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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룩함과 부정(不淨): 레11-15장의 신학적 해석
레위기 법전의 중심부에 해당하는 11-15장은 부정하고 정한 음식, 산혈(産血)의 부정함, 나병(혹은 전염성 피부병)이나 유출병과 같은 질병으로 인한 부정함을 다루고 있다. 이스라엘 백성들의 삶에서 차지하는 중요성이나 구속사적 맥락에서의 의의가 매우 크다. 예컨대 “내가 거룩하니 너희도 거룩할지어다.” (레11:45) 라는 주제성구는 벧전1:16에서 직접 인용되었을 뿐 아니라, 구약과 신약에 수많은 반향(反響) 구절을 통하여 성경의 중심 주제이며, 신자들의 삶의 원리가 된다. 하지만 레11-15장을 본문으로 설교하는 예는 극히 드물다. 토라에 나오는 거룩함에 관한 많은 계명들 가운데 이 본문은 그 해석과 적용이 매우 복잡하고 어렵기 때문일 것이다.
일반적으로 ‘의식법’(ceremonial laws)라고 불리어지며, 그 조항들의 문자적 의미는 ‘폐지’되었다(abrogated)고 한다. 의식법에 속하는 계명들의 일부는 그리스도를 예표한 것이기 때문에 신약시대에는 의미가 없고, 일부는 불신자와의 사귐을 반대하는(고후6:17) 추상적 의미만 지니고 있다는 것이다. (“웨스트민스터신앙고백서 제19장 3항) 필자도 이 규례의 조항들을 신약시대에도 글자 그대로 해석하고 적용해야 한다는 것을 주장하려는 것은 아니다. 이 정결법의 당시 역사적 상황 속에서의 의미가 어떠하였는지 또한 어떤 신학적 논의를 거쳐 이것들이 ‘폐지’되었는지를 알아야 본문을 주신 하나님의 의도를 파악할 수 있고 이를 설교할 수 있다는 것을 말하려 한다.
12장의 아이를 낳은 여인의 부정함에 관한 법이나 13-15장의 나병과 유출병의 부정에 대한 규례는 오늘날 성도들이 보기에는 대단히 이상한 법들로 비추어진다. 하지만 이 법이 주어졌을 당시에는 하나님 백성들의 거룩한 삶을 규정하는 중요한 법이었다. 11장의 먹을 수 있는 정한 음식에 관한 법은 고대 이스라엘은 물론 오늘날까지 유대인의 삶을 규정하는 법이다. (Jewish Encyclopedia의 ‘Dietary Laws’ 항목, www.jewishencyclopedia.com) 포로기 다니엘은 이방의 음식으로 자신을 더럽히지 않겠다고 결심하였고, 마카비의 반란으로 사로잡혔던 사람들은 돼지고기를 먹는 것보다 순교의 길을 택하였다. 더욱 중요한 것은 신약성경에서의 이 법의 위치이다. 음식법은 성전제사와 할례, 안식일 준수와 더불어 이방인에게 복음이 전해질 때 가장 우선적으로 고려되어야 할 문제였다. 아마도 가장 먼저 부딪혔던 문제가 음식법이었을 것이다. 유대인에게 당연하였던 모세의 법전에 기록된 음식법을 상대화시키는 것은 예루살렘 총회의 중요 의제였으며, 안디옥에서 바울, 바나바, 베드로의 논쟁의 핵심이었고(갈2:11-21), 후일 사도바울의 여러 서신에서 다루는 주제가 되었다.(롬14:1-3; 골2:16; 딤전4:3-5 등) 이렇게 중요한 주제의 최초 의미를 살펴보는 것은 석의(釋義)의 기본일 것이다.
이 법들과 관련하여 몇 가지 중요한 질문이 떠오른다. 첫째 질문은 ‘부정’의 의미에 관한 것이다. ‘부정’의 히브리어는 타메(amef;)라는 형용사로서 더러움, 불결함 등으로도 번역될 수 있다. 그 반대어인 ‘정함’은 타호르(r/hf;)로서 깨끗함이나 정결함으로 번역된다. 부정함이나 정함은 하나님의 거룩하심을 삶에서 나타내는 하나의 방법으로서, 의식(儀式, ritual)에서 주로 사용되는 개념이다. 주로 희생제물이나 희생을 드리는 제사장에 사용되었고, 레11-15장에서는 짐승, 질병, 그릇, 음식 등에도 사용된다. 영적이며 윤리적인 의미의 ‘거룩함’(vd'q;)와 대비되지만, 때로는 윤리적 부정의 은유로 사용되기도 한다. 예컨대 이스라엘 백성과 그의 땅이 우상숭배로 얼룩진 것을 “월경 중에 있는 여인의 부정함”에 비유한 것이다.(겔36:17)
그렇다면 레11-15장에서 ‘부정’하다고 지칭한 것들은 원래부터 ‘부정’한 것들인가? 토끼나 돼지와 같은 짐승, 미꾸라지나 장어와 같은 생선, 맹금류, 파충류 등은 하나님께서 부정하게 만드셨는가? 부정하다면 어떤 기준으로 부정하다는 것인가? 아이를 낳은 여인의 산혈이나 생리혈은 왜 부정한가? 여아를 낳을 때의 불결의 기간이 남아를 낳을 때보다 두 배인 이유가 무엇인가? 왜 어떤 병은 부정하고 어떤 병은 부정하지 않은가? 둘째 질문은 이 본문이 오늘날 우리에게 주는 의미가 무엇인가 하는 점이다. 분명 본문이 거룩함을 규정해 주고 있는데, 거룩한 삶을 추구하는 우리가 부정한 음식을 먹지 말라는 본문으로부터 얻을 수 있는 유익이 무엇인가? 계시가 드러나고 의학적 지식이 상식이 된 시대에 산혈의 종교적 의미는 무엇일까?
문화적·사회적 해석
이 법들을 해석하는 한 가지 방법은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들의 유익을 위하여 이 계명들을 주셨다는 것이다. 예컨대 문화인류학자 마빈 해리스의 설명에 따르면, (물론 그 자신은 하나님을 믿지는 않지만) 돼지고기를 먹지 못하게 한 것이 가난한 사람들을 위한 것이라고 한다. 돼지는 목초와 곡물을 많이 먹으면서 생산적인 일을 하지 않는 짐승이다. 목초지가 부족한 팔레스틴 지방에서 육질이 좋고 쫄깃쫄깃한 돼지고기를 먹도록 허용한다면, 축산업자들은 이익을 위하여 돼지를 사육하였을 것이다. 부자들에게 돈을 많이 받고 돼지고기를 팔 수 있기 때문이다. 자연히 곡물과 목초 가격이 상승하고, 젖과 털을 생산하는 양이나 농업을 위한 소가 먹을 풀이 없어지게 될 것이다. 소와 양의 값은 상승하고 가난한 사람들은 소젖과 양털을 빼앗기게 된다. 부자들은 맛있는 고기로 배불릴 수 있으나 가난한 사람들이 더 가난해 지고 만하는 것이다. 이러한 실용적인 이유로 돼지고기를 금한 것이라고 한다. (『문화의 수수께끼』, 한길사, 2006)
산혈을 부정하다고 한 것은 이 기간 동안 아기를 낳은 산모가 충분히 휴식을 취할 수 있고, 면역력이 약한 아기도 위험에서 보호받을 수 있도록 하기 위함이라고 해석하는 사람들이 많다. 2-3달 기간 동안 부부관계를 가지지 않음으로 즉시로 아이를 가지지 않을 수 있다. 여자아이를 낳았을 때 휴식 시간을 길게 준 것은 새로 태어난 딸이 후일 엄마처럼 출산할 것을 대비하여 더 건강에 유의하도록 한 배려라고 한다. 나환자를 격리시키도록 한 것은 전염병이기 때문이다. 피의 유출이나 정액의 유출을 부정하다고 한 것은 문란한 성생활을 방지하고, 성기를 통하여 전염되는 질병의 전염을 막을 수 있으며, 결혼을 성결하게 유지하게 하려는 의도이다. 피나 정액과 같은 것은 생명의 재생산(reproduction)을 위하여 존재하는 것인데, 이것이 불필요하게 낭비되는 것을 부정하다고 말하게 되었다고도 한다. 이런 해석을 문화적 해석 혹은 사회적 해석이라고 부를 수 있을 것이다.
문화적 혹은 세속적 해석이 아주 의미 없다고 말할 수는 없을 것이다. 실제로 이 법을 따라 코셔룰(Kashrut)을 지키는 유대인들의 음식은 현대에도 건강에 좋은 깨끗한 음식으로 정평이 나 있다. 할례라든지, 산후 휴식이라든지, 보수적인 성생활 등은 개인과 공동체의 건강을 위하여 매우 좋은 법들이다. 하지만 이스라엘 백성의 유익을 위한 것이라면 왜 여기에 종교적 의미를 붙여서 “내가 거룩하니 너희도 거룩할지어다.” 라고 하였을까? 아이를 낳은 여인을 ‘부정’(不淨)하다고 한 이유가 무엇이며, 또한 부정한 기간도 여아를 낳을 때가 남아를 낳을 때의 두 배인 이유는 또 무엇인가? 당시 사회가 남성 위주의 가부장제 사회이고, 여성을 무시하는 경향이 있기 때문에 그런 것인가? 여성의 수고에 대하여 보상은 못할망정 이렇게 비인간적일 수 있는가? 나병이라는 전염병에 걸린 것도 억울한데, 유출병에 걸리는 것이 본인의 윤리적 타락 때문이 아닌데, 꼭 그에게 종교적인 ‘낙인’(烙印)까지 찍어서 사회에서 따돌림 시켜야 하는가?
마술적 해석
두 번째 가능한 해석은 ‘마술적’ 해석이라고 이름 붙일 수 있겠다. 미개한 고대인들이 어떤 특정한 짐승을 실제로 부정하다고 여겨서 종교적 해석을 붙이는 것이다. 친숙하지 않은 존재들이 마귀의 지배를 받는다고 생각하고, 알지 못하기 때문에 공포감을 주는 것들을 괴물로 생각하고, 이해할 수 없는 문화를 가진 타자(他者)를 이방죄인 취급하는 것이다. (리처드 커니, 『이방인, 신, 괴물: 타자성 개념에 대한 도전적 고찰』, 개마고원, 2004) 피나 정액, 신체적 장애와 같은 것들은, 우리가 도달할 수 없고 설명할 수도 없는 미지의 초월적 세계가 언뜻 나타나는 표상이며, 그래서 두려움을 자아내기 마련이다. 이 세상은 나와 내가 속한 공동체가 친숙하게 알고 있는 합리적인 것들과, 우리에게 경외감과 공포를 동시에 불러일으키는 비합리적인 것, 혹은 거룩한 것(‘누미노제’)으로 나뉘어져 있다. (우리도 과거에 길거리에서 정신병자를 보았을 때는 ‘재수없다’고 생각하여 침을 뱉고 소금을 뿌리는 등의 행위를 서슴지 않았었다.)
이러한 마술적 존재들은 어떤 방식으로든 설명될 수 있을 때 그 마술적 힘을 잃어버린다. 포괄적이고 합리적인 설명이 주어지게 될 때 더 이상 우리 영혼에 공포를 줄 수 없다. 바로 예수 그리스도께서 전적인 타자인 하나님을 ‘아버지’라 부르심으로써, 하나님이 지으신 모든 피조물을 마술의 세계에서 해방시키셨다. (여기에 현대 의학은 전염병에도, 피에도, 정액에도 어떠한 귀신의 힘이 붙어 있지 않고, 조작이 가능한 것들이라고 합리적으로 설명함으로 두려움을 제거하였다.) 또한 예수님은 초월적 세계가 우리에게 공포로 다가오는 것은 우리 마음이 품고 있는 죄악 때문이라고 설명하였다. 음식물 자체가 공포의 대상이 아니라 그 음식을 취하는 사람의 마음이 문제이다. 모든 음식물은 아버지의 선물이기 때문에 이것들이 “능히 사람을 더럽게 하지 못하”고 단지 사람의 마음에서 나오는 것들이 사람을 더럽게 할 뿐이다. 예수님은 이렇게 말씀하심으로 “모든 음식물을 깨끗하다.”고 선포하신 셈이다. (막7:14-23) 후일 초대교회도 예수님의 음식에 대한 개념을 확대시켜 이상한(부정한) 음식물로 대표되는 이방인들도 모두 하나님이 받으시는 사람들이라는 것을 확인하였다.(행10장) 사도바울도 음식에 어떤 영이 깃들여 있다고 생각하는 것이 오히려 귀신의 가르침이라고 하였고,(딤전4:1-5) 심지어 우상에게 바쳐졌던 고기라고 할지라도 마음껏 먹으라고 하였다.(고전8:4-6)
마술적 해석에도 유익이 있다. 예수 그리스도의 구속이 마술적 힘으로부터의 해방(liberation)이라는 요소를 가지고 있음을 알려준 것이다. 예수를 믿고 창조주 하나님을 아버지라 부르게 되면 더 이상 ‘손’(損), ‘재수’, ‘액’(厄), ‘살’(煞)과 같은 것을 두려워하거나 신봉하지 않게 된다. 모든 자연물을 비신성화(非神性化)함으로 과학기술을 발전시킬 수 있고, 치료할 수 없는 질병에 걸린 사람을 공동체에서 소외시키지도 않게 된다.
하지만 이 해석은 더 많은 것을 설명하지 못한다. 이 개념은 기본적으로 구약의 율법이 하나님이 주신 명령이라는 생각보다는 인간의 공포가 만들어 낸 것이라는 전제 위에 놓여 있다. 또한 구약시대 신앙인들은 미개인이고 신약의 신자들은 계몽된 사람이며, 구약은 어두운 시대이고 그리스도에 의하여 계시가 완성된 신약시대는 모든 것이 드러난 시대라는 전제를 가지고 있다. 과연 그럴까? 구약의 성도들도 거룩한 것의 참된 의미는 물건에 붙어 있는 귀신의 힘이라기보다는 그 물건을 만지는 사람의 마음에 있다는 것 정도는 잘 알았다. 제사장 외에는 먹지 못하는 ‘거룩한’ 떡을 다윗이 먹은 것을 생각하면 된다. 예언서와 시편의 장엄하면서 깊이 있는 신앙은 그 저자들이 마술에 붙잡힌 미개인이라는 것을 강하게 부정한다.
자, 우리는 이제 난관에 부딪혔다. 부정한 짐승, 산혈과 정액, 나병과 유출병과 같은 것이 부정한 이유가 그것들에 원래 붙어 있는 본래적인(intrinsic) 부정한 성질 때문인가, 아니면 사회문화적으로 덧붙여진(adherent) 것인가? 본래적인 것은 아닐 것이다. 만일 본래적으로 이것들이 부정한 것이었다면 신약의 그리스도와 사도들이 이를 깨끗하다고 했을 리가 없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문화적인 것인가? 문화적인 것이라면 (구약시대에) 왜 이미 충분히 고통을 받고 있을 사람들에게 종교적 낙인까지 찍어 더 괴로움을 주는 것일까? 도대체 하나님은 구약 이스라엘 백성이 거룩하게 사는 방편으로 그들을 미신에 가두어두는 것 같은, 그리고 마침내 ‘폐기’되어 버릴 계명을 주신 것일까?
영광의 생명 속에 감추어진 죄의 저주
레11-15장의 ‘부정’한 것들은 그 자체로서 악하거나 부정한 것은 아니지만, 어떤 식으로든지 죄와 죄의 결과인 죽음과 긴밀하게 연결되어 있는 것들이다. 단순히 문화적인 것도 아니고 그렇다고 본래적으로 악한 것도 아니다. 하나님이 지으신 모든 것이 선하기 때문에 하나님이 지으신 모든 짐승들은 그 자체로서 선한 것들이다. 하지만 인간이 타락한 이후 하나님은 짐승들을 사람의 손에서 빼앗아 사람을 대적하는 부정한 짐승으로 규정하셨다. 은혜를 조금 베푸셔서 인간이 기르고 돌볼 수 있는 짐승들을 남겨두셨지만 말이다. 원래부터 부정한 것은 아니지만 인간의 타락 때문에 부정의 멍에를 쓰게 된 것이다. 정한 짐승과 부정한 짐승의 기원은 구약성경에서 노아의 홍수 시절까지 거슬러 올라간다.(창7:2) 부정한 짐승들은 대체로 어느 정도 본성적으로 그 형태나 촉감 혹은 습성에서 죄를 닮아 있다. 뱀을 닮아 있기도 하고, 축축하고 미끌미끌하며, 다른 짐승을 뜯어먹으며, 더럽고 지저분한 것들이다. 이런 것들에 대한 혐오감이 우리의 집단무의식 속에 남아 있고, 그 보편성으로 보아 이 혐오감의 기원이 인류 공통의 경험에 기인한 것처럼 보인다.
여인이 흘리는 피의 경우는 어떠한가? 이 역시 죄로 말미암은 저주의 표상이다. 죄를 지은 여인에게 “임신하는 고통을 크게 더할 것”이라고 하셨는데, 그 고통 가운데 일부가 피를 흘리는 것이다. 여인이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열매를 먹지 않았더라면, 생리와 해산 때 피를 흘렸을지, 아니면 피는 흘리되 고통과 저주만 수반되지 않았을지는 알 수 없다. 하지만 분명한 것은 타락 후 여인이 피를 흘려 아이를 낳아야 하고 그 피는 형벌과 저주의 의미를 띠게 되었다는 것이다.
어느 사회에서나 아기를 낳는 것은 가장 큰 경사요 복된 일이다. 사람을 창조하신 후 하나님이 주신 최초의 축복이 “생육하고 번성하여 땅에 충만하라.”는 것이었다.(창1:26-28) 여인의 가장 큰 영광은 생명을 낳는 것이다. 그러나 여인은 징벌과 저주의 의미를 담은 부정한 피를 흘리고, 그것 때문에 부정하게 된다. 사람들로 하여금 죄악의 뿌리를 깨닫게 하여 겸손케 하기 위하여 하나님은 인간의 생명을 만드는 작업을 부끄러움 속에 두셨다. 생명 탄생이라는 가장 큰 영광을 수치스런 일로 만들어버리심으로 인생 자체가 그리 영광스런 것이 못 된다는 것을 보여주고 싶으셨던 것이다. 에덴동산에서의 아담과 하와는 벌거벗고 다녔으나 이것이 부끄러움이 아니었다. 그러나 이들이 범죄하고서 맨 처음 느꼈던 감정은, 바로 자신들이 벗었음을, 즉 성기(=생식기)가 노출되었음을 부끄러워하는 것이었다. 생명을 얻는 것은 하나님의 가장 큰 축복이면서 동시에 가장 부끄러운 일이 되었다. 구약시대 이방인들은 남신 바알과 여신 아세라의 성생활을 신전(神殿)에서 드러내 놓고 행함으로 신들과 자연의 생명력과 출산력이 풍성해진다고 믿었다. 그러나 우리 하나님은 남녀의 성기를 가리도록 하셨다. 성(性)과 생명을 생각할 때 우리는 우리의 원죄를 기억해야 한다. “여인에게서 태어난 사람은... 누가 깨끗한 것을 더러운 것 가운데에서 낼 수 있으리이까!” (욥14:1,4) 또한 여자아이를 낳으면 더 부정하다고 하신 것도, 사람들로 하여금 죄악의 뿌리를 깨닫게 하려는 목적이다. “아담이 꾀임을 보지 아니하고 여자가 꾀임을 보아 죄에 빠졌음이니라.” (딤전2:15)
나병의 경우도 마찬가지이다. 성경에서 많은 경우 나병을 죄의 결과와 연결시킨다. 예컨대 미리암(민12장), 게하시(황하5:26-27), 웃시야 왕(대하26:16-21) 등이 그러하다. 나병이 항상 죄의 결과인 것은 아니다. 욥의 경우, 그의 질병이 죄의 결과로 온 것이 아니라는 것을 증명하려는 것으로 변론의 대부분을 채운다. 개인적인 죄와 질병이 일대일로 대응하는 것은 아니다. 하지만 전체적으로 볼 때 인간의 죄의 결과는 엄청난 것이어서 여러 가지의 무질서와 질병과 더러움이 발생하였다. 모든 질병 가운데 죄의 파괴적인 결과와 전염성을 가장 잘 보여주는 병이 나병인 것이다.
우리가 사는 세상은 완전한 세상이 아니다. 우리가 만든 사회는 모순투성이고, 우리의 아내들은 아름답기만 한 것이 아니고, 그 사이에서 우리가 낳는 아이들은 흠결이 있다. 세상은 불공평한 일들로 가득하고 우리는 이를 설명할 수도 없다. 왜 어떤 아이들은 장애를 가지고 태어나는지, 왜 남자들은 주체할 수 없는 욕정을 가지고 태어나며 여자들은 사랑에 목말라하다가 미련한 결정을 내리는지, 왜 어떤 사회는 미련한 독재자 통치로 신음해야 하는지, 왜 어떤 나라는 홍수와 가뭄이 번갈아 오는지 우리는 알 수가 없다. 감춘다고 해서 보이지 않는 것이 아니고, 미화(美化)한다고 해서 구역질이 사라지는 것은 아니다. 고대인의 세상이 우리를 위협하고 공포를 조장하는 ‘부정’한 것들로 가득한 불가사의한 세상이었다고 하면, 현대인이 만든 세상은 모든 공포의 근원이 까발려졌음에도 불구하고 더욱 불안한 곳이 되었다.
부정한 것을 만지지 말라.
레위기의 이 계명들이 현대의 우리에게 주는 구체적인 의미가 무엇일까? 레위기 11-15장을 본문 삼아 설교할 때 어떻게 설교할 수 있을까? 앞서 말한 대로 이미 예수님과 신약성경이 음식법과 특정한 날과 시체의 공포로부터 우리를 해방시켰고, 현대 과학이 나병과 유출병을 통제 가능한 질병의 하나로 분류하였기 때문에, 지금도 글자 그대로 이 계명을 지킬 수 없다. 아니 그대로 지키려 하는 것이 오히려 기독교를 마술적이고 미신적인 종교로 퇴행시킬까 두렵다. (예컨대 특정 지역에 자리 잡은 마귀를 ‘땅 밟기’를 통하여 물리칠 수 있다든지, 목사를 해코지하면 3대가 저주를 받는다든지.)
오늘날 우리에게 어떻게 적용할 수 있을지 두 가지 정도 살펴보자. 첫째, 죄를 짓게 하는 것이 우리와 아주 가까운 곳에 있음을 인식하고 죄를 피하기 위하여 노력해야 한다. 아마도 이것이 레위기의 계명을 주신 원래적인 이유일 것이다. 죄와 죽음의 상징인 짐승과 피와 정액과 같은 것을 경계함으로써 죄의 위험성을 알고 죄를 덜 짓게 되는 것이다.
사실상 우리의 거룩함을 해치는 것은 물질이라기보다는 사람일 경우가 많다. 고후6:14-18은 레위기의 언어를 사용하면서 “너희는 그들 중에서 나와서 따로 있고 부정한 것을 만지지 말라.”고 명령한다. 레위기의 신약적 적용인 셈인데 이는 특히 “믿지 않는 자와 멍에를 함께 메지 말라.”고 하여 고린도교회의 거짓 스승들을 경계할 것을 명령한다. 방탕한 사람과 사귀면서 경건을 위한 금욕을 하기 어렵고, 술친구들을 사귀면서 혼자 맑은 정신을 가질 수 없다.
사람은 환경에 영향을 많이 받는데, 이는 미개한 고대인만 그런 것이 아니라 현대인도 마찬가지이다. 음식 자체가 부정한 것은 아니지만 우리에게 죄를 짓게 하는 식물(食物)은 지금도 많이 있다. 육체와 정신을 해치는 마약이나 담배를 피해야 한다. 술은 원래 하나님이 주신 좋은 선물이었다. (신14:26-27; 삿9:13) 그러나 19세기 산업화 이후 술은 부정적인 의미를 가지게 되었다. 알코올중독. 폭력, 건강, 돈 낭비, 정욕, 가정 파괴와 함께 결합되어 죄를 조장한다. 또한 경건을 해칠 정도로 너무 비싼 음식을 너무 많이 먹는 탐식을 피해야 한다. 최고의 음식을 먹는 것을 인생의 가장 큰 낙으로 여기면서 마음만은 죄에서 멀다고 말하는 것은 또 다른 이원론이다. 땅 자체에 음기(淫氣)가 서려 있는 것은 아니지만 유흥가에서 먼 곳에 살면 죄를 더 피할 수 있을 것이다. 옷을 입을 때도 정숙한 옷을 입고(딤전2:9-10), 남녀가 옷을 혼용해서 입지 말아야 한다.(신22:5) 직장을 선택할 때 죄를 조장하는 직업인지 죄를 짓지 않도록 돕는 직업인지를 기준으로 삼아야 한다.
짐을 나누어 지라.
레위기11-15장의 정결법의 두 번째 현대적 적용을 생각해 보자. 부정한 짐승이 존재하고, 산혈이 부정하며, 나병과 유출병을 부정하다고 규정하신 하나님의 의도가, 우리 사회가 완전하지 못함을 보여주기 위함이라고 하였다. 죄의 저주로 이런 문제들이 생긴 것인데, 그렇다고 해서 각 사람이 자신의 죄에 대한 보응을 정확히 일대일로 받는 것이 아니라고 하였다. 인류의 보편적인 죄와 죄의 저주가 이 몇 사람을 통하여 표현된 것이다. 그렇다면 이런 질병을 가진 사람들은 어떤 의미에서 세상의 죄를 짊어지고 가는 것이다. 모든 사람에게 임하여야 할 저주가 특정한 사람의 어깨에 걸려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불치의 병에 걸린 사람이나 윤리적 부정과 연관된 것처럼 보이는 질병(예컨대 에이즈)을 앓고 있는 사람을 볼 때, 첫째로는 죄의 무서움을 기억해야 하지만, 둘째로는 개인과 가족이 당해야 할 엄청난 아픔에 대하여 미안하고 측은한 마음을 가져야 한다. 환자와 그 가족에게 모든 경제적, 심리적, 종교적 짐을 지워서는 안 된다. 인류의 죄악으로 이런 질병이 오게 되었으며 그 인류 가운데는 자신도 포함된다는 것을 아는 사람은, 환자 개인과 가족이 당해야 할 엄청난 아픔에 대하여 미안한 마음을 가지게 마련이다. 불행을 당한 사람에게서 돌아서서 이들을 정죄하고 이들에게 침을 뱉고 죄인의 낙인(烙印)을 찍는 사람은 언젠가 자신에게도 그런 일이 일어날 수 있음을 알아야 한다.
불행을 만난 사람을 한 사회가 함께 안고 가야 한다. 하나님께는 송구한 마음을 가지고, 이 사람에게는 미안하고 측은한 마음을 가지며, 경제적 짐을 같이 져야 한다. 환자와 그 가족에게 모든 짐을 뒤집어씌우는 사회는 자기의 죄를 돌아볼 줄 모르는 매정하고 불의한 사회이다. 구약시대 나병 환자들은 진영 밖(레13:46) 혹은 성문 밖(왕하7:3)에서 살아야 하였지만, 모두 공동체가 제공해 주는 음식으로 연명하였다.
우리 주님이 오셔서 행하신 최초의 기적 가운데 두 가지가 나병과 유출병과 관련되어 있다는 사실은 우리에게 시사해 주는 바가 크다. 예수님께서 그에게 나온 나환자를 고치실 때 말씀으로만 고친 것이 아니었다. “손을 내밀어 그에게 대시며” 그를 고치셨다.(막1:41) 이 사람을 만지는 것만으로도 부정한 행동이었지만 예수님은 개의치 않으셨다. 막5:25-34의 유출병 걸린 여인을 고치시는 것은 더욱 흥미롭다. 예수님은 이 여인이 자신의 옷에 손을 대는 것을 허용하였을 뿐 아니라, 그 여인의 신앙고백을 듣기 원하였고, 그 ‘딸’의 믿음을 칭찬하시며 복을 주셨다.
메시아가 오셔서 하신 일이 바로 이 일이다. 메시아가 오실 때, “소경이 보며 앉은뱅이가 걸으며 문둥이가 깨끗함을 받으며 귀머거리가 들으며 죽은 자가 살아나며 가난한 자에게 복음이 전파된다 하라.”(마11:5) 그는 장애인의 질고를 짊어지고 가셨으며(마8:16-17) 심지어 그들을 자신과 동일시하셨다.(마25:40) 그가 걸으신 길을 우리도 따라야 한다. 예수님이 나병과 유출병 걸린 사람들을 측은히 여기셨던 것처럼 이들을 공동체의 일원으로 여기고 따뜻하게 대하여야 한다. 한걸음 더 나아가서 예수님이 (나환자들이 살던) 성문 밖에서 구원을 이루신 것처럼, 이 사회에서 부정한 사람으로 취급 받아 따돌림 당하는 사람의 입장과 이익을 대변해야 한다. “예수도 자기 피로써 백성을 거룩하게 하려고 성문 밖에서 고난을 받으셨느니라. 그런즉 우리도 그의 치욕을 짊어지고 영문 밖으로 그에게 나아가자!”(히13:13)
첫댓글 레위기 묵상~
요즘 많은것을 알게되고 깨닫게 됩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