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벽이 소란합니다. 산에서 뻐꾸기, 산비둘기가 울고 울 근처에서는 새들이 모여 합창을 합니다. 이것을 공해라고 말하기는 어려워도 새벽잠이 많은 이들에게는 달갑지 않은 소리일 것입니다. 흔히 새들이 내는 소리를 노래니 지저귀니 하며 미화해도 새벽잠이 많은 이들에게는 소음일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다행히도 이 시간까지 잠자리에서 빠져나오지 못한 마을 사람은 없습니다.
나는 새들의 노랫소리에 잠이 스르르 깹니다. 그러면 날이 밝은 것이며 시계는 여섯 시를 가리킵니다. 새들이 언제부터 울기 시작했건 내 귀에 들리기 시작하는 시간이 대충 그때쯤입니다. 나는 간혹 좀 더 자기를 원하지만 잠은 나에게 머물지 않아 오감 중 마지막 한 가지가 깨어나기를 기다려 잠자리에서 빠져나옵니다. 누군가가 흔들어 깨우는 것보다는 몸과 마음이 상쾌합니다. 스르르 잠에 빠졌다가 또 그렇게 잠에서 깨는 안온함이 하루를 즐겁게 합니다. 그 일을 새가 해 주고 있는 것인데 마치 세월이 나도 모르는 사이에 흘러가는 것과 같이 그 사실을 깨닫지 못하고 산 것입니다.
내 집 근처에 저들이 머물며 노래할 수 있는 나무 한 그루 심어놓지 못한 채 저들의 노래를 공짜로 듣습니다. 지나가는 전깃줄이거나, 오십여 미터쯤 떨어져 있는 오래된 은행나무이거나, 아랫집 울안에 있는 단풍나무 위에 모여 노래할 때면 다소 미안하다는 생각이 듭니다. 뭐가 그리 미안할 일이냐고 하겠지만 적어도 수십 년을 그들과 함께 생활하고 그들의 노랫소리에 잠을 깨보지 않으면 그런 감정을 느낄 수는 없습니다. 나 들으라고 노래하는 것은 아니겠지만 은근히 그 노랫소리를 즐기고 있으니 염치가 없다고 할 것입니다.
그들을 거느리고 살지도 않고 그들이 나를 위해 노래하는 것도 아니지만 우리의 삶은 모르는 사이에 하나가 되어 바람이 불면 나뭇가지가 흔들리듯 저들이 울면 나도 잠에서 깹니다. 세월이 지나고 보니 참새잡이를 하던 시절이 부끄럽고 공연히 돌팔매질하던 일 또한 그렇습니다. 적어도 그때는 새를 정통으로 맞춰보려고 돌팔매질을 했기 때문입니다. 그렇지만 그들도 나도 이제는 그런 악연을 모두 잊은 채 자연의 일부로서 살아갑니다. 얼마나 다행한 일입니까. 그래서 이제는 곁으로 다가가도 나의 악의 없음을 나는 참새는 멀리 날아가지 않습니다.
한 해 전쯤 천장 속에서 새들이 산 적이 있습니다. 한동안 살게 내버려 두었는데 밤이면 시끄럽게 뛰어다니는 통에 잠을 잘 수가 없어 환기 구멍을 막아버렸습니다. 그즈음 새끼 새 한 마리가 환기구에서 뛰쳐나와 이층 베란다로 떨어졌습니다. 떨어졌다는 표현보다는 나는 시도를 하던 중 날갯짓이 서툴고 날갯죽지 근육이 풀리지 않았던 것으로 보입니다. 구해줄 요량으로 다가갔지만 사나운 몸짓으로 겁을 주는 통에 물러서고 말았습니다. 한 시간쯤 후에 어디론가 사라져 보이지 않았습니다. 온 힘을 다해 나는 법을 익힌 후 날아간 것입니다. 믿거나 말거나 나는 쾌재를 부른 후 놈에게 박수를 보냈습니다.
사람들은 나이를 먹으면 눈이 선해집니다. 자연에 대항하지 않고 순응해 가는 법을 배운 까닭이며, 자연이 얼마나 위대하고 인간이 얼마나 보잘것없는지 알았기 때문입니다. 그러니 새벽마다 자명종처럼 울어대는 새들의 노랫소리에도 감동을 받는 것입니다. 그런 일은 얼마든지 많습니다. 천변을 걷다 보면 매년 오월경이면 배가 부른 어미 잉어들이 산란을 위해 천을 거슬러 올라갑니다. 곁에 있는 것은 수컷이 틀림없는데 마침 그때는 봄 가뭄이 들 때여서 물이 그리 많지가 않습니다. 어느 지점에서는 배가 모랫바닥에 닿을 정도여서 거슬러 오르는 몸부림이 가엾습니다. 게다가 보를 막아 그들의 여정을 힘들게 합니다. 그들의 모정은 인간의 그것 못지않아서 나도 모르게 발길을 멈춘 채 응원을 보내기도 합니다. 그러고는 이내 그들의 모정에 존경을 표하며 부끄러워집니다.
지금은 막 새들도 산란기를 지낸 듯합니다. 늘 그렇기는 하지만 유난히 쌍쌍이 나는 것이 예사롭지 않습니다. 그러니 저들의 노랫소리 또한 다정스레 들리는 것이며 날갯짓도 경쾌하기만 합니다. 얼마 안 있으면 새로 태어난 새들이 가녀린 목소리로 노래하며 하늘을 날 것입니다. 새 생명을 보는 것은 즐거운 일입니다. 눈에 띄기만 하면 잡아 죽이던 뱀들도 이제는 슬며시 숲으로 가기를 기다립니다. 세상은 사람만이 사는 곳이 아니며 두루 어울려 사는 곳이라는 사실을 알았습니다. 나는 텃밭에 농약을 치지 않습니다. 그 속에서 사는 지렁이를 비롯한 뭍 생명이 다칠 것을 염려하기 때문입니다.
간혹 뉴스를 접하면서 사람을 악하게 만드는 원인 중의 하나가 자연과 멀어져 있기 때문이라는 생각을 해보게 됩니다. 새들의 노랫소리를 듣고, 고기들의 몸짓을 보며, 바람결에 살랑거리는 숲을 거닐면 나쁜 생각을 떠올릴 겨를이 없습니다. 보고 듣는 것, 마주치는 것들이 나에게 온화함과 즐거움을 주는데 어찌 나쁜 생각이 들겠습니까. 그래서 부모님의 산소에 내려와 굼벵이 사냥을 하느라 활개를 파헤쳐 보수하는 괴로움을 주는 산돼지조차 나무랄 일은 없는 것입니다. 나는 인본주의자는 아니지만 더불어 사는 이치쯤은 알고 있습니다.
집 울쯤에서 노래하던 새들이 숲으로 가고 더러 몇몇만 남아 지저귑니다. 저녁나절이면 다시 돌아와 근방 어디에선가 잠을 청할 것입니다, 그리고 새벽이면 다시 일어나 일상을 시작하겠지만 여전히 그들이 주는 즐거움을 즐거움인 줄 모르고 삽니다. 나는 누구를 위해 즐거운 몸짓 한번 한 적이 없었던 것이 분명합니다. 버릇이 들지 않았기 때문에 앞으로도 그리 살기는 어려울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