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죄와 벌 3부 1
라스콜니코프는 몸을 일으켜 소파에 앉았다.
그는 라주미힌에게 힘없이 손을 내저어 어머니와 누이동생을 향한 조리 없는 열띤 위로의 말을 중단시킨 후 두 사람의 손을 잡고 2분쯤 말없이 얼굴을 번갈아 들여다보았다. 어머니는 그이 시선을 보고 소스라치게 놀랐다. 그 시선에는 고통 어린 강렬한 감정과 동시에 무언가 응고된 것 같은, 광적이라고도 할 만한 표정이 엿보였기 때문이다. 풀헤리야 알렉산드로브나는 울음을 터뜨렸다.
아브도치야 로마노브나의 얼굴은 창백하고, 그녀의 손은 오빠의 손 안에서 바르르 떨고 있었다.
“그만 돌아가주세요....저 사람하고.” 그는 라주미힌을 가리키며 띄엄띄엄 말했다. “내일 또.....내일이면 모든 것이....도착한 지 오래됐나요?”
“저녁때 왔다, 로쟈야”하고 풀헤리야 알렉산드로브나는 대답했다. “기차가 몹시 연착했어. 그렇지만 로쟈, 나는 이제 무슨 일이 있어도 네 옆을 떠나지 않겠다! 난 여기서 자겠다, 네 옆에서......”
“날 괴롭히지 말아주세요!” 그는 귀찮다는 듯 손을 내저으며 말했다.
“제가 곁에 남아 있겠습니다!”하고 라주미힌이 외쳤다. “잠시도 곁을떠나지 않겠습니다. 손님 같은 건 아무래도 좋습니다. 성을 내라면 내라죠, 뭐! 그쪽 일은 백부님이 맡아서 하실 테니까.”
“정말이지 뭐라고 감사를 해야 할지!” 다시금 라주미힌의 손을 잡으면서 풀헤리야 알렉산드로브나가 말하려 하자, 또 다시 라스콜니코프가 어머니의 말을 가로막았다.
“못 참겠어, 도저히 못 참겠어!” 그는 안타까운 듯 짜증을 내며 되풀이했다. “괴롭히지 마라니까요! 됐어요, 돌아가세요....정말 못 참겠다니까!“
”가요, 어머니, 잠깐 문밖에라도 나갔다 와요.“ 겁에 질린 두냐가 속삭였다. ”우린 지금 오빠를 괴롭히고 있는 거예요. 보기만 해도 알 수 있어요.“
“그럼 얼굴도 제대로 볼 수가 없단 말이냐? 3년이나 헤어져 있었는데!” 풀헤리야 알렉산드로브나는 다시 울음을 터뜨렸다.
“잠깐만!” 그는 다시금 두 사람을 불러 세웠다. “모두 방해만 하니까 머리가 자꾸 혼란해져서 그럽니다....루쥔은 만나셨나요?”
“아니, 아직 안 만났다. 하지만 그이는 우리가 도착한 걸 알고 있을 거다. 로쟈, 듣자니 표트르 페트로비치가 친절하게도 오늘 너를 찾아주셨다더구나?” 어머니는 다소 망설이는 어조로 이렇게 덧붙였다.
“네... 친절하게도 와주셨더군요....한데 두냐, 나는 아까 루쥔에게 층계 밑으로 떨어뜨리겠다고 말해주었다. 그렇게 해서 당장 내쫓고 말았어.......”
“로자, 무슨 말을 하는 거냐! 너는 아마....마음에도 없는 말을 하고 있는 거겠지.” 깜짝 놀란 풀헤리야 알렉산드로브나는 이렇게 말을 꺼냈으나, 두냐의 얼굴을 보고 입을 다물어버렸다.
아브도치야 로마노브나는 오빠의 얼굴을 빤히 쳐다보며 다음 말을 기다리고 있었다. 그들 모녀는 이미 루쥔과의 충돌에 대한 이야기를 나스타시야가 이해하고 전할 수 있는 데까지는 그녀에게 들어 알고 있었기 때문에 의혹과 기대를 품으려 몹시 마음을 죄고 있었던 것이다.
“두냐.” 라스콜니코프는 가까스로 말을 이었다. “나는 그 결혼에 찬성할 수 없어. 그러니까 너도 만나면, 내일 첫 마디에 루쥔을 거절해버려야 해. 앞으론 그 녀석의 냄새도 나지 않게 말이다.”
“아니, 저런!”하고 어머니는 외쳤다.
“오빠, 무슨 말씀을 하시는 거예요.” 아브도치야 로마노브나는 발끈해서 이렇게 말을 시작했으나 곧 자신을 억제했다. “아마도 오빠는 지금 그런 걸 생각할 여유가 없을 거예요, 몹시 피로할 테니까”하고 그녀는 상냥하게 말했다.
“내가 헛소리를 하는 줄 아니? 아니야....너는 나 때문에 루쥔과 결혼하려는 거야. 그러나 그런 희생을 받아들일 수는 없어. 그러니까 내일까지는 꼭 편지를 써라....거절하는 편지를....그리고 아침에 그것을 내게 읽어줘. 그것으로 끝나는 거야!”
“그럴 수는 없어요!” 화가 난 누이동생은 이렇게 소리쳤다. “대체 무슨 권리가 있기에.......”
“두네치카, 너도 참 성미가 급하고나. 그만 둬라, 내일....너도 알 만한데 왜 그러니.....”어머니가 깜짝 놀라 두냐에게 달려가서 이렇게 말했다. “자! 어서 돌아가는 게 낫겠다!”
“헛소릴 하는 겁니다!” 거나하게 취한 라주미힌이 외쳤다. “그렇지 않으면 어떻게 저런 소릴 할 수 있겠습니까! 내일만 되면 저런 바보 같은 소리도 하지 않을 겁니다. 그렇지만 오늘 그 사람을 내쫓은 건 사실입니다. 그건 사실이예요. 그 사람도 화를 냈지요. 그리고 일장 연설을 하고 자기의 지식을 늘어놓았지만, 결국 꼬리를 말고 도망쳐버렸지요........”
“그렇다면 그 말은 정말이군요?”하고 어머니는 외쳤다.
“그럼 오빠, 내일 또.” 두냐는 동정 어린 표정으로 말했다. “가요, 어머니....안녕, 로쟈!”
“알겠니, 두냐?” 그는 있는 힘을 다해 되풀이했다. “나는 헛소리를 하는 게 아니야. 이 결혼은 비열해. 나는 비열한 놈이 돼도 좋지만, 너는 그렇게 되어서는 안 돼....우리 둘 중 하나면 족한 거야....비록 나는 비열한 놈이지만, 그런 동생은 동생으로 생각하지 않겠다. 나를 택하느냐, 루쥔을 택하느냐야! 자, 이젠 가도 좋다......”
“자넨 돌았군! 그런 폭군 같은 소릴 하다니!”하고 라주미힌은 고함을 질렀다. 그러나 라스콜니코프는 대꾸가 없었다. 어쩌면 대답할 기력이 없었는지도 모른다. 그는 맥없이 소파에 쓰러져 벽 쪽으로 돌아누웠다. 아브도치야 로마노브나는 호기심에 찬 눈으로 라주미힌을 바라보았다. 그녀의 까만 눈동자가 번쩍 빛났다. 라주미힌은 그녀의 시선을 받고 흠칫 몸을 떨기까지 했다. 풀헤리야 알렉산드로브나는 얼빠진 사람처럼 멍청히 서 있었다.
“아무래도 나는 갈 수 없어요!” 그녀는 거의 절망적인 어조로 라주미힌에게 속삭였다. “나는 여기 남아 있겠어요. 어디든 좋으니....두냐를 좀 바래다주세요.”
“그러시면 몽땅 망쳐버립니다!” 라주미힌도 몹시 흥분해서 역시 속삭이듯이 말했다. “아무튼 층계까지라도 나가시지요. 나스타시야, 불을 밝혀줘@ 사실 말씀이지만 실은........”층계에 와서도 그는 거의 속삭이는 듯한 목소리로 말을 계속했다. “실은 아까도 로쟈는 우리를, 나와 의사를 마구 때리려 들었습니다! 아시겠어요? 의사까지 말입니다. 의사는 흥분시키면 안 된다는 말을 하고 가버렸습니다. 그래서 나는 아래층에서 지키고 있었는데, 어느 사이에 옷을 갈아입고는 살그머니 빠져나갔던 겁니다. 그러니까. 지금도 너무 자극했다가는 또 다시 나가서 이 밤중에 무슨 일을 저지를지 모릅니다.“
”아니, 그게 무슨 말씀이세요!“
”게다가 아브도치야 로마노브나도 어머님이 안 계시면 혼자 하숙에 남아 있을 수 없을 겁니다! 두 분이 지금 어떤 곳에 머무르고 계신지 아세요! 저 비열한 표트르 페트로비치라는 사내도 두 분을 위해 좀 더 나은 숙소를 마련해드릴 수 있었을 텐데....하긴 보시다시피 나는 좀 취했습니다...그래서 말이 좀 거칠어졌습니다만....제발 언짢게 생각지는 마십시오.“
”그러나 나는 이 집 안주인한테 가보겠습니다.“ 풀헤리야 알렉산드로브나는 고집을 부렸다. ”나하고 두냐를 오늘 밤만 아무 데나 한구석에서 묵게 해달라고 부탁해보겠어요. 나는 저 애를 그대로 내버려둘 수 없어요. 그럴 순 없어요!“
이런 말을 하면서 그들은 안주인의 방문 바로 앞 층계참에 서 있었다. 나스타시야는 한 단 아래에서 그들에게 불을 비춰주고 있었다. 라주미힌은 전에 없이 흥분해 있었다. 반 시간 전에 라스콜니코프를 배웅할 때는 자기 자신도 시인했듯이 지나치게 지껄였으나, 이날 저녁 굉장히 많은 술을 마셨는데도 퍽이나 기운이 좋고 거의 평상시와 비슷했다. 그러나 지금 그의 심리 상태는 그 어떤 환희와도 비슷한 것이었다. 동시에 여태까지 마신 술이 완전히 배가 된 힘을 지니고 한꺼번에 머리 위로 올라오는 듯한 느낌이었다. 그는 두 여인과 마주 서서 그들의 손을 움켜쥔 채 어떻게든 그들을 설복시키려고 놀랄 만큼 솔직한 태도로 여러 가지 이유를 늘어놓았다. 그리고 한층 더 강조하기 위해서인지, 거의 한 마디 한마디마다 두 사람의 손을 아플 정도로 꽉 쥐곤 했다. 그러면서 아무 거리낌도 없이 아브도치야 로마노브나의 얼굴을 뚫어지게 바라보았다. 두 사람은 너무 아파서 이따금 그의 크고 억센 손아귀에서 손을 빼내려고 했으나, 그는 알아차리지 못했을 뿐 아니라 오히려 한층 더 세계 끌어당겼다. 만일 지금 두 사람이 자기들을 위해 층계에서 거꾸로 뛰어내리라고 했다면, 그는 조금도 주저하거나 의심치 않고 당장에 그 일을 실행했을 것이다. 로쟈의 일로 제정신이 아니었던 풀헤리야 알렉산드로브나는 이 청년이 예의에 어긋날 만큼 너무 아프게 손을 꽉꽉 잡는 것을 느끼고는 있었으나, 동시에 자기로서는 이 청년이 구세주 같았으므로 그러한 사소한 행동에 대해서는 조금도 마음을 쓰지 않았다. 한편 같은 불안에 시달리고 있다고는 해도 그다지 나약한 편이 아닌 아브도치야 로마노브나는 오바 친구의 이 야성적인 불타는 듯한 눈초리를 놀라움보다는 오히려 공포의 감정으로 받아들이고 있었다. 나스타시야의 이야기를 통해서 알게된 이 이상한 사나이에 대한 무한한 신뢰가 없었더라면 그녀는 어머니의 손을 끌고 그에게서 달아나버렸을 것이다. 물론 그녀도 이제 와서는 이 사나이에게서 달아날 수 없으리라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그러나 한 10분쯤 지나자, 그녀는 눈에 띌 정도로 침착해졌다. 라주미힌은 자기 기분이야 어떻든 간에 언제나 순식간에 자기의 모든 것을 상대방에게 나타내 보이는 특성을 지니고 있었으므로 누구를 막론하고 곧 그의 사람됨을 알아볼 수 있었다.
”안주인한테는 안 됩니다. 그야말로 어리석기 짝이 없는 일입니다!“ 풀헤리야 알렉산드로브나를 설득하려고 그는 이렇게 외쳤다. ”설사 어머니라 하시더라도 여기 남아 계시면 로쟈를 미친 사람으로 만들고 맙니다. 그렇게 되면 정말 무슨 일이 일어날지 몰라요! 자, 들어보세요, 저는 이렇게 하겠습니다. 우선 거기에는 나스타시야를 앉아 잇게 하고, 제가 어머님을 바래다드리죠. 두 분이서만 밤거리를 걸으실 수는 없으니까요. 이 페테르부르크라는 곳은 그런 점에서는.....아니, 그런 건 아무래도 좋습니다! 그리고 저는 곧 이곳으로 돌아왔다가 15분 후에는 틀림없이 어머님께 보고를 하러 가겠습니다. 로쟈의 상태가 어떠하며, 잠이 들었는지 어떤지.....등등을 죄다 보고하겠습니다. 그리고 그 다음엔 말입니다. 쏜살같이 우리 집으로 달려가서 조시모프를 끌고 오겠습니다. 우리 집에는 손님들이 있고 모두 취해 있을 테니까요. 조시모프는 로쟈를 봐주는 의사죠. 지금 집에 있긴 합니다만 취하지는 않았습니다. 그 사람은 취하지 않습니다. 절대로 취하지 않아요! 그래서 그 사람을 로쟈한테 끌어다 놓고, 다시 곧 저는 어머님한테 달려가겠습니다. 결국 두 분께선 한 시간 동안 로쟈에 대한 보고를 두 번 받는 셈입니다. 의사의 보고를 받는단 말입니다, 아시겠습니까? 주치의의 보고를요. 그건 제가 보고하는 것과는 전혀 다른 의미니까요! 만약 환자가 더 악화된다면 맹세코 제가 어머님을 이곳으로 다시 모시고 오겠습니다. 그러나 용태가 좋으면, 그대로 편히 주무십시오. 저는 여기 문간에서 하룻밤 보내겠습니다. 여기라면 알아차리지 못할 겁니다. 그리고 조시모프는 주인아주머니한테서 자게 하겠습니다. 만일의 경우를 위해서. 자, 어떻습니까, 지금 로쟈를 위해서 두 분과 의사, 어느 쪽이 더 유익하겠습니까? 그야 의사 쪽이 더 유익할테죠. 유익하고 말고요. 그러니까 제발 돌아가십시오! 안주인한테는 안 됩니다. 저는 괜찮지만 두 분께선 안 됩니다. 들어주지도 않습니다. 왜냐하면....어리석기 짝이 없는 여자니까요....그 여자는 아브도치야 로마노브나 때문에 질투를 할 겁니다. 물론 어머님에 대해서도 그럴 테지만....아브도치야 로마노브나에 대해서는 틀림없습니다. 그 여자는 그야말로 괴상망측한 성격이니까요! 하긴 저도 역시 바보이긴 합니다만....하지만 그런 건 상관할 것도 없습니다! 저를 믿어주시겠습니까? 어때요, 믿겠습니까, 안 믿겠습니까?“
”가세요, 어머니“하고 아브도치야 로마노브나가 말했다. ”이분은 약속대로 해주실 거예요, 저렇게 오빠를 살려주신 분인걸요. 그리고 의사가 정말 머물러주시기만 한다면 그 이상 좋은 일이 어디 있겠어요?“
”아아, 당신은 .....당신은....나를 이해해주시는군요, 그건 당신이....천사이기 때문입니다!“ 라주미힌은 기쁨에 겨워 소리쳤다.
”갑시다! 그럼 나스타시야, 얼른 올라가서 환자 옆에 있어줘, 불을 밝혀놓고. 나는 15분 뒤면 돌아올 테니까......“
풀헤리야 알렉산드로브나는 아직 충분히 이해하지 못했으나 더 반대하지는 않았다. 라주미힌은 두 사람을 부축하며 층계를 내려갔다. 그렇지만 그녀는 라주미힌이 근심되지 않는 것도 아니었다. ‘민첩하고 좋은 사람이긴 하지만 약속대로 실행할 수 있을는지? 저런 꼴을 해가지고......’
”아아, 알겠습니다. 제가 이런 꼴을 하고 있는 것이 마음에 걸리시는 모양이군요!“ 라주미힌은 눈치를 채고 그녀의 생각을 가로막았다. 그는 남다른 걸음걸이로 성큼성큼 걸어서 두 여인은 간신히 따라갈 수 있을 정도였으나, 그는 그것도 모르고 있었다. ”염려 없습니다!....사실....저는 주정뱅이처럼 취해 있습니다만, 그러나 문제는 그런 데 있는 게 아닙니다. 제가 취한 건 술 탓이 아닙니다. 어머님과 따님을 본 순간 머리를 한 대 얻어맞은 겁니다....하지만 저 같은 건 문제 삼지 말아주십시오! 조금도 염려할 건 없어요. 되는대로 지껄이고 있으니까요. 저는 두 분과는 비교할 수도 없는 인간입니다....도저히 비교할 수 없고말고요! 두 분을 배웅해드리고 나면 이 도랑에서 물을 두 통쯤 뒤집어쓰겠습니다. 그러면 문제없습니다....그저 다만 제가 얼마나 두 분을 사랑하고 있는지, 그것만 알아주신다면!....웃지 마십시오. 그리고 노여워하지 마십시오!....다른 사람에게는 노여워하셔도 상관없지만, 저에게만은 노하지 말아주십시오! 저는 로쟈의 친구니까, 따라서 두 분의 친구도 될 것입니다. 저는 그렇게 되기를 원합니다....저는 그것을 예감했었습니다....지난 해의 일이지만, 언젠가 문득 그런 생각이 든 적이 있었습니다....하긴 결코 예감했던 것은 아니죠, 두 분께서 마치 천국에서 내려온 것처럼 별안간에 나타나셨으니까요. 그건 그렇고 저는 한잠도 못 잘 겁니다.....그 조시모프라는 녀석도 아까는 로쟈가 정신 이상이 아닌가 걱정했으니까요....신경을 자극 하지 마라는 것도 실은 그 때문입니다.....“
”뭐라고요?“ 어머니는 소리쳤다.
”정말 의사가 그렇게 말했나요?“ 아브도치야 로마노브나도 깜짝 놀라며 이렇게 물었다.
”그렇게 말했습니다. 그러나 그게 아닙니다. 절대로 그렇지가 않습니다. 의사는 무슨 가루약을 먹이더군요. 저도 보았어요. 그때 두분께서 오신 겁니다....아아, 두 분께서 내일쯤 오셨더라면 좋았을걸! 그러나 저희들이 그곳을 떠난 것은 참 잘한 일입니다. 아무튼 한 시간 뒤에는 조시모프가 모든 것을 두 분께 보고할 거예요. 그 사람은 원래 취하지 않으니까요! 저도 그때는 술이 깰 겁니다.....그런데 나는 왜 이렇게 취해버렸을까? 그건 저 저주스런 녀석들이 토론에 끌어들였기 때문입니다! 토론 따위는 절대로 하지 않으리라고 맹세했는데!....너무나 맹랑한 수작들을 늘어놓는 바람에 하마터면 주먹다짐이 벌어질 뻔했다니까요. 저는 거기다 백부를 두고 왔지요, 좌상격으로 말입니다....그런데 아시겠어요, 그자들은 완전한 개성의 방기를 요구하고, 거기서 최대의 의의를 발견하고 있단 말이에요! 어떻게해서든지 자기가 자기 자신이 아니기를, 또 어떻게 해서든 자기가 자기를 닮지 않도록! 이것이 그자들 사이에서는 최고의 진보로 여겨지고 있답니다. 게다가 자기 식으로라도 거짓말을 한다면 또 모르겠는데, 그게 아니라......“
”저, 잠깐만“하고 더듬거리는 말투로 풀헤리야 알렉산드로브나는 ㄱ의 말을 가로챘으나, ,그것은 다만 상대방의 열을 더 돋우어줄 뿐있었다.
”네, 두 분께선 이렇게 생각하고 계시죠?“ 한층 더 언성을 높이면서 라주미힌은 외쳤다. ”그자들이 거짓말을 하기 때문에 제가 이런다고 생각하시겠죠? 천만에요, 저는 사람이 거짓말하는 것을 좋아합니다. 거짓말은 모든 유기체에 대한 인간의 유일한 특권이니까요. 거짓말을 함으로써 진리에 도달하는 겁니다! 저도 거짓말을 하니까 인간인 것입니다. 우선 열네 번쯤, 아니 어쩌면 백열네 번쯤 거짓말을 하지 않고서는 어떠한 진리에도 도달하지 못합니다. 그건 그것대로 존경할 만한 가치가 있어요. 그런데 우리 또래는 거짓말을 하는 것조차 스스로의 지혜만으로는 안 됩니다! 자, 어서 거짓말을 해봐, 자기가 생각해낸 거짓말을 해보란 말이다, 그러면 나는 너한테 키스를 해주마. 독창적인 거짓말을 하는 것은 남의 흉내를 내어 외워둔 진리를 말하는 것보다 훨신 낫징. 전자는 인간일 수 있지만 후자는 새 같은 미물에 지나지 않으니까요! 진리는 달아나지 않지만 생명을 때려죽일 수도 있거든요. 그런 예는 얼마든지 있습니다. 그런데 지금 우리는 어떻습니까? 우리는 모두 한 사람의 예외도 없이 과학, 진보, 사색, 발명, 이상, 희망, 자유주의, 이성, 경험, 그 밖의 모든, 그야말로 모든 영역에서 아직 중학 예과 1년 생에 지나지 않습니다! 남의 지식으로 제 앞을 가리는 것이 쉽고 편하니까....완전히 거기 젖어버리고 말았습니다! 그렇지 않아요? 내 말이 틀립니까?“ 두 여인은 손을 꽉 쥐고 흔들면서 라주미힌은 외쳤다. ”안 그래요?“
”어쩌면 좋아요, 나는 잘 모르겠군요.“ 가엾게도 폴헤리야 알렉산드로브나는 중얼거렸다.
“네, 그래요....물론 당신의 말을 하나에서 열까지 다 찬성하는 건 아니지만” 하고 아브도치야 로마노브나는 정색을 하고 덧붙였으나 이내 비명을 올렸다. 이때 그가 너무나 아프게 그녀의 손을 쥐었기 때문이다.
“그렇지요? 그렇다는 말씀이지요? 자, 이렇게 되면 당신은....당신은.......” 그는 기쁨에 겨워 외쳤다. “당신이야말로 선(善)과 순결과 이지(理智)와, 그리고.....완성의 원천입니다! 손을 내십시오, 손을. 어머니도 어서 그 손을 주십시오. 저는 당장 이 자리에서 무릎을 꿇고 두 분의 손에 키스하고 싶습니다!”
그는 이렇게 말하고는 느닷없이 길 한가운데서 무릎을 꿇었다. 다행히 그 근방에는 아무도 없었다.
“그만두세요, 제발. 이게 무슨 짓이에요?”
풀헤리야 알렉산드로브나는 소스라치게 놀라며 이렇게 외쳤다.
“일어나세요, 일어나시라니까요!” 하며 두냐는 웃었으나 역시 염려가 되는 모양이었다.
“손을 내시기 전에는 절대로 일어나지 않겠습니다! 네, 그렇게요, 됐습니다. 자, 일어났지요, 갑시다! 저는 불행한 바보 자식입니다. 저는 두 분과는 비교할 수도 없는 놈이고, 이렇게 술 취해서 그것을 부끄러워하고 있습니다.....저는 두 분을 사랑할 자격이 없습니다만, 두 분 앞에 무릎을 꿇는다는 것은, 이것은 무지몽매한 짐승이 아닌 이상 각자의 의무입니다! 그러니까 나는 무릎을 꿇은 겁니다....아, 벌써 두 분의 숙소로군요. 이거 한 가지만 보더라도, 아까 로쟈가 표트르 페트로비치를 내쫓은 것은 당연한 처사였습니다! 아니, 글쎄, 어떻게 이런데다 두 분의 숙소를 정할 수 있습니까? 정말 창피한 일입니다! 여기가 어떤 사람들이 드나드는 곳인지 아십니까? 더구나 당신의 약혼녀가 아니냐 말이에요? 당신은 약혼녀지요, 그렇죠? 그러니까 나도 말씀드리겠습니다만, 이런 짓을 하는 당신의 약혼자는 비굴한 인간입니다!”
“저, 라주미힌 씨, 당신은 이성을 잃으셨군요.....“풀헤리야 알렉산드로브나가 말을 하려 했다.
”그렇습니다, 그래요. 저는 이성을 잃었습니다. 부끄럽습니다!“ 라주미힌은 퍼뜩 제정신으로 돌아왔다. ”그러나....그러나...이런 말씀을 드렸다고 해서 두 분께서는 저를 노엽게 생각해서는 안 됩니다! 저는 성의껏 말씀드리는 것이지, 결코 그 어떤.....음! 그렇다면 비열한 이야기가 되겠습니다만, 한마디로 말해서 제가 뭐 당신에게 그렇다는 것이 아니라....음! 아니, 이제 그만둡시다. 필요 없어요. 무엇 때문인지 그 이유는 말하지 않겠습니다. 용기가 없습니다....아무튼 우리는 아까 그 사람이 들어 왔을 때, 우리와는 어울릴 수 없는 사람이라는 걸 곧 깨달았습니다. 그건 뭐 그 사람이 이발소에 가서 머리를 지지고 왔대서가 아니고, 또 그 사람이 자기의 지식을 성급히 피력하려 했기 때문도 아닙니다. 요컨대 그 사나이는 스파이이며, 협잡꾼이기 때문입니다. 유대인 같은 사람이고, 사기꾼입니다. 이건 뻔한 사실입니다. 두 분께선 그를 똑똑하다고 생각하십니까? 천만에, 그 녀석은 바보에요, 바보고말고요! 그런 사나이가 어떻게 당신의 배필이 될 수 있겠습니까? 아아, 한심스러운 일입닏! 아시겠어요.“ 방으로 통하는 층계로 올라가다가 그는 문득 걸음을 멈췄다. ”물론 우리 집에 와 있는 패거리는 모두 취했습니다만, 그 대신 모두가 정직합니다. 비록 우리는 거짓말을 지껄이긴 합니다만, 그건 나도 마찬가집니다. 그러나 그렇게 거짓말을 지껄이는 동안에 언젠가는 진리에 도달할 수 있습니다. 그건 우리가 올바른 길에 서 있기 때문이죠. 그러나 표트르 페트로비치는 올바른 길에 서 있지 않습니다. 나는 지금 우리 집에 와 있는 녀석들에게 마구 욕설을 퍼부었습니다만, 그래도 나는 그들을 모두 존경하고 있습니다. 자묘토프라는 자까지도 존경하지는 않지만 사랑하고 있습니다. 귀여운 강아지니까요! 조시모프라는 녀석도 그렇습니다. 정직하고 자기 할 바를 알기 때문이지요. 그러나 이제 그만둡시다. 할 말도 다 하고 용서도 받았으니까요. 물론 용서해주신 거죠? 그렇죠? 자, 갑시다. 나는 이 복도를 잘 압니다. 와 본 적이 있어요. 저 3호실에서 추문이 있었지요....그런데 두 분의 방은 어디지요? 몇 호실입니까? 8호? 그럼 밤에 주무실 땐 반드시 문을 잠그고 아무도 들이지 마십시오. 15분 뒤에 보고를 가지고 다시 오겠습니다. 그리고 또 반 시간 후에는 조시모프를 데리고 오교요. 두고 보십시오! 그럼 안녕히. 달려가봐야죠!“
”아아, 두네치카, 이젠 어찌 되는 거지?“ 풀헤리야 알렉산드로브나는 겁먹고 불안한 표정으로 딸에게 말했다.
”안심하세요, 어머니.“ 모자와 망토를 벗으면서 두냐는 대답했다. ”그이는 어느 술좌석에서 바로 오긴 했습니다만, 하느님이 우리를 도우려고 보내주신 거예요. 그인 믿을 수 있을 거예요, 틀림없어요. 더구나 그이가 지금까지 오빠를 위해서 애써주신 걸 봐도........“
”하지만 두네치카, 그 사람이 정말 돌아와줄지 어떨지 알 게 뭐냐! 어쩌자고 나는 로쟈를 두고 올 마음이 생겼을까!.....정말이지 그런식으로 만나리라고 꿈에도 생각지 못했어! 그 애의 그 무뚝뚝한 태도란, 마치 우리가 온 것을 싫어하는 눈치더구나.........“
그녀의 눈에는 눈물이 맺혔다.
”아니, 그런 게 아니에요, 어머니. 어머니는 잘못 보셨어요. 오빠는 중병으로 머리가 혼란한 거예요....모든 것이 그 때문이에요.“
”아아, 그 병이! 아무래도 무슨 일이 날 게다. 무슨 일이 날 거야! 게다가 너한테 하는 말투는 또 그게 뭐냐, 두냐!” 어머니는 딸의 기분을 살피려고 겁먹은 표정으로 딸의 눈을 들여다보면서 말했다. 그러나 두냐가 로쟈를 감싸주는 것으로 보아, 그만하면 오빠를 용서한 모양이라 생각하고 반쯤은 벌써 안심하고 있었다. “하지만 내일이면 그 애도 반드시 마음을 돌이킬 거라고 나는 믿는다.” 어디까지나 딸의 마음을 떠보려고 그녀는 이렇게 덧붙였다.
“그렇지만 나는 내일도 오빠는 역시 같은 말을 하실 거라고 믿어요....그 일에 대해서만은”하고 아브도치야 로마노브나는 딱 잘라 말했다. 이 말은 물론 지금 어머니가 입 밖에 내기를 매우 꺼려하기 때문에 미리 못을 박아놓기 위함이었다. 두냐는 어머니 곁으로 다가가서 키스했다. 어머니는 말없이 딸을 꼭 껴안았다. 그러고는 의자에 앉아 라주미힌이 돌아오기를 불안한 마음으로 기다리면서, 역시 같은 기대 속에 혼자 생각에 잠겨 팔짱을 끼고 이리저리 방 안을 거니는 딸의 모습을 겁먹은 눈으로 지켜보았다. 생각에 잠긴 채 이렇게 이 구석에서 저 구석으로 오락가락하는 것이 아브도치야 로마노브나의 버릇이었다. 그리고 어머니는 이럴 때면 늘 딸의 사색을 방해하지 않으려고 조심했다.
술에 취한 김에 밑도 끝도 없이 라주미힌이 아브도치야 로마노브나에게 열렬한 애정을 일으킨 것은 물론 우스꽝스러운 일이었다. 그러나 실제로 아브도치야 로마노브나를 본 사람이라면, 특히 지금처럼 팔짱을 끼고 방 안을 거닐며 생각에 잠긴 애절한 모습을 본 사람이라면, 라주미힌의 평상시와 다른 심적 상태를 새삼스레 끄집어낼 필요도 없이 거의 대부분 용서해주었을 것이다. 아브도치야 로마노브나는 뛰어나게 아름다운 여자였다. 후리후리한 키에 놀랄 만큼 균형 잡힌 몸매였고, 강인하면서도 자신에 넘친 태도가 동작 하나하나에 드러났으며 그렇다고 그녀에게서 부드러움과 우아함을 결코 빼앗아버리지는 않았다. 그녀의 용모는 오빠를 닮았으나, 미인이라고 해도 좋을 정도였다. 머리칼은 오빠보다 좀 더 밝은 밤빛이었다. 눈은 거의 까만 편이고 긍지로 가득차 빛나고 있었으나, 동시에 때론 순간적으로 무척 선량한 표정을 띠었다. 얼굴빛은 창백했으나 병적인 창백함은 아니었다. 그 얼굴은 신선함과 건강에 넘쳐 빛나고 있었다. 입은 좀 작은 편이며, 선명하게 붉은 아랫입술은 턱과 함께 약간 앞으로 튀어나온 느낌이었다. 이것이 이 아름다운 얼굴에서 유일한 결점이었으나, 동시에 이 얼굴에 한 가지 특징, 특히 오만스러운 듯한 느낌을 자아냈다. 얼굴 표정으느 항상 쾌활하다기보다 차라리 착실한 편이고 사색적이었다. 그 대신 이 얼굴에는 웃음이 매우 잘 어울렸다. 즐겁고 젊고 티 없이 맑은 웃음은 그녀의 얼굴에 얼마나 잘 어울렸던가! 열렬하고, 개방적이고, 순진하고, 정직하고, 고대 러시아의 용사처럼 힘찬, 더구나 이러한 모습을 본 적 없는 취중의 라주미힌이 한눈에 반한 것도 무리는 아니었다. 더욱이 기회가 마치 일부러 꾸며놓은 듯이, 처음으로 두냐를 그에게 보이기 위해 오빠와 만나는 사랑과 기쁨의 아름다운 순간을 안겨준 것이다. 그는 또 오빠의 파렴치하고 무정한 호령에 답해서 그녀의 아랫 입술이 노여움에 떨리는 것을 보았다. 그리하여 그는 자기로서도 도저히 어쩔 수 없는 상태에 빠지고 말았던 것이다.
그러나 그가 취한 나머지 아까 층계에서 라스콜니코프의 안주인인 괴벽한 프라스코비야 바블로브나가 아브도치야 로마노브나뿐만 아니라 어머니인 풀헤리야 알렉산드로브나에 대해서까지 반드시 질투하리라고 지껄인 것은 어디까지나 사실 그대로 한 말이었다. 풀헤리야 알렉산드로브나는 이미 마흔셋인데도 그 얼굴에 여전히 아름다움이 그대로 남아 있었다. 더욱이 명랑한 기분, 청신한 인상, 정직하고 순진한 마음의 정열을 늙도록 잃지 않는 부인이면 누구나가 그렇듯이 그녀도 나이보다 훨씬 젊어 보였다. 겸해서 덧붙여 말해두지만, 이러한 모든 것을 잃지 않고 보존해가는 것만이 만년에 이르러서도 그 아름다움을 잃지 않는 유일한 방법이다. 머리칼은 이미 희끗희끗하고 숱이 줄어들기 시작하면서 잔주름이 벌써부터 눈가에 나타나고 뺨은 근심과 슬픔으로 야위어 까칠해지기는 했으나, 그래도 그 얼굴은 여전히 아름다웠다. 그것은 20년 후 두네치카의 얼굴을 그려놓은 초상화와도 같았다. 물론 이것은 아랫입술의 표정을 제외하고 하는 말인데, 그녀의 아랫입술은 딸처럼 앞으로 튀어나온 감이 없었다. 풀헤리야 알렉산드로브나는 지나치지 않을 정도로 감상적이고 겁 많은 온순한 성질의 여자였다. 그러나 그것도 어느 정도 한계가 있었다. 그녀는 웬만한 일은 남에게 양보도 할 줄 알고, 때로는 자기 신념에 어긋나는 일에도 동의할 줄 알았다. 그러나 항상 성실과 계율과 신념의 정해진 한계가 있어서 어떠한 사정도 그녀로 하여금 그것을 넘어서게 할 수는 없었다.
라주미힌이 가고 나서 꼭 20분이 지났을 때, 나지막하면서도 성급한 노크 소리가 두 번 울렸다. 라주미힌이 돌아온 것이다.
“들어가진 않겠습니다, 시간이 없어서!” 문이 열리자 그는 성급히 말했다. “곤히 잠들었습니다, 그야말로 정신없이 푹 잠들었어요. 제발 열 시간쯤 자주었으면 좋겠습니다만, 옆에는 나스타시야가 붙어 있습니다. 제가 갈 때까지 떠나지 말라고 일러두었죠. 이번에는 조시모프를 데리고 오겠습니다. 그 사람이 보고할 겁니다. 그러면 두 분께서도 편안히 주무실 수 있을 테죠. 몹시 피곤해 보이시는군요.........”이렇게 말하자 그는 두 사람의 곁을 떠나 복도를 달려갔다.
“어쩌면 저렇게도 재빠르고 .....믿음직스러운 청년일까!” 기쁨에 겨운 나머지 풀헤리야 알렉산드로브나는 이렇게 외쳤다.
“정말 좋은 사람인가 봐요!” 아브도치야 로마노브나는 다소 열띤 어조로 이렇게 대답하고, 또다시 방 안을 거닐기 시작했다.
그럭저럭 한 시간쯤 지났을 때, 복도에 발소리가 울리고 또다시 노크 소리가 들렸다. 두 여인은 이번엔 완전히 라주미힌의 약속을 믿고 기다리고 있었다. 과연 그는 조시모프를 데리고 왔다. 조시모프는 두말없이 술좌석을 버리고 라스콜니코프를 보러 가는 데 동의했지만, 두 여인에게 오는 것은 술 취한 라주미힌의 말을 신용할 수가 없어서 어느 정도 의심을 품은 채 마지못해 끌려왔다. 그러나 그의 자존심은 곧 누그러졌을 뿐만 아니라 오히려 환대를 받기까지 했다. 정말로 자기를 예언자처럼 학수고대하고 있었다는 사실을 알았기 때문이다. 그는 정확히 10분 동안 거기 앉아 있었으나, 그동안 풀헤리야 알렉산드로브나를 완전히 설복하고 안심시켰다. 그는 깊은 동정을 가지고 말했으나, 그 어조는 매우 조심스럽고 어색할 만큼 진지했다. 그것은 중대한 병상에 관한 상의를 받고 있는 스물일곱 살 청년 의사에게 딱 들어맞는 그러한 태도였다. 그는 본직 이외의 말은 한마디도 입 밖에 내지 않았고, 두 여성과 개인적으로 친한 관계를 맺고 싶어하는 기색도 전혀 나타내 보이지 않았다. 방에 들어설 때 아브도치야 로마노브나의 눈부신 미모를 본 그는 거기 있는 동안 되도록 그녀 쪽을 보지 않으려고 애썼고, 다만 풀헤리야 알렉산드로브나만을 상대로 말을 했다. 이러한 모든 것은 그의 마음에 더없는 만족을 주었다. 병자에 대해서는, 지금은 매우 만족스런 상태에 있다고 말했다. 그의 관찰에 따르면, 환자의 병은 최근 몇 개월 동안의 물질적 궁핍 외에도 몇 가지 정신적 원인이 수반되고 있다고 했다. ‘말하자면 여러 가지 복잡한 정신적, 물질적 영향이나 불안, 두려움, 신경의 피로, 어떤 종류의 관념....등등의 산물’이라는 것이었다. 특히 아브도치야 로마노브나가 유심히 귀 기울이는 모습을 보자, 조시모프는 이 주제를 좀 더 부연해서 설명했다. ‘다소 발광의 징후가 있는 것 같다고 들었습니다만’하는 풀헤리야 알렉산드로브나의 근심 어리고 겁먹은 듯한 질문에 대해 그는 침착하고도 밝은 웃음을 띠면서 자기 말이 다소 과장됐다고 대답했다. 물론 환자한테서는 일종의 고정관념과도 같은, 편집광적인 증세가 인정되는 것도 사실이지만, 그것은 자신이 지금 의학상 매우 흥미 깊은 이 방면에 각별한 주의를 기울이고 있었기 때문이며, 환자가 지금까지 죽 헛소리만 지껄이고 있었다는 점도 고려해야겠고....그리고 또 물론 가족의 도착이 환자에게 힘을 주고 위로를 주어 결국 좋은 영향을 줄 것이라는 점도 고려해야 한다고 했다. ‘어쨌든 새로운, 특수한 정신적 충격만 피할 수 있다면’하고 그는 의미 있게 덧붙였다. 그다음 그는 일어나서 정중하고 상냥하게 인사를 하고, 두 여인의 축복과 진심어린 감사와 애원을 받으면서, 게다가 자청해서 손을 내민 아브도치야 로마노브나와 악수까지 나눈 다음 자신의 방문과 그보다는 자기 자신에게 더없는 만족을 느끼면서 그 방을 나섰다.
“이야기는 내일 하시지요. 오늘 밤은 곧 주무십시오, 부탁입니다!” 조시모프와 함께 나가면서 라주미힌은 다짐을 두었다. “내일은 될 수 있는 대로 일찍 보고를 가지고 오겠습니다.”
“그런데 그 아브도치야 로마노브나는 정말 매혹적인 아가씨더군!” 두 사람이 밖으로 나왔을 때 조시모프는 침을 꿀꺽 삼키다시피 하며 말했다.
“매혹적이라고? 자네 매혹적이라고 말했지!” 라주미힌은 이렇게 짖어대듯이 말하고는 느닷없이 조시모프에게 달려들어 멱살을 움켜잡았다. “만약 자네가 조금이라도 능청스러운 짓을 하면....알겠지? 알겠지?” 상대방의 멱살을 잡아 흔들어 벽에 밀어붙이며 그는 외쳤다. “알겠지?”
“이거 봐, 주정뱅이 같으니!” 조시모프는 몸을 뒤틀었다. 그리고 상대방이 손을 놓자 한참 동안 그의 얼굴을 유심히 바라보더니, 갑자기 배를 움켜쥐고 웃어댔다. 라주미힌은 두 손을 축 늘어뜨리고서 침울하고 심각한 얼굴로 그 앞에 서 있었다.
“물론 나는 바보야”하고 비구름처럼 음울한 표정을 하며 그는 말했다. “하지만....자네도 마찬가지지.........”
“아니야, 나는 절대로 그렇지가 않아. 나는 그런 어리석은 공상은 하지 않네.”
두 사람은 말없이 걸었다. 그리고 라스콜니코프의 하숙 근처에 이르러서야 라무미힌은 비로소 몹시 걱정스러운 낯으로 침묵을 깨뜨렸다.
“내 말 들어”하고 그는 조시모프에게 말했다. “자네는 사랑스러운 청년이야. 그러나 자네에겐 여러 가지 더러운 성질 말꼬 또 한 가지, 바람기가 있어. 그것도 아주 추악한 편이지. 나는 알고 있어. 자네는 신경질적이고 의지가 박약한 바보야, 기분파야. 피둥피둥 살만 쪄 가지고 자기 자신을 억제할 줄 모른단 말이야. 바로 이게 추악하다는 거지. 바로 추악으로 이끄는 길이란 말이야. 자네는 너무 기분파라서, 사실 말이지, 그런 짓을 하면서 어떻게 훌륭하고 헌신적인 의사가 될 수 있는지 나는 자못 의심스러워. 깃털 이불 따위를 덮고 자고, 의사가 말이야, 그러다가 밤중에 환자 때문에 일어나서 간다.....그러나 3년만 지나면 환자 때문에 일어나는 일은 없을 거야....아니, 뭐, 그건 문제가 아니야. 문제는 이거지. 자네는 오늘 밤 안주인 방에서 자는 거야.....내가 겨우 그 여자를 설득했으니까! 나는 부엌에서 자겠네. 그야말로 자네에게는 그 여자와 가까워질 수 있는 절호의 기회야! 그런데 자네가 생각하는 그런 여자는 아니야! 그런 점은 조금도 없어......”
“나는 아무 생각도 없어.”
“여보게, 그 여자는 말이야, 부끄럼을 잘 타고, 말이 없고, 소극적이고, 게다가 놀랄 만큼 정조 관념이 굳은 여자야. 더욱이....애처로운 한숨을 쉬며 밀랍처럼 녹아버리는 여자지! 제발 부탁이니 나를 그 여자한테서 구해주게나! 정말 애교 덩어리 여잘세! 사례는 하지, 맹세코 하겠네!”
조시모프는 아까보다 더 큰 소리로 웃어댔다.
“아니! 무슨 말을 하는 거야! 내가 뭣 때문에 그 여자를!”
“괜찮아, 크게 염려할 건 없어. 무엇이든 하고 싶은 말을 지껄이기만 하면 되는 거야. 옆에 앉아서 지껄이고만 있으면 돼. 게다가 자네는 의사니까 어디 치료라도 해주게나. 단언하건대 후회하는 일은 없을 거야. 그 집에는 피아노가 있어. 자네도 알다시피 나도 조금은 칠 줄 알지. ’뜨거운 눈물을 흘리며‘라는 순 러시아 노래 하나쯤은 알지만 말이야....그 여자는 순수한 것을 좋아해. 그래서 노래로 시작했던 거지. 그런데 자네는 피아노라면 루빈슈타인과 다름없는 명수가 아니냐 말야.....단언하네, 후회하는 일은 없을 거야......”
“자네는 그 여자에게 무슨 약속이라도 한 모양이군? 정식 계약서라도 썼나? 결혼 약속이라도 한 모양이야........”
“천만에, 천만에, 그런 일은 절대로 없어. 그 여자는 절대로 그런 여자가 아니야. 그 여자에겐 체바로프라는 사내가........”
“그렇다면 차버리면 되잖아?”
“그렇게 간단히 버릴 수는 없어!”
“아니, 왜 안 된다는 거야?”
“아무튼 그렇게 할 수는 없어. 그것뿐이야! 거기엔 그럴 수 없는 어떤 인연이 있어.“
”그럼 왜 그 여자를 유혹했나?“
”아니, 나는 조금도 유혹하지 않았어. 어쩌면 나야말로 어리석은 성격 때문에 유혹을 당했는지도 모르지. 그러나 그 여자에게는 나나 자네나 조금도 다를 게 없어, 그저 누가 곁에 앉아서 한숨만 쉬어주면 되니까. 그러니 여보게....뭐라고 표현해야 좋을까....아, 참, 자네는 수학을 좋아했지, 그리고 지금도 하고 있겠지, 다 알고 있어....그러니 자네는 그 여자에게 적분 계산을 가르쳐 주는 거야. 정말이야, 결코 농담이 아니야, 심각한 이야기야. 그 여자에겐 아무래도 마찬가지니까. 그 여자는 자네를 보고 한숨을 짓겠지, 그런 식으로 1년쯤 계속 해보는 거야. 나도 이틀 동안이나 계속해서 프로인센 상원(上院)이야기를 한 적이 있네, 대체 그 여자하고 무슨 이야기를 할 수 있겠느냐 말이야? 그래도 그 여자는 한숨만 쉬면서 땀만 흘리고 있었어! 다만 사랑 이야기만은 꺼내지 말게, 지나칠 정도 내성적이니 말이야. 그저 곁을 떠날 수 없는 듯한 표정만 짓고 있게. 그것으로 충분해. 아무튼 기분이 좋아, 마치 제 집에 있는 것과 같으니까. 책을 읽거나, 앉거나, 눕거나, 무엇을 쓰거나 제멋대로니까.....키스쯤 할 수도 있겠지, 조심스럽게만 한다면........“
”도대체 그 여자가 나와 무슨 상관이야?“
”아니, 어떻게 말해야 알아들을 수 있겠나! 이것 봐, 자네 두 사람은 서로서로 꼭 어울린단 말이야! 나는 전에도 자네를 생각한 적이 있거든....결국 자네는 그렇게 될 인간이니까! 그러고 보면 마찬가지야 뭐야, 늦고 빠르다는 차이 뿐이지. 거기에는 여보게, 뭐랄까? 깃털 이불의 요소가 가득 차 있거든.....아니, 단순한 깃털 이불의 요소만이 아니야! 거기에는 사람을 끄는 요소가 다 갖춰져 있어. 그곳은 세계의 끝이고, 배의 닻이며, 조용한 항구, 지구의 배꼽이고, 지구를 떠받치고 있는 세 마리 물고기, 블린(팬케이크의 일종), 기름진 쿨레뱌키(고기, 생선, 캐비지 등이 든 만두의 일종), 저녁의 사모바르, 조용한 한숨, 따뜻한 여자의 옷, 활활 타오르는 페치카 위 침상, 그러한 것의 에센스야. 어때 말하자면 삶과 죽음이 동시에 있다고나 할까, 그야말로 일거양득이라는 거지! 아니, 너무 지껄인 것 같군, 이제 자야지! 나는 밤중에 가끔 일어나서 환자를 보러 가겠네. 그저 가보는 거지. 쓸데없는 줄은 알지만, 아무 일도 없을 걸세. 그러니 자네는 조금도 걱정하지 않아도 좋아. 혹시 원한다면 한 번쯤 가봐도 좋고. 그러나 헛소리를 하거나 열이 나거나 조금이라도 이상한 데가 있으면, 곧 나를 깨워주게. 뭐, 그럴 리는 없겠지만 말이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