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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기 2570년 (2026 丙午年)
마음은 평안으로, 세상은 화합으로
불기 2570년(2026년) 5월 24일(일) 부처님 오신 날 봉축 법요식
봉축 법회를 준비하여 마련한 꽃으로 장엄한 관불대와 꽃꽂이와 화분으로 채워진 보광당.
책자로 제작된 법회보
현관 봉사팀은 법회 오시는 분들에게 봉축 법회보 책자와 가슴에 꽃을 달아드리고, 안내도 맡아 하고, 사무국 , 엘리베이터 봉사팀의 노고로, 혼선 없이 진행이 여법하게 이루어 지고 있다.
봉축 법회의 아침을 시작하는 일주문
대원2. 3구 거사님들의 로비 안전 지도 봉사로 1대의 엘리베이터로 많은 인원이 원만하게 법당으로 이동할 수 있었다.
강동 6구, 강서구, 관악구, 분당구에서 떡과 생수 보시하여 어제 준비한 2000개 봉송 봉투에 넣어 나눔 봉사하고 있다. 어느 노보살님이 천 여개의 수세미를 떠서 보시해주셔서 감사하게 모두에게 나누었으니 그 공덕 두루하리라 생각한다.
건강 회복하시고 봉축 법회에 참석하신 현진 前 법회장님과 스님, 회장단, 불광 형제들이 재회의 기쁨을 나누는 정겨운 모습
'불기 2570년 ( 丙午年 )부처님 오신 날' 불광법회 사부대중은 지극한 정성 모아 거룩하신 부처님께 올리는 육법공양.
육법공양은 불교의 대표적인 공양물로 향, 등, 꽃, 차, 과일, 쌀을 부처님께 올리는 의식을 말한다.
육법공양은 부처님 가르침대로 수행하는 것이며, 중생을 이롭게 하고 구제하려는 보살의 뜻을 저버리지 않는 것이며, 보리심을 잃지 않는 것이라 하였다.
향은 해탈', 등은 '지혜,' 꽃은 '수행', 차는 '감로', 과일은 보리과로 '깨달음', 쌀은, 선열미로 '기쁨'을 상징한다.
지극한 마음으로 육법공양 올리는 보살님들의 모습도 선녀 같다.
삼귀의를 시작으로 부처님 전에 마지와 헌향을 올리며 '불기 2570년 丙午年 봉축 법회'가 시작되었다.
오늘은 또 어인 일인지 좌측 스크린 작동이 안 되고 있어서 불편함이....
천진성 부회장님과 대중이 함께 경전
합송(법화경 여래수량품)
부처님 오신날을 맞이하여 스님, 회장단, 오늘 이 거룩한 행사에 참석하신 외빈, 법회 원로님, 명등대표 순으로 관불의식이 진행 되고 있다.
봉축사: 보관 법회장님
축 사 : 前 현진 법회장님
봉축 발원문: 혜담 스님
'특별한 한 사람만을 구제하기 위해 오신 것이 아니라 괴로움 속에 살아가는 모든 존재가 스스로의 참마음과 지혜를 발견하도록 이 세상에 출현하신 부처님'을 봉축하기 위해 모인, 많은 불광 형제들과 인연 있는 불자들이 함께하는 즐겁고 환희로운 법회 모습.
오늘 이 법회가, 중생을 구하고 이웃을 구하고 세계를 구하는 거룩한 불광 법회로 영원히 이어갈 수 있기를 간절한 마음으로 발원해 본다.
봉축 법어 : 옆구리에서 피어난 중도의 빛, 내 안의 연등을 깨우는 자각
봉축 법 문 : 만월선원 한주 지인스님
불광 형제여러분, 반갑습니다. 부처님 오신 날을 축하드립니다. 여러분들이 증거입니다. 오늘 여러분과 나눌 말씀은, 정확히 2570년 부처님 탄신일을 맞이하고 있습니다. 여러분의 가정에 부처님의 자비와 평화가 깃들기를 기원 드립니다.
오늘 부처님 오신날, 여러분들과 함께 생각해 보고 싶은 핵심은 부처님이 단지 과거의 인물로서 오신 것이 아니라, 지금 이 자리, 우리 마음속에 깨어 있음으로 오셨다는 점입니다. 그래서 오늘 말씀은 부처님은 어디에서 오시는가라는 질문으로 시작하겠습니다.
오늘 부처님 오신날! 여러분들과 함께 생각해 보고 싶은 핵심은 부처님이 과거의 인물로서 오신 것이 아니라, 지금 이 자리, 우리들의 마음 속에 깨어 있음으로 오셨다는 점입니다. 그래서 오늘 법문은 부처님은 어디에서 오시는가라는 질문으로 시작하고자 합니다.
오늘 사월 초파일은 각 사찰 마다 연등이 물결치고, 오색 깃발이 너울 치는 참으로 환희로운 날입니다. 불교의 전통 의례는 부처님 오신 날이 4월 8일로 정착되어 있으나, 문헌학적으로는 2월 8일이 유력합니다. 역사적으로 유력한 2월 8일 대신 만물이 생동하는 4월 8일을 택해 기념하는 것은, 우리 마음속 깨달음의 기운이 늘 생생하게 피어나길 바라는 중생들의 간절한 염원이 투영된 결과입니다.
2월이냐 4월이냐 보다 더 중요한 질문이 있습니다. 그것은 부처님은 어디에서 오는가 하는 것입니다. 부처님은 2650년 전에 역사적 어떤 시점에서만 오신 분이 아니라, 지금 이 자리에 앉아 있는 여러분들의 마음 속, 깨어 있음으로 오신 분입니다. 이것을 참마음이라고 하고, 주인공이라 하며, 원래 면목이라고 합니다. 그런데 우리는 왜 그것을 보지 못할까요? 부처님의 탄생 설화 가운데 가장 신비로운 대목은 싯달타 태자가 마야부인의 오른쪽 옆구리에서 탄생했다는 이야기입니다.
왜 하필이면 옆구리일까? 여기에는 깊은 상징이 있습니다. 아기는 보통 배 아래에서 태어납니다. 그것은 중력과 본능을 따르는 생물학적 길입니다. 반대로 아기가 머리 위로 나온다면 그것은 관념의 길인 것입니다. 그런데 부처님은 그 어느 쪽도 아닌 옆구리에서 나오셨습니다. 이는 곧 중도에서 나오셨다, 탄생하셨다는 상징이 됩니다. 관념(머리)이나 본능(아래)에 치우치지 않는 '중도(中道)'의 실천을 상징합니다. 극단적인 고행도, 비굴한 쾌락도 아닌 중도의 자리에서 법이 드러났다, 진리가 드러났다는 뜻입니다. 옆구리는 우리 몸의 일부지만, 평소에는 잘 보이지 않는 부분입니다. 그러나, 옆구리는 남이 슬쩍 건드리기만 하면 바로 ‘앗!’하고 깨어나는 자리입니다.
그래서 부처님은 먼 하늘에서 떨어진 신이 아니라, 바로 우리 삶 가까이에서 웃음이 퍼지듯, 삶의 현실 속에서 적극적으로 깨어 있음이 일어나는 것이 부처님의 작용입니다. 옆구리를 간질인다는 것은 곧, 너는 바로 지금 여기에서 깨어 있느냐 하는 질문입니다. 부처님이 태어나자마자 일곱 걸음을 걸으시고, 한 손가락으로 하늘을 가리키고, 한 손가락으로는 땅을 가리키며, ‘천상천하 유아독존(天上天下 唯我獨尊) 삼계개고 아당안지(三界皆苦 我堂安之)’라고 하셨다는 전승(傳承)이 있지요.
이 말은 여러 경전과 번역의 과정을 거치면서 오늘날 형태로 정착된 게송(偈頌)입니다. 초기 불교의 경우에는 이것은 개인적인 해탈(解脫,자유)의 상징이었습니다. 이러한 개인적 해탈의 선언이 뒤로 오면서 대승적 구제 선언으로 확장된 흔적을 우리가 볼 수 있습니다. 그러나, 이 말씀은 단순히, ‘나는 이 세상에서 가장 뛰어났다’는 선언으로 들으면 안 됩니다. ‘천상천하 유아독존(天上天下 唯我獨尊) 삼계개고 아당안지(三界皆苦 我堂安之)’, 이 선언은 원래 디가니까야 십사경에서 보는 바와 같이, 첫 번째 부처인 비바시불의 탄생게입니다. (편집자 註: 십사경은 붓다의 핵심 사상인 ‘괴로움을 어떻게 없앨 것인가’에 대한 고찰을 담고 있으며, 붓다의 언행을 모은 긴 경전의 모음입니다. 석가모니와 석가모니 이전의 여섯 부처를 묶어 ‘과거7불’이라고 합니다. 과거7불에는 비바시, 시기, 비사부, 구류손, 구나함모니, 가섭 그리고 석가모니 부처님입니다. 과거7불중 첫 번째 부처님이 비바시불입니다. '과거불'이라는 단어에는 부처로 알려진 석가모니 이전에도 '부처'는 여러 명이 있었고, 석가모니는 그 깨달음을 얻은 많은 '부처' 가운데 한 명에 지나지 않는다는 전제가 있습니다. 즉, 깨달음이란 석가모니 한 사람의 전유물이 아니며, 부처는 석가모니 이전의 과거에도 있었고 미래에도 다시금 나타나 중생을 제도하리란 믿음이 전제됩니다). 맛지마니까야의 석가모니 부처님의 탄생게도 비바시불의 탄생게와 똑 같이 되어 있습니다. 이처럼 내가 이 세상에서 가장 뛰어나다는 것이 ‘천상천하 유아독존’입니다. 현대적으로 보면, 이것은 이기적인 독선이 아니라, 이 우주 전체에서 ‘나’라는 존재가 유일무이(唯一無二)하다는 뜻입니다. 동시에, 내가 존재한다는 것은 나와 연결된 타인 역시 똑같이 존귀하다는 뜻도 담겨 있습니다.
태어나자마자 일곱 걸음을 걸었다는 것은 수행의 끝에 도달했다는 그 의미가 아니라, 이미 본래 갖추어져 있다는 뜻으로 읽을 수 있습니다. 선(禪)에서는 ‘너가 태어나기 전에 너는 누구냐?’라고 묻습니다. 이 질문 앞에서 번뇌를 일으키는 순간, 우리는 이미 본뜻에서 어긋나는 것입니다. ‘유아독존’은 교만의 선언이 아니라, 분별과 비교가 끊어진 자리의 선언입니다. 잘 아시는 운문 선사의 말씀이 떠오릅니다. ‘천상천하 유아독존’이라는 말씀에 대해서 운문 선사는 아주 거칠고도 날카로운 표현으로 응답을 했습니다. 부처의 탄생게에 대하여 "몽둥이로 때려죽여 개밥으로 주었을 것"이라 일갈하였습니다. 초파일에 벼락같은 막말로 들리시겠지만, 사실은 이 파격적인 가르침은, '부처'라는 관념적 우상에 매몰되어 정작 자신의 존엄함을 잊고 사는 우리를 향한 준엄한 죽비입니다.
부처님이 이 세상에 오신 이유는 분명합니다. 중생의 괴로움을 끝내기 위함입니다. 이것은 초기 경전에 나오는 사성제 팔정도가 바로 괴로움을 끝내기 위한 가르침입니다. 그런데 사람들은 자꾸 괴로움의 원인을 바깥으로 돌립니다. 세상이 문제다, 남편이 문제다, 아내가 문제다, 제도가 문제다, 이렇게 얘기합니다. 그렇지만 부처님은 ‘집착이 괴로움이다.’이렇게 가르쳐 주셨습니다. 같은 세상에 살아도 집착하는 사람은 지옥처럼 살고, 마음을 비운 사람은 자유롭게 삽니다.
자유롭고 행복하게 살기 위해서 부처님이 열반하시기 직전에 주신 가르침이 바로 ‘자등명 법등명(自燈明 法燈明)’ 아닙니까? 스스로 깨어나는 길이 바로 자유롭고 행복하게 사는 길임을 보여 주셨습니다. 오늘날 이 말은 더욱 절실합니다. 우리가 좋아하는 것만을 계속 보여 주면서, 확증 편향을 강화하고, 소비를 자극하며, 탐욕과 분노를 부추기는 그것이 바로 오늘날의 미디어요, AI 알고리즘입니다. AI 알고리즘이 짜놓은 감옥에서 우리는 살아가고 있습니다. 내 의지로 세상을 보는 것 같지만, 실로는 알고리즘이 만든 판 위에서 춤을 추고 있는지도 모릅니다. 그래서 ‘자등명’은 오늘의 언어로 말하자면 알고리즘으로부터의 독립이요, 해방입니다. 잠시 휴대폰의 전원을 끄고, 내 마음의 눈을 번쩍 떠서 나를 돌아봅시다.
어떤 스님이 운문 선사에게 물었습니다. 어떤 것이 부처입니까? 운문 선사는 ‘간시궐(乾屎橛), 마른 똥막대기’다. 이렇게 답했습니다. 이것을 부처를 모독하는 것처럼 받아 들여서는 안됩니다. 머릿속에 있는 관념의 부처를 깨뜨리라는 가르침입니다. 선사들은 특별한 체험, 신비한 경지, 놀라운 기적, 이런 것을 찾지 말고, 지금 너 앞의 현실을 바로 보라고 이렇게 일갈합니다. 부처는 관념 속에 있는 것이 아니라, 바로 지금 삶 속에 있다는 것입니다.
또 다른 예로 어떤 스님이 조주 스님에게 물었습니다. 달마 스님이 서쪽에서 오신 뜻은 무엇입니까? 조주 스님은 ‘정전백수자(庭前柏樹子), 뜰 앞의 잣나무다.’ 이렇게 답했습니다. 왜 하필 잣나무냐? 진리는 멀리 있지 않다는 뜻이겠지요. 지금 들리는 소리, 눈 앞에 사람들, 괴로운 마음, 불안한 마음 그 속에 바로 진리가 드러난다. 따로 떨어진 곳에 진리가 있는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지금 시대는 매우 빠르게 변화하고 있습니다. AI가 세상을 바꾸고, 경제 구조를 바꾸고, 경제 구조가 바뀌고, 인간관계도 흔들립니다. 사람들은 더 많은 정보를 가지지만, 마음은 오히려 더 불안해집니다. 바깥의 변화 속도가 마음의 중심보다 더 빨라졌기 때문에, 사람들은 끊임없이 비교합니다. 남보다 뒤쳐질까 두렵고, 인정받지 못할까 두렵고, 미래가 무너질까 두렵습니다. 그러나, 불교는 여기에서 묻습니다. 그 두려움을 극복하는 자는 누구냐? 생각은 변하고, 감정도 변하고, 세상도 변하지만, 그 변화를 알아차리는 자리는 본래 그 자리다. 선(禪)에서는 이를 주인공, 초기 불교에서는 정념(正念), 대승불교에서는 불성(佛性)이라고 그럽니다. 이름은 달라도 가리키는 바는 모두 같습니다.
오늘날 가장 필요한 수행은 아마도 안심(安心)일 것입니다. 현실을 피해, 과거 미래로 도망치는 마음이 아니라, 현실을 직시하고, 흔들리지 않는 마음입니다. 안심은 현실 부정이 아닙니다. 괴로움은 없어지지 않습니다. 괴로움 속에서도 자기를 잃지 않는 힘입니다. 파도는 계속 일어나지만, 파도가 일어나더라도 파도 때문에 바다가 아닌 적은 없습니다. 생각도 마찬가지입니다. 분노가 일어나면 그것을 알아차리는 자리는 그대로 남아 있습니다. 불안이 일어나더라고 불안을 비추는 그 자리는 사라지지 않습니다. 수행은 그 자리를 잃지 않는 것입니다.
초기불교는 괴로움의 원인을 보라고 가르치고 있습니다. 대승불교는 자신 안의 불성을 보라고 가르칩니다. 선에서는 지금 바로 여기에서 보라고 가르치고 있습니다. 결국, 이 셋은 다르지 않습니다.
불광형제 여러분!
부처님 오신 날은 참으로 환희로운 날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다시 묻고 점검을 해야 합니다. 부처님은 지금 어디에 오셨습니까? 마하반야바라밀. 오늘 법문은 이것으로 마치겠습니다. 여러분 감사합니다.(청명거사님 녹취)
발코니석까지 만석.
♬ 찬탄곡 : 경기민요 최윤선 명창과 마하보디 합창단 함께
1. 부처님 오신 날 (덕신스님 작사. 박범훈 작곡 , 김회경 지휘) 마하보디 합창단
2. 연꽃향기 누리 가득히 (목정배 작사. 박범훈 작곡) ♬
불기 2570년(2026년) 봉축의 날. 마하보디 추억이 될 사진 한 컷도 촬영.
축하공연: 'voice toy 아카펠라 팀'
곡 명: 'The Lion Sleeps Tonight'
발원문 낭독 : 감사 혜각 강세장 거사님 (불광사. 불광법회 정상화 기도 발원)
오랜만에 참석하신 분들까지 함께하니 보광당 가득 빈자리 없이 모여 앉아 법등 가족 모임을 하는 불광 형제들의 즐거운 모습
보문부에서 준비한 공양물 과일 나눔을 시식 후, 2부 행사 석촌호수 제등행진을 위해 외부로 향한다.
오늘은 5층 연화당에서. 끊임 없는 금강경 독송이 진행되었다.
법회 후에 각기 내, 외부 쓰레기를 꼼꼼히 처리 중인 봉사자분들에게 감사와 찬탄을.....
초파일 행사 후 불광 법회 완벽한 쓰레기 처리 상황. 불광 형제들이 머물다 떠난 자리는 정말 아름답다.
오후 2시 석촌호수 동,서호를 한 바퀴 행진하는 제등행진
혜담 스님, 지인 스님, 법회장님을 선두로 합창단 분홍 한복, 초록 법복을 입은 불광 형제들의 행진이 시작 되었다.
제등행진을 원만히 마치고 단체 사진도 남기고 보니, 연이은 두 해를 우중에 진행했던 날이 언제였던가 싶게 초록빛이 무르익고 햇살 뜨거운 화사한 초파일 행사가 폐회식만 남기고 모두 마무리되어 간다.
불광 형제들이 법당으로 다시 모여 회향식을 끝으로 불기 2570년 봉축 법요식을 원만하게 마쳤다.
회향식 중간에 일정으로 떠나시는 지인스님을 배웅해 드리고....
------------봉축 법요식이 진행되기 까지 보이지 않은 곳곳에서 수고하신 분들이 있기에 원만 회향하였다.----------
전 날부터 청정팀의 거룩한 보현행에 의해 장엄한 법석이 마련되어 부처님 오신날 행사는 더욱 여법하게 진행되었다.
토요일 오후, 보광당 현수막 설치, 욕불대를 비롯한 상단 장엄 꽃꽂이,
2천 개 봉송 준비, 배달된 물 보광당 앞 비치, 비워놓은 화장실 휴지 장착까지 봉사하시는 분들의 손길은 몹시 분주하다.
--------사 측 이야기 ------------
사측에선 봉축 전일 로비 통로와 남일주문에 이것 저것 나열해 놓은 모습.
광덕 스님께서는 대웅전에 탱화 하나도 없이 정면에 금강경만 새겨 삼존불을 모신 '내 생명 부처님 무량 공덕 생명'을 일깨워 스스로 부처 생명을 살라 이르신, '법등명 자등명'을 실천하는 정법 도량이건만.... 그런 불광에서 다 이루어지라는 '부적 체험'이라는 사 측 이벤트(?)가 너무 생소하고 이례적인 일이라 최소한 이런 건 안 했으면 싶은 마음에 기록해 놓는다.
부처님 오신 날 10시40분~11시10분경 대웅전과 만불전 풍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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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처님 오신 날'의 참뜻을 다시금 마음 깊이 새기어 '내 생명 부처님 무량 공덕 생명'을 실천하는 행복한 불광 형제들이 되시길 합장 발원 드립니다_()_
보관 법회장님을 비롯한 회장단, 정수위, 각 봉사 단체 및 명등님, 불광 형제 여러분 수고 많이 하였습니다. 감사합니다. 나무 마하반야바라밀.
| 우리는 횃불이다. 스스로 타오르며 역사를 밝힌다. 내 생명 부처님 무량공덕 생명 용맹정진하여 바라밀 국토 성취한다. |
첫댓글 환희로운 불광의 봉축법회를 기록하기 위해 수많은 사진 찍으신 사진팀원분들, 법문 풀어쓰신 청명님, 멋있게 편집 기록하신 마음님 모두 놀라운 불광의 보현행자님들이십니다. _()()()_
2천명이 넘는 분들이 모였다는데 머뭇거림 하나없이 잘 진행되는 행사가 감동적이었습니다. 보이는 곳 보이지 않는 곳에 힘써주시는 불자들의 거룩한 힘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