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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2번 버스를 기다리며
모임에 나선 길이었다. 찾아갈 곳이 같은 대전권이라 하여도 꽤나 떨어진 거리다. 차를 가지고 가는 것이 응당 맞을 것인데 분명 술을 걸칠 것이고 그러자면 차는 처치 곤란 대상이 되고 말 것이다. 내 차가 나를 여지없이 꽁꽁 묶고 있다는 생각이 들고서 부터는 나는 이를 과감히 포기했다. 웬만하면 걷던지 아니면 값 싼 버스. 무엇이든 의존성은 편리함을 차지하는 대신 그만한 반대급부가 있다. 짐으로 작용하거나 때론 대가를 치른다는 것이 거의 틀리지 않다. 조금 불편해도 홀가분한 것이 보다 선선하다.
버스정류장에서 가는 방향 차편 번호를 찾았다. 132번 신탄진 보훈병원 방향. 갈아타지 않아도 될 것이라 옳다구나 싶었다. 그런데 15분이 지나도 오지 않는다. 가는 곳이 외곽이라 드문드문 나타나는 게 아마도 경제논리상 정석일 것이다. 어느새 또 15분이 지나 버렸다. 다른 차는 수시로 오가는데 참 얄궂은 상황이 되고 말았다. 뒤쪽을 바라보다 지쳐 고개가 아플 정도다. 이제는 오는 차를 탄다 하여도 제 시간엔 당도하지 못할 시간이다.
택시를 잡아탈까 망설이다가 그냥 더 견뎌 보기로 하였다. 그 새 버틴 시간이 아깝고 택시비가 족히 이만 원은 나올 것이니 오늘 모임 회비하고도 맞먹는다. 주객이 전도된 그런 계산법이 마음에 안 든다. 또 시간이 거침없이 지나간다. 기다림은 초조가 되고 간절함이 되었다. 속상한데 야속함이 간절함으로 돌변하여 희망으로 급반전을 한다는 게 합리적이지 않다 싶지만 어쩔 수는 없지 싶다. 그러면서 하는 소리다. 앞으로 5분 안에 오면 그 차에 대한 상심을 아낌없이 덮어주자.
버스 한대가 들어왔다. 목적지까지 가지는 않지만 중간까지는 가는 방향이 같은 버스다. 탈 것인가 말 것인가 망설이는 순간 이내 차는 떠나버렸다. 이제는 숫제 오기가 생기고 만다. 언제까지 오는지 두고 보라지. 지속되는 헛말에도 132번 버스는 나타나지 않았다. 중간까지는 같은 방향인 버스가 또 하나 들어왔다. 순간의 결정이다. 이제 132번은 포기하자. 132번 너 잘 먹고 잘 살아라.
잘 선택한 것이라 싶었다. 그렇게 더 기다리다가 그래도 안 온다면 나는 분명 가는 것을 포기하고 말았을 것이다. 평상시는 자주 본 그 숫자인데 묘한 날이다. 그러고 보니 나는 거의 40분 이상을 승강장에 서성이며 시간과 기다림과 돈을 연관하여 머릿 속을 온통 뒤죽박죽을 만들어 버렸다. 버스를 타려한 것은 나의 홀가분함이라지만 기실 술 때문이었고 돈 때문이었다. 돈을 들였으면 시간을 벌었을 것인데 돈을 안 들이니 시간도 놓치고 늘어난 것은 안타까움이었다.
결국 돈 때문에 시간도 허비해 버리고 기다림도 무용이 되고 말았다. 시간의 입장에서 보면 시간이 어느 정도 지나치니 기다림은 더욱 더 절실해졌고 어느 시간 점을 경과해서는 기다림의 한계와 더불어 이제는 택시를 타서라도 가야한다는 강박감이 더 크게 작용을 했다. 그런데 또 그 시점을 경과하니 이젠 기다림도 돈도 무의미하다 싶어지는 상황이 되고 말았다. 관계를 정리해보자면 버스는 돈을 나무라야 할 것이고 돈은 시간을 원망해야 할 처지다.
따져보면 시간에 따른 마음의 변화가 시시각각 일어나고 있다. 우리의 인생을 빗대어 살펴본다면 어찌되는 것일까. 인생은 곧 시간이다. 각자 주어진 시간, 시간도 많고 돈도 많고 기다림도 즐비하다면 이보다 더할 기쁨은 없을 터다. 그런데 대개는 말하기를 시간에 쪼들리고 돈에 울고 기다림에 지쳤다고 말들을 한다. 모두 다 놓친 꼴이라 그중 하나라도 제대로 잡는 게 더 바람직할 것인데 사람의 욕심은 영 그렇지 않다.
선택의 기로에서 만약 시간이 많고 돈도 많으나 기다림과 희망이 없다면 어찌 될 것이며 시간은 많으나 돈도 없고 기다림이 없다면 또 어찌 할 것인가. 또 기다림은 산더미 같은데 돈도 없고 시간이 없다면. 시간의 제한성, 우리는 가는 세월을 붙잡을 재간이 없으니 우리는 별 수 없이 남겨진 시간의 아쉬움에 더더욱 돈과 기다림을 쫓으려들지는 모르겠다. 하지만 만약 돈과 기다림 중 택일을 하라한다면 어느 것을 택할 것인가. 개중에는 당연 돈이라고 말할 테지만 나는 그렇게 생각은 안 든다. 삶의 희망이 없다면 돈이 무슨 소용이 있는가.
그런데 분명한 것이 있다. 우리는 시간을 마음대로 할 수 없고 돈도 마음먹은 대로는 안 되지만 다행히 희망은 어디에서든 발아하는 특질로서 세상을 밝게 비추지 않는가. 우리가 믿는 종교는 기다림이고 또한 희망이다. 나로선 여유로운 시간이 만든 공간 속에서의 기다림 희망 낭만 행복 찾기이다. 이제부터라도 시간을 아껴 쓰던지 기다림을 많이 만들던지 돈 벌 궁리 몇을 꼬드겨 나의 시간 속에 처박으면 될 것도 같은데 이는 말이 그렇지 순탄한 경로는 아니다. 문득 세속의 시간을 버리는 것은 어떨까 싶어진다. 헐거워진 자유 속에는 느림보 시간이 다행히 존재하는 것도 같다.
심산유곡 세속이 미처 닿지 않는 곳에 더딘 시간 하나 만들어 사는 것도 괜찮을 것 같고 돈 덜 들어가는 기다림을 하루에 꼭꼭 두세 개 만들어 흐르는 시간에 대적함도 그럴 듯하다 싶다. 나로선 그러기에 글쓰기가 단연 최선책이다. 마음대로 사랑하고 마음 내키는 대로 떠도는 구름도 되고 자기 마음대로 숲 속을 노니는 시공간을 초월하는 자유를 만끽하지 않는가, 옛 선인의 초야에 묻혀 글이나 쓰다가 밤 하늘 별이 되겠노라 하는 말뜻을 이제야 조금은 알 것도 같다. 그런데 나는 여전히 속물이다. 돈도 있고 세월도 한량인 나를 건져줄 위인 혹시 없을까 찾는 마음은 여태 여전하다. 세파의 때 잔뜩 낀 존재로서 그래서 어리석은 중생은 쉽게 구제가 안 되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