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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년 8월 25일
생명사랑교회 창립 12주년 감사 예배 설교_현장예배
오직 주님이 바라시는 대로
사무엘기하15장 24-29절, 누가복음서 22장 39-43절
강영선목사
생명사랑교회 교우 여러분, 반갑습니다.
교회설립 12주년을 맞이하신 교우 여러분에게 주님의 은총과 평화가 가득하기를 기원합니다. 지난 12년 동안 우리 교회를 흔들림 없이 지켜오신 장로님들, 권사님들 집사님들, 교우님들에게 감사를 드립니다. 그리고 지난 9년 동안 우리 교회를 잘 양육해 오신 한문덕목사님과 교역자 여러분에게도 감사를 드립니다. 오랜 만에 와보니 새로운 교우들의 얼굴도 보여서 반갑습니다.
한문덕목사님이 불가피하게 우리 교회를 떠나셔야 한다는 소식을 저도 들었습니다. 지난 9년 동안 생활비도 넉넉히 드리지 못하는 개척교회에 부임하셔서 교회를 잘 발전시켜 주셨고, 특히 코로나 팬데믹 기간에도 교회가 위축되지 않고, 오히려 성장하고 발전하도록 지도력을 발휘해 주셨는데, 사실상 모교회와 같은 향린교회의 부름을 외면할 수 없어서 떠나시게 되었다는 소식을 듣고 저도 걱정이 앞섰습니다. 생명사랑교회를 생각하면 안타까운 일이지만, 하나님이 우리 교단을 위해서 한목사님을 더 크게 사용하실 계획이 있으신 줄 믿고, 교우 여러분도 그렇게 위로받으시고, 좋은 얼굴로 보내주셨으면 합니다. 오늘 설교 제목처럼 “오직 주님이 바라시는 대로 이루어지게 하소서” 라는 심정으로 기도하시면 우리 주님께서 지금까지 그래 오셨듯이 또 다른 적절한 종을 우리 교회에 보내주실 줄로 믿습니다.
교회당에 들어올 때마다 느끼는 것이 하나 있는데, 예배실 바로 옆에 마사지룸이 있다는 것입니다. 교회는 주님의 메시지를 전하는 곳인데, 마사지룸이 나란히 있다는 것이 상징적이기도 합니다. 교회에서 선포되는 메시지(message)가 변질되면 마사지(massage)가 됩니다. 한국교회는 지난 40-50년 동안 모성적 성령운동으로 교회를 성장시켜왔습니다. 아픈 데를 감싸주고, 가려운데 긁어주고, 교인들에게 위로와 기쁨을 주는 설교들이 주류를 이뤘습니다. 회개를 강조하고 잘못된 삶을 바르게 가르치는 설교보다는 모조건 좋으신 하나님, 온갖 응석을 다 받아주시는 하나님을 가르쳐 왔습니다. 그런데 이제 우리 사회가 발전되고, 경제도 좋아지고, 의료수준이나 사회복지 시스템이 발전하면서 이제는 교회에 나오지 않고도 그런 일차원적 욕구들을 해결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돈만 있으면 얼마든지 건강도 행복도 보장받는 시대에 우리가 살고 있습니다. 그래서 모성적 성령운동으로 성장해온 한국교회가 최근 들어서 위기에 봉착하고 있습니다.
각 교단 총회의 통계자료에 의하면 개신교인의 수는 1990년대에 1200만명이었는데, 지금은 800만명으로 줄었습니다. 여의도 순복음교회를 비롯한 대형교회들도 교인들이 많이 줄었고, 수많은 개척교회들이 문을 닫았고, 두 세 교회가 하나로 합치는 현상들이 생겼습니다. 특히 지난 3-4년 코로나 펜데믹을 겪으면서 문 닫는 교회들이 많이 생겼습니다. 이러한 와중에서도 생명사랑교회는 꾸준한 성장과 발전을 이루어 왔습니다. 그 핵심 요인 한 가지는 메시지가 살아있기 때문입니다. 메시지가 마사지로 변질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말씀과 사역과 봉사로 표현할 수 있는 교회의 본질과 사명을 잘 지켜왔기 때문입니다. 사람을 기쁘게 하는 교회가 아니라, 주님을 기쁘시게 하는 교회! 사람의 뜻이 아니라 주님의 뜻을 존중하고 따르는 교회! 우리 한목사님이 지난 9년 동안 견지해오신 이 아름다운 모습을 앞으로도 더 잘 발전시키는 생명사랑교회가 되기를 진심으로 기원합니다.
오늘 봉독한 구약성경 이야기는 다윗왕이 압살롬이라는 아들에게 쫓겨서 피난 가는 이야기 중 한 토막입니다. 삼무엘하 13장에서부터 다윗과 압살롬의 이야기가 전개되는데, 15장에서는 압살롬의 반란에 대해 상세한 보도가 나옵니다. 다윗의 생애에서 가장 음침한 사건이 밧세바 사건이라면, 가장 가슴 아픈 사건은 바로 압살롬의 반란사건이었습니다. 자신의 친아들인 압살롬이 아버지를 없애고 왕이 되겠다고 쿠데타를 일으킨 이 엄청난 사건은 9년 전에 있었던 암논과 다말의 사건, 그리고 7년 전에 있었던 암논 살해사건에서부터 그 뿌리가 자라게 됩니다.
압살롬은 다윗의 셋째 아들이었는데, 그는 키가 크고 외모가 준수하게 잘 생긴 미남자였습니다. 그에게는 다말이라는 어여쁜 여동생이 있었는데, 그가 아주 아끼고 사랑하는 여동생이었습니다. 그의 이복동생 중에 암논이라는 왕자가 있었는데, 그 암논이 다말을 짝사랑하였습니다. 비록 배다른 동생이지만, 같은 핏줄을 타고난 친동생인데, 그 다말을 짝사랑한 나머지 결국 상사병이 나고 말았습니다. 그가 상사병으로 끙끙 앓고 누워있는데, 그의 친구가 병문안을 왔습니다. 요나답이라는 이 친구는 아주 교활한 놈이었습니다. 그는 왕자인 암논이 여동생 다말을 짝사랑하다가 병이 난 것을 알고, 아주 못된 계략을 알려줍니다. “왕자님이 병든 체 하고 누워있으면, 임금님이 병문안을 오실 것입니다. 그때 임금님에게 청하십시오. ‘내 동생 다말을 나에게 보내서 직접 빵을 구워주도록 하면 내 병이 나을 것 같습니다.’ 그리고 다말이 병문안을 오면 이렇게 이렇게 하십시오.”
유유상종이라고 친구를 보면 그 사람 됨됨을 알 수 있습니다. 암논은 그 나쁜 친구의 계략대로 실천했지요. 다윗왕이 문병왔을 때, 다말을 나에게 보내달라고, 다말이 직접 만들어 주는 빵을 한 조각만 먹으면 병이 나을 것 같다고 능청을 떨었습니다. 다윗왕은 그의 음침한 속도 모르고, 다말을 오빠에게 보냈습니다. 다말은 오빠이기 때문에 안심하고 그의 침실까지 들어가서 수종을 들었습니다. 그때 암논이 다말을 성폭행해 버린 것입니다. 화장실 들어갈 때 마음과 나올 때 마음이 다르다고, 성폭행을 하고 나니 갑자기 그렇게 사랑스러워 보이던 다말이 미워졌습니다. 삼하13장15절에 보면, “이제는 미워하는 마음이 전에 사랑하던 사랑 보다 더하였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무정한 암논은 성폭행 당하고 울고 있는 다말을 하인들을 시켜 문밖으로 쫓아내 버렸습니다.
이 사건을 다말의 친오빠인 압살롬이 알게 되었습니다. 다말을 지극히 아끼고 사랑하던 압살롬은 그때부터 호시탐탐 복수의 기회를 엿보다가, 드디어 2년이 지난 후에 그 암논을 살해하게 됩니다. 다윗왕은 훌륭한 점도 많았지만, 자식농사에는 실패한 사람이었습니다. 다윗의 자식들 사이에서 강간사건도 터지고, 살인사건도 터진 것입니다. 세상만사는 심은 대로 거두는 법입니다. 다윗이 젊었을 때 왕궁 옆에 살던 유부녀 밧세바를 강제로 데려다가 자기 아내로 삼고, 그의 남편 우리야를 전쟁터에 내보내 죽게 했던 그 보응을 지금 자식들을 통해 받고 있는 것입니다.
암논을 살해하고 살인범이 된 압살롬은 그술이라는 이웃나라로 망명을 가서, 그곳 왕자의 보호를 받으며 지내게 됩니다. 이렇게 3년이 흐른 다음에 다윗왕은 요압장군의 간청을 받아들여 압살롬을 사면해주고 예루살렘으로 데려옵니다. 그러나 근신하라는 의미에서 거주지역을 예루살렘으로 국한시켰습니다.
예루살렘에 돌아온 압살롬은 그때부터 자기가 왕이 될 계략을 세웁니다. 우선 백성들의 마음을 사로잡기 위해 백성의 편에서 그들의 애로사항을 들어주는 일을 합니다. 아침마다 성문에 나가서 소송건을 가지고 성안으로 들어오는 사람들을 만나서 상담도 해주고, 은근히 왕을 비난하도록 거들고, 자기가 지도자가 된다면 여러분 같은 민중의 편에서 일하겠다는 식으로 민심을 잡기 위해 노력합니다. 그렇게 4년 동안 공작을 하면서 암암리에 전국적인 조직망까지 갖췄습니다. 압살롬이라는 이름은 ‘아버지의 평화’라는 뜻인데, 이름의 뜻과는 정반대되는 길을 걸었던 것입니다. 이 압살롬이 얼마나 잘 생겼던지, 삼하14:25에 보면, “머리끝에서 발끝까지 흠잡을 데가 없는 미남이었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잘 생긴 남자를 너무 좋아하지 마세요. 사고 칠 확률이 높습니다.
지금부터 20년전 쯤 제가 겪었던 일입니다. 어느 신사 한 분이 한신대 교목실장실로 저를 찾아왔습니다. 60대 초반 정도 되어 보이는데 키도 크고 훤칠하게 잘 생긴 신사분이었습니다. 옷도 품위있게 잘 입었습니다. 자기소개를 하면서 명함을 주는데, 울릉도에 있는 어느 기장교회의 장로였습니다. 너무 놀랍고 반가웠습니다. 왜냐면 기장교회가 없던 울릉도에 기장교회가 생겼다는 사실에 너무 반가웠던 것입니다.
사실은 울릉도가 한신대와 관련이 있습니다. 이일선목사님이라고 1960-70년대에 한국의 슈바이처로 유명했던 분이 계셨습니다. 그분은 한신대의 전신인 조선신학교를 나오고 목사가 되셨고, 슈바이처처럼 가난한 사람들을 의술로 섬기기 위해 다시 서울대 의대를 다녔습니다. 의사가 된 뒤에는 아프리카로 슈바이처 박사를 찾아가서 몇 년 동안 슈바이처 박사 밑에서 일하며 배웠습니다. 그리고 한국에 돌아와서는 울릉도에 들어가 나환자들을 위해서 평생을 살았던 분입니다. 그 이일선목사님의 삶을 제가 잘 알기 때문에 그 이일선목사님이 뿌린 복음의 씨앗이 살아 있었나보다 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울릉도에 언제부터 기장교회가 생겼냐?” 고 물었더니, 자기 집에서 몇 가정이 모이기 시작해서 최근에 교회당까지 건축했고, 곧 담임목사님을 청빙할 거랍니다. 그러면서 아담한 시골교회 사진을 보여주더라고요. 저를 찾아온 이유는 신축한 교회당 입구에 한신대 교목실장 이름으로 큰 거울을 하나 붙여주면 좋은 기념이 되겠다는 것입니다. 그 말을 듣고 제가 얼마나 기쁘고 흐뭇했던지 그 자리에서 봉투에다 30만원을 정성껏 담아서 드렸습니다. 그 봉투를 받아가지고 나가면서 나중에 연락드릴테니 꼭 한번 울릉도에 다녀가시라고 하더군요.
그 후로 저는 그 일을 까마득하게 잊었는데, 1년쯤 지난 후에 우연히 책상서랍에서 그분의 명함을 발견하고는 궁금한 생각이 들어서 전화를 걸어봤습니다. 그랬더니 없는 번호로 나와요. 경북노회 노회장에게 전화를 걸어서 혹시 울릉도에 기장교회가 생겼냐고 물었더니 금시초문이라고 해요. 그제서야 ‘아 내가 사기를 당했구나.’ 라는 생각이 들더군요. 저는 평생 남에게 사기 안 당하고 살 줄 알았는데, 그분의 인물이 워낙 젊잖고 훤칠하게 잘 생겨서 당했지요. 사기꾼들은 대체로 인물이 훤칠하게 잘 생겼습니다.
압살롬은 이렇게 잘 생긴데다가, 젊고, 유능하고, 패기 있고, 비전이 있는 지도자로 백성들에게 비쳐졌습니다. 다윗은 이미 늙고, 힘도 없고, 판단력도 떨어지고, 민심도 멀어진 상태였으니, 모든 정황이 압살롬에게 유리하게 전개되었습니다. 거주지역이 예루살렘으로 국한되었던 압살롬은 자기 아버지 다윗왕을 속여서 헤브론으로 갑니다. 헤브론에 가서 하나님께 예배드리고 오겠다고 거짓말을 하고, 여행허락을 받아 헤브론에 가서, 자신의 출생지였던 그곳에서 반란의 기치를 든 것입니다. “압살롬이 왕이 되었다”는 함성이 헤브론에서부터 시작하여 온 나라에 울려 퍼졌습니다. 대다수의 군대와 백성들이 압살롬 편에 섰습니다. 그리고 그 여세를 몰아 수도 예루살렘으로 진격해 들어온 것입니다. 그 쿠데타 세력이 얼마나 대단했던지, 다윗왕도 결국 예루살렘과 왕궁을 다 포기하고 정처 없는 피난길에 올랐습니다. 다윗왕을 몰아내고 압살롬이 새로운 왕이 되는 것은 이미 대세로 자리 잡았습니다. 그 대세를 좇아서 이미 수많은 백성이 압살롬의 편에 가담했고, 소수의 신하들과 얼마 안 되는 군대만이 다윗왕을 호위하고 따라나섰습니다.
오늘의 본문은 바로 이때 제사장 사독과 레위사람들이 하나님의 언약궤를 메고 다윗 앞에 나타난 장면입니다. 왜 그랬을까요? 왜 그 성직자들이 언약궤를 메고 다윗에게 왔을까요? 언약궤란 곧 법궤를 말합니다. 법궤란 그 옛날 모세가 시내산에서 하나님으로부터 받은 십계명을 기록한 석판 두 개를 담고 있는 궤를 말합니다. 광야생활 40년 동안 그 법궤는 곧 하나님의 임재의 상징이었습니다. 실제로, 그 법궤는 여러 가지 기적을 일으키기도 했습니다. 광야생활을 청산하고 요단강을 건너 가나안땅에 들어올 때, 제사장들이 그 법궤를 메고 강물에 발을 들여놓는 순간 요단강물이 마른땅처럼 갈라졌습니다. 이스라엘이 블렛셋과 전쟁을 할 때, 블렛셋 군인들에게 그 법궤를 빼앗긴 적이 있었습니다. 블렛셋 사람들은 그 법궤를 자기들이 섬기는 다곤 신전에 놔두었는데, 다음 날 아침에 보니 다곤의 신상이 박살이 나있었습니다. 그리고 온 블렛셋 땅에 괴질이 창궐해서 할 수 없이 법궤를 이스라엘에 되돌려 준 사건도 있었습니다. 그런가 하면 웃사라는 사람은 법궤를 옮기는 과정에서 법궤에 함부로 손을 댔다가 즉사하기도 했습니다. 이처럼 법궤라는 것은 곧 하나님의 임재 그 자체였습니다. 지금처럼 다윗이 난관에 봉착했을 때, 가장 필요한 것이 바로 그 법궤였습니다. 법궤만 곁에 있으면 지금까지 그랬듯이 그 법궤가 다윗을 지켜주고 난국을 타개해 줄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성직자들이 그 법궤를 다윗에게 가져온 것입니다.
그런데 다윗의 반응이 의외였습니다. 25-26절에 보면, “하나님의 궤를 다시 도성 안으로 옮기시오. 내가 주님께 은혜를 입으면, 주님께서 나를 다시 돌려보내 주셔서, 이 궤와 이 궤가 있는 곳을 다시 보게 하실 것이요... 그러나 주님께서 나를 싫다고 하시면, 오직 주님께서 바라시는 대로 나에게서 이루시기를 빌 수밖에 없소.” 지금 이스라엘과 다윗 가문의 운명이 풍전등화와 같은 위기상황에서 지푸라기라도 잡아야 되는 판인데, 다윗은 그 수호신과도 같은 언약궤를 다시 예루살렘으로 가져다 놓으라고, 제자리에 되돌려 놓으라고 명령하는 것입니다. 그 이유는 간단합니다. “만약 내가 주님의 은혜를 입는다면 다시 왕궁으로 돌아갈 것이고, 주님께서 나를 버리신다면 그것도 주님의 뜻이니, 오직 주님이 원하시는 대로 이루어지기를 바랄 뿐이다.” 바로 이 믿음 때문입니다.
지금까지 하나님은 언제나 다윗 편에서 일하셨습니다. 비록 다윗이 허물도 많고 실수도 많은 사람이지만, 그를 택하셨고, 그를 왕으로 세우셨습니다. 그 약속의 신실성을 다윗은 의심해본 적이 없습니다. 그러나 자식농사를 잘 못 져서 하나님 앞에 큰 죄를 지었고, 지금 이 고난은 바로 자신의 부덕의 소치임을 다윗은 누구보다도 잘 알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이 판국에 내가 무슨 염치로 하나님의 도움을 구하겠느냐? 그저 겸손하게 하나님의 처분을 기다리겠다’ 라는 것입니다. 다윗은 자신의 사사로운 일로 하나님의 크신 뜻을 어긋나게 할 수 없다고 생각했던 것입니다.
다윗의 훌륭한 점이 여기에 있습니다. 보통 사람 같으면, 어떤 어려움에 봉착할 때, 고난과 역경을 당할 때, 자신을 돌아보거나 회개하기도 전에, 무조건 하나님의 옷자락을 붙잡고 늘어질 것입니다. 어떻게든 하나님을 내 편으로 끌어들여 놓고 보자는 생각이 앞서기 마련이지요. 그러나 다윗은 이 위급한 상황 속에서도 “오직 주님이 바라시는 대로” 이루어지기를 원했습니다. 다윗의 생애에서 이때처럼 다윗의 모습이 크게 보인 적이 없습니다. 골리앗을 죽이고 의기양양하게 돌아오던 개선장군의 모습보다도, 지금 패배자로서, 아들에게 배신당한 처참한 패주로서의 다윗의 모습, 그의 생애에서 가장 어려운 역경에 처했음에도 불구하고, 겸손히 주님의 뜻을 따르겠노라고 자신의 잘못을 스스로 책임지려하는 그 모습이 훨씬 더 위대해 보이는 것입니다.
미국 남북전쟁 당시 북군의 사령관이었던 아브라함 링컨의 일화 중 유명한 이야기가 전해져 내려오지요. 참모회의 도중에 한 사람이 “하나님이 우리 북군 편에 계시도록 기도합시다.” 라고 제안했을 때, 링컨은 이렇게 대답했다고 합니다. “아니요. 우리가 하나님 편에 서도록 기도합시다.” 진정한 신앙인은 하나님을 내 편으로 끌어들이는 사람이 아니라, 내가 하나님 편에 서는 사람입니다. 하나님을 내 편으로 끌어들여서 나의 욕구충족을 위해 이용하는 사람이 아니라, 나를 주님의 뜻에 복종시키는 사람이 위대한 신앙인이 아니겠습니까?
예수님은 십자가의 고난과 죽음을 앞에 두고 이렇게 기도하셨습니다. “아버지여, 내게서 이 잔을 거두어 주소서. 그러나 내 뜻대로 마옵시고, 아버지의 뜻대로 하옵소서.” 기도 중 가장 위대한 기도는 “내 뜻대로 마옵시고, 주님의 뜻대로 하옵소서.” 이 기도입니다.
절체절명의 위기상황에서도 이처럼 훌륭한 신앙적 자세를 견지했던 다윗왕을 하나님은 결코 버리시지 않았습니다. 승승장구하던 압살롬은 결국 상수리나무에 머리채가 걸려서 대롱대롱 매달린 채로 창에 맞아 비참하게 죽었고(삼하18:14-15) 그가 죽자 자연스럽게 쿠데타 세력도 진압되었습니다. 그리고 그는 다시 예루살렘을 돌아오게 되었습니다.
언제부턴가 우리 사회는 극명하게 둘로 쪼개져 있습니다. 보수와 진보, 우파와 좌파! 그리고 그 병든 이념의 잣대로 사람을 판단하고, 세상만사를 재단합니다. 안타까운 것은 우리 그리스도인들조차도 좌파와 우파로 나뉘어있고, 그 이념의 시각으로 신앙까지 변질시키고, 예수님을 정치적 도구로 이용한다는 사실입니다. 분명한 것은 우리가 진정한 그리스도인이라면 우리는 좌파도 우파도 아닙니다. 파가 있다면 우리는 오직 예수파요 그리스도파가 되어야 합니다. 세상적 편견과 이념이 신앙의 본질을 왜곡시킨다면 우리는 그리스도인이 아닌 것입니다. 이런 경우에 우리 예수님이라면 어떻게 하실까? 어떤 것이 그리스도의 정신에 맞는 것일까? 그 주님의 뜻을 묻고 따르는 사람이 그리스도인인 것입니다. 하나님의 나라와 그의 의를 가장 먼저 구하라고 예수님은 명령하셨습니다.
우리 주님께서 진정으로 기뻐하는 사람이 누구이겠습니까? 하나님의 뜻을 빙자해서 나의 욕구를 채우려는 사람이 아니라, 주님의 뜻에 맞는 사람이 되고자 하는 사람! 주님이 원하시는 일을 하고자 하는 사람! 다윗처럼 “오직 주님이 바라시는 대로 이루어지이다” 라고 주님의 뜻을 높이는 사람!... 이러한 그리스도인을, 이러한 교회를 우리 주님은 지금도 찾고 계십니다. 우리 주님의 뜻을 존중하고 따르는 생명사랑교회와 교우 여러분이 되시기를 기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