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10년 전이었을 것입니다. 어느 집을 방문했다가 아파트 베란다에 놓인 많은 화분들을 보게 되었습니다. 난을 비롯해서 많은 꽃과 나무들은 답답할 수도 있는 집을 아름다운 실내 정원으로 만들어 놓았고, 또한 이 집안의 공기를 상쾌하게 만들었습니다. 그래서 저 역시 이 집처럼 꽃과 나무를 방에 키워보면 어떨까 라는 생각이 들었고, 곧바로 화원에 가서 꽃나무를 구입해 방의 한구석을 채웠습니다.
그냥 보기만 할 때에는 단순히 예쁘다는 생각만 들었는데, 규칙적으로 물을 주면서 보살피다니 정이 생기더군요. 잎 모양이 조금만 달라져도 염려가 되고, 꽃이 피면 기쁜 마음이 가득한 것입니다. 이렇게 화초에 대한 애정이 새록새록 솟아났습니다.
화초를 키우면서 제가 느낀 한 가지가 있습니다. 진정한 사랑은 단순히 보기만 해서는 안 된다는 것이었지요. 화초를 가꾸어나가면서 화초에 대한 사랑이 생겨나는 것처럼, 사람들과의 관계 안에서도 그들에게 받으려고만 하는 것이 아니라 주어야 하고 또한 윗자리에 올라가려 하기보다는 낮은 자리에서 섬기는 삶을 살아야 진정한 사랑 안에서 기쁨과 행복을 체험할 수가 있는 것입니다.
여기서 또 한 가지 중요한 것이 있습니다. 만약 내가 시간 날 때만을 이용해서 화초를 가꾼다면 어떨까요? 즉, 내가 한가할 때에만 물을 주고, 나에게 시간이 많이 허용될 때에만 햇빛을 볼 수 있도록 한다면 어떨까요? 그래서 그 시간이 일 년에 몇 차례 되지 않는다면 어떨까요? 자신이 이 화초를 진정으로 사랑한다고 말할 수 있을지는 모르겠지만, 화초가 원하는 물과 햇빛을 적당히 제공하지 않는다면 사랑하지 않는 것과 다를 바가 없을 것입니다.
사람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내가 기준이 되어서는 안 되는 것입니다. 내가 아닌 남이 기준이 되고, 상대방의 입장에서 사랑을 실천하는 것이야말로 주님의 뜻에 맞게 살아가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이 원칙을 항상 지키셨습니다. 가장 낮은 자의 모습으로 이 땅에 오신 것은 물론이고, 사람들의 큰 사랑과 존경을 받을 수 있는 상태에서도 섬김을 받기보다 섬기는데 더 많은 시간을 소비하셨습니다. 또한 오늘 복음에도 나오듯이, 당신을 따르는 군중들의 아픔을 먼저 보시고 “저 군중이 가엾구나.”라고 말씀하시지요. 그리고 그들을 위해 빵 일곱 개와 작은 물고기 몇 마리로 사천 명이나 되는 사람들을 배불리 먹이십니다.
이 사랑이 놀라운 기적을 만들었던 것입니다. 우리 역시 나를 위한 사랑이 아닌 남을 위한 사랑을 통해 놀라운 기적을 만들 수 있습니다. 그런데 문제는 나를 위한 사랑만을 일순위에 두고 있기 때문에 기적이 없는 무미건조한 삶을 살고 있는 것은 아닐까요?
예수님의 제1원칙인 ‘사랑’을 우리의 제1원칙으로 지금 당장 세워야 할 때입니다.
화가 났을 때 말하라. 그러면 평생 최고로 후회하는 연설을 하게 될 것이다.(앨브로즈 비어스)
“사람들은 배불리 먹었다. 그리고 남은 조각을 모았더니 일곱 바구니나 되었다. 사람들은 사천 명가량이었다.”
-양승국신부-
<병실 사도직>
오늘도 길고도 지루한 투병생활로 힘겨워하고 계시는 환우 여러분들, 얼마나 고생들이 많으십니까? 때로 왜 하필 이 몹쓸 병이 내 인생에 끼어들어 나를 못살게 하는가, 부르짖으며 눈물도 많이 흘리셨겠지요? 때로 하느님께서 사랑과 자비의 하느님, 치유의 주님이시라면서 어찌 이리도 참혹한 현실을 내게 겪게 하시는가, 원망도 많으셨을 것입니다.
저도 개인적으로 오랜 세월 꽤나 끔찍한 병치레를 해봐서 환우들이 오늘 겪고 있는 그 고통을 조금이나마 이해하고 있습니다. 돌아보니 언제 끝날지 모르는 길고도 어두운 터널 속에서 답답해하던 그 시절, 참으로 힘겨운 나날이었습니다.
정말 힘드시겠지만, 때로 지금 당장이라도 포기하고 싶은 분들도 계실 것입니다. 그만큼 고통이 끔찍하고 그로 인한 십자가가 혹독하기 때문이라는 것을 잘 알고 있습니다.
그러나 아무리 힘드셔도 이 한 가지는 꼭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여러분이 지금 겪고 있는 고통은 절대로 무의미한 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말입니다. 그리고 지금은 비록 끝이 보이지 않아 괴로우시겠지만 이 고통에 반드시 끝이 있다는 것, 비록 더디게 오시는 것처럼 보이지만 하느님께서는 반드시 오신다는 것, 그분께서는 기필코 내 인생에 개입하실 것이라는 것, 머지 많아 이 서러움의 뜨거운 눈물을 기쁨의 춤으로 바꾸어주실 것이라는 것을 굳게 믿으시기 바랍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빵을 많게 하는 기적을 통해 하느님 나라가 어떤 곳인지를 우리에게 살짝 보여주십니다. 빵 일곱 개로 사 천명 가량 되는 사람들을 배불리 먹이십니다.
언젠가 큰 축제를 치루면서 천 명 정도 손님을 맞이해본 적이 있었습니다. 그들에게 점심식사 한 끼 대접하느라 공동체 모든 식구들은 며칠 내내 죽는 줄 알았습니다. 시장 봐와야지, 찬거리 다듬어야지, 요리해야지, 식탁 차려야지, 설거지해야지... 정말 보통 일이 아니었습니다.
그런데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빵 일곱 개로 가볍게 천명 이 천명도 아니고 사천 명을 배불리 먹이십니다. 진리의 말씀에 목말라 시간 가는 줄 모르고 예수님을 따라다녔던 군중들은 사흘 동안이나 굶어 정신조차 혼미했었는데, 겨우 빵 7개로 그 많은 사람들이 배불리 먹었습니다.
하느님 나라는 바로 이런 곳이 아닐까요? 우리의 미약하고 작은 나눔이 큰 축제로 변화되는 곳, 우리의 보잘 것 없는 선행이 엄청난 사랑으로 확장되는 곳, 우리의 작은 희생과 고통에 대한 인내가 하느님 나라의 풍성한 결실로 성장하는 곳...
많은 환우들께서 품는 의문이 한 가지 있습니다. 내가 겪고 있는 이 투병생활이 과연 무슨 의미가 있겠는가? 투병하느라 돈이란 돈은 다 까먹고, 주변 사람들 힘들게 하고...
절대로 그렇게 생각해서는 안 됩니다. 우리가 고통을 잘 참아 견딜 때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의 수난에 동참하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가 기꺼이 우리의 병과 맞설 때, 우리가 사랑의 마음으로 우리의 십자가를 지고 갈 때 우리는 예수님처럼 기적을 행하는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오늘 세계 병자의 날을 맞아 모든 환우 여러분들, 여러분의 삶에 분명히 가치와 의미가 있음을 꼭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뿐만 아니라 환우 여러분도 병실 안에서, 병과 함께 훌륭한 사도직에 참여할 수 있음을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먼저 여러분 주변 사람들을 한번 살펴보십시오. 그들은 모두 여러분들이 감사와 사랑을 표현해야 할 대상들입니다. 환우 여러분을 위해 간병하느라 고생하는 가족들에게 진심어린 감사의 인사를 자주 해드리는 것, 너무나도 훌륭한 사도직입니다. 여러분의 치료를 위해 불철주야 애쓰는 의료인들에게 환한 얼굴을 보여주는 것 역시 좋은 병실 사도직입니다. 여러분이 시시각각 온 몸으로 체험하는 고통들을 하느님께 봉헌하는 것 역시 정말 좋은 사도직입니다.
어렵지 않습니다
-김효준 신부-
제자들에게는 사천 명이나 되는 사람들의 배를 채워 줄 능력이 없었습니다.
제자들도 그 사실을 분명히 알고 있었습니다. “이 광야에서 누가 어디서 빵을
구해 저 사람들을 배불릴 수 있겠습니까?” 하지만 결국 사람들의 주린 배를
채워 준 것은 제자들입니다. 예수님 앞으로 일곱 개의 빵과 작은 물고기
몇 마리를 가져온 것도 제자들이었고, 예수님께서 축복하신 그것들을
사람들에게 나누어 준 것도 제자들이었습니다. 제자들에게는 아무런 능력이
없었지만 한 가지 능력만은 탁월했습니다. 그것은 예수님의 말씀을 그대로
몸으로 옮기는 순명하는 자세입니다. 머리로 먼저 계산하기보다는 몸으로
우선 따르는 실천하는 자세입니다. 우리에게는 많은 걱정거리가 있습니다.
우리의 머릿속은 참으로 복잡합니다. 가정과 직장, 이웃과 성당 안에서
해결해야 할 일들은 산더미처럼 쌓여 있지만 어디부터, 어떻게 시작해야 할지
막막하기만 합니다. 쌓여진 일 전체를 보면 손 댈 엄두조차 내지 못할 때가
많습니다.
이때 우리가 먼저 해야 할 일은 다른 것이 아닙니다. 예수님의 말씀에 귀를 기울이는 것입니다.
그리고 예수님께서 시키는 대로 하나하나 따라하는
것입니다. 그렇게 할 때 우리는 빵 일곱 개로 사천 명을 먹일 수 있습니다.
몸을 움직이십시오. 예수님의 말씀 그대로.
주님 손 안의 쓰임이들
-김찬선신부-
“빵 일곱 개를 손에 들고 감사를 드리신 다음, 군중에게 나누어 주었다.
남은 조각을 모았더니 일곱 바구니나 되었다.”
빵 일곱 개로 사천 명을 먹이려고 할 때
누구나 드는 생각은 그것의 터무니없음과 무모함일 겁니다.
산술적으로 빵 일곱 개는 일곱 사람분이고,
사람의 손에 들린 빵 일곱 개도 일곱 사람분입니다.
빵 일곱 개는 일곱 사람 이상 먹이게 할 능력이 없고,
사람도 빵 일곱 개를 그 이상으로 늘릴 능력이 없습니다.
그런데 그것이 터무니없지 않고 무모하지 않을 수 있음은
주님의 손에 들려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일곱 개밖에 되지 않는다는 과소평가는
빵의 숫자만 보고
나, 인간의 능력만을 보기 때문입니다.
사실 모든 과소평가는 하느님을 떠난 인간의 시각입니다.
하느님은 결코 과소평가하지 않으십니다.
하나로 무엇을 할 수 있겠냐고 하지 않으십니다.
너무나 그러하지 않으시겠습니까?
없는 데서 모든 걸 이루신 하느님께서
왜 하나를 가지고 무언들 못하시겠습니까?
하느님은 또한 과대평가도 하지 않으십니다.
아무리 힘이 대단해도 하느님 능력에 비할 바 못되고
아무리 많은들 하느님의 한 말씀에 사라질 것들입니다.
하느님은 우리 인간의 능력과 가진 것의 숫자를 보지 않으시고
마음을 보시고 태도를 보십니다.
하느님을 믿는지.
이웃을 사랑하는지.
능력의 하느님을 믿고 사랑의 하느님을 믿기만 하면
우리 이웃 사랑은 사천 명이 아니라 사만 명도 가당합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결코 우리 자신과
우리가 가진 것을 과소평가하지 말 것입니다.
하느님께서 우리를 사랑하시고
보잘것없는 우리를 당신 손에서 크게 쓰시고자 하십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주님 손 안의 ‘쓰임이’들이 되기만 하면 됩니다.
모성적인 마음
-이민순 수녀-
이 기적사화를 통해 우리는 예수님과 제자공동체의 상황과 시대의 혼란과 백성들의 갈망을 추측해 볼 수 있습니다. 사천 명가량의 사람이 사흘 동안이나 예수님을 따라다닌다는 것은 불안한 사회와 메시아에 대한 갈증 때문일 것입니다. 유랑생활을 하던 제자들은 어느 정도의 빵과 물고기를 포함해 비상식량을 가지고 있었으나, 예수님의 ‘너희에게’ 라는 말씀으로 미루어 보아 예수님은 비상식량에 구애받지 않으시는 것 같습니다.
예수님은 당신을 따르는 사람들한테 무엇이 필요한지 모성적인 마음으로 미리 헤아리고 채워주십니다.( 2 – 3절 ) 그리스도를 따르는 사람의 마음에도 가난한 사람의 처지를 판단하기 전에 자상하게 헤아리고 도와주는 사랑이 있어야 하겠습니다.
우리는 때때로 가난한 사람 앞에서 내가 가지고 있는 것을 헤아려 보게 됩니다. 그런데 제자들처럼 나한테 있는 것을 모두 내어놓지는 못합니다. 먼저 나의 몫 ( 만일의 사태까지 대비할 만큼 )을 떼어놓고 나머지를 내어놓습니다. 하지만 예수님은 우리한테 ‘가난한 과부의 헌금’ ( 12,44 )처럼 가진 것을 모두 다 내어놓기를 원하십니다. 그래야 하느님께서 백배의 보상 ( 10,30 )으로 사천 명이 배불리 먹고도 일곱 바구니나 남도록 풍족히 되돌려주실 것입니다.
실제 내 삶에서 온 힘을 다해 남을 도왔을 때 느끼는 기쁨과 나의 것을 모두 주었을 때 느끼는 만족감이 하느님께 최선을 다했다는 행복감으로 연결됨을 체험하게 됩니다.
오늘 내 앞에 선물로 보내주시는 약한 사람을 만나거든 최선을 다해 주님을 섬기듯이 봉사할 것을 다짐해 봅니다.
나눔의 신비
- 김미자 수녀-
일곱 개의 빵과 작은 물고기 몇 마리는 사천 명이 먹기에는 턱없이 부족한 양입니다. 그러나 사천 명이 배불리 먹었고 남은 조각을 모았더니 일곱 바구니나 되었다고 오늘 복음은 전합니다. 이런 기적의 힘은 어디에서 온 것일까요?? 인간의 이성으로는 불가능해 보이는 것을 예수님은 우리의 고정관념을 뛰어넘어 놀라운 일을 해주십니다.
우선 예수님은 “저 군중이 가엾구나?…. 먹을 것이 없으니 말이다.”?라고 하신 것처럼 우리 각자의 처지를 보고 측은히 여기시며 우리를 늘 좋은 길로 이끌어 주는 분이십니다. 하느님의 은총은 우리에게 무상으로 베푸시는 선물이지만 우리의 협조가 있어야 받을 수 있습니다. 인간을 향한 하느님의 구원 계획이 실현되기 위해서는 우리 각자가 기여해야 할 고유한 몫인 협조가 필요합니다.
누군가가 가지고 있던 빵 일곱 개와 작은 물고기 몇 마리를 내놓았고 예수님께서는 감사기도와 축복으로 우리에게 되돌려 주십니다. 그것도 풍성하게 베풀어 주십니다. 사천 명이 배불리 먹고도 일곱 바구니나 남을 정도로 말입니다. 자신의 것이 초라하고 보잘것없어서 이 많은 군중에게 소용이 없겠다고 포기해 버리면 기적은 일어나지 못했을 것입니다. 비록 작고 보잘것없으며 초라하지만 자신의 것을 나눌 때 이 나눔의 행위 안에서 신비한 기적이 일어납니다.
자신의 물질뿐만 아니라 재능?·?시간?·?지식?·?성품이 비록 보잘것없다 하더라도 내놓는 비움의 행위 안에 예수님께서 축복을 베푸시어 풍성하게 열매를 맺어주십니다. 나는 무엇을 나누고 내놓을 수 있을까요??
예수님과 함께라면 모든 것이 다 만족스러울까요? 100%? 80%? 50%? 20%? 아니면 전혀 만족스럽지 않다에 손을 드시는 분들도 계십니까? 우선 결론부터 말씀드리면 예수님과 함께라면 당연히 100% 만족스럽다가 정답입니다. 그런데 여기에는 조건이 있습니다. 다른 것과 비교해서는 안 된다는 것, 그리고 또 한 가지는 세속적인 기준으로 평가해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이런 이야기가 생각납니다.
영국의 어느 귀족이 자기 집의 하녀가 말하는 것을 우연히 들었다고 합니다.
“나한테 돈이 10파운드만 있다면 정말 행복할 텐데…….”
그 귀족은 하녀를 행복하게 하기 위해 부엌으로 갔습니다. 그는 하녀에게 우연히 말을 듣게 된 것을 말하며 10파운드를 주었습니다. 그리고 행복하기를 바란다고 축복해 주었습니다. 하녀는 감격해 하며 진심으로 감사했습니다. 귀족은 하녀가 행복해 하는 것을 기뻐하며 부엌을 나왔습니다. 그리고 부엌문 앞에서 잠시 서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때 하녀의 목소리가 조그맣게 들렸습니다.
“아! 20파운드라고 말할걸!”
자기가 원하는 것을 얻었음에도 불구하고 이 하녀는 행복할 수가 없었습니다. 왜냐하면 세속적인 기준으로 생각했고, 또한 더 큰 것과 지금의 상황을 비교하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행복은 무엇을 얻고 또 얼마나 가졌느냐에 있는 것이 아니라, 현재의 모습을 어떻게 보고 또 얼마나 만족하느냐에 달려 있는 것이 아닐까 싶습니다. 특히 주님께서 함께 하심을 굳게 믿는다면 어떠한 상황에서도 항상 만족하며 행복할 수 있는 것입니다.
오늘 복음을 보면 사흘 동안이나 예수님을 떠나지 않는 군중들을 볼 수 있습니다. 그만큼 예수님과 함께 있는 것이 만족스럽고 행복했던 것이지요. 하지만 당시의 상황은 그리 만족스럽지 않았을 것 같습니다. 그래서 예수님도 말씀하시지요.
“저 군중이 가엾구나. 벌써 사흘 동안이나 내 곁에 머물렀는데 먹을 것이 없으니 말이다. 내가 저들을 굶겨서 집으로 돌려보내면 길에서 쓰러질 것이다.”
세속적인 입장에서는 분명히 만족할 수 없는 상황입니다. 어떻게 사흘 동안 쫄쫄 굶는 것이 만족스럽다고 말할 수 있겠습니까? 그러나 그들은 예수님을 떠나지 않았습니다. 예수님 곁에서 참 행복을 체험했기 때문에, 굶는 것은 아무런 문제가 되지 않았던 것입니다. 그들 스스로 선택했던 이 길이지요. 당신을 쫓으라고 하지 않아도 굶더라도 쫓아오는 그들에게 예수님이 어떤 의무감을 가질 필요는 없을 것입니다. 하지만 사랑 가득하신 주님이시지요. 그래서 그들을 모두 배불리 먹이십니다.
예수님을 떠나지 않는 것이 중요함을 다시금 깨닫습니다. 예수님 안에서만 참 행복이 존재하기 때문입니다.
행복한 사람은 모든 것을 갖고 있는 사람이 아니라 갖고 있는 모든 것을 최고의 것으로 만드는 사람이다.
강 건너 봄이 오듯
-김성웅신부-
오늘 복음을 통해 사람들이 주님께서 축복하신 빵을 함께 나누면서 서로를
배려하고 친교를 나누며 소통하는 장면을 상상해봅니다. 그러면서 우리 마음에
고이고 쌓인 응어리들을 풀고 살아야 한다는 생각이 듭니다.
이를 위해 가장 좋은 방법이 대화라는 건 누구나 잘 알고 있습니다. 하지만
의외로 제대로 대화하는 법을 모르는 이들이 많습니다. 자기중심적이고,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단정적으로 흐르기 때문입니다. 부드럽게 상대의 마음을
감싸주며 이야기를 이끌어내는 능력이 대화에서 가장 중요하지만 대체로
충동적이거나 직설적으로 자신의 생각을 이야기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그런 대화는 오히려 서로의 마음을 상하게 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겨울 바람처럼 차갑고 매서운 대화가 아니라 봄날처럼 부드럽고 따뜻한 대화가
필요합니다. 겨울이 지나고 봄이 오는 것은 자연스런 세상의 이치이지만,
이렇게 계절이 순환하는 것을 보면서 우리는 새 생명을 키우는
자연의 섭리에 대해 많은 것을 배웁니다. 부드러운 봄 흙이 생명을 키우는
터전이 되듯 우리도 참된 대화를 통해 얼어붙은 소통과 친교를 다시금
회복해야 합니다.
엄두
-김찬선신부-
엄두.
사전을 찾아보니, 그 뜻이 “감히 무엇을 하려는 마음”입니다.
엄두란 이런 것이니 엄두를 내지 못하는 것이 당연하겠습니다.
누가 감히 4천 명을 먹이려는 마음을 먹겠습니까?
4천 명 먹이는 것은 당연히 엄두가 나지 않습니다.
그러면 누가 4천 명 먹일 엄두를 내겠습니까?
예수님의 제자들도 엄두를 내지 못했습니다.
오직 주님만 엄두를 내십니다.
그리고 주님 같은 존재만 엄두를 냅니다.
그러면 어떤 사람이 주님 같은 존재입니까?
숫자를 보지 않고 마음을 가지는 사람입니다.
숫자의 많음을 보지 않고 주려는 마음을 그저 가지는 사람입니다.
숫자의 많음을 보면 누구도 엄두가 나지 않습니다.
그저 주려는 마음이 純一하고 간절하면 됩니다.
순일하고 간절한 마음이 사랑이고
순일하고 간절한 마음이 엄두입니다.
주님과 비슷한 사람은 두 번째로
4천 명이라도 먹이려는 엄두를 낼 뿐 아니라
먹일 수 있을 것이라는 믿음을 가진 사람입니다.
그런데 이 믿음은 혼자만의 믿음이 아닙니다.
나 혼자 4천 명을 감당해야 된다면 엄두가 나지 않습니다.
나 말고도 먹이려는 사람이 엄청 많다고 믿는 사람입니다.
당장 가진 것은 빵 일곱 개밖에 되지 않지만
좋은 뜻을 가진 사람은 많다고 믿는 것입니다.
모름지기 사람이란 이기주의자라고 남을 불신하지 않고
사람은 다 좋은 마음을 가지고 있다고 믿는 것입니다.
사람은 다 좋은 마음을 가지고 있다고 믿는 것이
하느님을 믿는 것입니다.
아니 그 반대라고 할 수 있습니다.
하느님을 믿는 것이
사람은 다 좋은 마음을 가졌다고 믿는 것입니다.
하느님은 선으로 모든 것을 만드셨고
보시고 좋다고 하셨습니다.
그러니 좋으신 하느님께서
당신의 좋은 자녀들을 보내주실 것이라 믿는 것입니다.
너의 믿음대로 된다고 주님께서는 수없이 말씀하셨습니다.
그러므로 우리의 믿음대로 됩니다.
사람들은 다 좋은 마음을 가졌다고 믿으니
믿음대로 아주 많은 사람들이 좋은 일에 동참합니다.
다시 평화 봉사소를 생각합니다.
몇 년 전 이 일을 처음 생각할 때
매일 1,500명을 먹일 거라고 생각지 않았습니다.
북한의 굶주리는 사람은 1,500명이 아니라
몇 백 만, 몇 천 만입니다.
그래서 한 명이든 열 명이든 그저 먹이겠다는 마음뿐이었고
먹일 수 있을 거라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1,500명을 먹여야 했고 먹이게 되었습니다.
하느님을 믿었고 하느님이 보내주실 좋은 사람들을 믿었기 때문입니다.
알 수 있습니까?
1,500명이 아니라 주님처럼 4천 명을 먹이게 될지.
4천 명이 아니라 5천 명이 될지 우리는 알지 못합니다.
그러니 우리는 숫자를 보고 엄두를 못 내지 말고
순일하고 간절한 마음으로 엄두를 냅시다.
세상에 꼭 필요한 양식
-전삼용신부-
연 루치아는 제가 보좌를 하던 본당의 예쁜 고 3학생이었습니다. 고해소에서 미사 전 고해를 듣다보면 어디선가 들려오는 CD를 틀어놓은 듯한 예쁜 성가소리가 들렸습니다. 아마 한 학생이 마이크를 잡고 성가 연습을 시키는 것 같았습니다.
성악을 전공하기 위해 서울 부근의 한 대학에 진학한 루치아는 청년 성가대를 하였고 술자리가 있으면 너무 늦기 전에 가장 먼저 집에 들어가는 착한 학생이었습니다.
제가 유학을 로마로 나왔을 무렵 청년들과 본당 신자 분들이 루치아가 청년 성가연습을 하러 나간다고 하고 돌아오지 않는다는 소식을 전해왔습니다. 자초지종을 들어보니 성가 연습을 나오기 위해 버스를 타야 했는데 버스를 놓쳤다고 합니다. 한 아주머니와 둘이 기다리다 아주머니는 그냥 집으로 돌아왔고 그 이후로 루치아는 2년 동안이나 실종된 상태였습니다.
시간이 지나면서 저조차도 희망이 줄어들고 가끔 생각 날 때나 기도를 해 주던 때, 날벼락 같은 소식이 전해왔습니다. 루치아가 온 국민을 경악케 한 연쇄 살인 사건의 한 피해자로서 유골을 찾았다는 내용이었습니다.
얼마 전엔 한 분이 저에게 더 가슴 아픈 이야기를 해 주셨는데 루치아가 살인범이 죽이기 전에 고민했던 유일한 사람이라는 것입니다. 착하고 깨끗하고 예뻐서 한 시간정도를 차에 태우고 돌아다니다가 결국 자신의 얼굴과 일을 알고 있는 루치아를 살려둘 수 없어서 범행을 저질렀다는 것입니다.
장례식에서 루치아의 어머니는 자신을 어떻게 위로해야 할지 모르는 사람들에게 이렇게 말씀하셨다고 합니다.
“이젠 괜찮아요. 아마 실종되었을 때 바로 딸의 시신을 찾았으면 미쳐버렸을 거예요. 지금은 하느님께 감사해요. 2년이란 시간을 주셔서 저에게 견딜 수 있는 힘을 주셨으니까요.”
아버님은 루치아의 홈피에 이런 글을 남기셨습니다.
“돌아오지 못할 길을 끝내 가고야 말았어. 살아서 돌아오기를 얼마나 기다렸는데... 하느님이 너무 사랑하셔서 예수님의 수난처럼 그렇게 처참하게 데려가셨을까? ...”
그리고는 보상을 안 받기로 하시고 그 이유를 이렇게 적으셨습니다.
“우리아이의 죽음은 더 이상 죄를 짓지 말고 서로 사랑하며 살아야 한다는 것을 하느님께서 깨우쳐 주신 거라고 생각되기에 더 이상 우리나라에서 이런 불행한 일이 없기만을 간절히 기도하고자 합니다.”
이런 부모님의 신앙은 인터넷 등을 통하여 많은 사람들에게 알려졌고 사람들은 믿음의 힘을 다시 한 번 느끼게 되었습니다. 이는 누구에게든 커다란 가르침이 되었기 때문입니다.
오늘 예수님께서 허기에 지친 4천명의 군중을 배불리 먹이십니다. 그 발단은 제자들이 봉헌한 빵 7개와 물고기 몇 마리였습니다. 예수님은 그것을 들고 ‘감사’의 기도를 드리십니다. 그리고는 수천 명이 배불리 먹고도 일곱 광주리나 남게 되었습니다.
루치아의 희생이 마치 봉헌된 빵처럼 여겨지고 부모님들이 마치 예수님처럼 그렇게 하느님께 감사히 봉헌하시는 모습 같습니다. 그리고 아버님의 지향대로 루치아의 희생은 많은 이들이 죄를 덜 짓게 하고 우리나라에 불행한 일이 없도록 하는데 쓰일 것이 분명합니다. 수많은 사람들이 아버지의 지향대로 봉헌한 루치아의 희생을 양식으로 삼게 될 것입니다.
아주 조금만 안 좋은 일이 있으면 감사보다는 불평만 할 줄 아는 저의 모습을 반성하며 작은 희생을 감사의 마음으로 봉헌하면 얼마나 큰 은총이 많은 사람들에게 미칠 수 있는지 다시 한 번 묵상하게 됩니다.
오늘 예수님은 수많은 배고픈 군중에 비해 아주 소량의 빵을 들고 ‘감사’의 기도를 드리십니다. 이는 자신이 가진 모든 것을 하느님께 봉헌한다는 의미입니다.
사실 성모님께서 예수님을 성전에 봉헌하신 것처럼 예수님도 아버지께 봉헌된 삶을 살았습니다. 봉헌이란 자기 자신을 버리고 아버지의 뜻을 따르는 것을 의미합니다. 이렇게 봉헌된 그리스도의 몸은 지금 우리에게 매 미사 때 생명의 양식으로 돌아옵니다.
한국의 슈바이처로 불리셨던 이태석 요한 신부님이 갑작스런 말기 암 판정을 받으시고 얼마 되지 않아 2010년 1월 14일 돌아가셨습니다. 하루에도 200명이 넘는 환자를 보살펴야 했지만 정작 당신 자신은 보살피지 못하셨나봅니다. 그러나 그 분의 짧은 생애도 그 분이 활동하시는 수단에서 뿐만 아니라 우리나라에도 매스컴을 통해 방영이 되었고 사랑이 무엇인지를 깨닫게 하는 큰 감동을 남겼습니다.
자녀를 훌륭히 키우기 위해 우리나라만큼 정성을 쏟아 붓는 나라가 없습니다. 그러나 세상에 꼭 필요한 사람이 되거나, 세상의 양식이 되는 길은 보잘 것 없는 나를 봉헌하는 길 외에는 없다는 것을 우리에게 일러주십니다. 하느님께서 내 자신의 작은 봉헌으로 많은 사람을 배부르게 할 양식으로 만들어 주십니다.
세상에 꼭 필요한 사람이란 자신의 야망을 실현하는 사람이 아니라 자신을 버리고 아버지께 봉헌하는 사람입니다.
<연민의 주님>
-양승국신부-
성서 연구와 묵상에 자신의 삶 전체를 봉헌했던 한 구도자께서 이런 말씀을 하셨습니다.
"제게 있어 시편 제23장만큼 소중한 보물은 다시 또 없습니다. 제게 시편 제23장을 천천히 음미하는 것보다 더 좋은 묵상은 없습니다."
"야훼는 나의 목자, 아쉬울 것 없어라. 푸른 풀밭에 누워 놀게 하시고 물가로 이끌어 쉬게 하시니 지쳤던 이 몸에 생기가 넘친다. 그 이름 목자이시니 인도하시는 길, 언제나 곧은길이요, 나 비록 음산한 죽음의 골짜기를 지날지라도 내 곁에 주님 계시오니 무서울 것 없어라. 막대기와 지팡이로 인도하시니 걱정할 것 없어라. 원수들 보라는 듯 상을 차려주시고, 기름 부어 내 머리에 발라주시니, 내 잔이 넘치옵니다. 한평생 은총과 복에 겨워 사는 이 몸, 영원히 주님 집에 거하리이다."
오늘 복음은 백성들을 향한 착한 목자 예수님의 따뜻한 마음, 연민의 마음, 측은지심이 유난히 돋보이는 내용입니다.
착한 목자 예수님의 모습은 구약성서의 수많은 곳에 예시가 되어있는데, 그 가운데 가장 "바로 이거다" 하는 구절, 손에 잡히게 설명하는 구절이 바로 시편 제23장이라고 생각합니다.
교회 역사 안에 많은 익명의 순교자들, 박해받던 의인들이 시편 제23장을 통해 한없는 위로받고 죽음의 고통을 이겨냈습니다.
시편 제 23장에는 쉽게 와 닿지 않던 주님, 잘 감지되지 않던 주님의 실체가 분명하게 제시되어 있는데, 그 주님이 지니신 가장 큰 특징은 바로 "자비의 주님", "측은지심의 주님", "위로와 격려의 주님"이십니다.
언제나 목말라하고 배고파하는 당신의 자녀들에게 일시적인 해결책뿐만 아니라 영원한 해결책을 마련해주십니다. 영원한 생명의 잔치로 초대하십니다.
생명의 잔치가 베풀어지는 그 곳은 바로 "주님의 나라"입니다. 그곳에서 주님께서는 친히 우리 앞에 서서 우리를 인도하십니다. 주님께서는 우리를 위해 세심하게 모든 것을 챙겨주시니 더 이상 아쉬울 것도 무서울 것도 없습니다. 결국 그곳은 언제나 주님께서 우리와 함께 계시는 주님의 나라입니다.
자리만 비웠다 하면 초대형사고가 빈발하기에 잠시도 마음 놓지 못하고 24시간 아이들 곁에 현존하는 우리 형제들, 시설 보육사들의 하루 일과를 옆에서 지켜보면서 하느님 나라의 한 단면을 확인할 수 있습니다.
생활공동체에서 교육자가 늘 현존하지 않음으로 인해 발생하는 문제들은 심각합니다. 약육강식의 동물의 세계가 여지없이 재현되어 싸우고, 얻어터지고, 병원가고...정신이 하나도 없습니다. 약한 아이들, 꼬마들은 늘 형들의 밥입니다. 유리창은 남아나지가 않습니다. 그래서 항상 착한 목자는 양들 사이에 서 있어야 하며, 늘 양들을 살펴보고 있어야 하는 것입니다.
결국 하느님 나라는 자비와 사랑의 주님께서 우리와 늘 함께 계시는 바로 그곳입니다.
조금만 주의를 기울여 살펴보면 우리의 주님은 항상 우리와 함께 계시며, 우리를 앞장서 가시며 우리를 축복과 생명의 잔치에로 인도 하는 자비의 주님이시라는 것은 알 수 있습니다.
우리의 갈증과 굶주림, 고통과 눈물을 보고 계십니다. 우리의 상처와 방황을 안쓰러워하시며 어쩔 줄을 몰라 하십니다.
네 사람의 수도자가 침묵 수행을 하기로 했답니다. 그들의 스승님께서 이런 말씀을 하셨거든요.
“침묵은 황금의 다리이며, 하느님에게로 향하는 무지개다리이니라.”
그들은 7일 동안 침묵하며 동굴에 틀어박혀 있기로 했지요. 하지만 그들은 한 시간도 지나지 않아 모두 돌아오고 말았답니다. 스승님께서는 빨리 돌아온 제자들에게 무슨 일이 있었는지를 물었습니다. 그러자 그들은 힘없는 목소리로 말했습니다.
“모든 것이 실패로 돌아갔습니다.”
“어찌 네 명 모두 실패했단 말인가?”
이에 한 수도자가 대답했습니다.
“우리 네 사람은 눈을 감고 침묵 속에 앉아 있었습니다. 10분, 20분이 지나자 우리들 가운데 하나가 중얼거렸습니다. ‘아이고, 집에 등을 끄고 왔는지 켜놓고 왔는지 모르겠네.’라고요. 그러자 또 하나가 ‘너는 우리가 7일 동안 침묵하기로 맹세한 걸 벌써 잊었느냐?’하고 꾸짖었습니다. 아, 그러니 이번에는 또 하나가 ‘이 바보 같은 놈들! 벌써 말해 버리다니…….’하며 혀를 찼습니다. 그러자 마지막 하나도 이렇게 말해 버리고 말았습니다. ‘하느님, 감사하옵니다. 저만은 아직 입을 벌리지 않은 유일한 사람입니다.’ 라고요.”
이 수도자들이 침묵 수행을 제대로 하지 못한 이유는 무엇인가요? 바로 세상일에 대한 걱정, 그리고 다른 사람에 대한 쓸데없는 관심 때문이었습니다. 우리 역시 이 세상 안에서 주님께 나아가는 순례의 길을 걸어 가고 있습니다. 그런데 그 순례의 길에서 제대로 주님의 뜻대로 살고 있을까요? 혹시 세상일에 대한 너무 많은 걱정과 쓸데없는 것에 대한 지나친 관심과 잘못된 판단으로 그 순례의 길을 제대로 걷지 못하는 것은 아닐까요?
사실 주님께서는 당신과 함께 하려는 사람들을 결코 내치지 않습니다. 즉, 끝까지 책임지고 지켜주십니다. 그 사실이 오늘 복음에 분명히 명시되어 있지요.
예수님께서는 당신을 찾아 온 사람들과 사흘 동안 함께 하고 계셨지요. 그 사람들은 주님과 함께 하고자 하는 마음으로 찾아온 사람이었습니다. 예수님께서 억지로 붙들어 놓은 사람이 아니라는 것이지요. 그저 예수님이 좋아서, 예수님께 희망을 두고 찾아온 사람이었습니다. 따라서 예수님께서 이들을 위해서 의식주를 해결해야할 어떤 의무가 있는 것이 아니지요. 그런데도 예수님께서는 당신과 함께 하려는 이들에 대한 연민의 마음으로 빵 일곱 개로 사천 명 가량 되는 사람들을 배불리 먹이시는 놀라운 기적을 행하십니다.
이렇게 우리를 사랑하시는 주님이십니다. 그런데 우리는 이러한 주님과 함께 하기 위해서 얼마나 노력하고 있나요? 혹시 이 세상일에 대한 걱정과 쓸데없는 것에 대한 지나친 관심으로 주님과 함께 하지 못하는 것은 아닌지요?
주님과 함께 하는 순례의 길. 그 길을 제대로 걷는 우리가 되었으면 합니다.
진정한 사랑은 신뢰다.(헤겔)
감사히 봉헌된 희생의 가치
-전삼용신부-
복음묵상을 쓰기 위해 이용하는 것 같아 루치아에 대한 내용을 쓰지 않으려했으나 부모님들의 놀라운 신앙심을 조금이라도 알리고 루치아를 위해 기도 부탁한다는 의미로 쓰기로 결심하였습니다.
루치아는 제가 보좌를 하던 본당의 예쁜 고 3학생이었습니다. 고해소에서 미사 전 고해를 듣다보면 어디선가 들려오는 CD를 틀어놓은 듯한 예쁜 성가소리가 들렸습니다. 아마 한 학생이 마이크를 잡고 성가 연습을 시키는 것 같았습니다. 저는 미사 전 그렇게 노래를 잘하는 학생이 누구인지 알고 싶었고 바로 교사들에게 물어보았습니다. 교사들은 루치아를 소개시켜 주었고 저는 성가를 아주 잘하니 청년이 되어서도 청년 성가대를 하라고 권유하였습니다.
성악을 전공하기 위해 서울 부근의 한 대학에 진학한 루치아는 청년 성가대를 하였고 어려서 그런지 술자리가 있으면 너무 늦기 전에 가장 먼저 집에 들어가는 착한 학생이었습니다.
제가 유학을 로마로 나왔을 무렵 청년들과 본당 신자분들이 루치아가 청년 성가연습을 하러 나간다고 하고 돌아오지 않는다는 소식을 전해왔습니다. 자초지종을 들어보니 성가 연습을 나오기 위해 버스를 타야 했는데 버스를 놓쳤다고 합니다. 한 아주머니와 둘이 기다리다 아주머니는 그냥 집으로 돌아왔고 그 이후로 루치아는 2년 동안이나 실종된 상태였습니다.
시간이 지나면서 저조차도 희망이 줄어들고 가끔 생각 날 때나 기도를 해 주던 때, 날벼락 같은 소식이 전해왔습니다. 루치아가 이번 연쇄 살인의 한 피해자로서 유골을 찾았다는 내용이었습니다. 하루 이틀은 그냥 멍한 상태로 있었고 그 이후론 별일도 아닌데 가끔 짜증도 잦아졌던 것 같습니다. 그러면서도 정작 그 일을 당한 루치아에겐 배부른 불평을 하는 것 같아 항상 미안했었습니다.
얼마 전엔 한 분이 저에게 더 가슴 아픈 이야기를 해 주셨는데 루치아가 살인범이 죽이기 전에 고민했던 유일한 사람이라는 것입니다. 착하고 깨끗하고 예뻐서 한 시간정도를 차에 태우고 돌아다니다가 결국 자신의 얼굴과 일을 알고 있는 루치아를 살려둘 수 없어서 범행을 저질렀다는 것입니다.
항상 감사해야 한다는 주님의 말씀을 되뇌면서도 친가족도 아닌 저조차도 은근히 불평이 늘어나 짜증을 내기도 했는데 오늘 루치아의 부모님의 이야기를 듣고 제 자신이 참 부끄럽게 느껴졌습니다.
장례식에서 루치아의 어머니는 자신을 어떻게 위로해야 할지 모르는 사람들에게 이렇게 말씀하셨다고 합니다.
“이젠 괜찮아요. 아마 실종되었을 때 바로 딸의 시신을 찾았으면 미쳐버렸을 거예요. 지금은 하느님께 감사해요. 2년이란 시간을 주셔서 저에게 견딜 수 있는 힘을 주셨으니까요.”
아버님은 루치아의 홈피에 이런 글을 남기셨습니다.
“돌아오지 못할 길을 끝내 가고야 말았어. 살아서 돌아오기를 얼마나 기다렸는데... 하느님이 너무 사랑하셔서 예수님의 수난처럼 그렇게 처참하게 데려가셨을까? ...”
그리고는 보상을 안 받기로 하시고 그 이유를 이렇게 적으셨습니다.
“우리아이의 죽음은 더 이상 죄를 짓지 말고 서로 사랑하며 살아야 한다는 것을 하느님께서 깨우쳐 주신 거라고 생각되기에 더 이상 우리나라에서 이런 불행한 일이 없기만을 간절히 기도하고자합니다.”
오늘 예수님께서 허기에 지친 4천명의 군중을 배불리 먹이십니다. 그 발단은 제자들이 봉헌한 빵 7개와 물고기 몇 마리였습니다. 예수님은 그것을 들고 ‘감사’의 기도를 드리십니다. 그리고는 수천 명이 배불리 먹고도 일곱 광주리나 남게 되었습니다.
루치아의 희생이 마치 봉헌된 빵처럼 여겨지고 부모님들이 마치 예수님처럼 그렇게 하느님께 감사히 봉헌하시는 모습 같았습니다. 그리고 아버님의 지향대로 루치아의 희생은 많은 이들이 죄를 덜 짓게 하고 우리나라에 불행한 일이 없도록 하는데 쓰일 것이 분명합니다. 누군지는 모르지만 수많은 사람들이 아버지의 지향대로 봉헌한 루치아의 희생을 양식으로 삼게 될 것입니다.
아주 조금만 안 좋은 일이 있으면 감사보다는 불평만 할 줄 아는 저의 모습을 반성하며 작은 희생을 감사의 마음으로 봉헌하면 얼마나 큰 은총이 많은 사람들에게 미칠 수 있는지 다시 한 번 묵상하게 됩니다.
루치아 위해 기도 중에 기억해 주시기 바랍니다.
일념과 다념
-김찬선신부-
저는 오늘 복음을 묵상할 때마다
예수님 참으로 대단하시다는 생각을 합니다.
4천명을 먹이신 것이 대단하다는 것이 아닙니다.
4천명이 사흘 동안이나 예수님 곁에 같이 있었다는 것이 대단합니다.
예수님의 무엇이 이 많은 사람을 당신 곁에 붙잡아 두었고
예수님의 무엇이 이들을 사흘 동안이나 붙잡아 두었을까?
그것도 굶겨서 보내면 쓰러질 정도로 먹지도 못한 사람들을.
요즘 한창 인기 있는 가수들인들
그들의 팬을 이렇게 붙잡아 둘 수 있을까?
그렇다면 며칠을 굶어도 떠날 수 없는 그 매력은?
너무도 교만한 저임을 미리 양해바라며 얘기한다면.
저는 아무리 대단한 사람이 와도 만나보러 갈 생각이 없습니다.
일 때문에 또는 그러 해야 하기에 가기는 해도
내가 보고 싶어 갈 생각은 전혀 없습니다.
대통령이 우리 수도원 마당에 와도 보고 싶지 않습니다.
이태리를 여러 번 갔어도 교황님 알현하러 간 적이 없습니다.
음악을 좋아하는 저이지만 세계적인 연주자나 단체가 와도
저는 보러가고 싶은 생각이 전혀 없습니다.
그래서 귀국 연주회와 같이 격려차 가본 것 외에는
연주회를 한 번도 간 적이 없습니다.
앞서 얘기했듯이
제가 교만하기 때문이고
사랑이 부족하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신적 사랑이 아니라면 저를 잡아끌지도 붙들지도 못하기 때문입니다.
이런 저에 비추어 생각해 보면
며칠을 굶어도 배고픈 줄 모르고 사람들이 주님 곁에 있었던 것은
배고픔을 잊게 하는 하느님의 사랑을 주님께 느꼈기 때문일 것입니다.
물리적으로 배고파도 그것을 느끼지 못하게 하는
영적 사랑의 풍요를 경험한 사람은 알 것입니다.
사람들을 잡아끌고 며칠을 붙잡아 두는 사랑의 매력도 대단하지만
4천 명을 먹이시겠다는 그 사랑의 마음도 대단하십니다.
제자들은 엄두가 나지 않았습니다.
제자들뿐이겠습니까?
인간이라면 다 마찬가지일 것입니다.
공중의 새까지 먹이시려는 그 하느님의 마음이 없으면
어느 인간도 그런 엄두가 나지 않습니다.
먹이시는 것은 어차피 하느님이십니다.
우리가 할 것은 먹이겠다는 마음을 먹는 것뿐입니다.
예수님과 우리 인간의 차이가 바로 이것일 것입니다.
자신의 능력을 보는 것과 능력의 하느님을 보는 것,
이것도 우리와 예수님의 차이이기도 하지만
그저 먹이겠다는 一念외에는 다른 것 생각지 않는 것과 그렇지 못한 것,
즉 一念과 多念
이것이 예수님과 우리의 차이인 것 같습니다.
예수님의 사랑법
- 이재학 신부-
외할머니는 모두 그렇겠지만 내 외할머니는 정이 참 많으셨다. 언제든 외가에 가면 엉덩이 두들겨 주시면서 반가워하셨다. 외가는 홍씨 집안이어서 외할머니는 나를 ‘우리 홍 강아지’라고 부르곤 하셨다. 그러면 어린 마음에 할머니의 마음도 모른 체 “아니에요, 나 이씨에요, 이 강아지예요!”라고 했었다.
외가에 가면 반드시 밥을 먹어야 했다. 점심밥을 먹은 지 얼마 지나지 않은 오후시간에 가도 꼭 밥을 먹이시곤 했다. 조금 일찍 먹는 거라며 꼭 밥을 챙기셨다. 당시에는 ‘뭐, 내가 밥 굶고 다니는 줄 아시나?’, ‘아, 귀찮아. 다음엔 아예 밥 때 와야겠다.’라고 생각하곤 했다. 지금 생각하면 그게 사랑이었음을 알겠다. 사랑하는 이에게 그 사랑을 표현해야만 하는 넘치는 사랑 때문이었다. 밥이라도 꼭 먹여 보내야 한다는 사랑 표현법인 것이다.
그 사랑법이 꼭 외할머니만의 것은 아닌가 보다. 예수님의 사랑 표현법도 역시 밥이라도 먹여 보내려는 마음으로 표현된다. 예수님을 따라온 이들, 하느님의 말씀에 함께 기뻐하던 이들, 새로운 가르침을 수용하고 새 삶을 다짐한 이들이다. 바로 하느님을 사랑하고 하느님의 사랑을 받는 자녀들인 것이다. 예수님은 그들에게 밥이라도 먹여 보내려는 사랑의 마음 때문에 또 한 번의 놀라운 기적을 보이신다.
그 기적을 체험한 사람들은 빵이 많아진 것에 놀란 것이 아니라 측은히 여기시는 예수님의 마음에 놀라고 감사한 것이다. 사랑하는 사람은 그 사랑을 알아보기 때문이다. 표현하지 않는 사랑은 사랑이 아니라고 했다. 내 주위의 사랑하는 이들에게 구체적인 사랑의 표현을 하는 하루가 되었으면 좋겠다. 그러면 예수님도 기뻐하시지 않을까?
-박영진신부-
오늘 마르코복음은 예수님께서 빵 일곱 개와 물고기 몇 마리를 가지고 사천 명을 배불리 먹이신 이야기를 전해주고 있습니다. 기적과 소문으로 인해서 예수님 주변에 많은 군중이 모이게 되었지만 먹을 것이 변변하지 못합니다. 예수님께서는 사흘 동안이나 동고동락하던 군중을 가엾게 여기십니다. 제자들은 불가항력이라 포기하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예수님께서는 가엾은 군중들에게 하나라도 주시려고 합니다. 그래서 보잘 것 없는 것을 가지시고서 엄청난 기적을 베푸십니다. ‘안됩니다.’ ‘할 수 없습니다.’ ‘능력부족입니다.’고 늘 핑계거리만 생각하는 우리의 모습을 반성하게 합니다. 그리고 주님의 우리에 대한 자애심을 다시 한 번 더 묵상하게 합니다.
오늘 창세기의 독서는 인류의 첫 죄에 대한 그 벌에 대해서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창조주와의 관계단절, 다른 피조물과의 관계단절, 고통, 노동, 죽음, 에덴동산에서 쫓겨남 등 단 한 번의 죄에 대한 그 결과는 실로 엄청납니다. 그리고 그 결과가 온 인류에게 유산(?)으로 내려오게 됩니다. 이것이 우리의 현실이고, 그래서 우리는 이 모든 것을 원상복구 시켜 주실 주님이 필요한 것입니다.
오늘 우리는 ‘유럽의 수호성인’인 성 치릴로와 성 메토디오 형제를 기념합니다. 이들 형제는 훌륭한 학자였고, 갖은 수고도 마다하지 않고 가진 모든 것을 함께 나누려고 했던 선교사였습니다. ‘하자!’ ‘할 수 있다!’ ‘해 볼만 하다!’의 정신을 본받도록 합시다. 아멘.
새벽을 열며
저는 화장품을 잘 바르지 않습니다. 제 피부가 특별해서일까요? 아니면 쓰던 화장품이 다 떨어져서 그럴까요? 물론 모두 이유가 되지 않습니다. 그보다는 미사 후에 어떤 자매님께서 하신 말씀 때문입니다.
“신부님, 영성체하는데 성체에서 화장품 냄새가 너무 나요.”
‘혹시’라는 생각에서 냄새가 별로 없는 화장품을 쓰고 있었는데, 이분께서 예민하신 분인지는 몰라도 이 화장품의 냄새가 몹시 싫었나 봅니다. 그래서 그 뒤로 저는 저녁미사가 있는 날을 제외하고는 화장품을 바르지 않게 되었습니다.
이것이 제가 신자들에게 하고 있는 배려입니다. 그런데 저는 이를 큰 배려라고 착각하고 있었습니다. 그러면서 “나처럼 신자들을 배려하는 신부가 어디 있어?”라는 교만한 마음을 품고 있었지요. 그러나 이는 큰 착각이었습니다.
지난 피정 중에 피정 지도 신부님의 한 가지 체험을 듣게 되었습니다. 미사 시간 10분 전, 고해성사를 마치고 고해소에서 나오는데 처음 보는 자매님께서 숨을 헐떡이면서 말씀하시더랍니다.
“신부님, 오랫동안 냉담했던 남편을 데리고 왔는데 지금 고해성사를 주시면 안 될까요?”
신부님께서는 망설임 없이 말씀하셨다고 합니다.
“죄송합니다. 미사 시간 때문에 더 이상 고해성사를 줄 수 없군요.”
신부님께서는 곧바로 이 선택이 과연 옳은 것인가 라는 반성을 하게 되었답니다. 왜냐하면 미사시간이 5분쯤 늦는다고 해도 달라지는 것은 없으니까요. 오히려 그 5분을 냉담자에게 배려함으로써 잃어버린 한 명을 구원할 수가 있었던 것이지요. 그런데 저 역시 이런 경우가 너무나 많았던 것 같습니다. 스스로 신자들에게 배려한다고 말하지만, 사실은 아주 조그마한 부분만 배려하고 있을 뿐 더 이상의 배려는 하고 있지 않았던 것이지요.
오늘 복음에서 우리들은 예수님의 큰 배려를 볼 수가 있습니다. 사람들은 예수님께 가르침을 얻기 위해서 먹지도 않고 모여 옵니다. 주님께서는 이 모습을 보고서는 안쓰러운 마음이 드셨나 봐요.
“저 군중이 가엾구나. 벌써 사흘 동안이나 내 곁에 머물렀는데 먹을 것이 없으니 말이다. 내가 저들을 굶겨서 집으로 돌려보내면 길에서 쓰러질 것이다.”
사실 좋은 말씀을 들으러 온 사람들이 예수님께 무엇인가를 가져다주는 것이 우리들의 일반적인 상식입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오히려 거꾸로 그들을 향한 배려를 하고 계시지요.
하긴 제1독서를 보니 그 아버지에 그 아들이라는 생각도 듭니다. 하느님의 뜻을 따르지 않은 인간, 거기에다가 남에게 책임을 전가하기에 급급한 비겁한 인간입니다. 그런데도 직접 옷까지 만들어 입혀주실 정도로 배려하시는 하느님이시지요.
하느님과 예수님의 이러한 배려를 보면서, 나는 사람들에게 과연 제대로 배려를 하고 있는가 라는 반성을 하게 됩니다. 혹시 나만을 위한 배려에만 온갖 관심을 가지고 있었던 것은 아닐까요?
다른 사람을 먼저 배려합시다.
빠다킹신부
참 좋은 몫
-이정호신부-
신학교에 입학한 지 몇 달 지나지 않아서 어머니의 소포를 받았습니다.
셔츠가 한 장 들어 있었고, 포장지를 찢어서 쓴 듯한 작은 메모가
같이 있었습니다. ‘너는 마리아처럼 참 좋은 몫을 선택하였구나’라는
구절과 함께 저를 위해 기도하겠다는 말씀이 적혀 있었습니다.
어린 시절에는 이런 저런 희망과 포부를 가지고 있었습니다.
제 삶을 어찌 살아야 할는지 나름대로 계획도 세우고 있었습니다.
지금 돌아보니 우습지만 결혼은 언제하고 아이는 몇을 낳을 것인지까지
계획하고 있었습니다만 그건 제 몫이 아니었나 봅니다.
인생의 성공, 지위, 명예, 부유함 등은 제 몫이 아니었습니다.
섬기기 위해 분주한 마르타처럼, 고요히 말씀을 듣기 위해
예수님 발치에 앉아 있는 마리아처럼, 제 몫은 이미 주님이십니다.
우리들 모두의 몫으로 주님께서 당신 자신을 내주시고
매일의 미사 때 성체를 통해서, 말씀을 통해서 우리 것이라고 내주십니다.
우리는 참 좋은 몫을 택했습니다.
끝
-윤인규 신부-
절 입구에서 스님의 유골을 안치한 부도(浮屠)를 볼 수 있다. 부도의 모양은 보통 원(圓)이다. 인생을 원으로 생각하기 때문일까? 길·성·계단·문 등과 같은 말은 하느님을 향해서 순례하는 영성생활과 깊은 관련이 있다. 부도의 ‘원’이나 영성생활의 ‘순례’ 개념은 끝을 원하지 않는 인간 본성과 맞닿아 있다. 실상 사람은 끝을 원하지 않는다. 그런 점에서 극락이나 천당은 끝이 아니라 새로운 시작이다.
빵의 기적(마르 8,1-10)에 이어 또 다른 기적 요구(마르 8,11-13)는 끝을 모르는 사람의 본성을 보여준다. 광야에서 예수께서 받으신 유혹은 그 단위를 높여가고 있다. 배고픔과 빵, 화려한 세상과 악마 경배, 성전과 자기 과시 등 세 번이나 예수님을 유혹하였지만 넘어가지 않자 악마는 다음 기회를 노리며 떠난다(루카 4,1-13). 이렇게 사람의 내면 깊은 곳에는 하느님을 향하거나 악마를 향하거나 끝없는 순환(원)이며 여정(순례)이 있다. 마르코와 마태오복음은 빵을 먹으면 기적이 보고 싶고, 기적을 보면 배가 고파지는 사람의 순환 본성을 성찰하고 있다(마르 8,1-21; 마태 15,32-16,12).
엠마오로 가는 제자들 사이에 주님께서 끼어드시지 않았더라면 그들의 생은 엠마오에서 끝나고 말았을 것이다. 끝을 모르는 순환 본성을 사람이 지녔다고 하더라도 주님께서 개입하시지 않는 생은 죽음으로 끝을 맞을 수 있다는 것도 알아야 한다.
연중 제5주간 토요일 -
박기흠 신부 -
마르코 복음서에는 예수님께서 군중을 먹이시는 두 가지 빵의 기적 이야기가 있다. 하나는 오천 명을 먹이신 기적(6,30~44)이고, 다른 하나는 사천 명을 먹이신 기적(8,1~9) 이야기이다. 여러 가지 정황으로 볼 때 기적 자체가 목적이 아니라 제자들에 대한 교육과 연관되어 있다고 본다.
앞서 오천 명을 먹이신 첫 번째 빵의 기적 사건은(6, 34~44) 이제 이방인에게도 주어진다. 두 이야기의 구조와 주제가 비슷한 것으로 보아(군중을 가엾이 여기심, 제자들과의 대화, 외딴 곳에서 빵과 물고기로 하는 식사, 배불리 먹고 남음, 많은 군중 등), 서로 다른 두 가지 사건이 있었다기보다는 하나의 사건이 유다인과 이방인, 곧 서로 다른 공동체 안에서 전승되었다.
그러나 두 번째 빵의 기적사화에서는 나누어준 빵의 숫자가 다섯 개가 아니라 일곱 개 -7이라는 숫자는 가나안 땅 이방의 일곱 민족(신명 7, 1)이나 예루살렘의 헬라계 그리스도인 공동체를 책임 맡은 일곱 명의 보조자들(사도 6, 1~7), 곧 이방계 그리스도인과 관련된 것으로 짐작-이고, 남은 빵조각이 열두 광주리가 아니라 일곱 바구니로, 빵을 먹은 사람의 숫자가 오천 명이 아니라 사천 명으로 나타난다.
그러나 4천명의 군중의 상황은 악조건 그 자체이다. 이런 상황이 예수님의 말씀을 통해 알 수 있는데, “저 군중이 가엾구나. 벌써 사흘 동안이나 내 곁에 머물렀는데 먹을 것이 없으니 말이다. 내가 저들을 굶겨서 집으로 돌려보내면 길에서 쓰러질 것이다. 더구나 저들 가운데에는 먼 데서 온 사람들도 있다.”(8, 2-3) 라고 밝혀집니다.
불의한 시장경제의 논리를 따르면 돈 있는 사람들은 갖가지 음식과 향락을 누릴 수 있지만 돈 없는 사람들은 굶어서 죽기까지 한다. 지상의 자연재화와 생명을 지탱해 주는 재화는 ‘하느님의 선물’로서, 모든 사람이 그 선물을 받을 권리가 있다. 정의롭게 짜인 시장경제에 따라 그것을 공평하게 나누게 된다면 어느 누구도 부족함이 없이 오히려 넘칠 것이다. 복음 구절은 위의 내용을 증명한다.
“사람들은 배불리 먹었다. 그리고 남은 조각을 모았더니 일곱 바구니나 되었다. 사람들은 사천 명가량이었다.”(8,8)
이런 행위 안에는 또 다른 가르침이 있는데, 사람들이 먹을 것을 사고 기본적인 생계를 유지하는 데는 많은 금전의 보유가 아니라 서로 나누어야 함을 보여준다. 이런 모양으로 예수님은 새로운 사회를 계획하셨다. 당신이 계획하신 그 사회 안에는 약자를 보호하고, 서로 가진 것을 따뜻하게 나누며 소유가 나눔으로 바뀌게 되는 세상이다. 그런 사회를 만들기 위해서는 자발적인 나눔을 실현하는 사람들의 모임이 필요하며, 개인과 집단은 독점하려는 불의한 사고방식에서 재화를 ‘하느님의 선물’로 보려는 사고방식이 무엇보다 필요하다. 예수님과 함께 도래하는 하느님 나라에서 하느님의 선물은 풍성하기 때문에 나누기만 하면 모든 사람이 만족하고 넘치기 된다.
예수님께서 축성하신 빵 일곱과 작은 물고기 몇 마리로 군중들은 배불리 먹었다. 예수님의 행위는 기적을 설명하기보다는 제자들이 마음에 새겨 교회에서 실행하도록 가르치는 것 같다. 오늘도 그리스도인들은 예수님의 제자로서 그분의 권능에 의지하여 세상 사람들에게 필요한 양식을 나누어 주라는 부르심을 받는다. 그 어느 시대보다 물질적으로 풍요로워졌지만 여전히 기아와 빈곤, 전쟁과 폭력, 생태계 파괴와 살상무기로 지구촌이 고통을 당한다는 것은 부끄러운 일이 아닐 수 없다.
오늘날 교회는 세상의 영적, 물질적 필요에 귀 기울이고 예수님의 이름으로 나눔에 앞장서야 할 것 같다.
일곱 개 있습니다
-이회진신부-
마르꼬 복음은 6장에 오천 명을 먹이신 이야기와 더불어
여기에 사천 명을 먹이신 기적 이야기를 함께 전하고 있습니다.
이 두 가지 빵에 관한 기적 이야기는 그 형식이나 내용에서 거의 비슷합니다.
다만 6장과 달리 오늘 읽는 복음에서는 이야기의 배경이
팔레스타인 밖의 지역이라는 점이 특이합니다.
특히 오늘 이야기에서 예수님은 그들을 그냥 돌려보내면
길에서 쓰러질 것이라고 하시며 그들을 먹여야 한다고 말씀하십니다.
사흘 동안 당신 곁에 머물며 하느님이 전하는 영적 양식을 받고
영혼의 위로를 받았던 그들에게
주님은 육신의 양식마저 주어야 한다고 제자들을 가르키십니다.
그렇다면 교회와 우리가 육신의 양식을 만들어 나누어주어야 한다는 것일까요?
아닙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이 “너희에게 빵이 몇 개나 있느냐?”고 물으시자
제자들은 빵 “일곱 개를 가지고 있다”고 말합니다.
“7”은 완전함을 뜻합니다.
다시 말해 사랑하기에 부족함이 없다는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자신들이 먹어야할 몫이고, 받아야할 사랑이라고 생각하기에
움켜쥔 빵, 자신 안에 간직한 사랑을 나누어야 된다는 생각조차 하지 못하였던 것입니다.
우리는 이미 우리 마음 안에 일곱 개의 빵을 가지고 있습니다.
사랑하기에 충분한 영적 은총과 육신적 양식마저 준비가 되어 있습니다.
따라서 하느님을 만나는 삶의 자리인 교회 안에서 우리는
위로와 평화를 전하는 영적 유산만이 아닌
실천적인 나눔의 문제도 또한 살아가야 합니다.
예수님이 원하시는 만남은 그렇게 우리의 시선을 돌리게 합니다.
생활 속에서 하느님을 섬긴다며 가족이나 형제자매 혹은 이웃에게 소홀히 한다면
그것은 정작 사흘 동안이나 꼬박 예수님과 함께 있으면서
온갖 영적 유산을 다 듣기는 하지만
그가 하느님을 찾아 나섰다 돌아가는 길은 언제나 지치고 기진할 뿐일 것입니다.
간혹 그런 아버지들의 이야기를 듣습니다.
밖에서 친구들 사이에서는 천사 같은 사람이고 훌륭하고 좋은 사람이라고 불리는 데,
집에만 들어오면 말도 없고, 조금만 잘못해도 화와 짜증을 내서
가족들을 불편하게 하는 아버지들이 있습니다.
그런 아버지를 바라보는 아내와 자녀들은 그 모습 때문에 힘들어할 뿐만 아니라,
그런 이중적이 모습을 이해할 수가 없고 반발하게 되죠.
결국 본인도 사랑에 굶주리고 가족들도 사랑에 허기진 황량한 시간을 살아가게 됩니다.
신앙은 좋은 말을 듣고 혼자 기뻐하며 행복을 만끽 하는 것으로 충분하지 않습니다.
그렇다고 어디서 커다랗게 많은 것을 구해다 주어야 하는 것도 아닙니다.
이미 우리가 가지고 있는 “일곱 개의 빵”만으로도 충분합니다.
이미 우리가 가지고 있는 그것을 쓸려고 마음 먹는 것만으로도 우리는
새로운 세상과 새로운 공동체를 이루는 기적을 볼 수 있음을 말하는 것이죠.
이런 이유로 우리는 하느님과 함께하는 공동체의 삶을 찾는 것입니다.
열심히 살아가고 있고, 열심히 신앙생활을 하고 있다고 생각하는데도
하느님으로부터 위로 받지 못하고, 가족으로부터 사랑을 받지 못한다고 생각된다면,
눈을 돌려 주위을 돌아보십시오.
자기 주변의 사람들도 또한 그렇게 여러분에게서 위로 받고 싶어 하고,
행복을 얻고 싶어하는 것을 볼 수 있을 것입니다.
그리고 내가 사랑한 것이 아니라 강요하고 있었고,
잊어버리고 있었다는 것을 발견하게 될 것입니다.
예수님은 그런 우리에게 우리 자신이 가지고 있는 것을 나누어 주라고 하십니다.
그리고 자신의 것을 나누는 그 순간부터 자신이 변하고,
함께하는 가족이 변하며, 세상이 변하는 기적이 시작되는 것을 보게 될 것입니다.
그 기적의 힘은 분명 우리가 이미 가지고 있는 “일곱 개의 빵”으로 시작합니다.
그 은총을 나누는데 두려워하지 않는 하루가 되길 기도합니다.
“주님, 저는 이미 충분히 당신의 은총을 받았습니다. 그런데 왜 이것을 나누지 못하는 것일까요? 주님, 제게 있는 일곱 개의 빵을 다른 이에게 나누어 줄 수 있게 마음을 열어 주소서. 아멘.”
"생명나무의 열매"
-이수철신부-
오늘 창세기의 1독서와 마르코 복음의 비교가 재미있습니다.
“너 어디 있느냐?”
주 하느님께서 물으시자 아담의 대답입니다.
“동산에서 당신의 소리를 듣고
제가 알몸이기 때문에 두려워 숨었습니다.”
참 안타까운 단절된 관계를 보여줍니다.
과연 여러분에게 주 하느님께서 “너 어디 있느냐?” 하고 물으신다면,
“예, 여기 있습니다.” 대답하며
두려움 없이 주님과 대면할 수 있겠습니까?
있어야 할 ‘제자리’에 있는가 하는 물음입니다.
평생 화두(話頭)로 삼아야 할 물음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너희에게 빵이 몇 개나 있느냐?”
물으시자 즉시, 제자들의 대답입니다.
“일곱 개 있습니다.”
주님과 제자들의 친밀한 일치의 관계를 감지할 수 있습니다.
진인사대천명(盡人事待天命)이란,
인간으로서 최선을 다하고 하늘의 처분을 기다린다는 말씀처럼,
제자들이 지닌 일곱 개의 빵 모두를 봉헌했을 때,
모두가 배불리 먹고 남은 조각들만 일곱 바구니였다 합니다.
무려 사천 명가량 사람들이 먹었다 합니다.
바로 성체성사의 축복을 상징합니다.
부족하면 부족한대로 내 모두를,
내 부족한 믿음, 희망, 사랑 모두를 봉헌 했을 때,
주님은 온갖 축복으로 우리를 채우십니다.
무엇보다 큰 축복은 에덴동산과도 같은 이 미사 잔치에서
생명나무의 열매인 주님의 말씀과 성체를 모시는 일입니다.
창세기에서 하느님은,
“이제 그가 손을 내밀어 생명나무 열매까지 따먹고
영원히 살게 되어서는 안 되지.”
말씀하시며, 에덴동산에서 아담을 내치시고
커룹들과 번쩍이는 불 칼을 세워
생명나무에 이르는 길을 막으셨다 합니다.
그러나 주님은 당신의 ‘십자가의 길’로
생명나무에 이르는 길을 활짝 열어주셨습니다.
십자가에 달려 죽기까지 아버지께 순종하신,
그리고 마침내 부활하신 주님 덕분에
아담의 불순종으로 닫혀버린 생명나무에 이르는 길이 활짝 열렸습니다.
하느님의 생명에 이르는 지름길은
십자가의 길, 순종의 길뿐임을 깨닫습니다.
주님의 십자나무, 생명나무에 달린 생명의 빵 말씀과 성체입니다.
이 은혜 가득한 미사시간,
주님의 십자가와 부활 은총으로 복원된 에덴동산에서
생명나무의 열매인 주님의 말씀과 성체를 모심으로
주님과 하나 되어 영원히 살게 된 우리들입니다.
아멘.
“이 광야에서 누가 어디서 빵을 구해 저 사람들을 배불릴 수 있겠습니까?”
-양승국신부-
<주님, 저를 보십시오>
예수님의 가르침에 매료된 백성들은 예수님께서 건네시는 한 말씀 한 말씀이 얼마나 ‘달던지’, 그분과 함께 보냈던 시간이 얼마나 꿈결같이 감미로웠던지, 시간가는 줄 모르고 예수님을 따라 다니고 있었습니다.
제 정신을 차려보니 어느새 사흘이란 시간이 흘렀습니다. 처음 예수님을 따라 나섰을 때는 저마다 먹을 것을 충분히 測構?있었지만, 사흘 동안 ‘비상식량’은 동이 나고 말았겠지요.
한여름인 7월 중순경 근동지방의 기후는 만만치 않습니다. 더위가 극성을 부릴 때였습니다. 백성들이 머물렀던 장소도 도시와는 상당히 떨어져 있던 오지였습니다. 그들 중에는 노약자들도 있었습니다. 치유를 기다리고 있던 환자들도 있었습니다. 아주 먼 곳으로부터 걸어온 사람들도 있었습니다. 지금 당장 뭔가 먹지 않으면 허기에 탈진할 사람들도 한둘이 아니었습니다.
예수님께서 제자들을 가까이 불러 말씀하십니다.
“저 군중이 가엾구나. 저들을 굶겨서 집으로 돌려보내서야 되겠느냐?”
예수님의 말씀에 대한 제자들의 답변을 한번 들어보십시오. 꽤 의미심장한 답변입니다.
“이 광야에서 누가 어디서 빵을 구해 저 사람들을 배불릴 수 있겠습니까?”
제자들의 답변은 자신들로서는 아무것도 할 일이 없음을 시인하는 답변입니다. 자신들의 한계, 무능함에 대한 솔직한 고백입니다. 그래서 결국 제자들이 원하는 바는 이것입니다. 자신들의 힘으로는 아무것도 할 수 없으니, 스승님의 개입이 필요함을 넌지시 암시하고 있는 것입니다. 은근히 스승님의 능력발휘를 촉구하고 있는 것입니다.
“스승님, 보십시오. 저희로서는 불가능한 일입니다. 스승님께서 나서주셔야 되겠습니다. 도와주실 순간입니다.”
이 세상을 살아가다보면 가끔씩 우리도 한계에 도달하게 됩니다. 더 이상 길이 보이지 않는 상황 앞에 직면합니다. 아무리 발버둥 쳐 봐도 사면초가인 경우가 있습니다. 삶의 막장까지 내몰리기도 합니다.
그 순간, 세상 사람들은 하느님을 원망합니다. 자신을 도와주지 않는 사람들을 저주합니다. 냉정하기만 한 세상을 향해 욕설을 날립니다.
그러나 신앙인들에게 있어서는 그 벽에 부딪치는 순간이야말로 ‘참 신앙인’으로서의 진가가 발휘되는 순간입니다.
그런 고통의 순간, 인간적 무능력을 절절히 체험하는 순간, 이렇게 주님께 아뢰도록 합시다.
“주님, 저를 보십시오. 보시다시피 저는 이토록 부족합니다. 주님께서 잘 아시다시피 이토록 나약합니다. 이다지도 힘이 없습니다. 제 나름대로 최선을 다했습니다만, 결과를 보십시오. 정말 참담합니다. 오랜 시간 발버둥 쳐 봤지만 결과를 보십시오, 이 모양입니다. 이제야말로 주님 당신께서 개입하실 순간입니다. 부디 도와주십시오. 꼭 동반해주십시오. 제가 끝까지 포기하지 않도록 힘을 주십시오.”
오늘 루르드의 복되신 동정 마리아 기념일이자 세계 병자의 날입니다.
오늘도 수많은 형제자매들이 끔찍한 병고에 시달리며 주님의 도우심을 기다리고 있습니다. 수많은 환자들이 사면초가의 상태에서 힘겨워하고 있습니다. 능력과 치유의 주님께서 그들의 고단한 삶에 끝까지 함께 하시길 기원합니다. 그들의 아픈 상처를 당신 자비의 손길로 오래오래 어루만져주시길 기도합니다.
사랑하는 환우여러분, 베네딕토 16세 교황님의 권고에 따라 여러분의 고통을 그리스도와 함께 아버지 하느님께 봉헌하시길 바랍니다. 어떠한 시련도 인내하며 받아들이면 가치가 있고 온 인류에 대한 하느님의 자비를 얻게 된다는 확신을 가지시길 부탁드립니다.
힘을 내십시오. 우리뿐만 아니라 예수님께서도 지금 고통 받고 계십니다. 성모님께서도 십자가 아래에서 말없이 고통을 받고 계십니다. 뿐만 아니라 우리의 고통까지 짊어지고 계십니다.
잘 기억하십시오. 여러분의 고통이 예수님의 고통과 결합될 때 그 고통은 구원의 도구가 됩니다.
우리가 지금 겪고 있는 모든 고통과 죽음에 대한 유일하고 진정한 대답은 우리를 위하여 돌아가시고 부활하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이심을 용감히 증언하길 바랍니다.
“그래서 나는 여러분을 위하여 기꺼이 고통을 겪고 있습니다. 그리고 나는 그리스도의 몸인 교회를 위하여 그리스도의 남은 고난을 내 몸으로 채우고 있습니다”(골로 1,24).
두가지 사랑
-오상선신부
아우구스띠노는 그의 저서 <신국론>에서
두 가지 사랑이 두개의 다른 도시를 만든다고 이야기한다.
하느님에 대한 사랑은 자신을 경멸하도록까지 만들어 천상도시를 만들고,
자신에 대한 사랑은 하느님을 경멸하도록까지 만들어 지상도시를 만들었다는 것이다.
오늘 복음에서 측은지심 때문에 사천명의 백성을 배불리 먹이신 예수님의 사랑은
천상 예루살렘의 표상이 된다.
수많은 성인성녀들의 삶은 자기자신을 위해서가 아니라 하느님에 대한 사랑 때문에
자신을 경멸하고 타인을 위해 자신을 온전히 봉헌함으로써 예수님께서 시작하신
하느님 나라 건설에 참여하신 것이다. 따라서 우리 크리스천들이 표방하는 신앙생활도
이렇게 하느님 사랑 때문에 자신을 온전히 내어놓는 사랑이 될 때 하느님 나라 건설에
이바지하게 됨은 자명하다 하겠다.
그런데 가끔 우리는 이웃에 대한 사랑, 백성에 대한 사랑을 빙자한 자기 사랑의 모습을
많이 접하게 된다. 우리나라의 역대 대통령들과 많은 정치인들이 백성을 위한 다한 미명하에 자기자신의 안위와 부귀영달을 꾀하였기에 우리나라가 모든 백성이 평화와
행복을 누리는 하느님 나라가 못되고 늘 수많은 범죄와 악행에 노출되는 그야말로
지상적 도시에 머물 수밖에 없는지도 모른다.
이는 정치인들만의 문제는 아닌 성싶다.
우리 교회 안에서도 있을 수 있고,
직장과 가정, 이웃들 안에서도 항상 있을 수 있는 문제이다.
나는 과연 하느님 사랑 때문에 나를 다른 사람에게 내어 놓고 있는가?
아니면 나 자신에 대한 사랑 때문에 다른 사람을 이용하고 있는가?
무시무시한 질문이 아닐 수 없다.
나 자신의 모습을 냉철히 바라보면
이 두 가지 사랑을 적절히 배합하여 두 마리 토끼를 다 잡고 싶어하는 것은
아닐까 생각해 본다.
하느님 사랑이 지상과제이긴 하지만
나 자신에 대한 사랑은 현실적인 문제이기에
쉽지만은 않겠지만
진정 내가 하느님 사랑 때문에 살지 않는다면
우리가 꿈꾸는 하느님 나라 건설은 결코 이루어질 수 없다고 해야하지 않을까?
오늘
나는 어떤 사랑을 살고 있고,
어떤 나라 건설에 일조하고 있는지 되돌아보자.
그리고 예수님께
우리가 직접은 하지 못한다 하더라도
당신이 시키시는 대로
그 사랑을 나누어 주는 역할이라도 할 수 있도록 해 주십사
간청하자.
왜냐하면
그분은 늘 하느님 나라 건설에
우리의 도움과 협력을 요청하시기 때문이다.
그냥 그분께서 시키시는 대로
<예> 하고 하기만 하면 된다.
그러기 위해서는
먼저 그분의 말씀을 귀기울여 들어야 하리라.
그리고 조용히 <예> 하고 응답해야 하리라.
그리고는...
묵묵히 <실행>에 옮기기만 하면 되리라.
그분은 우리에게 과중한 것을 요구하시지 않으신다.
그분이 주시는 것을 조금씩 나누어 주기만 하면 되니까...
-곽용승 신부 -
오늘 복음에서 만나게 되는 예수님의 모습에서 우리는 어떻게 아파하고, 힘들어하고, 배고파하는 이들에게 사랑을 나누어야 하는가를 잘 보게 됩니다. 복음의 내용을 살펴보면, 삼일 전부터 예수님을 따라 다니던 군중들이 모여 있는데 먹을 것이 없습니다. 이를 예수님께서 보시고 “저 군중이 가엾구나” 하십니다. 이 가엾음이란 말은 어원적으로 볼 때 함께 고통에 참여하고 그 고통 속에 뛰어 들어 간다는 의미가 있습니다. 때문에 “저 군중이 가엾구나, 벌써 사흘 동안이나 내 곁에 머물렀는데 먹을 것이 없으니 말이다. 내가 저들을 굶겨서 집으로 돌려보내면 길에서 쓰러질 것이다.”라는 예수님의 말씀은 예수님 스스로 군중이 먹을 것이 없어 배고파하는 그 고통을 함께 느끼고 그 고통에 직접적으로 뛰어 들어가심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이것은 관심과 사랑에 의해 가능한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배고픔에 있는 군중들의 상태를 아셨습니다. 곧 그들과의 친밀감을 가지고 계셨다는 것입니다. 이 친밀감이 그들에 대한 관심과 애정을 촉발시키고 이 관심과 애정이 가엾음을 느끼게 하는 것입니다. 이 가엾음이 그들의 고통과 힘듦을 나누게 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 힘듦과 고통을 풀 수 있는 것을 행하게 합니다. 그렇습니다. 이처럼 아파하는 이, 힘들어하는 이, 그리고 가난으로 고통 받는 이들의 고통에 함께하고 그 고통을 나의 고통으로 껴안으며 그 고통의 현장 안으로 들어가는 것이 그들을 사랑하고 그들에게 다가가는 것임을 잊지 말아야겠습니다. 이를 위해 우리는 지속적인 관심과 애정을 그네들에게 표현해야 할 것입니다. 그러면 우리의 내장에서부터 그네들에 대한 가엾음이 용솟음칠 것이고 이 마음이 우리를 그네들과 하나 되게 할 것입니다. 그럴 때 우리는 그네들의 아픔을 기쁨으로 나눌 수 있도록 행동할 것입니다. 예수님처럼 말입니다. 우리는 아파하는 이들, 힘들어하는 이들, 배고파하는 가난한 이들에게 관심과 애정을 가지고 있습니까? 그리고 가엾음을 느낍니까? 그리고 그들을 위한 행동을 하고 있습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