같은 종류의 사역을 하였다. 만일 하늘나라를 목표로 하고 살기만 한다면 우리도 그렇게 할 수 있다.
고후 5:1-21
▣ 그리스도인과 심판대-고린도후서 5장-
바울은 여전히 그의 대적들의 고발에 답하며 그의 사역에 대하여 논하고 있다. 본 장에서 그는 자신의 사역이 부주의하지 않으며 진지하다는 것과, 육신의 욕망이 아니라 진지한 동기에서 일하고 있음을 중점적으로 지적한다. 바울은 자신을 조절하는 네 가지의 동기들을 밝히고 있다.
1. 하늘나라에 대한 확신(5:1-8)
앞 장에서 바울은 고난과 죽음에도 불구하고 그리스도를 섬기기로 결심하였음을 언급하였다. 그는 보는 것으로 살지 않고 믿음으로 살았다. 그러나, 이 믿음은 맹목적인 신뢰가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분명한 확신이었다. 어디로 갈바를 알고 있는 사람에게는 어떠한 바람도 그가 가는 방향을 바꾸어 놓을 수가 없으며, 어떤 원수라도 그를 멸할 수 없다. 겉사람이 후패하더라도(4:16) 그것이 무슨 상관이 있는가? 바울은 영광이 다른 편에 놓여 있는 것을 알고 있었다.
바울이 여기서 말하고 있는 “집“이란 그리스도가 신자들을 위하여 예비하시는 집이 아니라(요 14:1-) 그리스도께서 돌아오실 때에 우리가 갖게 될 영화로운 몸을 가리킨다(빌 3:21/고전 15:50-). 이 땅 위의 우리의 집은 어느 날 해체되어야 할 장막이다. 그러나, 하나님은 우리를 위하여 영광스러운 몸을 준비하셨다 ! 하지만 그리스도인으로서의 우리의 원하는 바는 죽음에 삼켜지는 이 땅의 몸을 가지는 것이 아니라, 그 영광스러운 몸을 “덧입어“ 변화되는 것이다.
그렇다면 우리가 미래에 이런 영광스러운 몸을 가지게 될 것을 어떻게 아는가? 우리는 성령의 보증을 가지고 있으며(5절), 영원한 보증은 축복의 안식이 우리의 것임을 확신시키기 때문이다. 오늘 우리는 “주님이 예비하신 집이 아니라 몸의 집에 있다.“ 우리는 “주님과 함께 집에 있게 되며“ 결코 변하지 않을 영광된 몸으로 사는 것을 갈망한다."
고후 5:9-13
2. 그리스도를 기쁘시게 하려는 관심(5:9-13)
바울은 이기적이지 않다. 그리스도인에 대한 그의 봉사는 미래를 위한 소망 외에 다른 것으로도 동기를 부여받는다. 바울은 그리스도를 기쁘시게 하고 받으실만하게 되기를 추구하였으며, 언제나 그리스도께 “만족스럽다“는 말을 듣기를 원하였다. 바울은 주님에 대한 건전한 경외심을 가지고 있었는데(11절- “두려우심“), 이는 모든 신자들이 어느 날 그리스도의 심판대에서 심판을 받게될 것임을 알고 있었기 때문이었다(고전 3:10-15/롬 14:7-13). 그가 한 일들이 어느 날 드러나게 될 것이며 시험을 받게 된다는 것을 알고, 바울은 그리스도를 기쁘시게 하고 영화롭게 하는 삶을 살기를 원하였다.
10절에서 “드러나다“란 단어는 “서다“ 또는 “보여 주다“란 뜻보다 더한 의미가 있어서 “드러나게 된다“란 개념을 전해 준다. “우리는 모두 있는 그대로 나타나게 될 것이다“라는 뜻이다. 그 심판대에서는 아무런 꾸밈이 있을 수 없다. 우리의 성품과 사역이 있는 그대로 나타나게 될 것이며, 그에 적절한 상을 받게 될 것이다. 그러나, 참된 하나님의 종은 현재에도 조심스럽게 공개적인 생활을 하며, 하나님과 사람들에게 이를 표명한다(11절).
하나님께서 심판하시게 하는 것은 얼마나 중요한 일인가. 왜냐하면 하나님께서는 마음을 보시기 때문이다. 고린도 사람들은 “영광스러운 외모“를 가지고 있었다. 그들은 여러 명의 설교자들을 자랑으로 여기면서 바울을 비판하였다. 명심할 것은 “결과“가 반드시 인간의 생활과 봉사에 대한 평가 기준은 아니라는 점이다. 마음의 동기가 중요한 것이다."
고후 5:14-17
3. 강권하는 사랑(5:14-17)
바울은 사람들을 그리스도께로 인도하기 위하여 그처럼 극단에 이르렀기 때문에 미쳤다는 비난을 받았다(행 26:24 참조). 그러나, 실제 그의 생활을 좌우하는 힘은 그리스도의 사랑이었다. 이것은 그리스도를 향한 바울의 사랑을 뜻하지는 않았다. 물론 그러한 사랑이 있었던 것은 분명하지만, 이것은 오히려 그리스도께서 바울을 향하여 품으신 사랑이었다. 사도는 그를 향한 그리스도의 사랑에 압도당하여, 그리스도를 섬기며 높이는 것이 그의 생애를 조절하는 동기가 되었다.
그는 14-17절에서 그리스도의 사랑을 설명하는데, 그 사랑이 죽은 죄인들을 위해 죽도록 십자가를 지게 했다고 묘사한다. 왜 그리스도께서 죽으셨는가? “그로 말미암아 우리가 살 수 있도록“(요일 4:9), 그와 함께 살게 되도록(살전 5:10) 그리고 “그를 위하여 살도록“(고후 5:15) 하기 위함이다. 그리스도의 사랑을 이해하는 그리스도인의 마음에는 이기심이란 것이 있을 수없다.
고린도에 있었던 문제들 중의 하나는 신자들이 육신을 따라 판단하는 것이었다(고전 4:1-7 참조). 그들은 바울을 다른 사도들과 비교하고 있었으며, 실상 영적인 분별이라기보다는 육신전인 판단을 하고 있었다. 그들은 그리스도인의 생활이 새로운 가치와 동기를 가진 새로운 피조물이라는 사실을 잊고 있었다. 육신을 따라 그리스도를 판단하는 것은 잘못이다. 즉, 세상이 하는 것처럼 인간의 관점에서 위대한 교사나 본보기로 주님을 바라보는 것이다.
바울은 회심하지 않은 유대 랍비로 있을 때 아마도 육신을 따라 그리스도를 바라보았을 것이다. 그러나 영화롭게 된 그리스도를 보았을 때, 그는 자기의 관점을 바꾸었다.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에 기초한 영적인 평가를 해야만 한다. 그들은 바울이 제정신이 아니라고 말했는데, 이것은 육신을 따라 판단하고 있는 것이며, 그들의 생활을 조절하는 능력이 되는 “그리스도의 사랑“이 결여되어 있음을 입증하는 것이었다."
고후 5:18-21
4. 하나님께로서 온 사명(5:18-21)
우리는 바울의 생애와 사역을 조절했던 세 가지 동기들로서 하늘나라에 대한 확신, 그리스도를 기쁘시게 하려는 관심, 강권하는 사랑을 살펴보았다. 이제 네번째 동기로서 바울이 하나님께로부터 받은 사명에 대한 것을 보게 된다.
바울은 그리스도를 위한 대사였다 ! 그의 멧세지는 하나님께서 죄의 값을 지불하셨다는 평화의 멧세지였다. 하나님은 죄인들과 전쟁을 하고 계신 것이 아니므로, 죄인들은 믿고 구원을 받을 수 있다. 얼마나 놀라운 멧세지인가 !
대사는 선택된다-그리스도는 바울을 택하여 잃어버린 인류에게 보내는 대사가 되게 하셨다. 바울은 자기 자신이 아니라 그리스도를 나타내었다(4:5). 그가 전하는 멧세지는 그리스도가 그를 믿고 맡기신 복음이었으며(살후 2:4), 그의 목표는 그리스도를 기쁘시게 하며 그에게 주어진 임무에 충성하는 것이었다.
대사는 보호를 받는다-대사는 그가 대표하는 나라의 시민이어야 한다. 바울은 다른 모든 그리스도인과 마찬가지로 하늘나라의 시민이었다(빌 3:20 에서는 “회담“을 “시민권“으로 번역함). 국가는 대사들이 필요로 하는 모든 것을 공급하며 그를 보호할 준비를 갖추고 있다. 그리스도께서는 바울의 모든 필요를 공급하시며 모든 위기 가운데서도 그의 곁에 서 계신다.
대사는 전쟁이 선포되기 전에 본국으로 소환된다-하나님은 아직 이 사악한 세상에 전쟁을 선포하지 않으셨다. 그러나 어느 날 하나님은 선포하실 것이다. 사악한 자들을 심판할 진노의 날들이 오고 있다(살전 1:10). 그러나, 그리스도인들은 그 날이 오기 전에 본국으로 부름을 받게 될 것이다(살전 5:1-10). 하나님의 대사인 교회는 환란을 치르지 않을 것이다.
오늘날 교회의 멧세지는 화해의 멧세지이다. 하나님은 십자가 상의 그리스도를 통하여 세상과 화해하셨으며, 그의 아들을 믿는 모든 사람들을 구원하시기를 기뻐하셨다. 복음이 삶들을 개혁하기는 하지만 우리의 멧세지는 사회 개혁을 추진하는 것이 아니라(딛 2:11-15) 영적인 재생의 멧세지이다. 우리가 잃어버린 자들에게 주님을 영접하라고 초청할 때 이것은 그리스도를 대표하는 것이다. 얼마나 큰 특권이며, 또한 얼마나 큰 책임인가 !
우리들은 시명을 받았거나 안받았거나 간에 모두 대사들이다. 그리스도는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 것같이 나도 너희를 보낸다“고 요한복음 20장 21절에서 말씀하셨다. 우리의 멧세지와 방법과 동기들이 정당한 것임을 확신하여, 우리의 일이 지속되게 하며 주님 앞에 설 때에 불시험을 견딜 수 있어야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