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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광산(佛光山)불광사(佛光寺) 10월20일 아침 8시에 숙소를 출발 버스에서 청백님이 천수경 신묘장구대다라니 7독으로 대북역에서 고속열차를 타고 2시간 후 까오슝(高雄)역에 도착 버스를 타고 이동 대만 불교의 총본산인 불광산에 도착 입구 미륵불상과 두산문(頭山門) 중앙에 회두시안(回頭是岸) 생각을 바꾸면 그 곳이 피안이다. 문일성여금나라거(一聲汝今哪褢去) 그대는 어디로 가는가? 불광산을 떠나면 어디에 가서 머물것인가? 망삼사하일군재래(望三思何日君再來) 언제 다시 올 것인가? 라는 문구는 속세(俗世)에서 불광산으로 언제 다시 올 것인가를 다시 한 번 되새겨 보게 합니다.
조산(朝山)회관(신도들의 숙식장소)에서 사찰식(寺刹食)을 먹고 화장현문(華藏玄門)를 거쳐 성불(成佛)대도(大道)를 걸어 대웅보전에 들어갔다.
웅장한 대웅보전은 불광산의 큰 법당으로 석가모니불, 아미타불, 약사여래불 삼존불을 모시고 있으며 사방 감실에는 14,800존의 불상이 모셔져 있어 안내하는 스님께서 작은 촛불을 주시기에 9배의 예배를 드리고 신묘장구대다라니을 독경하니 조용히 하라는 주의를 받고 음성을 아주 낮추어 3독하였다.
룸비니원 옆을 지나 대불성(大佛城)으로 가는 도중 동자승 석상으로 장식 되어 있으며 황금빛으로 빛나는 입상 대형 아미타불의 높이 40m로 불광산을 대표하는 상징불(象徵佛) 이었다.
대불성(大佛城) 주위에 480존의 입상 아미타부처님이 모셔져 있으며 대불 좌대 밑 석굴에 불,보살님 상이 조각되어 있고, 대불법어(大佛法語) “대불성을 참배하는 불자들은 참다운 깨달음을 배워갈 수 있습니다” 하였으며 단체 기념 촬영 후 정자에서 더위를 식히며 지장전(地藏展)에서 예배를 드리고 옆에 기원(祈願)의 종(鐘)이 있어 3회 타종 소원성취(所願成就)를 빌었다.
불광사를 다 둘러 볼려면 적어도 며칠은 숙식하며 있어야 하므로, 짧은 시간으로는 무리수이고 대비전, 대지전, 보현전은 가보지 않은 채 만수원(萬壽圓)은 불자들이 사후 처리 문제를 해결하는 납골당 5만기가 설치 되어있고, 옆에 부도탑를 보며 계단을 내려와 버스에 승차 10여분 거리에 있는 불타기념관으로 향하였다.
☆불광산불타기념관(佛光山佛陀紀念館) 주차장에서 제일 먼저 등대같이 우뚝 솟은 탑에 붉은 글씨로 불광(佛光)이라 쓰여진 문도당(問道堂)은 길을 묻는 집이며 대문(大門)을 들어서 광장을 지나면 예경대청(禮敬大廳)은 중국 궁전식으로 지어져 있고 좌(左)측 해탈문(解脫門), 중앙이 예경대청(禮敬大廳) 우(右)측 자재문(自在門)으로 건물 앞에 사자와 코끼리상를 설치 문수보살님과 보현보살님를 상기(想起)하게 되었다.
한 권의 불교서적인 불타기념관 중앙 입구를 들어가니 본관까지 웅장함을 느끼며 성불대도(成佛大道) 양쪽에 팔탑(八塔) 설치 좌측에는 칠계탑, 오화탑, 삼호탑, 일교탑, 우측에는 팔도탑, 육도탑, 사급탑, 이중탑이 설치되어 있고 불타기념연기(佛陀紀念緣起) 오석(烏石)에 기념관 설립 인연을 새겨 놓았는데 우리나라 사찰명도 새겨져 있었다.
본관까지 가는 길은 복도식으로 비바람을 피하고 쉬어갈 수 있도록 설계되어 있으며, 보리광장(菩提廣場) 좌측에 고루(鼓樓:북) 우측에 종루(鍾樓:종)를 설치 이 종(鐘)은 우리나라에서 기증한 것이라 했으며, 본관(本館) 앞의 길이와 넓이가 각100m인 보리광장(菩提廣場)을 조성하여 많은 사람이 모일 수 있는 공간이었다.
좌우측에 무전(武殿) 문전(文殿)으로 본관 입구에 목조각상은 거대한 나무뿌리 부분에다 부처님과 아라한상 500분을 섬세하게 조각되어 있는데 어느 신도가 여기를 왔다 깊은 감명을 받고 제작하여 기증한 것이라 했으며 보타낙가산 관음전, 금불전 및 옥불전에 예배 드리고 본관 옥상에 사탑(四塔)은 원탑(願塔), 행탑(行塔), 비탑(悲塔), 지탑(智塔)으로 인도 보드가야 마하보디사원 양식으로 사성제탑(四聖諦塔)이 세워져 있으며, 대불평대(大佛平臺)에 오르면 불광대불(佛光大佛) 조성 이 대불은 좌불(坐佛)로 중품하생 수인(手印)을 하고 계시며, 지상부터 총 높이는 108m이며 좌불(坐佛)로는 전 세계에서 가장 높은 48m로 1,872톤의 구리로 조성 봉안 되어 있었다.
부처님 진신 치아사리를 티벳에서 1998년 4월 8일 대만으로 모셔와 불타기념관 중앙건물 전시관에 진신 치아 사리전에 불탑 조성 봉안하였다 한다.
불타기념관 내부에는 4군데의 법당과 8곳의 전시장들로 조성되어 있으며 2천여명을 동시에 수용할 수 있는 대각당(大覺堂)이 자리하고, 지하에는 48개의 지궁(地宮)과 56개의 천궁(天宮)을 조성하여 불교성보문화재들을 보관하고 있다 하였다.
불타기념관은 15,510㎡ 규모에 총예산 대만달러 100억, 우리 돈으로 3500억이 넘는 예산이 투입 10여 년간의 공사 기간이 소요 되었다 하며 2011년 12월 25일 비로소 성역화 사업을 마치고 일반인에게 공개, 공식적으로 하루에 2만 5000천명이 방문하는 것으로 소개되고 있다.
불광산사는 40년에 걸쳐 조성된 현대 대만불교 역사의 축약이며, 10년의 기간 동안에 조성된 불타기념관은 단순한 종교적 시설의 영역을 넘어 대만 문화와 예술을 상징하고 있었다.
개산조 성운(星雲) 대사는 1927년 중국 강소성(江蘇省) 강도에서 태어나 12세 때 난징 서하산 대각사에서 지개상인을 은사(恩師)로 출가(出家)하여 일찍이 금산, 초산, 서하율학원 등 선정율학의 대가람에서 불법을 수학한 뒤 임제종 48대의 법맥을 이어 받으셨다.
1949년 봄에 대만으로 망명했으며 1953년 의란에서 염불회(念佛會)를 조직해 불교 포교의 기초를 마련하였고 1967년 인간불교(人間佛敎)를 종풍(宗風)으로 '불광산사'를 창건 ‘인간불교(人間佛教)’ 의 서원을 세우고 약 10만평의 땅을 구입하면서 시작하여 불교문화·교육·자선사업 등에 온 힘을 기울여 왔다.
불광산사 종지(宗旨)는 문화사업을 통한 불교의 전파, 교육사업을 통한 인재양성, 자선사업을 통한 사회복지, 법회활동을 통한 마음의 정화를 내세우며 사찰의 사훈(寺訓)인 삼호(三好)를 강조 “혼자 있을 때는 좋은 것을 생각하고. 둘이 있을 때는 좋은 말을 하며. 셋이 있을 때는 좋은 행동을 해야 한다”는 것으로 좋은 마음, 좋은 말, 좋은 행동(일)으로 간략하게 말할 수 있습니다.
부처님! 대만의 자제정사 증엄스님과 불광산 성운대사님 같은 훌륭하신 선지식이 이 땅에도 탄생(誕生)하시어 대만과 같은 훌륭한 불법(佛法)홍포(弘布)로 우리나라 불교와 지역사회 발전에 기여할 수 있는 큰 별이 되어 만인(萬人)을 비추어 주시기를 간절히 기원(祈願) 드리면서 불타기념관을 나왔다.
☆연자담 풍경구 용호각(龍虎閣) 춘추각(春秋閣)에 오후 늦게 도착 흐린 날씨에 풍경구를 둘러보았는데 여기는 연못 주위로 도교 사찰 계명당(啟明堂) 등이 있고 연못에 용호각(龍虎閣) 용의 입으로 들어가 정자2기의 내부계단을 올라 호수을 전망할 수 있는데 화려한 입체 그림으로 가득 그려진 것을 보며 호랑이 입으로 나오면 액을 물리친다는 설(說)로 이를 거쳐 관우장군상의 춘추각(春秋閣) 옆 연못에 선녀와 말 장군상 등의 조형물로 장식되어 있고 연못에 오리정까지 다리를 놓아 정자가 있는 곳까지 걸어가며 주위 경관을 둘러보며 가랑비와 어둠이 짙어와 석식을 먹고 고웅역에서 고속 열차를 2시간 타고 대북역에서 내려 버스로 숙소에 도착 했다.
☆10월21일 국립고궁박물원국립고궁박물원(國立故宮博物院)은 중화민국 타이베이 시에 위치해 있는 중화민국 행정원 소속 국립박물관이다.
이 박물관에는 중국 국민당이 국공 내전에서 패배하여 타이완으로 이동할 때에 대륙에서 가져온 문화재가 대부분을 차지하고 있으며 소장품의 수는 69만 6422개나 되어 세계 4대 박물관의 하나로 손꼽히고 있으며 2001년부터 소장품 보호를 위해 박물관 건물을 보수하고 있었다.
황실(皇室) 보물을 장개석 총통이 대만으로 가져 올 때 보물이 유실 될까봐 공산당 모택동이가 배를 공격(攻擊) 침몰 시키지 못한 이유였다 하였다.
본래 베이핑(北京) 고궁(자금성)에 있었으나 국공내전 시기 장제스의 명령으로 그 유물 거의 대부분을 대만으로 실어와 현재에 이르고 있으므로 중국본토의 자금성 유물은 대만 국립고궁박물관 유물에 비하면 훨씬 못하다 하였다.
국립고궁박물관 한자로 '고궁(古宮)'의 '고(故)' 자가 우리나라 국립고궁박물관의 古자와, 대만의 국립고궁박물원 故자의 차이가 있었다.
台北故宫博物院(타이베이 고궁박물원)의 압도적인 유물은 국공내전 당시에 중국 국민당이 패주(敗走)하면서 북경의 자금성 고궁박물관에 있던 유물 중 가치가 높다고 판단한 유물을 선별해서 가져 왔다는데, 장제스는 피난민을 이주시킨다는 이유로 미군에게서 군함을 빌린 다음 피난민은 나몰라라 하고 대부분을 유물 운반에 사용해서 미국을 분노케 했다 한다.
그러나 이로 인해 수많은 유물이 문화대혁명으로부터 무사했음은 부정할 수 없으며 당시 장제스가 국민당 총재자격으로 유물을 이송시켰기 떄문에 이렇게 보존 전시될 수 있었다 한다.
유물 중 동파육을 본따 조각한 육형석(肉形石)과 더불어 대만 최고의 유물로 손꼽히는 취옥백채(翠玉白菜)는 배추를 조각해 낸 윗부분이 녹색, 아랫부분이 하얀색인 자연 옥을 이용해 조각된 유물로써, 청 황실 유물이 기반이며 덕후건륭제가 수집하여 직접 목록까지 정리한 법랑채 자기의 명품은 이 박물관에서만 볼 수 있다 하였다.
그리고 1940년대 이전 발굴된 유물들도 죄다 대만 고궁박물원이 소유하고 있어 발굴유물 수준도 상당히 높은 것으로 소장품이 너무 많아 옥제품·도자기·회화·청동의 작품들은 3개월 단위로 한 번씩 유물을 바꿔서 전시하는데 8여년 동안 겹치는 것이 없다는 속설이 있을 정도이다.
3층에 가 보면 최소 2~3천년된 고대의 청동 정(鼎)과 종, 신석기시대의 유물들이 절반을 차지하고 있었고 너무 오래되어 정확한 연대 측정이 불가능한 토기 잔은 물론, 당삼채(唐三彩) 중에서도 거대하고 아름다운 것들로 전시되었고 요나라 때 만들어진 자기인 여요연화식온완(汝窯蓮花式溫碗) 등 여기 있는 유물들은 중국 역대 송,원,명,청 왕조가 수천년 동안 계승한 것으로 국립고궁박물원 유보물은 확고한 물질적 문화유산(文化遺産)이었다.
고궁박물관 종교관(宗敎館)에는 불상과 보살상을 보고 일행은 모여서 중식 식당으로 갔다 중정기념당으로 이동 했다.
☆중정기념관(中正記念館)은 타이베이를 대표하는 인상적인 건축물 중 하나로 꼽히는 곳으로 1975년 4월 5일 쟝찌에스(장개석) 총통이 서거(逝去)하자, 타이완과 세계 각지에 흩어져 있던 화교들이 자발적으로 기부금(寄附金)을 모아 그의 업적을 기리는 기념당(記念堂)을 건립할 것을 정부에 건의했다는데 이 건의를 정부는 받아들여 1975년 6월에 기념당의 건설을 결정하였다.
그 후 1976년 10월 31일에 기공식을 가지고 1980년 3월 31일에 완공되어 일반인에게 공개된 날짜는 1980년 4월 5일이라 한다.
현재는 국립국부기념관(중정기념관), 국립고궁박물원, 용산사와 함께 타이베이 시의 4대 관광 코스로 꼽히고 있다 하였다.
09시부터18시까지 관람이 가능하며 비가 부슬부슬 내리는 우중에 조경이 잘 된 넓은 정원, 정자, 연못 등이 정연하게 배치되어 있었으며 대충문(大忠門)으로 들어가니 기념당은 아치형 정문은 흰 벽에 푸른 기와를 얹은 웅장하면서도 우아한 명나라식 건축물로, 높이 30m,에 달하는 누각이었다.
면적 25만㎡의 넓의 부지에 1층 전시관에는 그의 생전 유품과 업적을 사진으로 전시하고 있었고, 2층의 기념당 안에는 중국인의 정신적 지주 장찌에스 좌상이 설치되어 있으며, 뒤 벽면에는 윤리(倫理), 민주(民主), 과학(科學)을 한문으로 써 놓았으며 근위병(近衛兵) 교대식 관람 시간이 라서 인지 인산인해를 이루었는데 양측 근위병을 처음 볼 때는 마네킹으로 착각 할 정도로 근엄(謹嚴)하게 서 있었고, 5명의 근위병의 절도 있는 사열 모습이 보기 좋았으며, 장개석 총통 동상(坐銅像 무게 25톤)을 비롯하여, 집무실에 집기와 장개석 총통의 책상 앞에 앉은 모습 등 전시실에는 사진과 기념품 차량 등이 전시되어 있었다.
2층 전시관 앞에 계단을 내려와 광장에는 고전적 건물인 고국가희극원, 국가음악원으로 국립극장과 콘서트홀이 세워져 있었고, 저 멀리 명나라식 아치형 정문 옆에 누각 에는 ‘自由廣場’이라는 글귀가 쓰여 있는데, 이는 중국 최고의 서예가인 왕희지의 글씨체라 하였다.
☆용산사(龍山寺)는 타이베이 시에 있는 사원(寺院)으로, 타이베이에서 가장 오래된 사원이었으며 1738년 청나라 시절 푸젠 성 이주민들에 의해 세워진 사찰로 중간에 소실(消失)되어 현재의 건물은 1957년에 다시 지은 것이다.
돌기둥에는 조각된 용과 조화를 이루며 뒤쪽에 역사적 인물들의 춤추는 모습이 새겨져 있었고 지붕에는 용과 더 많은 모습의 형상이 장식되어 있었다.
이곳은 전형적인 타이완 사찰로서 도교, 불교, 토속신 등 각 종교의 색채가 서로 조화를 이루며 어우러져 있는 종합 사찰이었다.
입구 기념품 매점에서 향(香)을 받아 관음전에 봉향(奉香) 서서 합장3배를 올리고, 화타선생상을 보며 중국 고대에 의술이 뛰어나신 분이라 약사법회 문구를 보았고, 관우성군전 등으로 이어진 ㅁ자 사찰로써 마당 중앙에 꽃, 과일, 과자 등의 공양물을 올려놓고 소원(所願)를 빌고 점(占)을 치는 사람들과 관광객으로 북적이고 있었다
사찰 밖에는 폭죽 소리와 나팔을 불며 트럭에 깃발을 장식 거리행진을 하는 특이한 모습을 보았다.
☆대북101타워 전망대 관람 타이베이 101타워는 건축물 높이 509m이고, 지붕 높이는 449m, 최고층의 높이는 452m로 지상 101층 지하 5층 건물이다.
저층은 에스칼레이트로 이동 후 초고속 EV를 타고 전망대까지 갔는데 세계 최고속 엘리베이터로 16.83m/s. 60.4km/h에 맞먹는다 하였다.
전망대(展望臺)에서 야경(夜景)을 내려다 보니 아찔한 기분이 들었다.
이 건물은 1999년에 착공하여 2002년 3월 31일에 건물이 아직 반밖에 지어지지 않은 상태에서 근처에 규모 6.8의 지진이 발생해서 결국 크레인 2대가 붕괴되고 5명의 건설인부가 사망하고 행인을 포함해서 수십 명이 중상을 입은 사건이 일어났다.
그리고 1년 뒤인 2004년에 완공하였고 같은 해 12월 31일에 개장하였다.
마잉주 당시 타이베이 시장(市長)(전 중화민국 총통)이 완공식을 주재하였고, 그가 공식적인 지붕 완공을 알리는 황금 나사 하나를 조였다.
타이베이 101은 세계에서 처음으로 반-킬로미터 높이를 넘긴 건물이며 건 물주를 비롯한 여러 다른 출처에서는 이 건물의 높이가 508.0m 라고 언급하고 있다.
이 높이가 나온 이유는 기저의 1.2m짜리 플랫폼 위부터 시작하여서 재었기 때문이라 하였다.
☆스린 야시장(夜市場)은 주말이라 젊은 층들로 분비는 시장 거리는 우리의 동성로와 비교 해보며 카페, 극장, 음식점, 옷,잡화점, 등으로 구성 된 시장 골목이었으며 그냥 한 바퀴 돌아보며 현지인들의 모습을 보는 기회를 가졌다.
지하 가게에서 망고 아이스크림 빙과(氷菓)를 먹었는데 천정 일부와 벽면 전체가 한글 낙서로 도배를 해 놓아 이것은 정말 아닌데 하는 생각을 하면서 야시장을 나와 어깨 발 마사지를 받고 여정에 쌓인 피로를 풀었다.
시간 여유가 있어 과일 가게 야시장을 한 곳 더 둘러보며 열대과일을 먹고 공항으로 출발 3박5일 순례일정을 마무리하고 12시경 공항에 도착 02시경 출국수속을 마치고 티웨이 항공편으로 대북(臺北)공항을 이륙 기내(機內)에서 피곤한 몸을 의자에 기대어 한 숨 자고 나니 이른 새벽 어둠이 깔린 대지가 기내 창 밖에 보였고 05시20분경 대구공항 도착하니 쌀쌀한 초겨울 날씨였다.
감명 깊고 뜻있는 제4차 대만 해외 성지순례에 부처님 가피로 날씨와 무사히 귀국에 대한 감사의 기도(祈禱)와 대웅고님을 비롯하여 다선 추진위원장님 그리고 혜공회장님 순례를 주도 수고하시어 일행 법우님과 함께 감사의 박수를 보내며 해단(解團) 하였습니다. (사진은 카페에서 참조하여 보시기 바랍니다.) 졸필의 후기 읽어 주셔서 감사 합니다. 우담 이경태 합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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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우담단장님 2차 후기글 읽으면서 지나간 시간을 되돌려 다시 되새겨봅니다~~ 감사합니다
늘 부처님 가피 충만하시옵소서~^^
수고 했습니다.
우담 단장님 대장정의 후기글 수고하섰습니다 다시 돌아보는 시간여행 감사합니다
수고많이 하셨습니다.~~^^
먼길 돌아와 일상에서 흘러가는 시간의 흐름에 젖어지냈는데
또 다른 추억을 볼 수 있기에 고마운신 님의 손길에 감사의 인사를 드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