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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년9월16일(월)맑음
월요 강의하다.
기억은 매번 새롭게 업데이트 된다. 뇌는 대상에 대한 시각정보에 변화가 없으면 대상이 존재하지 않는다고 판단한다. 결국 인식이라는 것은 앞 장면의 정보와 뒤 순간 장면의 정보의 차이 값이다. 인식한다는 것은 뇌의 해석이다. 모든 것은 뇌의 착시현상이다=감각기관이 받아드린 정보+α(뇌의 해석). 소위 ‘자아’란 기억이다. 나는 나의 기억이다. 기억할 가치가 있는 정보와 기억할 가치가 없는 정보의 차이를 판단하라.
질문하는 문화가 요구된다. 호모 콰렌스Homo quaerens 질문하는 인간
인공지능이 도래하는 사회에서 인간의 역할은 답을 주는 것이라기보다는 질문을 하는 것이다.
행복을 주는 경험을 찾아서 하라. 여행을 하라. 경험의 이력서가 중요하다. 행복한 삶을 살기 위해서는 자신만의 이야기 꺼리를 만드는 데 돈과 시간을 쓰라. 누구와 시간을 보내느냐가 네가 누구인지 정의해준다.
호모 비아토르 Homo viator 여행하는 인간
호모 로퀜스 Homo loquens 언어적 인간
호로 루덴스 Homo rudens 놀이하는 인간
2019년9월17일(화)맑음
裕谷 閑山 雲山
대견스님 와서 일박하다.
2019년9월18일(수)맑음
<보리행자의 자비관>
당신이 아주 가깝다고 느끼는 사람과
괴로움에 빠져 고통 받고 있는 사람을 눈앞에 그려봅니다.
당신이 숨을 들이마실 때마다 당신의 자비심으로
그의 모든 괴로움과 고통을 들이마신다고 상상해봅니다.
또 당신이 숨을 내쉴 때마다
당신의 다정함, 치유력, 사랑, 기쁨, 행복을 그에게 뿜어준다고 상상해 봅니다.
이제 점차 자비의 울타리를 확장해 봅니다.
당신이 아주 가깝게 느끼는 사람으로부터 당신이 무관심했던 사람에게로
그 다음엔 당신이 싫어하거나 함께 지내기 어려운 사람에게로,
그 다음엔 당신이 아주 극악무도하고 잔인하다고 느끼는 사람에게로까지 말입니다.
나는 무한한 공간과 영원한 시간토록 모든 세계의 모든 생명을 사랑합니다.
나는 모든 생명을 가벼이 여기기 않겠습니다.
나는 모든 생명을 어머니처럼 받들겠습니다.
나는 어떤 경우라도 중생을 미워하거나 배신하지 않겠습니다.
나는 어떤 경우라도 보리심을 배반하지 않겠습니다.
나는 사랑입니다. 나는 보리심입니다.
ON BODHICITTA: The Compassionate Heart of the Enlightened Mind
It is the supreme elixir
That overcomes the sovereignty of death.
It is the inexhaustible treasure
That eliminates poverty in the world.
It is the supreme medicine
That quells the world’s disease.
It is the tree that shelters all beings
Wandering and tired on the path of conditioned existence.
It is the universal bridge
That leads to freedom from unhappy states of birth.
It is the dawning moon of the mind
That dispels the torment of disturbing conceptions.
It is the great sun that finally removes
The misty ignorance of the world. -SHANTIDEVA
보리심(Bodhicitta)-자비로 충만한 깨달은 마음
보리심은 최상의 불사약
죽음의 권세마저 극복하노라
보리심은 결코 고갈되지 보물
세상의 가난을 없애주노라
보리심은 최고의 만병통치약
세상의 질병을 다스리노라
윤회에서 방황하는 지친 삶을 사는
모든 중생에게 쉼터가 되어주는 나무이어라
보리심은 생사고해를 건네주는 다리
불행한 삶에서 벗어나게 해주노라
보리심은 떠오르는 마음의 달
어리석은 개념의 유희를 쫓아내노라
보리심은 안개처럼 드리운 세상의 무지를
남김없이 쫓아내는 위대한 태양이어라 -샨티데바
최근 차마고도와 실크로드를 완주하고 돌아온 快活쾌활거사가 방문하다. 점심공양을 함께 하면서 그간의 밀린 이야기를 나누다. 매년 2월에서 7월까지 중국 시상판나로 가서 차를 만들어 팔면 한 해 할 일을 다 마친 것이라 귀국하여 지내거나 유라시아를 탐방한다고 한다. 쾌활자재 驛馬人生역마인생이다.
2019년9월20일(금)맑음
아미화, 문정, 현정, 향인보살과 함께 구례로 달려가서 명섭스님과 본해스님께 점심공양을 대접하다. 용상방 쓴 것을 본해스님께 전해주다. 구만리 저수지 연꽃을 둘러보고 돌아오다. 태풍 ‘타파’가 온다는 소식이 질펀하다.
2019년9월21일(토)비
과연 비가 추적추적 온다. 00에게서 돈 빌려달라는 전화가 오다. 주역 점을 쳐보니 天山遯천산돈이 나왔다. 그러려니 하다. 오후8시부터 <808TS>를 진행하다. 토요 8pm~일요 8am 까지 가행 정진하는 프로그램이다. 만트라 염송 후 삼매에 들었다 나오는 과정이다. 참가자: 아미화 하심 송계 향산 문정 초록 현정 향인
2019년9월22일(일)비
국민이 정치에 무관심하면 가장 저질스러운 정치인들에게 지배당한다. -플라톤
국민이 국법을 준수하는 것은 의무이고, 국민이 위임한 모든 권력을 철저하게 감시 감독하는 것은 국민의 권리입니다.
정치에 무관심한 것은 자기 인생에 무책임한 것입니다. 수많은 시민 단체들이 심장이 뛰듯이 살아 움직이지 않고서는 그 사회와 국가는 병들 수밖에 없고, 민주주의는 시들어 꽃을 피울 수 없다는 것은 절대 불변의 사실입니다.
정치인들! 국민들의 전폭적인 지지와 신뢰를 받는 그들은 우리의 행복을 만드는 마술사입니다. -천년의 질문(조정래)
*요세프 괴벨스의 정치선전(프로파간다)
나에게 한 문장만 달라. 누구든 범죄자로 만들 수 있다.
민주주의가 철천지원수에게 자신을 파멸시킬 방법을 손수 알려주었다는 이야기는 아마도 민주주의를 비꼬는 풍자 중 가장 뛰어난 것이 될 것이다.
선전은 본질상 일종의 예술이다. 그리고 선전원은 엄밀한 단어 상 의미에 있어 군중심리예술가라고 볼 수 있다. 선전원의 가장 중요한 임무는 매일 매 시간 민중의 맥박 소리에 귀 기울이고 어떻게 맥박이 뛰는지 듣는 것이다. 그리고 그 맥박의 박자에 맞추어 조치를 취하는 것이다.
분노와 증오는 대중을 열광시키는 가장 강력한 힘이다. 선전의 가장 큰 적은 ‘지식인 주의’ 이다.
대중이란 작은 거짓말보다는 더 큰 거짓말에 속는다.
거짓말은 처음에는 부정되고 그 다음에는 의심받지만 되풀이하면 결국 모든 사람이 믿게 된다.
여론조사라는 것은 대상을 누구로 잡느냐에 따라서 결과가 달라지지.
선동은 문장 한 줄로도 가능하지만 그것을 반박하려면 수십 장의 문서와 증거가 필요하다. 그리고 그것을 반박하려고 할 때면 사람들은 이미 선동당해 있다.
당신이 거짓말을 자주 하면 할수록 대중들은 그것을 믿게 되며 마침내 자기 자신도 믿게 된다.
2019년9월28일(토)흐리다가 비 오다가
공부모임 갖다. 9:30am~5:00pm. 등현스님이 강의하시다. 참석자는 모두 8명. 구사론의 내용을 정리하되 불교 일대시교를 관통하는 관점으로 강의해주신다. 너무나 적실하고 실용적이다. 보살님들이 점심과 차담을 준비하다.
2019년9월29일(일)맑음
匡濟광제선사 다솔사 불이암 東初동초스님과 함께 진주선원에 오시다. 천황식당에서 점심 공양하고 다솔사 불이암으로 가다. 밤새 도담을 나누다. 차실에 에 걸려 있는 茶詩를 감상하다. 소암素菴 현중화玄中和 선생(1907∼1997) 글씨다.
曾到不曾到,
且喫一杯茶;
待客只如此,
冷淡是僧家.
-선문염송 411칙 조주끽다 부분에 목암법충牧庵法忠(1084~1149) 선사의 평창
일찍이 여기에 온 적이 있건 없건
다만 차나 한 잔 마시라 할 뿐
손님 대접이 다만 이러하니
이런 담박함이 절집의 가풍이라
광제선사가 내게 맞는 법호를 생각하다가 ‘笑山소산’이라하면 어떻겠느냐 하신다. 미소 짓는 산, 웃는 산 Laughing Mountain. 광제선사가 운문선사의 수미산 화두에 착어를 붙이면서 ‘笑破須彌山소파수미산’이라 지으신 선구에서 따온 것이다. 의미와 어감이 좋다.
2019년9월30일(월)맑음
진주선원 보살님들이 세 분 스님께 정성스레 점심공양을 올리다. 차 한 잔하고 산청 安寂寺 一味 老長을 찾아뵈러 가다. 스님께서는 開雲祖師가 주석한 능엄경에 의거하여 性命雙修성명쌍수를 수행하신다. 스님은 자신의 수행담을 들려주신다. 정진여여 하시라 인사드리고 진주로 돌아오다. 광제스님과 동초스님을 불이암으로 돌아가시다. 저녁 강의하다. 때 늦은 태풍이 온다고 한다.
2019년10월1일(화)흐리고 비
아침에 아미화, 문정, 현정과 연경 부부와 함께 영천으로 가서 진성도예를 방문하다. 오는 길에 고령 가야박물관을 참관하다.
2019년10월2일(수)태풍
비가 내린다,
하늘의 것들은 비를 타고 내려온다,
비가 오른다,
땅 위의 것들이 비를 타고 올라간다,
높은 것들이 떨어져 낮은 곳으로 스미려 하고
낮은 것들은 높이 올라 나르려 한다,
마음속 높은 것이 스며들면
함초롬 젖은 평화 지금여기
마음속 낮은 것이 날아가면
지금 여기 텅 빈 고요
비 그쳐 마음 쉬고,
비 오고 가듯 마음 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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體露堂堂葉已凋, 체로당당엽이조
一番疎雨轉蕭蕭; 일번소우전소소
來年更有新條在, 내년갱유신조재
腦亂春風卒未休. 뇌란춘풍졸미휴
-霅溪O益 선사(선문염송)
본체가 드러남이여
잎가지 다 말랐네,
한줄기 성근 빗발 차갑게 꽂히는 곳
오는 해 다시 피어날 새 가지를
신나게 흔들어댈 봄바람이여, 언제 쉰 적 있으랴!
2019년10월6일(일)맑음
어제 연경부부가 차 운전하여 화엄사 오다. 본해스님 배려로 선방 객실에 머물다. 조용준이 쓴 <일본 도자기 여행>을 읽다. 임진왜란 때 끌려왔던 조선인 사기장(도공)들은 대대로 도자예술을 발전시켜서 세계최고 수준의 도자기를 유럽에 수출하여 막대한 부를 불러들였다. 그러나 도자기 수출은 사가번佐賀藩 막부幕府의 전매사업이었기에 수입은 사가 막부로 귀속되었고, 막부는 그 수출대금으로 암스트롱 대포와 총과 군함을 구매하여 당시 프로이센의 군사력과 맞먹을만한 무장을 할 수 있었다. 이렇게 군비를 확충한 사가佐賀현은 조슈번長州藩과 연합하여 삿초동맹薩長同盟을 결성한 뒤 에도江戶 막부의 사무라이군대와의 전쟁에서 승리하게 되었다. 이것이 메이지 유신이며 이로부터 征韓論정한론(요시다 쇼인吉田松陰1830~1859)이 날개를 달아 조선을 침략했으며 대동아전쟁으로 치닫게 되었다. 조선에서 천대받던 도공의 기술이 일본에서 성공한 결실이 도리어 칼날이 되어 조선으로 되돌아와 조선을 찔렀으니. 고향에서 버림받던 천민이 양반주인에게 되갚아준 복수이냐, 원망이냐? 인간이란 아름다음을 창조한다는 예술로도 복수하는 묘한 존재이다. 도자기가 고가로 팔려서 살상무기를 사는데 쓰일 줄을 누가 알았겠는가? 예술가가 만들어낸 작품을 결국 누가 어떻게 쓰느냐가 문제인 것이지 작품자체가 문제일리는 없다. 그런데도 조선도공의 한이 서린 도자기는 총과 대포가 되어 조선을 침략하는데 써졌다. 조선도공이 애초에 그러려고 의도하지는 않았겠지만 그들을 부렸던 일본의 정한론자, 군국주의자들은 결국 그렇게 이용했다. 역사를 들여다보면 탐욕과 악심을 품은 자들이 권세를 잡아 순박한 사람들의 기술과 공예를 이용하여 자신들의 악업에 동원했던 일이 비일비재하다. 그들이 벌인 수작이 무슨 세계평화이니, 통일전쟁, 조선해방, 대동아공영이라 이름 붙여본들 모두 똑 같이 악업일 뿐이니, 자업자득이다.
<우리 모두 오늘에 살자 –원담>
오늘은
이미 와있는 당신의 날이다
매일 맞이하였고
매일 보냈던 그 많은 날들이
오늘 이날과 무엇이 다르랴,
해가 지고 해가 뜬다,
오늘은 오늘 한세상
원도 한도 없이 우리 모두 오늘에 살자
다시는 없을 오늘
어느 때나 같은 오늘
우리 모두 오늘에 살자
바람에 날리는 가을 잎처럼
수많은 오늘이 떨어져갔건만
흔들리지 않는 맑은 연못이 있다
낯익은 모든 것이 사라지고
정든 사람들이 하나둘 떠나가도
끝까지 지켜보는 따뜻한 눈길이 있다
분주한 거리를 쓸쓸히 가는 사람들을
붙들어주는 대지의 품 같은 눈길이 있다
안개와 비구름이 태양의 눈을 가릴 때에도
이 모든 것들을 바라봐주는 당신의 눈은
세상을 밝히는 영원의 오늘이다
-불교교실(2019년10월7일(월))에서 낭송했다.
2019년10월7일(월)細雨
불교교실에서 초록보살이 낭송했다.
1, <거미 –김수영>
내가 으스러지게 설움에 몸을 태우는 것은 내가 바라는 것이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나는 그 으스러진 설움의 풍경마저 싫어진다.
나는 너무나 설움과 자주 입을 맞추었기 때문에
가을바람에 늙어가는 거미처럼 몸이 까맣게 타버렸다
2, <살아서 돌아온 자 –박노해>
진실은 사과나무와 같아
진실이 무르익는 시간이 있다
눈보라와 불볕과 폭풍우를
다 뚫고 나온 강인한 진실만이
향기로운 사과알로 붉게 빛나니
그러니 다 맞아라,
눈을 뜨고 견뎌내라
고독하게 강인해라
거짓은 유통기한이 있다
음해와 비난은 한 철이다
절정에 달한 악은 실체를 드러낸다.
그대 아는가,
세상의 모든 거짓과 악이 총동원되었어도
끝까지 죽지 않고 살아 돌아온 자는
그 존재만으로 저들의 공포인 것을
진실은 사과나무와 같아
진실한 사람의 상처 난 걸음마다
붉은 사과 알이 향기롭게 익어오느니
자, 이제 진실의 시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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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아가 낭송했다.
<자유롭지만 고독하게 –이문재>
자유롭지만 고독하게
자유롭지만 조금 고독하게
어릿광대처럼 자유롭지만
망명 정치범처럼 고독하게
토요일 밤처럼 자유롭지만
휴가 마지막 날처럼 고독하게
여럿이 있을 때 조금 고독하게
혼자 있을 때 정말 자유롭게
혼자 자유로워 죄스럽지 않고
여럿 속에서 고독해도 조금 자유롭게
자유롭지만 조금 고독하게
그리하여 자유에 지지 않게
고독하지만 조금 자유롭게
그리하여 고독에 지지 않게
나에 대하여
너에 대하여
자유롭지만 고독하게
그리하여 우리들에게
자유롭지만 조금 고독하게
2019년10월9일(수)맑음
대구에서 정주보살 다녀가다.
소원을 빌 때 조심하라. 소원이 이루어질지도 모르니까. 아니, 오히려 간절한 소원은 이루어진다는 게 문제가 된다. 히틀러의 간절한 소원은 게르만 민족에 의한 세계정복이었다. 이루어질 뻔했던 그의 소원은 인류에게 재앙이었다. 모든 소원이 이루어져야 하는 건 아니다. 어떤 소원은 이루어지면 모든 사람들과 함께 행복해지지만 어떤 소원은 이루지게 되면 많은 사람들에게 불행이 되기도 한다. 한 사람의 소원이 이루지려면 시간과 권력과 자원과 노동이 동원되어야 한다. 탐욕에서 나온 소원은 이 세상 모든 것을 다 갖다 부어도 채울 수 없다. 그런데 모든 사람의 소원이 이루어진다면 세상은 어떻게 될까? 당신이 품고 있는 소원이 성취된다면 당신은 어떤 삶을 살게 될 것이며, 또 세상은 어떻게 변할 것인지 상상해보라. 당신의 성공이 주변에 어떤 파장을 일으킬지 상상해보라. 당신의 소원이 과연 이루어질만한 가치가 있는지 생각해보라. 모든 생명의 보편적 행복을 가져오는 원을 일으키고 또 간절하게 품을 수 있는가? 그 일으킨 원을 실현해나가는 삶을 일러 발보리심에서 행보리심으로 나아감이라 한다.
사람을 사귀되 장난삼아 사귀지 말라. 사람과 관계를 맺되 네 진심을 다하라. 그렇지 않다면 홀로 가라. 타인은 너를 즐겁게 해주는 도구가 아니다. 타인은 너의 요구를 들어주려고 기다리고 있는 하인이 아니다. 타인은 너의 욕심을 만족시켜주는 도구가 아니며, 네가 터트린 분노를 받아내는 동네북이 아니며, 네 기분대로 막 대해도 되는 애완용 동물이 아니다.
세상을 당신 마음대로 할 수 있는 전능한 능력이 주어진다면 당신은 그 능력을 어떻게 쓸 것인가?
<입보리행론>에서
세상의 행복은 남의 행복을 위하는 데서 오고, 세상의 고통은 자기만의 행복을 원하는 데서 온다.
많은 말이 무슨 필요가 있겠는가! 어리석은 이는 자기만을 위해 일하고 부처님은 남을 위해 일한다.
‘만약 남에게 이것을 주면 나는 무엇을 먹느냐?’라고 생각하는 사람은 자기만 생각하는 굶주린 귀신(아귀)이요, ‘만약 내가 이것을 먹으면 남에게는 무엇을 주지?’라고 생각하는 사람은 중생의 이익을 생각하는 천왕이 된다. 자기를 위해 남을 괴롭히면 지옥고통을 맛볼 것이요, 남을 위해 자신을 희생하면 큰 뜻을 이루게 될 것이다.
<김성철 칼럼>에서
부처님께서 보리수 아래서 성도하신 후 외치신 첫 마디가 “나는 불사(不死)를 얻었다”였다. 불사의 범어 원어는 ‘아므리따(amr.ta)’인데 ‘아(a)’는 영어의 낫(not)이나 노(no), 넌(non)과 같이 부정(negation)을 의미하는 접두사고, ‘므리따’는 죽음을 뜻하는 단어다. 한자나 우리말의 경우 부정을 표현하는 방식이 세 가지가 있다. ‘없다(無)’와 ‘아니다(非)’와 ‘않다(不)’가 그것이다. 그러나 범어나 영어와 같은 ‘인도-유럽어’의 경우 부정표현이 단순하다. 한자로는 불생불멸,비생비멸,무생무멸이라고 다르게 쓰더라도 범어 원문은 ‘안웃뜨빠담 아니로담(anutpa-dam. anirodham.)’으로 한 가지다. 영어에서도 “여기에 학생이 없다(There is not a boy)”거나 “그는 소년이 아니다(He is not a boy)”거나 “그녀는 행복하지 않다(She is not happy)”에서 ‘없다’와 ‘아니다’와 ‘않다’를 모두 똑같이 ‘is not’으로 표현할 뿐이다. 따라서 부처님께서 성도 후 외치신 ‘아므리따’는 ‘불사(不死)’이기도 하지만 ‘무사(無死)’나 ‘비사(非死)’이기도 하다. 부처님께서 외치신 ‘불사’의 선언은 “죽음이 없다(無死)”거나 “죽음이 아니더라(非死)”고 번역하면 훨씬 쉽게 이해된다.
무언가 ‘변치 않는 것’이 있어야, 그것에 대해 “살아있다”고 규정할 수 있고, ‘살아있는 것’만이 죽을 수 있는데, 변치 않는 것이 없기에 살아 있달 것도 없고, 살아 있달 것도 없기에 죽을 것도 없다. 위빠사나 수행을 통해서 무상을 현량함으로써 “죽음이 없다”는 사실을 자각한다.
<김성철 교수의 인명논리학 강의>
원자라든가 시간, 공간, 자아 등 불변의 실체를 주장하는 힌두논사에 대해 모든 유위법의 부당성과 찰나생멸을 주장하는 인명학파는 참다운 존재란 유효한 작용을 행사하는 힘이며, 그러한 힘은 변치 않는 실체에는 없고 불이나 물처럼 오직 끊임없이 변하는 사물에만 있다고 논박한다. 한 예로서 힌두논사는 '소'라는 사물이 '소'라고 불리는 것은 '소'라고 불리는 모든 사물, 다시 말해서 소의 종(類)에 공통된 성질 혹은 소의 본질은 마치 플라톤의 이데아와 같이 소라는 개체와 독립적인 실재라고 주장한다. 이에 반해 인명학파는 유일한 실재는 연기법에 따라 변화하는 특수뿐이고 언어나 그 언어가 나타내는 보편은 힌두논사의 마음(분별됨)의 소산이라고 주장한다. 예를 들어 인명학파는 a를 ‘소’라고 부를 때 ‘소’라는 모든 사물을 소와 소 아닌 것으로 이분하여 a로부터 소 아닌 것을 배제하고 부정함으로써 a와 a아닌 것을 구분 짓는 기능을 할 뿐, 소라는 말에 대응하는 실재로서의 a를 뜻하는 것이 아니라고 주장한다. a는 연기법에 따라 끊임없이 찰나생멸 하는 개체로서 어떤 영속적인 자기 동일이나 본질이 없으므로 '소'라는 말은 단지 세간의 소통을 위해 편의상 약정된 가명(假名)이자 가설(假設)일 뿐이다.
<草觀法燈禪師 법문>에서
물은 물을 모른다. 허공은 허공을 모른다. 마음은 마음을 모른다. 모른다는 건 모든 소견을 잊었다는 것이다. 일체의 소견이 깨끗이 사라져 본래의 맑고 밝음이 환히 드러나면 성성적적, 적조원명한 자리이다. 그 ‘모르는 데’에서 만법이 나타난다.
무엇이 오든지 감사히 받는 자세로 모든 결과를 받아들이는 것이 수연행隨緣行이다.
‘집짓는 자가 들켰으니 다시는 집을 짓지 못하리.’ 이것은 지견이다.
‘초발심시변정각, 한 생각나기 전, 부모 미생 전’이 모두 같은 자리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