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신들의 천국 / 이청준 / 문학과지성사
철조망 울타리가 둘러쳐진 천국이 있다면 그 안이 아무리 아름다울지라도 천국이라고 부를 수 있을까? 당신들의 천국은 내 안의 천국과 당신 안의 천국은 같을 수 없다는 이야기다. 나와 너를 가르는 순간, 천국이란 존재하지 않고 나와 너 사이에 존재한다고 생각하는 자유/사랑/믿음이라는 것들은 서로에게 상처를 주기 위한 도구일 뿐 그 무엇도 아니라는 이야기····.
간단한 줄거리일 수도 있으나, 각 장면에는 깊이 있는 사고를 요구하는 내용이 있어 정리하기 쉽지 않다. 심지어 작가마저도 이야기의 흐름이나 대화 또는 벌어지는 사건들을 통하여 메시지를 전하는 데 한계가 있다고 생각한 듯, 그의 생각을 소설의 마지막에 편지라는 것을 빌려 아주 잘 읽히는 한 편의 짧은 논문처럼 옮겨 놓았다.
한센병 환자들이 소록도에 모여 있다. 그들의 환경을 개선해주기 위해 많은 노력이 있었고 그 노력의 한 꼭지를 통해 우리에게 임해야 하는 천국은 어떤 모습이어야 하는지를 작가는 고발하고 있다.
새 원장이 부임한다. 때는 혁명 시대, 도착한 원장은 권총을 차고 있었다. 권총을 찬 의사, 조백헌 대령의 소록도 여정은 전날 소록도를 탈출한 원생의 흔적을 답사하는 것으로 시작한다. 조 원장은 죽은 자의 섬인 소록도를 낙원과 같은 곳으로 만들어 그들의 고향이 되기를 꿈꾼다. 이런 아름다운 계획에 왜 원생들은 냉담할까? 조 원장은 반응하지 않는 이 땅을 위해 자신의 모든 것을 걸은 듯하다. 소설에서는 한 줄 정도로 다루었지만 견디다 못한 가족은 그를 떠난다.
조 원장의 헌신적인 노력은 모두 수포로 돌아간다. 실패한 것이다. 조 원장은 소록도를 떠나고 몇 년의 시간이 흘렀다. 이상욱 과장의 편지를 받은 조원장은 사표를 제출하고 소록도로 돌아온다.
"섬은 변하지 않고 있었다."
소록도로 돌아온 그는 변한다. 기자의 말을 빌리자면, 미친 사람처럼 변했다.
애초에 문둥이들을 위한 낙원을 만들겠다는 그의 마음, 그 아름다운 마음에는 선이 그어져 있었다. 그 선 위에는 철조망이 둘러쳐 있고. 안에서든 바깥에서든 어디에서 바라보든 천국이란 존재하지 않는다.
돌아온 조 원장이 공을 들여서 결실을 본 것은 정상인과 음성인의 결혼이다. 결혼은 이루어졌는가? 모른다. 소설은 주례를 맡은 조 원장이 숙소에서 결혼 주례사를 연습하는 것으로 마치기 때문이다. 결혼식 시간은 이미 지났다. 결국 그들만의 천국을 만들어 주려는 것인가!
시기와 질투, 미움과 의심, 동상(우상), 자유, 믿음, 사랑 그리고 공동체까지 고민해야 할 부분이다. 모든 것이 함축된 단어 "천국"의 의미를 깊이 있게 생각하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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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제는 명분이 아니라 그것을 갖게 되는 과정이었다. 명분이 과정을 속이지 말아야 한다. 명분이 제물을 요구하지 않아야 한다. 천국이 무엇인가. 천국은 결과가 아니라 과정 속에서 마음르로 얻을 수 있는 것이어야 했다. 스스로 구하고, 즐겁게 봉사하며, 그 천국을 위한 봉사를 후회하지 말아야 진짜 천국을 얻을 수 있었다. 180
"그러나 내가 지금까지 한 번도 나의 주님을 당신들 앞에 내세우지 않은 것은 아직도 그곳에는 우리들 인간의 노력과 정성이 다 바쳐지지 못하고 있다고 생각했기 때문이였소. 주님의 큰 뜻이 이루어지기까지에는 아직도 우리의 피와 땀이 충분히 바쳐지지 못하고 있다고 생각했기 때문이었단 말이오. 더 많은 피와 땀으로 우리 인간들 스스로에 대한 믿음이 먼저 증명되지 않고는 주님에 대한 우리들의 믿음으로 증거할 수가 없기 때문이였소. 327
동상이란 언제 어느 곳에 세우게 되든 그것을 세우는 사람들에게는 일종의 자기 속박일 수 있기 때문입니다. 360
"글쎄·····. 믿음으로 행하지 못했다면 사랑으로 행하지 못했다는 것이니까······ 믿음과 사랑으로 행하지 못했다면 미움과 의심으로 행하고 있었다는 도리밖에 되질 않지 않아·····?" 392
"자유라는 거 그거 말대로만 된다면 그보다 더 좋은 것도 잆지. 제 가고 싶은 대로 맘대로 가고, 제 살고 싶은 대로 살고, 제 생각하고 말하고 싶은 대로 생각하고 말하게 되는 것보다 우리 같은 문둥이들에게 더 소망스론 바람이 있을 수 있겠나. 하지만 원장도 알다시피 우리한텐 언제 한번 그 자유라는 것이 말처럼 그렇게 되어본 적이 있었나. ···중략····· 믿음이 없이 억지 자유를 하자니까 불신과 미움 밖에 번지는 것이 없었단 말씀야." 394 - 395
"···· 이제 이 섬은 자유로는 안 된다는 걸 알았으니 다시 또 그런 자유로만 행해나갈 수는 없을 게야. 자유라는 건 싸워 빼앗은 길이 되어 이긴 자와 진 자가 생기게 마련이지만, 사랑은 빼앗음이 아니라 배푸는 길이라서 이긴 자와 진 자가 없이 모두 함께 이기는 길이거든. 하지만 이건 물론 자유로 행해나갈 것도 지레 단념을 한다는 소리는 아니야. 아까도 잠깐 말했지만 이제 이 섬에선 자유보다도 저 소중스런 사랑으로 행해나갈 수 있어야 한다는 소리일 뿐이지. 자유가 사랑으로 행해지고 사랑이 자유로 행해져서, 서로가 서로 속으로 깃들이면서 행해질 수만 있다면야 사랑이고 자유고 굳이 나눠 따질 일이 없겠지만, 이 섬에서 일어난 일들로 해서는 자유라는 것 속에 사랑이 깃들기는 어려워도, 사랑으로 행하는 길에 자유가 함께 행해질 수도 있다는 조짐은 보였거든. 그리고 아마 이 섬이 다시 사랑으로 충만해지고 그 사랑 속에서 진실로 자유가 행해지는 날이 오게 되면, 그때 가선 이 섬의 모습도 많이 사정이 달라질 게야." 395-39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