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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천순교성지 → 신암리성당 → 갈곡리성당 → 참회와속죄의성당 → 파주숙소
37.9Km 13.6Km 32.6Km 10.3Km
30. 신암리성당
의정부 지역 신앙의 뿌리가 된 교우촌
신암리는 지금은 농촌이지만 예전에는 산림이 울창했던 곳으로,
조선 말기에 천주교 신자들이 박해를 피해 모여들면서 형성된 마을이다.
1900년대 초 서울 종현(현 명동) 본당 관할이었던 의정부 지역은
구한말 박해를 피해 도자기를 굽던 교우촌이 신앙의 뿌리가 되었다.
구한말 우고리(양주시 광적면 우고리)와 신암리(양주시 남면 신암리) 일대에
박해를 피해 집단으로 공동체를 이루며 교우촌이 형성된 것이다.
신암리에 개성 본당 관할 공소가 설립된 것은 1909년이다.
이때 개성 본당의 주임 신부는 파리 외방전교회 소속 르 장드르(Le Gendre, 崔昌根)였고,
1년에 두 차례 봄과 가을에 신암리로 와서 판공성사를 베풀고 미사를 집전하였다.
그런데 개성과 신암리는 거리가 너무 멀어서
신앙을 유지하는 데에는 상당한 노력이 필요했다.
당시 신암리 공소에는 300여 명의 신자들이 거주하고 있었으며
박성로 프란치스코가 공소회장을 맡고 있었다.
1924년 10월 27일 개성 본당 서병익(徐丙翼) 바오로 신부가
신암리 공소와 우고리 공소를 방문하였다.
그 후 1925년 3월 박원문 마르코 회장시절에 본당으로 승격되어
2년 후인 1927년 5월에 가서야
최문식(崔文植) 베드로 신부가 초대 주임으로 부임하여
연천, 양주, 파주, 포천, 가평, 고양군 일대를 관할하게 되었다.
그러나 본당이 경제적으로 너무나 열악하여
도저히 사제의 생활을 뒷받침할 수가 없어 할 수 없이 3년 뒤인
1930년 4월에 최문식 신부는 미리내로 전임되고 본당은 폐지되어
다시 행주 본당의 관할 공소가 되었고,
이때 당시 신암리 공소의 회장은 이재현 베네딕토였다.
1933년 9월 26일 신암리 공소에 새로 개축된 경당에서
윤의병(尹義炳) 바오로 신부의 주례로
이하삼 회장 등 신암리 교우들이 참석한 가운데
79위 순교복자 첨례 대축일 미사가 거행되었다.
1935년에는 양주군 덕정리에 본당이 생기면서 그 관할 공소가 되었다.
1945년 12월 김피득(金彼得) 베드로 신부가 덕정리 본당의 주임으로 부임해 왔다.
김피득 신부는 덕정리 성당을 매각하고
의정부시 의정부동에 대지 1,625평을 매입하여 성당을 이전하고
본당 명칭을 의정부 본당으로 바꾸었다.
이때부터 신암리 공소는 의정부 본당에 속하게 되었다.
6.25 전쟁 때 신암리는 폭격을 당해 초토화되고 말았다.
1952년 9월 의정부 본당에 이계광(李啓光) 세례자 요한 신부가
제3대 주임으로 부임하면서 신암리 공소는 차츰 안정을 되찾기 시작하였다.
그리하여 1953년부터 1955년 사이에 박복선 형제의 주도로
신암리 신자들의 노력과 영국 군인들의 도움을 얻어 공소를 재건하였다.
구한말 박해를 피해 도자기를 굽던 교우촌이 신앙의 뿌리가 된 신암리 신앙 공동체는
1909년 개성 본당 관할 공소로 설립된 후 1925년 3월 본당으로 승격돼
본격적인 지역 복음화의 길을 걸었다.
1930년 다시 공소로 환원된 후 지난 1959년부터
동두천 본당 공소로 편입되어 신앙의 명맥을 이어 오다가
2008년 9월 12일 준본당으로 승격하는 등 다난한 역사를 걸어왔다.
2005년 3월 30일 본당 승격 80주년을 맞아 기념미사를 봉헌하고
도시 지역 신자들의 피정 공간으로 공소를 개방하는 등
공소 활성화를 위한 다양한 활동에 나섰다.
2008년 10월 5일 신암리가 고향인 서울대교구의 이경훈(李庚薰) 바르톨로메오 신부가
공소 설립 100주년을 기념하여 은인들의 도움으로 새 성당과
순교자 박 다미아노의 집(교육관 및 사제관) 건물을 새로 건립하여
이곳 출신 순교자로 전해지는 박 다미아노의 이름으로 하느님께 봉헌하였다.
그리고 2013년 8월 22일 준본당에서 본당으로 승격되었다.
[출처 : 의정부교구 문화미디어국, 의정부교구 순례길 안내,
내용 일부 수정 및 추가(최종수정 2013년 8월 31일)]
31. 갈곡리성당
박해를 피해 공동체를 이루며 옹기를 굽던 교우촌
의정부에서 서북쪽으로 20km, 문산에서 동쪽으로 12km 지점에 있는 갈곡리(葛谷里) 공소는
옛날에는 칡이 많던 곳이었는지 칡의 계곡(갈곡 : 葛谷)으로 불리었고
순수 우리말로 칡울(칡의 마을)이라 하여 공소 이름도 원래는 ‘칠울 공소’라고 불렸다.
이 마을이야말로 파주 지방 천주교 신앙의 요람이다.
이 마을은 6.25 전만 해도 수풀과 아름드리나무들이 우거져 있는 험한 지대였고,
동쪽에 있는 커다란 고개를 넘으려면 20여명이 모여야 넘을 수 있다하여
‘스르내미’(스물 넘어) 고개라 불렸다.
이렇게 험한 첩첩산중에 사람들이 들어와 살기 시작한 것은 약 110년 전이다.
홍천과 인근 풍수원에서 박해를 피해 처음에는 칠울에서 남동쪽 6km 떨어져 있는
‘우골’(현 우고리, 우묵하게 들어간 골짜기)이라는 곳에 정착하여 살다가
5년째 되던 해인 1896년 김근배 바오로, 김연배 프란치스코, 박 베드로 가족이
이곳 칠울로 이주 정착하게 된다.
이로써 구한말 갈곡리와 신암리(경기도 양주시 남면 신암리) 일대에 박해를 피해
집단으로 공동체를 이루며 옹기그릇을 만들어 생계를 유지하던 교우촌이 형성되었다.
이곳 칠울에 정착하게 된 동기는 칠울과 우고리 고령 등 인근에
옹기그릇을 만드는 점토가 많았기 때문이었다고 전해지며,
성당 앞마당도 옹기를 굽던 곳이었다고 전해진다.
1898년 신자 수 65명으로 약현 본당 칠울 공소가 설립되고
1900년 2년 사이에 신자수가 곱절이 넘는 145명으로 늘어났다.
1901년 송도(개성) 본당이 새로 설립되어 약현 본당에서 송도 본당 공소로 이관되었고,
1923년 신암리 본당 신설로 인하여 칠울 공소는 11년 동안 신암리 본당 공소가 되었다.
1934년 신자수가 급격히 줄어든 신암리 본당이 공소로 환원되고
덕정리 본당이 신설되어 칠울 공소는 1947년까지 13년 동안 덕정리 본당 공소가 되었다.
1947년 의정부 본당이 신설되어 1963년까지 16년 동안 의정부 본당 공소가 되었다.
갈곡리 교우들은 1936년에 마련한 공소 강당이 6.25 전쟁 중인 1951년 폭격으로 소실되자
옛 강당을 대신할 새 성당을 짓고자 했다.
당시 한국 해병대 군종이었던 김창석 타대오 신부와 미국 해병대 군종이었던
에드워드 마 신부의 도움을 받아 1955년 1월 현재의 의정부 주교좌성당을 본뜬
공소 성당을 건립하여 노기남 바오로 대주교의 주례로 축성 · 봉헌하였다.
1963년 7월 4일 법원리 본당 신설과 함께 의정부 본당에서
법원리 본당 관할 공소가 된 갈곡리 공소는 오랜 신앙의 역사답게
많은 성직자와 수도자를 배출한 성소의 못자리이다.
2004년 6월 24일 서울대교구에서 의정부교구가 분리 · 신설됨에 따라
갈곡리 공소는 의정부교구에 속하게 되었다.
의정부교구는 교구의 대표적 공소로 초기 교회사적으로 중요한 의미를 지닌
갈곡리 공소의 칠울 강당을 개보수하여 2008년 11월 20일 축복식을 가졌다.
오랜 세월로 낡고 불편해진 강당의 기본적인 외관과 틀은 보존하면서도
지붕과 바닥 공사 등을 새로 해 신자들의 편의를 도모했다.
성당 맞은편에 아담하게 흙집으로 보수된 칠울 강당은
한 번에 10-30명 정도가 이용할 수 있으며, 주일학교나 단체에서 피정 · 연수 등을 할 수 있다.
매월 둘째 주일 오전 9시에 공소 성당에서 미사가 봉헌된다.
[출처 : 의정부교구 문화미디어국, 의정부교구 순례길 안내,
내용 일부 수정 및 추가(최종수정 2011년 11월 8일)]
갈곡리 성당에 도착해 보니 자매님 5명과 형제 1명이
장아찌를 용기에 담고 있었다.
성지를 둘러보고 성당에 들어가 기도하고 순례도장을 찍은 후
일하고 계신 자매님들과 대화를 나누었다.
성지개발 기금을 마련하기 위해 장아찌를 담궈서 판매하고 있다한다.
우리를 보고 어디서 왔느냐고 물어 제주에서 왔다고 말하자,
제주 어느 본당이냐고 물어 본당을 말하자
김대건 신부님 표착성지에 갔을 때 들렸다고 하시며
형제님이 우리에게 강복을 주시겠다고 했다.
알고보니 본당 신부님이셨다.
우리는 만원짜리 장아찌를 종류별로 1개씩
(고추잎, 고추, 무말랭이, 깻잎 장아찌) 구입하고
10만원을 드렸다. 성지개발기금에 보태시라고~
내일 서울일정이 빡빡해 성지 한 곳을 더 방문하기위해
출발할 때 시간을 보니 4시 20분이었다.
방문지가 참회와속죄성당이라 혹시 일찍 문을 닫을 수 있다는
느낌이 들어 서둘러 출발했다.
참회와속죄성당에 도착하니 5분전 5시였다.
전화벨이 울려서 보니 여주대자의 전화였다.
통화할 시간이 없어 성당입구로 들어서자 직원분이 사무실에서
막 나와서 문을 닫느냐고 묻자 그렇다고 했다.
5분만 기다려 달라고 말하자 그러겠다고 해서
성전에 들러 잠시 기도하고 사진을 찍고 순례도장도 찍었다.
여유있게 외관을 보고나서 대자에게 전화했다.
대자부부가 오늘 우리가 다녀온 소양로 성당에 왔다고 한다.
방명록을 작성하려고 보니 우리 부부의 이름이 있어
너무 기뻐서 전화를 했다고 한다.
2차 여행때 여주 도전리 대자집에서 하루 묵으면서
성지순례에 대한 이야기를 나눌 때 관심을 갖기에
제주에와서 책자 2권을 사서 보내면서 틈틈이 시간이 날 때
가까운 곳에서부터 순례할 것을 권고한 바 있다.
부부 모두 직장을 갖고 있어 주말에 가까운 곳부터 시작했다고 한다.
원주교구를 시작으로 오늘 춘천교구를 돌고 있는 모양이다.
대자 라파엘 부부에게 주님의 은총이 함께하시길 빌어본다.
32. 참회와속죄의성당
북한 지역 순교자들을 위해 기도하고 공경하는 순례지로 선포되었다.
참회와 속죄의 성당과 민족화해센터는 한반도의 평화와 일치를 위해 기도하고
교육하는 장(場)을 마련하자는 김수환추기경의 제안으로
1990년경부터 건립이 준비되었고,
성당은 2008년에, 센터는 2014년에 완공되었다.
성당의 이름은 민족의 화해와 일치를 위해
우리 자신의 참회와 속죄가 먼저 이루어져야 한다는 뜻이다.
동.서 냉전 시기 독일인들이 매주 모여 기도를 바쳤던
성 니콜라이 교회를 모델로 하고 있다.
성당의 외형은 평안북도 신의주 진사동 성당,
내부는 함경남도 덕원의 베네딕도 수도원의 한국 전쟁 이전의 모습을
각각 그대로 재현하였다.
또한 민족화해센터는 평양 외곽 서포에 있던 메리놀 선교회 본부 건물을 복원하였다.
성당의 제대 위쪽 유리 모자이크는 남한과 북한 지역의 순교자들이
평화의 복음을 선포 하시는 그리스도왕께
한반도의 평화와 일치를 위해 한목소리로 전구하는 내용이다.
성전 뒤편에는하느님의 종 ‘제6대 평양교구장 홍용호 프란치스코 보르지아 주교’와
‘초대 함흥교구장 신상원 보니파시오 사우어 대수도원장’의 문장과
관련 사진이 유리 모자이크로 새겨져 있다.
이 모자이크들은 남한 작가들의 밑그림에
북한 평양 만수대창작예술단 소속 작가 7명이 완성했다.
의정부 교구장 이기헌 베드로 주교는 2018년 6월 25일 이 성당을,
북녁의 순교자들을 위해 기도하는 ‘북한 지역의 순교자기념 순례지’로 선포하였다.
오늘 숙소는 파주 딸집으로 정했었는데 1주일 전부터
딸과 손녀 그리고 사위까지 지독한 독감에 걸려 고생하고 있다.
혹여 우리부부에게 전염될까 걱정하여 근처에 숙소를 정하고
저녁식사를 같이 하기로 했다.
두 돌이 채 안된 손녀가 얼마 전 유아원에 입학해서 다니는데
그곳에서 바이러스를 옮겨온 것 같다고 했다.
딸 가족이 5시 미사 후인 6시에 식당에서 만나기로 했기에
먼저 숙소에 짐을 풀고 식당(도보 5분)으로 가려고 체크인하려는데
아내의 핸드폰이 없어진 것을 알았다.
내비로 주차장까지 작동했기에 차를 중심으로 전화를 걸어보면서
샅샅이 찾아보았지만 찿지 못했다.
6시가 넘자 딸이 전화가 와서 상황을 설명하고 기다리라고 했다.
얼마전 나도 운전석과 조수석 사이에서 찾은 일이 있기에
그곳을 집중적으로 찾아보니 희미하게 핸드폰같은 것이 있었다.
손을 넣어도 들어가지 않고 손가락 끝으로 집으려하면 미끌어내렸다.
내 것은 핸드폰 케이스가 있지만 아내는 없어서 아주 얇았기 때문이다.
겨우 꺼내고 호텔룸에서 찾고 있는 아내에게 전화를 하고 식당으로 향했다.
오늘 낮에 죽림동주교좌 성당에서 미사드릴 때,
무음으로 한 것을 풀지않아
전화를 걸어도 울리지 않은 것이었다.
우리 부부의 식성에 맞추어 해물과 갈비찜을 시켰다.
나는 해물을 주로 먹으며 사위와 소주를 주고 받으며 이야기를 나누었다.
맛있게 먹는데 입에 묵직한 것이 혀에 걸렸다.
꺼내보니 치아였는데 임플란트한 것이 빠진것으로 알았다..
제주에 와서 치과에 가니 임플란트가 아니라 씌웠던 이가 부러진 것이란다.
이가 빠진 후에도 시킨 음식을 맛있게 먹고 딸 가족과 헤어지고 숙소로 향했다.
오늘 하루도 여러가지 에피소드가 일어난 순례였다.
첫댓글
오늘 지역지도엔
경기도 고양 행주교구도 보입니다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