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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雞林歷史紀行 원문보기 글쓴이: 월성
어제(2024.11.9.)
대학동기생과
오어사
기림사
감은사지
대왕암
장항리사지
불국사
금오산 옥룡암으로
가을 여행
다녀왔어요
매월당의 영당이 있는
기림사 국화축제는 다시 보지 못할
장관이었어요
대왕암 해조음도 넘 좋았고요
우현 고유섭 선생의
<<조선탑파의 연구>> 중
다보탑 설명을 확인하는
답사이기도 했어요.
1975년 국민학교 6학년 때 기차타고 수학여행 와서 처음 본 다보탑이지만
환갑이 지나고서야 우현 고유섭 선생의 연구를 읽고
다보탑의 조형 근거와 양식사학적 특징, 다보탑의 사상적 의미까지 알 수 있었다.
유홍준의 <<나의 문화유산답사기>>를 비롯하여
문화유산을 공부하고 해설하는 사람 중에
아무도 50년 동안 다보탑에 관해 의미있는 설명을 해주는 사람이 없었다.
일본 여행 다녀온 서연샘이 촬영한 사진으로 본 일본의 다보탑과 그 안내문에서
일본 문화재 용어로서 다보탑의 정의를 읽고서
불국사에만 다보탑이 있는 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알게 됐다.
깜짝 놀라서
우현 선생의 <<조선탑파의 연구>>를 다시 읽게 되었다.
이미, 80~90년 전에 우현 선생이 불국사 다보탑을 비롯하여 다보탑을 연구하였다는 사실이 경이롭다.
일본 지은사 다보탑, 서연 김연숙 촬영
下基四方
周匝欄楯
아래 기단의 4방에 난간을
두르고
圓起二重
方牙四出
원형 2층 탑신을 세우고
4방으로 모서리가 나오게 하며
上施盤蓋(上盤蓋)
그 위에 쟁반 모양 뚜껑을
올리며
長表輪相
(施長表相輪)
다시 그 위에
길게 상륜을
설치한다.
-마하승기율
탑 만드는 법
*윤상(輪相)은 '초전법'륜상'탑(初轉法輪相塔, Caitya)에서 유래하고,
상륜相輪)은 바퀴를 강조하여 '윤상'의 어순을 바꿔서 쓴 말이다.
윤상과 상륜의 상은 '모양 상(相)'자이다.
*초전법륜상탑(初轉法輪相塔, Caitya)은 부다가야에서 성도한 붓다가 사르나트(녹야원)에서 5비구에게 처음으로 4성제 8정도를 설법한 것을 표현한 탑으로 법륜(진리의 바퀴)을 기둥 위에 올린 탑으로 차이티야라고 한다.
쿠시나가르에서 다비하고 사리(유골)를 모신 탑은 Stupa스투파라고 한다.
탄생지 룸비니의 사라나무, 성도지 부다가야의 보리수, 초전법륜지 사르나트의 초전법륜상탑,
열반지 쿠시나가라의 사리를 모신 스투파, 불족석, 금강보좌 등이 인도불교사에서
본래는 무불상시대에 모두 붓다를 상징하는 일종의 탑이었다.
후대에 스투파만이 탑이 되었다.
간다라 지방을 경유하여 중국으로 불교가 전파되며 복발형 스투파는 중층 누각의 기단부를 가지게 된다.
복발형 스투파는 중층 누각 목탑의 상륜부가 되고, 중층 누각 기단부는 탑의 몸체가 된다.
스투파의 원형인 상륜부의 노반은 스투파의 기단부이고,
복발은 스투파의 몸체이고,
앙화부터 상륜(목탑은 9개, 석탑은 3~5개), 보개, 용차, 보주는 스투파의 찰주에 해당된다.
중층 누각의 토대는 목탑의 기단부가 되었다.
동아시아탑의 원형은 목탑이고, 목탑 상륜부(9륜)의 기단과 복발은 스투파에,
상륜(법륜-불타 상징)과 보개(법륜이 불타를 상징하므로 불타의 존귀함을 표현하는 양산)는
곧 인도불교 초기의 차이티야(초전법輪相탑)가 스투파에 결합된 것으로 보인다.
보개 위의 수연은 붓다 열반 뒤의 다비 불꽃인데 목탑의 화재를 기피하여 이름을 물안개(水煙)로 명명했다.
수연 위의 용차(龍車)는 다비 뒤에 나온 사리(유골)를 갠지스강 유역의 8개 도시국가가 8등분하여 모셔간 일을 상징하고, 보주는 사리(유골)를 모신 8대 근본 스투파를 상징하는 것으로 보인다.
-김희준
다보탑 4방 계단의 좌우 기둥(親柱) 뒷면에 난간의 가로 부재를 꽂은 구멍과 양각된 동자주(童子柱)가 있다.
경주 토함산의 불국사는 원래 화엄불국사로, 혹칭 화엄법류사(華嚴法流寺)라고도 하였다 한다(<<불국사고금창기>>). 즉 신라 화엄종찰의 하나로서 특히 그 가람 경영에 있어 평면 배치의 만다라적 전개라든지 입체 취적(聚積)에 있어 환상적 가구 결축은 한갓 해동 계림의 명찰일뿐더러 동양의 명가람이요 우내(宇內-세계)의 화엄정사(華嚴精舍)라 아니할 수 없다. 지금 대웅금당보전(大雄金堂寶殿) 앞에 동서로 석탑 쌍기가 있으니, 서쪽에 있는 삼층 석탑이 즉 이미 서술한 석가탑 내지 무영탑이란 것이요, 동에 있는 것이 다보여래상주증명(多寶如來常住證明)의 탑 즉 다보탑이란 것이다.
<<묘법연화경>> <견보탑품(見寶塔品)> (중략) 있는 바와 같이 ‘법화경 유설처(有說處)’면 다보불의 탑묘(塔廟)가 그것을 들으며 그것이 곧 진리임을 증명하기 위하여 용현(湧現-솟아남)한다는 데서 ‘다보불상주증명(多寶佛常住證明)’의 보탑이라 하는 바인데, 이것은 그 명칭에 대한 유래 설명이요, <<법화경>>에는 다시 <견보탑품> 중에 (중략) 다보탑 안에 이미 석가모니불이 분좌(分座 자리를 나누어 앉음)하여 있느니만큼 따로이 석가탑이란 것이 필요하지 않을 성싶은데, 이곳에 석가탑이 다시 또 경영되어 있는 것은 석가탑을 석가여래상주(常住)설법의 보소(寶所-보배로운 곳)라 해석하느니 만큼, 시간적으로 말하면 저 다보탑이 용현되기 전, 즉 석가설법이 선행되는 데는 의미에서 경영되어 있는 것 같다.(중략)
다보탑의 유래는 위와 같은 것이라 하더라도 다보탑의 저러한 특별한 양식에 관하여는 그러한 양식이 아니면 아니 될 하등의 규정도 <<법화경>>에는 없는 것이다. 그러므로 <약왕(藥王)보살본사(本事)품> 같은 데 보이는 약왕보살 소비공양탑(燒臂供養塔)의 설화에 의하여 구례 화엄사의 사자좌삼층석탑(獅子座三層石塔), 평창 월정사 팔각구층석탑, 강릉 신복사지(信福寺址) 삼층석탑 등과 같이 전혀 별개의 이양(異樣) 탑파들로서도 그 앞에 약왕보살을 앉혀 그것이 다보탑임을 현시한 예도 있는 것이다.
혹은 중국의 용문(龍門)·대동(大同)·운강(雲崗)·돈황(敦煌) 등 여러 곳의 석굴 벽에는 흔히 보는 보통 방형의 층탑 속에 이불병좌(二佛竝坐)의 형상을 조각하여 그것이 다보·석가 양불병좌(兩佛竝坐)의 뜻임을 현시함으로써 다보탑임을 보인 예도 있는 것이다. 이렇게 보면 다보탑의 조성에 있어 양식적으로 하등의 규정이 없었던 듯하다.
그렇다면 어떠한 양식을 표현하든지 관계하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어떠한 양식이 나오든지 간에 관계하지는 않지만 한 양식이 나올 때면 그곳에 반드시 어느 턱거리(근거)가 있어야 하는 것이다. 전연 독립된 무에서 유로의 창안이란 인간세계에는 없는 것이다. 그렇다면 지금 우리가 이 경주 불국사에서 보는 다보탑의 양식은 어디다 그 턱거리를 잡고 있는 것일까. 그 외양은 실로 불교권 내 여러 나라에서 볼 수 없는 특출한 외양을 갖고 있다. 그러나 그곳에도 어떠한 턱거리는 있었을 것이다. 그러면 그 턱거리는 무엇이었을까. 이곳에 필자는 필자 자신의 의견이 있는 바이다.
우선 외양에 있어 복잡한 듯한 이 불국사 다보탑을 요소적인 근본 형태로 환원시킨다면, 기단 위에 방각(方閣)이 있고, 방각 위에 팔각원형의 보식부(寶飾部)가 있고, 그 위에 보개상륜(寶蓋相輪)이 있는 형식이다.
이 중에서 팔각은 곧 원형을 뜻하는 것임으로 해서 결국은 방각 위에 원형탑이 있고 그 위에 상륜이 있는 품이 된다. 이러한 의사의 공통된 양식을 찾자면 우리는 지금 조선 내에서는 열거할 수 없고, 일본 시가현 이시야마데라(石山寺), 와카야마현 고야산(高野山) 곤고산마이인(金剛三昧院)의 다보탑 등을 들 수 있다. (중략)
후지와라 기이치(藤原義一), 아마누마 준이치(天沼俊一) 공학박사 등이 논한 바 있고, 그들은 그 원형 출처를 인도 붓다가야 등의 복발식 대탑으로 돌렸다.(중략) 동양의 불탑은 그것이 불탑인 이상 무엇이고 간에 그 근원을 소구(遡究-거슬러 올라가면)한다면 인도의 복발 형식 원탑(原塔)에 회귀되지 아니할 것이 없을 것이다. (중략)
어찌하여 어디로부터 그러한 수이상(殊異相-다른 모양)이 나왔는가 함으로 해답하지 않으면 아니 된다. 이때 필자는 필자 자신의 의사껏, 이 양식이 나온 동기는 저 <<마하승기율>>에 나타난 조탑파설에 귀인시킬 수 있는 것이 아닐까 생각하는 바이다. <<마하승기율>>에 이르기를
下基四方
周匝欄楯
아래 기단의 4방에 난간을
두르고
圓起二重
方牙四出
원형 2층 탑신을 세우고
4방으로 모서리가 나오게 하며
上施盤蓋(上盤蓋)
그 위에 쟁반 모양 뚜껑을
올리며
長表輪相
(施長表相輪)
다시 그 위에
길게 윤상(輪相, 상륜相輪)을
설치한다.
-마하승기율
탑 만드는 법(作塔法)
불국사 다보탑을 해명하기 위한 특제의 구(句)인 듯도 하여 그 형식을 설명함에 실로 여온(남김) 없는 것이라 하겠다. 보계(寶階-보배 계단)가 사출(四出)한 방단 위에 난순의 흔적이 명료히 잔존해 있으니 이 곧 “하기사방(下基四方, 기단의 사방에 난간을 설치하고)”이며, 방각(方閣) 사주(四柱)의 옥첨(처마)이 표표(飄飄-날렵)한데 그 위의 방형 난간이 있어 그 속에 다시 팔각형 난순(난간)을 장각(長脚-긴 다리) 기대가 떠받들고 있는 죽절형(竹節形-대나무 마디 모양) 위주(圍柱-둘러싼 기둥) 사이에 팔각원당형(팔각형 둥근 집 모양)의 탑신이 있으니 이 곧 제1층의 원기(圓起)요,
이 위에 연화보대(蓮華寶臺) 위에 다시 팔각원형의 탑신이 있으니 이 곧 제2층의 ‘원기’와 양자 합하여 ‘원기이중’에 해합하는 것이며, 초층의 방각은 결국 초층 원기에 부상(副廂-부차적인 건물)으로 이것이 이른바 ‘방아사출(方牙四出)이며,
2중의 원기 위에 팔각형 반개가 있음은 소위 ’상반개(上盤蓋)‘란 것이며, 그 위에 노반 복발의 구륜(九輪-목탑엔 상륜이 9개이므로, 9륜은 곧 상륜(부)를 말한다. 다보탑엔 3개의 상륜이 있다.)이 장표(長表)되어 있으니 이것이 이른바 “시장표상륜(施長表相輪)”이라. <<승기율>>의 작탑 규범은 소호(小毫-작은 털)도 어긋남이 없다.
<<법화경>> 자체에는 조탑 양식이 규정되어 있지 않다. 그러므로 경설(經說)의 해석 여하에 따라 탑 속 이불(二佛-석가 다보 2여래)의 병좌(나란히 앉음) 형식만 가지고도 다보탑을 상징시킬 수 있었으며
혹은 또 약왕보살의 소비공양상(燒臂供養相)으로써 다보탑을 상징할 수도 있었지만,
그렇지만 동방무량천만억아승기보정세계(東方無量千萬億阿僧祇寶淨世界)의 다보불상주증명의 보탑을(이 뜻에서 다보탑을 또한 동편에 앉힌 듯) 표현하기 위하여는 재래의 단순한 방각(方閣-네모난 전각) 층루의 전통적 양식을 벗어나서 저 <<승기율>>에 규정된 양식에 좇아 세부에 자유로운 환상을 활약시키켜서 조성한 것이 곧 이 불국사 다보탑이요,
저 일본의 여러 다보탑의 양식도 이러한 데 그 발족이 있었던 것이요, 겸하여 그 양식적 원류도 중국에 있었을 법하되 지금 중국의 유구에선 그 예를 찾을 수 없고 오직 계림(신라)과 부상(扶桑-일본) 두 곳에만 남은 듯하다. 그러나 불국사의 이 다보탑같이 환상적이요 기교적인 것은 다시없는 모양이다.
(중략)
혹시 부분의 유사를 찾는다면 팔각원형이 후대에 유행된 팔각원당식 묘탑(탑)과도 통함이 있고, 팔각원형의 층탑에도 통하는 바 있다. (중략) 우주(隅柱-모퉁이 기둥)의 좌두(坐頭) 형식에서, 옥개석의 광활한 형식에서, 옥판석(지붕의 돌판)의 엇맞춤 수법에서, 후에 말할 옥산 정혜사지 13층탑과 함께 백제의 유구(遺構-유적)인 정림사지탑의 조형 의사와 일맥 통하는 점이 없지도 않으니, 즉 백제의 여운이 그윽이 숨어 있다고 할 만한 것이다. 백제의 복멸(멸망)이 백 년 미급(未及-미치지 못함)이라 이곳 탑파 조성에 무영(無影) 애화(哀話-슬픈 이야기)가 남아 있음도(비록 석가탑에 대해서이지만), 당장(唐匠-당나라 장인)에 얽힌 설화라 함보다 차라리 백제 유장(遺匠-남은 장인)이라도 남아 있어서 그곳에 애정(哀情)이 남겨진 것이 아닌가.
부론1
본시 이 탑 층계 및 기단에 난순(난간)이 있었던 것은 현재 잔존된 난간주석(欄干柱石)에서도 알 수 있는 점이며, 또 극락전 앞에 옮겨져 있는 석사자가 이 탑에 있던 것으로서 본시 네 기였으나 모두 도실(도둑맞아 잃음)되고 한 좌만이 남아 있다 한다. 석탑 기단 네 모퉁이에 석사자가 놓였을 것은 분황사탑, 의성군 단촌면 관덕동 사평(寺坪) 삼층탑, 구례 화엄사 사자좌삼층탑, 광양군 옥룡면 중흥사지(中興寺址) 삼층석탑 등의 예에서도 짐작되는 바이다.
부론2
<<고고학>> 제11권 제3호(1940년 3월)에 요네다 미요지(米田美代治)의 <불국사 다보탑의 비례구성에 대하여(佛國寺多寶塔の比例構成に就いて)>라는 일문(一文)이 있다.
(중략)
이상은 탑파 내지 가람의 구성에 있어서 산수적 엄정률(嚴整律)이 지배하고 있는, 따라서 그곳에 고전적 미를 느끼는 이유를 설명한 재미있는 연구이나 그러면 어찌하여 이러한 분수율을 사용하게 되었는가 하는 근본 동기에 대한 이유 설명은 없다. 이들의 연구 방법도 결국에 이러한 근본 문제까지 이르지 아니하면 결국 그것은 우연 대 우연의 설명에 불과할 것이다. 다시 말하면 유희에만 떨어지기 쉬운 것이니 이 문제를 어떻게 전개 시키는가는 앞날의 기대처일까 한다.
-고유섭, <<조선탑파의 연구>>(상), p.140~150
이 탑은 높은 일층의 방립(方立) 기단을 갖고(地覆 폭 14척 4촌), 그 사방에는 10보단(步段-10계단)의 석계(石階)를 가지고 있다. 석계의 양끝에는 오늘 최초의 구란(句欄-난간) 친주(親柱-난간의 큰 기둥)만을 남기고 있으나, 그 후면에는 동자주(童子柱-난간의 작은 기둥)의 모습을 양각하고 가목(架木-걸치는 부재)을 끼웠던 원공(圓孔)의 흔적을 남기고 있다. 무릇 초층 방각(方閣) 정부(頂部)에 현존하는 방형 구란과 같은 양식의 구란이 방단(方壇) 위까지 마련되어 있었던 것을 알 수 있다.
그리고 이 방단 위에는 다시 네 귀에 석제 사자가 있었다고 전칭되는 바, 그 하나라고 불리는 것이 지금 극락전 앞에 보존되어 있다. 조풍(彫風)이 성당(盛唐)의 기상을 지니고 있지만 탑의 수명(秀明)함에 비할 때 다소 투박한 맛이 눈에 띈다. 더욱이 형상이 완전하지 못하여 구각(口角)에 손상이 심한 것이 애석한 일이라 하겠다.
이 방단 위에 일단의 지대석(地臺石)이 놓이고 중앙에는 방주형(方柱形-네모 기둥 모양) 찰주(擦柱-탑의 중심 기둥)가 섰고, 네 모퉁이에 ‘ㄴ’자형 기둥이 있어서 주두(柱頭)에는 십자형으로 교착한 반원형의 주두를 얹고, 위에 정자형(井字形)으로 조합된 미석(楣石)이 놓여 편평아순(扁平雅淳평평하고 아담하고 순박한)한 방개(方蓋-네모 덮개)를 받들었다.
방개 위에는 아름다운 방란(方欄-네모 난간)이 있어서 그 형식 수법이 모두 일본 나라조(奈良朝, 710-794)의 난순(欄楯-난간)에서 흔히 보는 것과 공통하며, 이 방란 안에 팔각원주형의 탑신이 삼층으로 쌓여 돌려지고, 각층을 따라 아름다운 두터움과 조화된 폭의 감축을 보인다. 그리고 이 탑신 바깥 둘레에는 각층 변화의 묘를 다한 난순이 있다.
곧 아래부터 제1층 탑신의 외위(外圍)에는 발형(撥形-아쟁이나 해금 같은 악기를 타는 활 모양) 난각(欄脚 난간 다리)을 종반분(縱半分-세로로 반 나누어)으로 접은 것이 있어서 위의 팔각원형의 난순을 받는다. 이 난순은 에보시(烏帽子-아래는 4각이고 위는 반원형인 일본의 전통 모자)형의 친주(親柱) 아래에 복예단판(複蘂單瓣-두 장이 나란히 들은 하나의 꽃잎 복판단엽)의 모습을 한 화엽판각(花葉瓣脚 꽃잎다리)이 있고, 원형의 횡가목(橫架木-가로로 걸치는 부분)은 위에, 장방형의 회란목(廻欄木-돌리는 난간 석재)은 아래에 있다. 그리고 이 팔각 난순 안에는 다시 죽절형(竹節形-대나무 마디 모양)의 원주각(圓柱脚 둥근 기둥의 다리)이 여덟 개 있어서 상층의 연형(蓮形) 반대(盤臺-쟁반 모양 대)의 상각(床脚-상다리)을 이루고 있다. 이것이 제2층의 탑신부이다.
연화문 반대에는 복예단판(복판)의 꽃잎을 돌리기를 열여섯, 위에는 일단의 조출연식(彫出緣飾 테두리 장식을 새김)을 세우고 그 안에 도립이형(倒立履形거꾸로 선 신발 모양)의 지주 8개를 돌려서, 제3층째의 탑신을 둘러싸면서 동시에 팔각원형의 보개(寶蓋-보배로운 뚜껑)를 받는다.
이 보개 또한 경상우미(輕爽優美-날렵하고 우아함)하다. 처마 안쪽에는 넓고 얇은 홈이 파져 있고, 상부 노반(露盤)의 접부에(接部 접속 부위)에는 소형의 복예단판의 연화를 양각하였다.
노반 또한 팔각 위에 편구형(타원형 구)의 복발(覆鉢)이 있고, 중복(中腹 배 가운데)인 곳에 복선(複線)의 결뉴(結紐 매듭) 횡선과 8개의 결화(結花 꽃 매듭)를 부각하고 그 위 앙화의 연접부에도 연판을 부각하였다. 앙화는 풍려한 팔엽식식(八葉餝飾 8잎 장식)을 팔릉(八稜-8각)에다 세우고 층층 변화있는 상륜 삼층을 받게 하였다.
그 윤형(輪形 바퀴모양)은 물론 그것들을 관통한 찰주도 층층이 돌을 달리하고 형식을 다르게 하였다. 그리고 8개 식식(餝飾- 장식)이 세워진 작은 보개(寶蓋, 보배로운 산개傘蓋, 산개는 양산)를 받게 하였고, 보주 한 개를 최종에 남기고 있는데 아마도 원래는 또 하나의 주(珠-구슬)가 있었을 것이다. 그리하여 오늘날의 총 높이 삼십사 척 삼 촌 삼 푼이나 된다.
견치(堅緻 견고하고 치밀)한 화강암석으로서 백석수려(白晳秀麗 희고 밝고 빼어나고 아름다움)한 묘형(妙形-오묘한 모양)을 이루었으니, 그 묘공(妙工 오묘한 장인)의 신기함에 감탄하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 더욱이 단순한 신공(神工)의 묘작(妙作)에 그칠 뿐 아니라, 이 탑 구성에는 법화 묘제(妙諦-오묘한 진리)의 오의(奧義-깊은 뜻)에 참여한 일대 지식(知識)의 참획(參劃 참여하고 기획함)이 있었을 것을 느끼게 함이 있다.
돌이켜 이 탑의 변화를 보건대 제1층째의 팔각형 탑신은 제2층째의 팔각 원신(圓身 둥근 몸)을 둘러싼 팔각원형의 난순(난간)의 각부(脚部-다리 부위) 속에 숨겨짐으로써 그 탑신으로서의 의미가 일단 공(空)으로 돌려진 것으로 생각된다. 그러나 이 탑신이란 본시 그 아래의 방각(方閣 네모 전각) 구란(句欄 난간) 위에 얹어진 것임을 생각할진대 본시 그 출발은 묘유적(妙有的) 존재로서 세워진 것이었다.
그것이 제2층째의 탑신 구성에 있어서 비유적(非有的) 존재로 돌려졌지만 제2층째의 팔각 탑신도 팔각원형의 구란(난간) 중에 보유되어 있는 이상, 또한 묘유적 존재로서 세워지면서 다시 제3층째의 탑신을 받는 연화 반대(盤臺)의 상각(床脚) 안에 숨겨짐으로써 다시 비유적 존재로 귀(歸)하고 있다.
그리고 제3층째의 팔각 탑신도 연화 반대 위에 얹히고 있는 한 본유적(本有的) 존재였으나, 팔각 보개(寶蓋)의 지주(支柱) 속에 숨겨짐으로 하여 이것 또한 비유적(非有的) 존재로 되어 있다.
내려와서 초층의 방각(方閣)을 본다면 방립(方立) 기단 위의 난순 안에 있고 찰주를 갖는다. 무릇, 또한 일급 탑체(塔體)인 의미를 갖는다. 그렇지만 전체로 이 탑의 주체적 본원 형태를 팔각원형 탑신에 있다고 본다면 이 방각 일층은 또한 가상적 일층에 불과하다.
다시 입장을 바꾸어 난순에 싸인 것을 탑의 주체로 본다면 방원(方圓-네모와 원) 호각(互角)의 삼급탑(三級塔-삼층탑)이며, 반개(盤蓋)가 위에 있다는 사실을 중요시한다면 4층의 탑이라고도 말할 수 있다.
더욱이 층층 상각(廂閣)에 의하여 조정된 과정에서 본다면 무급(층이 없는)의 탑이며, 층층 조정된 경과에서 본다면 유급(층이 있는)의 탑이기도 하다. 평면에서 이것을 본다면 방원투합(方圓投合-네모와 원이 합해진)의 상징체요, 입체에서 이를 본다면 공유묘합(空有妙合)의 상징체이다. 평면의 상(相)은 원돈구유(圓頓具有-원과 네모를 갖춤, 원은 원교-화엄종, 네모는 돈교-선종)의 상이고 입체의 상은 회삼귀일(會三歸一 셋을 모아 하나로 돌아감. 3승1불-성문, 연각, 보살 3승이 한 부처로 통합됨)의 상이다.
(중략)
일반 다보탑이란 것과 의표(의도된 외모)를 달리하고 양상을 달리하는 한 묘상탑(妙相塔)을 만들어냈다는 것은, 실로 그 획책에 있어서 법화의 오제(奧諦-깊은 진리)에 철(徹-꿰뚫은)한 일대 선지식(善知識)의 지도에 크게 힘입었다고 해석하지 않을 수 없다. 전하기를, 당시의 대상(大相) 김대성(金大城)이 천보 10년(751) 이 사원을 수건(修建)하였다고 한다. 김대성의 정체는 과연 어떠한 것이었을까. 단순히 대상에 그쳤던 것이라고 하면 다시 그 속에 선지식의 별존(別存)을 생각하지 않으면 안 될 것이며, 나아가 따로 묘공(妙工)의 별존재를 생각하지 않으면 아니 된다.
-고유섭, <<조선탑파의 연구(하)>>, p.159~16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