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작시 | 이종수
힘 외 1
이 세상이
총 맞아 죽고
폭탄 맞아 죽고
진짜 맞아 죽고
찔려 죽을 수밖에 없는 세상에서
약자는 약자 위에
강자 아래 눕지 말아야 하고
약자는 더 이상 약자가 아니라, 힘 있는 자이며
칼이나 총, 폭탄. 주먹에서도 살아남을 수 있다는 있을 수 없지만
가공할 만한 폭력 앞에서도 초개와 같은 타자와의 대화,
진정 나일 수 있는 힘으로 자유로워야 한다.
우리는 약자는 결국 힘 있고자 하는,
자유롭고자 하는 이들은 적들을 몰라도 너무 몰라서 노예인 줄도 모르고
힘 닳도록 소진하면서 빛을 찾고
한 푼의 돈과 희망을 맞바꾼다
손에 쥐는 건 아무것도 없으면서
죽음보다 더 까만 밤을 보낸다
죽은 뒤를 모르면서
총과 칼과 폭탄으로, 돈으로 손가락으로 죽이면서 잊고자 한다
부디 삼가 명복은 없다
살아서 보여라
혼자 살아남을 수 있는 인간임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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속것들
어머니는 내일 육거리시장에 가서 사자고 약속해 놓고 오늘 시장에 가서 깨 사시다가 들켰다
내일 일이 생겨 큰딸이 못 간다고 해서 내가 모시고 가기로 했는데 그렇게 다정하게 말씀드렸거늘 큰딸이 점심이나 먹으려고 전화하니 시장에서 가방 메고 계시다가 붙잡혀 오셨다 걱정이 되어 가만히 있을 수가 있어야지 그럼 내일 가기로 약속해놓은 오빠는 어쩌라고 얼마나 속 터지것냐고 김장이 무슨 걱정이라고 걱정해서 걱정이 없어지면 걱정할 것 없다는 말도 있잖아요나도 뿔이 나서 내일 가기로 해놓고 약속을 깨시면 어떻게 하느냐고 볼멘소리하고 그래도 미리 해놓으면 너네들 덜 걱정할까봐 속 터진다 약속이 깨지면 없던 오해도 생겨요 조금만 참으시고 기다리셔요 그래 다시 어머니 모시고 시장에 왔다 양파, 대파, 쪽파, 갓, 미나리에 무까지 사는데 어머니는 육거리 시장 사방팔방으로 흩어진 마음 살 게 막 생긴다 젓국도 사야 하고 국물 낼 것도 사야 하고 국물은 북어 대가리, 아니 이번에는 황태포에 멸치 밴댕이도 살까 밴댕이는 무슨, 밴댕이가 들어가야 시원하지요 시장 아주머니도 거든다 내가 장사하지만 괜한 것 안 권한다고 그래 밴댕이도 벌써 한 짐인데 어머니 눈길은 더 좋은 대파에, 쪽파에, 미나리에 가 계시다 불퉁불퉁 속것이 끓어오른다 그러고 보니 김장 배춧속에 들어가는 것들이 다 맵고 아리고 들큼한 속것들이다 고추 먹고 맴맴 달래 먹고 맴맴 아버지 담배맛처럼 쓰리고 아린 속것들이 김장을 만들고 땅속, 아니 냉장고에서 숨 쉬며 먹잣것이 된다 내려놓고 보니 속것들이 나를 만드는 것임을 어머니 걱정을 조금은 알 것 같다 어머니 또 수레 끌고 마트에 가신다 또 뭐가 빠졌다고, 속것들이 그렇다 빠진 것 없이 들어가야 맛이 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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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종수
1998년 조선일보 신춘문예로 등단했다. 엽서시동인. 시집 『자작나무 눈처럼』, 『달함지』, 『안녕 나의 별』, 『빗소리 듣기 모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