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환자실 간이식 간호사의 일기
잊을 수 없는 동료 ‘담당의’
간이식 환자의 중환자실 치료는 레지던트가 아닌 펠로우가 전담한다. 간이식 후 내과의가 환자를 치료하는 서구의 시스템과는 달리 우리 병원은 수술에 직접 참여한 외과의가 중환자실 치료까지 전담하고 있다.
15년 동안 수많은 담당의를 거쳐 갔지만 그 중에서도 특히 기억에 남는 담당의가 있다.
무뚝뚝한 성격에도 환자에게만큼은 말끝을 늘이며 아들같이 살갑게 굴던 그 담당의는 간호사들 사이에선 FM이라 불리며 무조건 원칙대로, 원리원칙을 중시하던 사람이었다.
하루는 수술장과 중환자실을 오가는 바쁜 와중에 시간을 쪼개어 감염관리실 교육을 받고 왔다며 중환자실의 감염과 항생제 내성균이 그렇게 무서운 건지 새삼 깨달았다고 하였다.
그러면서 본인도 잘 하겠지만 만약 손을 씻어야 하는 순간에 씻지 않거나 시술을 할 때 무균적으로 하지 않으면 망설이지 말고 즉시 말해달라는 것이었다.
우리는 기대 반 흥미 반의 마음으로 몇 달 간 담당의의 행동을 예의주시하며 담당의의 행동을 지적해 주었다. 아마도 그때부터 간이식 팀의 Listen & Speak Up 문화는 자연스럽게 정착된 것 같다. 그 효과였을까?
몇 달 후 중환자실 내 감염과 항생제 내성균 발생은 눈에 띄게 줄어들었고 2015년과 2016년 연속으로 중환자간호팀은 손씻기 최우수부서로 선정되는 영광을 누렸다.
특히 우리 부서는 간이식 후 면역억제제의 사용으로 면역력이 타 중환자들보다 현저히 떨어져 있다.
그리하여 우리 중환자실 의료진들은 입사 시점부터 감염 전파 예방의 가장 기본인 ‘손씻기’를 습관화 하도록 교육받는다. 비록 손은 다 터지고 갈라져서 남들 앞에 보이는 것조차 부끄럽지만 이 또한 중환자실 간호사의 훈장 같은 것이다.

잊을 수 없는 가족 ‘보호자’
5년여 전부터 전체 환자 중 알코올성 간질환 환자의 비율은 점차 증가하여 지금은 전체 간이식의 80%이상을 차지하고 있다.
불안정한 경제성장 탓인지, 비관적인 사회 분위기 탓인지는 모르겠으나 알코올성 간경화 환자들은 일찍이 이환되어 꾸준한 치료와 자기관리를 해 온 바이러스성 간염 환자와는 달리 음주를 지속하다가 어느 날 갑자기 상태가 급속도로 악화되어 병원을 찾게 되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그리하여 중증도가 높고 갖가지 합병증이 동반된 경우가 많으며 이로 인해 중환자실 재원 기간이 길고 전동 후에도 회복을 위해 긴시간이 소요된다.
하지만 직업이 없는 경우가 대부분이어서 경제적인 어려움을 호소하는 환자와 가족들을 종종 볼 수 있다.
내가 만난 한 환자도 60대 초반의 나이에 40년 가까이 지속해 온 음주로 간경변증을 진단받고 치료를 권유받았으나 거부하고 음주를 지속하다 증상이 악화되어 간이식 후 중환자실에 입실하였다.
환자는 마취가 깬 시점부터 모든 치료를 거부하고 퇴원만을 요구하였고 그러한 와중에도 보호자는 3일 동안 면회조차 오지 않았다.
나는 도대체 무슨 사유로 이렇게 큰 수술을 한 환자를 보러 오지도 않는지 오늘은 꼭 연락해서 담판을 지어야지 하며 연락처를 찾아보았다.
적혀 있는 한 개의 연락처는 환자의 유일한 보호자이자 딸이자 환자에게 간을 준 기증자로, 이식 후 통증과 메스꺼움으로 가지 못했다며 지금 바로 중환자실로 내려오겠다고 하였다.
올해 스무 살이 된 딸은 3일만에 본 아버지의 병약한 모습에 터져 나오려는 눈물을 꾹 참고 치료를 거부하며 당장 퇴원하자는 아버지를 달래고 설득하였다.
나는 딸로부터 아버지가 수술비가 비싸다는 것을 알고 하나 뿐인 딸의 다음 학기 등록금이 모자랄까 봐 치료를 받지 않겠다고 했다는 이야기를 듣게 되었다.
우리는 경제적인 도움을 줄 수는 없었지만 중환자실의 재원일수를 줄여 퇴원일을 앞당기는 것이 환자에게 도움이 될 것이라 생각하고 딸과 함께 환자의 호흡재활 및 운동, 심리적 안정에 초점을 맞춘 간호에 대해 계획을 세우고 진행한 결과 예정보다 일찍 병동으로 올라갈 수 있었다.
어린 나이었지만 어떠한 보호자들보다 강단 있는 모습으로 꿋꿋하게 아버지에게 삶의 이유를 일깨워 주고 용기를 주던 딸의 모습이 아직도 눈에 선하다.
유일한 가족으로서 경제력이 전혀 없는 딸이 비관적인 아버지를 끝내 설득하여 본인의 간을 기증하는 과정까지 얼마나 많은 고민을 하고 상처를 입었을까 생각하면서
“간호란 질병을 간호하는 것이 아니라 병든 사람을 간호한다”는 나이팅게일의 말처럼 신체적, 정신적, 사회적인 상태뿐 아니라 개인과 가족의 삶을 이해하고 공감하는 것이 간호의 시작이라는 것을 깨달았다. 또한 환자에게 최고의 간호란 가족의 지지와 사랑이라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잊을 수 없는 환자
나의 첫 번째 이별을 기억한다.
두 달 남짓한 오리엔테이션 기간을 마치고 떨리는 마음으로 독립 첫 날 배정받은 내 환자는 간이식 후 폐합병증과 패혈증이 동반된 50대의 남자 환자였고, 이미 소생 가능성이 없다고 판단하여 심폐소생술 거절 동의서를 받은 상태였다.
가족들과 죽음의 순간을 지켜보며 심정지가 오고, 담당의의 사망선언과 함께 가족들은 오열했다. 환자를 편히 보내드려야 한다는 나의 이성과는 달리 아무리 입술을 꽉 깨물어도 터져 나오는 울음을 주체할 수 없었고, 도저히 내 감정을 어떻게 추스려야 할지 알 수 없었다.
결국엔 담당 간호사의 본분도 망각한 채 가족들 옆에서 함께 엉엉 울었던 기억이 지금도 선명하다.
내일이면 54번째 생신을 맞이하는 아빠의 볼에 입을 맞추고 아빠 딸로 태어나게 해 줘서 정말 고맙다며 나중에 꼭 다시 만나자고 약속하는 가족들의 등 뒤에서 나의 감정은 어떤 것이었을까?
스물셋 아직은 어린 나이에 한 번도 겪어보지 못했던 죽음에 대한 두려움이었을까? 아니면 입사와 동시에 가족들과 떨어져 지낸 시간에 대한 서글픔과 그리움이었을까? 환자에 대한 죄송한 마음이었을까?
그 후로 그러한 이별의 순간을 겪을 때마다 난 의식적으로든 무의식적으로든 내 마음의 벽에 쇳물을 부었고 연차가 조금씩 쌓이면서 어느 새 눈물 한 방울 안 흘릴 만큼 쇳덩이같이 단단해졌다.
눈물을 흘릴 시간에 당장의 전산정리가 더 급했고, 중환자실은 여전히 전쟁터처럼 바빴으며 환자를 장례식장으로 보내고 다음 환자를 받는 게 더 중요하다고 판단 했기 때문이었고 선배들 또한 암묵적이지만 그렇게 가르쳐 주었다.
과연 이게 옳은 일일까? 사실 가끔 의문이 들기도 하고 죽음이란 것에 둔감해진 기계 같은 간호사가 되는 건 아닐까 두렵기도 했지만 그 해답을 줄 수 있는 사람은 주변에 없었다.
그러던 나에게 깨달음을 준 사람은 다름 아닌 환자였다. 8년차 간호사로 수십 번의 이별을 겪을 즈음 난 또 한번의 이별을 준비하고 있었다.
50대의 남자 환자의 간이식 수술 후 일반병동에 전동조차 못 가보고 석 달을 넘게 중환자실에 있으면서 환자는 예민해질 대로 예민해져 담당 간호사는 으레 환자의 짜증받이가 되어야 했다.
젊었을 때부터 술로 보낸 시간 때문이었을까. 보호자의 발길도 뜸해 면회시간에도 홀로 창밖만 쳐다보고 있었다.
하지만 유독 나에게는 부드럽게 대해 주셨고 나의 썰렁한 농담에도 어색한 미소를 지으며 담당의의 잔소리엔 화를 버럭 냈었지만 내 얘기는 들어 주려 노력했다.
그런 환자에게 나 또한 더욱 정이 갔었고 보호자가 찾아오지 않는 날엔 “제가 보호자 해 드릴께요!”하며 말수 적은 나도 일하는 내내 수다를 떨게 만들었다.
하지만 이별의 순간은 찾아왔고 임종을 지키는 보호자 하나 없이 죽음의 순간에도 환자는 너무나 쓸쓸하였다.
난 그 동안 다져진 마음과는 다르게 어찌할 바를 몰라 가까이 다가갈 수 없었고 더욱이 수축기압이 50대가 되는 상황에서도 환자는 의식의 끈을 붙잡고 있었다.
내가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고 방문 앞을 서성이고 있을 때 환자는 힘든 고갯짓으로 조용히 나를 불렀다. 그리고 기관절개관으로 목소리는 나오지 않았지만 천천히 또박또박 그 동안 고마웠다고 말하고는 눈을 감으셨다.
순간 쇳덩이 같은 마음이 녹기라도 하듯 터져 나오는 울음을 참을 수 없었고 그 때엔 죽음에 대한 두려움이 아닌 환자의 이별을 더 따뜻 하게 준비하지 못한 죄송함과 먼저 고맙다고 말해준 것에 대한 감사함의 눈물이었다.
임종은 간호사에겐 피할 수 없는 이별의 과정이다.
특히 중환자실 간호사에게는 그렇다. 우리는 으레 죽음을 맞이하는 환자들의 간호요구의 변화와 간호사들의 역할 변화 요구, 의료한계에 대한 심적인 부담으로 인하여 임종환자를 간호하는 것을 어려워하며 임종 환자의 고통을 공유함으로써 간호사 자신도 고통을 같이 경험하게 된다.
그래서 우린 임종을 앞둔 환자를 돌보면서 육체적인 피로와 함께 환자를 살리기 위해 아무것도 할 수 없다는 무력감, 환자가 죽을 경우 보상 없는 헌신과 절망감 등으로 어쩌지도 못한 채 매일매일 마음에 쇳물을 붇고 있는지도 모른다.
죽음의 문턱에 서 있는 환자와 그를 지켜보는 보호자들을 위해 과연 우리가 할 수 있는 일들은 무엇일까?
가면 같은 얼굴로 슬픔을 억지로 감추기보다 함께 슬퍼하고 애도의 시간을 가지며 환자 생전의 추억에 대해 함께 담소를 나누고 가족들의 이야기를 들어 주며 그동안 헌신으로 돌봐온 가족들에게 따뜻한 위로와 감사의 인사를 전해 보는 것은 어떨까?
더불어 나의 마음을 다시 녹여 주고 임종 간호에 대해 다시 한 번 생각하게 해 주었던 환자분에게 진심으로 감사드린다.

잊을 수 없는 후배
6년 전 신입 간호사로 우리 부서에 처음 발령 받았던 그 친구는 빛나거나 눈에 띄는 활발한 성격은 아니었지만 프리셉티 때부터 성실한 자세로 이름처럼 초롱초롱한 눈을 빛내며 매사에 차분하고 조용하게 묵묵히 자기 일을 해내는 간호사였다.
독립하고 얼마 지나지 않았을 무렵 환자는 간성 혼수와 섬망 증상으로 인계 직후부터 기본적인 간호수행이 불가능할 정도로 비협조적이었다.
담당의는 활력징후가 불안정하고 신장 기능이 떨어져 있는 환자에게 진정제를 투여할 수 없을 것 같다며 사지 억제대를 적용 하도록 하였다.
흔히 간경화증 환자의 특성상 간성혼수로 같은 말을 반복하고 의료진을 불신하며 모든 치료를 거부하는 경우는 그나마 양호한 편이다.
그 날 그 간호사는 초인적인 힘을 발휘하는 환자에게 속수무책으로 맞고 차이고 욕을 얻어먹으면서도 허리 디스크가 심했던 환자에게 사지 억제대를 하면 허리 통증이 더 심해질 것이라며 굳이 억제대를 묶지 않고 환자의 위험 행동을 관찰하며 옆에 함께 있어 주는 것이었다.
환자와 눈을 맞추며 차분한 목소리로 상황에 대한 설명을 하고 불안해 하는 환자의 손을 잡아주고 있던 그 간호사에게 많이 힘들지 않냐고 물어봤을 때 헝클어진 머리를 정돈하며 “속상하긴 하지만 의식이 명료하지 않아서 그런 걸 어쩌겠어요?
그래도 환자분은 저보다 약자잖아요.” 라고 밝게 웃는 모습을 보고 뒤통수가 당길 정도로 무언가가 세게 머리를 내리치는 기분이었다.
그리고 그날 밤 편안히 숙면을 취한 환자는 거짓말처럼 의식이 명료해져 다음 날 일반 병동으로 전동을 갈 수 있었다.
내가 이상적으로 꿈꾸었던 ‘완벽한 간호사’는 어떤 모습이었을까?
제 시간에 오차 없이 약물을 투약하고 활력징후를 측정하며 환자의 머리부터 발끝까지 흐트러짐 없는 정돈된 모습으로 다음 번 간호사에게 인계를 주는 간호사일까?
환자의 발생 가능한 문제점을 예측하여 담당의와 의사소통해서 미리 문제 해결을 하는 명석한 두뇌를 가진 간호사일까?
간호에 대한 본질이 그 친구로 인해 뿌리부터 흔들리기 시작했고 지금까지 잘 하고 있었다는 나의 자만감에 경적을 울리는 계기가 되었다.
그 간호사는 지금 비록 다른 뜻을 품어 전혀 다른 일을 하고 있지만 병원을 떠날 때까지 환자를 환자가 아닌 ‘사람’으로 대하는 그 태도는 변함이 없었고 난 지금도 존경하는 간호사를 꼽으라고 한다면 망설이지 않고 그 친구를 떠올릴 것이다....조희주 외과계 중환자실 간호사 00병원 중환자간호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