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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6년 9월18일
말씀: 행 20:22-24
설교: 하나님이 주신 꿈의 확신
하나님은 하나님의 철저한 계획을 가지고 우리를 이끄십니다. 자로 잰 뜻한 하나님의 계획을 깨닫고 발견할 때만큼 감격스러운 때는 없습니다. 다시 말해서, 하나님께서 하나님의 계획을 말씀하고 우리에게 주신 꿈과 계획을 증거로 보이시는 경우가 참 많습니다. 증거로 보임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신 꿈은 사실이며, 실제하며, 분명하다는 사실을 증거로 보임으로서 계속 그 꿈에 확신을 심어주는 것입니다. 왜 이런 현상이 나타나느냐하면 꿈이 멀리 느껴질 수 도 있고, 꿈과 다른 곳으로 갈 수 도 있고, 꿈이 너무 커서, 황당하게 느껴질 수도 있고 더 중요한 것은 그 꿈 때문에 환란과 시련과 어려움을 당할 수 있기 때문에, 확정적 체험과 믿음 속에 하나님의 계획과 꿈이라는 사실을 분명히 보여주는 사건들이 있다는 것입니다.
우리교회가 새 신자 등록보다, 다니다가 다시 등록된 사람들이 더 많습니다. 참 고무적인 일인데요, 몇 분의 목사님들에게 물어본 적이 있습니다. 혹시 교회를 떠났다가 다시 돌아오신 분이 계십니까? 어떤 목사님은 부임했을 때, 새로운 목사가 왔다고 떠난 몇 분들이 들어온 적은 있다는 소리를 들었습니다. 그런데 대부분의 목사님들은 성도들이 나가면 돌아오는 일은 그의 없다는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 교회는 떠났던 사람들이 돌아오는 경우가 그의 대부분입니다. 왜 이런 현상이 나타난다고 생각하십니까? 단순히 생각해서 ‘교회가 친절하고 사랑이 넘치기 때문이다’ 이렇게 말씀할 수 도 있겠지만(이게 아닌 것 여러분도 아시죠.)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신 꿈이 부분적으로나마 이루어지고 있다고 생각을 한 번 해봅시다. 중보자적 사명을 통해 이 땅에 흩어진 백성들을 모으라는 하나님이 명령에 대한 증거로 해석 한 번 해보세요. 중보자적사명과 맞아 떨어지지 않습니까? 우리가 만일 중보자적 사명의 길을 건넌다면 분명히 하나님이 함께하시며 생명의 풍성함과 그 꿈의 실현의 과정 속에서 많은 확정적인 체험이 있을 것입니다.
한 예를 들어, 바울은 3차 전도여행을 마치고 예루살렘으로 올라갈 때 성령의 인도함을 따라 성령에 매인바 되어 올라가고 있다고 했습니다. 사도행전 21장을 보면 바울이 예루살렘으로 올라가는데 대한 방해요소들이 나타납니다. 먼저는 바울이 두로에서 제자들이 성령의 감동을 받아 바울더러 예루살렘에 올라가지 말라고 합니다. 그 다음에 가이사랴에 도착했습니다. 그 곳은 일곱 집사 중의 하나인 전도자 빌립이 있었는데 그 집에서 머물게 되었습니다. 빌립에게는 네 딸이 있었는데 모두가 예언자라고 했습니다. 빌립의 딸들이 어떤 예언을 했다는 구체적인 이야기는 없습니다. 하지만 이어서 유대에서 아가보라는 선지가가 내려옵니다. 이 아가보는 예언하는 사람인데 사도행전 11:28절에서 장차 세계에 기근이 있을 것이라는 예언을 한 자요, 그 예언이 이루어진, 그러니까 예언에 있어서 탁월한 사람으로 인정을 받았던 인물입니다. 이 아가보가 성령의 감동을 받아서, 어떻게 예언을 하느냐하면 바울의 띠를 가져다가 자기 수족에 잡아매고 하는 말이 ‘이 같이 이 띠의 임자를 결박하여 이방인의 손에 넘겨주리라 하거늘’이렇게 예언을 하니까 바울의 제자들과 그 곳 사람들이 바울을 예루살렘에 올라가지 말라고 강력하게 말립니다. 여기에 빌립의 딸들도 함께 동조했으리라 여겨집니다. 그렇다면 보십시오. 성령의 감동을 받은 제자들이나 빌립의 딸들이나 아가보가 어떻게 예언을 했습니까? 예루살렘에 올라가면 포박을 당하고 핍박을 당할 것이라는 말입니다. 그러니까 당연히 예루살렘에 올라가서는 안 된다는 결정을 하게 됩니다. 그래서 울며불며 바울이 예루살렘에 올라가지 말 것을 강력히 호소하는 것이지요. 그런데 바울도 성령의 감동을 받아 예루살렘에 올라간다는 것입니다. 사도행전 20장 22‘보라 이제 나는 성령에 매여 예루살렘으로 가는데 거기서 무슨 일을 당할는지 알지 못하노라 오직 성령이 각 성에서 내게 증언하여 결박과 환난이 나를 기다린다 하시나 내가 달려 갈 길과 주 예수께 받은 사명 곧 하나님의 은혜의 복음을 증언하는 일을 마치려 함에는 나는 생명조차 조금도 귀한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노라’
보십시오. 지금 바울이 성령의 감동으로 예루살렘에서 되어 질 일과 제자들과 아가보가 예언한 것이 다를 것이 없습니다. 모두가 성령의 감동을 받아서 예루살렘에 가면 이런 일을 당한다는 말입니다. 그런데 제자들이 왜 가지 못하도록 막습니까? 가면 죽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가지 말라고 합니다. 이 내용이 참 중요하다고 여겨지는데요, 왜냐하면 바울이 성령의 감동으로 예루살렘에 가야할 것을 알지 못했다면 아마 이들이 말류 할 때 그 말을 들었을 것입니다.
왜 성령께서 바울더러 예루살렘에 올라가라고 하신 것인지 제자들은 몰랐습니다. 그런데 바울을 알았습니다. 24절을 보면 ‘내가 달려갈 길과 주 예수께 받은 사명 곧 하나님의 은혜의 복음을 증언하는 일을 마치려 함에는 나의 생명조차 조금도 귀한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노라’그러니까 바울은 이 길이 마지막 길임을 보여주셨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두 번째로는 내가 가는 길이 핍박과 고통과 죽음의 길이라 할지라도 성령께서 가라고 길을 보여주셨으며 가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한 알의 밀이 떨어져 땅에 썩어질 때 열매가 맺힘을 바울은 알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여기서 우리는 바울의 사상을 이해하셔야합니다. 이렇게 결단하게 된 중요한 요인은 바로 바울이 획기적인 사건을 통해 하나님이 바울에게 심어준 꿈을 보았기 때문입니다. 더욱이 중요한 것은 제자들이 만류한 것으로 인해 바울이 힘들거나 괴롭거나 짜증스럽거나 그런 것이 아니라, 오히려 계속해서 제자들이나 아가보나, 빌립집사의 딸들이 예언한 것을 바울이 어떻게 받아들이고 해석을 하느냐하면, 이 모든 예언이 예루살렘으로 가야할 것을 확증적으로 보여준 사건으로 바울을 받아드렸기 때문에 더욱더 확고히 그 길을 갈 수 있었다는 것을 아셔야합니다. 이것은 결국 꿈을 본 사람과 보지 않은 사람의 차이라는 것을 잊어서는 안 됩니다. 꿈을 본 사람은 어떤 사건과 어떤 상황도 꿈과 연관해서 해석을 하게 되어 있습니다.
그리고 예루살렘에서 예언대로 감옥에 갇혔습니다. 이것 또한 하나님이 주신 꿈의 실제적으로 나타난 사건으로 바울을 인식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리고 그 날 밤에 예수님께서 찾아 오셔서 ‘이들 앞에서야 할 것처럼 가이샤 앞에서 서야할 것이다’는 것을 말씀하시면서 이곳으로 이끄신 분이 성령님의 강력한 뜻이었음을 예수님이 직접 말씀하신 것입니다. 보십시오. 계속해서 그 과정 속에서 하나님의 계획임을 확인시키고 있지 않습니까? 우리가 가는 중보자적 사명 안에서 하나님이 어떤 역사를 보여줄지 모릅니다마는 이렇게 흩어졌던 백성들을 모으고 그들의 죄악상을 위해 기도하라는 중보자적 사명을 우리에게 부여하셨다는 확정적인 믿음을 세워 나갈 수 있도록 하나님이 일하실 것입니다.
저번 주에 아브라함에 대해 말씀을 함께 나누었는데요, 아브라함이 갈대아 우르에서 부름을 받고 가나안땅에 와서 이 땅을 하나님이 주셨다고 했습니다. 물론 애굽에서 400년 동안 종살이를 하고 이 땅에 다시 돌아올 것도 말씀하셨습니다마는 가나안땅에 있을 때 기근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 기근으로 말미암아 애굽으로 내려가게 되지요.
창12:14-17 ‘아브람이 애굽에 이르렀을 때에 애굽 사람들이 그 여인이 심히 아리따움을 보았고 바로의 고관들도 그를 보고 바로 앞에 칭찬하므로 그 여인을 바로 의 궁으로 이끌어들인지라 이에 바로가 그로 말미암아 아브람을 후대하므로 아브람이 양과 소와 노비와 암수 나귀와 낙타를 얻었더라.’
아브라함의 아내 사라의 미모가 출중하다보니까 바로 귀에 들어가고 바로가 사라를 보고 반하여 사라를 취하려고 한 사건입니다. 그 당시 사라의 나이는 65살이 넘었다고 봐야합니다. 그리고 사라가 127살을 살고 죽었습니다. 그렇다면 그 당시 65세 정도는 오늘날 30-40대 정도의 미모로 생각해도 무방할 것입니다 동시에 바로도 70이 넘었다고 봐야겠지요. 우리가 생각할 때 65살 이 넘은 할머니가 예쁘면 얼마나 예쁠까? 이렇게 생각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요, 20대 총각이 40대 예쁜 여자를 예쁘게 봐주지 않겠지만, 50대는 정말 예쁘게 보는 것과 같다고 생각하시면 됩니다. 그리고 그 상황에서 아브라함은 아내를 누이라고 거짓말을 했지요. 물론 외사촌동생이기는 하지만, 아내지요. 이런 위기상황에서 하나님의 개입으로 말미암아 그 위기에서 건짐을 받는 일이 있었습니다. 여기서 우리가 주목하고 봐야할 것은 하나님이 아브라함을 인도한 관점에서는 애굽으로 내려가면 안 됩니다. 가나안에 머물러 있어야했습니다. 가나안땅이 그와 그 자손에서 주기로 한 땅이었기 때문입니다. 어려움이 닥치니까 애굽으로 내려가면서 문제가 생긴 것입니다. 다행이 하나님의 개입으로 그 위기에서 탈출하게 되고 나올 때 많은 재물을 얻어서 나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인도하심으로부터 떠난 삶에서 어려움과 시련이 있다는 것을 보여주는 부분이기도 하지만, 하나님의 계획에서 벗어났을 때 획기적인 사건을 통해 하나님이 가나안이 아브라함과 그의 자손에게 주신 땅이라는 사실을 즉, 꿈을 주신 것임을 명백하게 하는 사건으로 해석할 수밖에 없습니다.
여러분 하나님의 긴 역사를 어떤 관점에서 봐야하느냐 하면 구속사적 관점, 언약의 백성으로의 관점에서 봐야 보입니다. 이것은 성경을 보고 해석하는 관점이며 대단히 중요한 것입니다. 이런 관점을 통해서 하나님이 아브라함의 꿈이 진행되고 있다는 것을 보이십니다. 아브라함에게 이삭을 주어 이 이삭을 통해 큰 민족을 이루겠다고 말씀하신 후에 창26:23-24절 말씀을 보면 하나님이 아브라함에게 주신 꿈이 진행되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이삭이 거기서부터 브엘세바로 올라갔더니 그 밤에 여호와께서 그에게 나타나 이르시되 나는 네 아버지 아브라함의 하나님이니 두려워하지 말라 내 종 아브라함을 위하여 내가 너와 함께 있어 네게 복을 주어 네 자손이 번성하게 하리라 하신지라’여기서 하나님은 아브라함의 하나님이시다는 것은, 아브라함의 언약이 성취되고 있다, 꿈이 성취되고 있다는 뜻입니다. 그리고 ‘너와 함께함은’ 아브라함을 위해서다는 말씀이지요. 아브라함의 꿈을 성취하기 위해서 내가 너와 함께한다는 것입니다. 그리니까 이삭을 통해서도 아브라함의 언약과 계획들이 구속사적인 관점에서 지금 성취되고 있음을 이삭의 사건을 통해서 확연하게 볼 수 있습니다. 창26:1절을 보면 ‘아브라함 때에 첫 흉년이 들었더니 그 땅에 또 흉년이 들매’그랬습니다. 그런데 이삭은 하나님의 개입으로 애굽으로는 내려가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이삭은 그랄지방으로 갔지요. 물론 이곳에서도 이삭의 아내 리브가가 예뻐서 사람들이 누구냐고 물었을 때 ‘누이’라고 아브라함과 동일하게 속였습니다. 그렇지만 그는 애굽으로 내려가지 말라는 하나님의 전적인 개입으로 인해서인지, 아내를 빼앗기지는 않았습니다. 블레셋 왕 아비멜렉이 창문으로 이삭이 리브가를 껴안은 것을 보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아비멜렉이 모든 백성들에게 이삭의 아내와 동침할 때는 반드시 죽이겠다는 명령을 내립니다. 이런 획기적인 사건 한 가지를 보아도 언약의 백성들에게 하나님이 직접개입 하셔서 아브라함에게 주신 꿈을 어떻게 실현하고 있는지를 볼 수 있습니다. 그랄지방에서 이삭이 100배의 축복을 받지요. 그리고 이삭이 하는 일에 다 축복을 받아서 거부가 됩니다. 이것은 우연히 거부가 된 것이 아닙니다. 26장 3절을 보면, ‘이 땅에 거루하면 내가 너와 함께 있어 네게 복을 죽고 내가 이 모든 땅을 너와 네 자손에게 주리라 내가 네 아버지 아브라함에게 맹세한 것을 이루어’이 땅에 거주하면, 이 땅은 블레셋 땅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아브라함에게 약속하신 가나안땅을 의미합니다. 하나님이 이삭에게 복을 주시겠다고 약속하셨고, 그리고 이 모든 땅을 이삭과 그 자손에게 주시는 것은 아브라함에게 맹세한 그것을 이루기 위한 것이라고 분명히 말씀하고 계십니다. 그리고 이 해석이 조심스럽기는 하지만, 블레셋에서 100배의 축복을 주신 것은 하나님이 가나안땅에서 약속하신 그 약속이 하나님이 이루실 약속임을 보여주시는 사건이라 믿습니다. 왜냐하면 애굽으로 내려가지 말라는 그 말에 순종하여 그랄지방에 머물렀기 때문입니다. 보십시오, 일직선상에서 아브라함에게 주신 꿈을 이루고 계시며, 또한 획기적인 사건을 통해 아브라함의 꿈이 이루어지고 있다는 것을 보여주고 계십니다.
그리고 아브라함이 그랄지방에서 70년 전에 머물렀던 곳입니다. 당연히 아브라함이 팠던 우물을 파서 먹었지요. 그런데 이삭이 거부가 되니까 블레셋인들이 시기하여 이삭을 추방시키기 위해 우물을 메웁니다. 우물을 메운다는 것은 목줄을 끊는 것과 같습니다. 팔레스타인 지역에서 우물을 발견한다는 것은 금맥을 발견하는 것과 동일할 정도로 물이 중요합니다. 그런데 물을 메웠다는 것을 죽으라는 소리입니다. 그런데 이삭은 아브라함이 파 놓은 우물을 아니까 또 다른 지역으로 가서 우물을 팠습니다. 3번이나 계속해서 우물을 파게 되는데, 르호붓이라는 우물을 메우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난 후에 하나님이 이삭에게 나타난 것이지요. 그리고 하나님이 아브라함의 언약으로 인해 너와 함께하며, 네가 복을 받은 것이라고 말씀하심으로 이삭을 통해 아브라함의 꿈이 이루어지고 있음을 명백히 보여주고 있습니다.
그리고 또 하나의 교훈이 있다면 부모의 신앙의 열매를 자녀들이 누릴 수 있다는 것입니다. 부모의 기도가, 부모의 꿈이, 부모의 믿음과 헌신이 자녀들에게 흘러간다는 것을 아셔야합니다.
창35: 10-12 ‘하나님이 그에게 이르시되 네 이름이 야곱이지마는 네 이름을 다시는 야곱이라 부르지 않겠고 이스라엘이 네 이름이 되리라 하시고 그가 그의 이름을 이스라엘이라 부르시고 하나님이 그에게 이르시되 나는 전능한 하나님이라 생육하며 번성하라 한 백성과 백성의 총회가 네게서 나오고 왕들이 네 허리에서 나오리라’
야곱의 사건을 통해서도 더 명확히 볼 수 있습니다. 이 말씀은 아브라함에게 동일하게 주신 말씀입니다.
하나님이 야곱을 통해 아브라함의 꿈을 이루는 세부적인 계획을 세웠습니다. 그를 이스라엘이라고 하고, 그 의 배속에서 12명의 아들들을 통해 12지파가 만들어 집지다. 우리가 여기서 확인할 수 있는 것처럼 하나님이 아브라함과 일적선상에서 여러 세대를 걸쳐 동일하게 하나님이 일하시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여러분 야곱을 통해서 아브라함의 약속이 취소되거나 소멸되지 않은 다는 것을 야곱의 획기적인 사건을 통해 알 수 있습니다. 야곱이 이삭을 속여 장자권의 축복을 받는 것이나, 벧엘에서 하나님을 만나 약속의 말씀을 듣는 것이나, 얍복강에서 하나님의 사자와 씨름한 사건이나, 세겜에서 하몰의 아들 세겜이 디나를 겁탈한 사건이나, 그것 때문에 레위와 시므온이 할레를 받아야 결혼할 수 있다고 하몰을 속여 그 성읍을 쑥대밭으로 만들어 최대의 위기를 맞이하게 되는 사건이나, 벧엘로 다시 올라간 사건 등을 상세히 다룰 수는 없지만 이런 사건들을 통해 아무리 야곱이 인간적인 방법과 술수를 동원한다할지라도 하나님이 아브라함에게 약속한 그 약속은 반드시 성취된다는 것을 보여주는 획기적인 사건입니다.
저번 주도 살펴보았지만 모세를 통해 이제 새로운 민족을 이루도록 모세를 부르시지요. 출3:15 ‘하나님이 또 모세에게 이르시되 너는 이스라엘 자손에게 이같이 이르기를 너희 조상의 하나님여호와 곧 아브라함의 하나님, 이삭의 하나님, 야곱의 하나님께서 나를 너희에게 보내셨다 하라 이는 나의 영원한 이름이요 대대로 기억할 나의 칭호니라’
아브라함의 약속을 이루기 위해 하나님이 오셨다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출애굽 사건은 단순히 종살이하고 있는 유대인들을 해방시키기 위한 것으로 생각하면 안 됩니다.
이것은 언약의 백성을 세우실 그 계획을 구체적으로 실천하고 계신 것입니다. 이스라엘백성들은 가나안땅으로 부르시고 또한 언약의 백성으로서 제사장 나라로서 열방을 향해 구원을 이루실 그 일을 위해 지금 모세를 부르신 것입니다. 그리고 지팡이를 주시고 뱀을 만들게 하시며, 모세의 형 아론을 세우시고 한 것은 이 일을 하나님이 아브라함 때부터 계획하시고 지금 이루시고 계심을 모세를 통해 보여주시는 것입니다.
여러분 분명히 보셔야할 것은 이스라엘백성들이 우상숭배 하다가 죽고, 간음하다가 죽고, 주를 시험하다가 죽고, 불평과 원망하다가 애굽에서 나온 20세 이상은 다 죽었습니다. 이들이 왜 죽었는지 아십니까? 하나님의 계획과 그 언약의 백성들로서 꿈을 전혀 깨닫지 못하고 알지도 못하고 보지도 못했기 때문입니다. 그러니까 삶 그 자체가 원망스러운 것입니다. 아무리 기적을 보고 아무리 하나님이 공급하심을 먹고 누렸지만 하나님의 계획과 꿈을 알지 못하면 광야의 삶을 살아가는 것은 어려운 것입니다. 그러니까 방랑자가 될 수밖에 없는 것이지요.
신약을 사는 우리들은 예수그리스도를 머리로 교회의 몸으로 각 지체로 유기체적으로 연합되어 있는 우리에게는 하나님이 교회를 향한 계획과 꿈을 주셨습니다. 분명한 사실은 구속사적인 관점에서 언약백성의 관점에서 보면 우리의 꿈이 보입니다. 교회를 향한 꿈과 비전을 볼 수 없다면 우리는 이 땅에 살지만 은혜와 평강과 기쁨과 감사의 삶을 놓치면서, 하나님의 하심을 전혀 깨닫지 못하고 살아갈 수밖에 없음을 구약을 통해 볼 수 있어야합니다.
여러 세대를 거처 하나님의 꿈이 이루어진 것을 살펴보았습니다. 우리 또한 교회의 꿈을 통해 여러 세대를 거처 계속 하나님과 친밀한 교제와 교통가운데 생명이 풍성한 놀라운 일들을 이루어 나갈 것입니다. 그래서 후임자를 구할 때도 교회의 꿈과 함께 갈 수 있느냐를 보아야 되겠구나 하는 생각을 많이 하고 있습니다. 교회를 향해 주신 하나님의 꿈과 같이 가지 못하면 그 만큼 부흥의 때는 더디 이루어질 수밖에 없기 때문입니다. 사명과 헌신은 다릅니다. 교회는 복음의 삶을 살아야 되며 하나님나라확장을 이루어야 합니다. 이것은 사명입니다. 물론 헌신도 함께 갑니다마는 예를 들어 대전시에 있는 교회가 모두 꿈이 같다면 하나님이 대전시에 있는 모든 교회를 경쟁시키는 것이 됩니다.
그래서 우리교회가 헌신된 마음으로 하나님이 주신 중보자적 사명을 분명히 깨닫고 하나님이 중보자를 세우시고 부르시고 계시다는 것을 그리고 그 사명이 무엇인가를 조금씩 보여주고 있다고 믿습니다. 그것이 무엇이냐 하면 나갔던 성도들이 다시 들어오는 것입니다. 우리교회는 대부분 새 신자들도 오시지만 나갔던 사람들이 다시 들어오는 형태입니다. 왜 이런 현상이 나타나느냐하면 이 시대 흩어진 수백만 하나님의 백성들을 불러 모으는 일에 우리교회도 지금 사용하고 있다는 증거로 삼으시면 하나님의 계획이 보입니다.
다음 주에 계속해서 함께 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