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즘도 미하엘 길렌(Michael Gielen)의 열풍은 아직도 그 꼬리가 남아 말러와 브룩크너로 이어지는 것 같습니다. 첼리비다케와 반트가 떠나버린 요즘 80의 노익장을 아직도 과시하며 포디움에서 활약하고 있는 20세기의 지휘자 가운데 우리들에게 정체가 정확히 알려지지않은 한 사람을 오늘 만나려고 합니다.
제가 아직 청소년기일 때 집에는 성*사에서 만든 ‘세계명곡전집’ 이라는 8권의 LP 전집이 있었습니다. 속에 수록된 음악들은 모두 모노럴 녹음이었으며, 훗날 알게 되었지만 대부분 VOX나 INTERCORD 같은 유럽쪽의 연주자들이 연주한 것들로 채워져 있었지요.
개중에는 가스파르 카사도와 이브리 기틀리스, 수잔느 로텐바우허, 펠리시아 블루멘탈 같은 독주자들의 이름이 보이고 요넬 페를레아, 딘 딕슨 같은 지휘자들도 있었는데, 단연 가장 많이 보이는 이름은 미하엘 길렌과 하인리히 호를라이저(Heinrich Horleiser)였습니다.
이 음반은 제가 결혼하고서도 가지고 있다가 방출시켜 버렸는데, 이름만은 뚜렷이 기억하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미하엘 길렌의 지휘음반은 거의 대부분이 협주곡 반주였으며 그러하기에 그냥 어느 정도 독주자를 잘 받쳐주는, 그저 그런 지휘자로만 인식하고 있었습니다.
한동안 실제 음악 활동과 함께 러시아와 동구권의 음악에 미쳐서 저는 잘 모르고 있었지만, 1990년대 중반 이후 갑자기 미하엘 길렌의 열풍이 일었다고 하였습니다. 얼핏 그런 이야기를 듣긴 했었지만 저의 마음속에 있는 ‘최고’ 지휘자의 명단에서는 빠진 사람이었기 때문에 별반 신경도 안쓰고 있었습니다. 더욱이 방황하던 대학 초년 시절 말러에 중독되었다가 겨우 빠져나와 말러와 브룩크너, 바그너는 뒤도 돌아보지 않고 살고 있었기에 더더욱 그의 존재감은 저에게는 전혀 없었던 거죠...
언젠가부터 다시 말러와 브룩크너(아직 바그너는 안듣고 삽니다...^^;)를 듣기 시작하면서 부딪치지 않을 수 없는 이름들이 다시 등장하였으니, 그것은 귄터 반트, 칼 슈리히트, 그리고 미하엘 길렌이었습니다. 길렌이라니...? 그저 그랬던 협주곡 반주 지휘자...?
그래서 도대체 왜 미하엘 길렌인지...한 번 그에 대해 다시 알아보기로 하였습니다. 그리고 너무나도 상상과는 다른 한 사람의 지휘자를 새롭게 대면하게 되었던 것입니다.
제가 가진 음악 인명부에 보면 이렇게 설명되어져 있습니다.
*** 미하엘 길렌(Michael Gielen)
지휘자, 독일 출신. 1927년 7월 20일 드레스덴 출생. 독일태생이면서 어찌된 일인지 음악교육은 아르헨티나의 부에노스 아이레스에서 받았다. 음악이론, 작곡법, 피아노를 그곳에서 배웠고 쉔베르크의 전 피아노 작품을 그곳에서 연주했다.
그뒤 콜롱 극장의 지휘자가 되었고 1951년부터 빈으로 건너가 국립 가극장에서 지휘하는 한편 빈 방송국과 콘체르트하우스에서 현대음악 소개를 담당했다. 그는 작곡도 하는데 ‘바하 코랄에 의한 실내 변주곡’ ‘실내 칸타타’ ‘피아노와 관현악을 위한 콘체르탄테’ 등을 썼다.
너무 간단합니다...그의 어떤 면모를 알기에는 턱없이 부족한 자료였지요. 그랬는데, 그를 자세히 알게 된 것은 뜻밖에도 위에 간단하게 설명된 ‘현대음악 소개자’란 것을 근거로 자료를 찾던 중 그의 일대기가 곳곳에 소개되어 있음을 알게 되었습니다.
미하엘 길렌의 아버지 요세프는 오페라 극장 무대감독이었고, 오스트리아 집안 출신이었지만 그가 태어난 곳은 독일의 드레스덴이었습니다. 그가 성장하여 음악 교육을 받을 만한 나이가 되었을 때는 1940년대 - 나치의 세력이 독일을 뒤덮기 시작할 때였습니다. 게다가 전운마저 감돌기 시작했지요...
어머니의 고향이 바로 아르헨티나였기에 그들 가족은 나치스를 피하여 부에노스 아이레스로 보내져서 음악 교육을 받게 되었습니다. 그의 특이한 교육이력이 이렇게 시작되었던 것입니다.
에르빈 로이히터(Erwin Leuchter) 교수에게서 배운 그는 현대음악쪽에 많은 관심을 가지게 되었고, 작곡도 하게 되었습니다. 1949년에는 아르놀트 쉔베르크가 남긴 피아노 전곡을 연주하기도 하였다고 전해집니다.
그러다가 전쟁이 끝난 후 그는 1950년에 빈으로 와서 빈의 국립 가극장(Wiener Staatsoper)을 처음 지휘하게 되었습니다. 오페라도 물론 다루었지만 그는 이 관현악단과 비엔나 심포니 등을 지휘하여 현대음악을 많이 연주하고 소개하는 일을 꾸준히 하기 시작하였습니다. 그래서 헬무트 라헨만(Helmut Lachenmann:Fassade und Klangschatten), 죄르지 리게티(György Ligeti:Requiem), 칼하인츠 슈톡하우젠(Karlheinz Stockhausen:Carré), 베른트 알로이스 침머만(Bernd Alois Zimmermann:어느 젊은 시인을 위한 진혼곡)의 곡들을 초연하였습니다. 이러한 면모가 우리들에게는 거의 알려지지 않았던 셈이죠...
그가 거친 지휘자 자리들은 다음과 같습니다...
# 빈 국립 가극장(1950 - 1960)
# 스웨덴 왕립 가극장(1960 - 1965)
# 쾰른 오페라 극장, 네덜란드 오페라 극장, 프랑크푸르트 오페라 극장
# 벨기에 국립 관현악단(1969 - 1973)
# 신시내티 교향악단(1980 - 1986)
# 남서독일 방송 교향악단(1986 - 1999)
남서독일 방송교향악단(Südwestdeutsche Rundfunks Symphonie-orchester:SWR)은 바덴-바덴과 프라이부르크 두 곳에 있는데, 길렌이 지휘를 맡은 곳은 독일의 전통있는 온천 휴양지인 바덴-바덴의 관현악단이었습니다. 여기는 문자 그대로 현대음악의 메카로서 노노, 불레즈, 리게티, 루토스와프스키, 마데르나 같은 현대적/전위적 작곡가들과 연주자들이 살다시피 하였던 곳이기도 합니다. 1980년대 미국에서 돌아온 그가 택한 곳이 여기란 것도 많은 것을 시사해주고 있지요...
그런데 말러와 브룩크너, 그리고 베토벤이라니...
그런데 얼마 전에 그가 지휘한 베토벤의 교향곡 2,3번 LP가 우연히도 입수되었습니다. 1966년 발매된 것들인데, 중고음반 가게에서 다른 분들이 던져놓은 음반 무더기에서 찾아내게 된 것이어습니다. 하지만 아직은 길렌에 대한 호기심이 커지지 않았을 때라 그냥 뇌두고 있었는데, 그에 대한 자료들을 죽 읽어보고서 마침내 그가 그저 그런 지휘자는 결코 아니란 사실을 알게 되면서 또 한 장의 베토벤 교향곡 3번이 제 손에 들어왔습니다.
이것은 1980년부터 그가 맡았던 신시내티 교향악단을 지휘하여 녹음한 디지털 LP인데, 첼리비다케처럼 극도로 녹음을 싫어하는 그가 베토벤의 ‘영웅’을 두 번이나 녹음했다는 그 자체가 저에게는 일단 희안한 사실로 다가왔습니다. 그래서 두 음반을 비교해서 들어보기로 하였습니다.
먼저, 1966년 발매 음반입니다...
이것은 길렌이 비엔나 국립 가극장 관현악단을 지휘한 음반입니다. 각 악장마다의 시간이 이렇게 나와있네요.
# 1악장 : 14분 20초
# 2악장 : 15분 15초
# 3악장 : 5분 55초
# 4악장 : 11분 00초
음반회사는 미국의 오디오 피델리티 음반사(Audio Fidelity Records:FCS 50,019)입니다. 구미의 스테레오 기술은 데카-EMI-미국음반협회(RIAA)의 주파수 대역표준이 제대로 정해지게 되는 1962년을 깃점으로 향상되기 시작하였는데, 그래도 요즘 기준으로 들어보면 조금 갑갑한 느낌이 들긴 하지만 당시의 녹음 기술로서는 괜찮은 음반입니다.
그가 막 지휘봉을 잡고 한것 나래를 펼치기 시작했던 빈 시절의 탱탱한 박력과 더불어 이 연주에는 뭔가 특별한 것이 있음을 느끼게 됩니다. 분명 전통적인 해석을 바탕으로 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주제 제시부라던가 전체적인 전개에 있어서 대단히 뚜렷하게 불거지는 멜로디와 리듬감은 면도날까지는 아니어도 ‘칼같이 정확하다’는 말을 실감나게 해줍니다. 그에게 남미의 외향적인 성격이 있어서 그것이 곡을 해석하고 풀어나가는데 조금은 영향력을 행사하는 것이 아닌가...싶을 정돕니다.
그리고 대단히 세밀하게 분석되어져 또한 대단히 자연스럽게 연주가 이루어지고 있으니 이것은 그가 난해한 현대음악을 분석적으로 잘 소화해낸다는 평을 받는 것으로 설명이 되지 않을까...싶기도 하구요. 아무튼 녹음은 구식이지만 해석과 연주는 오늘날에도 결코 퇴색되지 않고 신선하게 받아들여질 수 있는, 개성감이 넘치면서 동시에 전통과 악보에 충실함을 보여주는 대단히 뛰어난 연주임을 알게 되어 온 몸에 전율이 느껴졌습니다.
더 재미있는 것은 다음 녹음입니다.
이것은 그가 미국의 신시내티 교향악단을 지휘하여 1980년 19월에 녹음한 것인데, VOX Records의 쿰라우데(Cum laude) 시리즈로서 발매되었으며(D-VCL 9007) 연주시간이 다음과 같습니다.
# 1악장 : 15분 18초
# 2악장 : 13분 31초
# 3악장 : 5분 22초
# 4악장 : 9분 47초
놀랍지 않습니까? 대개 청년에서 장년으로, 그리고 노년으로 갈수록 베토벤같은 정통의 고전 레퍼토리는 노련함이 더해지면서 조금씩 느려지는 것이 상례인데, 그는 훨씬 더 빨리 연주를 하고 있습니다. 지금껏 이런 경우를 보지못한 저로서는 궁금해지지 않을 수가 없어서 얼른 턴테이블에 음반을 올려봤습니다.
음...거의 상식을 깹니다. 위에 말씀드렸듯 노련미가 더해지면서 속도가 느려지는 대신 빠른 템포 속에서도 할 말을 다해가며 질주합니다. 이건 오늘날 젊은 신세대 지휘자들이 견지하는 템포와 유사한데, 대신에 그 연주의 깊이는 팝콘처럼 가벼운 것이 아니라 충분히 꽉 짜여져서 무게감은 그래도 느껴지고 있는 연주입니다.
두 음반을 비교해서 들은 결과, 이제 그를 존경하기로 마음먹었습니다. 그리고 그가 남긴 브룩크너와 말러를 찾아 여행을 떠나기로 결심하였습니다. 세세한 부분까지 너무나도 확실한,현미경같은 눈을 갖고 1mm의 오차도 허용하지 않을 것같은 짜임새에 설령 못배겨내고 포기할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들지만, 한 번 가보려고 결심해봅니다.
그에 대한 여러 가지 시각으로 쓴 두 편의 글이 있어서 소개해드립니다. 제가 다시 중언부언 할 필요도 없이 그의 음악 세계를 대단히 잘 파악한 글이라 여겨져 소개드립니다. 제가 더 쓰지 않은 베토벤의 ‘영웅’에 대한 평도 여기에서 다 말해주고 있는 듯하기에...
http://mahler.nayes.net/discgielen.htm
= 2008. 4. 1
첫댓글 길렌의 SWR 심포니 베토벤 교향곡 전집 영상물로 나와있던데 ..... 템포가 무지 빠르네요. 꽉 짜여져 무게감이 느껴진다면야 ..... 궁금해지기 시작하네 ..... 어떻게 들어볼 방법은 없는지요 ?
사무실로 왕림하시죠...ㅋㅋㅋ
저도 함 들어보고 싶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