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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1029. 묵상글 들 ( 연중 제30주간 금요일. - 거절당하는 실패보다 큰 포기하는 실패. 등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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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1029. 연중 제30주간 금요일. 김찬선 레오나르도 신부님.
- 거절당하는 실패보다 큰 포기하는 실패
어제는 시몬과 유다 사도 축일이었기에 다른 독서를 하였지만
원럐 연중 30주 목요일 독서에서 바오로 사도는 그리스도의 사랑에서
우리를 갈라놓을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는 그 유명한 고백을 합니다.
"무엇이 우리를 그리스도의 사랑에서 갈라놓을 수 있겠습니까?
환난입니까? 역경입니까? 박해입니까? 굶주림입니까?
헐벗음입니까? 위험입니까? 칼입니까?"
그런데 이렇게 아무것도 갈라놓을 수 없는 그리스도의 사랑에서
스스로 떨어져 나간 동족 이스라엘이 너무도 안타까워 오늘은
이렇게 자신의 심정을 토로합니다.
"내 혈족인 동포들을 위해서라면 나 자신이 저주를 받아
그리스도에게서 떨어져 나가기라도 했으면 하는 심정입니다."
오늘 바오로 사도의 심정은 죄를 지어 벌을 받게 된 아들을 대신하여
자신이 감옥에 가겠다는 어머니의 심정과 같거나 그보다 더 합니다.
대신 벌을 받아 아들이 정신차릴 수만 있다면 뭐든지 하겠는데
정신차리지 않는 아들이 어머니에게 너무도 안타까운 것처럼
바오로 사도도 동족인 유대인들이 회개하기 전의 자신처럼
그리스도의 사랑을 모르고 떨어져 나감이 너무도 안타까운 겁니다.
그런데 우리가 너무도 잘 알다시피 바오로 사도는 죽여서라도
신자들을 그리스도에게서 떼어 놓으려고 했던 존재였지 않습니까?
그러다가 자신이 오히려 주님에 사로잡혀 그리스도와 떼어서는 도무지
자기를 생각할 수 없을 정도로 자기 정체성을 가지셨던 분이 아닙니까?
그래서 바오로 사도는 자신의 모든 서간의 시작 부분에서
자신을 "그리스도의 종인 나 바오로"라고 소개하거나
"그리스도의 사도인 나 바오로"라고 늘 소개하지요.
그런 그가 자신이 그리스도의 사랑에서 떨어져 나갈지라도
동족이 돌아서기만 한다면 그렇게 되겠다니
그 사랑이 참으로 대단하고, 그 심정이 참으로 안타깝습니다.
아무것도 갈라놓을 수 없는 그리스도의 사랑과
그리스도의 사랑을 닮은 이런 바오로 사도의 사랑을 보면서
우리는 우리의 사랑을 반성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쉽게 포기해버리는 우리의 사랑 말입니다.
우리는 몇 번 우리의 사랑이 거절당하거나 충고가 무시당하면
그 사람을 포기하고 내 사랑에서 그를 제외시켜 버립니다.
그런데 자주 말씀드리듯이 우리의 사랑이 실패한다면
내 사랑이 거절당하는 실패보다 내 사랑을 내가 포기하는 실패가 더 큽니다.
누가 나의 사랑을 거절한다고 해서
나의 사랑을 포기하면 누구 손해입니까? 나의 손해지요.
그런데 누가 나의 사랑을 거절하면 그의 손해이고 그가 손해를 봐야지
그것 때문에 내가 사랑을 포기하는 손해를 봐서는 안 되겠지요.
거듭 말씀드리지만 사랑의 실패는 포기이지 거절당하는 것이 아닙니다.
바오로 사도를 이방인의 사도라고 하지만
바오로 사도가 이방인에게 간 것은 동족을 포기하고 간 것이 아니지요.
오늘 봤듯이 여전히 사랑하고 있고 그래서
가는 곳마다 유대인들의 회당에 찾아 갔음을 우리는 간과치 말아야 하지요.
아무튼, 포기하지 않는 바오로 사도의 사랑에 우리를 비춰보는 오늘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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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1029. 연중 제30주간 금요일. 이영근 아오스딩 신부님.
“안식일에 병을 고쳐주는 것이 합당하냐? 합당하지 않느냐?”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 안식일에 바리사이 지도자의 집에 초대되어 식사하시게 되었는데, 수종을 앓는 사람이 그분 앞에 있었고, 바리사이들은 “그분을 지켜보고 있었습니다.”(루카 14,1). 이는 마치 꼬투리를 잡아 예수님을 함정에 빠뜨리기 위해 동원된 것 같은 인상을 줍니다. 사실, 이전에도 이런 일은 있었습니다. 곧 ‘손 오그라든 환자를 치유하신 장면’(루카 6,6-11)과 ‘허리 굽은 여인을 치유하신 장면’(루카 13,10-17)에서, 바리사이들은 예수님께서 안식일에 치유하시는 것을 올가미에 걸어 체포하려고 하였습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오히려 그들을 자신들이 파놓은 함정으로 몰아넣으십니다.
“안식일에 병을 고쳐주는 것이 합당하냐? 합당하지 않느냐?”(루카 14,3)
그러자, “그들은 잠자코 있었습니다.”(루카 14,4). 왜냐하면, 이 치유를 인정하면 ‘안식일에 일해서는 안 된다’는 율법에 대한 전통을 어기는 것이 될 것이고, 인정하지 않으면 이웃의 불행에도 자비와 선행을 베풀지 않는 비정함이 드러나게 될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그들은 아무 말 없이 잠자코 있었습니다. 그러자, 예수님께서는 한 마디 말씀도 하시지 않으시고, “수종을 앓는 이의 손을 잡고 병을 고쳐서 돌려보내셨습니다.”(루카 14,4), 그리고 물으셨습니다.
“너희 가운데 누가 아들이나 소가 우물에 빠지면
안식일일지라도 바로 끌어내지 않겠느냐?”(루카 14,5)
그렇지만, 여전히 “그들은 이 말씀에 아무 대답도 하지 못하였습니다.”(루카 14,5). 자신들이 파놓은 함정에 오히려 자신들이 말려들고 말았던 것입니다.
사실, 율법에 따라 일을 맡은 관리인들은 안식일에도 정해진 희생제물을 잡고 모든 의식을 행할 수 있도록 안식일에 일하는 것을 금하지 않았습니다. 또 생명의 위협을 받을 경우에는 안식일 법규를 지키지 않아도 되었습니다. 이제 예수님께서는 안식법의 본질이 생명을 살리는 데 있음을 밝히고, 병을 고쳐줄 수 있는데 그렇게 하지 않음은 결국 죽이는 것과 같고, 할 수 있는데 선행을 하지 않는 것은 남을 결국 해치는 일과 같음을 깨우쳐주십니다.
그래서 <마르코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말씀하셨습니다.
“안식일이 사람을 위하여 있는 것이지,
사람이 안식일을 위해서 있는 것이 아니다.”(마르 2,27)
한편, 요한복음사가는 ‘벳자타의 병자를 치유하신 장면’에서 하느님께서는 이렛날에 완결된 창조활동과 동시에 완성을 위한 끊임없는 구원활동을 지속하심을 말합니다.
“내 아버지께서 여태 일하고 계시니 나도 일하는 것이다.”(요한 5,17)
이 말씀은 ‘주일’이라 해서, 마냥 게으르기 쉬운 우리에게도 경각심을 심어줍니다. 아멘.
-오늘말씀에서 샘 솟은 기도 -
“안식일에 병을 고쳐주는 것이 합당하냐? 합당하지 않느냐?”(루카 14,3)
주님!
당신은 결코 사랑을 멈추지 않으십니다.
안식일 율법 앞에서도, 올가미를 씌우려 지켜보고 있는 이들 앞에서도,
당신은 결코 사랑을 멈추시는 법이 없으십니다.
합당해서 사랑하는 것이 아니라, 사랑하기에 합당한 까닭입니다.
사랑스러워서 사랑하는 것이 아니라, 사랑하기에 사랑스러운 까닭입니다.
당신은 늘 살아계시기에 생명이시며 생명을 주시듯,
늘 사랑하시기에 사랑이시며 사랑을 베푸십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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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1029. 연중 제30주간 금요일. 반영억 라파엘 신부님.
☆★ 모든 법의 기초는 사랑이다
법은 한 공동체를 이루고 있는 사람들이 공동선을 지향하면서 선포한 이성의 명령으로 생각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법은 존중되어야 하고 지켜야 하며 지켜져야 선을 이룰 수 있습니다. 그러나 법은 어디까지나 법입니다. 따라서 적용에 있어서 공정해야 하고 형평성을 지켜야 하지만 예외가 있을 수 있습니다. 더군다나 인간의 생명이 위협을 받는 것이라면 그 법은 마땅히 거부되어야 합니다. 실정법보다는 하느님의 법이 우선하기 때문입니다.
유다인에게 있어서 안식일은 단순히 쉬는 날이 아니라 하느님께 바쳐드리는 하느님의 날이었습니다. 하느님께서 우주 만물을 창조하시고 이렛날에 쉬셨습니다. 창세기 2장 3절에 보면 “그분께서는 하시던 일을 모두 마치시고 이렛날에 쉬셨다. 하느님께서 이렛날에 복을 내리시고 그날을 거룩하게 하셨다. 하느님께서 창조하여 만드시던 일을 모두 마치시고 그날에 쉬셨기 때문이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그저 쉬는 날이 아니라 감사와 찬미의 날입니다. 일주일을 잘 지내기 위해서 하루 쉬는 날이 아니라 일주일을 잘 보내도록 안배하신 하느님과 함께 머무는 날입니다.
탈출기 20장 10절 11절에 보면, 십계명 중 3번째 계명을 볼 수 있습니다. “안식일을 기억하여 거룩하게 지켜라. 엿새동안 일하면서 네 할 일을 다하여라. 그러나 이렛날은 주 너의 하느님을 위한 안식일이다. 그날 너의 아들과 딸, 너의 남종과 여종, 그리고 너의 집짐승과 네 동네에 사는 이방인은 어떤일도 해서는 안 된다. 이는 주님이 엿새 동안 하늘과 땅과 바다와 그 안에 있는 모든 것을 만들고 이렛날에 쉬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주님이 안식일에 강복하고 그날을 거룩하게 한 것이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사실 십계명은 이스라엘 백성이 이집트의 종살이에서 해방된 다음 하느님의 백성으로써 “주님께서 이르신 모든 것을 실천하겠다고 약속”(탈출19,8)한 후 시나이산에서 받게 된 것입니다. 그래서 이스라엘 백성들은 안식일에는 노예뿐 아니라 가축까지도 일을 시키지 않았습니다. 노예살이했던 옛 상황을 기억하고 해방의 기쁨을 나누기 위한 축제의 날이었습니다.
이렇게 안식일은 찬미와 감사, 그리고 해방의 기쁨을 함께하는 하느님의 날이었습니다. 그런데 시간의 흐름 속에 안식일 안에 담긴 알맹이는 사라지고 법규의 틀만 지키기에 급급해했습니다. 율법학자들이나 바리사이들은 하느님의 법을 잘 지키기 위한 세부 규정을 만들고 해석한다는 빌미로 이제 절대 권력을 휘두르게 되었고, 자신들의 뜻을 합리화시키는 방법으로 안식일 법이 바뀌기 시작하였습니다. 우리나라도‘국가보안법’이니‘긴급조치 법,‘유신 법’등 정권유지를 위한 방법으로 법의 남용을 많이 해왔고, 지금도 여전히 사형제도라든지 낙태법을 빌미로 살인죄를 용납하고 있고, ‘유전무죄’,‘무전유죄’의 악법이 작용하고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안식일에 병자를 고쳐주셨습니다. 인간의 생명이 모든 것 위에 있고, 안식일과 같은 거룩한 제도보다도 우위에 있다는 것을 알려주기 위함입니다. 그런데 사실은 바리사이들이나 율법학자들도 그것을 알고 있었습니다. 알고 있으면서도 그 취지를 살리지 않았고 오히려 자기 기득권을 누리려고 외면해 온 것뿐입니다. 이렇게 보면 “수종 병자”는 바로 그들입니다. 그들은 하느님을 섬긴다는 구실을 내세워 자기 자신만을 챙기는 병에 걸려있었습니다. 병중에 가장 무서운 병은 ‘자폐증’이라고 합니다. 자기 안에 갇혀있는 병, 마음이 오그라든 병이 참으로 무섭습니다.
오늘날도 마찬가지입니다. 나쁜 것을 알면서도 바꾸려 하지 않고 오히려 즐기는 것이 얼마나 많습니까? 바리사이, 율법학자가 못된 것이 아니라 내 자신이 못된 것이 참 많습니다. 생각해 보십시오! 내가 잘못을 범할 때 정말 모르고 범합니까? 아닌 것을 알면서도 나의 달콤함을 채우기 위해서 선택하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합리화시키려는 것이 우리의 모습입니다.
법은 마땅히 존중되어야 하지만 인간을 앞설 수 없으며 또한 그 근본취지를 잘 살려야 하겠습니다. 주일을 거룩히 지내는 우리의 태도 또한 하느님을 찬미하고 감사하는 날, 주님과 함께 기쁨을 나누는 날이 되기를 희망합니다. 마지못해 억지로 의무적으로 주일미사에 오신다면 하느님께서 기뻐하실 수가 없습니다. 기쁨으로 감사함으로 주일을 맞이하시기 바랍니다. 하느님의 법은 영원합니다. 법을 집행할 때 사랑이 빠지면 악법이 되고 맙니다. 미룰 수 없는 사랑에 눈뜨기를 희망하며 더 큰 사랑으로 사랑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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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1029. 연중 제30주간 금요일. 이기우 사도요한 신부님.
◈ 내 양들은 내 목소리를 알아듣는다
양떼를 돌보아주고 목숨까지 바쳐 양들을 지켜주는 목자는 착한 목자입니다. 이처럼 예수님께서는 당신 양떼를 위해 목숨을 바치셨을 뿐만 아니라 양들의 먹잇감으로 당신 자신을 내놓으셨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의 양들은 그분의 목소리를 알아듣습니다(복음 환호송). 다른 삯꾼이나 거짓 목자를 따라가지도 않습니다.
예수님께서 어느 안식일에 바리사이들의 지도자 가운데 한 사람으로부터 식사 초대를 받으셨습니다. 그런데 고약하게도 그들은 예수님 앞에 수종을 앓는 사람을 데려다 놓고 그분의 반응을 지켜보았습니다. 그 자리의 분위기와 상황이 파악 되십니까? 그네들은 예수님께 대한 호의로 식사에 초대한 것이 아니라 공개적으로 스캔들을 일으키느라고 안식일을 골라서 수종병 환자와 마주치게 하는 연출을 한 것이었습니다.
세상에는 이런 고약한 일들이 아주 많이 일어납니다. 대개 고상하고 권위가 보장되는 제도권에서는 거의 일어나지 않지만 장삼이사(張三李四)들이 사는 저자거리에서는 일상적으로 흔히 일어납니다. 그래서 사람과 노력이 투입되어야 일이 이루어지는 현장권에서도 사도직이 필요합니다. 예수님께서 오늘 복음의 상황에서 당하신 일도 제도권인 듯 사실은 현장권에서 일어났지요.
그런데 제도권의 사도들을 뽑으실 때 예수님께서 밤을 새우며 하느님께 기도하셨고, 공생활 중에 지극 정성으로 가르치셨으며, 최후의 만찬 자리에서 성체성사로 당신의 전권을 공식적으로 위임하셨음에도 불구하고, 그 열두 사도들은 그분의 목소리를 알아듣지 못했습니다. 이스카리옷 유다는 스승을 밀고하러 나갔고, 나머지 제자들은 동료인 유다가 밀고하러 나가는 줄도 눈치채지 못했으며 급기야 스승이 체포되시자 죄다 도망쳤습니다. 그나마 수제자 베드로가 멀리 도망도 가지 못하고 대사제 관저 앞뜰에서 얼쩡거리다가 느닷없이 심문을 받자 얼떨결에 스승을 모른다고 부인했을 뿐입니다.
그런데 바오로는 아예 박해자 처지였다가 벼락을 맞고서야 사도의 길에 들어섰습니다. 제도권이 아니라 현장권 사도직을 받은 것입니다. 그런 바오로에게 기성 사도단의 수하(手下)들은 대놓고 무시하며 방해를 일삼았습니다. 하지만 바오로에게 더 신경 쓰였던 대상은 얼치기 사도꾼들이 아니라 그 당시까지도 예수님을 알지 못하고 메시아로 고백하지 못하며 내동댕이쳐져 있던 동족 이스라엘 사람들이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사도로 인생을 180도로 전환한 후에도 히브리 혈통으로서 지닌 자기의 정체성을 조금도 부끄러워하지 않고 오히려 자부심을 높이 지녔던 그로서는, “내 혈족인 동포들을 위해서라면, 나 자신이 저주를 받아 그리스도에게서 떨어져 나가기라도 했으면 하는 심정”(로마 9,3)이라고 하지 않아도 될 말을 하기까지 했습니다. 이 말은, 말 그대로 받아들이기보다는 그 말에 담긴 본심을 읽어야 할 말입니다. 그만큼 유다인 선교가 절박했었다는 뜻입니다. 할례 받은 유다인들에게 복음을 전하겠다던 제도권 사도직이 제 역할을 못한 결과이기도 했을 것입니다.
제도권이든 현장권이든 사도직을 수행하자면 스승이시오 목자이신 예수님의 목소리를 알아들어야 합니다. 그것은 섬김이요 기억이자 계승입니다. 서로를 종으로서 주인처럼 섬길 줄 알아야 하고, 이미 예수님께서 그 길을 십자가의 길처럼 가셨음을 기억해야 하며, 그분이 가신 길을 계승하는 우리네 사도직이 영광스러운 부활의 길임을 명심해야 할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하느님이시면서도 여느 사람처럼 당신 자신을 낮추시고 비우시어 종처럼 십자가에 달려 죽기까지 하느님께 순종하셨습니다”(필리 2,6-11). 예수님께서 하느님의 목소리를 알아들으셨기 때문입니다. 순종의 덕은 알아들은 경청의 결과입니다.
만일 우리 교회의 제도권 사도직이 현장권 사도직의 잠재력을 알아보고 자율성을 부여한다면, 그리고 현장권 사도직이 제도권의 권위주의가 아니라 진정한 복음적 권위를 알아보고 섬김과 성체성사의 현존 양식을 존중하고 그분이 맡기신 사도직을 계승하려 한다면, 가톨릭 교회의 매력은 마치 현재의 한류가 지닌 선한 영향력처럼 우리 사회 곳곳에 흘러 넘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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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1029. 연중 제30주간 금요일. 조명연 마태오 신부님.
감사하는 마음이 우리 삶에 큰 도움이 된다고 합니다. 이를 과학자들이 정말로 그런지 다음과 같은 실험을 했습니다.
사람들을 두 집단으로 나누어 일기를 쓰게 했습니다. 그런데 첫 번째 집단에는 감사함을 느낀 것들을 기록하게 하고, 두 번째 집단에는 귀찮거나 짜증 났던 것들을 기록하게 했습니다. 이제 어떤 집단의 스트레스가 더 높았을까요? 두 번째 집단이었습니다. 감사를 기록한 집단의 스트레스 수준은 그렇지 않은 집단보다 현저하게 낮았습니다.
이런 실험도 있었습니다. 너무 많은 생각과 걱정으로 머릿속이 복잡하다고 이야기하는 대학생들을 모았습니다. 이들은 불면증으로 거의 잠을 자지 못하고 있었지요. 이들에게 잠들기 전 15분 동안 감사하는 것들을 목록으로 작성하게 했습니다. 이 감사일기가 어떤 변화를 가져왔을까요? 학생들의 복잡한 생각을 풀어 주었고, 숙면을 할 수 있게 해줬습니다.
감사는 이렇게 과학적으로 볼 때도 자신에게 이롭습니다. 그런데도 감사의 이유를 찾으려 하지 않습니다. 사실 감사하는 마음이 있으면 그 자리에 다른 감정이 밀고 들어올 수 없다고 합니다. 당연히 긍정적인 삶을 살게 됩니다.
주님께 감사를 드릴 수 있는 이유를 오늘 복음에서도 찾을 수 있습니다.
율법 교사, 바리사이들이 있는 곳에 수종병자가 나타났습니다. 이때 이들의 반응은 어떠했을까요? 피하고 싶었을 것입니다. 안식일은 거룩한 날로 부정한 사람과 접촉하면 자신 역시 부정한 사람이 된다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이는 안식일을 거룩하게 지낼 수 없는 것이 됩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이런 질문을 던지셨던 것이 아닐까요?
“안식일에 병을 고쳐 주는 것이 합당하냐, 합당하지 않으냐?”
율법의 근본정신은 사랑입니다. 사랑을 실천하는 기회가 된다면 오히려 율법을 충실하게 지키는 것이라 말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율법 교사, 바리사이들은 자신의 부정함만을 바라보고 있었습니다.
사실 예수님께서 이 수종병자를 고쳐 주지 않아도 뭐라고 할 사람이 하나도 없습니다. 안식일에 어떤 치유행위도 불가능하다는 것을 잘 알고 계셨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 바라보시는 것은 ‘사랑’입니다. 이 사랑을 먼저 생각하시고, 사랑을 먼저 실천하십니다. 그리고 우리 역시 다른 생각보다 먼저 사랑할 것을 명령하십니다.
이런 사랑의 주님께 어떻게 감사를 드리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주님께 대한 감사 이유를 찾으면서 자기 자신의 이로움도 간직했으면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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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제는 목적지에 얼마나 빨리 가느냐가 아니라, 그 목적지가 어디냐는 것이다(메이벨 뉴컴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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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님을 어떻게 만나는가?
“신부님! 매일 30분씩 묵상하고 있지만, 주님과의 관계가 전혀 좋아지지 않는 것 같아요.”
누구는 하루 몇십 분만으로도 주님 안에서 커다란 위로와 힘을 얻는다고 하는데, 자신은 30분씩 하루도 빠지지 않고 묵상하고 있지만, 전혀 그런 위로와 힘을 얻지 못한다는 하소연이었습니다.
당연히 위로와 힘을 얻을 수 없습니다. 예를 들어, 데이트를 하는데 매일 만나서 30분이 될 때까지 시계만을 바라보고 있다면 애인과 좋은 관계를 만들 수가 있을까요? 그리고 데이트 시간이 30분이면 충분하다고 말할 수 있을까요?
사랑할 때는 밤새 이야기를 나누고 싶다고 합니다. 함께 있는 시간이 너무 짧게만 느껴진다고 합니다. 주님과도 그렇게 되어야 하지 않을까요?
시간을 딱 정해 놓고 주님을 만나서는 안 됩니다. 나의 욕심을 채우기 위한 의무감으로도 주님을 만나서는 안 됩니다. 그냥 사랑하는 나의 님을 만난다는 심정으로 만나야 할 것입니다. 분명 그 만남 안에서 커다란 위로와 기쁨을 얻게 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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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1029. 연중 제30주간 금요일.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님.
2달 전입니다. 통신사에서 스마트폰을 보내왔습니다. 제게는 별로 필요 없기에 서랍에 넣어두었습니다. 신부님들과 함께 산행을 가면서 문제가 생겼습니다. 그동안 쓰던 스마트폰이 작동하지 않았습니다. 산행을 마치고 대리점에 가서 이유를 물었습니다. 대리점에서는 친절하게 설명해 주었습니다. 지금 쓰고 있는 스마트폰은 더 이상 서비스가 되지 않기에 통신사에서 새로운 스마트폰을 보내주었다고 합니다. 하지만 새로운 스마트폰은 기능과 성능이 맘에 들지 않았습니다. 방법은 새로운 스마트폰을 마련하는 것이었습니다. 새로 스마트폰을 마련하는 것은 별 문제가 없는데 전에 있던 스마트폰에 있던 사진, 전화번호, 어플리케이션을 새로운 스마트폰에 옮기는 것은 제게는 부담이 가는 일이었습니다. 다행히 대리점에서 새로운 스마트폰으로 대부분 옮겨 주었습니다. 함께 지내는 신부님들이 나머지는 해결해 주었습니다. 대리점에는 저 같은 분들이 많이 오셨습니다. 대부분이 나이가 지긋하신 어르신들이었습니다. 친절한 대리점 직원은 하나하나 일일이 설명해 주었습니다. 직업이라서 하는 것이지만, 같은 한국인이라서 더욱 정성껏 설명해 드리는 것 같았습니다.
지난겨울입니다. 추운 날에 안타깝게도 굶주림에, 추위에 돌아가신 분들이 있었습니다. 신부님께서는 언어와 상관없이 힘들고 어려운 이웃들을 위해서 먹을 것과 입을 것을 마련하였습니다. 겨울은 지나갔지만 여전히 힘든 분들을 위해서 봉사하는 분들이 있었습니다. 언어와 민족은 달랐지만 친절과 따뜻함으로 먹을 것과 입을 것을 나누어주고 있었습니다. 1년 가까이 어려운 이웃을 위해서 봉사하시는 자매님의 얼굴은 날개 없는 천사 같았습니다. 멕시코에서 선교하시는 수녀님의 이야기도 들었습니다. 경제적인 어려움으로 성장이 더딘 아이들이 안쓰러웠다고 합니다. 가정 방문을 다니면서 아이들을 만났고, 미리암이라는 아이에게 명단을 적어달라고 부탁하였다고 합니다. 하지만 11살인 미리암은 글을 읽고 쓸 줄 몰랐다고 합니다. 수녀님은 당연히 글을 쓸 줄 알았다고 생각했지만 현실은 그렇지 않았다고 합니다. 50명의 아이들에게 줄 우유를 마련하기 위해서 지인들에게 부탁을 했다고 합니다. 지인들은 우유는 물론 빵까지 마련해 주었다고 합니다. 세상은 아름다운 사람이 있는 것만으로도 충분히 아름다울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좋은 음식을 먹는 것도 기쁨입니다. 사랑하는 이들과 여행을 가는 것도 즐거움입니다. 마음을 풍요롭게 해주는 글과 시를 읽는 것도 행복입니다. 10월도 이제 이틀 남았습니다. 이웃들과 함께 기쁨, 즐거움, 행복을 나누면 좋겠습니다. 하느님의 아들이 사람이 되신 것도 복음의 기쁨을 나누기 위해서였습니다. 사도들이 목숨을 바치면서 전하려했던 것도 바로 복음의 기쁨입니다. 10월을 보내면서 생각합니다. 오늘도 제가 하느님 앞에 설 수 있는 것은, 이웃들과 관계를 맺으면서 살아 갈 수 있는 것은 무수한 저의 실수와 잘못을 덮어 주시고, 용서하시는 하느님의 자비가 있기 때문입니다. 단순한 실수와 작은 잘못이 아니라, 이웃과 하느님의 마음에 큰 상처를 내는 죄를 지었어도, 참고 기다려 주시는 하느님이 계시기 때문입니다. 나의 실수와 잘못을 너그럽게 용서하시는 하느님의 자비하심을 깨닫고, 나또한 나에게 잘못한 이들을 이해하고 용서하는 것이 참된 신앙인의 자세입니다. 이것이 의로움의 열매를 맺어 하느님께 영광과 찬양을 드리는 것입니다.
오늘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아무런 조건 없이 병자를 고쳐 주십니다. 병자가 어떻게 살았는지, 무엇을 했는지, 왜 아픈지 묻지 않고 크신 사랑으로 고쳐 주셨습니다. 작은 일을 하면서 생색을 내고, 자신이 드러나기를 바라는 우리들의 모습과는 다릅니다. “주님이 말씀하신다. 내 양들은 내 목소리를 알아듣는다. 나는 그들을 알고 그들은 나를 따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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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1029. 연중 제30주간 금요일. 이수철 프란치스코 신부님.
“사랑은 선택이다!”
-판단의 잣대는 사랑, 사랑밖엔 길이 없다-
하느님은 사랑이십니다. 하느님에 대한 정의는 이것 하나뿐입니다. 사랑은 율법의 완성이자 판단의 잣대는 사랑입니다. ‘사랑밖엔 길이 없네’, 10년전 출간된 제 졸저의 책명이지만 누구나 공감하는 말마디입니다. 여기에 저는 한 진리를 깨달음처럼 발견했습니다.
“사랑은 선택이다!”
생각해보면 선택의 여지가 없이 타고난 것이 너무 많습니다. 애당초 자유롭지 못한 사람들입니다. 내탓이라 할 수 없는 타고난 것들입니다. 어느 분은 ‘원판불변의 법칙’이라 사람은 변하지 않는다는 말도 합니다. 변질이 아니라 본질이 드러난 것이라고 합니다.
나라도, 부모도, 가정도, 형제도, 건강도, 얼굴도, 재능도, 성격도, 기질도, 탄생도, 죽음도 타고납니다. 선택할 수 없습니다. 심지어는 집안의 내력처럼 타고나는 병도 많습니다. 그러니 노력에도 한계가 있습니다. 선택할 수 없는 타고난 것들만 생각하면 절망, 원망, 실망의 삼망에서 벗어날 수 없습니다.
그러나 생각을 바꾸면, 날마다 선택할 수 있는 것은 무궁무진합니다. 하느님은 우리에게 선택할 수 있는 자유를 주셨습니다. 무엇을 선택합니까? 사랑을, 믿음을, 희망을 선택하는 것입니다. 진리를, 선을, 아름다움을 선택하는 것입니다. 온유와 겸손을, 찬미와 감사를, 행복과 평화를 선택하는 것입니다.
한마디로 끊임없은 의지적 결단으로, 간절한 마음으로 주님을, 구원을 선택하는 것입니다. 지성이면 감천입니다. 주님은 눈물겨운 선택의 노력에 항구한 이들을 도와 주십니다. 주님을 선택하여 날마다 다음같은 고백의 기도를 바치는 것입니다.
“주님, 당신은 저희의 전부이옵니다.
저희 사랑, 저희 생명, 저희 희망, 저희 기쁨, 저희 행복이옵니다.
하루하루가 감사와 감동이요 감탄이옵니다.
날마다 새롭게 시작하는 아름다운 하루이옵니다.”
원망, 절망, 실망의 삼망이 아닌 감사, 감동, 감탄의 삼감을 선택하는 것입니다. 하느님을 선택한 믿음의 사람들은 절대로 절망하거나 원망하거나 실망하는 일이 없습니다. 제1독서 로마서의 바오로의 진솔한 고백이 감동적입니다. 얼마나 주님과 깊은 일치의 사랑을 살고 있는 바오로 사도인지 깨닫습니다.
“나는 그리스도 안에서 진실을 말하고 거짓말을 하지 않습니다. 그것은 커다란 슬픔과 끊임없는 아픔이 내 마음속에 자리잡고 있다는 것입니다. 사실 육으로는 내 혈족인 동포들을 위해서라면, 나 자신이 저주를 받아 그리스도에게서 떨어져 나가기라도 했으면 하는 심정입니다.”
바로 바오로의 ‘커다란 슬픔과 끊임없는 아픔’은 하느님의 가이없는 연민의 사랑을 뜻합니다. 마지막으로 하느님 찬미의 사랑으로 끝맺은 바오로입니다. “그분은 만물 위에 계시는 하느님으로서 영원히 찬미받으실 분이십니다. 아멘.”
우리 하느님은 대자대비大慈大悲하신 하느님이십니다. 이런 하느님을 닮으면 하나의 인격으로서 존경은 못해도 존중과 연민의 아가페 사랑을 선택하여 할 수 있습니다. 깊이 들여다보면 누구나 예외없이 약하고, 죄짓고, 병들고, 가난하고, 불쌍한 사람들이기에 저절로 인간 누구나에 대한 연민과 존중의 아가페 사랑을 느낄 것입니다.
동족을 위해서라만 지옥의 선택도 마다 않겠다는 바오로의 고백을 통해 사도의 한량없는 깊이의 사랑을 느낍니다. 흡사 불교의 지장보살을 연상케 합니다. 지장보살은 누구입니까? 지옥의 고통을 받으며 괴로워하는 중생들 모두가 빠짐없이 성불成佛하기 전에는 자신도 지옥에 머물러 결코 성불하지 않을 것을 맹세한 보살이 바로 지장보살입니다. 동방수도영성에 나오는 글 일부를 소개합니다.
“성 그레고리오에게 지옥은 영혼의 치유 상태로 이해된다. 그것은 하느님의 절대적인 선과 사랑의 확신에 기초한다. 지옥의 고통은 그의 유일한 목적으로서 영혼의 치유에 있다. 고통은 영원하지 않음을 뜻한다.”
이래서 자모慈母이신 교회는 죽은 이들을 위해 기도하며 착한 신자들은 불쌍한 영혼들을 위해 끊임없이 연미사를 봉헌합니다. 계속 이어지는 의미심장한 내용들입니다.
“치유는 불을 통해 이루어지는데 그 불은 감각적 불이 아니라 도덕적 성격의 불이다. 정화후에 영혼들은 영원으로 들어간다. 어떤 이들은 지상생활동안 정화에 도달하고 어떤 이들은 내세동안 성취한다. 정화와 부활후 인간은 하느님께 돌아갈 것이다. 그것은 천사적 상태로 돌아가려는 영혼의 갈망 때문이요 하느님의 선이 이것을 가능하게, 필수적이 되게 한다.
마지막으로 ‘악의 발명자(the inventor of evil)’까지 비슷한 방법으로 치유될 것이다. 그리하여 모든 것이 원래의 상태로 회복될 때, 온 창조계에 울려 퍼지는 찬미는 하느님께로 들어 높여질 것이다.”
고대 교부들의 긍정적이고 낙관적인 영적시야가 참 매력적이고 공감이 갑니다. 이분들에게 영원한 지옥의 개념은 없다는 것입니다. 사실 살아서도 이미 때로 지옥불의 정화를 체험하는 우리들입니다. 회개의 불로 마음이 극도의 고통과 아픔을 겪으며 정화될 때 그대로 지옥의 체험이요, 바로 이런 지옥같은 체험 역시 자비로운 하느님 안에서 이뤄진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하느님을 떠났지 자비하신 하느님은 우리를 떠나지 않습니다. 감히 말하건데 지옥의 영혼들이 다 구원되어 지옥이 텅비워질 때 까지 천국문은 계속 열려있을 것입니다. 이래서 교회의 죽은이들을 위한 기도가 참으로 절실히 필요하고 고마운 것입니다.
자비하신 하느님입니다. 판단의 잣대는 사랑이요 사랑은 율법의 완성입니다. 사랑은 선택입니다. 이런 사랑에 정통한, 하느님 자비의 화신인 예수님이십니다. 예수님께 분별의 잣대는 율법이 아닌 사랑이었습니다. 모든 율법을 상대화하는 절대적 사랑의 법입니다. 사람이, 사랑이 먼저입니다.
이웃에 대해 참사랑을 실천하는 이들은 결코 잘못될 수 없습니다. 참으로 사랑의 행위는 죄가 될 수 없는 것입니다. 사랑과 죄는 양립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이런 관점에서 보면 예수님께서 안식일에 수종을 앓는 이를 치유하신 것은 너무 자연스럽고 당연한 자비행인 것입니다.
“안식일에 병을 고쳐주는 것이 합당하냐, 합당하지 않으냐? 너희 가운데 누가 아들이나 소가 우물에 빠지면 안식일일지라도 바로 끌어내지 않겠느냐?”
율법주의에 눈이 가린 무지한 탓이지, 사실 예수님의 사랑의 처신은 지극히 온당하고 상식적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손을 잡고 병을 고쳐서 돌려보내셨고 율사들과 바리사이들은 아무 대답도 못합니다. 이미 질문안에 답이 들어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니 분별의 잣대는 사랑이요, 구체적으로 “예수님같으면 어떻게 하셨을까?” 예수님을 분별의 잣대로 하라는 것입니다. 주님은 이 거룩한 미사를 통해 우리 모두에게 분별의 지혜와 사랑을 선물하십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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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1029. 연중 제30주간 금요일. 오상선 바오로 신부님.
오늘 미사의 말씀은 하느님 백성을 향한 예수님의 마음을 보여 주십니다.
"안식일에 병을 고쳐 주는 것이 합당하냐, 합당하지 않으냐?"(루카 14,3)
안식일에 수종을 앓는 사람을 보시고 예수님께서 바리사이들과 율법 학자들에게 물으십니다. 이 일이 바리사이의 지도자들 중의 한 사람 집에 초대받으셨을 때의 일이니 앓는 이 역시 손님 중 하나였을 수 있지요.
율법 학자들이나 바리사이들이 당신에게서 가장 경계하면서 올가미를 놓으려는 지점이 어디인지 잘 아시면서 이렇게 대놓고 물으시는 것으로 보아, 이 질문은 정면 돌파하시겠다는 예수님의 의지를 드러냅니다.
예수님은 어떠한 이유에서건 창조적 온전함을 누리지 못하는 이를 보시면 당장 그를 고쳐 주고 싶어하십니다. 치유와 회복으로 하느님께서 그에게 부여하셨던 창조 때의 충만함을 되돌려 주시려는 겁니다. 그 온전함과 충만함이 그에게 평화를 되찾게 해 줄 것이고, 그는 행복해질 것이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율법 학자들이나 바리사이들은 앓는 이의 고통이나 갈망에는 별 관심이 없어 보입니다. 안식일에까지 손을 쓰지 않아도 그는 여태까지 그래 온 것처럼 불편하고 고통스런 채로 꾸역꾸역 살아갈 거라 여길 테지요.
그들에게는 한 사람의 평화와 행복보다 지켜야 할 제도와 형식이 더 중요한가 봅니다. 그렇다면 율법은 예수님에게보다 오히려 율법 수호자인 그들에게 올가미일 수 있겠네요. 자칫 그 좋은 율법이 하느님의 마음에서 점점 더 멀어지고 냉담해지라고 악이 놓은 함정이 될지도 모르니 말입니다.
"너희 가운데 누가 아들이나 소가 우물에 빠지면 안식일일지라도 바로 끌어내지 않겠느냐?"(루카 14,5)
타인의 고통보다 율법이 먼저인 이들에게 예수님은 아버지로서의 자애, 목자로서의 연민을 일깨우시려 예까지 드십니다. 혹 앓는 이와 관계가 없다고 여겨서 한없이 냉정할 수 있는 거라면, 사실 우리 모두가 하느님을 중심으로 서로 관계가 있다고 깨우쳐 주시려는 겁니다. 사랑이신 분이 사랑하지 않으려는 애쓰는 이들을 보는 심정이 얼마나 안타까우실지요...
제1독서에서는 사도 바오로가 예수님의 바로 그 마음을 표현하고 있습니다.
"커다란 슬픔과 끊임없는 아픔이 내 마음속에 자리 잡고 있다는 것입니다."(로마 9,2)
사도는 세상 어느 민족보다 앞서 하느님의 특별한 선택과 초대를 받았던 동족 이스라엘의 완고한 마음 때문에 슬퍼하고 아파합니다. 동족을 위해서라면 자신이 저주를 받아도 괜찮다고 할 정도로 동포에 대한 사랑이 크기 때문입니다.
"하느님의 자녀가 되는 자격, 영광, 여러 계약, 율법, 예배, 여러 약속이 그들에게 주어졌습니다."(로마 9,4)
유다인들에게 진즉에 주어졌던 이 어마어마한 은총은 부정할 수 없는 사실입니다. 그래서 그들의 고착이 더더욱 안타까운 게지요. 하느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믿음 여부에 따라 이스라엘이 이미 받은 것들은 자칫 약이 아니라 독이 될 수도 있으니까요.
사랑하는 벗님! 우리 각자가 주님에게서 받은 특별한 은총들이 평화와 행복을 갈망하는 주위의 이웃들에게 사랑으로 흘러나가는 오늘 되시길 기원합니다. 하느님 사랑을 막는 법은 없답니다. 하느님의 도구가 되어 사랑의 통로로 살아가는 여러분 모두를 축복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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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1029. 연중 제30주간 금요일. 이병우 루카 신부님.
"안식일에 병을 고쳐주는 것이 합당하냐, 합당하지 않으냐?"(루카14,3)
오늘 복음은 예수님께서 어느 안식일에 바리사이들의 지도자 가운데 한 사람의 집에 가시어 음식을 잡수실 때 일어난 일을 전하고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식사하실 때 바리사이들과 율법 학자들은 예수님과 함께 식사를 하지 않고 예수님을 지켜보고만 있습니다. 그리고 죄인들과 함께 하지 않는 그들인데, 예수님 앞에 수종을 앓는 사람을 배치해 놓았습니다.
이 두 모습은 바리사이들과 율법 학자들이 예수님을 적대시하고 있음을 단적으로 보여줍니다.
예수님께서는 그들의 그런 마음을 아시고 그들에게 "안식일에 병을 고쳐주는 것이 합당하냐, 합당하지 않느냐?" 하고 물으십니다.
그런 다음 수종을 앓는 사람의 병을 고쳐주십니다.
그리고 그들에게 다시 말씀하십니다.
"너희 가운데 누가 아들이나 소가 우물에 빠지면 안식일지라도 바로 끌어내지 않겠느냐?"(루카14,5)
그들은 예수님의 이 말씀에 아무 대답도 하지 못합니다.
오늘 복음은,
우리의 믿음이 바리사이들과 율법 학자들의 믿음을 뛰어 넘는 믿음, 곧 구체적인 삶의 자리에서 살아있는 믿음이 되어야 한다는 메시지를 우리에게 전하고 있습니다.
다시 말해서,
내가 주님께 드리는 기도와 미사가 생각과 말로만 드리는 기도와 미사, 계명 안에 갇혀 있는 기도와 미사가 되어서는 안 되고, 그것을 뛰어 넘는 기도와 미사, 곧 구체적인 사랑 실천을 통해서 드러나는 살아있는 기도와 미사가 되어야 한다는 메시지를 우리에게 전하고 있습니다.
이것이 바로 예수님께서 이 세상에 오셔서 선포하신 구체적인 메시지이며, 십자가 죽음에 이르기까지 바리사이들과 율법 학자들과의 싸움에서 지켜내신 메시지입니다.
예수님께서 전해주시고 지켜내신 이 소중한 메시지를 항상 기억하면서, 나의 믿음과 기도와 미사가 구체적인 삶의 자리에서 살아있었으면 좋겠습니다.
오늘도 나와 너의 구원을 위해 최선을 다하는 하느님의 자녀가 됩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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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1029. 연중 제30주간 금요일. 박형순 바오로 신부님.
오늘의 묵상
월요일에 이어 다시 안식일이 문제가 됩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바리사이들의 지도자 가운데
한 사람의 집에서 음식을 잡수셨습니다.
그런데 복음은 시작과 함께 두 가지 낯선 설정을 제시합니다.
먼저 그 자리에 있던 율법 교사와 바리사이들의 행동이
묘사되는데, 그들은 예수님을 식사에 초대하고
식사를 같이 하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을 지켜보았습니다”.
다른 하나는 식사 자리에 수종을 앓는 사람이 등장하는 것입니다.
위계질서를 좋아하고, 높은 자리에 앉기 좋아하던 율법 교사들과
바리사이들이 자신들의 식사 자리에 부정한 사람으로
여겨지는 병자와 함께 있었다는 것이 놀랍게 다가옵니다.
게다가 그날은 주중의 다른 식사와는 구분되는 안식일의 식사 자리였습니다.
이 두 가지 설정은 예수님을 함정에 빠뜨리고자 하는
바리사이들의 모습을 보여 줍니다.
이러한 그들에게 예수님께서는
“안식일에 병을 고쳐 주는 것이 합당하냐, 합당하지 않으냐?” 하고
질문하시며, 그들의 계략을 무력하게 만드십니다.
비록 그들의 침묵으로 이야기는 마무리되었지만,
율법 교사들과 바리사이들이 안식일이라는 주님의 거룩한 날과
수종을 앓고 있는 병자를 예수님을 옭아매려는
도구로 삼는 모습이 참으로 무섭게 다가옵니다.
안식일이 지닌 참된 의미는 보지 못한 채, 병자가 겪고 있는
고통은 생각하지 않은 채, 하느님의 계명과 고통받는
이웃을 수단으로 삼고 있는 그들의 폭력성은 끔찍하기만 합니다.
그러므로 우리도 기억해야 하겠습니다.
우리가 신자로서 지키는 계명과 의무가 지닌 본질적인
의미를 올바르게 깨닫지 못한다면, 생명의 법이 나만을 위하거나,
누군가를 억압하는 수단으로 전락할 수 있음을 말입니다.
지켜야 하는 계명보다, 그 계명을 통해서 우리에게
말씀을 건네시는 하느님을 잊지 말아야 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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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1029. 연중 제30주간 금요일. 조욱현 토마스 신부님.
안식일에 대한 논쟁
예수께서는 안식일에 바리사이의 초대를 받으시고 가셔서 음식을 잡수시게 되었는데, 바리사이들은 예수님을 “지켜보았다.”(1절) 한다. 그들은 무엇을 왜 지켜보았을까? 그분이 안식일에 금지된 일을 하여 율법의 존엄성을 훼손하지 않을까 하며 올가미를 씌우려고 지켜보고 있었다. 거기서 수종 앓는 사람을 고쳐 주신다. 그는 육체적으로 방탕한 생활로 그 영혼을 더럽히고 영의 빛을 꺼뜨린 사람이었다.
예수께서는 율법 교사들과 바리사이들에게, “안식일에 병을 고쳐 주는 것이 합당하냐, 합당하지 않으냐?”하고 물으셨다(3절). 그들은 침묵하고 만다. 안식일은 합리적으로 잘 지켜야 한다. 안식일은 달콤한 영적인 향기로 하느님을 기쁘게 해 드리는 것이 우리가 해야 할 일이다. 그리고 죄를 멀리하고, 모든 덕행에서 꾸준히 앞으로 나아가며 거룩하고 칭찬 들을 만한 삶을 하느님께 바쳐야 하는 날이다.
그들이 나쁜 뜻을 품고 침묵할 때, 예수께서는 그들의 몰인정과 파렴치를 설득려 있는 말씀으로 반박을 하신다. “너희 가운데 누가 아들이나 소가 우물에 빠지면 안식일일지라도 바로 끌어내지 않겠느냐?”(5절) 안식일에 자비를 베푸는 일을 율법이 금한다면, 어째서 그들은 우물에 빠진 사람을 건져내는가? 그들의 침묵이 잘못되었음을 말한다. 하느님은 사랑을 멈추시는 분이 아니시다.
이 안식일은 이스라엘 백성들을 해방해 자유를 주신 하느님께 감사하면서 그들 자신은 물론 노예나 가축들도 쉬게 하였다(신명 5,14-15). 그러므로 이 안식일이란 하느님께 대한 찬미와 감사의 날이며, 해방과 자유의 날로 기쁜 날이었다(이사 58,13). 안식일은 인간들을 위한 것이다. 예수께서 안식일에 기적을 행하신 것은 기쁨과 구원의 시대가 시작되었음을 보여주는 큰 표징이다.
즉 “안식일”이란 세상의 모든 피조물을 위한 하느님의 선하심과 구원을 상징하는 것으로서 언제나 구원을 베푸시는 하느님께 대한 찬미와 감사를 드리는 날이어야 한다는 것이다. 바로 예수께서는 이 “안식일”에 하느님의 기쁨과 희망을 베풀어주셨다. 즉 문자적이고 법적인 해석 너머 안식일의 근본정신이 바로 “인간의 해방”과 “인간에 대한 사랑”임을 알려주셨다. 즉 안식일의 의미를 인간을 위한 것임을 확인해 주셨고, 안식일의 본래 의미를 회복해 주셨다.
우리도 많은 경우에 계명의 문자에만 얽매여 형식적이고 율법주의적인 신앙생활을 하는 경우가 많다. 우리의 신앙생활이 습관적이고 형식적이고 타성적으로 되면 그 신앙생활은 얼마 가지 않아 의미를 찾지 못하고 식어가고 말 것이다. 신앙은 적극적이고 긍정적인 삶이 될 때 앞으로 나아갈 수 있다. 내가 먼저 보기 위해서 눈을 크게 뜨고 깨어 있는 자세가 필요하다. 하느님의 뜻이, 즉 본래의 의미가 무엇인지 알면서 그것을 실천한다면 진정으로 자유로운 하느님의 자녀가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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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1029. 연중 제30주간 금요일. 한상우 바오로 신부님.
"우물에 빠지면 안식일일지라도 바로 끌어내지 않겠느냐?”(루카 14, 5)
처음부터
끝까지
마음이다.
일상과 마음은
분리될 수 없는
하나의 관계이다.
이심전심(以心傳心)의
마음이 깨어있는
일상의 마음이다.
마음이
통한다는 것은
감정이 통한다는
것이다.
마음을
알아주는 것이
삶의 본질이다.
이미 우리
마음 속에 있는
측은지심이다.
측은지심은
공존과 상생의
마음이다.
이 마음을
하느님께서
우리에게
주셨다.
마음을 치유하는
것은 진심어린
마음이다.
예수님의 마음이
자기중심적
이기주의에 빠진
우리 마음을
치유하신다.
안식일은
무엇보다도
병든 마음을
고치는 날이다.
아프고 병든
마음이
고쳐져야
어떻게 마음을
쓰고 살아야
할는지를
알 수 있다.
우리를 이끌어
가시는
하느님의
마음이 있다.
하느님께
우리의 마음을
바치고 마음을
나눈다.
우리의 마음이
향하는 곳에
우리의
하느님께서도
계신다.
서로를 살리는
실천의 마음
사랑의
마음이다.
사랑의
마음에 빚 진
우리들이다.
우리가
일상에서
배달해야 할
가장 소중한 것은
마음이다.
오늘은 모두
사랑과 감사의
마음 배달부가
되는 날이다.
이것이 안식일의
마음이고 복음의
마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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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1029. 연중 제30주간 금요일. 송영진 모세 신부님.
<하느님의 자비는 법보다 위에 있다.>
“예수님께서 어느 안식일에 바리사이들의 지도자 가운데 한 사람의 집에 가시어
음식을 잡수실 때 일이다. 그들이 예수님을 지켜보고 있는데, 마침 그분 앞에
수종을 앓는 사람이 있었다. 예수님께서 율법 교사들과 바리사이들에게,
‘안식일에 병을 고쳐 주는 것이 합당하냐, 합당하지 않으냐?’ 하고 물으셨다.
그들은 잠자코 있었다. 예수님께서는 그의 손을 잡고 병을 고쳐서
돌려보내신 다음, 그들에게 말씀하셨다. ‘너희 가운데 누가 아들이나 소가
우물에 빠지면 안식일일지라도 바로 끌어내지 않겠느냐?’
그들은 이 말씀에 아무 대답도 하지 못하였다(루카 14,1-6).”
여기서 “안식일에 병을 고쳐 주는 것이 합당하냐, 합당하지 않으냐?”
라는 질문은, “안식일에 병을 고쳐 주는 것은 하느님의 뜻에 합당하냐,
합당하지 않으냐?”, 즉 “안식일에 병을 고쳐 주는 것은
하느님의 뜻을 실천하는 일이냐, 하느님의 뜻을 거스르는 죄를 짓는 일이냐?”
라는 뜻으로 하신 질문입니다.
예수님께서 그것을 물으신 것은, 몰라서 물으신 것도 아니고,
율법학자들과 바리사이들의 의견이 무엇인지 알고 싶어서 물으신 것도 아니고,
“안식일에 병을 고쳐 주는 것은 하느님의 뜻을 실천하는 일이다.” 라는 것을
가르치기 위해서입니다.
율법학자들과 바리사이들이 아무 말 없이 잠자코 있었던 것은,
예수님의 가르침을 논리적으로 반박할 자신이 없어서 그랬거나,
아니면 대답할 필요가(가치가) 없는 질문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일 것입니다.
어떻든 그들이 침묵을 지킨 것은 예수님의 가르침에 동의했기 때문은 아닙니다.
만일에 그들이 대답했다면,
앞의 13장에 나오는 회당장의 말과 같은 말을 했을 것입니다.
“일하는 날이 엿새나 있습니다. 그러니 그 엿새 동안에 와서 치료를 받으십시오.
안식일에는 안 됩니다(루카 13,14).”
‘치료를 받으십시오.’ 라는 말은 병자에게 하는 말이기 때문에,
예수님께 하는 말로 바꾸면, “일하는 날이 엿새나 있습니다.
그러니 그 엿새 동안에 치료를 하십시오. 안식일에는 안 됩니다.”입니다.
예수님께서 단순히 돈을(생계비를) 벌기 위해서 병자들을 고쳐 주는 일을
하셨다면, 안식일에는 안 된다는 율법학자들과 바리사이들의 말은 맞습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돈을 벌기 위해서가 아니라 ‘하느님의 자비’를 베풀어주려고
병자들을 고쳐 주셨기 때문에 그 말은 틀린 말입니다.
‘하느님의 자비’를 베풀어주는 일은
요일과 상관없이 ‘날마다’ 실천해야 하는 일이기 때문입니다.
(안식일에는 특히 더 실천해야 합니다.)
율법학자들과 바리사이들은 예수님의 병자 치유에서
‘하느님의 자비’는 보지 못하고, ‘일’만 보았습니다.
보는 능력이 모자라서 ‘하느님의 자비’를 보지 못한 것이 아니라,
그들 마음속에 사랑과 자비가 없어서 보지 못한 것이고,
또 보려고 하지 않았기 때문에 보지 못한 것입니다.
사랑이 사랑을 알아보게 하고, 자비가 자비를 알아보게 한다고
표현할 수도 있습니다.
<‘율법주의’는 사랑과 자비 없는(무자비한) 그릇된 신념입니다.>
지금 이 상황은 율법 해석의 차이에서 생긴 논쟁 상황이고,
서로 다른 두 신념이 충돌하는 상황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안식일일지라도’ 병을 고쳐 주는 것이 ‘하느님의 뜻’이라고
가르치시는데, 율법학자들과 바리사이들은 ‘안식일에는’ 어떤 일도,
병을 고치는 일도 하면 안 된다는 것이 ‘하느님의 뜻’이라고 믿고 있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안식일이 사람을 위하여 생긴 것이지,
사람이 안식일을 위하여 생긴 것은 아니다(마르 2,27).” 라고 가르치셨습니다.
이 가르침은, 자비와 사랑이 법의 근본정신이고,
법보다 위에 있다는 가르침입니다.
하느님께서는 사람들을 살리기 위해서, 즉 사람들에게 구원과 생명을 주려고
계명들과 율법들을 내려 주셨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그 계명들과 율법들로 사람들을 억압하고 압박하는 것은
하느님의 뜻을 왜곡하고 거스르는 죄를 짓는 일입니다.
따라서 율법학자들과 바리사이들의 신념은 ‘잘못된 신념’입니다.>
“너희 가운데 누가 아들이나 소가 우물에 빠지면 안식일일지라도 바로
끌어내지 않겠느냐?” 라는 말씀은, “너희는 너희 자신의 아들이나 소를
구하는 일은 안식일에도 하면서, 다른 사람을 구하는 일은 안식일이라는
핑계를 대면서 하지 않는 위선자들이다.” 라고 꾸짖으시는 말씀입니다.
그들이 아무 대답도 하지 않은 것은,
반박할 수 없어서가 아니라 대꾸하기 싫어서였을 것입니다.
(“아무 대답도 하지 못하였다.” 라고 표현되어 있지만,
실제로는 아무 대답도 ‘하지 않은’ 상황이었을 것입니다.
잘못된 신념에 사로잡힌 사람들을 설득하고 타일러서
그 신념을 바꾸게 하는 일은 굉장히 어려운 일입니다.
예수님의 능력이 모자라서 그들의 신념을 못 바꾸신 것은 아닙니다.
율법주의자들 자신들이 스스로 깨닫고, 스스로 마음을 바꿔야 하는 일입니다.)
우리 교회에도 교회법을 비롯해서 많은 규정들이 있습니다.
바오로 사도는 혼인 문제에 관해서 말할 때 이런 말을 했습니다.
“하느님께서는 여러분을 평화롭게 살라고 부르셨습니다(1코린 7,15ㄷ).”
(이 말에서 ‘평화’는 ‘구원, 해방, 행복, 기쁨’ 등을 모두 포함하는 말입니다.)
교회의 혼인법은 신앙인들에게 평화와 행복을 주기 위한 법이지
억압해서 불행과 고통을 주기 위한 법이 아닙니다.
혹시라도 혼인법의 규정만 생각하고 그 정신을 잊어버린다면,
우리도 무자비한 율법학자들과 바리사이들 같은 율법주의자가 되어버립니다.
사도시대 때에, 할례를 받지 않으면 구원을 받을 수 없다고 주장하는 사람들
때문에 큰 분쟁과 논란이 일어난 적이 있습니다(사도 15,1-2).
사도들과 원로들이 예루살렘에 모여서 그 문제로 회의를 열었는데,
그때 베드로 사도가 이런 말을 했습니다.
“지금 여러분은 왜 우리 조상들도 우리도 다 감당할 수 없던 멍에를
형제들의 목에 씌워 하느님을 시험하는 것입니까?
우리는 그들과 마찬가지로 우리도 주 예수님의 은총으로
구원을 받는다고 믿습니다(사도 15,10-11).”
여기서 ‘멍에’는 할례뿐만 아니라 유대교 율법 전체를 가리키는 말이고,
‘그들’은 유대인이 아닌 이방인 신자들을 가리키는 말입니다.
하느님을 시험한다는 말은, 하느님의 뜻을 거스른다,
또는 하느님의 계획에 반항한다는 뜻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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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1029. 연중 제30주간 금요일. 기경호 프란치스코 신부님.
<♣ 넓고 애정 깊은 눈으로 품는 사랑 ♣>
“내 동포들을 위해서라면,
나 자신이 저주를 받았으면 하는 심정입니다.”(로마 9,3)
하느님으로부터 지음 받은 우리는 늘 그분 안에서 숨 쉬고 그분을 바라보며 살아갑니다. 그러나 때로는 자신만의 기준과 관점으로 남을 판단하고, 옳고 그름과 좋고 나쁨을 가리느라 전체를 보지 못합니다. 이는 성경말씀을 읽을 때나 기도할 때, 그리고 사랑의 행위를 할 때에도 마찬가지입니다. 오늘의 말씀에서 보여주신 예수님과 바오로 사도의 태도를 통하여 우리 삶을 가다듬어 보았으면 합니다.
예수님께서는 안식일에 손이 오그라든 병자를 고쳐주실 때와(6,6-11) 곱사등이 부인을 고쳐주실 때(13,10-17) 바리사이들과 논쟁하신 바 있습니다. 유다인들은 안식일법의 준수를 삶의 중요한 부분으로 여겼음을 알 수 있습니다. 바리사이들은 수많은 율법규정을 뛰어넘어 그 근본정신을 말씀과 행동으로 보여주시는 예수님을 못마땅하게 생각했을 뿐 아니라 죽일 계획까지 합니다.
그런데 바리사이들은 율법을 사는 방식에 문제가 있긴 했지만 율법에 박식했을 뿐 아니라 열심히 지키려 힘쓴 충실한 이들이었습니다. 그들 가운데는 자신들의 종교적, 정치적 지위를 잃을까 두려워 예수님을 적대적으로 대하는 이들도 있었고, 오늘 복음에 나오는 이들처럼 뭔가 책을 잡기 위해 기회를 엿보는 이들도 있었으며, 예수님의 가르침이 옳음을 알면서도 적극적으로 동의하지도 반대하지도 않은 채 지켜보는 소극적 방관자들도 있었던 것 같습니다.
어느 안식일에 예수님께서는 바리사이들의 지도자 가운데 한 사람의 집에 초대를 받아 음식을 드시게 되었습니다. 이때 바리사이들이 꼬투리를 잡으려고 예수님을 지켜보고 있었습니다(14,1). 예수님께서는 그들에게 안식일에 수종병자를 고쳐주어도 되는지 그렇지 않은지 물으신(14,3) 다음, 그들이 답변을 못하고 잠자코 있자 병자의 손을 잡고 고쳐주셨습니다(14,4).
바리사이의 법에도 생명을 구하기 위한 경우에는 안식일법을 유보할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수종병처럼 위급하지 않은 병을 안식일에 고치는 것은 허용되지 않았기에 시비거리가 될 수 있었던 것입니다. 오늘 복음에 나오는 바리사이들은 예수님의 적극적 반대자가 아니라 기회주의자나 소극적 방관자였을 수 있습니다.
놀라운 것은 예수님께서 이런 바리사이들의 속셈과 행태를 잘 아시고 그들이 율법의 근본정신인 사랑과 동떨어져 있음을 아시면서도 초대를 거절하지 않고 그들과 함께하시며 생명의 밥을 같이 나누셨다는 사실입니다. 그분은 그들의 그릇된 생각을 직접 지적하거나 반박하지 않고 그들의 마음에 대고 살아야 할 사랑의 본질과 진리에 대해서만 말씀하십니다. 이것이 바로 바리사이들을 치유하기 위한 예수님의 사랑법입니다.
바오로 사도는 이스라엘이 그리스도로부터 떠나 있음을 보며 “커다란 슬픔과 끊임없는 아픔”(로마 9,2)을 느끼며, “육으로는 내 혈족인 동포들을 위해서라면, 나 자신이 저주를 받아 그리스도에게서 떨어져 나가기라도 했으면 하는 심정입니다.”(9,3)라고 고백합니다. 그는 그리스도로부터 떠나 있는 겨레를 보며 차라리 자신이 하느님의 저주를 받고 버림받는 것이 낫겠다고 하며, 그들을 위해 어떤 고통도 달게 받겠다는 결심을 밝힙니다. 그의 마음은 위대한 사랑 외에 다른 것이 아니었습니다.
나는 만나는 사람과 접하는 사건을 어떤 눈으로 보고 받아들이고 있습니까? 예수님의 ‘사랑의 관대함’, ‘모두를 살리는 함께함과 마음의 경청’, 그리고 바오로 사도가 그리스도를 떠난 이스라엘에 대해 보였던 위대한 사랑이 절실한 때입니다. 더 넓은 ‘긍정의 시각’과 더 따뜻한 ‘사랑의 품음’으로 서로를 치유하며 살았으면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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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1029. 연중 제30주간 금요일.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님.
이웃 사랑의 실천은 날이 궂으나 좋으나, 기회가 좋던지 나쁘던지, 꾸준히 지속되어야 마땅합니다!
수종병(水腫病)은 혈액 가운데 액체 성분이 신체 특정 부위에 가득 차 몸이 붓는 질환입니다. 환자는 끝없는 갈증에 시달리는데, 갈증을 해소시키기 위해 물을 마시면 더욱 목이 말라지고 증세는 심해진다고 합니다.
의학이 발달된 오늘날에야 여러 가지 검사를 통해 정확한 원인을 찾아내고 대처하면 치료가 가능한 일이지만, 예수님 시대 당시 수종병에 걸렸다 하면 치명적이었습니다. 여기저기 몸이 부어오르니, 그런 상황을 바라보는 본인이나 가족들의 마음을 한없이 찢어졌겠지요.
온 몸이 여기저기 엄청나게 부어오르는데, 마땅한 치료제도 없이, 아무런 회복의 가능성도 없이 죽을 날만 기다리고 있던 수종병자였습니다. 혹시나 하는 마음, 지푸라기라도 잡는 심정으로 그는 예수님 가까이 더 가까이 나아왔던 것입니다.
당신 양떼가 겪는 고통은 곧 당신의 고통이었던 자비하신 예수님께서 절대로 수종 병자를 보고 그냥 지나칠 수가 없었습니다. 예수님 따뜻하고 부드러운 손길이 자동으로 그에게 펼쳐졌습니다. 친히 그의 손을 잡고 치유의 은총을 베푸신 후, 집으로 돌려보내셨습니다.
그런 다음 꼬투리를 잡기 위해 눈에 불을 켜고 있던 율법 교사들과 바리사이들을 향해 예리한 성찰꺼리 하나를 던지시며 그들의 입을 막아버리셨습니다.
“너희 가운데 누가 아들이나 소가 우물에 빠지면 안식일일지라도 바로 끌어내지 않겠느냐?”(루카복음 14장 5절)
그 잘난 안식일 규정이라는 덫에 스스로 포박되어, 쫌생이요 찌질이처럼 살아가던 율법 교사들과 바리사이들을 향한 예수님의 질타는 오늘 우리에게도 적용되는 말씀입니다.
“안식일에 병을 고쳐주는 것이 합당하냐, 합당하지 않으냐?”(루카복음 14장 3절)
혹시 우리 역시 이런 저런 핑계를 대며 고통 받는 이웃들을 향한 나눔이나 사랑의 실천을 끝도 없이 뒤로 미루고 있는 것은 아닌지 모르겠습니다. 오늘은 주일이니, 오늘은 컨디션이 안 좋으니, 오늘은 날씨가 너무 악천후니, 오늘은 기분이 영 꿀꿀하니 다음에 해야지...그러다가 평생 그렇게 살아갈 것입니다.
고통 받는 이웃들, 절박한 동료 인간들을 대상으로 한 이웃 사랑의 실천은 날이 궂으나 좋으나, 오늘이나 내일이나, 기회가 좋던지 나쁘던지, 하루 삼시 꼬박꼬박 밥을 챙겨먹듯이 계속되어야 마땅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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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1029. 연중 제30주간 금요일. 전삼용 요셉 신부님.
<교리가 변질되면 비유부터 사라진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은 바리사이들과 율법학자들이 있는 가운데 안식일에 또 수종을 앓는 사람의 병을 고쳐주십니다. 아무래도 그들이 예수님을 식사에 초대해놓고 안식일에 병을 고치는지 시험하기 위해 수종을 앓는 사람을 들여보낸 것 같습니다. 어쨌든 예수님은 그들의 속셈을 아시고 이렇게 물으십니다.
“안식일에 병을 고쳐주는 것이 합당하냐, 합당하지 않으냐?”
그들은 분명 ‘합당하지 않다.’라고 대답하고 싶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을 시험하려 하는 처지에서 왈가불가할 수는 없는 상황이라 침묵합니다.예수님은 그의 손을 잡고 병을 고쳐주신 다음 다시 그들에게 말씀하십니다.
“너희 가운데 누가 아들이나 소가 우물에 빠지면 안식일일지라도 바로 끌어내지 않겠느냐?”
그러자 그들은 또 아무 대답도 못 합니다. 이 침묵은 종전의 침묵과 사뭇 다릅니다. 처음에는 속셈이 있는 침묵이었고, 이번 침묵은 이론으로는 반박할 수 없는 어쩔 수 없는 침묵입니다.
만약 그들도 이런 단순한 비유를 떠올렸다면 안식일 법을 그렇게 복잡하게 가르치며 실제로는 그 본질에서 벗어나는 일은 없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들의 교리는 복잡해졌고 일반 대중들에게 이해될 수 없는, 무조건 믿고 따라야 하는 뜬구름과 같이 되어버렸습니다.
하지만 예수님은 장황한 말씀으로 설득하려 하지 않으십니다. ‘비유’로 간단히 설득하십니다. 언어로 하는 설득은 ‘머리’까지 들어가지만, 비유로 하는 설득은 ‘가슴’까지 들어갑니다. 머리는 사고하는 데 사용되지만, 가슴은 ‘직관’을 사용하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태극기를 보고 손을 가슴에 올리는 이유는 무엇일까요? 태극기는 하나의 상징이며 비유입니다. 그런데 그 비유는 머리의 단순한 이해를 넘어서서 가슴으로 나라를 사랑하게 만듭니다.
원효 대사의 모든 것은 마음에 달렸다는 ‘일체유심조’ 사상을 전달하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요? 수많은 논문이 필요할까요? 아닙니다. 단지 그가 유학길에 올랐을 때 해골 물을 마신 이야기만 해주면 됩니다. 그렇게 맛있었던 물이 해골 물임을 안 이후로 구토가 올라왔기 때문입니다.
이처럼 비유를 통한 가르침은 대중들의 마음에 깊이 새겨집니다. 이런 교리는 그 사람들이 모조리 사라지지 않는 한 지구상에서 없어지지 않습니다. 따라서 지상에 존재하는 대형 종교는 이야기식의 비유로 교리를 전달해 왔습니다.
그런데 이런 교리 전달 방식이 어려운 ‘이론과 학문’으로 바뀌는 경향이 발생합니다. 그래서 비유와 상징, 스토리가 사라집니다. 이렇게 되면 어려운 것을 좋아하는 지식층이나 부유층만 좋아하지 민중들의 가슴에 새겨질 수 없게 됩니다.
현재 성탄 트리와 같은 것을 봐도 그렇습니다. 아담과 하와의 죄로 우리가 먹지 못하게 되었던 생명 나무가 오신 것에 대해 감격해서 눈물을 흘려도 모자랄 지경인데 그것이 무엇인지 잊어버렸습니다. 비유와 상징이 죽은 것입니다.
비유와 상징이 죽는 이유는 ‘돈’ 때문입니다. 얼핏 이해가 가지 않을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인도에서 불교가 완전히 사라져버린 이유를 알면 이해가 쉽습니다.
처음 불교 교리는 매우 쉬웠습니다. 모든 고통은 집착에서 나오고 그 집착하게 만드는 자아를 놓아버리면 고통에서 벗어날 수 있다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인도가 불교에 심취하였고 나중에는 나라가 불교를 지원해 주었습니다.
그러자 승려들은 큰 절에 머물며 더는 구걸하러 다니면서 민중들에게 불법을 설파할 필요가 없게 되었습니다. 큰 절에서 교리만 더욱 부유층에게 합당하게 만들어갔습니다.
그렇게 단순하던 교리는 평민들은 이해할 수 없는 어려운 철학과 같은 학문이 되어버렸습니다. 그러자 이슬람이 침범했을 때 대중들 안에 있던 쉬운 종교인 힌두교는 살았지만, 학문으로만 남아있던 불교는 완전히 사라지게 된 것입니다.
민중의 심장에 머무르지 않는 교리는 정권과 돈과 함께 사라집니다. 우리나라 의천의 천태종과 지눌의 조계종도 마찬가지입니다.
의천은 말 그대로 금수저였습니다. 왕의 아들이었습니다. 교리의 체계화를 통해 불교가 통합되어야 한다고 주장하였습니다. 그러나 지눌은 어려운 교리보다는 깨달음을 강조하였습니다. 직관입니다. 그 직관적 깨달음을 조금씩 실천해나가면 된다고 믿었습니다.
현재 남아있는 것은 지눌의 조계종입니다. 천태종은 거의 찾아볼 수 없습니다. 민중의 가슴에 교리가 들어가려면 그들이 ‘직관’을 이용하게 해야 하고 그 방법이 비유와 상징과 스토리인 것입니다. 이런 식의 교리교육이 아니면 일 년 동안 가르쳐도 예비 신자들에게 교리의 확신을 안겨줄 수 없습니다.
소리굽쇠가 있습니다. 한 소리굽쇠를 치면 옆에 있는 다른 소리굽쇠가 그 소리를 받아서 진동합니다. 친 소리굽쇠를 손으로 잡아도 그 소리를 받은 다른 소리굽쇠는 여전히 그 진동의 소리를 냅니다. 이렇게 소리굽쇠가 서로 공명하는 이유는 무엇일까요? 소재와 모양이 같기 때문일 것입니다. 소재가 다르면 아무래도 덜 공명이 일어날 것입니다.
사람의 심장은 소재가 같습니다. 내 심장이 공명하면 상대의 심장도 공명합니다. 내가 상대에게 더 잘 전달하기 위해서는 먼저 내 심장을 울려야 합니다.
내 심장이 울려지는 것은 비유입니다. 그것을 찾아내기 위해서는 정말 심장을 짜내는 고통을 감내해야 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나의 심장을 울리지 못하는 것은 누구의 심장도 울리지 못합니다. 이 때문에 어렵더라도 우리는 교리를 비유로 가르쳐야 합니다. 사실 온전히 이해하지 못하면 비유를 찾아내는 것이 어렵습니다.
오늘 예수님께서 비유 하나로 평생 안식일을 주제로 공부해 온 사람들의 입을 막아버리셨음을 깊이 묵상합시다. 우리가 쓰는 언어가 그냥 ‘소리’에 불과할 수 있고, ‘말’이 될 수도 있으며, ‘비유나 상징’이 될 수도 있습니다.
소리는 귀에만, 말은 머리에, 그리고 비유는 가슴까지 내려갑니다. 사람의 마음에 도달하는 것은 비유나 상징, 스토리임을 명심해야 합니다. 그리고 이 방식이 사라지는 이유는 돈이나 육체, 권력에 대한 욕심 때문임도 알아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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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1029. 연중 제30주간 금요일. 이승화 시몬 신부님.
아들이나 소가 우물에 빠지면 안식일일지라도 끌어내지 않겠느냐?
사람에게 관계는 중요합니다.
나와 어떤 관계이냐에 따라
삶의 방향성이 달라지기 때문입니다.
공동체를 위한 일보다
내 가족과 관련된 일이 더 중요하고
나 자신과 관련된 일이 더욱 중요합니다.
그러다 보니 유혹이 쉽게 빠지게 됩니다.
지켜야 할 율법의 적용에 있어
상황과 관점에 따라 다르게 적용하게 되는 유혹입니다.
같은 잘못을 해도
나와 관계된 사람은 눈 감게 되고
나와 거리가 먼 사람은 문제제기를 하게 됩니다.
그러다 보면 자연스럽게 공동체는 시기와 질투에 빠지게 되고
분열되고 갈등에 빠지게 됩니다.
인간적인 시선으로 하느님의 일을 감당하려는 유혹이
결국 더 많은 것을 잃게 만들게 됩니다.
오늘 예수님의 말씀이
우리를 유혹으로부터 벗어나게 합니다.
아들이나 소처럼 소중한 이에 대한 자세와
나와 관계 없는 이에 대한 자세가 어떤지 바라보게 합니다.
자신의 감정에 빠져 중요한 일을 놓치지 않게 하며
내가 바라보는 곳이 어디에 있는지 돌아보게 만들어 줍니다.
우리는 나약한 인간입니다.
그렇기에 혈연 지연 학연에 매이게 되고
나의 희망이신 하느님이 아닌 세상에 의지하게 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느님 자녀라는 정체성을 놓치지 않기 기도하며
내 삶의 기준이 하느님을 향하는
그런 하루 보내시길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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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1029. 연중 제30주간 금요일. 김 로마노 형제님.
연중 제30주간 금요일 제1독서 (로마9,1-5)
"나는 그리스도 안에서 진실을 말하고 거짓말을 하지 않습니다. 나의 양심도 성령 안에서 증언해 줍니다. 그것은 커다란 슬픔과 끊임없는 아픔이 내 마음속에 자리 잡고 있다는 것입니다. 사실 육으로는 내 혈족인 동포들을 위해서라면, 나 자신이 저주를 받아 그리스도에게서 떨어져 나가기라도 했으면 하는 심정입니다."(로마9,1-3)
사도 바오로는 로마서 9장 1-3절에서 자신의 민족이 구원받을 수만 있다면, 자신은 예수님께 저주를 받아도 좋다고, 천국의 생명책에서 자신의 이름이 빠지게 될지라도 자기 민족이 구원받기를 절규한다.
사도 바오로의 고통은 사랑하는 자기 민족을 위하여 일할 수 없다는데 있다.
그는 이방인을 위한 사도로 부르심을 받았기 때문이다.
사도 바오로의 간절한 꿈은 "민족 구원"이다.
그런데 하느님의 생각은 사도 바오로와는 전혀 달랐다. 하느님은 사도 바오로에게 이방인들을 위해 살라고 명령했다.
사실 은총 안의 삶이란, 내가 원하는 삶을 살지 않고, 하느님께서 원하시는 삶을 사는 것을 말한다.
연중 제30주간 금요일 복음(루카14,1~6)
예수님께서 율법 교사들과 바리사이들에게, "안식일에 병을 고쳐 주는 것이 합당하냐, 합당하지 않으냐?" 하고 물으셨다.(3)
루카 복음 14장 2절에 나오는 수종을 앓는 사람을 예수님께서 치유하시기 전에, 미리 율법 교사들과 바리사이들의 그릇된 생각을 지적하신다.
'수종을 앓는'으로 번역된 '휘드로피코스'(hydropikos; which had the dropsy)는 '물'을 가리키는 '휘도르'(hydor)에서 유래한 의학 용어이다.
이 병은 신체의 여러 부위에 물이 고여서 몸이 붓고 살이 썩어가는 병으로서 당시에는 불치병이었다.
유대인들은 이 병이 죄로 말미암아 하느님의 저주에서 비롯된 것으로 여겼다.
또한 이 병은 만성적 질병으로 취급되었는데, 바리사이들의 전통에 의하면 당장 위급한 병이 아닌 이런 만성 질병을 안식일에 고쳐 주는 것은 불법으로 간주되었다.
예수님께서 이러한 수종을 앓는 사람을 안식일에 고쳐 주려는 당신을 책잡으려는 그들의 음모를 아시고, 반론 양식의 질문을 던지신다.
여기서 '합당하냐'로 번역된 '엑세스틴'(eksestin; Is it lawful)의 원형 '엑세스티'(eksesti)는 '합법적이다', '타당하다'는 뜻이다.
특히 이 구절에서 이 동사는 단지 이성적인 타당성을 가리키는 것이 아니라 율법에 합당한 것을 가리킨다.
말하자면 예수님께서는 지금 율법 교사들과 바리사이들에게 안식일에 병을 고쳐 주는 것이 율법에 옳은 것인지 아닌지를 묻고 있는 것이다.
당시 바리사이들은 안식일을 거룩하게 지키기 위해 그들이 인위적으로 만든 39개 항목에 달하는 안식일 금지 규정이 있었다.
그리고 그들은 생명에 지장이 없는 경우에 안식일에 병을 고치는 것은 불법으로 규정하였다.
처음에는 안식일을 보다 거룩하게 지키려는 의도로 금지 규정을 만들었지만, 오히려 형식만을 강조하는 이 규정들이 사람들을 속박하는 결과를 낳았다.
실제로 모세 오경에는 안식일에 병을 고치는 것을 금지하는 내용이 없었고, 이것은 그들의 잘못된 전통일 뿐이었다.
예수님께서는 단순히 율법의 기준으로만 판단하는 것이 아니라, 루카 복음 14장 5절에서 보여지고 있는 대로, 안식일에 병을 고쳐 주는 것이 그들의 경험으로나 이성적으로도 타당한 것임을 논증하고 계신다.
그러나 경험적 논증에 앞서서 루카 복음 14장 3절에서 안식일에 병을 고쳐 주는 것이 율법적으로는 옳은 것임을 분명히 밝혀서 하느님 말씀에 대한 우선적인 태도를 보여 주고, 동시에 유대 종교 지도자들의 율법에 대한 왜곡을 지적하신 것이다.
특히 루카 복음 14장 5절의 원문에서 강조점이 '안식일'이 아니라 '바로', '곧', '당장'이라는 긴급한 시점을 가리키는 '유테오스'(eutheos; immediately; straitway)에 있다는 사실은, 지금 곤경에 처한 사람을 구해내는 일이 '안식일'이라는 시점에 상관없이 당장에 해야 할 급박한 일임을 드러내고 있다.
예수님께서는 한번도 안식일에 대한 율법 규정을 부정하시거나 고의로 어기신 적이 없으시다.
오히려 예수님께서는 당신이 안식일에 병을 고쳐 주는 일이 율법에 근거하여 안식일의 정신을 적극적으로 구현하시는 일임을 밝히신 것이다.
사실 안식일이 사람을 위해 있는 것이지, 사람이 안식일을 위해 있는 것이 아닌 것이다.
예수님께서는 당신 자신이 '안식일의 주인'이라는 신적 권위를 가지고, 안식일에 대한 왜곡된 관습을 바로 잡으려 하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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