낮의 길이가 짧으면 하루가 어떻게 가는지 모른다. 오전에 집안일을 마치고 늦은 아침을 먹거나 서재에서 일을 하다가 오후 들어 산책하러 나갔다 오면 벌써 해가 지고 있었다. 일찍 저녁을 먹고 한가롭게 글을 쓴다거나 영화를 보거나 침대에 누워서 뒹굴뒹굴하는 일도 재미있다. 동지 팥죽을 나 혼자 다 먹었다. 아들도 그다지 좋아하지 않는다며 입에도 안 대고 남편도 먹겠다고는 하지만 한두 수저 뜨는 둥 마는 둥 하는 것 같다. 나만 빼고 식구들이 대체로 죽을 좋아하지 않는다. 혼자 세 끼에 걸쳐서 맛있게 먹었다. 동지에 관련된 이야기도 검색해서 공부하고 곰곰이 생각하면서 팥죽을 먹으니 새로웠다.
오늘부터 구구소한도를 그리기 시작한다. 크로키 북과 크레파스 색연필을 다시 꺼냈다. 봄을 기다리는 마음이 도화지 안에 가득하다. 크레파스로 멋대로 선을 그어가며 한참을 놀다가 나무를 그렸다. 나무와 가지를 그려놓고 백매화를 매달아 놓았다. 81개 백매화 꽃송이를 그려놓고 하루에 한 송이씩 붉은색을 칠해가는 일이다. 홍매화를 그리는 일이다. 해마다 하는 작업이지만 선을 넘은 지 오래다. 꽃송이 대신으로 별도 그리고 구름도 그리고 제비꽃도 그리고 해바라기도 그리면서 봄을 기다렸다. 옛 어른들은 매화를 그리며 놀았지만, 우리는 우리만의 구구소한도를 그리며 논다. 하지만 본질은 변하지 않는다. 여유와 흥과 멋스러움을 즐기고 싶은 마음. 봄을 기다리는 마음은 예전이나 지금이나 같다.
이제 한 송이 꽃으로 시작했다. 올해는 어떤 구구소한도가 나올지 나도 궁금하다. 아무튼 열심히 즐겁게 하루 정성을 다해서 살아보자.
격리 4일 차다. 조금씩 심심해진다. 아들과 장난치며 놀고 싶다. 남편 옆에 앉아서 영화도 보고 싶다. 이제 얼마 남지 않았다. 잘 하고 있다. 조금만 힘내서 좋은 날을 기다리자. 현관 앞까지 책을 갖다준 친구에게 감사한 마음을 전한다. 새해에는 내가 밥을 사줘야겠다, - 2023년12월23일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