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심(下心)과 인욕(忍辱)으로 세상과 소통해야 합니다”
상주 남장사 성웅스님
장학사업 복지사업에도 앞장
상주지역서 40여 년 포교활동
8교구본사 직지사 주지 8년 수행
이주민 비롯한 어려운 이웃
남몰래 보살피는 ‘자비보살’
“나와 남 차별하는 마음 뛰어넘어
무한 지혜와 자비의 공덕 길러야”
상주에서 40여 년 동안 지역포교에 매진하고 있는 남장사 주지 성웅스님은 “나와 남을 차별하는 마음을 뛰어넘어 무한지혜와 자비의 공덕을 길러내야 한다”고 강조한다.
남장사(南長寺)는 경북 상주지역에서 가장 큰 사찰이다. 신라 흥덕왕 때인 832년 진감국사에 의해서 창건되었으며 당시의 이름은 장백사(長柏寺)였다. 고려 명종 때인 1186년에 각원국사가 주석하면서 이름을 남장사로 바꾸었고 조선시대에 들어와서는 사명대사가 주석하기도 했다. 임진왜란 때는 일본군이 이 길을 지나가며 남장사를 불태웠다. 전쟁 후 1635년에 중창하면서 절 전체 모습을 잘 간직한 채 지금까지 내려오고 있다. 이러한 천년고찰 남장사는 지금도 상주지역 복지와 포교도량으로 지역민의 정신적 귀의처가 되고 있다. 남장사 주지 성웅(性雄)스님이 주석하며 지역에서 왕성한 활동을 펼치고 있기 때문이다. 여름의 끝자락에서 성웅스님을 만났다.
지난 2012년 제8교구본사인 직지사 주지 두 번째 임기를 마치고 다시 남장사로 부임한 성웅스님은 여전히 바빠 보였다. 2004년에 교구본사 주지로 처음 부임했으니 벌써 10년 전의 일이다. 그간 스님은 사중의 어른 스님들을 모시고 원만한 살림을 살았다. 스님이 주지로 부임하기 전 직지사는 주지 문제로 상당한 잡음이 있었다. 하지만 스님이 부임하면서 일체의 파열음이 사라졌다. 여기에는 ‘하심(下心)과 인욕(忍辱)’이라는 성웅스님의 삶에 대한 철학이 밑받침 되어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하심과 인욕으로 세상과 소통해야 합니다. 저마다의 근기를 끌어올리기 위해서는 자기가 살아가면서 자기중심이 있어요. 그것을 우주처럼 섬기고 열정적으로 소통하고 지혜롭게 살아야 해요. 직지사에서 8년 살면서 새벽 2시5분이 되면 일어났어요. 2시30분부터 5시30분까지 염불수행을 하기도 하고 절도 했어요. 절은 몇 백배씩 했어요.”
스님은 저마다 확고한 가치관을 가지고 삶을 살아야 한다고 강조했다.
“최절인아산(催絶人我山)하고, 장양공덕림(長養功德林)이라 했어요. 나와 남을 차별하는 마음을 뛰어넘어 무한지혜와 자비의 공덕을 길러낸다는 뜻입니다. 우리가 살다보면 ‘내가 누구다’라면서 하심 하지 않을 때가 있어요. 그런 마음을 경계하라는 말입니다.”
한동안 스님은 침묵했다. ‘글귀가 가르치는 지혜를 배워보라’는 의미로 보였다. 스님은 다시 ‘군림집(群林集)’이라는 글을 써 보였다.
“30년 전 사자산 법흥사에 가면 반듯한 소나무 수백그루가 숲을 이루고 있었어요. 여기에 본받을 게 게 많아요. 우리가 언어를 통해서만 배울 게 아닙니다. 언어에는 지혜반야가 있기도 하지만 자연에서도 무한한 생명력이 있음을 배울 수가 있어요.”
저마다 자기의 위상을 가지고 있지만 자만하지 않는 나무들의 군락. 나무가 무리를 이루어 숲을 이루고 있지만 나무 한그루 한그루는 자만하는 모습을 보이지 않고 ‘숲’이라는 전체의 모습을 이루는 하나의 구성원이 된다는 가르침이다. 스님은 큰 숲이 되기까지의 과정을 중시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가을 산에 가면 도토리가 많이 떨어집니다. 그 도토리를 잘 키우면 큰 참나무가 됩니다. 이렇듯 매사에는 하나하나의 과정이 있어요. 그것을 중시해 최선을 다해야 합니다. 자그마한 도토리 한 톨이 큰 참나무가 되기 위한 과정을 살펴볼 필요가 있다는 겁니다.”
작은 것이 모여 큰 것을 만들 듯 성웅스님의 지역포교 결실도 그러했다. 스님은 1970년대 말에 상주에서 포교활동을 시작했다. 경상북도 북부지역은 불교세가 강한 영남지역에 비해 유교성향이 강해 상대적으로 불교세가 약하다. 이러한 지역에 스님은 어린이 포교의 원력을 세웠다.
“유치원을 건립하기 위해 지역 스님들과 힘을 모았어요. 그래서 은사 스님을 증명으로, 녹원스님 등 여러 대덕 스님들을 모시고 보살계대법회를 봉행했어요. 그 기금을 종잣돈으로 상락유치원을 지어 지역 포교를 시작했어요.”
상락사 주지를 맡은 스님은 상락유치원을 건립해 지역포교의 싹을 뿌렸다. 이후 스님은 직지사 주지로 재직한 8년을 제외한 40여 년 동안 상주지역에서 사회복지와 어우러진 포교활동에 매진해 왔다.
스님의 포교활동 밑바탕에는 사람을 소중히 여기는 마음이 깔려 있다. 그 일환으로 스님은 인재불사를 위해 꾸준히 해 오고 있다.
“불사 가운데 제일불사는 인재불사입니다. 출가 수행자로 이웃의 어려움을 보살피는 일은 당연한 일이지요. 처음에는 지역 청소년 불교 활성화를 위해 장학사업을 시작했다가 차츰 확대했어요. 직지사 주지 소임을 맡고 있을 때도 장학사업은 꾸준히 해 왔어요.”
이러한 장학금은 특별히 후원자의 도움을 받지 않고 진행하고 있다. 사찰에서 봉행하는 방생법회 때 비용을 아끼고, 사중의 재정을 더 보태 기금을 마련한다.
직지사 주지 소임을 회향하고 2년 전 남장사로 돌아온 스님은 지역포교 사업을 꾸준히 이어갔다. 지난 겨울에는 빙판에 낙상(落傷)을 당해 상당한 고초를 치렀다. 그 후유증으로 지금까지 물리치료를 받고 있다.
“건강해야 합니다. 불시에 낙상을 통해서 새로운 지병이 생기니까 많은 생각이 들었습니다. 동국대 일산불교병원에 입원해서 처음 느낀 생각이 ‘우주를 잘 섬기지 못해서 이렇게 됐구나. 내게 아직 하심과 인욕, 중생의 습기인 교만이 남아 있었던가 보다’라는 생각이 들었어요.”
몸이 불편한 가운데도 스님은 스님대로의 방식으로 수행을 이어가고 있었다.
“제 표현으로 정진이라 합니다. 화두를 들고 타파하는 정진도 하지만 법회가 있을 때면 신도들과 더불어 경전도 염송합니다. 어떨 때는 4시간을 하기도 합니다. 요즘은 한글의식으로 된 염불도 합니다. 모두가 무명의 마음을 밝히는 수행입니다.”
스님은 특히 참회 기도를 오랫동안 했다고 했다.
“해인사에서 발심, 행자시절 때는 당시 응진전 부전을 맡아 하루 1000배씩 100일 정진해서 입지(立志), 즉 뜻을 세웠어요.”
스님은 대중들이 마음에 새겨야 할 가르침을 <명심보감>에서 인용해 되짚었다.
“만언만당불여일묵(萬言萬當不如一默), 백전백승불여일인(百戰百勝不如一忍)이라고 했어요. 만 마디 말이 옳다고 해도 한 번의 침묵만 못하고, 백번 싸움에 백번 이기더라도 한번 참는 것만 못하다고 했어요. 침묵과 인욕으로 자신을 다스릴 줄 아는 불자가 되어야 합니다.“
수행자에게 세속 나이는 무의미 하지만 일흔을 훌쩍 넘긴 스님은 수척해 보였다. 이제는 노스님의 반열에 오른 모습이었다. 하지만 스님의 포교 원력은 아직도 40여 년 전 지역포교에 열정을 쏟기 시작할 즈음의 초발심을 그대로 견지하고 있었다.
지역복지와 장학사업을 꾸준히 이어가고 있고, 지역의 이주민 가정을 비롯한 어려운 이웃을 찾아 남몰래 보살피는 열정은 ‘자비보살의 나투심(顯現)’으로 보였다. 늦더위가 기승을 부리고 있지만 성웅스님의 자비행이 서늘한 단비가 되어 상주의 더위를 식히고 있는 듯했다.
■ 성웅스님은 …
1968년 고암스님을 은사로 해인사에서 출가한 성웅스님은 1970년 해인사에서 일타스님을 계사로 사미계, 1971년 고암스님을 계사로 구족계를 수지했다. 1974년 해인사 강원을 졸업했으며 제방선원에서 수선안거했다. 1981년에는 직지사 관응스님 문하에서 <선문염송>을 연찬했으며 1991년에도 관응스님으로부터 ‘무문관’의 가르침을 배웠다. 1993년 동국대 불교대학원을 수료했으며 조계종 개혁회의 의원(1993년)과 상주 상락사 주지(1986년), 남장사 주지(2002년), 초계호심위원(2001년) 등을 역임했다.
지난 2004년 직지사 주지 취임에 이어 2008년 재임하며 조계종 제8교구인 직지사 발전에 매진했다. 사회복지 분야에서도 왕성한 활동을 펼치고 있는 스님은 조계종사회복지재단 시설장협의회 초대회장과 상주자활후견기관장 등을 역임했으며 현재 상주시 종합사회복지관장으로 있다. 스님은 이같은 포교활동으로 1985년과 1998년, 2008년 조계종 총무원장 표창, 2000년에는 교정대상 본상인 자비상을 수상했다. 또한 2011년에는 보건가족복지부장관 표창을 받았으며 2013년에는 조계종 종정 표창을 수상하기도 했다.
[출처: 불교신문 | 2014.08.1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