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띵동!"
문자가 왔다.
'정** 학생 6-3일 내신 주간 테스트 1차 6월 3일
심화: 65
반평균: 60.85
70점 미만 학생은 6/7일 수업 종료 후 재시험 진행합니다.'
매주 수요일마다 수학학원에서 오는 문자다.
올해 초에 서울로 이사오고 아는 정보가 하나도 없어 맘카페에서 서치한 학원중에서 평판이 좋은 곳이라고 선택한 학원이었다. 주 3회 2시간 반 수업에 매주 월요일 시험, 3개월에 한 번씩 진행되는 평가에서 성적이 좋으면 월반하는 시스템이다. 현 학년 진도와 아이들 실력에 따라 선행이 진행되는 방식이다. 담임도 있고 부담임도 있는 전형적인 프랜차이즈 수학학원이다. 초등학생때까지 공부방에서 널럴하게 공부한 아이에게 좀 빡셀 수도 있겠다 싶었지만 다니는 학원이 하나뿐이니 적응할 수 있으려니 했다. 다행히 딸아이는 별 말없이 성실하게 잘 다니고 있다.
문제는 나다. 처음에는 뭐 일일이 문자까지 보내나 싶었는데, 어느새 딸아이의 점수가 평균보다 높으면 안심하고 낮으면 진도를 못 따라가나 제대로 공부하고 있는건가 하고 걱정을 빙자한 의심을 하고 있었다. 19세기, 통계학자 아돌프 케틀레가 '평균'의 개념을 제시한 이래, 많은 이들이 사로잡혔듯 나도 오랫동안 평균이 정상을 판단하는 기준이라고 생각했다.
'개개인의 구분에서 가장 중요한 점은 그 사람이 평균보다 얼마나 월등하거나 열등한가라는 개념을 그 바탕에 뒀다. 현재의 21세기 사고에서는 수재들은 '평균 이상'이고 무능력자들은 '평균 이하'인 것이 너무 당연하고 뻔한 것으로 받아 들여지고 있어서 이런 식의 사고방식이 한 사람에게서 기인된 것이라는 얘기가 극단적 단순화처럼 여겨질지 모른다. 하지만 사실상 골턴은 거의 혼자 힘으로 인간의 가치는 평균치에 얼마나 근접한가에 따라 측정될 수 있다는 케틀레의 확신을 밀어내고 인간의 가치는 평균치에서 얼마나 멀리 떨어져 있는가에 따라 더 잘 측정된다는 개념을 들어앉혀 놨다.
케틀레의 유형 개념이 1840년대에 지성계를 사로잡았듯 1890년대에 골턴의 계층 개념도 지성계를 매료시켰다. 1900년대 초반에 이르자 인간은 능력별로 하위에서부터 상위까지 분류된다는 관념이 사실상 사회과학계와 행동과학계 전체에 침투하게 됐다. 우리는 누구나 가능한 한 평균을 훌쩍 뛰어 넘으려는 압박감을 느낀다. 우리가 평균 이상이 되려고 그렇게 기를 쓰는 목적이 정확히 무엇인지에 대해서는 좀처럼 생각조차 하지 않는다. 평균 이상이 되려고 기를 쓰는 이유가 아주 분명하기 때문이다. 즉 평균의 시대에서 성공하려면 다른 사람들에게 평범하거나, 아니면 (정말 끔찍하게도!) 평균 이하로 평가받아서는 안 된다는 강박에 내몰리고 있기 때문이다.' <평균의 종말> (토드 로즈, P.63-64)
시스템이 최우선시 되어야 한다는 신념하에 비효율성을 최소화해줄 새로운 산업 조직의 비젼이 탄생했다. 그 이름도 뭔가 있어보이는 '표준화'였다. 표준화라는 미명하에 불필요한 노동시간을 최대한 줄이고 산업계에 동일한 매뉴얼을 도입함으로써 개개인의 창의력이나 독창성은 무시한 채 자동인형을 생산해냈다. 더 심각한 것은 산업계에 퍼진 이 표준화가 교육계로 넘어왔다.
고등교육을 받은 반숙련공이 필요했던 산업계는 단지 평균적 학생을 위한 표준교육에만 치중했다. 이 평균주의는 우리 모두에게 학교와 직장생활과 삶에서 성공하기 위해서는 특정의 편협한 기대치를 따라야 한다고 강요한다. 그 결과 우리 모두는 다른 사람들처럼 되려고 한다. 아니 다른 사람들처럼 되되 더 뛰어나려고 기를 쓰고, 미달시에는 실패했다고 생각하고 좌절한다. 이 사회는 너무 피폐해지고 이분화 되었다.
우리는 인간 개개인성을 중시하고 인정받고 싶어하는 본능이 있다. 그리고 그 개개인성이 인정받을 때 능력을 최대한 펼칠 수 있다. 구글 등 세계굴지의 기업에서 인재를 뽑을 때, SAT 성적 등 일차원적 잣대가 아니라 그 이면에 다양한 재능을 본다고 하니 고무적이다. 나도 학원점수를 알려주는 문자는 잊고, 우리 딸의 들쭉날쭉성을 알아봐 주는 엄마가 되어야하지 않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