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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집] 한국교회의 등불이 되다 (1) 브뤼기에르 주교
“누가 뭐라든, 나는 전진하리라” 조선 선교 열망했던 선구자
- 브뤼기에르 주교. 서울대교구 제공
서울대교구 시복시성위원회(위원장 구요비 욥 주교)는 지난 3월 23일 조선대목구 초대 대목구장 브뤼기에르 주교, 서울대교구 제11대 교구장 김수환(스테파노) 추기경, 한국 순교 복자 가족 수도회 설립자 방유룡(레오) 신부의 시복시성을 추진한다고 밝혔다. 세 성직자가 보여준 영웅적인 덕행과 성덕이 한국교회와 신자들, 수도회와 회원들의 영적 성장에 도움이 될 거라는 판단에서다. 박해시기부터 현대에 이르기까지, 한국교회 역사를 관통하고 있는 세 성직자는 어둡고 척박한 길 위에 불을 밝히며 한국교회와 함께했다. 그리스도교적 덕행을 실천했던 세 성직자가 한국교회 안에 남긴 의미있는 발자취를 소개한다.
아시아 선교를 향한 갈망, 조선으로 가닿다
끝내 조선 땅을 밟지 못한 조선대목구 초대 대목구장 브뤼기에르 주교는 한 번도 만나지 못한 조선의 신자들을 사랑하고 아낀 성직자였다.
바르톨로메오 브뤼기에르 주교는 1792년 2월 12일 프랑스 서남부 레삭 마을에서 태어났다. 1815년 12월 23일 사제품을 받은 그는 이듬해부터 1825년까지 모교인 카르카손 소신학교와 대신학교에서 신학생을 가르쳤는데, 아시아 선교를 갈망한 나머지 부모에게 알리지 않고 파리 외방 전교회에 입회했다.
네 달 반 동안 선교사 연수를 이수한 이후 지금의 태국인 샴의 선교사로 발령을 받은 브뤼기에르 주교. 1827년 6월 4일 샴 수도 방콕에 도착한 그는 교구청 일과 방콕 본당 사목에 힘쓰는 한편 20명 남짓한 신학생들의 교육을 책임졌다.
브뤼기에르 주교가 서한에서 조선에 대해 처음 언급한 것은 1826년 무렵이었다. 방콕에서 성직자가 없는 조선 교우들의 어려움을 들었던 브뤼기에르 주교는 그들을 도우러 가고 싶은 열망이 생겼다. 하지만 현재 몸담고 있는 샴교구에서 사목을 충실히 해야겠다는 생각에 마음을 접었다.
다시 조선과 인연이 닿은 것은 1829년 무렵이었다. 1825년 성직자 없이 신앙생활을 하던 조선 교우들이 교황에게 성직자를 보내달라는 편지를 보냈고 이 소식을 들은 브뤼기에르 신부는 1829년 6월 9일, 조선 선교를 자청하는 편지를 교황청 포교성성(현 복음화부)으로 보냈다.
그리고 6월 29일 방콕에서 샴교구 보좌주교로 주교품을 받은 이후 말레이시아 반도 서쪽에 있는 섬인 페낭으로 가서 교황의 결정을 기다렸다. 그레고리오 16세 교황은 1831년 9월 9일 조선대목구를 신설하고 브뤼기에르 주교를 조선대목구 초대 대목구장으로 임명했다. 브뤼기에르 주교는 이 소식을 이듬해 7월 25일에야 전해 들었다.
조선대목구 대목구장 임명 소식을 듣고 바로 조선으로 향한 브뤼기에르 주교. 1832년 8월 4일 페낭을 출항해 싱가포르, 마닐라, 마카오, 중국 푸저우·난징을 거쳐 1834년 10월 8일 중국 허베이성의 시완쯔(西灣子) 교우촌에 이르러 한 해를 보냈다.
1835년, 조선에 가기 위해 다시 채비를 마친 브뤼기에르 주교는 한겨울 얼어붙은 압록강을 건너 밀입국할 결심을 하고 10월 7일 시완쯔 교우촌을 떠났다. 12일 만에 마자쯔(馬架子) 교우촌에 도착한 브뤼기에르 주교는 고된 여정을 버티지 못하고 교우촌에 도착한 지 하루 만에 세상을 떠났다.
- 브뤼기에르 주교가 조선 선교 의지를 밝힌 첫 번째 편지.(1829년 5월 19일 작성) 가톨릭신문 자료사진
고난 이겨낼 수 있던 힘, 조선 신자들의 신앙과 그들에 대한 사랑
의지가 강하고 독립심이 컸던 브뤼기에르 주교의 성품은 기록으로도 남아있다. 그를 아는 한 장상은 “브뤼기에르 신부가 주교가 된다면 그는 ‘누가 어떻게 생각하든, 누가 뭐라든, 나는 전진하리라’를 사목 표어로 택할 것이다”라고 말했다고 전해진다.
이러한 그의 강건함은 아시아 선교를 향한 갈망으로, 나아가 조선교회를 일구겠다는 의지로 드러났다. 아시아 선교를 결심한 브뤼기에르 주교는 카르카손에서 부모님께 편지를 부쳤다. “제가 여러 해 전부터 결심한 것은 변덕스러운 마음 때문도 아니며 미지에 대한 호기심 때문도 아닙니다…. 저는 오직 하느님의 영광만을 추구합니다. 부족한 제가 양심을 깊이 성찰하면 할수록 은혜롭게도 하느님 친히 제게 선교사가 되라는 열망을 심어 주셨다고 생각됩니다.”(1825년 9월 8일자 서한)
브뤼기에르 주교는 1826년 바타비아(현재의 자카르타)에 있을 때, 카르카손교구 총대리 귀알리 신부에게 편지를 보냈다. 그는 “조선 교우들은 매년 정기적으로 베이징으로 교우 대표를 보내어 성직자를 요청했지만 늘 성과가 없었다”며 “조선행 성소를 받은 선교사는 하느님의 영광을 위해서 많이 고생하는 복락을 누릴 것”이라며 조선에 대한 관심을 내비쳤다.
한 번도 가보지 못한, 동쪽의 먼 나라 조선에서 전해진 소식은 브뤼기에르 주교의 마음을 흔들었다.
“일본사람들처럼 조선인들도 쾌활하고 영적이며 호기심이 강하고, 일단 그리스도교를 받아들이면 신앙심이 요지부동이라고 합니다…. 어째서 저 불쌍한 조선 교우들을 돌볼 사제가 온 유럽에 하나도 없단 말입니까?” (1827년 2월 4일 페낭에서 파리 외방 전교회 총장 랑글루아 신부에게 보낸 서한)
1827년, 교황청 포교성성은 파리 외방 전교회가 조선 선교를 맡아주길 바란다고 전했지만 파리 외방 전교회는 어렵다고 답했다. 이에 브뤼기에르 주교는 파리 외방 전교회 본부 지도 신부들에게 편지를 보내 “저 불운한 조선 교우들에게 선익이 되기를 원하는 간절한 마음이 있기 때문에 그들을 위해 이 편지를 쓴다”고 밝히며 파리 외방 전교회가 조선 선교를 망설이는 이유 5가지를 하나하나 따지고 비판했다. 그러면서 조선으로 가고자 하는 선교사가 없으면 자신이 조선 선교를 자원한다고 밝혔다.
1831년 9월 9일 조선대목구 초대 교구장으로 임명된 브뤼기에르 주교. 조선 신자들과의 만남을 간절히 염원했지만 그 여정은 녹록지 않았다. 싱가포르, 마카오를 거쳐 중국 마자쯔까지, 3년 넘게 이어진 고된 일정은 물론이고 난징교구장 피레스 페레이라 주교가 파리 외방 전교회 성직자들의 조선 입국을 막으면서 고비를 맞기도 했다.
그럼에도 멈추지 않고 조선으로 향했던 브뤼기에르 주교는 “제 앞에는 온갖 어려움과 장애와 위험만이 도사리고 있다”며 “저는 머리를 숙이고 이 미로 속으로 몸을 던진다”라는 마지막 편지를 남기고 마자쯔(馬架子) 교우촌에서 세상을 떠났다.
브뤼기에르 주교가 조선 교우들에게 남긴 단 한 통의 편지. 조선에 닿지 못한 브뤼기에르 주교의 신자들에 대한 사랑은 편지를 통해 남아있다.“조선 왕국에 도착하면 그곳에서 우리는 죽음에 이르기까지 온 삶을 바칠 것입니다. 그리고 여러분의 위로를 위하여 성사를 거행하고 성교회의 경계를 넓혀 나갈 조선인들을 사제로 서품할 것입니다.”(1832년 11월 18일 마카오에서 보낸 서한)
- 2015년 10월 20일 서울 용산성당 구내 성직자 묘역에서 브뤼기에르 주교 선종 180주기 추모·현양대미사를 봉헌한 후 주교단이 묘소를 참배하고 있다. 가톨릭신문 자료사진
- 프랑스 레삭마을에 있는 브뤼기에르 주교 생가.
[특집] 한국교회의 등불이 되다 (2) 김수환 추기경
'권위' 내려놓고 '낮은 곳'향하다... 어둠의 시대 물리친 정의의 빛
- 김수환 추기경은 교회라는 울타리를 넘어 사회 곳곳에서 정의 실천을 위해 기도하며 적극적인 사목을 펼쳤다. 가톨릭신문 자료사진
사진은 오래전 세상을 떠난 이의 삶을 말해준다. 밤하늘 수많은 별처럼 불을 밝히고 있는 달동네를 오르고, 집 없는 이들을 위한 청빈선언 대행진의 선두에 서있는 추기경. 빛바랜 사진 속 고(故) 김수환(스테파노) 추기경은 늘 가난하고 소외된 이들과 손을 잡고 있었다. 한국교회 최고 지도자였지만 권위를 상징하는 주교좌에서 내려와 가장 낮은 곳을 향했던 김수환 추기경. 그의 삶이 여전히 우리의 기억 속에 깊이 남아있는 이유는 참된 그리스도인의 삶을 보여줬기 때문이다. 서울대교구 시복시성위원회(위원장 구요비 주교)가 시복시성을 추진하고 있는 세 성직자 중 두 번째로 격동의 한국 현대사와 함께한 김수환 추기경의 삶을 들여다 본다.
가난한 신자들과 울고 웃었던 본당 신부 시절이 가장 행복했습니다
“너희는 이다음에 커서 신부가 되거라”
장사꾼이 돼서 스물다섯 살 즈음 장가를 갈 생각이었던 어린 김수환에게 어머니의 말은 청천벽력과 같았다. 13살, 어머니의 손에 이끌려 신학교에 들어간 김수환 추기경은 “하느님의 부르심에 회의를 여러 번 느끼기도 하고 신학교를 떠나고 싶은 마음에 꾀병을 내어 한 학기 건너뛰기도 했다”고 과거를 회고했다. 그에게 깊은 사제성소를 심어준 것은 어머니였다.
- 김수환 추기경(맨 앞줄 가운데)이 1997년 서울에서 열린 집 없는 이들을 위한 ‘청빈선언 대행진’에 함께하고 있다. 가톨릭신문 자료사진
옹기를 팔며 홀로 아이들을 키우면서도 곧은 신앙심과 여장부 같은 기질이 대단했던 김 추기경의 어머니. 그런 어머니의 무릎에서 신앙심을 키웠던 김 추기경은 자신을 이끈 하느님의 섭리를 기꺼이 따랐다. 1951년 9월 15일, 서품식 중 제단 앞바닥에 엎드린 김수환은 “주님 뜻에 따르겠습니다”라고 고백했다.
그의 첫 사목지는 안동본당(현 목성동본당)이었다. “전쟁 피해로 성한 집보다 불타 버린 집이 더 많았고 설상가상으로 두 해 연속 흉년이 들어 주민들은 그야말로 초근목피로 연명하고 있었다”고 김 추기경은 당시를 기억했다. 이제 갓 신부가 된 그의 관심은 주민들의 가난에 쏠렸다. 신자들을 위해 무슨 일이건 해야 했던 그 시간을 김 추기경은 “가난한 신자들과 울고 웃었던 본당 신부 시절이 성직생활 중 가장 행복한 시간이었다”고 회고했다.
가난한 신자들과 보낸 ‘꿈처럼 아름다웠던 시간’은 훗날 김 추기경이 ‘너희와 모든 이를 위하여’(Pro Vobis et Pro Multis)를 사목표어로 삼고 세상 사람들을 위해 자신을 온전히 내어주는 삶을 살겠다고 다짐하는 시작이 됐다.
독일에서 공부했던 시간은 세상의 일에 눈감지 않고 가난한 이들과 동행하는 성직자가 되는 토대가 됐다.
“한국교회가 성장하려면 신부들이 그리스도교 전통이 깊은 나라에 가서 하나라도 더 배워와야 한다”고 당시 대구교구장 서정길(요한) 대주교에게 유학을 가겠다고 요청한 김 추기경.
1956년 독일로 떠난 김 추기경은 뮌스터대학 교수 요셉 회프너 신부 밑에서 ‘그리스도 사회학’을 배웠다. 요셉 회프너 신부를 만난 것이 ‘행운’이었다고 회상한 그는 “신부님은 그리스도 사상에 기초한 인간관과 국가관 등을 정립하는데 적지 않은 영향을 줬다”며 “그런 이론적 토대가 허술했더라면 1970~1980년대의 그 험난한 시기를 제대로 헤쳐 나왔을까하는 의문이 든다”고 말했다.
또한 독일에서 제2차 바티칸공의회를 맞이한 김 추기경은 독일 신부들과 공의회에 대해 토론하면서 많은 이야기를 주고받았다. 김 추기경은 “제2차 바티칸공의회는 가톨릭교회가 쇄신을 통해 시대 변화에 적응하려는 희망의 대역사였다”라면서 “공의회에 대해 나눈 많은 이야기들은 내가 신부로서 뿐만 아니라 훗날 주교와 추기경으로서 소임을 수행하는 데 큰 도움이 됐다”고 말했다.
- 고 김수환 추기경. 가톨릭신문 자료사진
내 생각을 지배하는 가장 큰 주제는 인간입니다
1964년 가톨릭시보사(현 가톨릭신문사) 제12대 사장을 거쳐 1966년 초대 마산교구장을 지낸 김 추기경. 1968년 서울대교구장으로 착좌한 그는 1998년 퇴임까지 30년을 교구장으로 사목했다.
1966년 주교로 서품되고 대주교에서 추기경이 되기까지, 교회 안에서 그의 자리는 점점 위로 올라갔지만 그가 머문 자리는 늘 가장 낮은 곳이었다.
1968년 2월 9일 김 추기경을 주축으로 한국 주교단이 발표한 ‘사회 정의와 노동자 권익 옹호를 위한 주교단 공동 성명서’는 한국교회의 첫 사회적 발언으로 의미가 크다. 노동조합을 결성했다는 이유로 해고되거나 협박을 받았던 강화도 심도직물 노동자들. 그들의 기본적인 인권과 권리가 짓밟히는 현장을 두고 볼 수 없었던 김 추기경은 임시 주교회의를 개최하고 “인간 기본권은 어떤 이유를 막론하고 수호돼야 하기에 주교들은 부당한 조사 관계를 개선하는 데 적극 노력할 것”이라는 내용의 성명서를 발표했다.
교회가 울타리를 넘어 바깥 세상에 눈을 돌려야 했던 이유를 김 추기경은 이렇게 설명했다. “내 생각을 지배하는 가장 큰 주제는 예나 지금이나 인간이다. 하느님 모상대로 창조된 인간은 존엄한 존재이기에 그 권리와 존엄성은 언제 어디서든 지켜지고 보호받아야 했다. 이 같은 신념은 1970년대와 1980년대를 숨 가쁘게 헤쳐 나오는 동안 내게 절대적 판단 기준으로 작용했다.”
복음 정신에 비춰 정의롭지 않은 일들이 팽배했던 1970~1980년대, 김 추기경은 그런 상황들을 보고 침묵할 수 없었다. “교회가 왜 정치 문제에 깊숙이 개입하느냐”라는 비판에 대해 그는 “교회는 하느님이 가장 사랑하시는 존재인 인간의 존엄성을 짓밟는 악과 불의에 저항해야 할 의무가 있다”고 답했다.
이후로도 김 추기경은 한센인들, 외국인노동자, 성매매 여성들, 집을 잃은 철거민 등 우리 사회의 그늘에 가려진 이들 곁에 머물렀다.
1987년 4월에는 서울 상계동 판자촌에서 강제철거당한 주민들이 주교좌명동대성당 들머리에서 천막을 치고 생활하자, 당시 서울대교구장이었던 그는 2주 만에 교구장 자문기구로 ‘도시빈민사목위원회’(현 빈민사목위원회)를 설립했다.
오늘날 서울대교구 사회복지사목, 노동사목, 빈민사목의 토대를 만든 것은 김 추기경의 노력이 있었기에 가능했다. 엄혹한 시대였기에 빛과 같은 성직자가 나온 것일까. 김 추기경이 지금을 살았다면 어디에 가장 오래 머물렀을까. 그가 걸어온 길들은 그 답을 말해주고 있다.
- 6·10 항쟁으로 민주화 열기가 뜨겁던 1987년 6월 15일 김수환 추기경이 나라와 민주화를 위한 특별미사를 집전하고 있다. 가톨릭신문 자료사진
- 1997년 12월 29일 김수환 추기경이 서울 행당동 철거민촌을 방문해 철거민들을 위로하고 있다. 가톨릭신문 자료사진
[특집] 한국교회의 등불이 되다 (3) 방유룡 신부
한국적인 수도 영성에 바친 신앙 열정, 이 땅 교회의 뿌리 되다
일제강점기와 남북분단, 6·25전쟁 등 한국 근현대 수난의 역사를 경험했던 방유룡(레오) 신부는 주변국들의 개입으로 중심을 잡기 어려운 한국의 상황을 목도하며 한국교회의 뿌리를 기억하고자 노력했다. 특히 한국교회 박해와 순교의 역사를 가까이에서 접했던 방 신부의 삶은 훗날 순교자들을 본받는 영성을 사는 한국 순교 복자 가족 수도회를 창설하는 기반이 됐다. 서울대교구 시복시성위원회(위원장 구요비 주교)가 시복시성을 추진하고 있는 세 성직자 중 세 번째로 한국인에 걸맞은 고유한 수도 영성을 만들어 전파했던 방유룡 신부의 삶을 소개한다.
종로 깍쟁이, ‘방 수사’가 되다
방유룡 신부는 1900년 3월 3일 당시 궁내부 주사로 영국 공사관의 통역관을 지내던 아버지 방경희(베드로)와 어머니 손유희(아녜스)의 육남매 중 넷째로 태어났다. 당시 한학자였던 할아버지 방제원(프란치스코)은 제8대 조선대목구장이었던 뮈텔 주교와 만주 연길교구장이었던 브레허 주교에게 한문을 가르쳤다고 전해진다. 방 신부의 삶에 순교정신이 깊이 새겨질 수 있었던 것은 할아버지 방제원의 신앙교육이 있었기에 가능했다. 박해시대 수난을 직접 체험하고 순교자들을 직접 지켜 본 조부와 조모는 방 신부에게 죽음으로 신앙을 증거했던 순교자들의 이야기를 들려줬다.
방 신부의 누나인 고(故) 방순경(루시아)씨는 훗날 “집안에서 내려오는 박해 시대의 온갖 고초를 겪으며 훌륭하고 지혜롭게 이겨 낸 이야기와 신앙의 모범은 나에게 어떤 보물보다 귀했다”고 고백했다. 1917년, 중학교 3학년을 마치고 예수성심신학교에 입학한 방 신부는 장차 사제로서의 삶을 살고자 굳은 결심과 함께 인생의 전환을 맞게 된다.
신학생 시절, 방 신부의 별명은 ‘종로 깍쟁이’였다. 눈에 띄는 도시 소년이었던 그를 동창 고(故) 임충신(마티아) 신부는 이렇게 기억했다.
“여름방학 때면 그는 빳빳한 모시 두루마기를 입고 빳빳한 맥고모자를 쓰고 금테 안경 쓰고 귀또 구두를 신고 다녔습니다. 이런 차림은 그 시대에 일류 건달이나 했던 차림이었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방 레오는 신학교에서 쫓겨 나가거나 아니면 자진해서 나갈 사람이지 신부는 못될 것이라고 생각했었습니다.”
- 1957년 5월 6일 방유룡 신부(맨 왼쪽)가 종신서원을 하고 있다. 한국 순교 복자 수녀회 제공
자유분방하게 학교생활을 하는 와중에서 성모상 앞에서 기도하는 모습이 자주 목격됐던 방 신부. 두 번째 방학을 보내고 달라진 모습으로 학교로 돌아온 그는 “오늘부터 나는 성인이 된다”고 말했다. 이후로 ‘종로 깍쟁이’에서 ‘방 수사’라는 별명을 얻게 된 방 신부는 내적 여정을 걸으며 자주 묵상과 관상 생활에 빠져있었다.
1930년 10월 26일 사제품을 받은 방 신부는 사목자의 길을 걷기도 전에 난관에 봉착했다. 일제의 압제와 폭정으로 제대로 사목활동을 하기 어려웠기 때문이다.
일제의 감시는 종교시설까지 이어졌고 순사들이 모든 미사에 들어오고 신자들의 고해를 듣겠다고 고해실에 들어와 앉아있기도 했다. 사제들도 천황 숭배를 하지 않으면 즉시 경찰서로 불려갔고 자유롭게 외출하기 어려웠다.
방 신부는 활동이 어려운 상황에서 고요히 칩거하거나 기도와 묵상, 명상과 같은 관상생활에 더욱 많은 시간을 보냈다. 자유를 빼앗긴 시절을 보내며 방 신부는 자신의 존재를 자아로부터 자유롭게 만드는 여정을 걸었다. 돈과 권력, 관계로부터의 자유를 선택한 방 신부는 자아로부터 자유로워지는 경험을 통해 은총의 시간과 만나게 됐다.
- 한국 순교 복자 수녀회 창립자 방유룡 신부가 서울 성북동 한국 순교 복자 성직 수도회에서 대월기도를 하고 있다. 한국 순교 복자 수녀회 제공
역사적 수난 속, 한국적 신앙 지키고자 한국 순교 복자 수녀회 세우다
강원도 춘천본당(현 주교좌죽림동본당) 보좌를 시작으로 황해도와 서울의 본당에서 사목했던 방 신부는 해주본당에서 세시리아 성가대를 조직했을 뿐 아니라 사도신경에 음을 붙인 악보를 직접 만들어 창의 형태로 신자들에게 성가를 가르쳤다. 우리말로 된 성가를 알려주며 방 신부는 신자들이 민족적 혼을 잊지 않도록 이끌었다. 일제강점기가 끝난 뒤, 자유롭게 신앙생활을 할 수 있겠다 싶었지만 곧 6·25전쟁이 발발했다. 가회동본당에 부임한 지 1달 만에 전쟁을 맞은 방 신부는 신자들의 안전과 피난을 돕는 일에 몰두했다. 역사적인 수난들로 신자들의 신앙을 하나로 모으기 어려운 상황에서 방 신부가 시급하게 생각한 것은 교육이었다. 따라서 이후로 방 신부는 학교 설립과 수도성소 계발에 힘을 쏟았다.
신학생 초기 시절부터 수도자와 수도원에 대해 오랜 기간 탐구했던 방 신부는 외국에서 들어온 수도원을 방문하면서 한국인의 정신문화에 어울리는 수도 체계를 고심했다. 수도 생활을 하는 데 있어서도 유럽 신학과 수도 정신에 의존하는 양태에서 벗어나 한국 민족의 정신문화의 유산을 살려내길 원했다. 이러한 방 신부의 꿈은 한국 순교 복자 수녀회를 통해 구현됐다.
1946년 4월 21일 설립된 한국 순교 복자 수녀회는 한국의 순교자요 첫 사제인 김대건 안드레아 신부와 한국의 순교자들을 주보로 모셨다. 수녀회 창립식에서 “목적은 덕이요, 방법은 신덕이요, 도구는 빈주먹으로”라고 말했던 방 신부는 수녀회가 한국의 고유성과 독립적 정치성의 맥을 이어가는 수도회가 되길 염원했다.
- 방유룡 신부 친필 ‘무아’.
방 신부는 면형무아(麵形無我)의 삶을 봉헌하는 영성을 수도회의 영성으로 삼았다. 면형무아는 밀떡의 형상, 즉 면형이 실체를 비우고 성체(聖體)가 되듯이, 성체와 같이 자신을 비우고 하느님의 뜻을 이루며 매 순간을 살아가는 것을 의미한다. 그는 면형무아의 삶을 이루기 위한 구체적인 방법으로 점성(點性)과 침묵, 대월(對越)의 영성을 실천할 것을 가르쳤다.
점성은 가장 작으면서도 모든 것의 시작과 마침을 이루는 점처럼 자신을 낮추는 비움과 점처럼 작은 것도 소홀히 하지 않고 지나치지 않는 겸손함을 말하며, 침묵은 하느님과 하나 되는 데 방해되는 모든 것을 죽이는 순교를 말한다. 대월은 영혼이 하느님을 만나 하느님의 현존 속에 살아가는 것을 의미한다.
이러한 면형무아를 바탕으로 수도자들에게 한국 민족 문화 발전에 공헌할 것과 한국 고유문화를 보존 연구하는 데 공헌할 것, 그리고 토착화된 한국 그리스도교 정신을 우리 민족에게 전할 것을 천명했다. 그래서 수도자들을 각자의 소질과 취미, 능력에 따라 미술, 음악, 국문학 등 각 부에서 연구시킬 것을 창설 이념에서 명시했다.
한국 순교 복자 수녀회로 시작된 방 신부의 수도성소 계발은 이후 한국 순교 복자 성직 수도회(1953), 재속 복자회(1957년), 빨마 수녀회(1962)를 설립으로 이어졌고 수도자들은 본당과 해외선교, 사회복지기관, 교육기관 등에서 다양한 사도직 활동을 펼치고 있다. 한 성직자가 어두웠던 시대에 어렵게 켜놓은 등불은 지금을 사는 신앙인들이 순교자, 그리고 한국교회의 뿌리를 기억할 수 있도록 길을 밝히고 있다.
- 책상에 앉아 집필하고 있는 방유룡 신부.
[특집] 한국교회의 등불이 되다 (4·끝) 한국교회를 밝혔던 세 성직자를 만나는 길
오직 주님 따랐던 신앙 모범, 시복시성으로 영적 성장 열매 맺길
순교로, 혹은 영웅적인 덕행으로 복음적인 삶을 산 성인들. 그들이 남긴 그리스도인의 향기는 현재를 살아가는 신앙인들이 거룩한 삶을 살도록 이끈다.
서울대교구 시복시성위원회(위원장 구요비 욥 주교)는 지난 3월 23일 제11차 시복시성위원회 회의를 열고 조선대목구 초대 대목구장 브뤼기에르 주교(1792~1835), 서울대교구 제11대 교구장 김수환 스테파노 추기경(1922~2009), 한국 순교 복자 가족 수도회 설립자 방유룡 레오 신부(1900~1986)의 시복시성을 추진한다고 선언했다. 한국교회 역사 속에 등불을 놓은 세 성직자의 삶은 현재를 사는 우리의 신앙생활에 빛이 될 수 있기 때문이다.
이 자리에서 서울대교구장 정순택(베드로) 대주교는 “오랜 노력과 시간, 기도가 필요한 여정이지만 한국교회와 신자들, 수도회와 회원들의 영적 성장에 큰 도움이 될 것이라는 판단에 따라 세 분의 시복시성 추진을 결심했다”고 말했다. ‘한국교회의 등불이 되다’ 마지막 편에서는 세 성직자의 시복시성이 가지는 의미와 여정을 소개한다.
시복시성, 어떤 의미인가?
시복시성은 가톨릭교회가 성덕이 높은 사람이 죽었을 때, 혹은 순교자에게 공식적으로 복자(福者)나 성인(聖人)의 품위에 올리는 예식을 말한다. 성인은 전 세계 가톨릭교회가, 복자는 해당 지역 가톨릭교회가 모시게 된다. 시복시성에는 두 가지 이상의 기적이 필요하지만, 순교자는 순교 사실만으로 기적 심사가 면제된다. 시성이 되려면 먼저 시복이 이뤄져야 한다.
15세기에 시작된 시복 제도는 시성 안건이 최종적으로 확정되기 전에 제한적인 공경과 하느님의 종으로서 공경이 이뤄지도록 하는 제도였다. 이러한 영향에 따라 시복은 시성보다 쉽게 여겨졌고 차츰 시성 이전에 수여되는 전 단계로 간주됐다. 17세기에 이르러 온전한 제도로 인정됐다.
시성은 하느님의 뜻과 일치하려고 노력하면서 거룩한 삶을 살았던 이에 대한 교회의 공식 선언이다. 현행법에서 시성은 복자가 된 하느님의 종을 공적인 전례를 통해 성인들 명부에 올리는 교황의 최종적 행위를 말한다. 그러므로 시성은 교회의 권위를 통해 한 사람의 성덕을 공적으로 인정하는 것, 그 이상의 의미를 지니고 있다. 왜냐하면 윤리적이며 신학적인 요소, 특히 영성신학적 요소를 바탕으로 교의적 점검과 교회법적 절차를 거쳐 마지막으로 교회의 성인들의 공경이라는 공적 전례를 통해 드러나기 때문이다.
교황청 시성부에서 발표한 훈령 「성인들의 어머니」(2007)에는 “시복 시성 안건은, 삶과 죽음과 죽음 이후에도 모든 그리스도교 덕행을 영웅적으로 실천해 성덕의 명성을 누리거나 그리스도를 더 가까이 따르고 목숨을 바치는 순교 행위로써 순교의 명성을 누리는 가톨릭 신자를 대상으로 한다”고 규정하고 있다. 인종이나 사회적 환경에 관계없이 성덕의 향기를 드러내고 죽어 그 평판(명성)을 간직하고 있는 가톨릭 신자는 누구나 시성의 후보가 될 수 있다는 것이다.
시복시성에 추천되는 요건은 ▲ 성덕이나 순교와 전구 능력의 평판 ▲ 영웅적인 그리스도인의 덕행 실천이나 순교 ▲ 시성함에 있어서 중대한 장애가 없을 것 ▲ 하느님의 종의 사망 후 5년 경과 등이다. 성덕의 명성은 ‘하느님의 종의 삶의 순수함과 고결함, 그리고 그가 영웅적으로 실천한 덕행에 관해 신자들 사이에 퍼진 의견’이라고 「성인들의 어머니」에서밝히고 있다. 이때 명성은 자발적이고 지속적이어야 하며 공동체의 대다수에게 일반적이어야 한다. 영웅적 덕행이란 하느님의 은총에 감화돼 적극적이며 기쁜 마음으로 어려움을 극복하고 이를 반복적으로 실천하면서 특별히 영웅적으로 삶을 산 사람이 갖는 좋은 습관을 말한다. 또한 시복을 위해서는 신학적 덕행(향주덕)과 기본적인 덕행(사추덕)의 영웅적 실천이 요구된다.
- 서울대교구는 브뤼기에르 주교, 김수환 추기경, 방유룡 신부의 시복시성을 추진하고 있다. 사진은 지난 2015년 3월 12일 로마 성 베드로 대성당에서 김희중 대주교 주례로 봉헌된 복자 윤지충 바오로와 동료 123위 시복 감사 미사. 가톨릭신문 자료사진
브뤼기에르 주교 시복시성 안건 착수, 김수환 추기경·방유룡 신부도 올해 안에 추진
한국 천주교회에서는 1925년 조선시대 순교자 79위가 시복됐고, 1968년에 24위가 추가돼 103위의 복자가 있었다. 이들은 성 요한 바오로 2세 교황이 방한한 1984년 서울에서 열린 시성식에서 성인품에 올랐다. 이후 2014년 프란치스코 교황이 124위를 복자로 선포해 국내에는 103명의 성인과 124명의 복자가 있다. 또한 현재 ‘하느님의 종 이벽 요한 세례자와 동료 132위’, ‘하느님의 종 홍용호 프란치스코 보르지아 주교와 동료 80위’, ‘하느님의 종 신상원 보니파시오 사우어 아빠스와 동료 37위’의 시복시성을 추진하고 있으며 가경자 최양업 토마스 신부의 시복은 ‘기적 심사’ 절차만 남겨 놓고 있다.
시복시성은 교구 단계를 거쳐 로마 단계로 이어진다.
교구 단계에서는 후보자에 대한 공식 조사 이후 안건 착수, 안건 예비 심사가 끝나면 모든 자료를 로마의 교황청 시성부로 전달한다. 로마단계에서는 교구에서 수집된 모든 증거를 종합하는 문서, 즉 심문요항(Positio)을 작성하고 안건의 가치에 대해 심사한다.
서울대교구 시복시성위원회 부위원장 박선용(요셉) 신부는 “133위 순교성인과 124위 복자, 가경자 최양업 신부, 그리고 홍용호 보르지아 주교와 동료 80위까지 4개 안건이 동시에 진행할 때는 국내에서 10년 로마에서 5년까지 총 15년가량 소요됐지만 이번에는 단일 안건이기 때문에 시간이 빨라질 수도 있을 것 같다”고 말했다.
2004년 개포동본당에서 자발적으로 브뤼기에르 주교에 대한 현양운동을 추진하면서 시복시성 여정에 탄력을 받았다. 이어 서울대교구는 지난해 10월 열린 주교회의 추계 정기총회에서 한국 주교단으로부터 브뤼기에르 주교 시복을 교구 자체적으로 추진하는 것에 만장일치로 동의를 얻었다.
서울대교구는 브뤼기에르 주교 시복에 대한 안건 착수를 위해 교황청 시성부에 요청서를 보냈고, 시성부는 시복시성 절차를 추진하는데 아무런 ‘장애 없음’(Nihil Obstat)을 교령을 통해 승인했다. 이로써 브뤼기에르 주교는 하느님의 종으로 불리게 됐다.
3월 23일 회의에서 브뤼기에르 주교와 김수환 추기경 시복시성 안건 청원인으로 임명된 박선용 신부는 “브뤼기에르 주교님은 일상을 충실히 살며 맺는 열매의 중요성을 알게 하는 분”이라며 “한국 교회 모든 신자들이 브뤼기에르 주교님의 시복을 위해 기도하고 협력해 주길 바란다”고 당부했다.
한편 브뤼기에르 주교와 함께 시복시성을 추진키로 결정한 김수환 추기경과 방유룡 신부에 대한 안건은 올해 주교회의 추계 정기총회에서 동의를 얻은 뒤 본격적으로 착수될 전망이다.
서울대교구 시복시성위원회 위원장 구요비 주교는 “우리와 동시대를 살아가면서 영웅적인 덕행과 성덕으로 이미 명성이 자자하신 분들 뿐 아니라 잘 알려지지 않았지만 나름대로 하느님으로부터 주어진 삶을 거룩하고 아름답게 사신 분들도 많이 계실 것”이라며 “이런 분들을 발굴해 신자들의 영적 선익을 위해 봉사하는 것이 저희 위원회의 역할이며 이번 세 명의 성직자 시복시성에 대해서도 적극적으로 추진해 나갈 것”이라고 밝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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