웨스트민스터교회당에서 열린 총회는 종교개혁의 완성을 목표로 삼아 교회정치 제도와 정화(淨化)에 초점을 맞추었다. 청교도 정신을 반영하여 교회나 국가가 개인의 양심을 구속할 권리가 없다는 등의 주제를 다루었다. 개혁신앙을 구체적으로 표현하는데 정성을 기울였다. 웨스트민스터신앙고백서는 로마가톨릭교회의 성직주의를 배격한다. 바울, 어거스틴, 위클리프로 이어지고 칼빈이 강화한 칼빈주의 신학을 담고 있다.
잎서 언급했듯이 신앙고백서는 역사적인 산물이며, 그것이 만들어진 시대, 사회, 정치, 정신, 신앙을 반영한다. 웨스트민스터신앙고백서는 다른 고백서들과 마찬가지로 제한성을 지니고 있다. 인종차별, 도시화, 산업화, 직장, 민주화, 남녀평등, 매스 커뮤니케이션, 복잡한 인간관계 등은 당시 사람들이 관심을 가진 주제가 아니었다. 그 당시의 교회는 사회 문제, 경제 문제에 대한 기독교인들의 책임을 오늘날처럼 자각하지 못했다. 영국교회는 18세기 후반에 이르러 비로소 사회개혁에 대한 관심을 보였다.
이 신앙고백서는 법률조문 또는 헌장이라는 인상을 준다. 어떤 문제에 대한 정답은 단 하나밖에 없는 것으로 보는 경향도 엿보인다. 하나님의 ‘구속’을 강조한 반면에 ‘이웃’에 대한 그다지 큰 관심은 표명하지 않는다.
1907년 9월 17일, 평양 장대현교회당에서 조직된 한국장로교회 첫 노회는 인도장로교회의 신조문을 본 떠 만든 신앙고백문을 채택했다. ‘조선예수교장로회 신조’는 흔히 ‘12신조’라고 불린다.
이 신조문은 다음과 같은 서술로 시작한다. “대한예수교회에서 이 아래에 기록한 몇 가지 조목으로 신경을 삼아 목사 및 인허 강도인과 장로와 집사로 하여금 청종하게 하는 것은 대한교회를 설립한 본 교회의 가르친바 취지와 표준을 버림이 아니라 오히려 찬성함이니 특별히 웨스트민스터신조와 성경요리문답 대소 책자는 성경을 밝혀 해석한 책인즉 우리 교회와 신학교에서 마땅히 가르칠 것으로 알며 그 중에 성경요리문답을 적은 책을 더욱 교회문답으로 삼느니라.” 한국장로교회는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서를 교리의 표준으로 삼았다. 배위량 선교사가 1925년에 처음으로 한글로 번역했다.
우리나라에서는 1907년 대한 예수교 장로회 독노회의 설립 시에 채택한 12신조의 서문에는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서를 존중하여 그것을 받아들여 사용할 것을 명시하였다.
우리나라 장로교회의 신앙고백서는 거의 원안을 따르고 있으나 “장로교 정치체제(政治體制)”만큼은 영국 것을 도입하지 않았다. 그렇다고 미국 것을 도입한 것도 아니다. 이 분야에 전문적이지 못한 선교사들이 급조한 것을 비판 없이 수용한데다 유리하게 변질시켜 오늘날에 이르고 있는 것이다. 어쨌든 교회에서 가톨릭의 교권체제와 비슷한 정치체제를 가지고 있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다. 교회의 머리는 오직 예수 그리스도이고, 거듭난 성도는 사람이 만든 어떤 권위에도 순종해서는 안 되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