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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 야구장에 나타난 황야의 무법자
철모르던 중학생 시절엔 왜 그리 서부영화가 좋았는지 모른다. 우상처럼 각인된 영화배우 존웨인(John Wayne)과
클린트 이스트우드(Clint Eastwood)로 상징되는 웨스턴 무비에 매료되어 그 속편이 나오기가 무섭게 친구들과 함께
영화관을 찾았던 기억이 생생하다. 당시 까까머리의 영혼을 사로잡은 것은 라틴풍의 독특한 배경음악과 함께 펼쳐치는
대평원에서의 질주 그리고 원주민 인디언 무리와 쫒고 쫒기는 돌풍같은 추격전뿐 아니다.
선과 악의 대결에서 최후의 화면은 긴박감을 더해가다 결국에는 응징의 총구에서 내뿜는 탄환과 0.1초의 간격을 두고 터져나오는
총잡이 속사포의 재빠른 손놀림이 경이한 마술을 선사하기 때문이다. 무적의 용사인 건맨의 승리로 최고의 남성미를 과시하고
난 뒤엔 그녀마저 뒤로한 채 묵묵히 말등에 올라타 석양을 등에 지고 사라지던 그의 뒷모습은 당시로선 환상적 낭만의 극치였다.
제목부터 석양의 건맨이 아니더냐! 내가 역마차와 평원을 내 인생의 지평으로 삼은 것은 바로 그 때였을 것이다.
황야의 결투
" 역마차를 타고 가자 ~"
지난 달에 라스베가스의 업무 일정을 마치고 아리조나 떠나게된 것은 어찌보면 우연이었는지도 모른다. 당초에 비행기를
이용하려다 일정이 갑자기 당겨지는 바람에 자동차로 직접 운전하여 출장을 떠나게 된 것이다. LA를 출발해서 라스베가스를
거쳐 피닉스 찍고 다시 로스엔젤레스까지 총950마일(1500km)의 장정(長征). 환락의 도시 라스베가스를 출발하여 280여마일의
길을 홀로 달려가는 시발점인 미드호수의 후버댐을 넘어서면서 점차 삭막한 사막의 길로 접어 들었다. 남동쪽으로 향하는
93번 도로위에서의 고독한 행진이 시작되었다.
킹스맨이라는 소도시를 거쳐 나가면서 잠시 길이 막히더니 그랜드캐년으로 닿는 40번 고속도로를 빠져나오자 2차선으로
바뀌면서 이내 교통량이 줄어들어 여유를 갖고 눈길을 창밖으로 넓혀갈 수 있었다. 주변은 얕은 구름아래 겹겹이 낮은
구릉인데도 한가롭게 풀뜯는 소들의 모습이 정겨웠다. 아리조나 카우보이와 블랙 앵거스(Black Angus). 진한 검정색을
뒤집어 쓴 소들의 모습도 강렬하고 도도하게 다가왔지만 반면 녀석들의 유유한 자태가 단연 하늘아래 대자연을 맘껏
구가하는 그들만의 또 다른 태평성대인 듯 보였다. 초목지를 잠시 지나자 바깥 풍경이 자슈아 나무(Joshua Tree)로
서서히 옷을 갈아 입더니 커다란 선인장이 듬성듬성 나타나 손을 흔들기 시작했다.
고개를 몇구비 넘어가기를 반복하면서 굽어진 길 따라 선인장의 숫자도 점차 늘어갔다. 들판에만 서 있는 것이 아니다.
멀리 산등성이며 협곡 사이에 놓인 돌위에도 또한 뿌리라곤 발붙일 곳 없어보이는 바위 절벽 가파른 옆면에서도 놈은
고개를 꽂꽂히 들고 일어나 있었다. 빗물이 귀한 사막 위에서 오직 태양이 내려주는 햇볕과 흙속의 척박한 자양분을 받아
마시며 곧게 날개를 편 그 자태가 가상하다. 우리네 인간의 힘으로는 걸어나가지조차 못할 이 고립무원(孤立無援)의 땅을
가슴으로 품어낸 그들이야말로 진정한 자연의 동반자다. 자연의 몸을 빌어 빚은 고상한 몸매를 뽐내고 있었던 것이다.
바닷물에 잠겼던 흔적이 선연한 겁의 세월을 안고 서서 병풍처럼 높게 둘러싼 황토빛 암벽의 사열을 받으며 끝머리에서
고개를 마저 넘기자 눈 앞에는 넓다란 평원이 펼쳐졌다. 순간 나도 모르게 탄성이 흘러나왔다. "와우~"
선인장은 더 이상 외롭게 서있는 개체가 아니었다. 명칭이 Saguaro Cactus, 그들은 사방을 뒤덮어 드넓은
시야를 온통 차지하고 있었다.
큰 놈들은 10미터가 넘는 몸집에 200년의 나이를 머금고 이제는 한줄기 준엄한 광채로 빛났다. 웅장하면서도 화려한
점령의 잔치에 위압감을 느끼며 바라볼 뿐, 더 이상의 이방인은 없었다. 버림받은 저주의 땅, 지상의 한편에서 그들만의
고유한 언어로 수만년에 걸쳐서 풍요로운 인고(忍苦)의 향연을 벌이고 있는 것이다. 지는 햇살아래 성대한 군무를 펼치는
선인장들의 당당한 자태 앞에서 나는 나즈막히 혼잣말로 읊조린다. 아리조나 평원에 함께 살리라.
그 곳에서 나는 잊혀졌던 총잡이 장고(Django)의 환상을 보았다. 무법자 시리즈의 클린트 이스트우드도 만났다.
나무관을 질질 끌면서 그 자가 걸어가고 있었다. 기병대 용사 존 웨인(John Wayne)도 보였다. 뿐만 아니다.
저편에서는 한 무리의 인디언들이 말을 달려 환호성을 올리면서 내쳐 달린다. 인디언 추장의 검게 그을린 얼굴에서
용맹성이 튀어나고 그들에 쫒기는 역마차의 바퀴가 힘겹게 땅을 내친다. 나는 보았다. 아스라한 과거, 컴컴한
영화관 안에서 숨죽여 보던 화면 그대로를 나는 역사의 현장에서 살아있는 동영상으로 다시 보게 된 것이다.
이 어찌 감격이 아니랴.
By the time I get to Phoenix의 멜로디가 로컬 라디오를 통해 흘러나온 것도 마침 그 때였다.
아리조나의 주도인 피닉스가 가까워지고 있기 때문이다. 글렌 캠벨(Glen Campbell)의 1967년 히트곡
<피닉스에 도착할 즈음에> 노랫말이 이렇다.
“피닉스에 도착할 즈음이면 그녀는 깨어나겠지/ 내가 남긴 쪽지의 작별을 고한 부분을 읽고 그녀는 웃을거야/
전에도 여러 번 그렇게 떠났었으니까/ 앨버커키에 도착할 즈음이면 그녀는 일을 하겠지/
점심시간에 잠시 일손을 놓고 나에게 전화를 걸지만 벨 소리만 듣게 될거야/
오클라호마에 도착할 즈음이면 그녀는 자고 있겠지/ 부드럽게 돌아누워서 내 이름을 부르게 될 거야/
내가 정말 떠났다는 사실을 알고 나서 울게 되겠지/ 떠날 거라고 그토록 얘기해왔건만/
내가 정말 떠날 줄은 몰랐던 거지”
노래링크 http://youtu.be/WD2fCebrSFU
한국에선 송창식씨가 번안해서 불렀던 팝송. 깊은 기억의 창고속에서 나는 송창식의 애끓는 음성으로 그 노래를 다시
꺼내 들으면서 오랜동안 묻혔던 학창시절로 돌아가서 빛 바랜 나의 잊혀진 꿈을 보았다. 그것은 황야의 무법자가 보여준
꿈이었다. 아리조나를 무대로 펼쳐졌던 그 영화의 장면들이 사춘기 시절부터 간직해왔던 나의 꿈을 일깨워준 것이다.
나그네로서의 꿈은 낭만을 즐기며 떠돌아 길위의 명상을 통해 구도의 각성을 얻는 일이다. 나는 그 길을 따라 집시처럼
지구를 몇바퀴 돌아 지금 비로소 그 꿈의 발원지에 다달아 있는 것이다.
"참으로 멀리도 돌아서 왔네, 그려~"
아리조나에 도착하여 또 다른 황야의 무법자 일당을 접하게 되었다. 먼길을 왔으니 시장하였고 저녁은 자연히 한식당을
찾아갔다. 고송이라는 이름의 식당에 도착해서 차에서 내린 후 주차장에서 길을 물었다. 식사가 끝나면 묵을 호텔을
찾아가야 하는데... "여기서 이렇게 나가서 곧바로 좌회전 됩니까?" 그러자 마침 주차장에 서있는 등치가 산만한 청년이
주춤하더니 "여기서요,,, 네, 될 겁니다. 조심해서 잘 돌아 보세요"라며 애띤 얼굴에 천진난만한 미소로 빙긋이 웃는다.
인근 고교의 미식축구팀에서 운동하는 한국인 선수쯤으로 보였다. 식당 안에 들어서자 주인아줌마가 반갑게 맞는다.
주문을 하려는데 종업원 아가씨들이 들뜬 분위기에 부산하다. 무슨 일이냐고 물으니 류현진 선수가 와 있단다.
바깥에 나가있다길래 곧바로 밖으로 나왔다.
"아니, 이 친구 쫌전에 길 물어봤던 그 친구 아닌가. 이제야 보니 맞네, 류현진 그 괴물투수 아냐"
반가워 손을 잡으며 "응원 갈테니깐 잘 던져요! 나도 LA에서 왔네요" 한마디 던지고 다시 식당으로 들어서는데
마주 친 사람이 있었으니 이게 누구던가! "오호, 추신수 선수, 여기서 같이 만나네" 손을 꼭잡아 '한민족의 정'을
나누었다. 딱 벌어진 어깨에 과묵한 표정에서 영락없는 승부근성이 엿보였다. 두 선수가 객지에서 만나
숯불 바베큐를 '엄청' 드신다는 전갈이 종업원으로부터 날아왔다.
신시내티 추신수와 더저스의 류현진이 메이저리그 스프링캠프를 차리고
애리조나의 캑터스(cactus·선인장)리그에 임하였다는 소식을 옆좌석에서 전해 들었다.
다저스는 캐멀백 랜치 구장을, 신시내티는 굿이어 볼파크를 사용했단다.
저녁을 먹으면서 "참으로 귀한 인연이다. 유명 선수 두사람을 한자리에서 다 만나다니.
그것도 이국 땅에서 집 떠나 멀리 이곳 아리조나까지..."
곰곰히 생각해보았더니 가만있자,
이 자들이야말로 한반도에서 미국의 서부도시로 날아 들어온 황야의 무법자가 아니고 무엇이란 말인가.
참으로 장한 황야의 무법자들이다. 공은 총알처럼 던지고 방망이는 대포처럼 터졌으니 말이다.
야구의 본고장 미국의 텃세를 박차고 나가서 공을 던지고 받아쳐 일궈낸 우뚝 선 이정표.
타국땅에서 고군분투하며 역경을 헤쳐나가는 그들이 바로
황무지 사막에서 피는 강인한 선인장의 꿈을 실현하는 아메리칸 드림의 화신이요,
한국 스포츠 정신의 희망인 것을.
야구의 본바닥을 뒤흔드는 풍운아, 아리조나의 무법자였다.
피닉스의 일정을 마치고 얼바인으로 돌아오는 길에 세번째 황야의 무법자를 만났다.
<세번째 이야기, 다음 속편을 기대하시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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