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5회] <사상>지 발행하다 <사상계> 창간
장준하 평전/[9장] 시대의 양식 <사상계> 창간 2008/12/05 08:00 김삼웅 장준하는 국민사상연구원의 직원으로서 <사상>의 편집을 맡았다.
특이했던 점은 국민사상연구원이 정부기관이었지만, <사상>의 편집ㆍ발행은 민간인에게 맡겼다는 사실이다. 정부기관지라면 무상으로 배포해야 하는데, 당시 정부에 그럴만한 재정적 뒷받침도 없었고, 무엇보다 정부가 직접 제작하면 관제사상의 지도라는 인상을 줄까봐 민간인에게 맡겼던 것이다. 문교부장관 백낙준의 배려였다.
이것이 장준하에게는 대단히 좋은 기회가 되었다. <사상>은 1952년 9월호로 창간호를 냈다. 이병도의 '신라의 협동정신과 통일의 지도이념', 김석목의 '주체성과 전환기의 지도이념'을 비롯하여 김재준ㆍ김상기ㆍ배성룡 등의 비중 있는 논문을 실었다.
장준하는 창간호의 편집후기에서 “우리 민족 4천 년의 역사는 실로 이 땅에 생을 받았던 모든 생명들의 사고와 행위의 집적이다. 그 속에는 이 집단의 고민ㆍ희열ㆍ성공ㆍ실패 등 모든 모습이 아로 새겨져 있다.” (주석 3)라고 썼다.
창간호는 3천 부를 찍어 서점에 배포했다. 학계와 학생들 사이에 인기가 있었지만 일반 국민은 별 관심을 보이지 않았다. 주한 미국 공보원이 2,000부 씩을 사서 정부 기관과 주요 인사들에게 무료 배포하겠다고 제의하여 제 2호는 5,000부를 찍었다. 그러나 이것이 실책이었다. 창간호를 돈을 주고 사서 읽었던 기관ㆍ인사들이 대부분 공짜로 받게 되면서 시중에 깔았던 잡지가 그대로 반품이 되었다. 미국 공보원은 잡지를 도와주는 뜻으로 2,000부나 사 주었는데 이로 인해 출발부터 판매에서 타격을 받게 되었다.
제 3호부터는 책을 사 주는 대신 용지로 도와달라고 하여 미국 공보원이 수락했지만, 한번 ‘공짜’ 인식이 든 <사상>의 판매 부진은 제 3, 4호까지 이어졌다. 이를 계기로 장준하는 무가지를 함부로 낸다는 것이 잡지경영에 얼마나 타격을 주게된다는 사실을 뼈아프게 인식하고, 뒷날 <사상계>의 반품 때에는 아깝지만 헌책방에 내다 팔지 않고 반드시 절단하여 폐품 처리하도록 했다. <사상>은 반품이 거듭되고 미 공보원도 더 이상 용지의 지원을 중단하여 통권 4호인 12월호를 마지막 호로 하여 문을 닫게 되었다.
<사상>지의 종간과 관련하여 색다른 증언이 있다. 이승만 대통령의 작용이란 주장이다. 부산 피난 시절 <사상>지에서 장준하와 함께 일한 바 있는 KBS사장을 지낸 서영훈의 증언이다. 이승만의 최측근 이기붕의 부인 박마리아가 자기 남편과 라이벌관계로 인식되는 백낙준이 뒤에서 <사상>지를 지원하면서 세력을 형성하고, 주로 흥사단 계열과 비판적인 인사들이 집필하니, 이 잡지를 더 이상 내지 못하도록 이 대통령에게 밀고했다고 한다. 이 대통령은 백낙준을 관저로 불러 사실여부를 추궁하고, 재정지원자인 자유당 소속 이교승 의원에게도 돈을 지원하지 못하도록 하여 결국 <사상>지가 폐간되었다는 것이다.(주석 4)
꽃이 지면서 열매를 맺기 시작하듯이, 장준하에게는 <사상>의 종간이 <사상계>창간의 계기가 되었다. 그동안 몸담았던 국민사상연구원에 사직서를 내고 새 잡지의 창간에 나섰다. <사상> 제 5권에 싣기 위해 모아둔 원고뭉치를 들고 혼자서 허허벌판으로 나왔다.
여기서 ‘벌판’이란 용어를 썼지만, 1953년 한국의 상황은 여전히 전쟁 중이었다. 4월 12일 이승만 대통령은 휴전반대ㆍ단독북진을 주장하는 성명을 발표하고, 6월 18일에는 반공포로 2만 5,000여 명을 석방했다. 이에 앞서 2월에는 화폐개혁을 단행하여 원을 환으로 100대 1로 평가절하했다. 7월에는 한국정부가 불참한 가운데 휴전협정이 체결되고, 8월에는 정부에 비판적인 연합신문ㆍ동양통신 편집국장 정국은이 정부전복 음모 혐의로 체포되어 처형되었다.
전국토가 허허벌판이었다. 전란으로 수백만 명의 국민이 죽거나 부상당하고, 가족이 이산되고, 가산이 불타고, 먹고 살기가 힘들었다. 벌판은 장준하가 장정 6천리의 고행길을 걷던 그런 벌판과 크게 다르지 않았다. 경교장에서 모셨던 김구는 암살되어 ‘불온’의 대상으로 낙인되고, 비서 시절에 지켜보았던 이승만 대통령은 국난을 막지 못한 채 부산에 피난와서도 권력놀음에 영일이 없었다.
6ㆍ25전쟁 중인 1952년 여름, 이 대통령은 정치파동을 일으켜 직선제 개헌을 강행했다.
6ㆍ25전쟁 중 터져 나온 행정상의 무능, 부정부패, 국민방위군사건과 거창양민학살사건 등은 이 대통령의 권위를 실추시켜 다가오는 제 2대 대통령선거에서 연임을 위협하고 있었다.
이승만은 국회의 간접선거로는 당선이 불가능함을 알고 대통령직선제와 국회양원제를 골자로 하는 개헌안을 제출했지만, 국회에서 부결되었다. 이에 이승만은 국민회ㆍ족청ㆍ대한청년단ㆍ노동총연맹 등 어용단체를 동원하여 관제데모를 부추기고 정치깡패 집단인 백골단ㆍ땃벌떼ㆍ민족자결단 등의 이름으로 벽보와 비라가 부산 일대를 뒤덮었다.
이승만은 이범석을 내무장관, 원용덕을 영남지구계엄사령관에 임명하여 야당 의원들을 체포하여 국제공산당과 결탁했다는 혐의를 씌우고, 이른바 발췌개헌안을 통과시켜 전란 중에 직선제 대통령선거를 실시하여 다시 당선되었다. 이때 개헌과정에서 내무장관으로 이 대통령의 오른팔 역할을 하던 이범석은 자유당의 부통령후보가 되었으나, 이승만은 이범석의 족청계가 세력이 커지는 것을 막기 위해 선거도중에 무소속의 함태영을 런닝메이트로 지지하여 당선시키고 이범석의 족청계를 숙청했다. 그리고 1953년 봄, 휴전을 반대하며 북진통일을 주장하고 있었다. 이범석의 꼴만 우습게 되었다.
주석
3) 장준하, 앞의 글, 같은 쪽.
4) 서영훈, '6.25 동란 중 부산에서 있었던 일', <광복50년과 장준하>, 65쪽.
특이했던 점은 국민사상연구원이 정부기관이었지만, <사상>의 편집ㆍ발행은 민간인에게 맡겼다는 사실이다. 정부기관지라면 무상으로 배포해야 하는데, 당시 정부에 그럴만한 재정적 뒷받침도 없었고, 무엇보다 정부가 직접 제작하면 관제사상의 지도라는 인상을 줄까봐 민간인에게 맡겼던 것이다. 문교부장관 백낙준의 배려였다.
이것이 장준하에게는 대단히 좋은 기회가 되었다. <사상>은 1952년 9월호로 창간호를 냈다. 이병도의 '신라의 협동정신과 통일의 지도이념', 김석목의 '주체성과 전환기의 지도이념'을 비롯하여 김재준ㆍ김상기ㆍ배성룡 등의 비중 있는 논문을 실었다.
장준하는 창간호의 편집후기에서 “우리 민족 4천 년의 역사는 실로 이 땅에 생을 받았던 모든 생명들의 사고와 행위의 집적이다. 그 속에는 이 집단의 고민ㆍ희열ㆍ성공ㆍ실패 등 모든 모습이 아로 새겨져 있다.” (주석 3)라고 썼다.
창간호는 3천 부를 찍어 서점에 배포했다. 학계와 학생들 사이에 인기가 있었지만 일반 국민은 별 관심을 보이지 않았다. 주한 미국 공보원이 2,000부 씩을 사서 정부 기관과 주요 인사들에게 무료 배포하겠다고 제의하여 제 2호는 5,000부를 찍었다. 그러나 이것이 실책이었다. 창간호를 돈을 주고 사서 읽었던 기관ㆍ인사들이 대부분 공짜로 받게 되면서 시중에 깔았던 잡지가 그대로 반품이 되었다. 미국 공보원은 잡지를 도와주는 뜻으로 2,000부나 사 주었는데 이로 인해 출발부터 판매에서 타격을 받게 되었다.
제 3호부터는 책을 사 주는 대신 용지로 도와달라고 하여 미국 공보원이 수락했지만, 한번 ‘공짜’ 인식이 든 <사상>의 판매 부진은 제 3, 4호까지 이어졌다. 이를 계기로 장준하는 무가지를 함부로 낸다는 것이 잡지경영에 얼마나 타격을 주게된다는 사실을 뼈아프게 인식하고, 뒷날 <사상계>의 반품 때에는 아깝지만 헌책방에 내다 팔지 않고 반드시 절단하여 폐품 처리하도록 했다. <사상>은 반품이 거듭되고 미 공보원도 더 이상 용지의 지원을 중단하여 통권 4호인 12월호를 마지막 호로 하여 문을 닫게 되었다.
<사상>지의 종간과 관련하여 색다른 증언이 있다. 이승만 대통령의 작용이란 주장이다. 부산 피난 시절 <사상>지에서 장준하와 함께 일한 바 있는 KBS사장을 지낸 서영훈의 증언이다. 이승만의 최측근 이기붕의 부인 박마리아가 자기 남편과 라이벌관계로 인식되는 백낙준이 뒤에서 <사상>지를 지원하면서 세력을 형성하고, 주로 흥사단 계열과 비판적인 인사들이 집필하니, 이 잡지를 더 이상 내지 못하도록 이 대통령에게 밀고했다고 한다. 이 대통령은 백낙준을 관저로 불러 사실여부를 추궁하고, 재정지원자인 자유당 소속 이교승 의원에게도 돈을 지원하지 못하도록 하여 결국 <사상>지가 폐간되었다는 것이다.(주석 4)
전성기의 사상계 가족들 - 1960년 강용준이 '철조망'으로 신인문학상을 받자 축하모임을 가졌다.
꽃이 지면서 열매를 맺기 시작하듯이, 장준하에게는 <사상>의 종간이 <사상계>창간의 계기가 되었다. 그동안 몸담았던 국민사상연구원에 사직서를 내고 새 잡지의 창간에 나섰다. <사상> 제 5권에 싣기 위해 모아둔 원고뭉치를 들고 혼자서 허허벌판으로 나왔다.
여기서 ‘벌판’이란 용어를 썼지만, 1953년 한국의 상황은 여전히 전쟁 중이었다. 4월 12일 이승만 대통령은 휴전반대ㆍ단독북진을 주장하는 성명을 발표하고, 6월 18일에는 반공포로 2만 5,000여 명을 석방했다. 이에 앞서 2월에는 화폐개혁을 단행하여 원을 환으로 100대 1로 평가절하했다. 7월에는 한국정부가 불참한 가운데 휴전협정이 체결되고, 8월에는 정부에 비판적인 연합신문ㆍ동양통신 편집국장 정국은이 정부전복 음모 혐의로 체포되어 처형되었다.
전국토가 허허벌판이었다. 전란으로 수백만 명의 국민이 죽거나 부상당하고, 가족이 이산되고, 가산이 불타고, 먹고 살기가 힘들었다. 벌판은 장준하가 장정 6천리의 고행길을 걷던 그런 벌판과 크게 다르지 않았다. 경교장에서 모셨던 김구는 암살되어 ‘불온’의 대상으로 낙인되고, 비서 시절에 지켜보았던 이승만 대통령은 국난을 막지 못한 채 부산에 피난와서도 권력놀음에 영일이 없었다.
6ㆍ25전쟁 중인 1952년 여름, 이 대통령은 정치파동을 일으켜 직선제 개헌을 강행했다.
6ㆍ25전쟁 중 터져 나온 행정상의 무능, 부정부패, 국민방위군사건과 거창양민학살사건 등은 이 대통령의 권위를 실추시켜 다가오는 제 2대 대통령선거에서 연임을 위협하고 있었다.
이승만은 국회의 간접선거로는 당선이 불가능함을 알고 대통령직선제와 국회양원제를 골자로 하는 개헌안을 제출했지만, 국회에서 부결되었다. 이에 이승만은 국민회ㆍ족청ㆍ대한청년단ㆍ노동총연맹 등 어용단체를 동원하여 관제데모를 부추기고 정치깡패 집단인 백골단ㆍ땃벌떼ㆍ민족자결단 등의 이름으로 벽보와 비라가 부산 일대를 뒤덮었다.
이승만은 이범석을 내무장관, 원용덕을 영남지구계엄사령관에 임명하여 야당 의원들을 체포하여 국제공산당과 결탁했다는 혐의를 씌우고, 이른바 발췌개헌안을 통과시켜 전란 중에 직선제 대통령선거를 실시하여 다시 당선되었다. 이때 개헌과정에서 내무장관으로 이 대통령의 오른팔 역할을 하던 이범석은 자유당의 부통령후보가 되었으나, 이승만은 이범석의 족청계가 세력이 커지는 것을 막기 위해 선거도중에 무소속의 함태영을 런닝메이트로 지지하여 당선시키고 이범석의 족청계를 숙청했다. 그리고 1953년 봄, 휴전을 반대하며 북진통일을 주장하고 있었다. 이범석의 꼴만 우습게 되었다.
주석
3) 장준하, 앞의 글, 같은 쪽.
4) 서영훈, '6.25 동란 중 부산에서 있었던 일', <광복50년과 장준하>, 65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