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자유롭고 싶다. 사산아처럼 자유롭고 싶다.” “나의 불행은 이 세상에 태어났다는 것이다./에밀 시오랑”
우리가 사는 이 세상은 무지개 떠 있는 언덕이 아니고, 동경의 요람도 아니다.
포탄으로 찢긴 대지에서 눈물짓는 이도 있고, 생의 음지에서 갈대처럼 고개를 떨구는 이도 있다.
세상의 음울한 현상에 집중한다면 그 어두운 무게를 감당하기 힘들 것이다.
루마니아 철학자 에밀 시오랑의 이런 염세적 탄식은 얼마나 우울한가.
어디 이 한 사람뿐이겠는가, 생에 대한 감격 없는 눈으로 모래시계를 바라보는 사람들이.
"헛되고 헛되며 헛되고 헛되니 모든 것이 헛되도다(전1:2)"
세상의 현실은 정치가가 손을 댈 수 없다. 세상의 현실은 과학자가 손을 댈 수도 없다.
세상의 현실은 철학자가 개입할 수 없으며, 세상의 현실은 혁명가가 변화시킬 수 있는 것도 아니다.
세상은 어쩔 수가 없다.
그러나......이런 인생관을 가지고 살아갈 수는 없다.
어떻게 살아있는 인간이 죽은 시체를 품고 살아갈 수 있겠는가.
놀랍게도 나는 이 세계의 반전을 보았다. 그리고 믿는다. 하지만 이 반전은 인간이 만들 수 있는 게 아니다.
베들레헴 마구간 구유에 누우신 한 어린아이,
나는 그분으로 말미암은 이 하나의 반전 외에는 이 세계에 그 어떤 반전도 믿지 않으며 기대하지 않는다.
지상이 비극의 소용돌이에 휘말리는 것은 필연적이다. 죄인들의 마을 아닌가.
하지만 이 어린아이에 의해 무의미는 정복되고 이 지상은 하늘로의 사다리가 놓인다.
그분의 십자가가 이 공허한 우주에 종과 횡으로 도장을 찍고,
그분의 부활은 죽어버린 우주라는 나뭇가지에 생명의 새 순이 돋게 한다.
우리가 노래하는 것은 우리에게 노래할 이유가 있기 때문이 아니다.
우리가 믿는 것은 이 세상이 믿을 만하거나 우리에게 믿을 힘이 있기 때문이 아니다.
우리가 희망하는 것은 이 세상에 희망의 근거가 있기 때문이 아니며,
우리가 사랑하는 것은 이 세상이 사랑스럽거나 우리에게 사랑의 본성이 있어서가 아니다.
세상은 죽었고 우리에겐 아무것도 없다. 우리는 아무것도 할 수 없으며, 우리는 아무것도 아니다.
그런데 나는 안다. 그분 때문에 이 무덤 안으로 부활의 새벽 빛이 쏟아져 들어온 것이다.
이 반전은 놀랍다. 이 반전은 결정적이다. 이 반전은 영원하다.
나는 사산아처럼 자유롭고 싶지 않다. 나는 세상에 태어났음을 불행이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나도 인간이기에 다른 인간과 같이 찢어진 세상의 한 복판에 서있지만 그분 안에서다.
나는 노래하고 싶다. 그리고 실제로 노래한다.
나의 시선은 부러진 젓가락처럼 부러진 것이 아니라 나는 영원히 그분을 바라본다.
영원히.
“나는 한 어린아이로 정원에 들어갔다. 그런데 그곳은 무시무시한 곳이었다...
사람들은 성탄절에 머리맡에 걸어놓은 양말에 넣어준 사탕이나 땅콩을 고맙게 생각한다.
그런데 내 양말 속에 두 개의 다리, 나에게 존재를 선물로 주신 이에게 어찌 감사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G.K 체스터튼”
같은 인간이라도 같은 고백이 아니지 않은가. 이것은 감탄이며 놀람이다.
그렇다. 기독교의 본질은 놀람이요 전율이다. 그분의 십자가 때문에, 그리고 부활 때문에.
우리가 사는 이 세계에 찾아온 경이의 근본 때문에. 우리는 그것을 믿어야 한다.
이 세상에 놀랍고 경이로운 것은 오직 예수 그리스도 한 분뿐이다.
2023. 3. 7
이 호 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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